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61화 (761/813)

761 수목 도시 엘위드리스

성벽 바깥.

괴물과 마수, 마물이 출몰하는 니오네브레스에서 성벽은 여러 가지 의미로 울타리를 의미한다.

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집단이나 소속을 의미하기 위한 울타리.

그리고 울타리 바깥은 보통 보호받지 못하는 위치다.

괴물이나 마물이 쳐들어와도 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에게도 박해와 차별을 받는 위치가 바로 난민인 것.

시민 입장에서는 언제 강도나 도적 같은 놈들로 변할지 모르는 난민이 거북스러울 테고 영주 또한 세금을 내지 않고 거리도 더럽게 만들고 언제 음지로 숨어들어 범죄자가 될지 모르는 난민은 고까워서라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개는 난민으로 있기보단 인근의 마을이나 촌으로 흩어져 생존을 도모하지, 저렇게 대규모 난민촌을 형성하는 경우는 없다.

영도의 아랫도시 외곽에 만들어진 판자촌은 난민과는 다른 의미이기에 예외.

도시 주변 마을이나 다른 도시가 패망해서 대량의 난민이 발생한 것도 아니고 어째서 성벽 바깥에 수만 명 규모의 난민이 모인 걸까.

난민이 저렇게 모여있는데도 물자가 계속 엘위드리스로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아해하며 근처를 지나가던 환인은 난민들의 표정이 생활고로 인해 어둡긴 하지만 절망과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문을 더했다.

그리고 성문을 지났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거수목이…… 엘위드리스 상징수가 불타 쓰러지면서 도시를 덮쳤나 보네.=

일반적으로 도시는 석재와 목재를 섞어 집을 많이 짓는다. 주변에 괜찮은 석재 광산이 있다면 돌집이 많고, 삼림이 많다면 나무집이 많아지는 식이다.

여기에 플뢰족은 또 다른 특유의 건축물을 가지는데, 이른바 홈트리home tree다.

플뢰족이 특정한 수목을 심고 특유의 교감 능력으로 키우면 나무가 점차 자라면서 집으로 변하는 홈트리.

=……홈트리 구역을 불타는 상징수가 덮쳤나봐.=

홈트리라고 해도 나무다. 고열과 화염을 품은 거대한 초거목이 쓰러지니 주변이 한꺼번에 불타올랐을 테고, 그 규모는 19세기 시카고에서 일어났던 대화재에 버금가는 규모였지 않았을까.

다수의 플뢰족들이 느릿하게 복구 작업 중인 구역으로 일행의 시선이 향한다.

당시 대화재를 진화하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뒤집어엎었기 때문인지 지반의 높낮이가 다르다.

거기다 상징수象徵樹가 쓰러진 뒤에 한참을 타올랐는지 땅 곳곳이 용암처럼 녹아내린 흔적도 있고, 무엇보다 상징수가 아직도 철거되지 않고 있었다.

아영이 마차 창문 밖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성벽 바깥의 난민들은 이 구역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나 보네요.=

=딴 데서 온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기 어려웠겠지.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셈이니까.=

그녀와 같은 장소를 바라보던 유르파의 이야기에 백려강이 이해가 잘 안된다는 듯이 눈썹 끝을 살짝 늘어트린다.

=하지만…… 저희가 팔라툼에 머물 때 엘위드리스에 쿠데타가 벌어졌었잖아요. 이쪽 시간으로 1년이 다됐을 텐데 아직도 다 정리하지 못한 건…….=

백려강의 의문에 안느가 쓴웃음을 지었다.

=벨은 루크랑 사람이라서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하겠네. 플뢰족에게 있어 상징수는 또 다른 가족 같은 거야.=

=가족……이요?=

도시의 상징이라는 나무가 가족이라니? 궁금증을 담은 그녀의 시선에 안느는 담담하지만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눈빛으로 뿌리라고 할지 그루터기라고 할지, 상징수의 흔적으로 눈길을 주며 설명해주었다.

=태어나면 상징수 아래에서 축복과 이름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상징수의 곁에서 하고, 죽어 장례식을 치르는 것도 상징수에서 해. 탄생과 삶, 죽음을 전부 같이하는 상징수는 보통 도시의 역사와 함께하기 마련인데 그게 불타 쓰러졌잖아. 더욱이 플뢰족은 식물에 남다른 애정과 애착을 느끼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가족이 죽은 듯한 먹먹한 마음에 복구가 늦어지고 있다는 거네요…….=

=안느 아가씨도 상징수에서 이름을 받았니?=

=저는 가문의 가문목 앞에서 받았어요. 왕가는 전부 가문목이나 가문비가 있거든요. 그리고 상징수라고 해도 모든 메리아놀 도시에 있는 게 아니에요. 종족 특화 도시, 그것도 플뢰족의 특화 도시에만 있어요.=

메리아놀은 여러 종족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다.

콜라이도, 몰드레테처럼 수많은 종족이 적절한 비율로 살아가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특정 종족 비율이 8할을 넘어가는 종족 특화 도시도 존재한다.

그리고 엘위드리스는 대표적인 플뢰 종족 특화 도시.

안느의 설명에 이실리테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시에 무기력이 퍼져있는 거네. 상징수가 타오르다 못해 쓰러져서.=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도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특별함이 사라지고 성장 동력도 꺾였기 때문이겠지.”

특별함? ……아.

“귀족 태반이 죽었다. 귀족 거리 또한 초토화되었고 엘위드리스의 특수성이자 상징이던 예언자들 대다수가 주도 패시지로 전향했으니 시민들은 장래가 어둡다고 느끼고 있을 거다. 도시 복구 작업이 지지부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고.”

=그래서 도령이 영령을 마부석에 앉혀놓은 거구나.=

자세한 연유를 모르는 시민 처지에서 자신들은 원수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환연의 정령 정찰로 엘위드리스가 가까워졌을 때, 환인은 이실리테를 마차 안으로 불러들인 뒤 영령을 다수 소환해 마차의 조종과 호위를 지시했다.

그걸 가리키는 안느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유는 엘위드리스에서까지 정체를 감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

도시에 들어설 때 변장하는 이유는 소란을 피하고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서인데 엘위드리스를 찾은 것은 영주와 면담이 목적이다.

도시의 최고 권력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길에 정체를 감춘다?

이쪽이 올바르지 못하거나 떳떳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암살자도 아니고 정체를 감출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대놓고 성제 일행임을 보여주는 것도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어 그러한 문제를 영령으로 해결한 환인이었다.

똑똑똑.

마부석 쪽의 쪽창 너머로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환인 님~ 목적지는 영주성으로 하면 될까요~?」

“그래.”

「알겠습니다~.」

영령의 겉모습은 귀족 일행의 종자처럼 바꾸고 젤프리는 마차에서 분리, 호위처럼 영령 하나를 태워 붙였다.

여기에 밀짚 쿠에 아성체의 체급에 가까워진 실루에게 목걸이를 채워놓았고 이모렐도 근처를 비행해서 따르는 데다 마차 지붕에는 검회색 두건 망토를 씌워놓은 김철수와 김영수가 있다.

겉만 봐서는 귀족의 행차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의욕이 없어서일까. 도시의 성문 신분 검사는 정말 대충 이루어졌다.

병사가 인원만 묻고는 통행세만 받고 통과시킨 것이다.

타박타박타박—

쿠에 특유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스무스하게 움직인다.

아르겐테아 정찰대는 엘위드리스의 원로원 직속 비밀 정찰 조직, 도시 내부는 그들에게 손바닥처럼 훤하다.

그러다 보니 영주성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오르막을 오르는가 싶더니 마차가 멈춰서자 환연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엘위드리스 성에 도착했어. 도개교를 지키는 기사들이 영령들을 알아본 눈치네. 경악한 얼굴이야.」

환연의 이야기를 들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님.=

“그래.”

환인이 허락하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마차에서 내리고, 즉시 짤막한 경악성이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검희!=

=성제의 영혼 기사……!=

=영도의 길잡이이자 뭍 영혼들의 안내자, 자애신님의 방랑하는 등불이신 성제께서 엘위드리스의 영주 프슈드 오울 백작과 면담을 위해 찾아왔어. 안내해주었으면 해.=

안느의 발언에 당황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예법에는 방문자보다 귀족의 지위가 낮을 경우 지금 모습을 잠깐 드러내야 하지만, 환인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 엘위드리스 기사의 감정을 억누르는듯한 목소리가 마차 창문으로 흘러들어왔다.

=본성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차가 열려있는 도개교를 건너 엘위드리스 성 정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중에 환연이 성안을 둘러보며 속닥거린다.

「귀족 진짜 거의 다 죽었나 보네. 보이는 인간이 별로 없어.」

“성 근처 귀족 거리가 대파되었을 정도니까.”

「흐음~. 정말 단순 내전일까?」

“영주파와 원로파의 단순 내전으로 도시가 이 꼴이 될 수 있을까.”

이름리아라는 이름의 공녀는 동생을 통해 자신에게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었다. 영주도 그쪽 편이었고.

만약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암살 시도가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을 거다.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암살 시도도 무언가에 쫒기듯 불분명한 점이 있었지. 패시지 협의회, 혹은 결명자 놈들이 있을 게 틀림없다.”

=오빠. 그럼 엘위드리스의 반응을 봐서 용서해……주시진 않으실 거네요.=

말하다 말고 차가운 환인의 눈빛에 재빨리 말을 돌리는 아영이었다.

저 차가운 눈빛은 용서를 언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납작 엎드려 용서를 구걸해야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지나갈 눈빛이다.

수틀렸다간 청령주가 도시에서 터질지도 모르지.

환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창밖의 수목 정원을 응시하며 말했다.

“꾀임인지 꼬드김인지에 넘어간 것은 원로 측이겠지. 어쨌거나 암살은 실행되었고 이후 엘위드리스 영주는 내게 그 어떤 전언도 보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사과의 편지라도 보냈다면 100번 양보해서 한 번쯤 고려는 해보았겠지만, 엘위드리스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쪽 시간으로 1년 가까이.

“용서해줄 이유가 있나.”

=없죠.=

아영과 조금씩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마차는 엘위드리스 성 정문에 멈추어 섰다.

입구에는 50에 이르는 집사와 하인, 하녀들이 나와 2열로 서서 허릴 숙이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그사이 모두 나와 반듯하게 서 있다니. 이쪽의 방문 사실이 그사이 전달된 걸까.

달칵.

안느가 마차 문을 열어주고, 천릉을 걸친 환인이 아신위의 휘광을 드러내며 내리자 집사복을 입고 유일하게 꼿꼿이 서 있던 여자 플뢰가 긴장된 진땀을 한 방울 흘렸다.

환인이 다가서자 귀족 예법에 따라 허릴 숙이며 인사한다.

=귀…빈의 방문을 엘위드리스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엘위드리스 가문 수석 집사, 미리아 이오 엘위드리스입니다.=

수석 집사라고 보기에는 너무 젊고 여자다. 내전 중에 집사장이 사망하기라도 한 거겠지.

=영주님께서는 나가족 토벌을 위하여 외출 중이시기에, 황송하오나 본인이 귀하신 분의 접대를 맡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방문 시기가 맞지 않았군요. 영주는 언제 돌아올 예정입니까.”

=긴급히 통신 보고를 드렸으니 늦더라도 내일 아침 복귀하실 것입니다.=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미리아는 귀빈실을 안내해드리겠다며 긴장된 모습으로 앞장섰다.

엘위드리스 성은 독일의 고성처럼 삐죽삐죽하고 삼각기둥이 많은 성castle이 아니라 방어를 극대화한 성fortress처럼 네모나고 각진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실용성만 강조한 게 아니라 미의식도 첨가해 영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성의 색이 강하다.

그런 성의 한켠, 펜트하우스와 비슷한 구조의 귀빈실로 돌아오자마자 여자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염탐 마도구, 마도기의 수색이었다.

=……응, 염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김철수와 김영수의 객실까지 확인해주십시오.”

=그럴게.=

김철수와 김영수가 따로 배정받은 객실까지 조사를 끝낸 여자들은 펜트하우스형 귀빈실의 거실에 모여 엘위드리스 영주의 자리비움을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흐응~. 엘위드리스 영주가 정말로 외출 중일까?=

=프슈드 백작이 영지의 안정을 위해서 1년에도 수십 차례 출정 나가는 건 유명한 이야기야. 그걸로 거짓말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엘위드리스 백작의 이명이 오죽하면 나가 학살자일까요. 저도 안느 언니님 의견에 동감이에요.=

「프슈드라는 인간은 7급 희귀 직업자라며? 적어도 오는 길하고 지금 성안에 7급 희귀 직업자는 안 보였.」

침대 바구니에 드러누운 환연의 발언에 유르파가 그녀를 돌아보며 묻는다.

=성안이 보이는 거니?=

「응. 여유가 없는지 성의 중요한 방어 기능하고 방 몇 개를 제외하면 정령 차단 결계가 해제되어있어.」

=영주성의 방첩 기능이 해제되어있을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한가 보다. 자업자득일까 인과응보일까?=

유르파의 이야기에 미묘한 표정을 짓던 안느는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아영을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영이 너 지금 뭐 적는 거야?=

=예? 아, 엘미 언니한테 전해줄 거요. 방첩 기능이 다 꺼져있다니, 첩자를 심을 최적의 기회잖아요.=

거기다 엘위드리스 성 내부 구조도까지 그리고 있다.

한 번 방문으로 엘위드리스의 정보를 가능한 한 되는대로 다 털어버릴 심산으로 보인다.

=엘위드리스의 혈계술은 예언 예지 쪽이에요. 시간이 흐르면 어쨌든 혈계술이 다시 피어날 테니까 이 틈에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해요.=

“그쪽은 아영이 알아서 하고, 안느와 백려강은 날 따라와라. 도시를 둘러봐야겠다.”

=성불행 하게?=

“글쎄. 일단은 지금 느껴지는 기운이 혼재가 맞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다.”

=혼재? 도시에서 혼재의 기운이 느껴져?=

뜻밖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다.

그녀들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작게 저은 환인은 벗어둔 검은 장갑을 다시 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멀어서 아직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확인해봐야지. 맞다면 그 혼재를 손에 넣을 생각이고.”

흐라스린드에서 수백, 수천 명의 영혼을 성불시키며 영혼 감지 능력을 얻었었다.

그리고 차원 방랑자 출신의 여자 혼재, 세나 덕분에 혼재가 어떠한 감각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그 뒤로 히스론드를 지나 벨티칼에 이어 메리아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혼재의 기운을 탐지하지 못했었다.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그 후 팔라툼에 도착했을 때 대륙적으로 승령천제가 펼쳐졌는데 그때 혼재가 전부 강제 성불 당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랬는데 지금 이곳에서 자그마한 적색 소용돌이가 매우 희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엘카타가 보았던 전견시의 내용, 적색과 흑색의 영혼으로 펼친 혼령주.

그건 생물을 포함해 위상 에너지까지 사멸시키는듯한 효과였으니 만약 적흑령주를 펼칠 수 있게 된다면 여휘가 펼쳐놓았다는 역장에도 제법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이실리테와 노른은 남아서 유르파와 아영을 지켜라.”

「잉……. 나도 환인 따라가면 안 돼?」

“네가 여기 있어 줘야 안심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긴다면 유르파를 안전히 탈출시켜줄 수 있는 건 너니까.”

「이모렐도 있잖아.」

“이모렐은 김철수와 김영수를 보호해야지. 아니면 그 둘도 불러서 객실에 같이 지내고…….”

「아냐. 내가 여기 있을게. 다녀와.」

두 김씨가 거실로 들어와 함께 생활하는 건 싫은지 재빨리 태도를 바꾸는 노른이다.

환인은 그런 노른의 머리를 자상한 얼굴로 토닥거려준 뒤 귀빈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단정한 클래식 메이드 복장의 하녀가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성제님, 분부하실 것이 있다면 차임벨을 울려주십시오. 1분 이내에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도시를 둘러보려할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시길.”

=그, 그러시다면 안내인을…….=

“필요없습니다.”

차갑게 대꾸한 환인은 허둥거리는 하녀를 두고 엘위드리스 성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중간에 기사며 하인들이 당황해서 따라붙으려 했지만, 따라오든 말든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희미한 혼재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한다.

좌우로 불타고 무너진 고급 저택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으니 안느와 백려강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쪽은 귀족 거리 같은데…… 죽은 자들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혼재로 남을 만큼 억울했나?=

=저도 귀족 출신이지만 귀족의 탐욕은 소설로도 자주 등장할 정도니까요. 그런 게 아닐까요?=

=그건 그래…….=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향해 불타버린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걸어가던 환인은 점점 강해지는 혼재의 기운에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혼재의 기운을 감지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이제 고작 두 번째 감지해보는 혼재의 기운이었기에 자신의 감각에 약간 자신이 없었던 거다.

그렇게 걷던 중 뒤에서 갈색 쿠에를 탄 미리아=이오=엘위드리스와 엘위드리스 가문 기사 둘이 따라붙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내린 미리아 수석 집사가 쿠에의 고삐를 잡고 환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백려강이 부드럽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성제님을 방해하시면 안 돼요.=

=예,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성제님께 탈것을…….=

=성제님께는 노르스리넨이라는 녹색 쿠에의 신수가 있으세요. 그럼에도 홀로 나오신 이유를 생각해주시기 바랄게요.=

조곤조곤한 백려강의 말투에 할 말이 없어진 미리아는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열 걸음 떨어져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탈것의 인도를 거부당했지만 그녀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영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귀빈이 방문하면 수석 집사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 다음 영주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

그런데 방문자가 성제라니. 그런 성제가 호위 영혼 기사 둘만 데리고 귀족 폐허 거리로 오다니…….

자연스럽게 불안한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간다.

살해당한 귀족들이 원한에 불타 혼재가 되었다면 어쩌지.

내전이 발발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번 승령천제도 건너뛰었다. 혼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고 있는데 성제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눈치챈 미리아의 안색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설마…… 혹시?

기사들 또한 표정을 간수하지 못하는 모습에 안느가 환인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령, 뒤에 애들 표정이 어마어마해. 이쪽에 뭔가 있나 본데?=

“…….”

무엇이 있는 걸까. 먼 친족인지 엘위드리스라는 성을 쓰는 집사의 표정이 안 좋아질 정도라면…….

이윽고 미리아의 기색이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으로 변했을 때 환인의 앞에 드러난 것은 폭탄이 크게 터진 듯한 저택, 그것도 다른 여느 저택들보다 훨씬 크면서 더욱 심하게 파괴된 저택의 모습이었다.

=저, 성제님…….=

=집사 아가씨. 더 이상 말하면 화낼 거야.=

=…….=

=엘위드리스 가문이 성제님께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잖아?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조용히.=

안느의 냉정한 제지에 정신이 번쩍 든 미리아는 안타까운 마음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속만 썩였다.

잠깐 불타고 폭발한 집터 앞에 서 있던 성제가 도저히 영혼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훌쩍, 반쯤 무너진 10m짜리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부수세요!=

깜짝 놀란 미리아도 기사들에게 지시해 담벼락을 무너트린 뒤 기적적으로 남아 서있는 정문을 통과 중인 성제를 뒤쫓았다.

그리고 약간의 벽과 함께 외로이 서있던 ‘옛’ 저택의 정문을 지난 순간.

=이, 이름리아……!=

친척이자 가주 후보였던 여인의 붉은 영혼을 목격하곤 넋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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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컨디션 관리가 안되서 연재 시각이 오락가락하네용...ㅠㅠ

죄송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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