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 지오드 지협
지협까지 얼마 남지 않은 장소.
불어오는 바람에서 바닷냄새가 조금씩 느껴질 무렵 환인은 점심 식사 후 이실리테에게 무술 대련을 해준 뒤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실리테가 대련 중에 꺼낸 이야기 때문이다.
그녀와 최상급 방어술 전수를 위한 대련을 벌인지도 4년째.
덕분에 이실리테는 환인의 최고급 방어술, 회피 막기 반격 3종 세트를 각각 95%, 85%, 70% 정도로 습득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였고, 환인의 짐승 같은 육감으로 벌이는 전투술도 흡수해 다중 검기에 반영하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무술에 대한 자질은 없지만, 루크랑족이 가진 야성의 감각이 환인의 전투술과 제법 잘 맞아 기술을 체득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은 형태다.
그러다 보니 환인은 그녀와 대련하다 보면 종종 거울을 앞에 둔 느낌이 들어 재미있다고 생각할 정도.
하지만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니…….
=읏, 앗?=
환인은 눈에 훤히 보이는 이실리테의 공격 궤적과 이후 4수를 읽고 버드나무 가지처럼 신형을 흔들며 그녀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위상력이 있다지만 한팔에 쏙 들어오는 이 허리에서 어떻게 그만한 괴력이 나오는지 의문이다.
순식간에 품을 내어준 이실리테는 환인에게 안긴 상태로 민망함과 창피함을 얼굴에 드러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졌습니다…….=
“그렇게 한숨 쉴 필요 없다. 다중 검기를 쓰면 이번 같은 약점은 전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다중 검기를 못 쓰는 일도 있을 수 있는데…….=
거기에 대비하려면 지금 같은 약점은 없이 없애는 게 좋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약점을 없애기가 어렵다.
환인은 그녀의 고민을 듣곤 잠시 생각하다 한차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부드럽고 거대한 질량의 젖가슴 감촉을 만끽한 뒤 놓아주며 말했다.
“이실리테 네 검술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내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욱이 네 기질도 야성의 육감을 전투술에 녹여내는 식인데…….”
=…감에 의존하면 수읽기가 어려워져요. 그렇다고 수읽기에 신경 쓰면 공방이 빨라질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감이 무뎌져요. 치명적인 약점이에요…….=
“그래. 그런 약점을 다중 검기로 공격 횟수를 증가시켜 보완하지. 하지만 말이다.”
환인이 말을 멈추고 목창을 들어 1초에 8회, 삽시간에 40번의 공격을 찔러넣고 변화와 페인트를 더하면 160회나 다름없는 모션을 넣는다.
그러자 앗, 아앗, 당황하다가 손발이 어지러워져 삽시간에 26번이나 얻어맞는 이실리테.
“억지로 생각을 늘려 수를 읽으려 들면 지금처럼 오히려 생각 안 하느니 못한 것이 된다.”
=하지만 생각을 안 하면…….=
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환인과 대련할 때마다 절절히 체감하는 이실리테다.
얼마 전 이실리테는 환인에게 자신의 최고급 방어술을 80%가량 습득하였다고 인정받았다.
신체 능력은 그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난다. 여기에 방어술을 더하면 실질적으로 체득한 무술은 환인과 이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 대련할 때마다 이실리테는 환인을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꼈다.
이런 상황에 수 싸움은 적당히 하라는 말을 듣는다고 =네, 그럴게요.= 하면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거다.
안느 정도 되는 상대라면 지금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녀와 실전 대련을 할 때마다 안느가 짜증 나 죽겠다는 듯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응해오는 걸 보면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강자, 환인 급의 실력자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그게 이실리테를 조금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딱!
“으악! 아이고오! 이, 이실리테 누님……!”
=아. 미안해. 아영, 영수를 회복시켜줘.=
환인과 대련을 끝낸 뒤 두 김씨를 상대로 대련해주던 이실리테는 부러진 정강이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김영수의 비명에 잡념에서 깨어났다.
딴 생각을 하다가 다리를 부러트리다니…….
따각!
“끄악!? 아고고고!”
=……아영, 철수도 치료해줘.=
=예입~.=
정강이가 부러져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진저리쳤던 김영수가 치료받아 멀쩡해진 다리를 문지르며 실실 웃는 안느에게 애원한다.
“으어어, 안느 누님. 누님이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이실리테 누님은 손이 너무 아파요!”
=내가 가르쳐주는 건 훈련이야. 대련도 경험해봐야 실력이 늘어.=
“하, 하지만 이실리테 누님 지금 딴생각하시는지 힘 조절을 못 하고 있으신데요?! 맞을 때마다 뼈가 부러지고 있다고요……!”
=야. 이슬이한테 돈 내고 대련 받으려면 1회에 금화 1개도 부족해. 거기다 아영이가 고쳐주고 있잖아? 그런 걸 공짜로 받는 건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지만…….”
=그리고 말이야. 이슬이는 4년 넘게 그런 대련을 도령하고 해왔어. 한 번은 대련 중에 목뼈가 부러져 진짜 죽을뻔한 적도 있고. 근데 이슬이는 그렇게까지 안 하잖아?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하니까 열심히 해.=
“으어어……. 알게씀다…….”
두 김씨의 곡소리가 인적 없는 들판에 울려 퍼지는 와중에도 환인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현 상태로는 너무 안일한가.’
영혼술로 광역기, 단일기 양쪽을 커버할 수 있지만 단일기인 영혼 화살이나 영혼 폭발은 대인 전투와 그다지 맞지 않다.
그리모암의 강력을 발동하고 강령에 광명창을 쓰며 이실리테의 검기를 흉내 내면 대인전도 제법 가능하지만, 자신처럼 비전투직이 아닌 전투직에 자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상대라면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더욱이 근접 박투를 지향하는 신수급이라면?
‘그런 상대라면 혼령주는 펼치기도 어렵겠지. 영령군을 전원 소환해도 나 정도라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을 테고.’
무한 재생에 죽지 않는 만큼 성가시기야 하지만 절단해놓으면 짧게는 몇십 초에서 길면 몇 분 정도 무력화된다.
재생에 시간이 드는 거다.
그만한 시간은 진짜 실력자에게는 제약도 되지 않는다.
거기에 영령군을 최대한 불러내 버리면 심핵력이 바닥나 이쪽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것도 문제다.
따로 대對 신수급 전투술을 만들 필요성이 느껴지는데…….
환인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외 초월급 전투에 쓸 에너지라면 역시 영기와 심핵력이겠지.
영기와 심핵력을 에너지원으로 전투를 한다면…… 개량형 방벽 패널을 쓰고 비교적 형태 조절이 자유로운 광명창에 심핵력을 밀어넣고…… 그리모암의 강력 효과를 더해서…….
……저주는 어떨까.
계약 적옥으로 저주를 내리면 과연 어느 수준까지 통할 것인가.
“이름리아, 나와라.”
환인의 호출에 불길한 적색 불길이 허공에서 화악 피어나더니 피부까지 붉게 물든 이름리아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몇몇 인간을 죽이고 심문하며 자기 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이름리아에게서 지금까지 만났던 일반적인 혼재가 아닌 이형종이 아닐까 싶은 존재감이 물씬 피어난다.
‘이 기색은 알드헬름보다 시더 쪽에 가까운듯한데.’
분노와 자식을 지키고자 한 갈망에 악령화한 시더. 그리고 혼재가 되어 재액을 일으켜 어미인 스타에타에게 빙의한 알드헬름.
혼재도 목적에 따라 그 기질이 달라지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환인은 생각했다.
그 예로 알드헬름은 심한 악취와 괴물의 이명을 일으켰지만, 이름리아와 시더는 흡사…… 타오르는 불길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모습을 드러낸 이름리아가 찢어지고 헤진데다 붉게 물든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며 무릎 굽혀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나요, 성제님?」
“그래. 네 힘을 써봐야겠다.”
「제 힘이라니…… 성제님이라면 얼마든지 빌려드리겠어요.」
강제력과 강력한 의지로 그런 이름리아의 영체 제어를 손에 넣은 환인은 이름리아와 감응을 한 순간 의식이 링크되는 것을 느꼈다.
팔을 들었다 내리고 몸을 돌리고 앞뒤로 움직이고.
‘이런 방식도 있는 건가.’
자신의 의지대로 동작하는 이름리아를 보며 이건 근접 전투와 맞지 않음을 금방 깨달은 환인이지만, 조금 더 혼재의 능력을 테스트해볼 생각으로 이름리아의 기억을 한층 더 강하게 감응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이름리아가 품은 원한, 분노, 증오, 복수심에 자신을 향한 굴종과 복속이 감지되고 그녀의 기억 또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거기에 더해 이름리아가 적극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겠다는 듯 주변으로 그녀의 온갖 기억이 무수하게 떠오른다.
‘이건 위험하군.’
정신력이 약하다면 삽시간에 상대의 의식에 동조, 동화되어버릴 위험이 느껴진다.
영혼과 감응이 위험한 것은 능력을 얻었을 때부터 인지했지만, 이름리아의 기억 강도는 평범한 영혼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
환인은 정신력으로 다른 기억을 간단히 억누른 뒤 그녀의 혼재로서 능력을 파악, 이름리아의 손을 한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환인의 영기와 동조한 혼재의 적색 기운이 한겨울 뜨거운 물을 뿌린 것처럼 확 퍼지더니, 그 기운에 닿은 녹색 수풀이 삽시간에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죽어버리고 땅도 모래처럼 버석버석해진다.
이름 붙이자면 생명력 휘발의 저주 정도겠지.
그 외에는 평범한 영혼에 기운을 억지로 밀어 넣어 적옥으로 만들어버리는 타락의 저주, 주변으로 타락을 퍼트리는 광역 타락의 저주.
더 볼 것은 없어 이름리아와 링크를 끊자 흐리멍덩해졌던 이름리아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가더니 요사함이 느껴지는 미소로 다소곳이 서서 환인의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하지만 환인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방금 저주를 뿌릴 때 머리 한구석을 스치고 지나간 번뜩임에 집중했다.
생명력 휘발의 저주를 뿌릴 때 이름리아는 혼재로서의 정체성과 기운을 썼다.
만약 자신이 그러한 기술을 쓴다면 어떤 기운을 뿌려야 할까.
‘이런…… 식으로, 아신위의 존재감을? 아니, 생명력을…… 생명력보다는 기력? 원기?’
이건 뭘까.
알 것 같으면서도 모호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아슬아슬하게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환인은 안달 내지 않고 차분히 그 깨달음의 끄트머리를 쫓았다.
자신은 이것이 뭔지 알고 있다. 어디서 보았었지? 어디서 느꼈었나.
이 세상에 다신 없을듯한 그…… 신神묘한…… 힘力.
신력神力.
한 단어를 떠올린 순간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낀 환인은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이 아닌 무한한 우주의 천체가 눈 앞에 펼쳐지며 미간에 하나의 눈이 더 열리는듯한 영적인 개화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인지할 수 없는 삼라만상의 개념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존재의 격이 한없이 드높아지는 듯한 영적인 쾌감이 영혼을 잠식한다.
영혼이 정화되어 한층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승천의 감각.
『ď̸̺̳͎͛̑ͅe̴̡̛̜̭̗̒͊̀͊̌͐̍̈́͂̚͘ư̵͕̝͈͔̻̟̣̌̌̂̄d̶̛͉̗̓̈́i̸̢̨̢̙̲̜͎̹̤͍͐̔͜e̸̞̰͚͉̞̰̟̱̠͔̳̹̎̑̍̀̉̈́̉o̷̗̹̮̬͇̹̠͇̾̈́.』
『드디어.』
환인은 영혼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닿는 순간 주먹을 콱 움켜쥐며 초월적인 정신력으로 미간에 열린 세 번째 눈을 강제로 닫았다.
『후후…….』
눈이 닫히자마자 차츰 귓가에서 멀어져가는 거룩하고 고귀한 웃음 소리.
환인은 아연하면서도 망했다는 감상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환인은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짐승, 바다, 하늘, 땅에 이어 세계의 다섯 번째 기둥.
자개신慈皆神 자농慈濃.
천원을 방문한 그 날, 하늘에 새겨져 있던 눈동자의 주인이다.
“…….”
신안神眼이 아닌 육안을 뜬 환인은 몸 안에 벌어진 변화를 깨닫고 허탈함에 한숨을 흘렸다.
꾸욱, 주먹을 쥐고 힘을 끌어 올리니 영기와 심핵력이 합쳐져 신력이 된 기운이 손아귀로 스며든다.
미간에 세 번째 눈이 잠시 열린 틈을 타 쏟아져 들어온 인지를 벗어난 지식, 그중 하나가 선명해지며 신력의 사용법 일부를 이해했다.
손아귀에 맺힌 신력을 뿌리치듯 팔을 휘두르자 궤적을 따라 쿠확— 대지에 누운 듯한 광포한 회오리가 발생하더니 사정없이 뒤틀리다 이윽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주변 수 킬로미터를 뒤덮어 대지를 흔든다.
쿠구구구구—
불과 수 초간 이어진 대지의 소용돌이였지만, 소용돌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미스터리 서클처럼 커다란 상흔이 남아있었다.
고개를 들자 점점이 하늘을 떠다니던 구름이 모조리 증발했는지 눈이 아릴 정도의 푸른 하늘이 눈에 쏟아진다.
환인은 그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포영과를 먹었지만 아신위와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14~15살 남짓한 나이까지만 큰 건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진정한 아신위까지 이제 반걸음도 남지 않은 느낌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자농의 웃음소리에 세 번째 한숨을 내쉰 환인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철수와 김영수는 기절해서 썩은 짚단처럼 널브러져있고, 그의 여자친구들은 주저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다.
이모렐과 이름리아는 자신과 계약했기 때문인지 멀쩡하지만, 무릎 꿇고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조아린 상태.
가장 가까운 안느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자 어딘가 나사가 풀린 것처럼 그를 부른다.
=도, 도령…….=
“괜찮나.”
=…도령, 아신이 된 거야……?=
“그럴 리가.”
=하지만, 하지만 아까 도령한테서 쏟아져나온 빛은…… 존재감은, 아드네빌라 님을 크게 능가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걸 느낄 정도여서 기절까진 하지 않은 건가.”
돌아다니며 이실리테, 유르파, 백려강, 아영을 일으켜 세우고 다리를 쩍 벌린 채 주저앉은 노른까지 일으켜 세우자 그의 코트 안쪽에서 환연이 약 먹은 파리처럼 툭 떨어진다.
헤롱거리는 환연을 유르파의 가슴 위에 올려준 환인은 안느처럼 조금 멍한 표정의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아직 아신이 되진 않았다. 앞으로 반걸음이라는 느낌이지만.”
=그……. 아휴, 혀까지 굳어버린 거 같네. 아까 자기가 보여준 그거, 신력으로 한 거지? 신력을 깨달은 거니?=
뺨을 꼬집고 문질러 마비 증상을 푼 유르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영기와 심핵력이 합쳐져 신력이 됐습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다고 고민했던 게 방아쇠가 되어서 지금 제 상태와 결합해 상승 작용을 일으킨 거로 보입니다.”
=자기의 상태는 억지로 아신위랑 거리를 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인력에 이끌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아신위로 끌려가고 있었던 걸까?=
“그렇겠지요. 자애의 주인이 저에게 접촉해오지 않는 것도 그것 때문인 듯 합니다.”
=으응?=
“제가 아신위에 오를 거라 확신하고 기다리는 것 같더군요. 아신위에 가까워졌을 때 그녀의 웃음이 들렸습니다.”
여자들은 신의 웃음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아영이 눈썹을 팔八자 모양으로 만들며 묻는다.
=그러면…… 오빠가 진짜 아신이 되면 바로 그, 천원이라는 곳에 끌려간다는 이야기…죠?=
“지하율이 허공 단말로 알아본 것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내가 거절할 테니까.”
강한 의지를 갖출수록 신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결사적으로 거부하면 천원의 관리자에 자신을 앉힐 수 없다. 없지만…….
“내가 신이라면 천원으로 올라오려 하지도 않는 아신은 세계에서 추방해버릴 거다.”
신력을 다루는 아신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재해가 될 수 있다는 게 방금 든 생각이다.
신수처럼 제약 속에서 지상에 머무르다 타락하거나 나쁜 짓을 하면 바로 신성이 꺾이는 존재도 아니고 홀로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는 생물이 지상에서 마음껏 활개 치게 내버려 둘까.
적어도 수천 년, 영도의 기록실에 아신의 본격적인 활동은 단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유는 아신위에 오른 인물은 전원 천원에 올랐거나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겠지.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가 조금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거기다 도령은 지구 태생이니까…….=
“그래. 쫓아내기도 쉽겠지.”
환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 하늘 너머 우주를 올려다보았다.
아신위에 올라 나 홀로 쫒겨나느냐, 아니면 쫓겨나기 전에 일을 끝마치고 여자친구들과 다 함께 지구로 복귀하느냐.
이제부터 진짜 타임어택이다.
길을 따라 빠르게 지협으로 나아가던 환인은 지협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지대가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바라스티어 섬의 평균 고도는 58m 정도. 메이신 섬과 바라스티어 섬을 잇던 지협도 좁고 잘록하면서도 지대가 높은, 절벽처럼 형성된 길이었다.
하지만 도르와인 섬과 바라스티어 섬을 잇는 지오드 지협은 달랐다.
이실리테가 지협을 가리키며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저긴 왜 저렇게 낮아? 이 섬으로 넘어올 때 건넜던 지협보다 훨씬 낮은 거 같은데. 좀 인위적인거 같아.=
지협 너머의 땅도 낮다면 이해하겠는데 지협만 쑥 가라앉은 형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1년 내내 파도도 안 치고 잠잠한데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데, 땅의 신수님이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뇌물을 안주면 막 땅속으로 납치해서 혼내준다던가?」
환연의 숙덕임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자 환연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땅 속으로 납치해서 만약 적당한 제물을 바치면 기억만 지우고 보내주고, 아니면 그냥 땅에 파묻어버리는 거야. 그래서 소문이 안난 거지.」
=그건 아무리 봐도 신수가 아니라 악수가 저지를만한 일이지 않니……?=
환인도 지오드 지협을 넓게 눈에 담았다.
고개를 좌우로 끝까지 돌려야 시야의 끝에 희미한 바다의 흔적이 보일 정도로 폭넓은 지협.
지협의 건너편 끝에 매우 희미하게 보이는 땅과 연결된 모습은 솔직히 지협이 아니라 평범한 땅처럼 보인다.
그런 지협의 중앙즈음에는 뒷산 언덕 정도로 솟은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가자 야산의 정상에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제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 소리도 없고 파도 소리도 안 들리는, 오직 적막뿐인 지협.
조금 꺼림칙하다는 듯이 주변을 살피던 백려강은 야산 꼭대기의 구조물을 발견하곤 그걸 가리키며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언니. 저 제단에 재물 수레를 올려두는 건가요…?=
=맞아. 저곳에 재물 수레를 놓고 기도를 한 번 올린 뒤에 지나가는 거야. 그런데 신기한 게, 행렬이 모두 지날 때까지는 재물이 수레에 가득 차 있는데 나중에 돌아와 보면 재물은 없고 수레만 덜렁 놓여있다고 해.=
=수레만……인가요?=
=응. 그래서 도르와인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 그 빈 수레를 회수하고 가져온 제물 수레를 놓고 가는 거야. 반대도 마찬가지로 바라스티어에서 도르와인으로 넘어갈 때 빈 수레를 회수하고 재물 수레를 놓고.=
안느의 설명에 아영은 원경遠鏡 성술로 제단을 바라보다 눈썹을 찡그렸다.
=안느 언니님. 제단에 수레 같은 건 안 보이는데요?=
=……응? 진짜? 내가 전에 도르와인 쪽에서 넘어올 땐 빈 수레가 있었는데.=
안느도 원경의 성술을 쓰고 유르파와 백려강도 원거리 시야의 술법을 써서 제단을 살핀다.
=진짜 없네.=
=혹시 지오드라는 땅의 신수님이 아직 재물 수레를 내놓지 않은 거 아님까?=
=그보다 있잖니. 신수가 재물을 밝히는 건…… 괜찮은 걸까?=
환연이 말한 건 음해니까 넘어간다 쳐도 명색이 고고한 신수인데 재물을 밝히는 건 좀 세속적이지 않냐는 유르파의 의견에 여자들이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본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적막에 휩싸인 길을 따라 계속 달려 제단이 있는 야산에 점차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제단이 가까워질수록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제각기 기감이나 감응을 퍼트리고 정령을 부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함이 늘고 있었던 것.
환인도 신식 영혼의 눈으로 제단이며 주변을 면밀히 살피는 중이다.
진정한 아신위를 살짝 엿보며 얻게 된 제3의 눈을 뜨면 허공 단말이나 아카샤의 기록처럼 모든 걸 아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신력을 쓰는 건 최대한 자중해야겠지.’
제3의 눈을 감자마자 자애신의 목소리가 멀어졌던 걸 보면 틀림없다.
신력을 안 쓴다고 곤란한 일도 없다.
영기와 심핵력이 합쳐져 신력으로 변했지만,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라 영기와 심핵력이 밑바닥에 깔려 신력으로 합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아신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듯한데…….’
아무튼, 신식 영혼의 눈으로 야산을 응시하던 환인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몇 초 후, 김영수도 공간 지각으로 무언가를 발견하곤 어? 하고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형님형님. 제단에 뭔가가 있는데요?”
=뭐? 뭐가 있는데? 뭘 발견했어?=
“뭔가, 황색의 동그란 빛덩어리가 둥실둥실 떠 있는 게…… 어어!?”
김영수가 질문에 대답하던 도중, 황색 천체에서 일행을 향해 빛이 확 쏟아졌다.
지오드 지협에 들어섰을 때부터 긴장하고 있던 환인은 즉시 영혼의 방패와 방혼벽에 개량형 패널 방패까지 펼쳤고, 김철수는 능력을 전개해 일행 전원을 뒤덮는 차원벽을, 환인의 여자들도 각자 쓸 수 있는 방어 술법을 전개했지만…….
화아악—!
=으앗!?=
=이, 이게 뭐야아!!=
구체에서 발사된 빛은 그 모든 방어를 뚫고 일행 전원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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