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48화 (748/813)

748 콜라이도 연합도시

* * * *

달칵.

=우리 왔어~.=

=왔니?=

완전 무장 차림의 안느, 아영, 백려강이 뒷골목 순회를 마치고 돌아오자 유르파가 주방에서 나오며 셋을 맞이한다.

안느는 좀 지친 얼굴로 소파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밥만 먹고 다시 나가야 해.=

=뒷골목 조직 소탕은 거의 끝나지 않았어? 또 나가는 거니?=

=도시 기병들이 뒷골목을 정리하고 있긴 한데 잡아 온 놈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중앙 광장에 전부 꿇려놨거든. 도망가는 놈들은 즉결심판도 해야 하니까 우리가 감시하는 게 좋아.=

=공공 재판 장소도 중앙 광장 한쪽에 만들고 있어서 좀 소란스럽거든요. 소란에 숨어서 튀는 놈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앗, 감사합니당.=

뒤따라 나온 이실리테가 물수건을 건네주자 아영이 손이며 무릎에 묻은 피를 닦기 시작한다.

그러다 거실을 둘러보곤 유르파에게 물었다.

=근데 오빠가 안 보이네요? 먼저 돌아가시는 거 같던데.=

=왔었는데 에로프 의원이 찾아와서 바로 나갔어. 시레세아 영주 귀족이 뻗대면서 죄인을 안 넘기려고 한다던가.=

말하면서 그가 엄청나게 화났다는 걸 전하려는 듯이 검지로 뿔을 만들고 인상을 귀엽게 쓰는 유르파.

여자들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특히 안느의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녀가 그냥 평범한 플뢰였거나 아니면 적당한 귀족 자녀였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명색이 메리아놀 왕가 가문의 공주 출신이다.

그렇지 않아도 책임감이 남다른데 같은 플뢰족이 고의 트롤링을 할 때마다 자기 잘못처럼 느껴져 양심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던 것.

안느가 숨길 수 없는 피로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환인 앞에서는 절대 안 짓는 표정을 한다.

=아니 일이 벌어진 지도 4일째잖아. 그 정도면 옆도시에 소문이 퍼지기 충분한 시간인데 그 영주란 인간은 뭘 하는 거래…….=

=안느 언니. 시레세아의 영주님은 아마 자존심 때문에 밀당…? 그걸 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리 귀족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영주가 군말 없이 넘기면 권위가 무너지는 걸로 보일 테니까…….=

=밀당도 좀 때와 장소를 봐가면서 해야지.=

백려강의 위로에 밀당이라는 현대 용어의 뜻을 기억해낸 안느가 재차 한숨을 푹 내쉰다.

요즘 들어 부쩍 속이 쓰리기 시작한 안느는 소파에 풀썩 앉아 배를 어루만지며 얼굴을 찡그리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르파가 여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보다! 자기가 요즘 부쩍 신경이 날카롭잖니. 이쯤에 그를 위해서 이벤트 하나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가씨들 생각은 어때?=

=이벤트……?=

=어떤 이벤트요?=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여자들이 관심을 보이자 유르파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자긴 이제 몸이 거의 다 컸지만 어렸을 때 영향이 무의식에 남았는지 우리 몸을 자주 만지게 됐잖아? 그러니까 조금 선정적이면서 야한 옷을 입고 위로해주면 어떨까 싶어.=

위로?

위로!

몸으로!

동생들의 눈빛이 반짝이는 모습에 살짝 웃음 지은 유르파는 옷 가방에서 토끼귀 모형에 망사 타이즈와 하이레그 타입의 천 면적이 적은 의복을 꺼내 들었다.

=바니걸이라는 옷을 만들어봤는데, 어떠니?=

=우와아. 조금만 험하게 움직여도 짬지가 다 드러나겠어요!=

아영의 말대로 옷은 극 하이레그 타입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넓이의 밑단은 보지를 간신히 가릴 수준이며, 그외 서혜부는 물론 아랫배와 골반 위쪽까지 90%를 드러내는 레오타드 바니걸의 모양.

그 옷을 본 백려강과 안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이거 언니나 이슬이가 입으면 젖이 흘러넘치겠는데……?=

=괜찮아~. 남들 앞에서 입을 것도 아니고 여기에 본이 들어가서 의외로 튼튼하거든? 뭐 본이 꺾여서 가슴이 좀 드러나면 어떠니. 오히려 자긴 좋아할 텐데…….=

=…….=

=…….=

안느, 아영, 백려강은 그녀가 꺼낸 망사 타이즈와 바니걸 옷을 만지다가 음흉하게 웃는 유르파를 보곤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율이 언니가 입어야겠다.=

=맞슴다요. 이야기를 꺼낸 장본인이 입는 게 국룰이죠.=

=이건 가슴이 클수록 파괴력이 강할 거 같으니까 저보다 유리 언니가 입는 게 좋아보이네요.=

=……응?!=

* * * *

시레세아의 성벽을 무너트리고 돌아온 환인은 얼굴에 짜증을 조금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간 강혁준과 관련된 뒷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짜증 날 정도로 더러운 일들이 계속 쏟아져나온 것이다.

항상 담담하거나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라는 걸 증명한다.

‘플뢰가 고고한 종족이라는 것도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군.’

가장 처음 만나고 교류를 맺은 플뢰족은 이엘카타였다. 그다음으로 만난 플뢰족은 다수였지만, 대화를 나눈 두 번째 플뢰족은 안느다.

그런 둘의 성격을 본 환인은 조용조용하거나 다정다감한 게 플뢰족의 기본 소양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근래에 연이어 벌어진 사건, 사고는 그에게 플뢰족의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재구축하는데 충분했다.

무능한 플뢰, 프라우드, 루크랑 의원들이 일감을 가져오는 지랄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이 상황도, 감정 컨트롤이 이렇게 미숙했나 싶은 자신도 싫다.

‘역시 주범 격인 놈들은 죽여버리는 게 좋겠지. 아란 에로프에게 준비물도 구해놓으라 했으니…….’

어차피 그걸 실행하면 안 죽고 못 배길 거다.

처벌을 이겨내고 살아남더라도 수만의 관중 앞에서 그 치욕스런 라이브 쇼를 보여주었으니 귀족 자존심에 목매달아 자살할 게 틀림없다.

미치광이 살인자도 ‘와 이건 좀;;’ 하며 혀를 내두를 계획을 차분히 추진시켜나가던 환인은 호텔 발코니에 도착해 노른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무심히 둘러봤다.

이실리테가 혼자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른 여자친구들은…… 아직 밖인가.

=주인님, 다녀오셨어요?=

“그래. 다들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아니면 왔다가 간 건가.”

외투를 벗어 손을 내민 이실리테에게 묻자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한쪽 방을 가리킨다. 그녀들이 머무르는 객실이다.

이실리테가 왜 저렇게 웃는지 모르겠지만, 먼저 확인할 게 있어 환인은 조금 목소리를 높여 이모렐을 불렀다.

“이모렐.”

이모렐을 부르자마자 여자친구들의 방에서 분주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다가 강혁준과 같은 방을 쓰던 이모렐이 걸어 나오는 걸 보고 신식 영혼의 눈으로 그녀의 영혼을 살핀다.

‘세뇌 흔적은 없군.’

강혁준과 이모렐을 같은 방에 몰아넣고 이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 이유는 하나뿐.

정신 술사의 세뇌 능력으로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면 같은 방에 머무르는 이모렐에게 먼저 시도하라는 의도였다.

여자친구들은 강혁준을 경계하고 있기에 그가 화장실을 가거나 할 때 마주치더라도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애초에 빈틈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헛짓거리하려는 순간 기감이 예리한 그녀들은 강혁준을 강/혁/준으로 만들어버리겠지.

하지만 나흘째가 되었는데도 이모렐의 영혼에는 그 어떤 수작의 흔적도 없다.

정말 다 내려놓고 자신이 만들어주는 재판의 무대만 기다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똑똑.

“아, 환인 씨…….”

강혁준이 있는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나흘 전보다 좀 더 야윈 강혁준이 힘겹게 일어난다.

방안에는 서서히 죽음을 앞둔 사람 특유의 냄새가 들어차고 있다. 그에 조금씩 들던 상념을 털어버린 환인은 그의 어깨를 잡아 다시 눕혀주며 말했다.

“괜찮으니 누워있으십시오.”

“네,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늦어도 12시간, 이르면 서너 시간 뒤에 시레세아의 그 자작이라는 자가 도착하는 대로 심판이 시작될 겁니다.”

“드디어……!”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면 복수심과 원한이 줄어든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마비되어있던 이성이 나흘간 하루 한 번씩 반복된 평온의 파동에 돌아와 분명한 복수의 대상을 고정했기 때문이겠지.

“환인 씨. 정말, 정말…… 고마워요. 타인이나 다름없는 저를 위해서 귀찮은 일도 마다하시고…….”

“그게 약속이니까요.”

약속이라 해도 약속을 헌신처럼 내팽개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강혁준은 숨길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준비가 마무리되면 부를 테니 그때까지 쉬고 계십시오.”

“네…….”

눈을 감고 마지막 한숨처럼 작게 날숨을 내뱉은 강혁준이 시체처럼 조용히 늘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모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방을 나간 환인은 후우, 작게 숨을 내쉬었다.

콜라이도의 사건은 이제 결말만 남았다. 그러다보니 다른 일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한다.

‘패시지의 결명자 놈들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지금까지는 타 대륙의 먼 곳에 있었으니 세뇌에 가깝게 휘어잡은 차원 방랑자들을 보내기 어려웠겠지만, 메리아놀의 권역에 들어왔으니 언제 공격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그에 대한 대비는 해놓았다.

차원 방랑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포착할 수 있도록 메리아놀의 각 도시에 하얀 늑대들을 잠입시켜 공간이동술법진이 설치된 장소를 감시하도록 지시한 거다.

이 이상의 대비는 의미가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헛수고에 가까운 노동력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차원 방랑자는 각성할 때 각종 희귀 직업을 얻는다.

초장거리 이동 술법을 쓸 수 있는 직업도 있을 수 있고 기척이나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을 갖춘 직업을 얻을 수도 있다.

이걸 어떻게 대비할까.

‘게다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지.’

멀리서 저주를 내려 대상을 죽일 수도 있는 직업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런 직업이 있다면 모든 게 말짱 황이다. 아신급인 영혼사 자신이 죽으면 대륙 전체에 영식이 벌어져 말 그대로 죽음의 행성이 될 테니 자신은 놔두더라도 여자친구들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다.

그걸 대비하려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까.

어떤 노동력이 들어갈까.

“…….”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스툴에 발을 올린 채 멈추지 않는 머리를 애써 쉬게 만드는 환인이지만, 별 소용이 없다.

포기하고 중앙 광장에 가서 의원들이나 쪼아댈까 생각하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주인님.=

그녀가 여자친구들의 방문 쪽을 손가락질하는 모습에 환인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언니, 지금이에요! 출동!=

=율이 언니! 어서!=

=으으~. 이러려고 이 옷을 꺼낸 게 아닌데……. …뿅, 뿅.=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흘렸다.

“……큭큭.”

거기에는 온통 하얗고 검은 토끼 아가씨가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깡총거리면서 나오고 있었다.

=아, 웃었다.=

=웃었어요 언니!=

=성공이네요…!=

머리에는 검은색 인조 토끼귀, 레오타드는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골반을 강조하고 매끈한 다리는 망사 타이즈를 입어 육덕지면서도 매혹적인 각선미를 부각하지만…….

“굉장한 토끼 아가씨군요.”

수박보다 커서 컵cup에 흘러넘치려는 한 쌍의 젖가슴보다는 임팩트가 덜했다.

진짜 툭 건드렸다간 가슴 컵이 떨어지고 하얀 아기 맘마통이 쏟아질 것 같은 모습.

유르파는 ‘주책입니다, 유르파.’라는 소릴 들을 각오까지 했지만, 예상을 초월하는 환인의 호평에 그제야 불안을 벗어던지고 웃음을 지으며 검지를 세워 보였다.

“그러면 아기 토끼는 쓰다듬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토끼는 외로우면 죽어버리니까요.”

이걸 위해 일부러 앞머리까지 가지런히 빗은 건가.

환인은 자신에게 정수리를 내미는 유르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고오며 망사 타이즈만 입은 허리와 골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망사의 살짝 꺼슬꺼슬함 사이로 그녀의 말랑말랑한 피부 감촉이 섞이니 정말 손을 뗄 수가 없다.

“이 옷은 또 언제 만드신 겁니까.”

=내가 만든 건데…… 마음에 들어?=

“훌륭하다는 말밖에 못 하겠군요. 이렇게 야한 토끼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 그러니?=

눈앞에 들이밀어진,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젖가슴을 보자마자 홀린 듯이 젖가슴을 움켜쥐어본다.

손가락이 파고들자 젖살이 손가락을 포근하게 감싼다.

그야말로 마약적인 감촉에 참지 못한 환인은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함. 포근함, 거기에 살짝 아기의 젖살 냄새가 나는 게…….

‘짜증과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는 기분이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테스토스테론과 도파민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환인은 그렇게 그녀를 끌어안고 힐링 타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르파와 여자들은 살짝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가 흥분해서 바로 덮치……는 것은 몰라도 이리저리 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만지는 건 잠깐이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임을 멈춘 게 아닌가.

‘어쩌면 좋니? 좀 더 그를 자극해볼까?’

‘으음, 그건 별로 안 좋은 생각 같은데요.’

‘저도 아영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도령이 기분 좋게 휴식하는 거 같으니까 일단 대기.’

대기란 말이지? 그러면…….

그의 숨결이 가슴골에 느껴지니 젖꼭지가 서면서 배란할 것처럼 아랫배가 큥큥거리지만, 자신의 욕망보단 그의 휴식이 더 중요한 유르파였다.

유르파는 자기 몸으로 환인에게 안식을 주고 있다는 게 기뻐 조심스레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조용한 이 시간을 누렸다.

물론 계속 그렇게 휴식하진 않았다.

30분 정도 충분히 정신을 환기한 환인은 즉시 야한 토끼를 데리고 방으로 이동, 레오타드 아래쪽만 옆으로 젖힌 뒤 망사 타이즈를 살짝 찢어 그 틈으로 밀접 접촉 교류를 시도한 것.

힘을 주면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망사 타이즈에 뒤덮인 둔부가 타격에 출렁이는 걸 보며 과잉 분출된 도파민과 테스토스테론을 유르파의 자궁에 몽땅 때려 붓길 2시간.

욕정을 정말 남김없이 모두 배출한 환인은 그 뒤 여자친구들의 알몸 수발을 받으며 뜨거운 물에 1시간을 목욕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들의 살냄새를 맡으며 한숨 푹 자고 났더니 과장 보태 다시 태어난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 평소 오빠로 돌아왔네요!=

“……며칠 동안 좀 날이 서 있긴 했었지.”

=도령은 야한 토끼 취향이었어? 되게 좋아 보였는데.=

“바니걸 취향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바니걸 코스프레를 한 너희가 취향이지.”

천릉을 챙겨입으며 하는 말에 여자들은 불시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빨개진 얼굴을 돌린다.

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잖아.

환연도 오래간만에 좋은 구경을 했기에 적당히 이완된 얼굴로 그의 근처를 둥둥 떠다니며 말했다.

「어쨌든 원래 컨디션을 되찾은 게 다행이네. 유르파가 몸을 바친 보람이 있겠는걸.」

“바치다니. 누가 들으면 산제물 인신 공양이라도 한 줄 알겠군.”

그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마자 환연이 이죽거리며 그의 뺨을 콕콕 찔렀다.

「분노한 신에게 바쳐진 인신 공양 맞지. 너 시레세아에서 무슨 짓 했는지 잊었어? 네가 아까처럼 짜증이 한가득 난 상태로 재판장에 갔어봐. 거기 모인 놈들 태반이 죽어 나갔을걸.」

“…….”

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여자들은 쓴웃음을 짓다가 퍼뜩 놀란다.

시레세아에서 뭘 했길래 환연이 저렇게 말하는 거지?

「시레세아 성벽을 무너트렸어. 환인이 영혼 폭발로 성벽 근처에 폭격을 퍼부었거든. 영주가 환인 앞에 오체투지하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걸 너희도 봤어야 했는데.」

=…….=

=…….=

=…….=

여자들의 멍한 시선에 환인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인명 피해는 내지 않았다.”

「어휴. 그걸 말이라고.」

똑똑, 울려 퍼진 객실 문의 노크 소리.

재판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러 온 아란=에로프의 기척에 환인은 코트를 펄럭- 소리 나게 걸치고 광명창을 마저 챙겼다.

“그만하고 나가지. 이모렐!”

환인의 외침에 이모렐이 강혁준을 부축하며 방에서 나온다.

시선이 마주치자 야윈 얼굴로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혁준.

그사이 아영은 객실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는데 앞에는 아란=에로프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성제님. 재판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쪽도 준비 끝났습니다. 가시죠.”

환인의 이야기에 강혁준을 복잡한 눈으로 힐끔 본 아란이 몸을 돌려 앞서 걷는다.

그 뒤를 따라 환인도 나가니 여자들도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리곤 환인의 뒤를 쫓았다.

가면서 환연에게 묻는다.

=환연, 정말이야? 시레세아의 성벽을 모두 무너트렸다구?=

「모두는 아니지만 성벽의 존재의의가 뭐야. 도시를 빙 둘러싸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거잖아. 그런데 성벽의 3/4이 무너졌으니 전부 무너진 거나 다름없지.」

=와…… 죄인을 저 비싼 공간이동술법진으로 보내는 거 보고 뭐지? 했는데 그래서였구나…….=

「그거도 환인이 시레세아 영주한테 배를 몇 번 째줄까 협박해서 그런 거야. 3시간 안에 죄인을 안 보내면 인내심이 바닥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웃으면서 찔렀거든.」

……뭐?

가장 앞서 걸어가던 아란=에로프는 뒤에서 들려온 대화 소리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분노로 인한 혈류 변화가 아니라 공포로 인한 변화다.

콜라이도가 암흑의 숲과 가장 인접했다 뿐이지 시레세아도 남쪽의 대호수 인근에 군집해있는 이블팩션 부락과 마주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졌다면 땅술사를 대규모로 동원해 긴급히 성벽을 세운다 했을 때 드는 비용은 추산해서 80만 금화정도.

겨울에 이블팩션의 공격이 심화하니까 그전에 성벽을 세우려면 영주성의 금고는 거덜 날 테고 그러고도 부족한 비용은 시민들에게 징수하겠지.

이번 겨울은 시레세아에게 매우 혹독한 시기가 될 거다.

그리고 이번에 일이 잘못되면 콜라이도도 똑같은 꼴을……!

“의원분들이 제대로만 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히야악…!=

속내를 읽은 것처럼 찌르고 들어온 성제의 목소리에 아란=에로프는 첫날밤 남편의 자지를 처음 본 숫처녀처럼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얼굴이 빨개진 아란=에로프와 같은 마차를 타고 중앙 광장에 도착한 환인은 콜라이도의 모든 시민이 모여든 것처럼 구름같이 모여든 군중을 볼 수 있었다.

중앙 광장 중앙 분수대를 기점으로 500m가량 공터를 유지한 채 모여있는 군중들.

그런 군중을 막고 선 중무장한 기병 1,800명과 각 조합에서 차출된 직업자 250명.

그리고 팔목, 발목까지 완전 포박된 채 무릎 꿇려져 있는 400명의 범죄 조직원과 시레세아에서 끌려온 흙빛 안색의 얄팍하게 생긴 남자 플뢰 귀족.

마지막으로 대미를 장식할 호그질라 뺨치는 야수형 돼지 두 마리.

1톤 트럭 사이즈의 대형 수컷 멧돼지 두 마리가 성인 허벅지 굵기만한 자지를 꺼덕이며 푸욱푸욱 콧김을 뿜을 때마다 군중에서 의문의 숙덕거림이 흘러나온다.

분명 차원 방랑자로 비롯된 사건의 공개 재판장일 텐데 저 호그로드는 왜 가져다 놓은 거지?

그런 숙덕거림은 환인이 마차에서 내린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환인이 내리자마자 물결처럼 침묵이 번져나가 1만 평 남짓한 중앙 광장에 소리가 사라진다.

환인은 아신의 존재감을 조금도 억누르지 않고 수십 명의 의원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의원들은 신의 편린이라 할 수 있는 아신의 존재감에 의식이 짜부라질 것 같음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쓰러지거나 기절했다간 당장 다음 의원직 선출 선거에 악영향을 준다. 서서 죽으면 죽었지,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의지가 드러나는 의원들의 면상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막시아=에로프에게 차가운 시선을 고정했다.

=……?=

안 그래도 신위에 당장 쓰러질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살벌한 시선을 이쪽에 보내시는 걸까.

“막시아 에로프. 당신이 설 자리는 거기가 아닙니다.”

=……예?=

“이실리테.”

환인의 나지막한 부름에 이실리테는 기사검을 뽑는 동시에 네 자루의 다중 검기도 형성시켜 막시아에게 겨누었다.

당연히 놀랐다. 그냥 놀란 게 아니라 아주 약간이지만 오줌을 지릴 정도로.

=왜, 왜 이러십니까!? 제가, 제가 뭘 했다고……!=

=움직이세요. 움직이지 않는다면 팔다리를 베어서 구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말씀해주셔야……!=

억울해하면서 저항할 기색을 드러내는 막시아의 행동에 의원들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고 그녀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아란=에로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일단 나섰다. 어찌 됐든 그녀는 조카이고 같은 집안사람이니까.

성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극히 조심해서 묻는다.

=저…… 성제님, 막시아가 뭔가…… 범죄를 저지른 건가요?=

그 모습에 환인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겨 영기의 파동을 펼쳤다. 그러자 은은한 회색빛의 구름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하나둘씩 영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숫자는 열을 넘어갔으며 전부 여자 영혼. 그녀들의 원독에 찬 모습이 드러나자 주변에서 술렁임이 흘러나왔다.

여자 영혼들이 전부 막시아=에로프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으며 막시아=에로프도 숨길 수 없는 당황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

=어? 저 여자는…….=

=자네, 누군지 아는가?=

=어어. 다른 마을에 방문한다고 떠났다가 실종된 여자 같은데…….=

비슷한 이야기는 군중 속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 영혼의 정체가 알려질수록 막시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식은땀이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환인은 그런 막시아를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혁준 사건에 핵심이 되는 주범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저기 잡혀있는 시레세아 소속의 하급 자작. 그는 윤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다 실패하자 그녀를 살해한 범죄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제 조카란 말씀이십니까?=

“여러분들이 저 여자의 죄목을 말씀해보시겠습니까.”

아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여자 영혼들에게 바톤을 넘기는 환인.

원독이 서린 얼굴을 하고 있던 여자 영혼들이 하나씩 입을 연다.

그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전…… 저는 사랑하는 남편과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저년이, 저년이 제 남편을 노리곤 절 사고로 꾸며 죽인 뒤에 제 남편이랑……!」

「저도 저 썅년에게 죽임당했어요! 그리고 제 남편을 위로한답시고 접근해서……!=

「이 씨발년아! 날 죽이곤 내 남편 좆을 맛보니까 기분 좋더냐!?」

「네년은 죽어서도 성불하지 못할 줄 알아아악…!!」

한 명씩 한 명씩 사례를 꺼낼 때마다 한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니 중간부터는 여자 영혼이 고함을 지를 때마다 귀곡성이 터져나와 광장의 온도를 1도씩 낮춘다.

환인은 그런 영혼들을 진정시킨 뒤 광명창을 발동.

=서, 성제님 잠시만, 이건 오해가…… 아악!=

변명을 주워 삼키려는 막시아의 팔과 무릎 관절을 베어버렸다.

삽시간에 팔다리를 잃고 피를 뿜어내며 펄떡거리는 막시아를 벌레보듯이 보던 환인은 아영을 불렀다.

“지혈만 시키고 끌고 가서 자작 옆에 묶어놔라.”

=옙.=

자작은 곤장을 칠 때 묶어놓는 형틀 같은 것에 묶여있었는데 옆의 빈 형틀에 사지가 결손된 막시아도 똑같이 묶인다.

그렇게 중앙 광장 전체가 얼음이 된 상황에 환인은 마련된 단상 위에 올라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강혁준, 윤미래 차원 방랑자 부부의 살인 교사 및 살인 사건에 대한 공판에 들어간다.』

아신의 목소리가 드넓은 광장을 맴돌다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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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신속한 호메떼를 요구합니다.

주범의 처벌이 무엇인지는ㅋ 이미 눈치채신 분들이 계실테지만 다른 독자님들을 위해 쉿~ 해주세용!

[작품 설정]

바니걸 유르파

성스러운 맘마통 ㅗㅜ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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