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6 암흑의 숲
앙상하게 마른데다 5년 동안 머리카락만 대강 손질했는지 머리카락이 굉장히 길다.
이 때문에 쓰러진 강혁준의 외모는 약간 억지를 부려…… 아니,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여자로 보일 정도였다.
그것도 니오네브레스에서 제법 통할 정도의 미녀.
“아니…… 여자인가?”
「남자 맞아. 체구도 작고, 남색 취미가 있으면 환장하게 생겼네. 아무튼 강혁준도 확보했으니까 이제 여기를 청령주로 날려버리고 복귀하면 끝이지?」
환연은 한 건 해결이라며 홀가분해 하지만, 환인은 뭔가 마음이 걸리는 느낌에 기절한 강혁준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퍼벅, 콰광. 퍼엉!
으아악……!
끄억……! 아아악—…….
창밖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비명에 잠깐 고개를 돌렸던 환연이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부른다.
「뭐해? 안 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데?」
가구라고 해봤자 좀 낡긴 했지만 깨끗한 나무 침대에 정체 모를 짐승의 부드러운 모피 가죽으로 만든 깔개와 이불. 작은 탁자와 의자에 책상이 전부다.
조금 텅 빈 느낌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건 없는데? 주술 함정도 없고.」
“그거다. 없어도 너무 없군. 영혼 오염 폭탄으로 도시나 대륙을 날려버리려는 인간의 거처치고는 너무 깨끗해.”
「…….」
환연이 다시 나무 속을 파내고 만든 듯한 방을 둘러보다가 눈을 찌푸린다. 그의 말대로 대비가 너무 없다.
1층과 2층에는 이블팩션이 나름 있었던데다 곳곳에 위상력이 맺힌 장소가 보인다. 이블팩션이 나름 보안이랍시고 주술 등으로 함정을 설치한 흔적이겠지.
그런데 3층에는 아무것도 없다. 함정도, 인간도.
“게다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강혁준과 1초 정도 시선이 마주쳤었는데 그 눈이…….”
「……눈이?」
“환연, 너는 죽고 싶지만 자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의 눈빛이 어떤지 알고 있나.”
「몰라. 본 적 없으니까. 저 인간이 그랬다는 거야?」
“비슷하게 느껴졌다. 뭔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기다리는 듯하다고 할까.”
「그러니까 뭐야. 네 말에 따르면 저 강혁준이란 인간은 수백, 수천만 명을 죽일 준비를 전부 해놓고는 대량 학살을 저지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발사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
환연은 살짝 어이가 없어져 죽은 듯이 늘어진 강혁준을 쳐다봤다.
“수백만 명을 학살할 용기가 없어서 타인에게 스위치를 건네는 거지. 준비는 다 해놨으니 누르는 건 네가 대신 하라고. 알량한 책임 회피가 아닐까 한다.”
「……그럼 기억석을 탈취하려 한 건 뭔데?」
꺼림칙한 예감이 점점 마음속에서 크기를 불려간다. 이대로 강혁준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갔다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듯한 예감.
“모르겠다. 이블팩션 인간들의 욕망이나 욕심을 채울 임시방편인지, 아니면 세상에 대량 학살 병기의 지식을 퍼트리려 한 건지.”
「와, 네가 아니라 다른 애가 그런 말 했으면 마약 했냐고 물었을 텐데…….」
믿기 어렵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던 환연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묻는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야?」
“강혁준과 눈이 마주쳤을 때 도무지 원한과 증오에 물든 눈빛이 아니라고 느꼈다. 뭔가 모든 걸 내려놓은 모습, 자아와 싸우면서 고뇌에 빠진 인간의 눈빛이었다고 할까.”
이런 감각적, 감상적인 부분을 언급하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환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각을 그럭저럭 신뢰하는 환인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신식 영혼의 눈을 최대로 전개해 방을 살피고 강혁준의 영혼도 들여다본다.
5살 남짓한 아이일 때는 1분도 아니고 30초도 전개하기 힘들던 신식 영혼의 눈이지만, 15살 남짓까지 자란 지금은 꽤나 오래 펼칠 수 있게 되었다.
“……?”
그리고 무척…… 매우 옅고 희미한 아지랑이, 주위가 조금이라도 더 밝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흔적이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와 침대 위 창문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연기처럼 덧없는 선.
환인은 굳은 얼굴로 그 선을 따라 창문 바깥에 머리를 내밀어 신식 혼령주 네 개의 빛으로 대낮처럼 밝은 마을을 살폈다.
“…….”
생물의 영혼뿐만 아니라 세상의 마력 흐름까지 어느 정도 보이는 영혼의 눈으로 마을을 낱낱이 살피던 환인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환연이 호브와 콜브 주술사들이 있던 땅을 무너트린 장소다.
선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신식 혼령주의 빛 때문에 선은 이미 안 보인다. 환인이 본 것은 다른 거다.
“환연. 저기 네가 무너트린 지반의 단면을 봐라.”
「응? ……어, 저거 뭐야.」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한 환인은 광명창을 꺼내 거목 외벽을 △ 모양으로 베어내 쾅, 걷어찼다.
깔끔하게 잘린 세모꼴의 벽이 날아가 떨어지고, 환인은 바로 거목 밖으로 몸을 날려 해당 지점에 착지한다.
비몽사몽으로 흐늘거리다 바로 옆에 착지한 환인을 발견하곤 달려드는 돼지 대가리.
꾸, 끄릐야아아악—!
서걱—
망설임 없이 괴물의 목을 쳐서 날린 환인은 머리를 잃고 자빠지는 괴물을 지나 무너진 지반 가까이 다가갔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위상력도, 심핵력도, 영기도 아닌 괴상한 기운이 무너져 드러난 지층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릴도 이런 기운은 처음 본다는데?」
“이게 강혁준이 쓰는 에너지인가. 환연.”
그의 부름에 눈치껏 땅 정령으로 땅을 한 꺼풀 벗겨내는 환연.
약 20평가량 되는 지층이 과일 껍질처럼 벗겨지자 밑에서 희미한 기운의 아지랑이가 더욱 많이 피어오른다.
너무 희미해 조금씩 흘러나올 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기운이 조금씩 뭉쳐지니 자주색을 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기운이 거목 3층의 방과 이어져 있다는 것도.
……꾸르?
취와오아아악—!
캐르르르륵—!!
신식 혼령주의 중심 범위에 벗어나 있어 반쯤 최면에 걸린 것처럼 흐느적거리던 이블팩션 노예 계급이 환인을 향해 살기를 뿌리며 달려든다.
하지만 환인이 손 쓸 것도 없이 환연의 바람 정령술에 수십 토막이 나 피와 토막 난 내장을 뿌렸다.
피 냄새가 확 퍼지니 신식 혼령주에 취해있던 이블팩션 노예 계급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알이 주변을 이리저리 훑다가 환인을 발견하곤 침을 질질 흘리며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눈치.
귀찮아진 환인은 광명창에 다량의 영기와 약간의 심핵력을 주입. 이실리테의 검섬을 흉내 낸 창섬을 부채꼴로 날렸다.
쫘아아앙—!
대형 유리창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황금빛의 커튼이 수십 마리의 목이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가자 1초 후 상하 2등분으로 나뉜 채 우수수 쓰러진다.
“…….”
움찔
흠칫흠칫
범위 밖에 있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노예 계급 괴물들은 살기 어린 환인의 시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가, 그가 몸을 돌리자 그제야 슬그머니 근처에 죽어 나자빠진 동족의 시체로 가 뜯어먹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노른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 그에게 물었다.
「환인! 이제 다 죽여버려도 돼?!」
“아직은 아니다. 고위 이블팩션 중에 정신 차리는 것들이 있으면 혼령주의 빛기둥에 계속 던져넣어다오.”
「응!」
노른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환연이 교대하듯 그에게 묻는다.
「환인, 저 땅속에 있는 저거, 뭐라고 생각해?」
“역시 폭탄이겠지. 선은 신관일 테고.”
「강혁준이 이 땅을 벗어나면 쾅, 터지는?」
“그것 밖에 생각 안 나는군.”
강혁준이 기절한 방으로 돌아온 환인은 회색 펑퍼짐한 로브를 입은 데다 머리카락까지 치렁치렁해 영락없이 여자로 보이는 강혁준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짜고짜 기절시켰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깨워서 이야기를 나누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깨울 수는 없어.’
환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카턴 마을에서 여자 악령의 한을 풀어주고 얻은 능력, 지금도 잠자리에서 요긴하게 쓰는 원기 흡수/방출 능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식 영혼의 눈으로 강혁준의 영혼을 다시금 읽는다.
‘이게…… 그의 직업 에너지인가.’
자신이 쌓이지 않는 위상력 대신 영기를 쓴 것처럼 그도 위상력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자색紫色 기운이다. 이걸 흩어버린다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만들 수 있겠지.
……그런데, 이건……?
환인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이제까지 신식 영혼의 눈으로 보아온 게 잘못되지 않았다면, 영혼을 이루는 수많은 색 중 이 색이 만약 진짜라면.
‘수명이…….’
……영기 방출의 경험을 토대로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린 환인은 자색 기운에 접속, 흡수와 방출을 동시에 일으키려 했지만 무언가 한 겹의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흡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시 위상류인가.’
하지만 환인도 몇 년간 영기 조작을 중점적으로 수련하고 훈련했다. 여기에 아신체를 거의 완성한 단계.
영기의 조작 감각을 자색 기운의 조작 감각으로 치환하고 신식 영혼의 눈으로 분석을 동원, 마지막으로 압도적인 제어력을 일으키니 그의 몸 안에서 암야의 탄왕이 쓰는 에너지라 판단되는 자색 기운이 점차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손바닥쪽으로 기운이 흘러나와 손등을 통해 빠져나가는 기운.
그렇게 자색 기운을 10% 미만만 남겨놓은 뒤 그의 원기도 흡수해 20% 미만으로 줄였다.
자색 기운이 빠져나갈 때부터 안색이 흐려지더니 원기가 대폭 감소한 지금은 낯빛이 파리해 보일 지경이다.
“후우…….”
환인은 성수포를 꺼내 영혼의 눈을 과다 사용해서 욱신거리는 눈을 덮고 잠시 마사지한다.
잠시 후 노른과 이모렐을 불러다 히스론드의 주도에서 만든 기술인 방혼벽, 영혼 공격을 방어해주는 영혼술을 걸었다.
신식 혼령주 3발에 이블팩션의 영혼 오염 폭탄은 다 해소되었다.
만약 강혁준이 돌아버려서 터트려도 대형 폭발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모르는 일이다. 영혼 오염 폭발이 아닌 다른 기술을 쓸 수도 있고.
안전장치를 2중, 3중으로 마련한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약초를 꺼내 그의 코 밑을 슥슥 훑었다.
박하향과 암모니아향을 섞고 거기서 몇 배는 더 뻥튀기시킨 냄새가 그의 정신을 빠르게 일깨운다.
꿈틀, 눈썹이 두어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눈을 뜨는 강혁준.
무표정으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그를 잠시 응시하던 환인은 강혁준이 뭔가 수작을 부리려 하면 당장 기절시키기 위해 준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혁준 씨. 정신이 듭니까.”
“……한국인…?”
힘겹게 고개를 돌려 환인을 바라보는 강혁준의 시선에 놀람이 섞인다.
목소리도 가늘군. 윤미래가 아닌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환연도 남자라고 확인해주었으니 강혁준이 맞겠지.
검은색과 붉은색이 불길하게 층을 이룬 홍채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예. 당신과 같은 한국인입니다.”
“…여긴 어쩐 일로…….”
“당신이 콜라이도에서 겪은 일, 저지른 일 때문입니다.”
“…….”
환인의 대답에 강혁준의 눈빛이 다시 공허해졌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 삶의 의지도 잊어버린 사람의 눈동자다.
“…절, 안 죽이셨군요…….”
“…….”
아무래도 아까 내린 판단이 맞는 듯하다.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성격. 스스로 수백만 명을 죽일 용기는 없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증오와 원한에 분노의 질주를 멈추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
남이 떠밀어주길 바라며 니오네브레스 수천만 인구를 저승길의 친구로 삼기 위해 준비를 끝내놓은 상황인 거겠지.
그의 정수리와 마을의 땅속에 이어진 선, 그리고 그가 나지막이 한 말은 그의 계획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오염 폭탄의 폭발 트리거를 기동해도 영혼 오염 폭탄이 대규모로 터져 대륙을 휩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죽일까? 어차피 수명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주룩, 갑자기 그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빛은, 선생님이 하셨습니까…?”
“예.”
“……이 빛 속에서…… 미래를, 봤습니다…….”
미래future가 아니라 아내인 윤미래를 말하는 거겠지.
“울고…… 있었어요……. 그러지 말라고…….”
“…….”
그건 강혁준이 무의식중에 그려낸 환상일 뿐이다. 윤미래는 콜라이도 어디에도 없었고 그의 곁에도 없었으니까.
죽은 지 5년이나 지났으니 이미 성불해서 이 세계의 윤회에 섞여들었겠지.
“저는…… 그 사람들을, 그 새끼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원기가 10% 미만이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텐데 주먹을 힘겹게 쥐고 부들부들 떤다.
환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원기를 조금 보충해주었다.
그러자 힘에 부친 한숨을 내쉰 강혁준이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강혁준은 태어나길 소심한 성격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주눅이 잘 들고 기가 약해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하지만 그와 반대로 태양처럼 밝고 활달한 윤미래, 같은 산부인과 병원 출신에 모친도 같은 병실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태어날 때부터 소꿉친구인 그녀가 옆에서 지켜주어 그럭저럭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둘 다 서로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정도로 친했기에 중학교 들어갈 때쯤 자연스럽게 사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생이 되었을 땐 부모님들 몰래 동거하다 들켜서 갓 스무 살 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뭐, 간단히 말해 소꿉친구에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꿈꾸는 삶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둘이 사이좋게 니오네브레스로 끌려오기 전까지는. 아니, 니오네브레스에 끌려와 윤미래가 죽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로 도망쳤다가 희귀 직업을 각성하신 거군요.”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강혁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예……. 그래서, 얻게 된 힘으로…… 그놈들을…… 미래를 죽게 만든, 이 세계를…… 부수려고 한 거예요…! 복수하려고!”
“……범인은 시레세아의 하급 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자와 윤미래 씨를 죽게 만든 뒷골목 조직들에게만 복수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부수려고 한 겁니까.”
“저도, 수소문 끝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절 손가락질하고, 미래가 죽을 짓을 저질렀다고……!”
동향 사람인데다 5년 가까이 썩어만 가던 속내를 토해내어서일까, 환인에게 선명하고 뚜렷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 새끼는, 사회의 비호를 받고 있어요…! 그 비호를 등에 업고, 미래를…… 억지로……!”
아내가 간살姦殺 당했다고 말하는 강혁준의 홍채 속 붉은색이 피처럼 진해지며 홍채의 검은자위를 잠식해간다.
힘이 없을 텐데도 반쯤 몸을 일으켜 환인에게 동의를 구하듯 팔을 뻗는다.
“그렇다면, 사회 그 자체를 부숴버리는 게 맞잖아요?! 그 새끼만 죽이지 못한다면, 그 새끼가 속한 사회까지 전부 다!!”
“이해합니다. 복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으니까요.”
“……!”
환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공감해주자 강혁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와락 눈물을 뿌린다.
이해한다는 환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자신의 여자친구들이 같은 꼴을 당한다면 환인은 그 사건에 조금이라도, 정말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 자들이라도 전부 쳐 죽여 버릴 테니까.
그 과정에 방해받는다면 방해한 자뿐만 아니라 그 방해자와 관련된 인물, 집단, 단체, 국가까지 전부다.
물론 환인은 자신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있는 중이다.
끅끅거리며 환인의 손을 잡고 우는 강혁준의 귀에 환인의 목소리가 닿는다.
“저도 당신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관련된 사람들을 전부 죽였을 겁니다. 사적 제제? 개나 주라고 하십시오.”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머리가 들리며 환인의 얼굴로 향한다.
환인도 솔직히 말해 자신과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면 강혁준이 뭘 하든, 콜라이도나 시레세아를 날려버리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내 일 아니라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오지랖을 부려 평판을 얻으려 하는 것도 상황이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강혁준이 벌이는 일은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자들도 피해를 볼 수 있는 일.
“하지만 저는 당신이 세상을 날려버리는 행동을 막아야 합니다. 당신의 계획이 실행된다면 제 여자도 크게 다치거나 죽을 테니까요.”
“…….”
분노에 불타던 권혁준의 눈동자가 그림자에 뒤덮여 흐려진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너는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냐는 질투와 분노의 그림자다.
환인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강혁준 씨. 저는 보기에 이제 10대 중반처럼 보이겠지만, 실제 나이는 서른을 넘었습니다.”
“……?”
“이 세계에 넘어온 지 대충 5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사이 목숨을 몇 번 잃을 뻔한 적도 있지만, 대게 운이 좋아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 신분과 지위를 얻었으며 반로환동을 이뤄 이 모습이 되었습니다.”
“…….”
분노와 질투의 그림자에 휩싸여있던 그의 눈이 조금 맑아진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자기 자랑처럼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강혁준의 눈이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조금 더 커졌다. 두 눈의 홍채에 붉은색의 비율이 줄어들고 검은색이 좀 더 많아진다.
“신이라는 작자의 광대가 되어 놀잇감이 된 상태이기도 한데 아무튼…….”
“시, 신이…라고요……?”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분은 아닙니다. 이 세계의 신이지요. 저는 그런 신의 손길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고요.”
강혁준의 표정이 이번에는 멍해진다.
“아무튼. 신의 노림을 받다 보니 나름 이 세계에서 발언력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신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러니…… 강혁준 씨,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의 복수, 코앞에서 직관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멍해져 있던 표정이 더더욱 멍해진다.
그런 그의 표정에 환인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볼 수도 없는 곳에서 원수들이 터져나가봤자 속은 별로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 없는 사람들도 휘말려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만들겠지요.”
그럴 바엔 당신의 삶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자들이 목매달려 죽는 꼴을 코앞에서 직관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는 환인의 감언이설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물론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강혁준이 딜을 받아들인다면 환인은 계약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 그게……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강혁준 씨가 특별한 직업을 각성한 것처럼, 저도 특별한 직업을 각성했습니다. 영혼사 계통인데, 신분과 지위는 영도의 대성녀님 바로 아래 정도는 됩니다. 발언력도 그 정도며 무력은 당신의 앞에 별 어려움 없이 있을 수 있는 정도이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말하는 도중 강혁준은 그제야 이블팩션의 짐승들이 아무도 올라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밖이 저렇게 환한데도 싸우는 소리 하나 없고 말이다.
그의 눈에서 흔들림을 포착한 환인은 악마가 유혹하듯이 은근히 말했다.
“무엇보다, 제가 이 세계에서 영혼사로 각성한 뒤 확인한 사실은 영혼과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거였습니다.”
환인은 아까 죽인 이블팩션의 영혼을 손짓으로 불러와 강혁준의 앞에 내세운다.
그리고 평온의 파동 약식을 펼쳐 정화하자 보기에도 황홀한 빛무리가 되어 지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 승천하는 영혼들.
“……!”
강혁준의 눈이 부릅떠지는 걸 본 환인이 더더욱 속삭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윤미래 씨는 이미 성불하셨습니다. 아마도 밝고 따스한 곳에서 행복한 내세를 기다리고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강혁준 씨는 다릅니다. 현재 갈림길에 서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전 대륙에 걸친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윤미래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니면 흉악한 죄를 저지른 죄인만 단죄한 뒤 윤미래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지.
“저는…… 저, 저는…….”
덜덜 떠는 것처럼 말을 더듬는 권혁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원기 방출과 더불어 평온의 파동을 한 번 더 펼쳐주었다.
마치 가톨릭 신부가 세례를 내리는 것처럼.
그의 고백에서 고해성사 느낌이 나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증오와 원한에 휩싸여있을 텐데도 거친 언행이라곤 개새끼라는 단어뿐인 것에서 혹시 강혁준은 가톨릭 신자가 아닐까 싶어서 해본 거였는데…… 효과는 굉장했다.
“흐으윽…….”
강혁준이 기도하듯 깍지를 끼고 눈물을 철철 흘리기 시작한 것.
황금빛의 파문이 아름답게 퍼져 나와 심신이 평온해지고 원기 방출로 원기까지 회복되니 머리까지 맑고 또렷해졌다.
정신이 온존치 못한 그로서는 환인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콜라이도에서 지내는 6년간 영혼사가 어떤 존재들인지 들은 것도 있기에 나온 효과.
“선생님.”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예, 환인 선생님. 선생님께서 정말 그 개새끼들을 죽일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테러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돌변해 처벌받는 일 따위, 현대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느님께 맹세코 윤미래 씨의 원한과 강혁준 씨의 증오가 남지 않도록 범죄자들을 모두 잡아 강혁준 씨가 보는 앞에서 가혹하게 처벌하겠습니다.”
“예, 예……! 크흑, 으흐흐흑……!”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오열하는 강혁준의 뒤통수를 보며 환인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사기에 가까운 짓을 했지만,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수천만 명을 죽여 문명을 리셋시킨 영혼을 자애신이 용서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연히 강혁준의 영혼은 소멸할 것이고 먼저 죽은 윤미래와 내세에서 만날 가능성은 0.0001%에서 완전한 0%가 되겠지.
범죄자의 멱살을 잡아 끌고 와서 사적 제재를 가한다면 영혼사로서 평판이 조금 미묘해질 수 있지만, 한반도의 수십 배나 되는 암흑의 숲을 샅샅이 뒤지며 영혼 오염 폭탄에 걸린 놈들을 찾아 저주를 해소하는 미친 짓거리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오히려 전말이 알려진다면 콜라이도와 시레세아의 시민과 지도층은 환영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로써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일은 막았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풍둔 주둥아리의 술법!
주인공이 주둥아리를 나불거리기 시작하면 현대의 심신미약이 아니라 진짜 심신미약 상태인 강혁준은 저항할 수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