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 콜라이도 연합도시
호텔 뒤편인지 옆편인지 모르겠지만, 상점가는 족히 300평은 될법한 길쭉한 수영장의 좌우, 짧은 팜 트리 비슷하게 생긴 것들 너머에 쭈욱 늘어서 있었다.
환인이 보기에 상점가라기보단 바자르bazaar 느낌이 컸다. 근현대와 현대의 바자회나 아케이드 아래의 점포 거리가 아닌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동권의 바자르.
니오네브레스의 문화라는 게 이것저것 지구의 문물이 섞여 자체적으로 발달해온 식이라 바자르가 있다 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
여자친구들과 뜨거운 햇살 아래로 나오자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남자, 여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들은 피부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나들이옷 비슷한 옷을 입고 수영하며 노는 중이고, 남자들은 상체만 드러낸 반바지 차림으로 손에 유리잔을 들고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든다.
귀족 남녀만 있는 게 아니라 호텔의 고용인인 듯 귀족들 사이사이 VIP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미남미녀들도 많다.
플뢰족이나 루크랑족 여성들은 피부 노출이 없는 일상복 같은 수영복으로 수영장 안에서 돌아다니고 플라비우스족은 수영장 밖에서 발만 담근 채 시간을 보낸다.
루크랑족 남자는 일반인과 비슷한 체구밖에 없는데 웨이터처럼 정장 차림으로 가벼운 디저트나 술 같은 음식을 서빙하고 나르고 있다.
수영하며 놀다가 지치면 근처의 비치 체어에 앉아 쉬거나 노점 같은 점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음식을 사서 먹거나 노점 등을 구경하는 분위기.
수영장이라기보단 귀족들의 여가 장소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환인 일행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저분이 성제님이시지……?=
=어쩜, 성제님의 휘광 좀 보세요…….=
=영혼 기사도 하나같이 아름답군. 흡사 들판에 핀 야생초처럼 강인한 생명력까지 느껴져…….=
환인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여자친구들과 초상화관으로 향했다. 목적인 초상화를 먼저 그리고 그 뒤에 근처에서 휴식하든 뭘 먹든 할 생각.
세 곳의 초상화관이 나란히 선 장소에 도착하자 여자들이 안쪽을 구경하며 속닥인다.
=환연이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릴라이스가 몸 바꿔 달라고 성화를 부리니까 어쩔 수 없지…….=
=언니들, 릴라이스는 초월 정령인데 좀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들판이랑 황야를 가로지를 땐 암말도 안 하다가 도시에 들어오니까 자기 차례 주장하고.=
=그런 게 없잖아 있는 거 같지만 연이도 딱히 불만은 없어 보이니까…….=
초상화관 세 곳은 현대의 포토 스튜디오나 사진관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세 곳, 혹은 네 곳 정도로 배경과 가구 등이 꾸며져 있고 피사체가 옷을 차려입고 포즈를 취하면 화가들이 조명 마도구로 빛을 비춰 그림으로 그려내는 식.
「환인. 난 수영하고 놀면 안 돼?」
노른은 초상화에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환인의 코트 자락을 잡아당기며 허락을 구했고,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니 좋아라하며 이모렐의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안느, 유르파, 백려강, 아영은 초상화관 세 곳을 살펴보며 각자 의견을 주고받다가 세 곳에 나뉘어 선다.
완성된 초상화를 입구 근처에 예시로 초상화를 여러 점 걸어놨는데 VIP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장소라 그런지 세 곳 다 수준급 실력을 자랑했기 때문.
색감이나 작화의 차이에서 오는 감각적인 호불호 뿐이었기에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초상화관의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지만, 이실리테는 환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실리테. 넌 안 가는 건가.”
=네. 주인님 호위 문제도 있고 초상화에는 별로 관심이…….=
“…….”
환인은 매혹적인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고 플뢰족 여자 화가의 앞에서 자세를 잡는 안느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꼈다.
노른도 빠졌고 환연도 없고……. 흠.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저벅저벅, 안느를 그리기 위해 준비 중인 여자 화가에게 다가가 캔버스와 이젤, 간단한 그림 도구를 빌렸다.
=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예.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네? 아, 네…….=
“이실리테, 이리 와라. 넌 내가 그려주지.”
성제가 그림을 그린다고?
화가도 놀라고 화가의 조수도 놀라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대기하던 여자들도 놀라 환인을 돌아본다.
그의 그림 실력이 제법 뛰어나다는 것은 그의 여자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릴 정도의 실력이었어?
아니, 잠깐! 그런 거면 우리도……!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피식 웃었다.
“나는 단순한 소묘밖에 못 한다. 그러니 전문가들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
=그치만…….=
이런 화가들이 그려주는 화려한 초상화보다 그의 소묘가 수백 수천 배 더 가치 있는 그녀들이다. 물론 환인은 자신의 소묘보다 전문가의 초상화를 원한다.
결국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나중에 간단한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약속해주고서야 그녀들의 시선에서 풀려났다.
“이실리테, 너도 이 뒤에 자리가 나면 전문 초상화를 그려달라 해라.”
=…네, 주인님…….=
“그러면 저기서 드레스로 갈아입고 와라. 머리카락도 포니테일을 풀고…… 이 리본을 묶으면 좋겠군.”
=…….=
이실리테는 빨개진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유르파와 아영, 백려강에게 끌려가 단장 당한다.
그렇게 일광 아래에서 시작된 드로잉은 약 1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실리테, 표정…….”
=네?=
“…아니, 아니다.”
밝은 햇빛 아래 차분히 빗겨 내린 호박색 머리카락은 백금처럼 빛나고 신의 붓으로 그린 듯한 눈썹과 눈매는 주인이 직접 그려준다는 황송함과 부담감에 미묘한 부끄러움을 담고 있다.
환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천천히 새하얀 캔버스에 그려 나간다.
“이실리테, 고개와 시선 돌리지 말고. 부끄러워해도 이쪽을 보고 해라.”
=네, 네.=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자세. 이른바 모나리자 포즈를 요구하지만, 부끄러운지 계속 몸이 돌아고 있어 수 차례 자세 교정을 하며 그림을 그려 나가는 환인.
영혼사로서 정점이라 볼 수 있는 성제가 직접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에 어느덧 그의 주변에는 귀족과 호텔의 종업원들이 모여 갤러리를 이루었다.
초상화가 빠르게 완성되어갈수록 갤러리에서 감탄과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오오…….=
=굉장하군. 목탄과 펜으로만 저만큼의 그림을 그려내실 줄이야.=
=내가 아는 소묘와는 다른데…….=
=어쭙잖은 초상화가는 흉내도 못 내겠어.=
=저 자체로도 작품이야!=
=얼마를 내든 간에 갖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군……!=
그 유명한 성제가, 아신위에 오른 성제가 손수 그린 초상화. 그 대상 또한 대륙 5대 미녀로 손꼽길 망설이지 않을 여성이다.
귀족들은 1000금화를 지불하고서라도 저 초상화를 갖고 싶단 욕망이 들끓었지만(희소 가치를 생각하면 실제 경매에 내놔도 이 정도는 나올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저 초상화는 영혼 기사를 위해 손수 그려주는 것이라 했다.
영혼 기사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대한 소문에 따르면 억만금을 불러도 팔지 않겠지.
“끝났다.”
환인의 선언에 갤러리들은 다시금 탄성을 질렀다.
흉상으로 얼굴과 표정에 집중한 대신 그 외에는 거칠게 그린 초상화다.
미완성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매혹적인 맛이 느껴지는 그림.
대귀족의 공녀처럼 드레스를 입고 사뿐사뿐 걸어와 캔버스를 확인한 이실리테의 얼굴에 그야말로 꽃망울처럼 화사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미소가 번진다.
=이게 주인님의 눈에 보이는 저…….=
“마음에 드는 거 같아 다행이군.”
=…….=
=…….=
감격해 살짝 눈물을 글썽이는 이실리테와 그런 그녀를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는 환인의 여자들.
유르파를 비롯한 여자들은 직감했다. 이후에 그에게서 초상화를 그려 받더라도 지금 느끼는 부러움은 상쇄하기 어려울 거라고.
자고로 이런 그림은 첫 번째가 가장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자기가 직접 그려주는 그림이니까.”
세간에서는 저 첫 번째 그림에만 큰 가치를 부여하겠지. 하지만 타인의 시선 따윈 쓸모없다.
중요한 건 그가 마음을 담아 자신들을 그려주는 것이니까.
점심은 오랜만에 바자르의 노천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중동권의 향기처럼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음식도 중동의 느낌이 제법 나는 것들이었다.
비율로 보자면 중동권:미국&유럽권:동양권이 45:35:20정도일까.
환인은 두께만 5cm는 되는 두툼한 미디엄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채소와 생선요리를 적당히 섞어 주문했고 안느와 아영을 제외한 여자들도 환인과 비슷한 라인업으로 음식을 주문해 점심을 먹는다.
그 뒤에 여자들은 다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흩어졌다. 초상화 하나를 완성하는데 4~6시간은 걸린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환인은 물놀이 하느라 홀딱 젖었다가 뽀송뽀송해진 노른, 그리고 공녀 같은 드레스 차림에서 다시 벌레굴 미궁에서 입수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이실리테와 바자르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보석 가게, 장신구 가게, 의복 가게, 음식점, 서점, 주점, 마도구점.
=거기 녹색 머리의 귀여운 아가씨! 달콤한 하늘 과자 어떻습니까!? 달고 맛있어요~!=
「오—……. 환인, 나 저거 사줘.」
그다지 감흥 없는 것들을 구경하고 노른이 먹고싶어 하는 것을 사주면서 환인은 아란=에로프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겼다.
‘아내가 죽어 정신이 나가버렸다면 계획을 방해한 나에게도 적개심을 드러낼 텐데…….’
더욱이 기억석을 파괴했다는 소문이 강혁준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을 향한 적대심이 그 즉시 폭발할 거다.
5년 전쯤 이블팩션에 투신했다 하니 자신의 소식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성제? 씨발 그게 뭐 하는 새낀데!!’하면서 날뛸 가능성이 크다.
“…….”
아란=에로프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강혁준도 직업자로 각성했겠지.
힘도 없는 무력한 차원 방랑자가 본능으로 움직이는 이블팩션 내에서 섀도어족을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여자친구들에게는 편의주의적 상상이라 했지만, 기억석을 탐낸다는 건 그가 정신술사의 능력을 갖춘 특수 직업으로 각성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자신만 봐도 영혼사의 특성을 지닌 특수 직업자로 각성해 성제로 재각성하지 않았던가.
그게 26살일 때의 이야기니,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는 강혁준이 6년 뒤 각성했다고 하면 자신과 연령대도 얼추 비슷해진다.
=주인님. 초상화가 다 그려졌나 봐요.=
이실리테의 알림에 초상화관쪽을 보니 과연, 여자친구들이 다들 원래 복장으로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들과 합류하자 안느만 조금 표정이 밝고 유르파, 백려강, 아영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왜인가 했더니 나온 결과물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 것으로 보였다.
환인이 보기에도 뭔가 애매하다. 17세기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처럼 뭔가 부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히잉.=
아영은 특히 심각해서, 19세기 인상파 거장들의 그림처럼 개인에게 집중하지 않고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테마처럼 그려놨다.
클로드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처럼 얼굴이 거의 묘사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영이라고 알기도 어려운 수준인 것.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무려 아신격인 성제의 영혼 기사를 초상화로 담아내는 일이다. 긴장해서 예술혼이 발아, 회심의 작품을 그려버린 것을 두고 뭐라 할 수 없는 일.
잘못이 있다면 중간중간 캔버스를 확인하지 않은 그녀들과, 화가의 그림을 확인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자르를 구경한 환인에게 있는 것.
송구해 하며 허리를 굽신굽신 굽히는 화가들에게 두 배의 품삯을 지불한 환인은 그녀들의 초상화를 챙겨 객실로 돌아왔다.
=이실리테 언니는 좋겠다.=
=부러워요…….=
=아휴…….=
아영과 백려강, 유르파가 이실리테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환인은 그녀들의 초상화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
“미술관에 걸릴법한 이런 것도 괜찮은데.”
=……오빠가 마음에 든다면야 뭐…….=
그리고 환인은 안느의 초상화로 고개를 돌렸다가 큭, 하고 웃었다.
=왜,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
환인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자 다른 여자들이 안느의 초상화 앞에 서서 감탄한다.
=이것만 보면 안느 언니의 덩치가 전혀 안느껴지, 꺅!=
철썩— 얼굴이 빨개진 안느의 등짝 스매싱에 얻어맞은 아영이 앞으로 나뒹군다.
=푸흐흡. 안느 아가씨 엄청 소녀소녀하게 그려졌네? 화가한테 요구한 거야?=
=……조금 체격을 줄여달라고는 했어. 이 정도로 줄였을 줄은 몰랐지만.=
차마 유르파는 때리지 못하겠는지 안느가 팔짱을 끼고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하얀 창가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안느의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이 다소 가미되었는지 복장에 약간의 변형이 들어가 있었다.
약간 노출도가 높은 원피스에 짧은 치마가 시스루처럼 속살이 살짝 내비치는 레이스 타입의 다소 야한 차림이 되어있었던 거다.
바람에 아름답게 흩날리는 은발은 차분한 미소녀처럼 흘러내리고 있고, 각자 길이가 다른 검은색 실크 글러브를 끼고 턱을 괸 채 이쪽을 바라보는 그 자태는 한 송이 백합 그 자체.
도저히 키 195cm가량의 여자라고 보기 어려울만큼 가녀리다.
=와…….=
이실리테가 작게 감탄하며 안느와 그녀의 초상화를 번갈아 보니 안느가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들어 보인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때려주겠다는 의지의 표현.
=표정은 왜 이렇게 유혹적이야? 화가를 이렇게 보고 있었어?=
=야이……!=
안느의 주먹이 붕 휘둘러졌지만, 이실리테는 푸후후 웃으며 가볍게 피해버린다.
그 뒤로 안느와 이실리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안느의 초상화를 감상하던 환인은 웃으면서 아스펜드에 그녀들의 초상화를 수납한 뒤 살짝 분위기를 환기해 여자친구들을 불렀다.
“난 지금부터 강혁준과 윤미래의 집터로 가볼 생각이다. 안느와 노른은 날 따라오고, 너희는 만약 나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짝을 지어서 외출해라. 이블팩션이 다시 돌아와 습격할지 모르니까.”
=윤미래의 영혼이 남아있나 확인해보려고?=
이실리테의 추격을 포기하고 그녀를 찌릿 째려보았던 안느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묻는다.
“그런 것도 있고, 도시의 이면 분위기를 살펴볼 생각이다.”
호텔을 나오자마자 노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환인에게 말했다.
「저기랑 저쪽에 인간이 이쪽을 보고 있어.」
“시의회가 붙여놓은 눈이겠지. 신경 쓰지 마라.”
=도령, 걸어서 갈 거야? 아님 쿠핀 데리고 와?=
“여기서 그다지 멀지도 않다고 하니 느긋하게 걸어가지. 확인해볼 것도 있고.”
=확인할 거?=
“그래. 영혼.”
아란=에로프에게 들었던 곳으로 걸어가며 도시를 둘러보지만, 차원 방랑자의 지식이 대놓고 드러나는 곳은 거의 없다.
도시의 분위기는 19세기 유럽과 비슷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중동과 서구를 반반씩 넣어서 섞은 느낌.
어제 이블팩션의 습격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표정에 불안은 거의 안 보인다. 이블팩션의 습격을 하나의 일상으로 여기는 듯한 모습이다.
“…….”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환인의 눈에는 고통과 신음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었다.
곳곳에 사지가 날아간 영혼이 참혹한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죽을 때 뭉개진 모습 그대로 거리에 박혀있거나 뿌려져 귀곡성을 흘린다.
‘니오네브레스 시간으로 반년 전, 승령천제가 대륙적으로 이루어졌을 텐데.’
어째서 영혼들이 길거리에서 저런 모습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까.
어제는 노른을 타고 막시아의 뒤를 따르느라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갔지만, 역시 부자연스럽다.
「안돼안돼안돼안돼 왜왜왜왜왜왜왜…….」
일一자로 갈라진 배에서 쏟아진 내장을 주워 담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흘러내리기만 할 뿐이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플뢰 여자의 영혼에게 다가간 환인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올렸다.
아주 살짝, 영혼 감응을 열어 여자가 죽기 전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환인.
여자는 바르둘 여자로 짐작되는 이블팩션의 도주 경로에 우연히 서 있다 날카로운 손톱에 뱃가죽이 찢어져 내장을 뿌리며 사망했다.
내장을 계속해서 집어넣으려는 이유는 그녀가 임신 3~4개월의 임산부였기 때문.
짙은 잿빛의 갈기 같은 머리카락과 피부를 지닌 바르둘에게 죽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은 없는 여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남아있는 걸까.
“성불하십시오.”
「아…….」
환인이 펼친 평온의 파동에 정신을 차린 듯 검게 죽어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다.
이어 여자의 영체가 살아생전 평범한 모습…… 아니, 아이를 밴 모습으로 돌아가고, 눈물을 주룩 흘리며 희뿌연 빛무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헉. 영혼사님이야…?=
=어어? 하, 하지만 아우라가 없으신데…….=
지나가던 시민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강혁준의 집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영혼들과 하나하나 접촉했다.
코끼리에게 짓밟힌 것처럼 명치부터 하반신이 으깨진 여자.
날붙이에 정수리부터 왼쪽 턱까지 잘려 나간 남자.
상·하체가 나뉜 남자.
새까맣게 탄 여자.
산성용액에 상반신이 녹아버린 여자.
전부 이블팩션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이다.
어느샌가 환인의 뒤로 군중이 생겨나 그의 뒤를 따르고 있지만, 환인은 굳은 얼굴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영혼들을 감응하고 성불시키다가 노른을 불렀다.
“……노른, 저기서 이쪽을 보는 사람을 데리고 와라.”
「응.」
환인의 지시에 휙— 군중의 머리 위로 날아가 줄곧 쫓아오던 여자를 붙잡아서 환인 앞에 내려놓는 노른.
느닷없이 붙잡혀온 시의회 요원은 ‘절대 성제와 마찰을 빚지 말라’는 윗선의 최고 우선 사항을 떠올리며 다급히 손사래 쳤다.
=스, 서, 성제님! 이건 염탐이 아니라……!=
“오해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의회 분들의 걱정은 이해하니까요. 당신을 이리로 부른 이유는 몇 가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예? 아,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것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최근 영혼사가 방문한 적은 언제입니까.”
=네? 그, 그것이…… 4개월 전의 아스톨라 상급 영혼사님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분이 이쪽 거리를 다녀가셨었습니까?”
=예. 불쌍하고 안타까운 분들이 많으시다고 한 달에 걸쳐 도시 전체를 둘러보신 후 떠나셨습니다.=
“……그때 성불하신 분들의 숫자가 어떻게 됩니까.”
요원은 무서운 분위기의 성제님이 왜 이런 걸 질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성실히 대답해드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알지 못하는 사항이라, 답변해드리기 위해서는 상급 담당자를 호출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대로 이전 강혁준이 살았던 저택으로 향할 테니 알아보시고 돌아오셔서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옙!=
척, 상급자에게 하는 것처럼 경례를 올린 요원은 황급히 골목길로 들어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군중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환인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안느가 환인에게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령.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듯하니 돌아가면 하도록 하지.”
=응.=
환인은 다음 영혼, 마찬가지로 이블팩션에게 살해당한 영혼을 성불시키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우연 같은 게 아니다. 이블팩션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일반적인 영혼사의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성불하지도 않는다.
‘니라인에서는 이런 영혼을 본 적이 없는데……. 혼령주에 강제 성불해버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건가.’
영도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블팩션이 남하해오면 영도 아랫마을에 닿기 전에 출동해 토벌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하나도 못 본 것은 이상하다.
‘아신에 가까워졌기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군. 아니면…….’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모래색 제복을 입은 플라비우스족 남자가 굳은 얼굴로 날아와 환인에게 허릴 꾸벅 숙이고 요원에게 했던 질문의 답을 들려준다.
한 달간 아스톨라 상급 영혼사가 성불시킨 영혼은 34명.
=상급 영혼사님께 직접 여쭈어보고 기록한 숫자이기에 잘못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4명…….”
=저, 성제님. 무언가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직 말씀드릴 단계가 아닌듯합니다. 아스톨라 상급 영혼사님이 떠나가신 뒤 이블팩션의 습격과, 그 습격에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아십니까?”
=예? 어, 정확한 건 관련 부서의 문서를 확인해보아야겠지만 이블팩션의 습격은 총 2차례가 있었으며 최소 10명 이상, 최대 30명 미만이 아닐까 하고…….=
호텔에서 이곳까지 4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성불시킨 숫자만 27명이다.
환인은 남자에게 웃으며 협조에 감사드린다고 인사한 뒤 다시 성불행을 해나가며 강혁준이 살았던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1시간 뒤.
강혁준의 생전 저택에 도착했지만 남은 것은 잡초만 무성한 공터뿐.
어디에도 윤미래의 영혼은 없었다.
[이블팩션에게 살해당한 사람의 성불 유무 말이시오? 갑자기 그런 질문이라니, 조금 이해가 되지 않소. 영혼사의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이 있을 리도 없고…….]
환인의 질문에 내막을 눈치챈 대성녀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묻는다.
또 무슨 큰일을 가져온 건가, 하고 걱정에 물든 표정이다.
“있습니다.”
[이, 있다고? 설마 진짜 이블팩션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영혼사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단 말이오?]
“3개월 전 아스톨라 상급 영혼사님이 다녀가셨는데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영혼은…….”
콜라이도의 상황과 영혼사의 방문 이후 이블팩션의 습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해도 맞지 않는 숫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대성녀의 얼굴이 이전에 본 적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
아스톨라 상급 영혼사의 불성실 같은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오직 봉사와 자애의 마음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희생하는 영혼사들이다. 부조리와 불합리한 일을 저지를 리 없다.
있다면 그야말로 말세가 도래했다는 증거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니오.]
“저도 언제부터 이걸 볼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만 벌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는 일인지 확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현시점에서 그대 외에는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군.]
“…….”
[…….]
무표정으로 얼굴을 몇 차례 문지른 대성녀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일단…… 영도의 기록실 문서를 전부 뒤집어서라도 이와 관련된 언급이 있는지 조사해보겠소. 동시에 강구책을 마련해볼 터이니 성제는 당신 자기 일에 집중하시기 바라오.]
“괜찮으시겠습니까.”
돕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환인의 질문에 대성녀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일은 영도 차원에서 움직여야 하는 사안이오. 그 사례가 존재함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성제는 할 일을 다 한 셈이지.]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연락해주십시오.”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가슴이 훈훈해지는군. 아, 그리고 다시 성인이 된 것을 축하드리오. 족히 15년은 회춘한 것처럼 보이오만.]
통신을 종료하려다 이어지는 대성녀의 이야기에 환인도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려져서 보기 이상하진 않나 모르겠습니다.”
[이상하다니. 보기만 해도 모성애가 흘러나올 것 같은 모습인데. 우리도 나름대로 성제가 안전히 나이를 먹을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해결 방법을 찾아낸 그 수완이 감탄스러울 따름이오.]
“하하…….”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라니, 대체 어떻게 보이길래?
모든 일을 끝마치고 지구로 돌아가면 포영과를 조금 더 먹어야 하나 환인이 고민에 잠길 무렵이었다.
=주인님, 시의회 도시 역사 기록담당자가 아란 에로프 상원의원과 함께 도착했어요.=
“그래. 지금 나간다.”
이실리테의 알림에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만약……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면, 강혁준은 물론 암흑의 숲에 자리 잡은 이블팩션은 그날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니오네브레스에 애정이 없다지만 그간의 여행길에 쌓은 인연은 적지 않다.
더욱이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를 떠난 뒤에도 이 세계를 살아갈 자신의 아들딸들을 생각한다면 세상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는 일을 꾸미는 놈 따위, 살려놓을 수 없다.
환인은 광명창의 코어를 꽉 움켜쥐며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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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드디어 얼굴이 나온 이실리테와 키 196cm의 백합(쑻)
엄청 늦었지만 삽화 두 장이랑 8500자(공백포함 11300자)로 용서해주세용!!
[작품 설정]
이실리테 초상화!
환인 손은 금손
한떨기 백합(쑻)
코이쯔 포샵이 과하게 들어간www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