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5 해협도시 몰드레테
길거리 데이트 겸 항만으로 가 선박 출항 일정을 확인한 환인은 대기가 생각 이상으로 길다는 것에 살짝 눈을 찌푸렸다.
안느의 예상대로 물자 유동량과 통행량이 폭증하면서 현재 몰드레테의 선박이 풀 가동 중이지만 전부 소화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정이 밀리고 있다는 거였다.
=우선해야 하는 게 물자의 이동이오. 사람의 이동은 뒷순위로 밀리고 있단 거지.=
환인은 잠시 침묵하다 덥수룩한 산적 몰골의 인랑족 루크랑 남자 항만 관리원에게 물었다.
“승선 신청을 넣으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예약해도 언제 자리가 날지 모르오. 지금으로는…….=
항만 사무실, 파라락, 일정표와 예약 대기표 종이 다발을 넘겨본 관리원 남자가 툭하고 내뱉는다.
=6일 정도 걸리겠군.=
“…….”
인원이 몇인지 묻지도 않고 날짜만 이야기하는 태도에 환인은 무표정으로 심드렁한 항만 관리원을 응시했다.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저기서 말한 6일도 기한 없이 죽죽 늘어날 테지.
대놓고 탐욕을 드러내는 모습에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덥지근한데다 젖은 개 냄새로 가득한 20평 남짓 목조 사무실에 더 있다간 짜증이 드러날 것 같아서였다.
‘감정이 생겨나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군.’
이전이었다면 이런 환경에는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을 것이고, 뇌물을 요구하는 항만 관리원에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으름장을 놓아 적당히 승선 방향을 찾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저런 놈과 한시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저런 놈에게 돈을 쓸 바에 차라리 뒷골목의 거지에게 적선하고 말지.
콧구멍을 후비던 항만 관리원이 뒤돌아서던 환인을 향해 이죽거린다.
=그냥 가시려고? 우리 관리사무소가 몰드레테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오. 다른 곳은 상황이 더 나쁠텐데.=
“…….”
돌아서려던 환인은 멈칫했다가 관리원을 돌아보며 살기를 확 내뿜었다.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관리원에게만 집중해서.
=……!?=
놀란 고양이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선 관리원을 향해 환인도 나지막이 이죽거렸다.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이죽거려서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뭐, 흑혈여우처럼 목숨이 여섯 개라도 됩니까?”
=그, 그…….=
환인은 빙그레 웃으며 관리원에게 묻는다.
“뇌물을 요구하는 당신의 행동에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할 테니까. 하지만 적당히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려는 무고한 손님을 조롱하고 비웃어서야 쓰나.”
말하며 능력을 사용한 척, 방벽 패널을 검의 형태로 한 자루 소환해 관리원의 책상을 세로로 쫙 쪼개버리자 흐억, 하고 관리원이 의자 채로 넘어간다.
척 봐도 고위 능력으로 보이는 빛의 검이다.
사무실의 직원들과 직업자 경비원들이 긴장하는 것을 본 환인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적의는 없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소란을 피워 미안합니다. 저자가 워낙 성질을 긁어대는 통에 그만.”
=크흠. 폭력은 곤란하오.=
들어올 때 관리소의 경비 책임자로 판단한 남자가 지적하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그를 향해 열은화 한 닢을 튕겨주었다.
뇌물을 받아 챙긴 경비 책임자가 히죽 웃는다.
=……하지만 이해하오. 나라도 내게 저랬다면 골통을 쪼개놨을 테니까. 책상이나 서류 같은 건 이쪽이 정리해놓겠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고맙습니다.”
=무얼. 자, 오늘은 끝나고 술이나 한 잔씩 하자고.=
경비 책임자가 직원들과 동료들을 향해 소리치자 다들 웃으며 좋다고 찬성한다. 일부에서는 =내 저 새끼 언제고 저럴 줄 알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쨌든 돈이면 안 될 일이 없다.
환인은 주저앉아 오줌을 지린 관리원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 뒤 의자에 앉히고는 살기 어린 미소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밤길 조심해라. 뒤지고 싶지 않으면.”
=……딸꾹.=
하얗게 질린 관리원은 적어도 한 달, 밤에 싸돌아다닐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참 좋은 말이야.」
관리소를 나오자 팔짱을 낀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던 환연이 씨익 웃는다.
환인도 씩 웃어주고는 바로 옆 부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들 몇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영을 즐긴다고 보기에는 장소도, 복장도 안 맞다. 그 시선에 환연이 그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귀찮게 치근덕거려서. 그래서? 노른을 타고 넘어갈 거야? 아니면 내가 바다에 길을 만들어줘도 되는데?」
고개를 작게 저은 환인은 시가지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자들은 없던가.”
「찻집에서 나온 뒤로 줄곧 지켜보는데 의심 가는 부분은 없어. 이쪽을 지켜보는 인물도 없고 누군가를 쫓아다니면서 관찰하는 인물도 안 보여.」
환연이 릴라이스와 합체한 뒤 가장 크게 바뀐 점이라면 단연 정령 감응을 통한 감시 능력이다.
이전에는 환연이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지시해서 수동으로 감시해야 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환연이 볼 수 있는 곳도 제한되었고 정령이 놓치는 곳은 그녀도 보기가 어려웠다.
24인치 모니터에 컴퓨터 한 대로 화면을 8분할, 16분할 해서 일일이 두 눈으로 감시하는 느낌?
이 때문에 도시 같은 곳에서 이전의 환연은 감시를 크게 넓힐 수 없었다.
기껏 해봤자 지형을 파악하거나 염탐하거나 두드러지게 돌출행동을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정도.
그랬는데 지금은 수십 개의 모니터에 그 숫자만큼의 컴퓨터를 붙여놓고 AI까지 붙여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쏙쏙 빼먹는 느낌이다.
도시에서도 수 킬로미터 범위를 영역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동태를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상급 정령들과 생각이 이어진데다 그 애들도 도와주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아직 암살자가 도착하진 않았다고 봐야겠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북 몰드레테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겠지?」
환연이 팔짱 낀 팔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니 야들야들한 젖가슴의 폭신한 감촉이 팔뚝을 짓누른다.
그 도발에 환인은 팔짱을 풀고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팔뚝으로 감아 당기며 그녀의 밑가슴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다섯 손가락을 모아 그녀의 작은 머리만큼 커다란 가슴 밑을 간질간질하니 물빛을 머금은 단발이 찰랑일 정도로 움찔움찔한다.
「이해, 이해가 안돼. 그놈들은 다 머저리들인가? 통하지도 않을 암살자를 왜 자꾸 보내나 몰라.」
자신의 팔 안에서 살짝살짝 몸을 떠는 환연의 체구를 느끼며 환인은 말을 받았다.
“지금 메리아놀이 보낼만한 인물이라면 각성한 차원 방랑자뿐이라고 생각한다. 희귀 직업자일 테니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고 여겼겠지. 들켜도 댈 핑계가 있으니까.”
「핑계?」
“같은 차원 방랑자인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자들의 독단이라고 말이다.”
「그……거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 아니야?」
밑가슴을 간지럼 당하던 환연이 그의 손목을 잡고 슬쩍 밀어내지만, 잠시 밀려났던 환인은 다시 그녀의 밑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어차피 나와 메리아놀의 관계는 파국인 상태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핑계지만, 지금 메리아놀의 시국을 생각하면 제법 먹히는 핑계이기도 하지.”
우리가 안 했다니까? 걔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차피 너랑 나랑은 원수 관계잖아?
「네 능력……이, 아직 메리아놀 상층부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내 능력 대부분은 파악했겠지. 흑령주는 심증뿐이지만 내 행동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테고. 그런데도 암살자를 보내오는 건, 메리아놀이 하나의 군집 생명체가 아니라 순환제 왕정이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발생한 문제일 거다.”
겸사겸사 설마 수백만 명이 사는 도시에 영혼사가 대량 학살 술법을 펼치겠느냐는 심정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암살자가 공격해오지 않고 특정 장소에 대기한다면 그건 환연 말대로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이모렐이 발견한 암호를 고려하면…….”
“메리아놀 상층부도 한마음 한뜻은 아니라는 거겠지. 궁금한 점은 차원 방랑자를 어떤 식으로 회유했는지, 찾아올 차원 방랑자가 어떤 성격인지, 몇 명인지, 어떤 능력인지인가.”
그마저도 대충 짐작은 간다.
일단 한 명은 아닐 테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직업이 뭉쳤겠지.
자신이 사망하면 광역 영식이 펼쳐져 메리아놀 전체가 죽음의 땅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니 누군가를 죽이는데 능력이 집중된 직업자는 아닐 것이다.
이 점을 감안했을 때 가장 가설이 높은 것은…….
“두 명 이상, 그중에는 차원이나 공간과 관련된 능력을 갖춘 직업자들이 하나씩 있을 거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암호가 내걸린 것으로 보면 메리아놀도 위치를 빠르게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긴 거리를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날 죽이지 않고 격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겠지.
한 사람이 두 가지 능력을 다 갖추고 있을 수 있지만, 날 알고 있다면 내 반사신경과 반응 속도가 일반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데다 위상역쇄류도 알고 있을 테니 단판 승부라고 생각하고 최대 전력을 한순간에 부딪혀 올 게 틀림없다.
「한 명으로는 딜레이가 발생할 테니 두 명 이상이란 거네.」
“차원 방랑자가 직업자로 각성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 하니 세 명은 안될 거다. 놈들도 본진이라 할 수 있는 곳을 텅 비울 수는 없을 테니까 예상으로는 두 명이군.”
「차원 관련이랑 공간 관련.」
“그래. 여기서 궁금한 건 암살자들이 알고서 메리아놀에게 협조하는지, 아니면 속이기 쉬워 이용당하고 있는지인데…….”
어느 쪽도 말이 되다 보니 하나를 고를 수가 없다.
「그래도 꼽자면?」
“……달콤한 꿀에 빠진 파리 같은 놈들이라는 쪽에 손을 들고 싶군. 지하율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놈들은 차원 방랑자를 사육하는 것처럼 좋게 좋게 다루는듯하니까.”
자신들의 정보가 일부의 우연과 트롤 짓으로 하나하나 밝혀지는 중이란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김철수와 김영수는 환인의 짐작대로 북 몰드레테에 이미 도착해있었다.
관리국이 비밀리에 지원한 마도구와 마도기로 정체를 감추고 북 몰드레테의 한적한 호텔에 방을 잡은 김영수와 김철수.
둘은 국장이 제공한 성제 분석 파일을 며칠 동안 읽고 또 읽으며 암살각을 찾고 있었지만…….
검은색 제복 차림에서 평범한 귀족 복장으로 갈아입은 김영수가 짜증을 내며 서류철을 던진다.
“아니 씨발. 이 새끼 인간 아닌 거 같은데.”
“…….”
“야, 철수. 전직 프로게이머 지망생이 보기에 어떠냐. 각이 보여?”
김영수의 질문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바가지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한차례 저어 반듯하게 자른 앞머리를 찰랑이며 대답했다.
“국장이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을 경우, 서류철의 신빙성이 60%정도일 경우, 우리가 찾아간 정보 조합에서 제공한 성제의 소문을 합쳐서 분석해보면…….”
“해보면?”
“……시발, 우리 못 이기겠는데?”
철수의 심각한 어조에 영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런 그에게 철수가 서류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헤뷜트에 벌어진 사건을 다룬 대목이다.
“이거 봐. 추정하기로 최상급 정령하고 계약한 놈이 일행 중에 있다고 나와 있잖아. 저번 달에 투르시온 왕가 주최 파티에 참석했을 때 본 최고위 정령 생각 안남?”
“왜 안나겠냐…….”
최고위 바람의 정령. 그건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감시 레이더였다. 적대 행위가 포착되면 그 즉시 요격까지 하는 인공지능 방어 시스템.
김철수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최고위 정령의 감시 범위가 어느 정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500M는 넘겠지. 단지 그거뿐이면 연속 공간 이동으로 접근해서 다차원으로 날려버리면 되는데 문제는 영혼 기사들이야.”
성벽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실력의 7급 정령 기사, 미리아스툼 왕가의 가출 공주도 있고 6급으로 각성한 검희도 있다.
이 둘은 국장피셜 8~9급 정도의 강함을 지닌 희귀 직업자. 그뿐만 아니라 팔라툼 미궁의 중핵 육체를 탈취해 호위로 삼았으며 용인체의 궁수도 있고 7급의 암살자 출신 성술사도 있다.
“8급 승급자의 순간 반응 속도 범위가 분명 600m랬지?”
“엉. 고릴라 공주는 근접 특화니까 무시한다해도 검희의 다중검기 투척은 진심 위험해. 용인체도 명색이 영혼 기사로 두고 있으니 그만한 능력이라고 보면…… 근접전은 절대 못 해. 중심 범위에 가까이 갈수록 공간 이동을 끝내자마자 목이 달아날 가능성이 존나 높아져.”
애초에 자신들은 육체파가 아니다.
영수는 반경 500M를 초 상세한 미니맵처럼 모든 구조와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지역 내에서 마음대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 두 가지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은 공간을 비틀어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장벽을 펼치고 특정 지점을 잡아 뜯어 대상을 다른 차원으로 날려버리는 것뿐.
물론 효용성과 응용성이 말도 못 하게 뛰어나 두 가지 능력만으로도 메리아놀에서 손꼽는 직업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이 잡아 비튼 공간은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치즈 한 장처럼 잡아 비틀어버릴 수 있고 8급 술법사가 날린 속성 공격도 그 어떤 피해 없이 지워버릴 수 있다.
영수도 자신의 공간 내에서는 바늘 하나, 모래 한 알 떨어지는 것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기감이 예리하고, 그 공간 내에서는 딜레이 없이 연속 공간 도약을 펼칠 수 있다.
자신만 아니라 물질도 임의의 위치로 전송시킬 수 있어 준비만 되어있다면 8급 승급자도 간단히 죽일 수 있는게 영수인 거다.
하지만 응용력으로 전투에도 쓸 수 있다 뿐이지 실제는 전투 능력이 아니다.
각성하며 신체 능력이 특전사 정도가 됐다지만 그건 1급 근접 직업자와 겨우 비슷비슷한 정도.
김철수가 서류철을 툭 던지곤 뿔테 안경을 벗어 눈을 마사지하며 탄식한다.
“답이 없네, 답이 없어. 국장이 왜 이번 작전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하고 못 이길 거 같으면 그냥 도망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
“……영혼 기사들을 하나씩 치워버리면 어떨까? 영혼 기사만 없어도 성공 가능성을 크게 올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다시 서류를 들고 영혼 기사 항목을 읽던 김영수에게 김철수가 짜증을 낸다.
“집어치워. 이 새끼 보나마나 백 퍼센트 하렘 차렸을 텐데 자기 여자 하나라도 없어져 봐라. 눈에 불을 켜고 패시지로 달려가서 혼령주인가 그걸로 날려버릴걸.”
“성제 본인이든 영혼 기사든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경계심이 맥스 만땅 찍을 테니까 기회는 한 번뿐인데, 성제를 다이렉트로 노리자니 영혼 기사들이 문제고 그렇다고 영혼 기사를 노리면 성제가 가만 안 있을 거고…….”
하나하나 조건을 나열해보던 김영수가 별안간 벌컥 화를 낸다.
“아니 시발. 우리도 치트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새끼는 진짜 뭐지. 인간 맞아?! 게다가 뭐? 신?”
서류의 말미에 나와 있는 대목, 성제가 아신위에 도달해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글귀.
연신 씨발거리던 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
“…….”
아무리 봐도 국장은 자신들을 과대평가한 거 같다.
실력은 20% 정도 감추라고 해서 전부 드러내지 않고 감췄는데, 국장은 그 20%를 200%정도로 해석해서 자신들을 불렀던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 정보 조합에서 얻은 정보, 성제는 패시지로 향하는 중이란 이야기.
김영수는 그나마 자신보다 머리를 잘 쓰는 김철수에게 물었다.
“야…… 성제가 패시지로 가고 있다는 거, 패시지랑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고 봐야 하는 거 맞지?”
“그렇게 보는 게 정상이지……. 이길 자신 없으면서 자기 여자들 다 데리고 가는 거면 진짜 상종해선 안 될 미친 또라이 새끼고…….”
“…….”
“…….”
“……그냥 돌아갈까?”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하면 국장이 잘도 팔 벌려 환영하겠다?”
그 수박만 한 젖탱이의 국장이 두 팔 벌려 가슴을 출렁이던 걸 상상하던 김영수가 으흠, 헛기침한다.
“아니, 봐봐. 국장도 우리가 못이길 거 같으면 도망치랬잖아.”
“그래, 도망치라고 했지. 우리는 성제 암살을 공모했고.”
“…….”
김영수의 얼굴이 흐려진다.
범죄를 공모하다 공범 하나가 빠지려하면 기를 쓰고 막거나 죽여서 입막음 하는 게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꼭 등장한다.
자신들이 그 공범 꼴이 됐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뭐, 쓱삭하지 않더라도 이 세계에는 온갖 능력이 다 있다. 세뇌, 최면, 암시 같은 거.
둘에게 메리아놀을 향한 충성심 따윈 조금도 없었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숩고 힘과 권력도 챙겨주고 여자까지 주니까 눌러앉아 있었을 뿐.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랐는데, 북 몰드레테에 도착해서 암살 각을 찾기 위해 이거저거 알아보다 보니 그동안 안 써서 죽어있던 뇌세포가 서서히 깨어나는 느낌이다.
문제는 깨어난 뇌세포가 귀에다 대고 “너흰 좆됐어ㅋㅋㅋ”라며 속삭인다는 점일까.
“…….”
어느 일본 로봇 애니의 사령관처럼 두 손으로 턱을 받친 김철수가 별안간 눈을 번뜩이며 김영수에게 요구했다.
“야. 공간 지각으로 이쪽 지켜보는 사람 없는지 함 살펴봐라.”
“……없어.”
“범위 좀 더 늘려서 자세히 살펴봐. 우리 목숨하고 관련된 중요한 거야.”
김철수의 재요청에 김영수는 검지로 양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더욱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정말로 부자연스럽게 이쪽의 호텔을 관찰 중인 몇 명이 보였다.
자신의 알려진 지각 범위 500m 너머에만 모여있는, 의도가 명확한 모습에 김영수가 쌍소리를 내뱉는다.
“이 씨발 뭐야 이거.”
“진짜 좆됐네…….”
김철수가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김영수가 심장이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물었다.
“우, 우리 지금 감시당하고 있는 거야?”
“국장이 머저리도 아니고 우리한테 전부 맡기고 기다리기만 하겠냐. 아이 씨…… 야, 옷 다 벗어. 소지품 같은 거 전부 다 모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철수가 후다닥 자주색 망토와 입고 있던 옷과 아공간 손가방에 가지고 있던 소지품까지 싹다 내려놓는다.
애지중지하던 자주색 망토와 뿔테 안경까지 벗고 순식간에 팬티 바람이 되는 김철수의 모습에 김영수도 허둥거리며 몸에 걸친 걸 전부 내놨다.
이어서 객실의 흔한 가운을 가져온 김철수가 김영수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왕궁에서 가지고 나온 거 전부 내려놔. 추적 신호기나 폭탄 같은 게 있을 수 있으니까.”
“뭐? 폭탄?”
“지금 우리가 살길은 하나뿐이야. 그 새끼…… 가 아니라! 성제한테 가서 투항하는 거나 멀리 도망치는 거.”
“이, 시발거……!”
김영수는 갑자기 비약된 논리를 내뱉는 김철수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똑똑한 놈이란 건 확실했기에 내심 숨기려던 금화 주머니까지 전부 다 올려놓았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기다려봐 임마!”
이제 어떻게 하지? 남 몰드레테로 넘어가야 하나? 남 몰드레테에도 감시가 있을 텐데 성제하고 만나는 걸 들키면…….
그보다 성제도 되게 똑똑한 거 같은데 우리 원래 목적을 눈치채고 죽이려 들면 어쩌지?
‘차라리 메리아놀을 벗어나서 멀리 도망칠까?’
영수의 능력만 있으면 영주 성이고 뭐고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다.
보물창고에 숨어들어서 금화만 조금씩 빼돌려도 평생을 풍족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겠지.
패시지에 있는 성처리 노예들하고 집하고 이때까지 모은 재산? 아깝긴 하지만 여자는 딴 데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같은 차원 방랑자 출신 사람들? 알게 뭔가. 관리국은 차원 방랑자들끼리 친목질 하는 걸 경계한다. 실친인 영수 빼면 인간 관계라는건 한없이 얄팍하다.
하지만 그렇게 숨어 살자니 흔적이 많이 남을 거라는 게 걱정이다.
메리아놀은 국가가 아닌가. 아무리 숨어 지내더라도 자신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겠냐는 거다.
그걸 피하려면 도시를 벗어나 마을이나 촌락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랬다간 문명과 떨어진 생활을 해야 한다.
이제 와서 푸세식 화장실을 쓰고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얼굴을 씻고 힘들게 불을 피워 음식을 해먹어야 한다고?
성제한테 투신하는 것도 불안 요소가 있다. 자신들의 목적을 의심할 수 있으니까.
‘성제를 피해서 영도로 간 뒤에 보호를 요청하면…….’
아니, 성제가 영도에서 높은 신분이라잖아. 만약 자신을 피해 영도로 도망쳤다는 걸 안다면 괘씸하게 여길 수 있다.
머릴 벅벅 긁던 김철수는 긴장하고 있는 김영수에게 자신이 도출해낸 결론을 이야기해주었다.
“뭐야. 그러니까 성제한테 투신하는 게 제일 안전하단 이야기야?”
“제일 안전한지는 모르겠고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선택지야. 숨어 사는 방법도 있지만 마도구 없는 불편한 생활을 너 감당할 수 있겠어?”
“못하지…….”
“그러니까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인 거야. 그게 싫으면 역용 마도구로 겉모습을 바꾸고 촌락이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먹으면서 죽은 듯이 지내는 거.”
지금까지 니오네브레스에서 현대와 다를 바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해온 김영수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린다.
“아 시발……. 그냥 그때 국장이 말하는 거 무시 때렸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면 패시지에서 머무를 때도 뭔가 이상했어. 우리한테 제공되는 소식도 뭔가 제한적이었고 외출할 때도 여자애들이 달라붙어 왔었고…….”
한 번 의심하니까 계속 의심이 든다.
자신들과 떨어지려 하지 않는 여자들이 혹시 자신들을 감시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국장의 행동도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 은근슬쩍 교묘하게 부추기는 꼴도 뭔가가 뭔가인데 거기에 홀려서는 헬렐레하던 우리도…….
잠깐 침묵하던 김영수는 혹시 하며 입을 열었다.
“야. 메리아놀이 진짜 나쁜 놈들인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지. 니오네브레스에서 용은 대체로 신수인데 그 신수가 반년 동안 비를 뿌리는 것도 의미심장하잖아.”
어금니를 깨물며 대답하던 김철수가 샤워 가운 차림으로 다시 일어나며 말했다.
“성제한테 가자.”
“지, 진짜 가게? 계획이라곤 해도 암살하려고 했잖아. 그냥 멀리 도망가서 조용히 살면…….”
“도망가는 건 최악의 선택이야. 성제하고 패시지 사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만약 둘의 사이가 원만해진다면 그땐 진짜 우리 좆되는 거라고.”
“성제가 메리아놀하고 싸우다 지면 어떡하고?”
“그땐 진짜 도망자 찍어야지. 촉이 지금 말하고 있어. 메리아놀로 돌아가봤자 우린 처분당하거나 세뇌 당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나마 성제는 같은 한국 사람이잖아. 정에 호소하면서 패시지 내부 정보를 제공해보자. 안 통하면 존나게 튀고.”
이쪽이 무방비하게 접근하면 일단 대화라도 하려할테니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그때가서 도망쳐도 될 거다.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김영수도 그 방법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김철수처럼 목욕 가운을 입고 머릴 벅벅 긁던 김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럼 남 몰드레테로 간다?”
“어. 성제하고 만날 때까지 긴장타라. 까딱 잘못하면 그전에 암습당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너나 긴장 타 새꺄! 차원벽 늦게 쳐서 우리 다 죽게 만들지 말고!”
으르렁거린 김영수는 김철수와 함께 남쪽으로 공간 이동을 연달아 펼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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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철수 영희 하려고 했다가 영수로 바꾼건 안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