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7 암흑의 숲
“그럼…… 능력을 거두어들일게요.”
한동안 오열하던 강혁준은 눈물과 함께 썩어버린 마음 일부를 도려냈는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펼친 능력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정수리에서 흘러나오던 자주색 연기 같은 선은 멈추었고, 환연이 파헤친 땅에서도 더 이상 자주색의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나지 않는다.
10분 정도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강혁준이 눈을 뜨자 홍채를 채우던 붉은색이 많이 감소한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조리개를 넘어 붉은색이 차올라있었는데, 지금은 홍채의 아래쪽에만 조금 잠겨있는 모양새.
“쿨럭!”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토해내는데 가린 손 좌우로 시뻘건 피가 튄다.
“강혁준 씨. 그건…….”
창백해진 낯으로 힘겨운 미소를 짓는 강혁준.
“대가예요. 제가 능력을 쓰기 위한 대가.”
“…….”
“제 능력은, 상대를 원격 조종형 폭탄으로 만드는 저주에요. 저주에 걸리면…….”
저주에 걸리면 피부가 자주색으로 변한다. 저주의 농도가 짙어지면 자주색이 더욱 강해지고, 자주색이 강할수록 터졌을 때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저주에 걸린 사람에게 공격받으면 공격받은 사람도 저주에 걸려요. 전염병이죠.”
“……저주가 폭발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가 폭발하는 조건은 셋이에요. 제가 폭발시키는 것, 저주의 농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마지막으로 저주에 걸린 사람이 죽었을 때죠. 피부가 검은색에 가까운 자주색이 되었을 때 폭발하면…… 미사일이 터진 정도의 파괴력이 나와요. 폭발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도 감염되고요. 감염 범위는…… 초등학교 운동장 넓이 정도일 거예요.”
초등학교 운동장은 학생 1명당 2제곱미터의 운동장을 확보해야 한다.
500명의 초등학생이 다니는 학교 운동장이라면 2,500제곱미터, 대충 750평 정도인데 미터로 환산하면 폭이 대강 500m가량 된다.
암야의 탄왕 능력인 폭탄과 규모와 비슷하지만, 강혁준의 영혼 폭탄 저주는 폭발 시 물리력을 동반한다는 게 차이점이다.
또 탄왕의 감염 폭탄은 영혼도 감염시키지만, 강혁준의 저주는 영혼 감염 기능이 없다.
상급 영혼사가 해당 영혼을 볼 수 없었던 건 능력 변주에 포함된 내용인 듯 했다.
이게 아무 문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원한이 가득해 지상에 남은 영혼이 영혼사의 눈에도 안 보여서 성불도 못 해 계속 썩어만 간다면?
언제고 악령이든 혼재든 타락해서 재액을 사방으로 뿌리게 될 것이다.
대규모 혼재 범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환인은 대성녀에게 전해줄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메모하며 말했다.
“마음먹으면 도시 하나 지워버리는 건 문제도 아니군요. 폭발 범위는 감염 중첩과 상관없습니까.”
“감염이 반복될수록 범위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았어요.”
탄왕의 영혼 폭탄은 중첩될수록 마지막 폭발의 배수로 감염 범위가 증가한다 했다.
진짜 인구 10만의 대도시에 감염을 뿌리고 차례대로 기폭 시키면 마지막 폭발은 대륙 전체를 뒤덮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혁준의 저주는 그 정도는 아닌듯했다. 물리력을 더한 대신 범위 증가가 대폭 감소한 거겠지.
환인은 손에 묻은 피를 닦으라고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며 물었다.
“그 대가라는 건…… 역시 수명입니까.”
“……네. 앞으로 제 수명은 길어봤자 한 달…… 짧으면 10일 정도라고 생각해요. 위력을 늘리기 위해서 수명을 가져다 쓴 거죠.”
그렇겠지.
환인은 자신이 반십년간 얼마나 말도 안 될 만큼 빠르게 강해진 건지 잘 알고 있다.
바보도 아니고 모를 리가.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성장 곡선이 완만하기 마련이다.
각성한 지 5년이 채 안 된 강혁준은 복수를 위해 긴 시간을 들이기보단 빠르게 복수하려 수명을 바쳐가며 저주를 거는 쪽을 선택했다.
수명을 바쳐 위력을 늘리는 방식을 찾아냈다는 건 그도 제법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예시가 아닐까.
만약 그의 성격이 조금만 냉정하고 차분했다면 사태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거다.
사건은 환인의 귀환 이후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는 니오네브레스 인류의 멸절로 이어졌겠지.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났겠군.’
자신이 이때 콜라이도에 도착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인도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
이런 꼬라지를 보면 역시 니오네브레스는 사람이 살 데가 못 된다는 생각이 견고해진다.
조금 정이 붙으려다가도 넌덜머리가 나는 거다.
고작 한 명의 테러로 세상이 망할 수 있다니.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살고 싶단 생각이 안 드는 게 정상이지.
손에 묻은 피를 닦은 강혁준은 손수건과 환인을 번갈아 보다가 숨기려 했지만, 환연이 손수건을 빼앗아 물의 정령으로 깨끗하게 씻어버린다.
그제야 환연의 존재를 눈치챈 강혁준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저주의 해제는 끝나셨습니까.”
“아, 네. 저주가 벨티칼 너머까지 번져있는 거 같았는데…… 전부 거두어들였어요. 암흑의 숲에 있는 이블팩션은 제외하고요.”
지정 해제도 가능한 건가. 역시 자질이 없지는 않군.
“이블팩션을 남겨둔 이유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니까요…….”
“그건 이 세계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블팩션에게 걸린 저주도 해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네.”
강혁준은 다시 눈을 감았고 이번엔 아까보다 더 빨리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요.”
“그럼 나갑시다.”
거목을 나가면서 강혁준은 바닥에 이리저리 기절하다시피 널브러진 이블팩션들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강혁준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환인은 자신의 예상이 얼추 거의 맞아떨어진 것을 확인했다.
강혁준은 암야의 탄왕 능력에 정신 술사 능력도 함께 각성했다.
이블팩션에 투신한 것은 저주와 정신 술사의 지배, 세뇌 능력으로 이블팩션을 복수에 이용하기 위해서.
“동족을 포식하는 괴물들이라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마저 잡아먹는 모습을 보니까…….”
“콜라이도의 기억석을 노린 건 이들에게 줄 일종의 미끼였던 거군요.”
“예……. 콜라이도를 공격했다가 요한 건스미스 씨의 요격 시스템에 큰 피해를 보던 괴물들이라, 총기 제작을 당근 삼아 흔드니까 말이 잘 먹혔어요.”
정신 지배와 세뇌는 너무 힘이 많이 들어 10명 정도를 지배하는 게 고작이었다고 했다.
열 명 중 다섯은 저주를 걸어 공격시키고 죽은 숫자만큼 다시 지배한다. 그리고 남은 다섯은 이블팩션을 제어하는 데 썼다고.
그런 제어에 기억석을 미끼로 흔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며 옆에서 걸어 내려가는 강혁준을 보니 참 왜소하단 생각이 들었다.
키는 150을 조금 넘기는 거 같고, 몸무게는 수명을 끌어다 쓴데다 먹을 것도 부실해 살이 쭉쭉 빠져 지금은 40kg도 채 안 되는 느낌.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아이 몸무게와 비슷하지 않을까.
“환인 선생님. 그 기억석은…….”
“기억석 안의 내용이 퍼진다면 이래저래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파괴했습니다.”
“네…….”
기억석을 파괴했다는 이야기에 강혁준은 오히려 옅게 웃음 지었다.
기억석을 콜라이도 의원들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잘 아는 강혁준이다. 그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수다니.
환인을 향한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 그러다보니 강혁준의 본래 성향이 조금 드러났다.
남에게 잘 의지하고 타인을 잘 믿는 그의 성정.
“역시 선생님이시네요.”
“……예?”
“절 죽이는 게 더 편하셨을 텐데 죽이지 않고 제 복수에 사후까지 걱정해주시고…….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수백만 명이 죽었을 거예요.”
환인은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강혁준 씨가 한 행동은 테러리스트가 할 짓이었지만, 잘잘못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플뢰족 측의 문제가 큽니다. 그래서 강혁준 씨의 편을 들어준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 사람은 테러리스트를 비난하니까요.”
“그러면 제가 좀 이성적이라고 해두죠.”
강혁준은 환인의 뻔뻔한 말투에 작게 웃다가 주먹을 쥐고 입을 가리며 콜록콜록 기침했다.
그 모습은 천상 여자다.
환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좀, 기분 나쁜 가설을 떠올렸다.
‘남색가들이 손을 썼을 가능성은…….’
설마 싶지만 돌아가서 확인해볼 가치는 있는듯하다.
그의 원한과 증오를 풀어주는 것이 계약이니까 파헤칠 수 있는 만큼은 파헤쳐봐야지.
거목을 나서자 이모렐과 노른이 그의 앞에 내려선다.
강혁준은 이모렐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가 환인을 돌아보았는데, 엉뚱한 오해를 하는듯해 환인은 아니라고 칼같이 부정했다.
“이모렐은 절 암살하려 했던 플뢰족의 레인저였습니다. 죽어서 영혼만 남은 그녀의 속죄행을 받아들여 미궁의 중핵 몸에 부여해 하인 같은 것으로 쓰고 있지요.”
“아…….”
「환인. 그 인간은 누구야?」
“말했다……?!”
그냥 봐서는 아름다운 녹색 짐승인데 사람처럼 말하는 모습에 강혁준이 깜짝 놀란다.
“이쪽은 강혁준 씨다. 이번 사건의 중심인물이지.”
「그 나쁜 놈?」
“그렇게 단순히 판단할 문제는 아니야. 강혁준 씨, 이쪽은 노르스리넨, 쿠에들의 여왕이자 신수입니다. 제 친구이자 가족이기도 하지요.”
나쁜 놈이라는 말에 잠깐 침울해졌던 강혁준이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사이 환인은 이모렐에게 안에 들어가서 커다랗고 튼튼한 천 같은 걸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노른은 틀림없이 강혁준을 등에 태우려 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노른의 발에 잡혀 날아가는 것도 현재 건강 상태를 보면 무리.
대형 천을 가져온 이모렐은 방석 크기의 단단한 나무판을 올려놓고 방석 대용의 가죽 모피까지 가져와 올린다.
“강혁준 씨. 콜라이도로 돌아갈 땐 이모렐이 태워줄 겁니다. 거기 천 가운데 올라가십시오.”
“이, 이렇게요?”
“편히 앉는 게 좋을 겁니다.”
방석처럼 깔아놓은 모피 위에 강혁준이 앉자 이모렐은 천의 네 귀퉁이를 잡아서 한 번 묶은 뒤 잡고 여섯 장의 날개를 펄럭여 날아올랐다.
“어떻습니까?”
“아, 굉장히 편해요.”
=저도 문제없이 콜라이도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강혁준의 감상과 이모렐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노른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강화 청령주를 이블팩션 마을에 떨어트렸다.
콰과광……!!!
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한밤중의 어둠을 밀어내는 섬광이 수십여 초간 세상을 물들인다.
빛기둥처럼 치솟아 오르는 폭발에 황새가 나르는 아기처럼 이모렐에게 들려있는 강혁준이 입을 살짝 벌린 게 보였다.
환인은 멍한 표정의 강혁준을 바라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블팩션의 마을 흔적, 주위로 불이 번져가는 킬로미터 단위의 크레이터를 내려다보았다.
‘각성의 요건은 불명확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니오네브레스에 널리 퍼진 미신 중 하나가 ‘간절함’이 직업의 각성을 부른다는 설說이다.
그 설대로라면 강혁준의 희귀 직업을 목격한 이블팩션은 간절함을 담아 그 직업의 각성을 바랄 것이고, 아니더라도 구전을 통해 암야의 탄왕과 정신 술사의 능력이 전승될 수도 있다.
거기에 저 마을은 인간들을 공격하는데 맛이 들린 곳.
다른 이블팩션 마을은 몰라도 저곳은 깨끗하게 밀어버리는 게 답이지.
“환연, 비를 뿌려서 불을 꺼다오.”
「알았어.」
환연이 불러낸 물의 상급 정령들이 국소적으로 비를 뿌리며 화재로 번져가려는 암흑의 숲을 천천히 적셔나간다.
다소 느긋하게 비행한 덕분에 콜라이도로 돌아왔을 땐 하늘에 검푸른색이 물감처럼 번져가는 동틀녘이었다.
머무르는 호텔 객실의 발코니에 내려서자 밤새 안자고 기다린 여자들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주인님.=
=도령!=
“다녀왔다. 자릴 비운 사이에 문제는 없었나.”
=시장이 다녀갔어. 강혁준, 윤미래 사건을 전면적으로 재조사해서 잘잘못을 뿌리째 뽑겠다고 하더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환인의 냉소적인 말투에 안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모렐이 조심스레 내려놓는 커다란 보따리 주머니로 눈길을 돌리며 묻는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이모렐이 가져온 저건 뭐야?=
퐁— 신수화를 풀어 여자아이 모습으로 돌아간 노른에게 옷을 입힌 백려강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흠칫했다.
웬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기절한 것처럼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강혁준이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이야기해주지. 이모렐, 그를 작은 방에 데려가서 눕혀놓고 지켜봐라.”
=예, 성제님.=
강혁준? 강혁준을 데리고 왔다고?
눈을 크게 뜬 여자들은 보따리 안에서 자그마한 여자애가 나오는 걸 보고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저 여자애가 강혁준이란 말이야?
=자, 자기? 혹시 강혁준이 아니고 윤미래라던가……?=
실상은 남편이 죽은 원한에 미쳐서 자신이 강혁준인 줄 알고 복수를 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일부러 남편의 이름으로 복수극을 꾀한 거라거나??
유르파의 혼란에 환연이 그런 거 아니라고 설명해준다.
「남자 맞아. 정령으로 확인까지 해봤어.」
=……와.=
놀라워하며 따라 들어오는 여자들과 거실에 앉은 환인은 이실리테가 타주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복 약 1,200km를 오가며 노른의 등에서 5시간가량을 보냈고 암흑의 숲을 쏘다니는데 4시간 정도를 썼다.
심핵력과 영기도 제법 써서 조금 피로해진 육체와 정신을 진한 블랙 커피가 일깨우는 것 같다.
그리고 천천히 자초지종을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들은 여자들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납득했다.
대체로 환인의 예상대로지만 역시나라고 할지. 그 상황에서도 침착한 판단력으로 최악을 피하고 최선을 끌어낸 게 대단하다.
자신들이었다면 강혁준을 그냥 죽였거나 생포해서 떠나며 사태를 최악으로 만들었을 텐데.
찰나의 이상함을 놓치지 않은 그의 눈썰미와 판단이 놀라울 따름이다.
유르파가 쓰디쓴 홍차로 나른함을 날려버리며 중얼거린다.
=수명을 써서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거구나……. 앞으로 10일 정도밖에 못산다니…….=
=오빤 강혁준의 상태를 짐작하셨어요?=
“아니. 영도의 기록실에 문헌이 남을 정도니 암야의 탄왕은 7~8급의 능력을 갖추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걸 기준 삼아 움직였지. 그보다 약하면 다행인 거고, 강하다면 이쪽의 운이 나쁜 셈이라고 생각하면서.”
합리적인 판단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안느가 조금 우려를 드러낸다.
=도령, 만약 시레세아의 귀족이 극구 혐의를 부인하면 어쩔 거야? 도시 영주가 귀족을 내어주지 않겠다면?=
“그땐 패시지에서 할 일의 예행연습을 해야겠지. 단순히 혐의를 부인하는 거라면 영혼을 씌워 심문하는걸 보여주면 그만이다.”
죄상을 확인한 뒤에는 죽여 영혼으로 만들어 여죄를 고백시켜도 된다.
강제력을 가한다면 거짓도 말하게 할 수 있지만, 아신 같은 초월자는 거짓말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다고 하니 그건 피해야 할 테고.
「이실리테. 나 배고파.」
=조금 있으면 아침 식사를 준비할 텐데, 못 기다리겠어?=
「엄청 배고픈데. 5시간 동안 날았다고. 이블팩션 마을에서도 힘 많이 썼고…….」
=그럼 이거 먹고 조금만 더 참아. 아침으로 맛있는 거 해줄게.=
「응!」
이실리테는 배고파하는 노른에게 음식 가방에서 주먹밥 도시락 두 개를 꺼내준 뒤 환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남은 건 그 귀족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 건지 정하는 건가요?=
=음, 귀족이니까 처벌은 도시 규율에 따르게 되나…….=
힐끔, 노른이 맛나게 먹는 구운 주먹밥을 곁눈질한 아영의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도시 규율이라면 귀족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있잖아. 금화 몇 닢 내고 면죄 받는 꼴을 볼 생각이야?=
=그치만 오빠가 하는 처벌은 뭔가, 엄청 아신위 같은 품위가 느껴지는 것들이잖아요. 그런 처벌을 저 상태인 강혁준이 속 시원해할까요?=
……품위? 환인이 눈썹 끝을 살짝 찌푸리자 아영이 보세요, 하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한다.
=적굉 그 병신…… 죄송. 그 모자란 놈이 그딴 짓을 저질렀는데도 오빤 그저 헤뷜트에 물 정령을 전부 내보내는 걸로 마무리 지었잖아요. 적굉을 죽이고 그 기관 동료를 죽인 것도 만엽하고 청 최고 전사였고요.=
그 뒤에 만엽과 청을 움직여 후조치 보복을 조정하긴 했지만, 직접 손을 써서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도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하게 느낄 만큼 멋들어진 제재 방식.
역시 품위 있지 않은가. 라드세아, 헤뷜트, 히스론드, 메리아놀의 귀족 누구도 그걸 보면 =음, 매우 귀족적인 방식이군!=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구주의 독니를 이용해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 것도 귀족의 모범이 될만한 방식이었어요. 스프라울드에서도 오빠는 직접 움직이지 않고 말 몇 마디로 영주가 자살하게 했고 시민들이 직접 움직여서 죄를 저지른 놈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했잖아요. 팔라툼에서도 그 이름 기억 안 나는 기사단장도 직접 손쓰지 않고 우회적인 수단으로 지위와 신분을 잃게 했고요.=
=아영이 너랑 카락스의 암살자를 정리한 깔끔한 방식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긴 해.=
안느의 이야기에 아영이 뻘쭘하게 웃으면서 라벤더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다가 다시 환인을 보며 묻는다.
=그래서 말씀 드린 거예요. 이번에도 그렇게 품위 있는 귀족적인 처벌을 하면 강혁준이 납득하지 못할 거 같아서. 그러면 도시 규율에 맡겨야 할 텐데 그건 또 이실리테 언니 말처럼 될 거 같고.=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혐오를 자극할 방식으로 정리할 거니까. 물론 강혁준의 의견도 수렴해야겠지.”
이, 인간의 원초적인 혐오……? 무슨 방식을 쓰려고 하시는 거지?
여자들은 환인의 담담한 말투에 오히려 오한이 돋는 걸 느끼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플뢰족의 수명은 길다. 보통 일반적인 인종의 2배, 길면 3배를 넘어가는 수준.
그렇기에 업무 처리에서부터 생활 양상까지 비교적 느긋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이번만큼은 그런 느긋함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욱이 ‘내가 일을 정리할 때까지 귀족 건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너희도 뭉뚱그려 죄를 묻겠다.’라는 환인의 선고에 콜라이도 시의회는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특히 하루 만에 암흑의 숲에 있는 이블팩션 마을 하나를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소식, 강혁준까지 사로잡았다는 이야기에 시의회 소속 의원들은 정말 망아지처럼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대충대충 하는 꼴을 보여주었다간 콜라이도도 그 이블팩션 마을 꼴이 될테니ᄁᆞ.
하지만 시레세아 영주 가문은 달랐다.
=우리 귀족이 누굴 죽게 했어……? 뭐 어쩌라고.=
콜라이도 시의회와 비슷한 지위와 신분인 시레세아 영주 및 휘하 귀족원은 불침 맞은 망아지처럼 날뛰는 시의회의 요청에 시큰둥하게 대응하다가…….
꽈과과과광!!! 쿠과과과…… 콰과광——!!!
시레세아 성벽에서 불과 200m 떨어진 지점에 도시를 포위하듯 쉴새 없이 떨어지는 영혼 폭발의 향연을 목격하곤 혼이 달아나버렸다.
8급 대지 술사가 펼치는듯한 대폭발의 연쇄.
성벽 위로 치솟아 오르는 흙더미와 바위 파편이 도시 안으로 쏟아지고 난폭한 폭발의 후폭풍에 성벽이 무너질 듯 출렁인다.
성벽 너머 집은 땅을 통해 전달되는 충격으로 금가거나 무너져내리니 여의도 4배 넓이만 한 도시가 공황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한순간에 저지른 환인은 시레세아 영주성에서 영주와 마주하고 있었다.
“시레세아 영주. 지금 나와 싸우자는 겁니까.”
=그, 그, 그, 그것, 그것이…….=
“이틀 전 콜라이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전말과 이후 당부 사항을 통신 수정과 전서구로 충분히 연락받으셨을 텐데…….”
=서, 성제님! 성제님 잠시만……!=
“그런데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라 하셨습니까? 명백한 증거를 갖춘 요청에도 어쩌라고 라는 말씀을 하시다니. 제가 영주님의 배를 물리적으로 몇 번 째드려야 이해하실지 정말 궁금합니다.”
=히이익, 죄송합니다아아악!!=
이쪽에 나름 잘못이 있다곤 해도 도시 소속의 귀족을 넘겨야 하는 일이다.
영주로서 귀족을 지키는 모습 정도는 보여야 하기에 면을 세우고 협의와 회담으로 조금~ 책임을 조율한 다음 적당히 대응해주려 했는데.
설마 응답을 보낸 당일, 20분도 지나지 않아 성제가 직접 찾아와서 성벽을 무너트리고 광명창을 들이밀다니!
아신위에 도달했다는 게 진짜인지 성제와 마주 보고 있으려니 알몸으로 저 남극의 얼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턱이 딱딱 떨리고 몸에 경련이 멈추질 않는다.
전면 통유리로 된 발코니 너머, 높이 70m의 성벽이 먼지구름을 피워내며 무너지는 게 영주의 눈에 들어온다.
역시 저만한 힘이 있으니까 패시지하고 싸우러 가는 거겠지?!
플뢰족 영주는 어느새 죄다 도망가버려 텅 빈 접견실에서 환인의 앞에 무릎 꿇고 넙죽넙죽 머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즉시 죄인을 넘기고 관련자를 색출해 포박하여 콜라이도로 압송시키겠습니다!!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시레세아 영주님. 전 지금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입니다. 만약 3시간 안에 죄인이 콜라이도에 도착하지 않으면…….”
환인은 싱긋 웃음 지었다.
“바닥난 인내심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걸 영주님께서 알아주시면 고마울 것 같습니다.”
=……공간이동술법진으로 즉시 죄인을 전송시키겠습니다아악…!!!=
이렇게 시레세아에서 환인이 저지른 일은 콜라이도에 실시간으로 전해져 시의회가 재차 발칵 뒤집혔다.
이대로 적당적당히 움직이다간 성제의 영혼술 폭격이 이번에는 콜라이도에 떨어질 것이다.
강혁준을 포획해온 그 날 오전, 성제와 면담했을 때 그의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시장이다.
범인도 잡았고 사태도 원만히 마무리 되어가는데 여전히 기분이 매우 안좋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잘못의 여지가 콜라이도에도 있다는 이야기.
시장은 특급 비상사태를 대대적으로 선포, 총동원령을 선언하여 제1 제2 제3 제4 모든 기병대는 물론 콜라이도에 존재하는 의원 가문 소속, 상업협동조합 소속, 술사조합 소속, 모험가 조합 소속, 머시너리 길드 소속…… 하여튼 직업자들을 전부 끌어모아 콜라이도의 뒷골목 조직들을 습격했다.
=저항하더라도 일단 죽이지 마라!=
=팔다리는 잘라버려도 된다! 죽이지만 마라!!=
시 유보금으로 땅신 교단의 사제들까지 긴급히 동원한 시장의 특명 아래 진행된 소탕 작전 12시간 후.
=성제님, 추정된 죄인을 도시 중앙 광장에 모두 포박하여 무릎 꿇려놓았습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시레세아의 자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습니다. 이번 일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시지요.”
=예.=
콜라이도 차원 방랑자 살해 사건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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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며칠전에 살짝 에고 서치를 해봤습니당
그중 게시물 하나가 기억에 남아있는데.... 무슨 초반 도적떼들하고 후반 귀족들 대응 패턴이 다 똑같냐, 한심하다는 거였읍니당.
그야 통신 산업 같은것도 없고 연락은 전서구나 매우 비싼 통신 수정 같은거 뿐, 정보 집단 같은 건 중급 도시나 대도시급은 되어야 운용하는 세계, 교육과 학습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지만 귀족놀음으로 전락된 곳인걸요!
지능이 높으면 라펩의 여족장이나 니라인의 영주대리처럼 나올거고 멍청하면 주인공의 사건 트리거가 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용?
=ㅂ=;;
중세는 생각보다 더 야만적인 시대였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