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72화 (772/813)

772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

밤마다 야간 수중 전투 훈련을 병행하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던 일행은 마을이나 촌락에 들러 주변 지리를 묻지 않아도 길을 잃거나 헤매는 일 없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메리아놀 출신인 안느의 안내 덕분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도시가 있어요?=

=어. 노천광산으로 유명한 도시야. 프라우드족의 종족 도신데 셀핀하고 핀겔하고 다 모여있어서 무기나 방어구의 품질은 그곳이 대륙 제일일걸?=

완연한 아성체가 된 실루의 기동 훈련과 전투 훈련으로 빠진 이실리테를 대신해 고삐를 쥔 안느가 옆에 앉은 백려강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자 아영이 마부석 쪽 지붕에 납작 엎드리며 안느를 향해 엄지를 세운다.

=나도 메리아놀 도시랑 마을 위치는 대강 외웠는데. 언니님은 아예 지리까지 익히셨네요.=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에 몇 년은 본섬에서 활동했으니까. 출신이 출신이라서 정확한 지도도 있었고.=

북쪽을 돌아보는 백려강의 모습에 아영이 그녀의 푸른 물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벨은 두르데인에 가보고 싶어?=

=그 정도는 아닌데…….=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에는 팔라툼에서 구입한 화살통이 들려있었는데, 제법 많이 헤져있었다.

팔라툼에서 이곳까지 매일같이 화살을 뽑고 쏘며 연습하다 보니 화살을 넣고 뽑을 때마다 화살촉 같은 것에 긁혀서 마모된 모습.

백려강은 입구가 너덜너덜해진 화살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리 언니한테 여쭤봤는데 재료가 목재인데다 아공간 기능이 화살통이랑 일체화되어있어서 수리할 수 없다고 해. 신비궁의 화살 생성 기능을 써도 되지만, 화살 쏘기 연습은 실제 화살로 하는 게 좋아서…….=

=하긴. 넌 하루에 활시위를 자세별로 수백 번씩 당기니까.=

앉아서 쏘기, 서서 쏘기, 엎드려서 쏘기, 누워서 쏘기, 점프, 회전에 곡사와 직사에 회전까지.

활시위를 당기는 횟수만 보면 하루에 천 번이 넘는다.

거기에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화살을 아껴가면서 쐈음에도 200발씩 사두었던 각 속성 화살은 다 합쳐서 100발도 남지 않았고 1,000발을 사둔 일반 화살은 진작에 다 썼다.

지금은 도시나 마을에 들를 때마다 화살을 보충하고 있지만, 화살을 아예 팔지 않는 곳도 있어 화살 수급에 조금 애를 먹고 있다.

안느는 고삐를 쥔 채 도르와인 섬의 지형 지리와 도시, 마을 위치를 떠올리다가 점심 식사 시간 때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잠깐 노천광산 도시에 들르는 건 어때?=

“두르데인 말인가.”

=응. 벨이 화살을 꾸준히 만들고는 있는데 좀 부족한가 봐. 화살통도 슬슬 교체할 때가 됐고.=

“…….”

신비궁을 얻었지만 백려강의 궁술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다.

프슈드 백작은 궁사로서 완성된 인물이어서 실물 화살은 없어도 됐지만, 백려강은 아직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해 본격적으로 화살을 소모한다면 하루에 수백 발도 부족하다.

도르와인은 밀림이 가깝기도 하고 노천광산의 광맥이 풍부, 거기다 플라비우스족만큼이나 활을 많이 다루는 플뢰족이 있기에 두르데인에 간다면 대량의 화살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하면 두르데인에서 무한의 화살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무한이라니. 화살통에서 화살이 생성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응. 두르데인 가문에서 개발한 최상급 마도구인데 상등품의 무한 화살통은 하루에 200발씩 화살을 생성한다더라.=

물론 무한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면 5분 뒤에 소멸하고 200개 이상 늘어나지 않으며 1발 생성에 7분이 걸린다는 제한이 있지만, 무한의 화살통은 메리아놀의 궁사들이 갖고 싶은 물건 중 한 손에 꼽는다고.

환인은 살짝 고민했다.

아무리 두르데인에 장인들이 많아 뛰어난 품질의 장비가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여자친구들의 장비를 교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백려강, 아영. 환연과 노른.

여자친구들은 유르파가 제작한 마도기, 마도구로 온몸을 둘둘 감고 있기 때문이다.

이실리테는 미궁에서 획득한 무기와 의복을 입고 있지만 그 외 장갑과 신발, 목걸이, 귀걸이 등은 유르파가 제작한 방어 + 신체 능력 증폭의 마도기를 쓴다.

안느도 땅신 교단의 최상급 무구인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에 등대의 빛이라는 교단 지정 제복 마도기를 착용하고 있지만, 장신구는 유르파가 제작한 신체 강화와 정령력 강화의 마도기를 끼고 있는 상태.

둘 뿐만 아니라 백려강과 아영도 똑같다.

특히 아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옷마저 유르파가 만들어준 것을 입고 있으며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환연과 노른도 유르파가 짠 옷을 입은 상황.

7급 비술사인 유르파가 일행의 장비를 책임지다 보니 두르데인 시를 가더라도 장비를 바꿀 일 같은 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거다.

“…….”

현재 일행의 목적지는 도르와인 섬의 최동단, 곶처럼 튀어나온 곳의 해안도시다.

거기서 배 한 척을 구한 다음 패시지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바다 어딘가에 있을 아드네빌라를 찾는 게 당면한 목표.

안느의 지리 정보를 통해 경로를 다시 점검해본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중 훈련도 끝물이고 해안을 쭉 따라가는 것보다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거리로 보면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을 테지.”

=그럼 두르데인에 들렀다가 가는 거지?=

“그래.”

일정 변경을 허락하자 안느가 웃으면서 옆에 앉은 백려강에게 =잘됐네.=라며 옆구리를 쿡 찌른다.

‘이모렐이 쓸 방어구에 영령군이 사용할 무기 등도 미리 장만해놓으면 좋겠지.’

환인의 시선이 점심을 끝마치고 식기를 모아 설거지 중인 이모렐에게 향했다.

그녀가 사용 중인 육체는 중핵용 천인체라 맨몸으로도 6~7급 신체 강화 직업자만큼이나 강인하고 튼튼하다.

여기에 유르파의 신체 강화 장신구를 쓴다면 안느의 해머질을 맨팔로 막아낼 수 있을 정도.

그렇다고 방어구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능 좋은 방어구를 착용한다면 방어력은 더 오를 테니까.

환인은 이때까지 천인체를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드네빌라는 1년 정도가 지나면 육신이 썩어 문드러질 거라 장담했기에 적당히 쓰다 버리거나 유르파에게 연구용으로 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운이 겹치고 겹쳐 백려강처럼 이모렐도 천인체와 영육이 융합되어버렸다.

되살아난 것이다.

저 상황이 되었을 땐 라드세아에서 너무 멀어져 그녀에게 맞는 장비를 구할 수가 없었다.

천인체는 키가 2.5m에 이르는 데다 가슴도 한쪽의 무게가 10kg에 달할 만큼 크다.

여자이면서 이만한 신체는 라드세아 권역의 희소 종족인 질리언트 여성 정도.

히스론드, 벨티칼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기성품 방어구는 저 몸에 맞지 않는다.

주문 제작하려니 짧게는 2주에서 길면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기다려서 받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금속 방어구.

금속 방어구를 받아 유르파가 각인을 새겨 마도기로 만들 수는 있지만 길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데 시간 낭비가 너무 컸던 것이다.

‘메리아놀에는 온갖 종족이 지내니 저 몸에 맞는 방어구도 찾을 수 있겠지.’

점심 식사를 끝마친 일행은 방향을 바꿔 북상하기 시작했다.

노천광산 도시 두르데인으로.

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가야 할 거리가 조금 더 길어졌다.

대신 이동 시간을 늘린 덕분에 일행은 다음 날 저녁 즈음에 두르데인을 코앞에 둘 수 있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시각. 적당히 높은 성벽 위로 불이 난 것처럼 화광火光이 충만하다.

거기에 쾅…… 캉…… 희미한 쇳소리까지 들려오는 데다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얼마 안 간 곳도 불빛이 훤한 걸 보면 밤에도 노천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걸 알 수 있다.

마차 위에 서서 그쪽을 보던 김철수가 중얼거린다.

“역시 드워프하면 불과 철, 그리고 환경오염이지.”

광산이 주변을 얼마나 오염시키는지 잘 아는 김철수의 혼잣말에 김영수도 같은 쪽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저 정도로 공업이 흥하면 총이 나올 만도 한데 왜 없지……?”

“이시발. 판타지에 총은 무슨 총이야.”

“알못 새끼. 엘프 총사가 얼마나 꼴리는데.”

“미친놈아. 그런 흉물은 SF 판타지에서나 찾으라고.”

마차 지붕에서 두 김씨가 툭탁거리고 있을 때 마차 안에서는 백려강이 당혹한 얼굴로 아영에게 묻고 있었다.

=밤인데도 저렇게 소란스럽고 빛이 환하면 마수가 다 몰려들지 않아?=

니오네브레스의 사람들은 보통 밤에는 침묵을 미덕으로 삼는다.

주도나 대도시, 중급 도시 정도 되면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밤이 되면 조용히 돌아다니거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소란을 들은 괴물이나 마물, 마수들이 도시로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정도의 쇳소리와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라니…….

=두르데인의 전력은 패시지 다음이라고 할 정도야. 성벽에는 5m마다 마력 포대가 설치되어있어서 어지간한 마수 떼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폭사할걸?=

거기다 프라우드족은 전원이 전사라고 할 정도로 힘이 강하고 체력이 뛰어나다.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 프라우드족도 힘과 체력만큼은 1~2급 근접 직업자 수준인 것.

그런 프라우드족이 10만 막강한 무구로 무장할 수 있으니 어지간한 마수 무리는 출몰하자마자 쓸려나갈 거다.

유르파의 변장 마도구로 정체를 감춘 환인 일행은 야간 할증 통행세로 20은화을 지불하고 두르데인의 높고 두터운 성벽을 지났다.

“우와, 해자 폭이 10m인데 깊이도 20m나 되네.”

공간 지각으로 해자 치수를 확인한 김영수의 이야기에 김철수도 머리 위로 지나가는 성벽의 두께를 보곤 혀를 내둘렀다.

“성벽도 두께가 50m는 될 거 같은데…… 이걸 다 어떻게 만들었냐.”

“드워프니까 이 정도는 만들어줘야 인정이지.”

두 김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개교를 지나 도시로 들어온 환인은 도시에 입장하기 전, 성벽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공성 병기를 떠올렸다.

“…….”

콜라이도 연합 도시의 시 외곽에 설치되어있던 고정형 포대, 옥시벨레스와 달리 진짜 발리스타라고 해야 할법한 물건들.

장전하는 것도 화살이나 볼트가 아니라 길이 3m의 기병창 같은 것이고 방향 조절이 어렵던 콜라이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상하좌우 각도까지 조절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전쟁 병기다.

‘콜라이도에서 발리스타 원형이 만들어진 게 100년 전이었으니…….’

기술은 발달하기 마련. 옥시벨레스가 발리스타로 개량될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안느는 이것들을 마력 포대라고 했었다. 저기다 위상력을 충전시켜 대포처럼 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두르데인에 저런 공성 병기가 있다면 주도 패시지에는 저것보다 더 위력적인 무기가 설치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하율과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그녀가 알고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모른다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환인의 시선이 거리로 내려간다.

프라우드족의 종족 도시라는 말이 허명은 아닌지 오가는 사람 중 절반이 작달막한 프라우드 족이다.

키는 작으면 1.3m, 크면 1.5m는 되는데 대부분이 드럼통처럼 옆으로 퍼진데다 남녀 할 것 없이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수염과 모발이 덥수룩하다.

「우와. 진짜 여자가 턱수염이 나 있네.」

「어? 남자 아니야?」

「여자 맞아.」

「……여잔데 왜 턱수염이 나?」

「핀겔 프라우드족 특징이라던데.」

노른과 환연이 나누는 대화에서처럼 프라우드족은 핀겔과 셀핀 둘로 나뉜다.

핀겔은 외향적인 성격으로 두꺼운 근육과 통뼈를 자랑하며 가혹한 광산 일과 대장일을 사랑한다. 그만큼 단순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사람을 쉽게 믿었다가 속기도 잘하는 부류다.

셀핀은 핀겔과 정반대로 내향적인 성격이며 가늘고 호리호리하지만 솜씨와 손재주, 기교는 핀겔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며 성격도 핀겔보다 섬세하다.

핀겔이 무구의 생산과 제작으로 유명하다면 셀핀은 장신구와 설계에 압도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졌다.

=핀겔을 속이면 셀핀이 뛰어나와 핀겔을 몰고 온다고 할 정도니까.=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술에 취해 오가는 프라우드 족을 구경하던 노른이 안느를 돌아보며 묻는다.

「핀겔밖에 안 보여. 셀핀은 없어?」

=셀핀은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싫어해서 일할 때를 제외하면 집에만 있는 편이야. 밖에서는 보기 힘들걸? 아, 저기 셀핀 지나간다.=

그녀의 이야기에 냉큼 고개를 돌린 노른은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아이를 볼 수 있었다.

같은 핀겔 여자가 몸무게 80kg은 될 것 같다면 셀핀은 40kg도 안 될 것 같은 체구.

자신과 별다른 것 없는 모습에 금방 호기심을 잃은 노른과 달리, 마차 지붕에서 흥분한 듯한 김철수의 탄성이 튀어나온다.

“우오오…! 합법 로리, 합법 로리!”

“하 이 페도 새끼 진짜.”

“응~ 셀핀은 성인이죠? 합법이죠?”

“와씨. 야, 존나 토나오니까 어디 가서 내 친구라고 하지 마라?”

“장난이야 장난. 내 취향은 나보다 키 크고 강한 누님이라고.”

“…….”

“강한 눈나! 왜곡된 성욕!”

여느 때처럼 영양가라고는 1g도 없는 소리다.

환인은 마차 내부와 이어진 마부석의 쪽문을 두드려 환연을 불러냈다.

“도시에 주의해야 할 것은 없나.”

「전체적으로 싹 살펴봤는데 영주성은 성 전체에 정령 방지 처리가 되어있어. 도시 핵심 건물로 보이는 곳도 정령을 막는 술법이 펼쳐져 있고. 그 외에는 뭐, 별나거나 특이한 건 없어.」

뒤를 쫓는 의심스러운 인간도 없으니 일단 지금은 안심해도 될 거 같다는 환연의 소견이다.

=그런데 글쎄 그놈이 말이야,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불콰해져서는……!=

=사내새끼가 고작 맥주 한잔에……. 쌍방울이 아깝구만!=

=크학학학!=

호탕하기 그지없는 웃음과 목소리가 옆으로 지나간다.

옥타브가 다른 프라우드보다 한 단계 높아 힐끔, 옆을 보니 핀겔 프라우드 여자들이다.

얼굴이며 어깨 목에 검댕이 가득 묻은 모습으로 술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

두르데인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환인이 무언가 거슬리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이실리테가 마차 안의 안느에게 묻는다.

=안느.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해?=

=저기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서 쭉 나아가면 상급 상업 거리야.=

=거기서 또 어디로 가?=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전에 왔을 때는 중급 상업 거리에서만 묵었으니까. 거기 거리 전체가 고급 호텔이랑 여관이라고 들었는데 맞다면 내성벽을 지나자마자 잔뜩 보일 거야.=

그녀의 말대로 북적이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내성벽 관문이 나타났고, 관문 너머로 이쪽 중급 상업 거리와는 다르게 더욱 밝고 길거리도, 건물도 화려한 게 눈에 들어온다.

관문에 가까워지자 육중한 풀 플레이트 아머에 강철 헬버드를 든 핀겔 프라우드족 병사가 일행의 마차를 가로막았다.

=잠깐. 이 너머는 아무나 못 간다. 넘어가려면 특수 신분증이 필요한데…… 있나?=

=어, 여기.=

얌전한 황색 로브를 입은 아영이 잽싸게 마차에서 내려 땅신 교단이 증명하는 자유 신분증과 통행패를 보여준다.

그걸 받아 아영의 얼굴과 패를 살피던 프라우드족이 헬멧 아래로 인상을 쓰며 통행패를 흔들었다.

=이봐, 이 통행패 효력 기간이 지났잖아.=

=어? 무슨 말이야. 내년까지 유효일 건데?=

=플뢰면서 눈이라도 나쁘냐. 잘 보라고. 저번 달 말일까지잖아.=

=아차~ 진짜네.=

통행패를 돌려받은 아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의 머리색에 매우 옅은 휘광을 본 병사는 쓰읍, 쓴소릴 내면서 신분증도 돌려주고 한 가지를 요구했다.

=확인 좀 해야겠는데. 아무 성술 한 번 펼쳐봐.=

의도를 눈치챈 아영이 기력 회복의 성술을 병사에게 걸어주자 병사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안에 들어가서 금속패를 가지고 나와 아영과 일행의 면면을 살피며 무언가를 새기곤 내밀었다.

=임시 통행패다. 내일 날 밝는 대로 행정관이나 신전을 방문해서 갱신해. 늦으면 벌금에 심각하면 수배령까지 떨어질 테니까 기억해두고. 통행세는 임시 통행패까지해서 60은화다.=

=비싸!=

=성직자 50%할인이라서 그 정도지 아니었으면 1.2금화야.=

=그래도 너무 비싼데……. 여기. 그리고 안쪽에 시설이랑 서비스 괜찮은 호텔 알아? 하루이틀 정도 묶어야 해.=

아영이 건넨 통행세를 챙긴 병사는 일행을 한 번 보곤 품 안에서 직사각형 금속 막대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가지고 유자 호텔로 가봐. 위치는 안으로 들어가서 우회전 1번, 좌회전 1번하면 나오는 광장과 맞닿아있어.=

=병사랑 연줄이 있는 곳은 안 내키는데.=

찡그린 그녀의 표정에 병사도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 거 아니다. 내 본가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오, 그런 거면 환영이지.=

내성벽 상급 거리 관문의 병사다. 부패하고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으니 바가지 같은 것도 없겠지.

=그럼 수고해~.=

그 금속패를 냉큼 집어 든 아영이 마차에 올라타자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주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던 환인은 아까부터 느껴지던 말 못 할 껄끄러움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가 내성벽 관문을 지나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바뀐다.

오가는 행인의 옷차림이 서민에서 부유층으로 바뀌었고 건물 외벽도 고급스럽게 치장되어있지만, 분위기는 중급 거리와 다를 게 없이 흥겹고 떠들썩하다.

다른 도시였다면 축제 기간인가 싶었을 정도.

‘주도 패시지는 여기서 북동쪽으로 대략 일주일 거리일 텐데.’

멀다면 먼 거리지만 주도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는 거리다.

환인이 도르와인 섬으로 넘어와 마을, 도시에 들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주도 패시지와 가까워서다.

반년을 넘어 7개월째 비가 쏟아지는 패시지는 현재 실시간으로 수몰이 진행 중이고 나가족 대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주도의 분위기는 상갓집이나 다를 바 없을 텐데 그 원인은 자신이나 마찬가지.

그런데 두르데인의 분위기는 너무 밝다.

“…….”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마차는 내성벽 관문 병사가 말한 유자 호텔에 도착했다.

프라우드족의 도시라 그런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면서도 실용적인 면이 가득한 호텔이다.

=프라우드족의 건축 솜씨가 대단하긴 대단해.=

유리도 마음껏 사용했고 곳곳에 금을 도금해놓은 데다 실내장식도 최고급 석재와 목재만 쓴 것처럼 고급스럽기 그지없어 현대의 호텔하고도 구별이 안 될 지경.

이틀 숙박으로 체크인하고 객실로 들어온 환인은 곧장 환연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관문 초소 안에 우리 몽타주 같은 것이 없는지 확인해봐라.”

「응? 음…… 없는데?」

“……도시 분위기는 어떻지. 우리가 지난 곳과 비슷한가.”

「슬럼 쪽은 조용하지만 다른 곳은 비슷비슷해. 왜?」

자기 침대 바구니를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환연이 묻자 환인은 커튼이 드리워진 전면 유리창 쪽으로 다가가 현대 도시의 불야성 같은 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패시지가 북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나라의 주도에 7개월째 비가 내리고 있다면 초상집이나 다를 바 없을 텐데, 분위기가 밝아도 너무 밝지 않은가 해서 어딘가 꺼림칙하군.”

짐을 가져와 내려놓던 그의 여자들이 환인의 이야기에 =그러고 보니…….= 하고 서로를 쳐다본다.

“아영.”

=옙.=

“엘미느에게 패시지 주변 도시 정황을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전해라.”

=옛.=

아영이 곧장 통신 수정구를 꺼내 통신을 시도하는 걸 보며 환인은 거실의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보고가 올라온다면 이 꺼림칙함이 어느정도 해소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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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머릿속의 내용이 4차선 정체처럼 틀어막혀서 손가락으로 안 내려 오는 기분...

언능언능 후딱후딱 이벤트 진행해야하는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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