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66화 (766/813)

766 수목 도시 엘위드리스

여관으로 돌아간 환인은 파손한 기물의 수리비와 괴한들이 머무른 숙박 대금을 치렀다. 물론 그들의 소지금으로.

여관 주인과 여관 주인의 딸이 무슨 일인가 겁먹은 태도를 보였기에 환인은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해주었다.

=패시지에서 보낸 첩자라니……. 어, 어쩐지 이상했어요. 그 여자아이한테서는 높으신 분의 향기가 났는데 어째서 대로의 호텔이 아니라 이런 구석진 저희 여관에…….=

여주인의 떨리는 한숨에 환인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높으신 분이라니. 그러고 보면 같은 플뢰족은 신분이 높은 플뢰족을 향기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하던가.

안도하는 여주인을 뒤로하고 여관을 나서자 괴한 셋이 사지가 부러진 채 꽁꽁 묶인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도 이실리테가 묶어놓았는지 포승줄로 포박된 상태.

포박이라지만 빈약한 가슴 쪽과 사타구니 쪽을 중점적으로 매어놔 얼핏 봐선 귀갑 묶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인. 인간들이 소음에 모여들고 있어. 돌아가려면 지금뿐이야.」

무릎 꿇려진 채 오들오들 떠는 소녀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던 환인은 환연의 충고를 듣고 이실리테와 영령군을 향해 복귀한다고 말한 뒤 영주성을 향해 뛰어올랐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것들의 엘위드리스 방문 목적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김철수가 차원 방랑자 관리국에서 보았다는 이야기에 일단 덮어놓고 추적해서 생포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소녀가 엘위드리스를 찾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복잡하고 막연한 계획과 음모 때문에 알아낼 수 없는 게 아니라, 관리국이 이 시국에 또다시 습격자를 보낼 타당한 이유와 현실성을 찾을 수 없는 거다.

소녀의 아우라 농도를 떠올려보면 기껏해야 2급 정도.

무휘광은 아니며 차원 방랑자처럼 위상류 탓에 아우라가 극도로 희박한 경우도 아니다.

2급이면 직업의 제 위력을 내기도 어려운 수준인데 관리국이 저 소녀를 보낸 이유가 뭘까.

보내서 관리국이 얻을 이득은?

몸 안에 자폭 마도구를 심은 세 괴한을 같이 붙여 보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어째서 신분이 높은 소녀를 저런 뒷골목 여관에 묵게 한 걸까.

저 소녀의 정체를 오해했다고 보기엔 이쪽의 접근에 소녀가 보여주었던 행동이 말이 안 된다.

소녀가 바닥에 던지려 했던 것은 꽤나 보편화된 긴급 탈출 마도구로, 유르파와 섹스한 뒤에 으레 벌어지는 필로 토크에서 들은 마도구와 생김새가 똑같았다.

이쪽의 접근에 도망치려 한다면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니 이해를 위해 심문해야겠지.

영주성의 도개교에 내려서서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들어가는데 코트 안에서 환연이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내가 좀 더 신경 써서 감시해야 했는데……. 감시에 구멍이 뚫린 거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응?」

“네 덕분에 편히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고작 그 정도로. 오히려 이때까지 고맙다는 소리를 몇 번 하지 않은 내가 미안하군.”

「…….」

환인의 사과에 모호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던 환연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한결같이 자상한 남자다.

한 번 어려진 뒤에는 미소도 많아지고 행동도 더 다정다감해졌지만, 그전에도 사이코패스 맞나 싶을 만큼 자신들을 신경 써주고 배려해준 남자.

어쨌거나 감시망에 구멍이 뚫린 것은 사실이고 그건 감시를 제 역할로 삼은 자기 잘못이다.

여자들은 유르파를 제외하고 전투 요원이라는 점에 더해 각기 자신만의 역할을 나누어 가졌다.

이실리테는 환인의 수발과 일행의 식사 및 가사 전반을 맡은 메이드 역할.

안느는 세탁과 비품의 파악, 환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조언해주는 역할.

유르파는 각종 마도 아이템 및 의복, 속옷을 제작해 공급하고 재정을 담당하며 술법과 비술에 관련된 조언자 역할.

백려강은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의 보조이자 환인의 부끄럼쟁이 역할.

아영은 성술사로서 일행의 부상과 질환을 책임지며 쿠에들의 관리와 하얀 늑대들의 배후 수장 같은 역할.

그리고 자신은 정령으로 주변 감시와 정찰을 담당한다.

환인이 감시에 구멍이 뚫린 것을 두고 폭풍 잔소리해도 입 꾹 다물고 받아들이려 했는데 오히려 격려받을 줄이야.

“이번 같은 일도 있는 걸 알았으니 이후에는 놓치지 않을 테지.”

「응.」

“그럼 됐다.”

환연이 들어가 있는 안주머니 쪽을 다독인 뒤 귀빈실로 돌아온 환인은 기절한 세 명을 의자에 앉혀 묶은 다음 물을 뿌려 깨웠다.

=푸흡! 프헉, 푸으으으……!=

사지가 부러진데다 재갈에 물리고 물까지 끼얹어져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괴한들을 분석용 외눈 안경 마도구를 걸친 유르파가 먼저 살핀다.

환인이 낸 명치 쪽 상처를 중점적으로 살피던 유르파는 메스와 외과 수술용 가위를 가져와서 피가 계속 흐르는 상처를 우악스럽게 벌렸다.

=끄으으읍—!!=

=끄그극……!=

생살을 찢고 정확하게 반동강 난 조그마한 단검 모양의 엠블럼을 적출하는 장면에 철수와 영수는 여자의 알몸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엄청나게 예쁜 여자의 알몸인데 생 젖가슴 사이로 피가 철철 흘러내려 음부와 음모를 흠뻑 적시니 고추가 서려다 죽는다고 할까.

=응, 철수랑 영수 몸에 들어있던 거랑 같은 계통이야.=

“저, 저희랑요?=

철수가 팔에 솟은 닭살을 털어내며 눈을 크게 뜨자 세 괴한의 가슴에서 엠블럼을 뽑아낸 유르파가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엠블럼은 능력을 폭주시키기 위한 공명 반향 기능이 탑재된 거고, 이건 위상력을 매개로 폭발력을 크게 늘리는 생체 폭탄 뇌관이야. 만약 이게 다 폭발했으면 주변 30m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아갔을걸?=

“……저희 몸에 박혀있던 거랑 같은 계통이면 역시 관리국에서 보낸 사람이란 뜻이네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환인의 대답에 김철수와 김영수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자신들도 저 괴한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소모품이었다는 게 둘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두 김씨가 분노하면 할수록 계획의 실행이 유연해진다.

환인은 두 명이 충분히 분노할만한 대답을 준 뒤 세 괴한에게 영혼을 빙의시키고 질문을 던졌다.

“네놈들은 어디에서 왔지.”

재갈이 풀린 여자는 알몸으로 가슴이 헤집어지고 사지가 부러진 고통 속에서도 비웃음을 흘렸다.

=똑똑하다는 소문이 많더니 헛똑똑이였군요. 이렇게 묻는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줄 알았나요?=

플뢰족치고 제법 큰 가슴을 지닌 갈색 머리 여자가 허리를 숙인 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비웃었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정교 심판국인가. 차원 방랑자 관리국과는 무슨 관계지.”

=……?!=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면 엘위드리스에 찾아온 이유는 뭐지? ……저 소녀 때문에? 저 소녀가 누구길래.”

여자 둘과 남자 하나로 이뤄진 3~4급의 심판국 요원들은 고통으로 머릿속이 뜨겁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뭐지, 성제는 독심술 능력까지 가지고 있나? 어떻게……!

“흐음…… 소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목적이 뭔지도 모르는군. 받은 임무는 소녀를 엘위드리스로 배달하고, 도중에 발각되면 도주하거나 도주할 수 없으면 자폭해라? 하찮은 심부름꾼인가.”

빙의된 영혼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잃고 전해주는 중이란 걸 꿈에도 모르는 요원들은 겁에 질려 환인과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녀들의 뒤에 선 이실리테, 안느, 아영에게 머릴 잡혀 강제로 환인과 시선을 마주한다.

좀 더 쉽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아신위를 드러내며 셋을 위축시키던 환인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돌아보았다.

흐려진 눈으로 덜덜 떠는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넌 어디서 왔나. 무슨 지령을 받았나. 차원 방랑자 관리국이 보낸 인간인가. 정체는 무엇이지. 이름은?

소녀는 너무 겁먹어 패닉에 빠진 것처럼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기만전술인가 싶어 신식 영혼의 눈으로 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처럼 영혼도 공포를 관장하는 색이 다른 영혼의 색을 모두 가릴 정도로 부풀어있었다.

심신 양쪽이 유약한 인물인 거겠지.

‘곤란하군.’

유르파가 제작한 특수 봉인 마도구는 효과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나다.

얼마나 뛰어나냐면 저 봉인구를 착용하면 몸에 빙의된 영혼도 힘을 거의 쓰지 못할 정도.

이 때문에 영혼을 빙의시킨 다음 정보를 빼내는 것은 못 한다. 그렇다고 봉인구를 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죽이는 것도 뭔가 꺼림칙하다.

잠깐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다가 심판국 요원이 죽지 않도록 가슴 쪽 상처만 치료하는 안느와 아영을 따로 불러 조용히 물었다.

“저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어떤 신분인지 짐작이 가나.”

=체취만 보면 후작급 집안의 자식이야. 나이는 대충 열둘? 열셋?=

=후작급 여식이라면 최근 10년 출생자를 제외하면 거의 다 알고 있는데요, 저런 여자애는 없어요. 하늘색 체모의 플뢰족이면 작톨 후작가, 구탈레온 후작가 둘 뿐이기도 하고요.=

=체모 색은 격세 유전으로 드러나기도 해서 크게 믿을 건 못돼.=

=격세유전이 뭔데요……?=

“대를 건너뛰어 발현되는 유전적 특징이다.”

=……어, 그러면 대다수 후작가가 포함되는데.=

아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안느도 표정을 살짝 찡그린다.

그런 둘에게 환인이 의문점을 물었다.

“만약 후작급 인간이 평민의 씨를 받거나 평민에게 씨를 뿌리면 어떻게 되지. 마찬가지로 후작급의 체취가 나는 건가.”

=응? 어…… 확률은 낮지만 가능한 일일 거야. 고유의 체취는 마력이랑 정령력이 버무려져서 나는 일종의 마력흔이라는 이야기가 있거든. 우연히 강한 마력을 타고나면 평민 사이에서 태어나도 후작급 체취를 가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가문에 끌어들여 방계 자손으로 삼기도 해.=

=진짜요? 그런 이야기 처음 듣는데.=

=왕족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도는 이야기라 그럴걸.=

=아……. 플뢰족의 높으신 분은 자기들 체면이 깎일만한 소린 절대 안 하니까요…….=

안느와 아영의 대화를 듣던 환인은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후작과 평민 사이에서 난 아이가 백작이나 자작급 체취를 지닐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지?=

“그럼 저 소녀는 왕족과 평민, 혹은 하급 귀족 사이에서 난 아이일 수 있다는 거군.”

=…….=

=…….=

두 여자의 생각 못했다는 시선이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소녀에게 향한다.

환인도 소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김철수와 김영수를 불렀다.

“여자에 굶주렸다고 했었지. 저자들을 데리고 옆방으로 잠시 넘어가있어라. 쓸모는 다 했으니 부를 때까지 가지고 놀아도 된다.”

“……?!”

“……!”

둘은 환인의 이야기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좀 다치고 피폐해지긴 했지만, 관리국에서 주었던 여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쁜 여자들이다.

저런 여자들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김철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려는 김영수를 발로 까버린 뒤에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데리고 넘어가서 허튼짓 못하게 감시만 할게요.”

“그런가.”

“시발아, 왜 까는데……!”

“미친 새끼야 눈치 좀 챙겨……!”

“아 왜……! 형님이 허락……!”

“닥치고 빨리 넘어가자, 응……?”

작은 목소리로 아웅다웅하며 심판국 요원을 잡고 옆 방으로 공간 도약하며 사라지는 김영수.

작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본 환인은 심판국 요원들이 사라지자 더욱 심하게 떠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평온의 파동을 약하게 펼쳤다.

일단 이 긴장을 어떻게 해야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이어서 몸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고 펑퍼짐하긴 해도 겉옷을 둘러준 뒤 이실리테를 시켜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실음료를 건네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태도 변화인가, 공포와 두려움에 머릿속이 마비되어있던 소녀는 조금이나마 차린 정신으로 환인을 힐끔거렸다.

꼬르륵—

우유 딸기 주스에서 올라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까. 소녀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에 환인은 무서운 기운을 치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한다. 성제라고 불리고 있지만 나는 적에게 가차 없는 성격이니까.”

=…….=

“널 무섭게 한 것도 네가 적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일단 그것부터 마시고 한 숨 돌리는 게 좋겠군.”

환인의 부드러운 이야기에 소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벌컥! 문이 열리며 노른이 뛰어 들어왔다.

실루와 놀고 있었는지 머리카락이며 옷이 지푸라기투성이다.

소녀의 손에 들린 주스를 본 노른이 눈을 반짝 빛내며 소리쳤다.

「이실리테! 나도 우유 딸기!」

=줄 테니까 너 몸에 지푸라기 묻은 거 털고 들어와.=

「응!」

평범한 아이라면 두 손으로 옷을 털겠지만, 노른은 바람을 일으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가볍게 휘감은 다음 창밖으로 지푸라기와 먼짓덩어리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녹색 머리카락을 봉두난발처럼 만든 꼴로 우유 딸기 주스를 가져오는 이실리테에게 달려갔다.

“노른, 이리 와라.”

환인은 그런 노른을 자신의 앞에 앉히고 빗으로 직접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몇 번의 빗질에 봉두난발이 찰랑찰랑한 단발로 변했지만, 빗질해 줄 때마다 귀가 쫑긋거리는 것이 귀여워 천천히 계속 머리를 빗겨준다.

노른은 그게 무척 마음에 들어 미소 띤 얼굴로 다리를 작게 흔들며 우유 딸기 주스를 마시니,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소녀도 조심스레 우유 딸기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넘어가자마자 황금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는 조금 더 빠르게 마시는 소녀.

얼굴 절반을 가릴 정도로 큰 컵의 주스를 금방 비우는 모습에 환인이 손짓해 주스를 다시 채워주었고, 노른도 자기 몫이 줄어들세라 경쟁적으로 주스를 마신 뒤 이실리테에게 리필 받는다.

환인은 아까보다 좀 더 주스의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소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네 소심함을 보면 네가 주도적으로 누구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곤 보기 어렵지. 누군가 시켰을 테고, 그건 관리국의 국장일 거라 생각한다.”

=……!=

흠칫 어깨를 떤 소녀가 차츰 진정하는 것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덜 놀랐는지 환인의 이야기를 비교적 차분하게 경청한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준다면 최대한 네게 좋은 방향으로 처우를 생각해보마.”

=…….=

소녀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 발가락의 움직임에서 훤히 보인다.

초조하고 긴장한 것처럼 작고 하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소녀는 반쯤 마신 주스 컵을 내리며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왕가, 의…… 사생아예요…….=

왕가의 사생아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뜬 안느는 환인이 자그맣게 보내는 신호에 나서려던 마음을 접고 침착을 되찾는다.

=차, 차원 방랑자 관리국에서…… 저를 여기로, 보냈어요. 여기에 있으면, 다음 사람이 와서…… 할 일을 알려준다고 해서…….=

“왕가라면 투르시온인가.”

=네…….=

“긴급 탈출용 마도구를 써서 도망치려 한 것은 관리국의 지시 사항이었나.”

=네, 네. 도시에서 누가, 공격해오거나 하면 도망치라고 하면서…… 타비아누스 국장님이 주신 거였어요…….=

“…….”

유르파에게 시선을 주자 아까부터 만지고 있던 긴급 탈출용 마도구를 내려놓고 이런저런 손짓을 몰래 보낸다.

겉모습만 긴급 탈출용 마도구지, 실상은 신호기라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다리 사이에 앉은 노른의 손가락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 틈에 안느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아빠나 엄마가 누구인지 알아?=

=아니요……. 그냥, 투르시온 왕가의 어느 왕족님이라고만…….=

=그래? 혹시 머리카락 색이…….=

이것저것 물어보던 안느는 소녀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의 질문이 소녀의 불안을 좀 더 가라앉혀주었을까.

좀 더 편해진 안색으로 말문이 열린 소녀에게 환인도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이름은 무엇이냐. 네 직업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관리국의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는 무얼 하고 지냈느냐. 패시지의 분위기는 어땠느냐…….

소녀, 사이네는 왕족의 사생아를 모아놓고 관리하는 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설이라고 해도 널따란 정원에 방 3개짜리 단층 건물에서 풍족하게 지냈다고.

다른 소년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두 명의 감시인 겸 시녀와 함께 지내던 사이네는 희귀 직업으로 각성하며 소속이 옮겨졌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특수한 시설로 옮겨져 조사한 결과 능력은 별것 없었다.

그저 식물을 조금 더 빨리 자라게 하는, 흔히 말하는 꽝인 희귀 직업이었던 것이다.

전투와는 전혀 관계없는 능력에 성장 한계 자질도 고작 2~3급 정도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는 작은 텃밭뿐.

희귀한 식물이나 약초를 재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2차 조사가 들어갔지만, 사이네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중급 초목의 정령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자 본격적인 홀대가 시작되었다.

계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특수 시설, 결명자와 연관된 장소를 보였기에 소속을 다시 옮길 수도 없는데 능력은 보잘것없으니까.

그렇다고 함부로 처분하기에는 왕족의 피를 이었다.

시설에서 몇 년간 눈칫밥을 먹던 사이네는 며칠 전 타비아누스 국장의 호출에 불려갔고, 호위인지 감시인인지 모를 인간들과 엘위드리스로 이동했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였다.

사이네에게서 멀어진 환인과 여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 전부 진실이고 진담이야. 도령이 영혼의 눈으로 보기엔 어땠어?=

“너와 같다. 당초 저런 성격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겠지.”

=공감임다. 그래서, 저 여자애를 보낸 이유를 오빠는 짐작하신 거 같은데요?=

환인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비아누스 국장은 사이네를 제물로 삼아 이쪽의 능력을 파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특정 탐지 방해 마도구를 쥐여주고 보낸 시각, 잡힌 시간대, 잡힌 방식을 계산하면 상대가 어떤 탐지 능력을 지녔는지 알아내기란 쉬우니까.

=어, 그러면 환연이 정령 탐지가 밝혀진 거 아님까……?=

“다른 건 몰라도 이쪽이 정령을 탐지에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겠지.”

담담한 환인의 대꾸에 이실리테가 고개를 갸웃한다.

=알려진다고 뭔가 바뀌는 게 있나요?=

“글쎄. 관리국이라면 정령의 시야를 완벽하게 피하는 물건이나 능력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걸 만들어낼 정도의 기술이 있으니까.”

두 김씨의 몸에 박혀있던 엠블럼과 자폭 기능의 엠블럼을 들어보이자 여자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르파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귀엽게 인상을 쓴다.

=그러니까, 이쪽을 암살하려고 조건을 맞추기 시작할 거란 이야기네.=

“우리가 패시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습니다. 행적은 뻔하니 길목에 암살자를 매복시켜놓는다는 수도 있지요.”

=그런 거라면 굳이 사이네를 보낼 이유가 없지 않니?=

“있지 않습니까.”

=무슨…… 아.=

무언가를 깨달은 유르파와 달리 아직 짐작을 못하는 여자들이 있었기에 안느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설명해준다.

=도령이 사이네를 죽이면 왕족 시해죄를 끼얹을 수 있고 시설의 비밀도 감출 수 있는 데다 투르시온은 사생아의 흠을 덮을 기회니까. 오히려 죽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무표정한 안느의 더러운 정치 이야기에 여자들이 입을 다문다.

환인은 신입을 경계하는 강아지처럼 노른에게 주시당하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하지만…… 타비아누스 국장과 시설은 사이네를 잘못 평가한 것 같군.”

=응? 뭐가?=

“사이네의 능력은 별것 아닌 게 아니다.”

희귀 직업에 대해서는 그 어디보다 많은 정보를 지녔을 시설이 그녀를 조사했단 뜻은 그녀의 직업이 유일 등급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거기다 환인의 신식 영혼의 눈에 사이네의 영기는 굉장히 짙고 풍부하다.

온몸이 영기로 꽉 찬 안느만큼은 아니지만, 상급 영혼사 정도는 가뿐히 넘을 수준.

“그런데도 외모는 가녀림 그 자체지. 영기가 육체에 영향을 못 끼칠 만큼 그녀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영기가 많다는 뜻이다.”

환인이 사이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조심스레 들어 보이자 가까이 다가온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이네의 능력이 조사 결과 약해서 쓸모없다는 건 그럼…….=

“관리국과 결명자 조직의 시설은 영기 검출 수단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적절한 훈련만 한다면 사이네가 농업과 식물 쪽으로 막대한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초목의 정령과 계약을 맺는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순수화 같은 특정 식물을 재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인의 추측에 사이네가 큰 눈망울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담는다.

그 눈빛에 환인이 작게 웃어주었다.

“믿기 힘들 수도 있겠지. 이쪽은 별다른 검사 수단도 없는 일행이고 네가 받은 곳은 주도의 갖은 지원을 받는 전문 시설이었을 테니까.”

=아, 아니요! 미, 믿어요…….=

작 주먹을 꼭 쥐고 붕붕 고개를 흔드는 사이네를 바라보다 피식 웃은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소감을 말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군. 물론 유르파의 정밀 검사를 받아 몸에 해로운 시술이 가해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겠지만 말이다.”

안느도 조금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영도의 대성녀님이 사이네를 보면 기뻐하시겠어.=

=그러면 사이네도 주인님과 잠자리를 해야하나요? 영기가 많다면 그만큼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뜻밖의 질문을 던지는 이실리테를 향해 환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럴 일 없다. 미성년자는 내 관심 밖이니까.”

=그래? 노른은 어쩌고?=

안느의 태연자약한 질문에 환인이 조금 더 미간을 찌푸린다.

“노른은 쿠에 종족으로 봤을때 성인이다. 환연도 인간의 연령으 따지기 무의미한 정령이잖나.”

환연을 언급할 기세에 먼저 쐐기를 박았지만, 여자들은 뜻을 알기 어려운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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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사생아가 알고보니 치트 식물 육성 능력자였던 건.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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