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
잠시 기다려서 받은 보고에는 뜻밖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아니, 뜻밖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던 내용이다.
주도의 지배력이 약화하며 도시와 주도 간에 발생하는 불협화음.
콜라이도와 시레세아는 주도의 개입 전에 강혁준 사태가 수백 명의 처형으로 끝을 맺었고, 몰드레테에서는 주도에서 보낸 심판관들이 차원 방랑자를 어찌하려다 도시에 대량의 파괴 행각을 벌였다.
엘위드리스에서는 도시 몰락에 주도의 작당이 있었다는 게 발각되기까지 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면 지도부의 무능함에 레임덕을 넘어 탄핵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의 연속.
하지만 메리아놀은 일곱 왕가, 더해서 스물 남짓한 협의회 의원들이 이끌어간다.
어떻게 소문은 무마하고 있는 듯하지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메리아놀 핵심부에서는 논란과 분란이 번지고 있다는 보고.
[두르데인은 드로거스 왕가의 직할지입니다. 현재 드로거스 왕가는 주도의 협의회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주도의 왕실에는 일부만이 머무르고 있을 뿐, 왕가의 가주를 포함하여 대다수 가문원들은 두르데인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수십이나 되는 종족이 부대껴서 살아가는 메리아놀에는 플뢰족 왕가 넷, 프라우드족 왕가 셋이 존재한다.
정령精靈 가문의 미리아스툼.
점성占星 가문의 투르시온.
영림英林 가문의 포르미살드.
성검聖劍 가문의 알세이시스.
흑철黑鐵 가문의 드로거스.
지모知募 가문의 옴바드.
천렵天獵 가문의 알콰닌.
메리아놀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기여와 희생을 한 플뢰족과 프라우드족을 존중하고 존경하기에 다른 종족에서는 왕가가 나오지 않으며, 플뢰족과 프라우드족 왕가에서만 국왕이 선출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일곱 가문은 크고 작은 영지를 지니고 있는데 노천광산 도시인 두르데인은 드로거스 왕가가 다스리고 있다는 이야기.
물론 영주가 드로거스의 가주는 아니지만, 현 영주는 드로거스 가주의 지시를 받는 위치다.
그런 드로거스 왕가는 주도에서의 입장을 대부분 정리하고 두르데인으로 근거지를 옮긴 상태라고.
[드로거스 가문뿐만이 아닙니다. 주도에서 멀어지고 있는 가문은 두 곳이 더 있어 한 곳은 알세이시스 왕가, 다른 한 곳은 미리아스툼 왕가이며 두 곳도 마찬가지로 기반을 주도에서 직할 영지로 이전 중이라 합니다.]
얼마 전까지 두 왕가의 주도 왕실과 직할지의 병력, 전력, 금력 비율이 7:3이었다면 현재는 4:6정도로 역전되어 분할해놓은 것.
[추가로 주도에 잠입한 첩보원들의 첩보 활동에 미리아스툼, 알세이시스, 드로거스 세 곳 왕가는 성제님과의 분란을 적극 회피하려는 낌새가 수집되고 있습니다. 투르시온 가문은 현재 둘로 갈라져 언쟁과 반목을 하는 중으로 파악됩니다만 신빙성은 낮은 것으로…….]
알세이시스와 드로거스. 환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문명이다.
크샤나리=루올=알세이시스 왕자와 다루그=오얀=드로거스 왕자. 거인숲 미궁 앞에서 만났던 메리아놀 사절의 특사 두 명.
환인이 계속 눈을 감은 채 앉아있으니 통신수정구 화면 너머에서 엘미느가 그를 힐끔거렸다.
“옹호파와 제거파가 두드러지고 있다더니 그 균열이 본격적으로 심화되고 있나 보군요.”
[예. 특히 알세이시스와 드로거스 왕가는 거인숲 미궁에서 성제님과 조우한 이후 성제님의 행보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던 차에 아신위에 오르시고 메리아놀과 적대적인 방침을 취하시니 대적을 피하고자 힘쓰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음, 내막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오빠가 알린 메리아놀의 부정부패 정보의 여파가 메리아놀 협의회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여요.=
거기에 환인의 능력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겁먹은 인사들은 그를 옹호하며 지금이라도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과격한 인사들은 사태 파악이 느린 멍청이들이나 자존심이 높고 강한 자들이 국가로서 입장 때문이라도 고개 숙일 수 없다는 쪽으로 대립 중이란 이야기.
아영이 첨언을 붙이자 엘미느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제님 본인을 어쩌지 못한다는 건 옹호파, 제거파 양쪽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오빠가 죽기라도 하면 최소 메리아놀은 소멸이니까. 제거도 오빠가 아니라 오빠 주변의 연결고리를 없애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죠.=
=두르데인이 패시지의 불행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현재 분위기는 주도의 국왕과 협의회하고 노선을 달리한 증거라는 이야기네.=
[그렇습니다.]
유르파의 이야기에 엘미느가 긍정하자 여자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환인을 어찌하진 못하니까 자신들을 죽이거나 납치해 그의 활동을 축소시키겠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자신들이 죽거나 쓰러지기 전에는 그가 다칠 일은 없다는 이야기지 않은가.
“네 곳 교단의 행보는 어떻습니까. 미리아스툼 왕가의 상황과 땅신 교단의 최근 동향도 필요합니다.”
[먼저 바다신님의 교단은 헤뷜트의 내전이 격화되어감에 따라 잠정적으로 교단 연합에서 빠지겠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구주의 독니가 소멸 직전 터트린 극비문서로 인해 부족 간 원한 관계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고 있는데 바다신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도 그러한 여파에 휘말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러다 벨티칼의 국력이 반토막이 아니라 1/4토막 날 위기 상황이라던가.
구주를 잃은 조언자가 제대로 폭탄을 터트린 셈이다.
[짐승신님 교단과 하늘신님 교단은 주도 패시지 협의회의 내부 분란에 한발 물러서 사태를 관망 중으로 보입니다. 내부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성제님을 암살하려 한 배후의 수사를 진행하더라도 혼선이 빚어질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땅신님의 교단은…….]
땅신 교단의 막내 추기경, 르아웬=아기오시스가 미리아스툼 왕가의 현 가주 엘레델=슬라인=미리아스툼과 밀약을 맺고 패시지의 심문 기관과 심판 기관, 정보 기관이 제멋대로 활동하거나 주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억누르는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온다.
“…….”
자신의 생각보다 추적자와 습격자가 적은 게, 교단의 견제에 내부 파벌끼리 알력과 간섭을 벌이고 있기 때문인 건가.
환인이 광명창의 코어를 볼펜처럼 돌리며 생각에 잠겨있으니 안느가 손가락을 몰래 꼬물거리면서 엘미느를 힐끔거렸다.
애써 궁금증을 억누르고 있던 르아웬과 엘레델의 소식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왔더니 얌전히 있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챈 엘미느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약간, 성제님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실지 몰라 보류한 정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땅신 교단의 르아웬 추기경이 미리아스툼 왕가의 엘레델 가주와 관계가 깊어진 게 아닐까, 밀회하는 모습이 몇 번 포착되었습니다.]
=에엥?! 르, 르아랑 오빠가……?=
[두 분께는 하나의 공통 관심 분야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인연이 된 게 아닐까 하고.]
너무 놀라 소파에서 반쯤 일어난 안느에게 엘미느가 시선을 주자 다른 여자들도 그녀를 쳐다본다.
=……어, 뭐 둘이면 쿵짝이 잘 맞긴 한데……….=
남자는 관심도 없다던 르아가 정령에 미친 그 인간을 좋아하게 됐다고?
박수도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 십수 년째 일에 파묻혀 살던 르아. 그리고 정령에 미쳐서 정무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정령에만 온 신경을 쏟느라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그 인간.
‘안 믿기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신호를 주면 즉시 패시지를 빠져나올 준비를 해두십시오.”
[예, 성제님.]
가타부타 대꾸 없이 환인의 지시를 받아들인 엘미느가 수정구에서 모습을 감춘다.
투명해진 수정구를 챙기면서 아영은 이해되지 않는 기분에 으음,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타르반시올 국왕, 그 톨마이어란 인간의 행보가 이해 안 되는데…….=
=진짜 사이네가 그 인간의 숨겨진 딸 같은 거 아니니? 그래서 가문이 하려는 일을 반대하고 나서는 중이라던가.=
내일 시장이나 조합에 가서 판매할 마도구를 분류하던 유르파가 묻자 환인이 손을 털듯이 손뼉을 치고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은 좋습니다. 여러 집단이 서로를 견제하며 적당히 고착되어있다면 그사이 아드네빌라를 찾은 다음 계획을 진행하는 데 편하니까요.”
가까이 다가온 이실리테에게 천릉의 코트를 벗어 장갑과 함께 넘겨주며 창문 너머를 돌아본다.
알세이시스와 드로거스인가……. 그 두 곳은 어쨌든, 들어오는 정보를 확인하며 때를 봐서 미리아스툼 가문에 경고를 주어야겠지.
주도를 떠나라고.
엘미느와 통신을 종료한 환인이 저녁 식사에 이어 여자친구들과 함께 목욕하며 피로를 풀고 있을 때.
김철수와 김영수는 환인의 허락을 받고 환락가를 걷는 중이었다.
상급 상업 거리여서 환락가도 온통 고급투성이. 건물 전체에 피임과 방음 술법은 기본이며 제법 신경 쓴 고급 창관은 질병 내성까지 부여해놓았다.
외부 인테리어도 그에 걸맞게 고급스러운 살롱이나 칵테일 바처럼 꾸며진 곳이 대다수인데다 가로등의 불빛이 건물 외벽을 비추니 도저히 환락가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
소시민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풍경에 김영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감탄한다.
“이야, 상급 거리는 상급 거리네. 삐끼도 없어.”
“쓰읍. 화대가 좀 많이 비싸 보이는데…….”
호텔 라운지에서 안내원에게 환락가 위치를 묻고 찾아오긴 했지만 어째 하나같이 화대가 비싸 보인다.
건물 바깥, 야외 라운지처럼 꾸며놓은 곳에 앉아있는 화류계 여자들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라 하룻밤에 금화 단위가 들 것 같다고 할까.
=후후후.=
“헤헤헤.”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던 약간 퇴폐미가 느껴지는 플뢰 여성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김철수는 저도 모르게 헤헤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은색 반짝이 홀복은 허벅지는 물론 골반까지 드러내는 옆트임 드레스였는데, 그걸 입고 다리를 꼬니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거다.
“으음.”
김철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잡히는 동전 세 개를 주물럭거렸다.
지금 가진 돈은 3금화.
이쪽에 손을 흔들어준 여자가 소속된 듯한 창관은 여러 인종을 받는지 플뢰족에 셀핀도 있고 루크랑 여자도 보인다.
종족 입장 제한은 없어 보이니 들어가는 데는 문제 없겠지.
‘하지만 화대가…….’
고민된다. 급은 조금 떨어지지만 중급 거리로 내려가서 괜찮은 창관을 찾아 길게 놀 것이냐, 그냥 봐도 텐프로급 같은 저곳으로 가서 하룻밤 반짝 놀 것이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철수는 루크랑 족 창녀의 웃음에 헬렐레하는 김영수의 어깨를 퍽 때리며 말했다.
“야. 중급 거리로 가자.”
“역시 그렇지? 딱 봐도 얼굴 이쁜 게 콧대 더럽게 높아서 서비스 별로 일거 같음.”
“신포도냐?”
킥킥 웃으면서 골목길로 들어선 김영수는 공간 지각으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중급 거리로 공간도약을 펼쳤다.
어차피 이 세계 여자들의 미모는 추녀로 분류되어도 지구에서는 모델 일을 할 수 있을 수준이다.
둘은 텐프로에서 하룻밤에 3천만 원을 쓸 바에 쩜오에서 300만 원을 쓰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부류.
=어머, 오빠들 멀리서 왔나 보네~.=
“엄청 멀리서 오느라 잔뜩 굶주렸거든. 여기 질병 내성이랑 피임 술법 걸려있는 곳 맞지?”
=그러엄! 요즘 딴 건 몰라도 질병 내성하고 피임은 필수잖아~. 얘! 멀리서 귀한 손님 오셨으니 손님 받아~!=
마담과 함께 창관 건물에 들어선 두 김씨는 입을 살짝 벌렸다.
겉이 깔끔하고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가는 창관이길래 고른 건데, 내부가 무슨 고급 창관 수준이지 않은가.
천장에는 대형 샹들리에가 환한 빛을 뿌리고 있고 벽 곳곳에도 밝은 오렌지빛 마도등이 켜져 흡사 대낮처럼 밝다.
그런데도 창관 특유의 묘하게 달콤한 분위기가 풍기니, 김철수는 남자를 끼고 오가거나 라운지처럼 꾸며진 홀 곳곳에서 대기 중인 아가씨들을 보며 혹시 화대가 비싼 곳이 아닐까 싶어 안내를 위해 붙은 남자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하룻밤 얼마야?”
=저희 가게 수질이 근처에서 가장 뛰어난 편이라서요. 아가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짧은 밤 2열은화에 긴 밤은 4열은화 정돕니다.=
‘다행이다.’
그 정도면 부담 없다. 아니, 오랜만에 여자 둘을 끼고 놀아볼까……?
영수를 돌아보니 이미 흰 고양이 귀에 꼬리가 둘 달린 루크랑 여성을 픽업해서는 자신을 향해 음흉한 얼굴로 엄지를 척 세우고 있었다.
짐승귀성애자 아니랄까봐.
똑같이 엄지를 세워주려던 김철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움찔했다가 방으로 이동하는 불알친구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켁! 뭐야. 왬마?”
“야, 따로 떨어지는 건 왠지 안 좋은 생각 같으니까 2:2로 가자.”
“……?”
다방 레지 하나 불러서 난교해본 적도 있으니까 별로 문제 될 건 없는데…….
저 새끼가 괜히 저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김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업원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렇게 김철수는 살짝 붉은 기가 감도는 기 센 언니 타입인 플뢰 여자를 소개받아 그녀를 선택했고 김영수는 이미 고른 흰 고양이 혈통의 루크랑 여자와 함께 넷이서 룸으로 향한다.
잠시 후면 오랜만에 회포를 풀 수 있겠지?
정말 간만에 여자 속살을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헤벌쭉 웃으며 종업원이 안내해준 2층 안쪽의 룸에 들어섰을 때, 헤벌쭉하던 그의 웃음은 짜증으로 변했다.
“에이 시발.”
방 안에는 척 봐도 어떤 기관과 연관되어있을 듯한 복장의 인간 셋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급수도 낮지 않다. 무려 4급 전사 하나와 4급 엽사 둘.
“뭐야 씨발. 사쿠라여?”
김영수의 짜증에 그와 김철수가 고른 여자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물러서 벽에 붙는다.
전투를 직감한 두 김씨가 정신을 집중하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말했다.
=잠깐. 아스트롤라보스, 그리고 김영수. 당신들을 적대할 생각은 없소. 잠시 이야기만 하자는 것뿐이오. 원한다면 이야기 후에 그 여자들을 같이 보내주지.=
김영수는 김철수를 돌아보았고, 김철수도 김영수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을 아스트롤라보스라 부르는 집단은 하나뿐. 어쩐지 입구에 여자도 그렇고 종업원도 우릴 힐끔거리더라니.
“여기가 관리국이 운영하는 창관일줄은 몰랐는데……. 국장 그 씨발년이 우릴 어떻게 폐기하려 했는데 이제 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관리국이 아니었으면 당신들은 각성은커녕 강제소환 당한 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그걸 구해주고 여자까지 붙여주어 호의호식시켜주었지 않소. 그 점을 생각해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면 좋겠소. 당신들에게 해가 될 제안은 하지 않을 테니까.=
“…….”
=미리 말해두지만 여긴 능력 발현을 방해하는 봉인진이 설치되어있소. 우릴 어찌하겠다는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도망가도 상관없지만, 그때부터 우리의 공개 수배가 떨어질 거란 것도 생각해두시오.=
복면 남자의 협박에 김철수는 끄응, 앓는 소릴 내며 머릴 긁적였다.
환연 누님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거면 환연 누님도 우릴 못 보고 있는 건가?
김철수는 잠깐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김영수에게 말했다.
“고고.”
“레알?”
“마드리드.”
그 말 직후 김영수는 0.1초도 걸리지 않아 공간도약과 동시에 4급 엽사를 붙잡고 재차 도약, 남자를 벽에 파묻어버렸다.
두터운 벽 속에서 튀어나온 한쪽 팔이 한순간 경련을 일으키다 멈춘다.
=뭣?! 어떻게……!=
4급 미만의 능력은 거의 봉인에 가깝게 틀어막고 4급, 5급이라 해도 능력을 방해받아 힘이 절반 가까이 깎는 봉인 지정 술법진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신 집중도 없이 공간 도약을!?
김철수와 대화하던 복면 남자는 김영수의 연속 공간도약에 깜짝 놀라면서도 무기를 빼 들었지만, 이실리테와 아영에게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대련을 받았던 둘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살짝 겁먹고 위축되었겠지만 지금은 온갖 고통을 맛보며 간이 커질 대로 커져서 즉사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머릴 차지하고 있기 때문.
그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어도 김철수와 김영수는 침착을 유지하며 둘을 상대했다.
김영수가 공간도약을 펼치려 해 모습이 깜빡일 때마다 전사는 검을 사방으로 휘두르고, 엽사는 김철수의 손짓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단검을 양손에 정수와 역수로 쥐고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엽사가 재빨리 연막을 뿌려 시야를 가렸다.
시야가 막히면 차원 전개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데서 나오는 대비.
회색의 짙은 연기가 방을 채우는 가운데 유일한 출입구를 틀어막은 김철수도 자신과 김영수의 앞쪽에 차원벽을 펼쳐두고 물었다.
“야, 공간도약 얼마나 막힘?”
“1/3정도. 너는?”
쉬쉭— 태탱! 견제인지 단검 두 자루가 정확히 머리 쪽으로 날아왔지만 차원벽에 막혀 툭툭 떨어진다.
“나도 비슷해. 쓰읍, 능력에 제약이 붙어서 생각한 대로 차원벽이 안 펼쳐지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팔다리만 뽑아봐.”
“시발. 눈감고 지각없이 도약 쓰라는 말하고 똑같거든 그거?”
“아니면 그냥 놔두고 튀든가. 지하에서 쫄따구들이 막 몰려오고 있거든.”
그냥 튀자고? 그럴 수는 없다. 섹스를 방해받은 원한 때문에라도, 다음에 또 외출을 받기 위해서라도 저 새끼 중 하나는 환인 형님한테 데려가야 하니까.
“에이 시발. 나가서 올라오는 새끼들 좀 막아봐.”
쓰읍 쇳소리를 낸 김철수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손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와 동시에 김영수가 옆에서 훅, 모습을 감췄다.
잠시 기다리자 문밖에서 쿵쾅 퍽, 우당탕 콰광, 기물이 부서지는 소리와 여자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저새끼 잡아, 죽여, 해치워, 고성을 들어보면 김영수가 캥거루처럼 공간도약을 하며 행패를 부리는 걸로 보인다.
복면 새끼들도 들었는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막 속에서 성난 외침이 연막을 뚫고 날아왔다.
=빌어먹을! 관리국을 적대하면 네놈들한테 미래는 없다!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나!=
쉬쉿- 틱! 티딕!
“어. 있을거 같은데.”
차원벽에 부딪쳐 떨어지는 바늘 암기를 힐끔 보며 대답하자 =허튼소리!=라며 악을 쓰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너희 새끼들도 내 차원 전개가 무서워 연막 속에 숨어있는 거잖아. 틀려?”
환인 형님만큼 멋지게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형님을 보면서 어떻게 능력을 써야 할지, 대국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배웠다.
=크윽……!=
“너희야말로 도망칠 생각 마라. 방 전체에 벽을 쳐뒀으니까.”
협박 겸 짧게 말한 김철수는 필요한 정신 집중이 끝났음을 느끼고 곧게 세운 검지와 중지를 검처럼 복면남들을 향해 휙 휘둘렀다.
그 손짓에 가슴 속이 살짝 허해지며 연막이 상하로 갈라졌고 으아악! 끄악?! 비명과 묵직한 살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터져나왔다.
“얼쑤!”
동시에 김영수가 연막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피묻은 강철 메이스로 두 놈의 사지를 내려쳐 분질러버린다.
=크아악!!=
=아아악—!=
“좋고 지화자!”
쿵더덕, 쿵더더더덕.
=끄아아아악!=
=그, 그만! 그마아아아악!?=
김영수가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바닥이 부서지는 소리와 복면남들의 비명이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연막이 서서히 흩어지더니 허벅지 아래가 석둑 잘린…… 잘렸다기보다 나뉜데다 양팔이 가루가 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복면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김철수는 무력화된 놈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부욱— 얇은 이부자리 천을 뜯어 두 놈의 주둥이에 처박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우리도 강해진거 같긴 하네. 생각하며 여자들을 돌아보니 괴물을 본 것처럼 서로 끌어안고 벌벌 떤다.
=히익!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사, 살려주세요……!=
반쯤 헐벗어 젖가슴이며 팬티를 드러낸 예쁜 여자들을 보니 성욕이 다시금 치솟는다.
“쓰읍. 돈도 내서 그냥 돌아가기 아까운데.”
“야, 저 여자들 데려가면 안 되겠지……?”
“데려가면 형님이 잘했다고 퍽이나 칭찬해주시겠다. 벽에 파묻은 저 새낀 죽었어?”
“어.”
“그럼 저건 냅두고 저 둘만 가져가자.”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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