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 해협 도시 몰드레테
메리아놀 국정 요원의 시선을 피해 김영수와 김철수가 남 몰드레테로 공간 이동을 펼치는 사이, 환인은 호텔로 돌아와 여자친구들에게 외출했던 결과를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아니 이해가 안 가네. 항만 사무소의 관리원이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고?=
관리원의 행태에 안느가 분개하자 환인은 설탕과 꿀로 코팅한 딸기 과자를 그녀의 입에 물려준다.
“항만 관리사무소의 분위기를 보면 몰드레테의 영주는 실무에 별 관심이 없는 거겠지. 중요한 것은 물자의 수송일까.”
아무리 최고 관리자가 신경을 쓴다 해도 문화가 이렇다면 실무자의 횡령과 수수는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난 갑자기 수송량이 이렇게 폭증한 이유를 모르겠어. 지금 패시지가 고립되어서 물자를 많이 요구한다고 해도 어지간한 식품은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동안 다 썩어버릴 텐데…….=
환인이 사 온 수십인 분의 길거리 간식 중 오독거리는 식감의 닭고기 꼬치구이를 먹으며 중얼거리는 유르파에게 환연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엘위드리스.」
=……아.=
“엘위드리스 시가 천천히 복구 작업을 진행 중인 것 같더군요. 도시 인구가 반토막 났다고 해도 절반은 남아있다는 말이니 내전으로 망가진 터전을 일구려면 물자가 많이 필요한 법입니다.”
영주의 주된 관심은 아마도 그쪽일 것이다. 전후 복구를 위한 물자를 공급하며 벌어들이는 수익 말이다.
손에 묻은 설탕꿀을 핥던 안느가 그에게 묻는다.
=그럼 도령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번처럼 우리 모두 작아져서 노른을 타고 건너가?=
“돌아다니면서 보니 종족연합국가라서인지 루크랑 조인족과 플라비우스족도 다수 보이더군. 노른을 타고 날아가면 이래저래 눈에 띌 텐데 가급적 조용히 본섬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찾아보면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의 유람선 같은 게 있을 거예요. 그쪽으로 한 번 알아볼까요?=
아영의 제안은 환인도 생각해두었던 것.
그가 고개를 끄덕여 수락하려 했을 때 요정 크기로 돌아가 자기 머리만 한 감자튀김을 마악 먹으려던 환연이 움직임을 딱하고 멈추었다.
「……뭐지?」
잠시 멈춘 채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상한 모습에 여자들이 눈을 깜빡인다.
“뭐가 뭔데?”
「바다 쪽에서 뭐가 점멸하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와서 도시에 스며들었어. 목욕 가운 차림 같았는데 진짜 뭐지……?」
=바다 쪽에서 목욕 가운을 입은 사람이 연속 점멸로 도시에 들어왔다고?=
안느가 되묻자 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4km 바깥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왔는데…… 헛것을 봤나?」
모험가나 탐험가, 하다못해 여행자 같은 차림이었다면 암살자인가,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줬을 텐데 목욕 가운 차림이라니.
여자들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환인이 물었다.
“용모나 인상착의는 확인했나.”
「진짜 1초? 0.5초? 그 순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져서 못 봤어. 목욕 가운에 너무 신경이 쏠려가지고.」
“다들 무기와 장비를 챙겨라.”
여자들은 2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재빨리 일어나 각자 전투를 준비했다.
잠깐 멍해졌을만큼 그의 목소리가 평온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환연이 말한 게 그만큼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느가 벗어두었던 등대의 빛 코트를 입으며 유르파에게 물었다.
=율이 언니, 1초만에 수 킬로미터를 주파하는 연속 점멸은 차원 방랑자의 희귀 능력이겠지?=
=응. 비교적 간단한 수 미터 공간 이동마저도 좌표 지정과 공간 연결에 적어도 1초 이상이 들어. 그건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제곱 이상으로 증가하는데 1초 만에 수 킬로미터……? 그건 술법이 아니라 권능 영역이라고 봐.=
환연도 먹으려던 감자튀김을 내려놓고 괴한들의 이동 경로를 통해 그자들이 숨어들었을 법한 곳을 땅, 바람, 불, 물의 정령을 불러다 광범위 탐색을 시작했다.
천릉의 외투를 걸치고 광명창의 코어를 꺼내 들던 환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의아하군.”
=뭐가?=
벗어두었던 등대의 빛 코트를 입고 가슴 단추를 꽉꽉 잠그던 안느가 그를 돌아본다.
“그 목욕 가운의 괴한이 암살자라고 가정한다면 목욕 가운 차림이라는 것도, 능력을 대놓고 쓴 것도, 바다를 건너 온 것도 무엇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상황에 이야기를 끼워서 맞춰 본다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암살자가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임무를 거부한 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이탈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메리아놀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일 처리를 이렇게 허술하게 한다고?
……콰쾅……!
그때 폭음이 방음 창문을 뚫고 객실 내부를 흔들었다.
충격에 객실이 작게 흔들리고 창밖으로 흑연을 머금은 붉은 화염이 꽃망울처럼 피어난다.
달려간 아영이 창문을 열자 사람들의 비명과 쿠궁, 쾅, 쿠구구— 크고 작은 진동 및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거기에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매캐한 탄내까지.
「환인, 찾았어. 목욕 가운을 입은 인간은 둘인데 뭔가 검은색 제복을 입은 여섯과 싸우, 아니 일곱… 여덟…… 에이, 하여튼 목욕 가운 인간 둘이 계속 늘어나는 제복 차림 인간들하고 싸우는 중이야.」
“…….”
「그런데 그 목욕 가운 인간, 아무리 봐도 환인 네 동네 인간 같은데? 동양인이라고 하던가.」
“가보지. 모두 따라와라.”
=네.=
=응!=
콰과광!!!
“이 씨발!!”
김영수는 자신과 김철수를 향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공간 지각 능력으로 파악, 공간 이동 능력으로 흘려내며 쌍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대놓고 죽이려고 하다니!
콰광—!!!
날아드는 집채만 한 고열의 화염구를 재빨리 딴 곳으로 전이시켰더니 마치 미사일이 터진 것처럼 화염이 확 피어오르며 열풍이 불어닥치고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그의 귓가를 찔렀다.
김영수의 공간 지각에 사람들이 산채로 불타올라 너울거리는 것이 감지된다.
“……이, 씹새끼들아!!”
“야! 김영수!!”
발작적으로 공간 이동을 펼치려던 김영수는 무너진 집의 잔해 속에서 들려온 김철수의 고함에 멈칫했다가 그가 숨어있는 차원벽 쉘터 안으로 공간 이동을 펼쳤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얼굴만 한 틈을 메워버린 김철수가 핏발선 눈의 김영수의 어깨를 잡고 소리친다.
“저 새끼들 우리 능력을 카운터하고 있어! 너나 나나 지금 저 새끼들을 잡는 건 무리야! 맞서다간 죽어!”
“무리 아니라고! 저 새끼들 공간 이동으로 잡아서 땅속 깊은 곳에 처박아버리면……!”
이유야 어쨌든 자신 때문에 아무 상관 없는 사람 수십 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처음에는 사리사욕과 욕망 때문에 누구 한 명을 죽이기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차원에 보내버리는 임무였다.
그걸 받았을 때만해도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사람이 죽는 꼴을 바로 옆에서 보자 죄책감과 두려움과 분노에 이성이 마비된다.
머리에 피가 거꾸로 오른 김영수가 다시 공간 이동을 펼치려는 걸 붙잡은 김철수가 그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새꺄 정신 차려!! 저 새끼들이 그 정도 준비도 안 했겠냐?! 마도기 중에서는 공간 좌표를 교란하는 것도 있는데 거기에 당하면 너는……!”
쿠광, 쿠구궁. 쿠그그그그……!
갑자기 차원벽 쉘터 내부가 흔들리는 것에 흠칫하고 고개를 든 김철수는 벌꿀집 무늬의 반구 형태 차원벽을 둘러보았다.
차원벽은 그 어떤 공격과 충격을 내부로 전달하지 않는다. 한다면 땅을 통해 전달…….
“김영수!”
“씨발!!”
김철수를 잡고 공간 이동을 펼치자마자 그들이 숨어있던 곳의 땅이 싱크홀처럼 쑥 꺼지며 막대한 흙먼지가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둘을 향해 날아드는 메리아놀 심판관들의 불의 파도와 바람의 폭풍.
하나하나가 집을 가볍게 삼켜버릴 정도의 규모인데 두 가지가 중간에 합쳐지자 거대한 화염 폭풍을 일으킨다.
그걸 공간 이동시키거나 할 수 없어 김영수가 허둥거리며 재차 공간 이동을 펼쳐 화염 폭풍 범위를 벗어난다.
둘이 공격을 회피할 때마다 회피 지점을 예측한 것처럼 공격이 쏟아지며 유탄이 도시 곳곳에 떨어져 폭발하니 도시가 아비규환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씹! 아무래도 추적 마커가 찍힌 거 같은데……!’
김영수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공간 이동하던 김철수는 공간 이동을 할 때마다 예리하게 날아드는 공격에 기겁하면서 필사적으로 차원을 격리하거나 유리시켜 막아낸다.
동시에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리 굴려봐도 답이 안 나온다.
북 몰드레테의 호텔을 나와 우선 옷을 구하기 위해 옷 가게로 향했던 둘은 그때부터 메리아놀 심판관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었다.
김영수와 김철수도 마냥 당하지만 않고 심판관들의 공격을 막고 피하며 침착하게 반격하려 했었.
공격받을 것은 이미 상정했었기에 냉정해질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심판관들이 공격해온 순간 김영수의 공간 이동 직후 김철수가 차원 유리로 심판관들을 날려버리려 했는데.
‘틀림없어. 우리를 죽여야 할 사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우리 능력을 카운터치는 법을 가르친 거야!’
심판관들은 김영수가 공간 도약을 펼치면 자신이 차원 유리를 걸기도 전에 전력으로 몸을 날려 차원 유리 범위를 벗어나 버린다.
공격 도중이라도 김영수가 공간 이동을 쓰면 일단 전후좌우, 아무 곳을 향해 몸을 날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식하지만 장비를 다 잃어버린 둘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김영수가 온갖 암기와 독이 든 캡슐 주머니를 지니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냈을 텐데 소지품은 추적과 모종의 리모트 컨트롤을 우려해 호텔에 두고 온 상황.
소지품이라곤 금화 두 닢뿐인 둘은 결국 도망치듯이 북 몰드레테를 나와 연속 공간 이동으로 해협을 건넜다.
건너는 도중 너무 연속된 이동에 김영수가 지치면 바다에 차원벽을 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는 식으로 남 몰드레테로 넘어와 겨우 한숨 돌렸는데 설마 여기에서도 심판관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 굴리는 동안 심판관들이 날리는 범위 공격을 계속해서 피하던 김영수가 이를 으득 갈면서 김철수에게 물었다.
“야, 김철수! 5~6급은 되어 보이는 저 새끼들이 저렇게 나오면 도구도 없는 난 손쓸 방법이 없어! 어떻게 해!? 그냥 도망쳐?!”
심판관들이 정말 공간 이동 저해 마도기를 지녔다면 결정적인 순간 치명적인 반격을 받아 뒤질 거다.
자신이 죽으면 기동력이 없다시피 한 이 새낀 차원벽 안에 숨어있다가 방금처럼 차원벽째로 생매장당하거나 차원벽 안에서 존버타다 굶어 죽는 길밖에 없다.
“안돼, 도망치는 건 어려워!”
이쪽이 배신할 걸 짐작한 것처럼 준비해놨는데 어디까지 손을 써놨을지 어떻게 알아!
무엇보다 우린 지도도 없고 식량도 없고 가진 물건도 없다. 여기에 목욕 가운 덜렁 한 장만 입은 채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럼 어쩌라고! 더 버티는 것도 힘들어!!”
“시발 생각 중이니까 좀 더 버텨봐!”
가뜩이나 어지러운 공간 이동 때문에 멀미 날 것 같은데……!
그때였다.
피이잉—
김영수의 공간 지각 범위로 갑작스레 화살 세 대가 들어오더니 마악 화염 구슬을 다시 던지려던 심판관의 사지와 배를 꿰뚫는다.
꽈르르릉—
끄아악……!
이어서 한발 늦게 터진 우렛소리와 감전 당한 것처럼 온몸을 흔들다 풀썩 쓰러지는 심판관.
우르릉, 꽈르릉, 꽈광—
뒤이어 화살이 쉼없이 날아들자 심판관들이 놀란 토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런 토끼를 쫓는 미녀들을 발견한 김영수와 김철수는 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옅은 호박색 머리카락의 여신이 세 자루 빛의 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자신들은 결코 접근하지 못했던 근접 직업의 심판관들 사지를 썰어버린다.
티 없이 깨끗한 순은의 머리카락 여신은 온몸에 빛을 휘감고 섬광처럼 움직이며 얼을 타는 술법 계통 심판관들을 쫓아가 방패로 후려쳐 박살을 내거나 다리를 잡아 땅에 패대기친다.
날아오르거나 여신들에게 반격하려던 심판관들은 눈 깜짝할 때마다 고슴도치처럼 몸에 화살이 돋아나 감전당한 듯이 춤추고, 단검이나 화살로 기습하려던 엽사 계통의 심판관들은 잠깐 고개를 돌릴 때마다 온몸의 힘줄이 잘린 채 풀썩풀썩 쓰러지고 있었다.
“……야, 영수. 저기, 저기 봐.”
“어, 어?”
그 모습을 높은 건물 지붕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김영수는 김철수가 자기 뺨이며 옆통수를 두드리면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했다.
척 봐도 같은 한국인이지만 한국 연예계 10대 남신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을 미남이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
국장 씨발년이 준 성제 자료철에 나와 있던 인상착의 초상화보다 좀 어리고 분위기가 다르긴 한데 성제…… 맞겠지?
왠지 쫄리는 눈빛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던 김영수는 그 잠깐 사이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던 심판관들이 네 명에게 전부 제압당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메리아놀 심판관들이 누구인가. 메리아놀 내부에서만 활동하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전원이 5급 직업자 이상으로 이뤄진 메리아놀의 자타공인 최고 전투 집단이다.
“그런 새끼들을 무슨 파리 잡듯이…….”
김영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김철수가 멍하니 중얼거리다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성제(로 짐작되는 남자)가 자신들을 향해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하고 있었다.
도망가면 죽는다는 눈빛으로.
김영수와 김철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환인. 저 인간들 한국인 맞아?」
“그래.”
씨발 씨발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었다.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트립하기 전, 세계 규모로 흥행한 OTT 드라마 때문에 shibal이 전 세계로 수출되긴 했지만, 저 외모를 보면 원조 씨발인게 틀림없다.
환인은 멍하니 건물 위에 선 그들을 바라보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곤 흠칫거리는 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즈음 심판관들을 모두 제압한 여자들이 굴비 엮듯 심판관들을 끈으로 묶어 끌고 왔다.
=도령, 다 때려잡았어.=
=저도요!=
사지가 잘리거나 팔다리 힘줄이 잘리거나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거나 고슴도치처럼 몸의 앞뒤로 화살이 마구 박혀있거나.
공통점이라면 재갈이 물려 읍읍거리기만 한다는 것이다.
“수고했다. 수고하는 김에 조금 더 힘 좀 쓰지. 이실리테와 이모렐, 노른, 백려강은 돌아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을 이쪽으로 인솔해와라. 안느와 아영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유르파도 회복약으로 사람들을 치료해주십시오.”
여자친구들을 칭찬하고 다시 임무를 주어 보내려 하자 이실리테가 묻는다.
=주인님, 이자들은 어떻게 하시고요?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은 위험…….=
말하다 말고 환인의 광명창에 심판관 열셋의 목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이실리테는 입을 다물고 부상자를 구출하러 움직였다.
=거기 당신들,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사람들을 구하러 움직이세요. 그쪽은 힘이 세 보이니 절 따라오시고요.=
=우, 우리가 왜요?=
=사람을 구하는데 왜냐는 말은 도리에 맞지 않아요. 어서 따라와요.=
=윽…….=
선명한 아우라를 드러내고서는 구경 중이던 구경꾼들을 끌고 흩어져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하는 여자친구들.
환인은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다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목욕 가운 차림의 남자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면서 꽤 고생했는지 하얀 목욕 가운 곳곳이 찢어지거나 불에 그슬리거나 젖어있어 몰골이 상거지 꼴이다.
시선이 다시 마주치자 두 남자는 흡사 사신을 본 것처럼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김영수와 김철수의 눈에 환인은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13명을 단숨에 죽여버린 미친 사이코패스 살인마였으니까.
게다가 뭔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뱀……이 아니라 용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기분이…….
“처음 뵙겠습니다. 두 분, 한국인 맞으십니까.”
“예? 예, 예! 마, 맞아요!”
“마, 맞습니다!”
“간단히 통성명부터 할까요.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온 지 5년 정도 지났고, 트립 당시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어? 스물여섯이면 지금은 서른하나란 말인데 왜 저렇게 어려?
김철수는 속으로 당황하면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는…… 기, 김철수입니다. 이 새낀… 아, 아니! 이놈은 김영수고요.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온 지 2년 정도 됐습니다. 저희 둘 다 강의 들으러 학교로 가다가…… 넘어왔어요.”
인사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는 둘의 모습에 환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강의라면 3월초 정도입니까.”
“네, 네. 23년 3월이요.”
대학생인가. 자신이 트립하고 한 달쯤 뒤라는 말이니 개강일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허를 찌르는 것처럼 살기와 함께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두 분이 메리아놀에서 절 죽이기 위해 보낸 암살자입니까?”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저희는 뭣도 모르고 왔다가 뭔가 이상해서! 임무를 거절하려고 했는데……!=
“…….”
화들짝 놀라고 심장이 철렁했다는 것처럼 허둥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두 남자는 말 없이 담담하게 지켜보는 환인의 행동에 이해 못할 위압감을 느끼며 땀을 뻘뻘 흘렸다.
만약 진실과 거짓이 반반씩 섞였다는 걸 상대가 알아차렸단 걸 알았다면 사색이 되었겠지.
“두 분은 어떤 식으로 니오네브레스에 넘어오게 되었습니까.”
“그게…… 비싸 보이는 금화를 길 가다 주웠는데, 경찰서에 맡기기에는 강의 시간이 늦을 거 같아서…….”
수업이 끝나면 나가서 경찰서에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패시지의 어딘가였다고.
“패시지에 여러분과 같은 방식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 대충 60명 정도 되는데……. 말은 안 하지만 대부분 저희처럼 뭔가를 줍고 난 뒤에 넘어온 걸로 알고 있어요…….”
처음 대답만 거짓과 진실이 반반씩 섞여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진실이다.
아마 구슬림에 넘어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되어서는 마음이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이! 여기 약초랑 붕대 좀 가져와!=
=사제님! 여기 이사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거 같아요!=
=아아악… 나죽네에….=
=사, 살려줘…….=
=팔다리 부러진 정도는 참아! 더 위험한 사람이 많다고!=
환인이 잠시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이들의 행동 배경에 대해 유추하고 있자니 부상자가 계속해서 들것에 실려오거나 누군가에게 업혀서 오니 주위가 삽시간에 야전 병원처럼 변했다.
환연의 탐색에 발견되는 부상자가 줄지어 눕혀졌고 안느는 비교적 상처가 덜 심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성술로 치료한다.
아영은 자신에게 이송되는 심각한 상태의 사람을 계속해서 치료해가고 유르파도 회복제를 양손에 들고 바삐 움직이니 점차 주위가 소란스러워져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김영수와 김철수의 긴장감은 끝도 없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성제와 직접 마주하고 있다보니 이유는 모르겠는데 계속 몸이 떨린다. ‘그냥 도망칠까?’ 둘이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일단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척척척척—
번쩍이는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주황색의 땅신교단 사제복, 신관복을 입은 성직자들.
성직자들은 곧장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달라붙지만, 병사들은 주민들을 억지로 헤치며 접근하니 주변이 도떼기 시장처럼 삽시간에 북적거린다.
=거기! 당신이 저 여자들의……!=
척 봐도 뇌물로 배에 기름이 낀 곰 머리의 루크랑족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환인은 말없이 손을 모아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파아아앗—
주위를 따스하게 감싸며 널리 퍼져나가는 평온의 파동에 주위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며 모두의 시선이 환인에게 쏠렸다.
그리고 환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인웅족 루크랑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 제 영혼 기사들이 어쨌다는 겁니까.”
환인이 눈에 황금빛 광채를 일렁이며 노려보자 멍하니 서 있던 갈색곰 머리의 루크랑 남자가 딸꾹질하면서 고개를 붕붕 휘젓는다.
=아, 아닙니다! 저 여자분들의 일행이 되시는… 분이신지! 그걸 여쭈려고 했던 겁니다!=
“맞습니다. 도시를 파괴하던 범죄자들을 제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중이었지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다 안다는 차가운 목소리에 곰 머리의 남자, 영주성 서기 집사가 화들짝하고 손을 저었다.
=무무문제라니요! 전혀 없습니다! 그보다, 호, 혹시…… 성제… 님이십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냐고? 당연히 중요하지! 그런데 중요하다고 말했다간 날벼락을 떨어트릴 것 같은 표정인데…….
서기 집사는 꿀이 앞에 있지만 먹지 못하는 곰처럼 끙끙거리다가 목이 달아난 시체 열세 구를 보고 문득 자기소개를 안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 저는 몰드레테 영주님의 수석 서기 집사, 웅골로이라고 합니다. 이, 이 자들이 도시를 공격한 범인들이겠군요?=
“예. 내버려 둘 수 없어 임의로 처분하였는데 영주님의 권한을 침범한듯해 조금이지만 우려가 듭니다.”
=그으…….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듯싶습니다! 허, 허락하신다면 저자들의 시체를 저희가 수습하여 영주님께 보고를 올리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더해서 저것으로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주님의 ‘자비’를 바란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정 단어에 하는 강조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곤 웅골로이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 예! 영주님께 꼭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벌벌 떠는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웅골로이가 심판관들의 시체를 챙기라고 병사들에게 소리쳐 명령을 내린다.
김철수와 김영수는 허겁지겁 심판관의 시체를 챙기는 병사들과 그런 병사들을 재촉하는 서기 집사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두려움은 평온의 파동 덕분에 다 가라앉았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성제의 믿을 수 없는 위세.
대체 얼마나 위세가 드높기에 그저 정체를 밝히고 평온의 파동에 말 몇 마디로 저런 배불뚝이 귀족이 굽신거리는 걸까.
저 곰 대가리의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 콧대가 더럽게 높은 귀족이 틀림없을 텐데 저렇게나 굽신거리다니, 저게 성제의 권력인가?
차원 방랑자라고 하면 늘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여기던 것들의 비굴한 꼴을 보니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그런 둘에게 환인이 다가와 웃으며 금속제 토시 같은 것을 내밀었다.
“저기…… 이건…….”
착용하라고 내미는 거 같은데 척 봐도 뭔가 좋지 않은 물건으로 보여 그를 바라보았지만, 대답 없이 조용히 웃음만 짓고 있다.
저 표정에 담긴 뜻과 분위기를 읽지 못할 김철수가 아니다.
“맨살에 착용하십시오.”
주눅이 든 김철수는 조금 투박한 은색의 금속제 토시를 팔에 착용했고, 그 순간 몸 안의 기운 대다수가 봉인되어 능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영수도 토시를 찼다가 그걸 깨닫고 두 눈에 두려움을 드러낸다.
이제 성제가 마음먹으면 자신들은 저항도 못 하고 목이 달아날 테니까.
“실행 중간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두 분이 절 암살하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임시 조치로나마 능력 봉인 마도기를 착용시킨 거니 이해해주십시오. 제게 협조해주시고 해가 없다 판단되면 마도기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예…….”
“네.”
두려움도 잠시, 논리 정연하고 배려해주는 듯한 환인의 이야기에 두 남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살벌한 성제의 기세가 거의 다 사라지기도 했고, 문답 무용으로 열셋이나 되는 심판관의 목을 쳐버린 성제인데도 자신들한테는 폭력을 안 쓰고 봉인구만 채웠다.
적어도 자신들을 때려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란 이야기 아닌가.
저 심판관들에게 한 것처럼 팔다리를 자르고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으면 봉인구를 채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오빠! 이 두사람 데려가서 일 좀 시켜도 되나요?! 일이 너무 바빠요!=
“그래.”
두려움이 아주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하던 둘은 느닷없이 아영에게 끌려가 이것저것 심부름을 바삐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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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다이스갓: 이걸 사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