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76화 (776/813)

776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

다루그 왕자에게 중후한 멋이 나는 목각 상자를 선물로 받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자신들의 마차보다 더욱 편한듯한 왕실 마차 안에서 환인은 그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한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혹여 두르데인에 악감정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그 점은 불식시켜주었으니 문제 되지 않겠지.’

그보다 다루그가 한 질문과 약속의 가이드라인이다.

그건 그의 여동생이 잡아준 것이 틀림없겠지.

거인숲 미궁 앞에서 처음 봤을 때 그의 인상은 전형적인 니오네브레스의 우직한 전사였다. 헌데 좀 전 접견에서의 질문은 지략가의 느낌이 적지 않았으며 이쪽의 진면목을 제법 날카롭게 간파한 모습이었다.

그만한 눈썰미는 그에게 없었으니 배다른 누이라는 그녀의 작품이 확실하다. 셀핀 프라우드는 지성적이기도 하다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가 우연히 주워 들었다던 결명회라는 자들의 목적이다.

‘신의 힘이라고…….’

아신위에 발을 걸치며 알게 된 것에 따르면 신의 힘이란 자유와 정반대되는 성질이다.

족쇄, 제약, 운신의 부자유.

명분 없이는 함부로 힘을 쓸 수 없고 명분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힘을 쓰다간 자칫 영락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는 제약 때문에 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도 없게 된다.

하늘을 떨치고 땅을 울리는 강한 힘이 있으면 뭐 하는가. 마음껏 쓸 수도 없는데.

더욱이 신의 힘을 가져 신계라고 부르면 알맞을 듯한 천원이나 오르빈치에 올라보았자 주변에 비슷한 힘을 가진 자들은 지천으로 널려있을 거다.

기껏 고생 끝에 힘을 손에 넣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도 아니고 자유도 잃는다.

강해지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신의 힘을 얻는 것은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짓이라는 게 환인의 인식.

거기에 이 세계의 신이란 자들이 모종의 힘으로 신의 힘을 얻는 걸 두고 볼까?

더해서 자신처럼 능력의 성장으로 인간을 초월해 아신위에 오른 게 아닌, 인위적인 방식으로 신의 힘을 얻으려 하다간 4대 교단이 ‘신성모독이다!!’ 고성을 지르며 눈을 까뒤집고 미친놈처럼 달려들게 뻔하다.

그런 위험 부담을 지면서까지 신의 힘을 얻으려 할까.

아니, 신의 편린만 맛보아도 신의 힘을 얻겠다는 둥의 헛소리는 못할 텐데.

“…….”

관점을 달리한다면 어떨까. 신의 힘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불로장생 같은 능력을 얻으려 하는 거라면?

불로장생은 예로부터 지배자의 원픽 소원이었다.

니오네브레스에는 신비로 가득 찬 미궁이 잔뜩 존재한다.

4개 국가의 수반이자 왕족이라면 인력과 금력, 권력으로 미궁에 사람들을 들여보내서 유물을 입수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불로장생의 신약 같은 것도 입수할 수 있겠지.

물론 ‘불로장생’을 입수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을 거다.

한 번에 두 가지, 최상위 계열의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약을 얻는 일은 등가교환의 법칙을 생각해보아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일일 테니까.

하지만 ‘불로’의 비약, ‘장생’의 영약을 손에 넣기란 상대적으로 쉬울 거다.

더불어 플뢰족의 표준 연금 능력과 플뢰족의 특징 덕분에 노화 방지, 수명 증진 정도의 효과를 내는 소재나 약을 입수하기란 더욱 쉬울 것이고, 최상급 마도구의 힘을 빌린다면 정말 수백 년 동안 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러니까, 신이 존재하고 그런 신을 섬기는 교단이 존재하며 니오네브레스의 문화와 관습 전부를 고려한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목적은 영생인가…….’

신의 힘으로 영원한 삶을 얻어 이 땅을 통치하려는 야망. 물론 불로불사도 더해진 영생이라야겠지.

…….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 드는 결론을 내놨지만, 환인은 마뜩치 않았다.

영생이라니, 혼자 그런 것을 받아서 어디다 쓸까.

만약 자신이라면 사랑하게 된 여자친구들까지 함께 지구에서 영생을 누리게 해준다면 조금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영생으로 인한 문제점? 그런 것쯤은 명가를 일으켜 세워 국가 하나를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면 해결될 일.

지금 자신의 능력이라면 음모론에 등장하는 세계 3대 가문인 록펠러, 메디치, 로스차일드 정도 되는 가문을 세우는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테니까.

잠깐 딴생각을 하던 환인은 다시금 결명회의 목적에 대해 고심했다.

다르게 생각해 ‘모종의 대지’를 지구로 치환하여 지구 침략의 가능성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의미가 없지.”

=응? 뭐가?=

환인의 옆에 앉아 갓 사귄 연인처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안느가 환인의 혼잣말에 반응했다.

“니오네브레스 인류가 지구를 침략할 이유 말이다.”

=……엥?=

=네……?=

「그야 당연하지. 지구에서는 위상력도 못써, 위상력 회복량도 줄지, 공기가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착한 것도 아니고. 장점이라면 신과 미궁, 괴물이 없다는 건데 대신 탐욕이 가득한 휴먼이 있잖아.」

환연이 그의 코트 안에서 머리를 쏙 내밀며 하는 말에 안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지구 침략이란 가설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지구에는 니오네브레스하고는 비교도 없을 만큼 발달한 문화가 있잖아. 그 정도면 침략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너같이 특이한 애나 그렇지 여기서 가질 수 있는 거 다 가진 놈들이 그런 거에 혹하겠어? 문화 발전은 멍청하고 무식하고 무지해야 할 서민들의 지성 발달을 의미하는데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의 지성 향상을 퍽이나 반기겠다.」

=…….=

환연의 무자비한 팩트 폭행에 안느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주인님. 드로거스 1왕자님의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안느와 가위바위보에 져서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실리테의 질문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십 소문으로 들었다고 했지만 신의 힘과 모종의 토지를 얻으려 한다는 일은……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조금, 믿기지 않아요……. 신의 힘을 탐낸다는 사실이 교단에 알려지면 당장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대륙의 공적이 될 텐데. 아무리 메리아놀의 왕족이라 해도 이단 심판에서 빗겨나지 못할 거예요.=

=나도 이슬이랑 같은 생각이야. 차원 소환을 마구 해대는 미친 자식들이라 해도 이 정도는 괜찮다,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정도는 인식할 텐데, 신의 힘이라는 건 명백히 후자야.=

두 여자가 부정을 드러내자 환연이 가볍게 발상을 전환시켰다.

「신의 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게 목적이라면?=

=…응? 어, 그건…….=

=…….=

그의 이야기에 환연만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족이면 평민들이 닿지 못하는 세계의 비사 같은 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잖아. 아신에 대해서도 알 거 같은데 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추측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인간들이 무식하게 신의 힘 그 자체를 노릴 거라고 생각은 안 드네.」

그녀의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환인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모습 그 자체다.

환연이 한 말에 대한 가설은 이미 검증을 끝마쳤고 차원 침략은 그 말미에 나온 흥미 본위의 가설이란 뜻이겠지.

움직이던 마차가 멈춰서더니 똑똑, 마차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자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 유자 호텔 바로 앞이었다.

플뢰로 변장한 채 호텔로 돌아온 환인은 외출한 여자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영주성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낸 결론은, 결명회의 최종 목적이란 영생과 불로불사일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아.=

=으음.=

돌아오는 마차 안,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설명해주겠다는 말에 잔뜩 궁금해하던 이실리테와 안느는 단번에 납득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만한 소원이라면 신님의 힘이 아니고서야 성취하는 건 어렵겠네요.=

=영생이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이해되기도 하고…….=

여자들은 환인의 수명이 ‘고작’ 80년 정도이며 이미 30년 가까이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생각하면 영생을 향한 욕구,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다리를 꼬아서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던 유르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에게 물었다.

=자기, 그러면 드로거스 왕가는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는 거니? 협조를 요청해서 패시지의 무력 구도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알세이시스 왕가를 설득하고 미리아스툼 왕가하고도 손을 잡으면 3:4 잖아? 힘의 균형이 제법 자기 쪽으로 쏠려서 편해질 거야.=

“그건 메리아놀을 반으로 쪼개서 분열시키는 행동이나 다름없습니다. 교단과 사도, 땅신이 어떠한 성향인지 모르는 지금은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넌 이미 헤뷜트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놨잖아.」

“벨티칼의 주도에서 벌인 일은 나라를 반으로 갈라 쪼개는 일이 아니라, 속부터 곪아서 썩어들어가던 피부를 찢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쪽이 주적이 되어 나라를 양분시키는 것과 저희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니 차후에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도록, 타 왕가가 투르시온에게 붙지 않고 딴생각을 못 하게끔 상황을 경직시켜놓는 것이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흠. 그건 그러네.」

여자들은 환인의 설명에 충분히 수긍했다.

확실히 현재 그의 무력과 패시지의 전력을 생각해본다면 이제 와서 새 동료를, 세력을 영입할 이유가 없다.

어중간한 동료라면 이쪽의 동태만 누출될 뿐이고 세력을 늘린다면 ‘아신’인 성제의 단죄가 아니라 성제군 vs 메리아놀군이라는 전쟁 구도로 초점이 잡힐 테니까.

그리되면 결명회가 어떤 개수작을 벌여 여론을 뒤집을지 모르는 일.

고개를 끄덕이던 아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오빠. 성에 가셨다가 바로 돌아오신 거예요? 드로거스 왕자만 만나고?=

“두르데인은 이미 드로거스 왕가가 지배 중이다. 그리고 다루그 왕자는 이미 왕위 계승 절차에 들어간 것 같더군. 그를 만났으니 다른 인사를 만날 이유는 없지.”

자신이 성제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현시점에 몇 안 되니 괜히 정체를 드러내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음, 그걸 보면 두르데인이 패시지하고 거리를 두고 있는 건 맞나보네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소문에 귀를 기울여봤는데 패시지로 물자나 상단을 보내는 양이 이전에 비해 1/3 가까이 줄었나 보더라고요.=

“완전히 끊을 수는 없겠지. 그랬다간 민족 반역자가 될 판이니까. 아무튼…….”

이야기를 거기서 마무리 지은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외출했던 용무는 끝마친 건가.”

환인이 아스펜드에서 목각 상자를 꺼내는 걸 보며 다들 나갔던 일을 이야기한다.

=자기가 말했던 대로 품질 좋은 다수의 병장기를 구매했어. 비술 부여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제품 품질 쪽으로 신경 써서 영령군이 쓸 것을 중점적으로 모았고…… 이모의 방어구도 한 벌 구매했어.=

그녀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 창, 활, 단검, 방패 등 100여 개의 무구가 쏟아져나온다.

매끈하게 잘 빠진 장검 한 자루를 들어 은색으로 빛나는 검면을 손가락으로 튕기니 팅— 맑고 깨끗한 음색이 귀를 간지럽힌다.

옆에는 이모렐의 방어구도 한 벌 놓여있었는데 여자의 날씬한 몸매와 풍만한 젖가슴을 강조하는 듯 타이트한 디자인의 질리언트 종족용 가죽 갑옷이었다.

거기에 더해 하얀색 서코트 같은 외투까지. 전부 인챈트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상등 품질의 제품이다.

=이모, 한번 입어보렴.=

유르파의 요청에 입고 있던 드레스를 훌렁 벗어 알몸이 된 이모렐이 가죽 갑옷을 착용한다.

그러자 수박보다 커다란 젖가슴이 코르셋 형식을 차용한 가죽 갑옷 때문에 더욱 거대하게 강조되었지만, 그 위에 서코트 같은 외투를 걸치니 눈부신 금발과 하얀 날개 세 쌍 덕분에 약간 전투 수녀 같은 느낌도 났다.

부담스럽게 강조되던 가슴도 가려져 덜 부담스러워졌고.

=와. 역시 프라우드는 프라우드네요. 명품 느낌이 가득해요.=

그 모습에 잠시 감탄하던 아영도 벨과 함께 외출한 결과를 이야기했다.

=저는 벨이랑 같이 전투 보조 도구 상점을 쭉 돌면서 무한의 화살통을 구할 방법이 없나 찾아봤는데요. 시중에는 유통하지 않고 도시의 축제나 제작 경진 대회 같은 게 있을 때만 소량으로 푸나 보더라고요. 따로 구할 방법이 없었어요.=

=아영이랑 영주성에서 직접 관리하는 대장간도 찾아가 봤지만, 거긴 일반 판매를 않는 곳이었어요…….=

대신 활&화살 상점 몇 군데서 화살이랑 화살 재료를 잔뜩 구매해 재료까지 다합치면 대충 8천 발 정도 모았다고 아영이 이야기해주었다.

그 외에도 유르파가 가입한 조합이 도시에 들어서있지 않아 마도구는 많은 양을 팔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판매해서 벌어들인 약 50금화도 무구 구입에 다 썼다고.

많이 팔지 못해 조금 신경을 쓰는 유르파의 모습에 환인은 꽤 큰 목각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요즘 들어 지출은 식량과 약간의 기호품 구매에 쓰는 정도뿐이지 않습니까.”

기호품도 고급 과일이나 귀중하고 고품질의 채소, 술, 커피콩 등에 교단에서 판매하는 피임약 정도.

최근에 한 가장 큰 지출은 하얀 늑대들 운용비의 1000금화 뿐이다.

그에 비하면 수익은 계속, 그리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동 중 공격해오는 마물, 마수를 죽이고 회수하는 위상석. 암흑의 숲에서 이블팩션을 대량으로 쓸어버리면서 입수한 위상석에 방문한 도시에서 벌어진 민폐를 사죄하는 사례금과 유르파가 계속해서 마도구와 마도기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 등.

현물까지 다 합치면 보유 금화가 1만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금 주괴로 만들어 지구에서 판다면 64억에 가까운 돈.

「그래서, 프라우드 왕자한테 받은 이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데?」

환연이 목각 상자 위에 서서 하는 질문에 여자들의 시선도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던 상자로 향했다.

“글쎄. 간소한 선물이라고 하던데.”

드레스 상자처럼 꽤 큰 목각 상자가 열리자 물건 세 개가 드러나고 그중 하나를 본 아영의 눈에서 희열이 번졌다.

=무한의 화살통이에요!=

상당히 컴팩트하고 무난한 원통형 디자인, 현대의 국궁 화살 가방과 비슷한 검은색 가방은 둘레로 따지면 성인 남성이 양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이는 1m 정도로 통상 화살 규격보다 조금 짧은 수준.

딸칵.

화살통을 들어 상단부의 뚜껑을 열자 경첩 같은 것이 젖히며 내부가 드러나는데, 아공간 가방처럼 안쪽은 어두컴컴해서 잘 안 보이지만 화살깃 끄트머리만큼은 눈에 들어온다.

묵빛 광택의 금속제 화살깃을 본 안느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철 화살이잖아? 왕실 납품용인데 이거.=

=그러니?=

=응. 철시랑 골시는 왕실 납품용으로 1년에 하나둘 정도밖에 안 만든다고 들었어.=

안느의 설명을 들으며 화살 한 발을 뽑아본 환인은 4척, 약 120cm 정도 되는 날렵하고 매끈한 철시鐵矢의 자태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도 약간 묵직한 것이 강한 장력을 가진 신비궁으로 쏘면 훌륭한 위력이 나올 것 같다.

=으응? 자기, 나도 화살 하나만…… 역시, 화살에 관통 강화가 걸려있어. 이걸 신비궁으로 쏘면 철 골렘도 꿰뚫겠다.=

“그러면 이건 백려강이 쓰고 기존 아공간 화살통은 이모렐에게 주면 되겠군요. 사둔 8천 발의 화살은 둘이 연습용으로 쓰고.”

무한의 화살통을 여자친구들에게 넘겨주자 유르파가 중간에 가로채서는 분석용 외눈 안경을 꺼내 화살통을 살펴본다.

급기야 화살통을 뒤집어 탈탈 터니 철 화살이 우수수 쏟아지는데 그 숫자가 400에 이르렀다.

상등품의 무한 화살통은 하루 200발을 생성한다고 했으니, 왕실 납품용이기도 한 저 화살통은 당연히 최상등품이겠지.

환인은 다시 목각 상자로 시선을 돌려 너클 같은 게 붙은 손목 보호대를 들었다.

금속을 실처럼 얇게 뽑아 만든 듯한 묵빛 보호대는 보기만 해도 범상치 않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약 1.5m 길이의 한 자루 검.

“…….”

묵빛 검 자루와 한 쌍인 듯한 묵빛 목검집에서 검을 뽑아보았다.

검날도 묵빛이었는데 묵빛 검면에는 흡사 조선 시대에 제조되었던 벽사辟邪용 도검인 사인검처럼 기이한 무늬가 은색으로 길게 그려져 있었다.

더해서 검 자체가 은은한 열기를 발산하는데 이것도 평범한 검은 아니겠지.

“아영, 이걸 한번 착용해봐라.”

그녀에게 손목 보호대를 넘겨주자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던 아영이 왼쪽 손목에 착용한다.

그리고 그녀가 보호대에 위상력을 불어넣은 순간, 삽시간에 그 부피를 늘려나가서는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상완까지 빈틈없이 뒤덮어버렸다.

아영이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손가락이며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곤 환인에게 당황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이, 이거 변모권갑이에요. 흑철의 전투사이면서 권각술의 달인인 다루그 왕자의 애병이라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면 거인숲 미궁에서 무장을 해제할 때 저 권갑과 흡사한 철제 건틀릿을 내려놓았었지.

환인의 시선이 무한의 화살통과 보호대, 검을 한 번씩 훑었다.

‘다루그 왕자의 여동생은 이쪽의 장비 사정까지 짚어내고 있었나 보군.’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 맞춘 것처럼 ‘간소한’ 선물을 줄 리 없다.

환인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이실리테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다루그 왕자의 무기는 금속제 건틀릿이었다. 네가 낀 건 아대 모양에 질감도 실이니 그의 무기를 개량했다거나 양산한 제품인 거겠지. 아대는 아영 네가 쓰고 검은 이실리테가 써라.”

=앗…… 감사합니다, 주인님.=

=우와! 오빠 싸랑해용!=

환인은 답삭 안겨 온 아영의 등을 두드려주며 새 장비를 갖게 되어 기쁜 듯한 이실리테와 백려강을 바라보았다. 이모렐도 새로운 장비에 알게 모르게 살짝 들뜬 기색이다.

본론만 주고받다시피 한 짧은 접견, 그리고 절대 ‘간소’하지 않은 선물.

‘앞으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인가.’

=유르파 언니! 이것도 분석해주세요!=

=이 검도 부탁드릴게요.=

=저, 저도요…!=

=그래그래~ 이 언니가 몹쓸 비술이 부여되어있진 않은 지 꼼꼼하게 살펴봐 줄게~.=

=그런데 와, 보호대랑 화살통만 해도 1000금화 가까운 값어치일 텐데 이런 걸 막 선물로 주네. 이슬이 검도 모르긴 몰라도 저 두 개랑 비슷한 급일 거 아냐. 아무리 봐도 간소한 선물이 아닌데?=

「뇌물 아냐?」

=뇌물보다는…… 주인님께 잘 보이고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그런 느낌이었어.=

=히야. 메리아놀의 왕족도 설설 실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오빠라니…….=

=오라버니는 아신님이시잖아.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오라버니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으니까.=

소파에 등을 파묻고 들뜬 여자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비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큰둥하던 노른이 그의 무릎 위에 앉는다.

환인은 노른의 쓰다듬기 좋은 녹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이쪽을 이용하려 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으니 그 뜻에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루그 왕자는 크샤나리 왕자와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듯하였다.

아마도 그에게 오늘 있었던 일 일부를 그에게 전해주겠지.

알세이시스의 직할지는 패시지의 북부에 있다던가. 직접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은데

품에 쏙 안기는 아담한 체구의 노른을 끌어안은 환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후의 일정을 다시금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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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엄지 발가락을 가구 모서리에 찍었는데 살이 살짝 찢어졌읍니당...

지옥의 고통을 느낌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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