778 항구 도시 니아마드
클레이히 영혼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서둘러 나온 듯한 다루그 왕자와 마주쳤다.
이 세상에 또 없을듯한 황금빛 베일을 여러 겹 몸에 두른 듯한 성제의 아우라, 거기에 땅신님의 가호를 박아넣은 듯한 황금색의 홍채.
한밤중이라서 더욱 찬란하게 보이는 그 자태에 다루그는 살짝 얼어버렸고, 환인은 다루그의 몸에 묻어나는 영기의 흔적 때문에 그를 빤히 응시했다.
=……아! 어흠, 벌써 돌아가시는 거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클레이히 상급 영혼사께서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급히 전할 이야기가 있었던 터라.”
=그…러셨군. 아랫것들에게 편의를 신경 쓰라 전해놓았으나 귀빈이라고만 하여 결례를 저지르진 않았을지 우려하던 차였소.=
“염려 마시길. 두르데인의 기사들이 얼마나 절도 있는 인물이었는지 잘 알게 된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런가……. 하하하!=
환인의 공치사에 다루그 왕자는 흐뭇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사실 성문을 지키던 기사는 두르데인의 기사가 아닌 드로거스 왕가의 전사들, 황철의 전투사였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사들이 성제 같은 영웅에게 절도를 인정받았으니 어찌 흡족하지 않을까.
그렇게 덕담을 몇 마디 더 주고 받은 환인은 헤어짐을 약간 아쉬워하는 다루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성을 나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주변에 인적이 사라졌을 때 이실리테가 실루를 움직여 그의 곁에 붙으며 물었다.
=주인님. 방금 드로거스 1왕자를 보실 때 눈빛이 달라지셨는데 적으로 간주하신 건가요?=
=어? 도령 그랬어……?=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뜻밖의 영기 흔적이 그의 몸에서 묻어나서 잠시 지켜봤을 뿐이었지.”
=뜻밖의 영기?=
“그의 배다른 누이 말이다. 그와 깊은 관계인 것 같더군.”
다루그 왕자의 몸 곳곳에서 묻어난 영기의 흔적은 평범한 생활로 묻어날 수 없는 부위와 밀도였다.
교접이 아니고서야 날 수 없는 흔적이라고 할까.
신식 영혼의 눈 덕분에 알게 된 거지만…… 이런 것까지 알아두어야 할까 생각하느라 그를 지켜봤는데 그게 이실리테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듯하다.
=뭐야, 그런 거였어?=
“…….”
자신의 생각과 달리 별로 신경 안 쓰는 그녀들의 반응에 환인이 반대로 물었다.
“이 세계에도 권력과 가문의 재산 유지를 위한 근친혼은 평범한 행위인가.”
=엑, 뭐야. 지구에서는 그런 일도 저질러?=
안느의 반문에 환인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예전 일을 떠올렸다.
라드세아의 호천명 친왕은 최대 육촌 간 근친혼으로 황실의 피를 유지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계속 근친혼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일정 간격으로 외부의 피를 수혈하니 완전한 근친혼이라 보기 어렵다.
그걸 생각하며 물었던 건데 안느의 반문은…… 적어도 메리아놀에는 그런 근친 행위가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근현대에 들어서 그런 근친혼 풍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흔히 일어났지. 그보다, 메리아놀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면 이상하군…….”
환인이 의문스러워하자 이실리테가 옆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다.
=주인님. 드로거스 1왕자님이 근친상간을… 하셨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다루그 왕자가 이복 여동생과 합방을 한 게 틀림없다.”
=……어?! 태어난 배가 다른 것도 근친이야?=
정말 몰라서 묻는 듯한 안느에 그녀와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이실리테.
환인은 단순하게 ‘이 세계의 근친은 범주가 꽤 넓은가보군.’하고 그렇다는 대답을 한 뒤에 끝냈지만, 안느와 이실리테는 달랐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유르파를 낚아챈 두 여자는 지구에서 보편적인 근친 행위의 범주를 캐묻기 시작했다.
=으응? 사촌과 결합도 근친인 곳도 있고 직계혈족끼리만 하지 않으면 되는 곳도 있고…… 지역마다 좀 달라. 왜 그러니?=
=그거 도령의 노트북에서 본 거지? 직계혈족에는 배다른 남매도 포함이야?=
=응. 엄마가 다르거나 아빠가 달라도 직계혈족으로 분류돼.=
유르파의 대답에 안느와 이실리테는 맥이 살짝 풀린 모습으로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산된 듯한 표정. 왜 그러냐고 유르파가 물으니 환인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 그녀들에게서 나왔다.
=현대로 넘어간 뒤에 도령의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이슬이 아이랑 내 아이랑 결혼시키려고 그랬지…….=
“…….”
멈칫, 환인이 드물게 놀란 얼굴로 그녀들을 바라보자 안느가 제 발 저린 것처럼 손사래를 친다.
=그, 그게… 이슬이 아이랑 내 아이랑 결혼하면 손주는 도령이랑 나랑 이슬이랑 힘을 잇는 거잖아? 틀림없이 대단한 영웅이 태어날 테니까…… 그래서…….=
잘못이란 자각은 있는지 뒤로 갈수록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환인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사랑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다른 여자들도 황당해하다가 작게 웃음 짓는다.
=확실히 아가씨들이랑 자기의 피를 한 번에 이으면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궁금하긴 하네.=
=이실 언니랑 안느 언니의 아이들이면 아기 천사처럼 귀여울 텐데 귀여운 아이들이 낳을 아기는 또 얼마나 귀여울까요…….=
“나도 궁금하긴 하군.”
급기야 환인까지 그리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공감을 표현하자 안느는 한결 부담이 사라진 모양새로 히히 웃었다.
=그치?=
“하지만 아버지로서 찬성할 수는 없다. 근친이라는 행위는 당장 멀쩡해 보일진 몰라도 핏줄에 폭탄을 심는 행위니까. 그 폭탄이 격세 유전으로 후대에 발현되면 아이는 평생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걸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묻자 여자들은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1~2대 정도의 근친으로 심각한 유전 질환이 발생할 확률은 희소하다.”
물에 비유하자면 근친혼은 A의 호숫물과 B의 호숫물을 한데 섞는 식이다.
A와 B 양쪽 호수가 깨끗하다면 둘이 섞여도 당장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A의 호숫물이 지저분하다면 B뿐만 아니라 C나 D의 호숫물과 섞여도 유전병이 발생할 수 있다.
그녀들은 니오네브레스의 원주민이고 자신은 지구의 인간이다. 자신은 반로환동을 겪었고 아신이라는 인간을 초월한 특수 생명체가 되었다.
자신의 후손이 배다른 남매와 결혼할 경우 유전자적인 문제점을 갖고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겠는가.
환인의 이해하기 쉬운 설명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아영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오빠. 유전병을 폭탄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폭탄은 어떤 걸 가리키는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환인은 노트북을 펼쳐 의료 카테고리로 들어가 유전 질환의 심각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애꾸눈, 사시, 주걱턱, 돌악, 부실한 치아와 듬성듬성한 모발에 안면 비대칭인 얼굴. 거기다 구루병까지.
=히익…….=
=아…….=
사진을 본 여자들이 기겁하면서 신음을 흘린다.
그녀들 입장에서 사진 속의 사람은 호브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백려강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게…… 심각한 유전병이라는 거죠?=
“그래. 몇 대에 걸쳐 빈번한 근친을 반복하면 나타날 수 있는 사례 중 최악의 사례다.”
환인은 유전병의 치명적인 사례를 좀 더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외에 면역력이 기이할 정도로 낮아 병치레가 잦고 왜소증, 선천적 지적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가슴이나 등뼈가 굽어 곱사등이가 되는 구루병의 발병 소지도 커지지. 생식 능력도 약해져 후손을 보기 어려워진다는 사례도 존재한다.”
여자들이 멍한 얼굴로 이실리테와 안느를 바라보자 둘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해. 안 할 거야…….=
현기증이 난다는 듯 노트북을 슬쩍 덮어버린 이실리테가 차를 준비하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진다.
남은 여자들은 수군거리면서 조금 겁먹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친상간이 저렇게 끔찍한 병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응. 괜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었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긴 해. 이런 사실은 고도의 과학적인 접근이 있어야 근거를 뒷받침할 증거가 제시될 텐데, 니오네브레스에서는 이미 자연스럽게 근친을 멀리하는 풍조가 있잖니. 어떻게 된 걸까?=
=경험에서 우러난 게 아닐까요?=
=차원 방랑자들이 알려준 거일지도 몰라.=
환인은 잠시 그런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배에서 태어날 자신의 아이들.
기대가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백려강의 이야기처럼 아마도 천사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아이들이 태어나겠지.
그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서로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당첨이 확실한 즉석 복권을 긁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다.
1/3 근친으로 1대 결합에 문제가 발생할 일은 소수점 이하로 낮을 테니 허락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한 번은 두 번이 되기 쉽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렇게 겁을 주어서 근친을 멀리하도록 하는 게 좋겠지.’
이실리테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환인은 약간의 아쉬움을 접어두었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끝마친 환인 일행은 호텔 지배인의 협조로 일찍 체크아웃한 뒤 곧장 두르데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도르와인 섬의 동쪽 끝에 돌출된 반도의 항구 도시.
거기서 배 한 척을 구해 아드네빌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패시지 동쪽 해상을 향해 북상하는 게 계획의 기본 골자다.
=가는 건 그렇게 해도 아드네빌라 님을 어떻게 찾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를 바 없을 텐데……. 하율 씨한테 연락하면 위치를 안 알려주려나.=
=우리한텐 릴라이스 님이 있잖아요.=
「릴은 안 도와줄 거라고 빽 소리 지르는데?」
=엥? 왜?=
「릴은 아드네빌라한테 처맞은 기억 때문에 그 여자를 싫어…… 아, 귀 따가워! 소리 그만 질러!」
두르데인에서 보낸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쉬는 시간과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이동한 일행은 2일 만에 약 300km를 주파해 짧은 해협을 지나 항구 도시 니아마드에 들어섰다.
도시의 첫 인상은 근현대 유럽의 항구 도시 느낌이었다.
지형은 약간 비탈진 곳에 세워진 도시 몰드레테와 흡사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도시의 삼면이 바다라는 것.
바다와 접해있는 면적이 넓어서인지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한 길고 견고한 방파제가 굉장히 견고하고 촘촘하게 짜여있다.
거기에 더해 부두 및 방파제 곳곳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작살 포대.
다연장 로켓포처럼 흉흉하기 짝이 없는 포대의 존재는 이곳도 몰드레테나 엘위드리스처럼 나가족, 해양 마수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통과. 다음!=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외성벽 성문을 통과한 일행이 햇볕이 쨍하니 내리쬐는 분주한 항구 도시의 대로를 이동하며 쉴 곳을 찾을 때였다.
=앗. 저, 저기 좀 보세요…!=
백려강의 목소리에 도시 중심부로 고개 돌린 일행은 뜻밖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지이이이잉—……
니아마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탑, 피사의 사탑처럼 생긴 원통형 탑의 외벽을 푸른 연기와 빛줄기가 뒤덮는다.
이윽고 탑의 상층부에 형성된 뾰족한 첨탑에 푸른 연기와 빛줄기가 모여들더니 징징징징— 기묘한 기파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것도 잠시. 두쿵— 작고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푸른색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오.=
=어어.=
푸르고 선명한 빛기둥이 한순간에 수백 미터를 치솟는다.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빛기둥은 어느 정도 지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오로라처럼 도시를 뒤덮어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자신들처럼 외부 방문객들 뿐. 주민들은 흔한 일상인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잠시 후 보호막처럼 도시를 뒤덮던 오로라가 사라지자 백려강이 안느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니. 방금 저건 무엇인지 아세요?=
=음, 마물을 내쫓는 탑이라고 들었어. 하루에 한 번 정오에 마물이 싫어하는 에너지를 뿜어서 도시를 뒤덮는다더라.=
=확실히 파사의 기운이 좀 느껴지네요. 6~7급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이 정도면 어지간한 괴물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할 거 같아요.=
도시를 뒤덮은 에너지의 반경은 족히 5km에 달했다.
니아마드 전체를 뒤덮다 못해 도시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방파제까지 전부 포함하는 범위.
그 범위 안에서 배가 떠다니며 낚시나 어업을 하는 게 보인다.
유르파가 망원 술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이만한 영역을 뒤덮을 정도의 에너지를 한순간에 방출하다니. 어지간한 제어력으로는 시도조차 불가능할 텐데…… 누가 하는 거지?=
“…….”
=오빠, 왜 그러세요?=
환인의 가라앉은 눈빛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아영이 물었다.
“……여기서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방을 잡고 나서 하지.”
방금 에너지 방출이 점심시간 시작의 신호였는지 건물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주변 식당으로 흩어진다.
현대의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에 회사에서 빠져나와 주변 음식점으로 흩어지는 듯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은 상념을 털고 성문의 경비병이 알려준 호텔 밀집 지역으로 움직였다.
호텔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정해져 있다.
더 늦었다간 여관 같은 곳에 숙박해야 한다.
=오빠오빠.=
주민을 붙잡고 물어 적당히 괜찮은 호텔에 체크인한 환인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영이 팔짱을 껴오며 하는 재촉에 작게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알소프의 소멸은 너도 알고 있겠지.”
=옛. 아드네빌라 님의 노여움을 사서 도시가 송두리째 사라졌잖아요.=
당시 아영은 일행에 없었지만, 언니들이 해준 이야기에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알소프가 소멸하기 직전, 미궁이 역류를 넘어 폭발했다. 아드네빌라는 인간의 탁기로 오염된 미궁이 자신의 순수한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해 폭발하였다고 했는데, 파사의 기운은 그 순수에 포함되지 않는 건가 생각했던 거다.”
=……!=
=…….=
점심을 먹기 위해 거실에 탁자와 식기를 준비하던 여자들이 멈칫하면서 환인을 돌아보았다.
‘그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하는 눈빛이 역력하지만, 환인은 신경 안 쓰고 창밖으로 작게 보이는 탑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탑은 오랜 시간을 보내온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수백, 수천 번의 기운이 뿌려졌을 텐데 니아마드의 미궁은 멀쩡한 것 같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보통 판타지 소설에서는 이걸 플래그라고 하는데…….”
“레알. 형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터질 거 같음…….”
“그것이 클리셰니까.”
=얘들이 못 하는 말이 없어.=
철썩철썩— 김철수와 김영수의 등짝을 후려친 안느는 “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져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둘을 치우며 환인에게 물었다.
=배를 구하고 항해사도 모집해야 하니까 며칠 여기서 머물러야 하잖아. 도령이 한 번 봐두는 게 좋지 않을까?=
“네가 신경 쓰인다면 확인해보도록 하지.”
신식 영혼의 눈은 미궁의 혈맥도 확인할 수 있다. 혈맥의 상태를 보면 미궁의 상황도 대강 알아낼 수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서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거다.
이실리테가 미리 만들어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환인은 드물게 각자 할 일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영. 너는 이모렐과 함께 부두로 내려가 분위기를 확인하고 배를 구매할 수 없는지 알아봐라.”
=옙. 주변 바다 동향 말씀이시죠? 배의 크기랑 선원은 어떻게 할까요?=
“몰드레테에서 탔던 바사보다 한 단계 더 큰 것까지 괜찮겠지. 선원은 필요 없다. 유르파, 도시에서 볼일을 본 뒤에 항해술 전반에 관련된 서적을 구해주십시오. 안느는 유르파를 따라가고.”
=영령군에게 항해술을 가르칠 생각이구나?=
“예. 도시를 돌아다녀 선원 출신 영혼도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 후에 미궁을 잠깐 들를 예정이니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날 따라와라.”
=네, 주인님.=
=넷.=
「환인. 나는? 나도 환인 따라가면 안 돼?」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묻는 노른에게 환인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나보다 유르파나 아영을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을 텐데.”
노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지 환인을 따라갈 거라며 그의 허리에 매달린다.
「환인. 노른 데려가는 게 좋을 거야. 릴이 지금 몸 바꾸자고 성화거든.」
“……그러면 노른도 날 따라오고, 환연 너는 릴라이스가 사고 치지 않게 하면서 짐과 우리 쿠에들을 누가 안 건드리는지도 주시해라.”
「그럴게.」
대답을 마지막으로 검은색 환연의 머리카락이 물빛으로 확 바뀌더니 환인만큼이나 키가 훌쩍 커진다.
물로 평범한 로브까지 만들어 입은 릴라이스는 환인의 시선에 멈칫했다가 《……흥!》 까칠하게 콧방귀를 끼며 방을 나가버렸다.
환연을 통해 몇 번이나 환인과 통정했지만, 여전히 그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습.
하지만 여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릴라이스의 태도가 점점 무디게 변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환연과 처음 합체했을 당시에만 해도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뿌려댔었다.
그런데 지금은 콧방귀만 뀔 뿐이니…… 조만간 릴라이스도 그의 밑에 깔려서 앙앙거리지 않을까?
“음.”
자신에게 콧방귀를 끼고 나가버린 릴라이스의 태도에 환인은 영령 둘을 소환해서 호텔에 붙어있는 쿠에 축사로 보냈다.
환연에게 지시는 내려놨지만, 릴라이스의 태도를 보면 이중으로 방비를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젤프리와 실루의 깃털 색은 현재 밀짚색이다. 마도구로 바꿔놓았는데 비술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비술을 꿰뚫어 볼지 모른다.
그리고 노을색 쿠에인 실루를 본다면? 주체 못할 욕심이 범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다.
여자친구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 환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안느 말대로 여기서 며칠 머무를 예정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 볼일이 있다면 볼일을 보면서 적당히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와라.”
“형님형님. 저희는요?”
손을 번쩍 들면서 자신들은 뭘 해야 할지 묻는 김철수에게 환인은 간단한 지시를 내려주었다.
“밤에는 놀러 나가도 괜찮으니 낮에는 시간 나는 대로 능력 훈련을 반복해라.”
“옙!!”
“옛썰!”
“아드네빌라를 찾은 뒤에는 너희가 나서야할 일이 며칠 내로 다가온다. 그때 너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너희 능력의 숙련도다.”
환인의 담담하지만 무거운 이야기에 밤의 나들이를 생각하며 희희낙락하던 둘은 자연스럽게 굳어버렸다.
머릿속에서 사창가 생각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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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죽기 싫으면 열심히 훈련하라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