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
두르데인 방문 목적을 초과 달성한 일행은 그날 오후부터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이실리테 언니. 여긴 바위 소금이랑 둘데 향신료가 유명하다고 해요. 돌도스 미궁에서 채굴되는 돌 버섯도 별미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돌 버섯…… 설마 돌로 된 버섯인가요?=
=앗, 그건 아니구 겉은 돌처럼 생겼는데 속은 평범한 버섯이에요. 찌거나 삶은 뒤에 바위 소금, 돌데 향신료를 가루로 만들어서 섞은 뒤에 찍으면 그렇게 맛있다고 주점의 프라우드 분들이 이야기하셨어요.=
=저기 팔고 있네요. 한 번 시식해봐요.=
=네, 언니!=
이실리테는 백려강과 함께 두르데인 특산물과 뭍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재를 사러 돌아다녔고 유르파는 안느와 아영을 데리고 두르데인의 질 좋은 각종 주괴를 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두르데인의 북서쪽 노천광산에는 돌도스 4급 미궁이 붙어있는데…….
=광산이 미궁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품질의 광석을 생성하거든.=
=……네? 생성이요?=
=응. 광산을 파고 내려간 뒤에 며칠 뒤 다시 들어가 보면 캐낸 자리에 광석이 다시 생성되어있다고 해.=
=우와, 프라우드족한테 마르지 않는 각종 천연 광산이라니. 금붙이가 나오는 미궁보다 더한데요?=
=그 덕분에 드로거스 왕가의 재정은 다른 왕가들보다 매우 풍족해. 협의회에 매년 기부하는 금액도 일곱 왕가 중 가장 많았는데 이번 일로 가장 큰 후원자가 떨어져 나간 셈이니까…….=
=그 때문에 협의회 내부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거겠군요.=
=내 생각에도 그래. 거기에 알세이시스 가문이랑 미리아스툼도 이탈 중이잖아? 금력으로 원탑인 드로거스에 무력 원탑인 알세이시스, 정령 원탑인 미리아스툼이 한 번에 이탈해버려서 메리아놀의 전력이 크게는 절반 이상 깎여나갔다고 봐.=
=으음……. 남은 네 가문은 전투가 주력 특기는 아닌 거죠?=
=그렇지. 그나마 영림의 포르미살드하고 천렵의 알콰닌이 억지를 부린다면 싸움할 수 있긴 한데…….=
포르미살드는 다방면에 뛰어난 인재가 많은 가문이다.
알세이시스의 인재가 무력 수치 10이고 미리아스툼이 정령 친화 수치 10이라면 포르미살드는 무력과 정령 친화 수치가 7~8인 셈.
알콰닌은 가문의 시초가 시초여서 괴물과 이형종만을 상대하겠다 천명하였기에 대인 전투에 동원은 힘들다.
점성술의 투르시온이나 지모의 옴바드는 전투 외 특기이고. 물론 왕가이니만큼 기본 전력은 있지만…….
=……투르시온은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점성술이 있는데도 이러다니, 이런 상황을 예측 못했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까지 예측해서 계획을 진행 중인 건지 참.=
=점성은 인지를 초월한 육감으로 도구를 써서 가야 할 길이나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거잖아. 예지하고는 전혀 다른 구조니까 뭐. 선택지에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
=아가씨들~ 빨리빨리!=
=앗 언니가 불러요.=
=얼른 가자.=
여자친구들이 그렇게 돌아다닐 동안 환인은 노른과 환연만 데리고 영혼 감응과 감지를 따라 두르데인을 휘젓는 중이었다.
「성제님. 이쪽에 장기가 느껴져요.」
비가시화 상태로 따르던 이름리아가 두르데인의 골목길을 안내한다.
다른 나라였다면 이렇게 돌아다니지 못했겠지만, 메리아놀이라 플뢰족이 두건을 쓰지 않고 혼자 덜렁 돌아다녀도 이상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리아의 뒤를 따라간 환인은 해가 가려져 음침하고 눅눅한 장소에서 껄렁하게 앉아있는 남녀 영혼을 찾을 수 있었다.
꽤 힘든 삶을 보내다 죽었는지 허름하고 기워 붙인 옷차림인 셀핀 프라우드 두 명은 양아치처럼 앉아있다 「아앙?」 하고 자신들 앞에 선 환인을 야려본다.
「뭐야 이 멀대 귀쟁이 새끼는?」
「……우리가 보이는 거 아냐?」
「보이긴 씨발 보지가 보이냐. 영혼사도 아닌데 우릴 어떻게 봐?」
「그래도…….」
셀핀 프라우드 남자는 현대의 10대 양아치 청소년처럼 건들거리며 환인과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노른을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어보았다.
「직업자도 아닌 게 여기까진 왜 들어왔어? 옆에 애새끼 보지라도 쑤시려고 으슥한 곳을 찾았나?」
「……얌, 뭔가 느낌이 이상해. 그냥 가자.」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기다려보자고. 잘하면 떡 치는 것도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죽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노른의 치마 안쪽을 보려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는 남자의 모습에 이름리아가 후후후, 웃으며 환인에게 물었다.
「성제님, 어떠신가요?」
「어?! 뭐, 뭐야! 어디서 들리는 소리……!」
「얌, 역시 이상해! 도망가자!」
바로 눈앞의 이름리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흠칫하던 둘은 이내 여자의 외침에 벽을 뚫고 도망가려다 박제된 것처럼 움직임이 굳어버렸다.
머릿속에 ‘멈춰라.’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정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된 거다.
그사이 두 영혼에게 감응을 걸어 생전 삶이 어땠는지 확인하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군요.”
살아서는 자신보다 약자들에게 공갈협박과 갈취를 일삼았고 몇 번은 살인까지 저질러 땅에 파묻었다.
10명에게 묻는다면 10명 모두 사형을 입에 담을 범죄자들.
「네에. 그러면…….」
등을 보인 채 굳어있는 두 영혼으로 다가간 이름리아는 두 명의 목을 아이처럼 감싸 안으며 귓가에 불길한 핏빛의 숨결을 후우~ 흘려 넣기 시작했다.
「흐긱!? 그히힉!」
「하흑…! 시……럿……! 머리로… 들어오지…… 마아……!」
흘러 들어가는 숨결이 많아질수록 귀에서부터 적색으로 물들어가는 회색 영혼 둘.
목에 이름리아의 팔이 감긴 채 파들거리던 둘은 불과 10초가 지나기 전에 완전한 붉은색의 영혼이 되어버렸다.
이지가 흐려진 듯 이제는 도망갈 생각도 안 하고 멍하니 서 있는 둘을 영혼 구슬로 만들어 회수한 환인은 “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적옥을 늘리기 위해 습격해온 마물, 마수, 괴물에 동물도 잡아서 실험을 해봤지만, 혼재가 되는 것은 사람의 영혼뿐이었다.
도적이나 야적이 자주 출몰하고 패시지에서 습격자를 계속 보내온다면 금방 모을 테지만, 패시지의 현 시국이 시국인지 습격자는 아예 없고 나가족이 들끓는 메리아놀 국가 특성상 도적도 얼마 없다.
그러다 보니 엘위드리스에서 이곳까지 이제야 겨우 17체를 모은 상황.
이름리아는 고민하는 환인을 바라보다 서큐버스처럼 유혹하듯 그의 어깨에 살그머니 손을 올리며 간드러지게 속삭였다.
「성제니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모으는 것보다…… 투르시온 가문의 직할시를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거기에 가면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텐데…… 후후후.」
“…….”
환인은 대답 없이 무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고, 얼음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질 법한 그의 시선에 이름리아는 흠칫하면서 물러섰다.
“이름리아.”
「네, 네.」
“당신의 원한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게 협조해주는 만큼 그 원한을 해소해주려 노력할 생각이기도 합니다.”
「…….」
『그런데 이렇게…… 주제를 넘으려 하면 곤란하지요.』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위압감에 이름리아는 하악, 거친 숨을 토해내며 제 목을 움켜쥐고 털썩 무릎 꿇었다.
영혼의 결집이 엉성해질 것 같은 목소리. 영혼 자체를 움켜쥐고 짜부러트리는 듯한 존재감.
이름리아는 그의 황금빛 눈과 주변을 왜곡시키는 휘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환인은 그런 이름리아의 피처럼 붉기도 하고 눈처럼 하얗기도 한 그 머리에 손을 올리며 웃음지었다.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입술과 눈매는 봄바람처럼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감정이 일말도 담겨있지 않다.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간 혼까지 소멸시켜버릴 듯한 무자비한 폭군의 눈빛.
이름리아는 꼬리뼈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찌르르한 전율이 역으로 치고달리는 느낌에 봉긋 솟은 가슴이 짜부라질 정도로 꾸욱 누르며 대답했다.
「네…헤엣! 성제님의…… 말씀대로에욧…♥」
“좋습니다.”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환인은 몸을 돌려 뒷골목을 빠져나가며 혼재를 더 모을 방안을 구상했다.
두르데인의 미궁에서 출몰하는 것은 골렘 타입의 이형종뿐이다. 하지만 인간형 이형종이 출현하는 미궁도 있다.
그곳의 이형종 영혼이라면 혼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패시지 인근의 미궁 정보를 찾아보면…… 아니, 그보다는.
‘나가족으로 시도해봐도 될 것 같은데.’
통역 기관만 없을 뿐, 언어를 가졌고 군락이나 집락을 이루며 집단 전술을 구사하는 마물이 나가족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도 조만간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나가족과 척지면 귀찮아질 테니, 나중에 아드네빌라를 찾은 다음 확인해보아야겠다.
광기가 옅어져 한층 얌전해진 이름리아를 사냥개처럼 다뤄 적옥을 3개 더 확보한 환인은 슬슬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며 대로로 빠져나왔다.
더 이상 두르데인을 돌아다녀도 적옥을 더 얻기는 어려워보였기 때문.
「결국 3시간 동안 적옥은 다섯밖에 확보 못했네. 환인, 불량배나 양아치를 찾아서 조지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조직 하나를 습격한 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놈들은 그대로 처형해버리고, 그보다 덜한 죄를 저지른 것들은 도시 경비대에 던져서 해결하자는 이야기.
하지만 환인은 그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그 아드네빌라가 영락해서 비만 뿌리는 이무기처럼 변한 것도 현 사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본다.”
「인간을 죽이고 혼을 붙잡아 적옥으로 만드는 건 아드네빌라가 한 짓이랑 다를 게 없다는 뜻이야?」
“그래.”
영혼의 선악 판단은 신이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은 아니다.
명백한 적의로 이쪽을 죽이거나 해치려 달려드는 놈들을 역으로 해치워 사용하는 건 정당방위가 될 것이다. 문제 없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악인이라 해도 이쪽과 큰 연관이 없는 사람을 해치고 영혼까지 이용하려 드는 것은, 현대 법으로 보자면 일종의 과잉 대응이라고 느껴지는 것.
「흐음. 이래서 적옥 100개를 어느 세월에 다 모아.」
“모으다 보면 되겠지. 써야 한다면 이름리아를 우선해서 써도 될 일이고.”
그리 말하며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서자 두르데인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쏟아져나오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서서히 푸른색에서 오렌지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하나둘 불이 들어오는 가로등.
손님을 실어 나르느라 바삐 움직이는 수레와 마차,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술집을 찾아가는 평화로운 풍경.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서는 왁자한 웃음소리와 튀기고 볶고 지지며 발생하는 음식 냄새가 흘러나온다.
「환인. 저쪽에서 영혼사가 들어오고 있어. 정식 상급 영혼사인가본데?」
왠지 모르게 그리운 풍경 속을 걸어가며 추억에 살짝 잠겨있던 환인은 환연의 이야기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묘한 웅성거림이 인파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똑같이 길을 걷던 사람들이 환인과 마찬가지로 멈춰서서 도로 저편을 기웃거린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웅성거려?=
=……응? 뭐라고=
=어이, 영혼사님이 오셨대!=
=영혼사님이라고!?=
=뭐? 진짜?=
=이렇게 술 마실 때가 아니야! 가보자!=
일부는 술을 마시다 말고 뛰어나와 저편으로 달려가고 길을 오가던 수레와 마찰들도 어수선해지다가 일단 길 가장자리로 붙는다.
인파가 좌아악 갈라지며 빛내림 현상 같은 아우라를 지닌 영혼사가 밀짚색 쿠에를 타고 나타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
함성이 왁 하고 터졌다.
좌측에 세 명, 우측에 세 명. 총 6명의 영혼 기사를 대동한 노란 여우귀의 여자 영혼사가 나타나자 길을 걷던 인파들이 도로 가장자리에 모여들며 영혼사라는 단어를 연호한다.
여자 영혼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부르는 두르데인 시민들에게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런 영혼사를 향해 시민들은 존경과 환영의 뜻을 담아 우렁찬 함성을 내지른다.
「저 정도 아우라면 6급 정도는 되겠다. 뒤에 영혼 기사들도 4~5급인걸 보면 도시급 순회 영혼사인가 보네.」
“…….”
이런 환영이 익숙한 듯 보무도 당당하게 걷는 영혼사 일행의 쿠에들. 그리고 그런 쿠에의 등에서 조금의 빈틈도 없이 영혼사를 호위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는 영혼 기사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존경과 흠모의 함성을 내지르는 시민들.
잘 보니 영혼사 일행과 함께 도시에 도착했는지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모험자와 여행자들, 상단과 상단의 호위들이 행진처럼 뒤따르고 있다.
이윽고 두두두두— 영혼사 일행의 진행 방향 맞은 편에서 일단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쿠에와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재빨리 탈것에서 내려 영혼사에게 척, 하고 경례를 올린다.
=두르데인은 영혼사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도시 제1 수비대 대장 로트거스 아드밀리온입니다!=
영혼사가 무어라 대답하지만 주변 함성에 파묻혀 잘 안 들린다.
=오오! 알겠습니다, 클레이히 영혼사님! 저희 제1 수비대가 영혼사님을 수행하겠습니다!=
수행인가.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어쩔 수 없이 영주성으로 안내하겠지.
노른은 이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지만, 환연은 거의 축제급으로 소란스러운 주변을 바라보다 그의 뺨을 콕콕 찌르며 키득거렸다.
「와, 영혼사가 이렇게 인기 좋았구나. 근데 우리 성제님은 도시에 이렇게 환영받았던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기분이 어때?」
환인이 피식 웃으니 환연도 히히 웃다가 그의 안주머니로 모습을 감추었다.
노른은 이제 지겨운지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린다.
「환인. 나 배고파.」
“그래. 이실리테가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니 돌아가자.”
환인은 잠시 멀어지는 영혼사 일행을 바라보다 유자 호텔로 복귀했는데, 들뜬 분위기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앗, 오빠오빠! 보셨어요? 마을에 영혼사님이 오셨대요!=
「얘 좀 봐. 야, 넌 성제님을 앞에 두고 영혼사님 도착 소식에 들뜬 거야?」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영의 호들갑을 본 환연이 핀잔을 주자 아영이 헤헤 웃으며 환인의 옆에 붙어 팔짱을 낀다.
=뭔가 신기하잖아~. 이렇게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건 진짜 드문 확률 아냐?=
「그건 그렇지.」
=호텔 분위기도 뭔가 들뜬 느낌이더라. 이번에 방문한 영혼사 님은 정규 영혼사님들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분 같았어.=
요리 중인 이실리테를 대신해 코트를 받아드는 안느에게 환인이 담담히 말했다.
“클레이히 카스테힐. 현재 영성으로 승급할 가능성이 가장 큰 영혼사로 보고 있다. 그에 걸맞게 위험한 지역만 골라서 찾아다니는 성녀 같은 여성으로도 유명하지.”
=어! 클레이히 님이셨어? 우와, 바깥의 소란이 이해가 가네.=
=안느 언니, 그분 아세요?=
=나도 소문만 들어봤지 직접 뵌 적은 없어. 야, 환연. 클레이히 님 직접 봤지? 어땠어?=
「어땠긴. 환인보다 못한 영혼사였지.」
=그런 당연한 소린 말고. 영혼사님 분위기랑 일행인 영혼 기사님들이 어땠냐는 거지.=
「몰라~ 난 관심 없어.」
=에이그.=
=언니님. 혹시 오늘 클레이히 님이 성불행을 할까요? 한다면 살짝 보고 싶은데.=
=으음.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보지만…… 가능하다면 나도 클레이히 님을 한번 뵙고 싶긴 하네.=
축제 분위기에 휩쓸린 것과 비슷하게 살짝 즐거운 분위기가 거실을 뒤덮고 있다.
방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자 유르파도 방에서 나오고, 옆방에서 김철수와 김영수도 식사 시간에 찾아오니 더욱 떠들썩해진다.
“누님들. 밖에 유명한 영혼사가 찾아왔다는데 들으셨어요? 앗, 환인 형님.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슴까!!”
“그래.”
=언니들~ 이제 곧 음식 나가니까 식기 좀 차려주세요~.=
“어? 저희가 할게요!”
바깥의 흥겨운 분위기가 옮았는지 평소보다 흥이 돋는 모습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여자들과 거실에 가득한 맛있는 향기에 헤벌쭉 웃는 김철수, 김영수.
환인의 제안에 술도 꺼내고 잔까지 준비하자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공들여 만든 요리가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오옷!”
“오늘은 특히나 더욱 맛있어 보이는데요?!”
두르데인 특산품인 돌버섯과 바위 고기, 용암 장어와 용암 가재 등을 사용한 진수성찬이 차려지자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는다.
김철수와 김영수까지 포함하면 11명이나 되는 대인원이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에 술과 음료들까지.
이쯤 되면 작은 연회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일행은 정말 오랜만에 들뜬 분위기 속에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해나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김철수와 김영수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한참 뒤.
“이실리테와 안느는 잠시 나갈 준비 해라.”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을 때 환인은 천릉의 코트를 입으며 여자친구 둘을 불렀다.
=어디로 가려고?=
“클레이히 영혼사를 만나러 갈 거다.”
그의 이야기에 눈을 살짝 크게 뜬 둘은 즉시 벗어두었던 의복과 장비를 챙기고 인식 저해 후드 망토까지 둘렀다.
유르파에게 은신과 기척 감소의 비술까지 받은 셋은 노른, 실루, 젤프리를 타고 영주성으로 향했다.
깊은 밤이다.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고 거리를 순찰하는 기사와 병사들도 7급 비술사의 비술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에, 세 명은 아무런 제지 없이 영주성 앞 도개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성문 근처에서 비술을 해지한 환인은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신분을 가볍게 밝혔다.
=서, 성제, 성제님?!=
발설 엄금을 경고받긴 했지만, 아침에 어마어마한 신분의 귀빈께서 방문하셨었다는 소식은 기사들에게도 전달되었었다.
기사들은 설마 그 귀빈이 니오네브레스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아신위의 성제였을줄 몰랐고, 더욱이 이런 야밤에 방문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클레이히 영혼사님을 만나뵙기 위해 잠시 방문했습니다. 안에 기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성제의 휘황찬란한 황금빛 아우라에 얼었던 것도 잠시, 경악을 애써 감추며 기사들은 환인을 클레이히 영혼사가 머무르는 별실로 안내했다.
=저곳입니다. 안에 기별을 넣어두었으니 클레이히 영혼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입구에서부터 프리패스에 가까운 통과.
이건 다루그 왕자가 혹시라도 자신의 방문을 대비해 따로 지시를 내려놓은 거라고 봐야 할까.
“안내 감사합니다.”
=벼, 별말씀을…….=
환인 일행이 아름다운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별실에 다다르자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영혼 기사들은 성제 일행의 방문에 딱딱하게 굳어서는 척, 경례를 올렸다.
=환인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환인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늦은 시각에 예의 없이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찍 떠날 예정인지라 이야기를 전하려면 지금 밖에 없을듯해 부득이 찾아뵈었습니다.”
=예, 옛. 클레이히 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시지요.=
환인은 영혼 기사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영혼사의 로브를 차려입은 클레이히가 거실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클레이히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소곳이 손을 모아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방랑 중인 영도의 작은 등불이 자애신님의 등대이신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저도, 클레이히 님도 자애신님의 똑같은 등불일 뿐입니다. 이런 예의는 너무 과합니다.”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 클레이히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손이 몸에 닿은 것만으로도 황송해하고 시선은 아예 마주치지도 못하니, 환인은 그녀가 자신을 대성녀와 동급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래서야 이야기를 오래 나누거나 육보시는 하지도 못하겠군.
자신이 이곳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편히 쉬어야 할 클레이히 일행이 쉬질 못한다.
그녀의 영혼 기사들도 완전 전투 차림을 하고선 한쪽 벽에 나란히 각 잡고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정도니까.
환인은 신식 평온의 파동을 작게 펼쳐 클레이히 및 영혼 기사들의 긴장과 놀람을 진정시켜주고 빠르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클레이히 님의 다음 목적지는 주도 패시지라고 판단됩니다. 제 예상이 맞습니까?”
=예에. 8개월에 가까워져 가는 수해로 인하여 다수의 영이 주도에 발생하고 있을 거란 예측이 기관으로부터 전달되었습니다. 하여 두르데인에서 4일간 성불행을 진행한 이후 주도로 향할 예정입니다.=
“제가 정식 상급 영혼사이신 클레이히 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주도로 향하는 일정은 중단하시고 두르데인의 성불행이 끝나시거든 남쪽으로 내려가십시오.”
=성제 예하의 분부에 따르겠사옵니다.=
“…….”
어째서냐고 묻지조차 않고 따르겠다는 모습에 환인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클레이히의 뾰족하게 솟은 금색 여우귀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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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포스타(성제) 앞에서 얼어붙은 일병(상급 영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