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
탁,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릴 들으며 환인은 앞으로 얼굴도 좀 바꾸는 게 좋을까 생각했다.
반로환동 이후 피부가 아기처럼 깨끗해졌다. 덕분에 귀를 늘이고 머리카락 색만 바꿔도 사람들이 플뢰로 알아보았는데,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정체가 들킨 것 같으니까.
이외에 마차도 제법 특징적이고 쿠에들의 숫자도 비교적 뚜렷하고…….
집사장의 말대로 머리에 기억해두고 알아보려 했다면 모를 수 없는 흔적.
뭐,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자 기분이 좀 그렇다.
변신의 팔찌를 아스펜드에 넣은 환인은 집사장과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응시했다.
“집사장님의 방문을 드로거스 왕가의 뜻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예. 드로거스 왕가의 첫째 왕자님께서 성제님을 뵙고자 청하셨습니다. 말도 없이 직접 찾아뵙는 것은 민폐이며 결례라고 생각하여 대리인으로 저를 보내신 것이지요.=
그러며 품에서 반듯하고 깔끔한 편지를 꺼내 환인에게 두 손으로 내미는 집사장.
지배인의 반응을 보면 집사장이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결례 같지만, 왕자라는 입장에서는 최대한 절충한 인물이 집사장이었겠지.
탁자에 놓인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뜯어 내용을 읽어보았지만 평범하게 정중한 어조의 초대장이다.
편지를 내려놓은 환인은 담담히 집사장에게 말했다.
“두르데인에 오래 머물지 않을 예정이라 이런 초청장을 받아도 곤란하기만 할 따름이군요.”
=바쁘실 거라는 점은 왕자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부득이 왕림하여주시길 바라셨으니, 혹 거절의 뜻을 비치신다면 이것을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환인이 담담한 시선을 마주하자 집사장의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결명회.=
“…….”
결명자는 단순히 소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나. 환인은 졌다는 듯이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고 내려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연히 차원 관리국 요원이 운영하는 창관을 발견하여 핵심 인물을 나름 제압해놓았습니다만, 괜한 참견이 아닌가 걱정이 듭니다.”
=…민폐를 끼쳐 송구합니다. 어디인지 말씀해주신다면 즉시 정리하여놓겠습니다.=
“자료와 증거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안느, 그자들과 그것을 가져와서 집사장님께.”
=네.=
어젯밤 수집해놓은 증거를 넘겨받은 골터는 환인이 위층에서 준비하는 사이 바위처럼 딱딱해진 얼굴로 동행한 기사들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렸다.
중급 거리의 창관 하나는 오늘이 가기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영주성 직할의 창관이 들어서겠지.
환인과 영혼 기사 둘(플러스 정령)을 실은 영주성의 고급 마차는 호텔을 나온 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경비와 경계가 삼엄한 영주성에 입장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성에서 가장 깊고 안전한 장소로 안내된 환인은 중정식으로 작게 꾸며진 정원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두르데인 영주성은 성이라기보다 산 안쪽에 지어진 성채의 느낌으로 무척 웅장했는데, 이곳 정원은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작고 소박하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아름답게 정원을 비추는, 딱 봐도 자신과 안느를 위해 일부러 고른 듯한 장소.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며 안느가 중얼거린다.
=프라우드족의 성이라서 그런지 역시 웅장하네.=
=안느, 드로거스의 왕자라면…… 거인숲 미궁 앞에서 봤던 그 프라우드족 맞지?=
정원에 환인과 남게 된 이실리테는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안느에게 묻는다.
=응. 다루그 오얀 드로거스. 내가 패시지를 떠나기 전부터 흑철의 전투사로 명망이 높은 왕자였어.=
플뢰족의 하얀 나뭇잎과 함께 메리아놀 양대 무력이라 불리우는 흑철의 전투사. 그러면서 7대 왕가중 한 곳의 왕자.
=그런 사람이 왜 여기까지 부른 걸까.=
=아까 집사장이 결명회라고 언급하더라. 결명자와 관련된 정보를 전해주려고 그런 거 같던데.=
환인이 집사장과 대화를 나눌 때 문 앞을 틀어막고 있느라 듣지 못했던 이실리테가 아, 하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다루그 왕자…… 세간의 평가로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폭급한 성정이라고 들었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일부러 자기 본모습을 숨긴 듯한 느낌이야.=
=드로거스 왕가가 가장 먼저 패시지를 떠났잖아. 혹시 오래전부터 결명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거나…….=
=글세? 적어도 도령이 누굴 적대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는 거 같으니까. 오늘 접견으로 드로거스 왕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게 될 거야.=
메리아놀의 일곱 왕가 중 한 곳이 적일지 아군일지 아니면 중립일지, 잠시 후 이 자리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그야말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듯한 중년의 핀겔 프라우드족 남자가 호리호리한 셀핀 여시종 한 명만 대동한 채 정원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특색 없는 전사 아우라가 흡사 바위처럼 단단한 기운을 정원에 한가득 퍼트렸다.
8급에 가까운 7급의 전사. 프라우드족에서 무력으로 세웠을 때 한 손가락 안에 든다는 흑철의 전투사 서열 2위, 다루그 오얀 드로거스.
하지만 이 장소에서 그런 아우라에 영향을 받을 사람은 없다.
정원에 들어선 다루그 왕자는 안느, 이실리테를 차례대로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정원을 구경 중인 환인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가 작게 목례했다.
=그날 이후 처음 뵙는군. 오랜만이오, 성제.=
“오랜만입니다, 다루그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환인이 먼저 손을 내밀자 다루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잘 지내지 못하였소. 머저리들이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니 패시지가 곧 무너질 폐광처럼 느껴졌거든.=
“그래서 드로거스 왕가가 두르데인으로 자리를 옮긴 거군요.”
=맞소. 탈출이라 해도 무방하지.=
쓴웃음을 다시 한 차례 지은 다루그 왕자는 환인과 함께 티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집사장을 보낸 것을 사과하겠소. 본래는 내가 직접 가려 했지만 아랫것들이 필사적으로 막아서 말일세.=
“다루그 왕자께서 직접 오셨다면 이만저만 소란이 아니었겠지요.”
=그런가.=
흐, 하고 웃음을 흘린 다루그는 바위처럼 묵직한 표정으로 되돌렸다.
바위를 깎아 만든 티 테이블에는 여시종이 조용히 차와 과자를 세팅하고 물러난 상황. 하지만 다루그는 차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런저런 겉치레는 익숙하지 않고, 성제도 그런 허례는 안 좋아하는 듯 보였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혹시, 성제는 두르데인을 쓸어버릴 생각이신가?=
“두르데인을 방문한 이유는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두르데인의 소멸이나 몰락은 없습니다.”
=그런가. 한시름 놨군. 어젯밤 성제가 두르데인에 입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내가 모르는 악폐습이 성제의 화를 돋웠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네.=
진심으로 고민했었는지 다루그 왕자의 중후한 표정에 안도가 깃든다.
환인은 작게 웃음 지으며 다루그 왕자의 이야기를 부정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시 하나를 통째로 쓸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습을 답습한 영주와 무능한 영지 관료들의 목은 망설임 없이 따버렸지. 지금 헤뷜트에서 벌어진 내전도 성제의 작품이라고 난 믿고 있소. 아랫것들은 도통 믿지 않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다루그 왕자였던 듯하다.
환인이 말없이 작은 웃음을 유지하고 있으니 다루그 왕자는 골치가 아픈지 평범한 성인 남성의 손보다 5배는 더 크고 두꺼운 손으로 조금씩 흰머리가 생겨나는 머리를 쓸어 넘긴다.
=현재 패시지 협의회의 정책 방향은 도통 이해되지 않소. 성제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무서운지 나와 크샤나리가 그토록 언급했음에도 병신같은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오. 이건 숫제 자살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질 지경이라니까.=
“그렇습니까.”
=아신이 출현한 것은 근 천년 만인 것으로 알고 있소. 당시 기록된 아신에 대한 자료도 소상하지 않지. 그 때문에 그대를 얕보는 자들이 많은 게 아닐까 싶은데…….=
말하던 다루그 왕자는 두드러기가 솟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거인숲 미궁 앞에서 성제가 보여준 혼령주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하면 지금도 두드러기가 솟을 정인데 지금은 아신이 되지 않았나.
아무리 여휘께서 역장을 펼쳐놓았다지만 성제라면 패시지를 무너트리고도 남을 힘을 지녔다고 그는 믿고 있다.
=적어도 성제와 적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메리아놀에 최소 두 명이 있소.=
“다루그 님, 크샤나리 님이십니까.”
=음. 알세이시스 왕가에서는 크샤나리가 강하게 주장하여 일족을 이끌고 있지. 드로거스 왕가는 내가 끌고 있고. 그 밖으로 보면 교단도 추기경 한 명이 성제와 마찰은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고, 미리아스툼 왕가에서도 갓 가주에 오른 엘레델이 성제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던데…….=
기억을 되새기듯 이야기하던 다루그 왕자는 조그맣게 고개를 흔들고는 환인을 향해 맹세했다.
=맹세하겠소. 드로거스 왕가는 성제를 절대 적대하지 않을 것이오. 혹여 우리에게 못마땅한 점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대신 두르데인은 부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시군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다루그 왕자의 모습에 환인은 이러려고 자신을 불렀던 건가 생각했다.
환인은 먼저 고개를 숙이고 전면적인 화평을 요청하는 다루그와 대립할 생각은 없었기에 먼저 손을 내밀었고, 다루그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환인과 악수를 하며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다루그는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골터에게 듣기로 차원 관리국의 쥐새끼들을 발견해 증거를 모아주었다지. 고맙다고 인사하겠소.=
“저도 그자들은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드로거스 왕가도 관리국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봅니다.”
=관리국은 투르시온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곳이오. 남의 미운 집 자식새끼들이 우리 집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것만큼 싫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리 말한 다루그는 단정하게 깎은 산적 수염을 쓸어내리다가 으음, 하고 답답한 침음을 흘리고는 한 가지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결명회 말이오. 성제와 적대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던 도중 성제의 선언을 듣고 알게 된 것인데, 내가 보기에 결명회가 성제의 최종 목표인 걸로 보였소만, 맞소?=
“그렇습니다. 메리아놀이 차원 방랑자 소환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한 소환 실험을 하는 자들이 결명자라 부른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솔직히 결명회라는 것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넌지시 이야기해주자 다루그가 상처 입은 야수처럼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두르데인으로 이전을 추진 중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 아니, 가십에 가까운 소문인데 듣고 보니 성제가 선언한 것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말이오. 나름 조심스럽게 조사하며 손에 넣은 정보가 있는데 도무지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나 성제가 그리 말하는 걸 들으니 가십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확신이 드는군.=
“무엇이었습니까.”
=메리아놀 어딘가에서 묘한 실험으로 신의 힘을 얻고 모종의 대지를 얻으려 한다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었소. 그리고 ‘우연히’도 결명회라는 집단이 암약 중이라는 것도 들었지.=
성제의 분노와 선언, 묘한 시기에 입수한 가십거리, 거기다 결명회라는 이면 집단까지.
셋 중 하나만 터졌다면 우스갯소리나 흔한 음모론이라 치부했을 텐데 세 가지가 동시에 벌어지자 다루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고.
=그 소문도 저잣거리에 퍼진 것이 아니고 사교계의 비밀 클럽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것이라는 게 의심을 부채질하더군. 그리고 결명회는 차원 관리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게 우리 추측이오.=
이것이 오늘 초대의 본론인가.
환인도 팔짱을 끼고 미간을 좁혔다.
차원 방랑자 관리국. 푸른 나뭇잎의 탑. 결명자와 결명회. 지하율. 강제 소환. 모종의 실험.
투르시온 가문.
투르시온 가문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잠시 일부러 뜸을 들인 환인은 다루그 왕자를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현 상황과 하얀 늑대들이 수집해온 정보, 그리고 자신이 하나씩 모아온 조각을 펼쳐보면 다루그 왕자는 결명회와 연관이 없는 걸로 보이지만…….
눈을 잠시 감았다 뜬 환인은 신식 영혼의 눈으로 다루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다루그 님은 여휘라는 분을 뵌 적 있으십니까.”
=있소. ……혹시 성제는 그분이 결명회와 연관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역장을 도시에 두르고 몇 년 몇십 년 침묵 중이신 것을 보면 의혹이 멈추지 않습니다.”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루그 왕자는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정원을 서성이다가 자리에 다시 앉아 말했다.
=이성은 답을 아끼라고 하지만, 감성은 이렇게 말하라 부추기는군. 적어도 내 생각에, 결명회라는 집단이 정녕 존재한다면 여휘 님은 그자들과 결코 손을 잡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그자들을 박멸하는 데 앞장서시겠지.=
“그렇습니까.”
저 말도 진심이다. 다루그는 모사가라기 보다는 우직한 장군 타입이다.
그가 저리 확신을 담아 말할 정도라면 몇 명을 통해 더 확인해본 다음 결정을 내려도 되겠지.
“다루그 님. 오늘 여기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말하며 그의 뒤에 선 시종을 쳐다보자 다루그 왕자는 심유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제는 어설픈 조력보다 침묵을 바라실 거라 믿소. 드로거스 왕가는 성제 그대의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두르데인에서 결코 나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소. 그리고…….=
드로거스는 자신의 옆에서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여시종의 손을 잡아 탁자로 가까이 당기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나의 배다른 동생이자 내가 가장 아끼는 지혜 주머니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중요한 조언을 해주는데, 성제를 이 자리에 초대하여 흉금을 터놓으라는 조언도 이 아이가 해주었지. 성제와 나의 대화가 한 마디라도 유출될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다루그 왕자는 핀겔 프라우드다. 여시종은 가녀리고 호리호리한 셀핀 프라우드에 얼굴도 닮지 않았기에 남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설마 배다른 남매였을 줄이야.
신식 영혼의 눈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루그 왕자도 같이 자리에 일어나 이렇게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그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아, 잠시 기다려주겠소? 간소하나마 선물을 준비하고 있으니 부디 받아주었으면 좋겠군.=
* * * *
성제가 간소한 선물을 받고 돌아가는 것을 성채의 가주 집무실에서 바라보던 다루그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앞머리를 다시 쓸어넘겼다.
전대 국왕이자 미리아스툼의 가주이신 그라파든 공이 훌쩍 떠난 뒤 아버지까지 자리에서 물러나시며 자신에게 가주직을 이양하셨다.
현재는 이른바 적응 기간이기에 아직은 1왕자로 불리고 있지만, 조만간 정식 가주직 계승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덕분에 수월히 패시지에서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오늘 같은 일이 몇 번 더 벌어지면 다시 아버지에게 가주직을 던져버리고 싶어질 것 같다.
다루그는 자신의 뒤에 다소곳이 선 흑갈색 머리카락의 미소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기. 네가 보기에 성제는 어떠했느냐.=
=표리일체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 대답보다 좀, 현 상황에 도움 되는 조언을 듣고 싶다만.=
=그러면 그렇게 물어보셔야죠. 원하는 답과 다른 질문을 던지시면 어떡합니까?=
배다른 여동생의 힐난 어린 시선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던 다루그는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서? 성제가 정말 패시지를 뭉개버릴 거라 생각하나?=
=…….=
그의 질문에 나기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하던 성제의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리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허허. 네 입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인데.=
아무리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더라도 나기에게 물어 나온 조언을 바탕으로 행동하면 결과는 늘 좋았었다.
그런 지혜의 축복을 받은듯한 여동생이 모르겠다 대답하다니.
=정말…… 정말 그분의 속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북극의 한겨울 바람처럼 차갑고 또 어떻게 보면 한여름 동해 바다처럼 따스하기도 하다.
한 사람이 정 반대되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미쳐가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성제는 그 두가지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미쳤거나 미쳐가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살아서 아신위에 오른 사람의 특징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이것은만큼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가까이해서도 안 됩니다. =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간 십중팔구 그의 색에 물들어 미치거나 아니면 추종하게 될 것이다.
왕이 되어야할 오라버니에게 그 두가지는 절대악과 마찬가지. 성제를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동생의 진심이 가득한 대답에 다루그는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크샤나리 그 녀석에게도…… 이야기해주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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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당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