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 콜라이도 연합도시
강혁준 사건을 마무리 짓고 이틀.
그동안 환인은 출발을 미룬 채 영령군의 강화와 영령군의 능력 구조 파악에 힘을 쏟았다.
자신은 니오네브레스에서도 규격 외인 힘을 쓸 수 있지만,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부수고 파괴하는 것만이라면 지금도 충분하지만, 파괴의 화신처럼 모든 것을 부수고 망가트리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가 혼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변에는 그만을 사랑하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이 모여있으니까.
환인과 비교하면 많은 점이 미흡한 여자들이긴 하나 그건 애초에 비교 대상이 틀렸다.
그가 규격외이지, 이실리테와 안느도 니오네브레스 표준 무력 규범으로 보면 정상급이다.
가진 무위 하나만으로 라드세아, 벨티칼, 히스론드, 메리아놀 어디를 가든 최소 5급 호족이나 상급 백작 정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
유르파는 환인과 함께하며 니오네브레스의 수학과 과학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는 현대의 지식을 흡수해 독자 체계의 마도기,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수준은 주도 비술사 조합이나 조직의 장長을 맡을 정도. 비술뿐만 아니라 술법 쪽에도 성취가 있어 4급 술법사 정도의 실력을 낼 수 있다.
백려강도 용인체龍人體라는 인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물과 바람을 다루며 장래에 최고위 엽사가 될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아영은 일행에 합류하기 전부터 7급 성술사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는데 환인과 합류하며 선천적인 불치병, 감각과민증을 자신의 탤런트로 재흡수하여 회피 방어술 한정으로는 이실리테나 안느의 숙련도를 보여준다.
환연은 초월급 물의 정령과 합체했으며 노른도 쿠에 종의 신수로 그 능력을 유감없이 개화시켜나가는 상태다.
「노른 걔 머리에 늘 붙어 다니는 중급 바람 정령 있잖아. 그 애 덕분에 바람 속성 친화랑 바람에 대한 이해도와 친화도가 계속 오르고 있어. 듣자 하니 태어날 때부터 붙어있었다던데…… 노른이 신수가 된 데는 그 정령 덕분이 클걸?」
환연의 짐작에 따르면 노른도 조만간 최상급 바람 정령하고 계약할 수 있을 거라고.
그만큼 강한 여자들이지만, 환연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표준 규범 내에서의 강함이다. 국가가 동원한 군대와 싸우는 건 위험하다.
개개인으로 따지면 그녀들보다 강한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겠지. 그러나 그녀보다 조금 못하다거나 특정 분야가 약해 부족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국가의 힘으로 총동원령을 선포해 그런 이들을 모아 숫자로 밀어붙이면 그녀들로서도 속수무책.
환연이 정령술로 보조하면 어느 정도 벌충할 수 있겠지만 저주와 술법이 이쪽에 쏟아지고 저쪽은 강화와 회복이 쏟아지면 소모전으로 들어갈 텐데 그리되면 필패다.
환인이라는 규격 외가 있으니 늘 함께 있다면 문제는 줄겠지만, 각국에도 1~2명 정도는 규격 외의 존재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신의 사도라 부르는 자들과 백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나이를 먹을 동안 한 우물만 판 괴물들.
능력의 상성을 타지 않는 환인이기에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런 자들과 싸워도 제법 높은 승률을 점칠 수 있다.
혼자라면 맞서 싸우지 않고 hit & run 전술로 시종일 유린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 상태에서 여자친구들이 국가군에 기습당하면 위험하다는 거지.’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
벨티칼은 부족국가라 개인이 군을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히스론드는 절대왕권 체제와 비슷하지만, 현재 왕은 존재하지 않고 섭정과 아직 어린 쌍둥이 왕과 여왕뿐. 그 어린 왕들도 환인을 친형 친오빠처럼 여기고 있다.
메리아놀은 플뢰족과 프라우드족이 각각 대여섯의 왕가를 둔 순환제 왕정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체계다.
막말로 성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죽이면 영식으로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으니) 전군을 동원하려다간 왕권의 위협당할 수 있다.
개개인의 이념과 손익 계산 등으로 의견이 한데 취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호작약이라는 여왕이 다스리는 라드세아지만…….
만약은 늘 대비해두어야 하는 법.
환인은 이 때문에 자신은 물론 여자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줄 영령군의 구조 파악과 강화에 힘을 썼다.
아르겐테아 정찰병 다섯을 일렬로 세워놓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결과 대강의 메커니즘은 알게 되었다.
0. 영혼의 영령화英靈化는 심핵력 0.5%, 영기 2% 기준, 지속시간은 2시간이다.
0-1. 심핵력 0.5%를 주입하면 생전의 실력을 그대로 낼 수 있다.
0-2. 심핵력을 늘리면 영혼이 낼 수 있는 출력이 증가, 영기를 늘리면 지속시간이 늘어난다.
0-3. 생전 등급이 높을수록 영령화에 소비되는 심핵력, 영기가 소폭 늘어난다. 낮으면 반대로 줄어든다.
1. 강제력으로 영혼의 외형을 변화시킬 수 있다.
1-1. 한계는 1/3 정도. 이 이상 변화시키면 영혼이 고통을 호소한다.
1-2. 대가는 지속시간으로, 1/3을 변화시키면 33%가량의 지속시간이 감소한다.
2. 영령화 할 수 있는 것은 계약한 영혼뿐이다.
2-1. 정령에게 영령화를 시도하면 정령이 낼 수 있는 출력만 상승한다.
2-2. 무직자 미계약 영혼은 영령화할 경우 이성을 잃고 날뛰다 극히 쇠약해져 승천한다.
3. 영령화 상태에서 적지만 오감이 되살아난다.
3-1. 영령화 상태에서 음식을 섭취하면 지속시간이 소폭 증가한다.
3-2. 음식에 들어있는 생기의 양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
3-3. 도축한 지 얼마 안 되는 생물, 채취한 지 얼마 안 되는 식물일수록 증가 폭이 높다.
5. 영령화 상태라 해도 영혼의 특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1. 지속시간을 소모해 비행, 물질 통과가 가능하다.
5-2. 물질 통과 상태일 때에는 일시적으로 물리력이 봉인된다.
‘대강 이 정도인가.’
환인이 앞에 시립 해있는 영혼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의 차림이 생전 정찰대 정복 차림에서 알몸으로 되돌아간다.
영혼이 되어 사고방식 또한 바뀌었는지 알몸으로 젖가슴과 아래 골짜기, 부속지 등을 훤히 드러낸 상태임에도 수치심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다.
환인이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이런저런 실험을 할 때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들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정령한테 영령화가 안 통하는 건 아쉽네. 그게 됐으면 영령화를 미끼 삼아 계약을 시도해볼 만 했을 텐데.」
=결국 영령화는 도령하고 계약한 영혼들만 가능한 거네.=
=생전 직업의 등급이 높을수록 영기랑 심핵력 소모가 늘어나는 것도 좀 아쉬운데요? 현실적으로는 7급 직업자 영혼 35명을 부리는 게 한계겠어요.=
=7급 직업자 35명이면 나라도 뒤집어버릴 전력인데 아쉬워?=
=안느 언니님도 참. 나라 같은 건 오빠 혼자서도 엎어버릴 수 있잖아요.=
=그런 것보다 7급 직업자 35명의 영혼을 모으는 것부터가 문제 아니니……?=
=전 세계 7급 직업자는 다 합쳐도 500명이 될까 말까 한다고 하니까 현실적으로는 6급이 한계겠지. ……그런데 벨, 너 어딜 보는 거야?=
=넷?! 아아, 아니에요! 안 봤어요…!=
안느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백려강이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친다.
그 의미심장한 반응에 남자 정찰대 영혼을 돌아본 아영은 이윽고 아저씨처럼 으흐흐 웃으며 그녀의 뺨을 콕콕 찔렀다.
=다른 남자 거시기가 그렇게 흥미로웠던 거야~? 우리 벨 아가씨, 보기보다 엉큼하네~.=
=그, 그런 거 아니야아…. 그냥, 듣던 것보다 더 작구나 싶어서…….=
작아?
여자들은 플뢰 남자인 정찰대 영혼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발기하지 않은 상태라지만 여자 새끼손가락 두 마디 크기는 좀…….
여자들이 슬그머니 모여 숙덕거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게 플뢰족 남자 평균 아니니?=
=평균이죠. 세워도 여자 가운뎃손가락 정도니까요.
아영이 손을 펴서 자기 중지를 가리키자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풉, 웃음 지었다.
그의 우람한 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쌍할 정도이지 않은가.
=진짜 부속지 수준이네.=
=너무 작은 거 아니야……?=
=플뢰 여자도 좁고 짧으니까 뭐.=
=루크랑 남자는 동물하고 똑같이 생겨서 좀 징그럽다던데 플라비우스족 남자는 어떤지 알아?=
=플뢰족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에요.=
=……진짜? 아니 넌 그걸 또 어떻게 아는 거야?=
=현지에서 정보 수집을 할 때 남탕을 한 번 훔쳐본 적이 있거든요.=
=그럼 플라비우스족 여자도 속이 좁으려나?=
나름 목소리를 작게 한다고 하지만 환인의 뛰어난 청각은 여자친구들의 발칙한 이야기를 전부 캐치하고 있었다.
종족적인 문제로 경험이 많은 유르파는 섹스쪽 이야기가 나오니 눈치껏 한걸음 물러나는데, 남자라곤 자신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속닥거리는 걸 보니 귀엽다고 해야 할지 우습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환인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영혼들을 보다가 역소환시키며 판단을 내렸다.
‘영령군을 잠입이나 암살에 쓰기는 어렵다.’
일반 영혼 상태에서는 자신이 원기 방출로 양기를 채워주지 않으면 같은 영혼사를 제외하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하지만 영령화를 하면 강제로 가시화를 하는 데다 영령화 상태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몸에 희미한 빛이 뒤덮여있어서, 후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누구의 소행인지 특정하기 쉬워진다.
‘그렇다고 해도 불사의 군대는 이용 가치가 높지.’
앞으로 청색이면서 직업자였던 영혼의 확보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할 듯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야한 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떠날까.”
=응? 영령화 파악 끝났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현재 필요한 점은 대부분 확인을 끝냈다. 남은 건 동쪽으로 가면서 해도 돼.”
결명자 놈들이 어떤 차원 방랑자를 암살자로 보내더라도 처음은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패시지로 이어지는 각 길목에서 하얀 늑대들 첩보원들이 계속해서 상황을 전달해주고 있고, 강혁준 사건으로 발생한 영도 내부 혼란도 수습되었으니 콜라이도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짐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며 안느가 묻는다.
=그 영혼 탐지술은 결국 가르치기로 결정 났어?=
“대성녀님이 고심 끝에 상급 영혼사들 이상에게만 전수하기로 하셨다더군.”
영탐술靈探術, 모종의 저주로 인해 일반적인 방법으로 볼 수 없게 된 영혼을 찾아내는 술법.
영혼사의 능력이 아닌 술법이기에 이 술법을 배우면 영혼을 볼 수 있게 된다.
익히기 쉬운 술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 배울 술법은 아닌 이 술법이 술식연구기관에 수천 년간 봉인되어있던 이유는, 이 술법이 유출될 경우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로비 프런트에서 체크아웃하고 오랜만에 마차를 꺼내자 쿠에들이 마차에 다가가 기쁜 듯이 부비부비한다.
백려강이 그런 쿠에들을 쓰다듬어주다가 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악용이요…?=
“혼재의 주요 발생 원인은 원한이지. 그런 원한이 어디서 가장 많이 발생할까.”
귀족 태생인 백려강은 물론 안느도 환인의 질문에 정답을 바로 떠올렸다.
=정치 쪽이요….=
=정계지.=
“그래. 정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때다. 자신이 살해당했음을 깨닫는다면 귀족은 보통은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힐 테니까. 이 때문에 지금까지는 벨티칼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암살 같은 수단은 잘 동원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술법이 널리 퍼진다면 적어도 권력자들은 살해를 결심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술법으로 영혼을 찾아내어 제거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영혼에게는 일반적인 무기나 위상력을 쓰는 기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찾아보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영탐술을 봉인한 이유는 인간을 위해서였다. 인간들의 악의와 욕심에 영혼이 소멸당하기 시작하면 자애신의 분노가 지상에 강림할 수 있다는 게 당시 대성녀님의 판단이었으니까. 그러나…….”
현재의 대성녀와 대성녀 후보는 강혁준이 각성한 직업, 이름 없는 원한의 저주사가 남긴 여파를 우려해 영체 탐지 술법을 가르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강혁준은 모든 저주를 거두어들였다고 했지만, 대성녀 및 영성들은 이미 감염된 영혼이 그 감염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고 회의를 통해 판단을 내린 거다.
이 때문에 모든 영혼사들에게 성불행을 하며 자주색의 희미한 해골 형태의 폭발 목격담을 수집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안느가 조금 눈매를 늘어트리며 중얼거린다.
=강혁준의 일이 이래저래 문제를 남겼네.=
출발 준비를 끝내고 마차를 끌며 나아가는 길에 수백, 수천 명의 시민이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부촌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 보인다.
이미 이틀간 다섯 곳의 의원 저택이 불타올랐다.
이유는 깡패놈들에게 향응을 받아 놈들의 뒤를 봐주었다는 사실이 적발되었고, 처벌 없이 단순 면직으로 끝났다는 정보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환인의 작품이다.
영혼을 부려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인 환인이 손에 넣은 정보를 아영과 유르파를 통해 퍼트린 것이다.
물론 아영은 변장 도구로 변신했고 유르파도 비술로 정체를 감추어 환인의 작품이란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상원의원 넷 중 둘이 옷을 벗었고 하원의원 중 절반이 감옥에 갇히거나 시민들에게 얻어터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신관과 사제에게 치유를 받아 상처가 회복되어도 귀신같이 찾아온 시민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얻어터졌다.
이 혼란이 가라앉더라도 상원, 하원 선거가 남아있으니 논란의 불씨는 길고 오래 이어지겠지.
무엇을 숨기랴.
이 모든 것은 환인의 마지막 뒤끝이 작렬한 결과다.
자신을 귀찮게 만든 도시, 강혁준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간 도시에 내리는 뒤끝.
=…….=
=…….=
=…….=
중앙 광장을 지날 때 여자들의 시선이 중앙 분수대로 향했다.
보존 술법 처리된 막시아의 시체가 사람들의 노리개로 엉망진창이 된 게 눈에 들어온다.
어린애들이 기다란 작대기로 막시아의 음부와 항문을 쑤시며 놀고 썩은 야채나 과일을 배 속에 집어넣거나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을 가져와 시체를 범하게 하는 등, 말 그대로 모든 방법을 사용해 시신을 모욕하는 중이다.
여자들은 말없이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렸고 인식 장애 술법이 걸린 후드 망토 차림의 이실리테는 마부석에서 조용히 마차를 끌었다.
콜라이도의 시민들은 무광의 검은색 마차가 환인 일행의 것이라는 걸 모른다.
덕분에 일행은 시민들에게 길이 막히는 일 없이 조용히 콜라이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마차는 시레세아로 이어진 관도를 따라 열심히 달렸다.
정말 오랜만에 마차를 끌게 된 쿠에들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땅을 박차나갔지만, 노른의 상태는 그런 쿠에들과 정반대였다.
「…….」
“…….”
「…….」
“……노른, 할 말이 있으면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해라.”
「………….」
환인을 등에 태우고 달리며 1시간에 수십 번을 돌아보며 환인을 신경 쓰이게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할 말이 있다면 하라고 해도 아무 말 없이 달리기만 할 뿐.
이런 상태가 이틀, 성벽 태반이 무너져 초상집 같은 분위기의 시레세아를 통과할 때까지 이어졌다.
눈이나 표정을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신식 영혼의 눈으로 감정 상태를 읽자니 친구, 동료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쓰기 꺼려진다.
여자친구들에게 신식 영혼의 눈을 쓴 적은 있지만 그때는 사리사욕을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도 했었고.
첫날은 금방 발랄한 성격으로 돌아오겠지 했는데 그게 이틀이 넘어 사흘이 되어가니 계속 내버려 둘 수가 없다.
환인은 그날 밤, 여자친구들이 방랑자의 안식처를 설치하며 야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노른을 따로 불렀다.
하루하루 부쩍 자라고 있어 조만간 아성체가 되지 않을까 싶은 실루와 놀던 노른이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선다.
5m 정도 거리를 두고 딴청 부리듯 고개를 돌린 채 발치의 자갈을 툭툭 차는 노른.
‘부른다고 오는 걸 보면 섭섭하다거나 화가 난 것은 아닌데…….’
자신이 노른을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다. 노른에게 부탁할 때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보상을 챙겨주었었다.
이블팩션 마을을 공격하고 돌아왔을 때도 노른이 맛있는 걸 먹고 싶다기에 자신이 수타 면 요리해주지 않았던가. 노른도 그걸 맛있다며 배불리 먹었었다.
그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혹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섭섭함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건드려 터진 건가.
가능성이라면 그거뿐이다.
적당히 커다란 바위 위에서 노른을 불러 옆에 앉힌 환인은 하얀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노른. 며칠간 너의 행동을 보면 나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뭔지 알려주면 고치도록 노력할 테니 나에게 이야기해주지 않겠나.”
「…….」
“만약 나에게 말하기 어렵다면 이실리테나 안느에게 전해달라고 말해도 된다. 그녀들이라면 네 뜻을 곡해하지 않고 올바르게 전달해주려 노력할 테니까.”
「……아냐.」
아니라니, 실망한 게 없다는 이야긴가.
의아한 시선을 주자 노른은 무릎을 세워 앉더니 유르파가 만들어준 녹색의 귀여운 외투를 더욱 여몄다.
「실망 같은 건 안 했어. 강혁준이 죽는 걸 봤더니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생각할게 많아져서 그랬던 거야.」
“……죽음과 이별 말인가.”
「응……. 환인. 내가 죽으면 환인도 강혁준처럼 해줄 거야?」
전제 조건이 다른데 같은 행동이라니, 실망한 게 아닌 것은 다행인데 시야와 사고의 한계가 깨어지고 넓어질 수 있는 고민이라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워진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대답에 조금 더 감성을 담았다.
“나와 강혁준은 성격부터 행동 양식까지, 정반대의 인물상이다. 내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겠지. 한다면…….”
강혁준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할 거다.
노른을 죽게 만든 놈들을 찾아 하나하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정신이 파괴될 정도로 오랫동안 괴롭히다 끝내는 영혼까지 소멸시킬 게 틀림없다.
“……그만큼 넌 여자친구들과 다른 의미에서 소중한 녀석이니까.”
말하며 달빛을 받아 선명한 녹색 단발을 쓰다듬어준다.
그의 손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서 털어낸 노른은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말했다.
「환인. 나 이제 남자와 여자가 뭔지 알아.」
“…….”
「짝짓기도 뭔지 알고 환인이랑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백려강, 아영, 환연의 사이가 어떤지도 알아.」
결국 이때가 찾아온 건가.
환인이 말없이 조용히 듣기만 하자 노른은 그의 커다란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대보며 계속해서 말한다.
「전에 나도 환인이랑 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환인은 곤란해했고. 왜 그랬는지도 강혁준을 보면서 알게 됐어.」
이윽고 노른의 입에서 그가 예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도 환인의 여자가 되고 싶어. 환인의 여자가 될래. 환인은…… 나 싫어?」
환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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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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