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 소도시 라펩
호로로롤로롤—
바깥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새 울음소리에 눈을 뜬 환인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도 달리지 않은 바깥을 통해 새빨간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런 하늘을 배경으로 까맣게 보이는 새 떼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도 보인다.
대충 오후 6시쯤인가.
백려강에게 착즙 당한 뒤 잠깐 눈을 감고 떴다 생각했는데 몇 시간이나 흘러있다니. 왠지 시간을 버린 기분이다.
‘어른일 때는 몇 날 며칠 동안 해도 멀쩡했는데.’
그래도 적굉으로 인해 쌓였던 짜증과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서 머리는 개운하다. 환연을 안으며 올랐던 열도 완전히 내려갔고 컨디션도 양호.
=도령 일어났네? 식사할 수 있겠어?=
“그래. 문제없다.”
=응. 그럼 저녁 바로 준비할게. 이슬아~ 도령 일어났어~.=
몸 상태를 점검한 환인은 그새 조금 뻣뻣해진 관절과 근육을 푼 뒤 여자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 누가 방문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누가 왔었지.”
=4시간 전 귈탐 여족장이 다녀갔습니다.=
줄곧 밖에서 경계 근무를 선 이모렐의 대답에 어느새 배가 홀쭉해진 환연이 케이준식 가재찜을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말을 더했다.
「환인 네가 한참 내 구멍을 탐하고 있을 때 만엽하고 청이라는 사비족이 공간이동술법진으로 넘어왔었어.」
“넘어올 때 표정은 봤나.”
「만엽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얼굴이었고 청은 만엽을 죽도록 갈구고 있던데?」
“그렇군.”
자신이 자고 있었고 방문자를 더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기관장들의 방문까지 막다니. 귈탐의 뜻일까 아니면 그 둘의 결정일까.
민물이라지만 오랜만에 수산물로 풍성한 저녁을 만끽한 환인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포영과를 섭취했다.
이번에 먹으면 9~10살 정도가 된다.
앞으로 약 6회만 더 먹으면 육체는 성인에 가깝게 자라겠지.
식사 뒷정리를 끝마치고 돌아온 안느는 손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그 기관장들 오늘은 안 만나?=
“그래. 내일 아침에 만나도록 하지.”
그리 말하며 유르파에게 손짓해 차폐막을 거두게 한 환인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발코니로 나가 후우웁— 크게 숨을 들이마셔 폐를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어서…….
『갈—!!!』
갈喝, 한 글자를 신언으로 온 힘을 다해 토해냈다.
우르르르릉— 꽈과광!! 쿠구구구…… 꽈아앙!
마치 용의 포효처럼 대기를 가르고 구름을 뚫어버리는 신의 목소리.
그에 날아가던 밤새가 픽픽 추락하고 뻥, 뚫린 구름이 삽시간에 검게 물들어가며 꽈르릉, 벼락과 천둥을 뿌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그리고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환인은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보며 목을 어루만졌다. 확실히 몸이 커지며 그릇도 점점 완성되어가는지 낮에 신언을 썼을 때보다 목의 부담이 덜하다.
“……흠.”
불만 켜져 있을 뿐, 빗소리에 파묻힌 도시를 내려다보던 환인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여자친구들을 보곤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아…….=
=으, 으으. 도오려엉…….=
=으에에…….=
“큭큭. 제법 짜릿했나보군.”
=두 번 짜릿하면 기절하겠네 진짜…….=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안느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나 앉는 여자들. 와중에 노른과 환연만 제법 멀쩡하다.
“앞으로도 종종 신언을 써줄 테니 빨리 적응해라. 내 여자들이면서 내 신언에 자지러지면 본말전도니까.”
=네, 주인님…….=
=으으. 도령의 진짜 신언을 들을 때마다 신경줄이 끊어질 것처럼 바짝바짝 조이는데.=
잠시 여자친구들을 둘러보던 환인은 어지럽다는 듯이 귀를 잡고 있는 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신언에 자주 노출될수록 너희들의 영혼도 격이 오른다. 어쩌면 너희도 신의 시련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
=어? 진짜요?=
그가 먼저 다가와서 기쁜 듯이 헤헤 웃으며 뒤에서 끌어안은 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내 영혼의 격이 이렇게까지 상승한 것은, 린덴 촌락에서 신의 눈동자와 마주해 신의 목소리를 뇌리로 직접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내가 쓰는 신언은 진정한 신의 언어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신언은 신언이니.”
=우와.=
=오오오…….=
환인의 이야기에 살짝 흥분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여자들.
인간이란 시련을 거칠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다.
물론 가혹한 시련에 망가지거나 마모되어 폐인이 되는 일도 있지만, 신식 영혼의 눈이 그에게 있는 이상 적어도 그의 여자들이 망가질 일은 없다.
신언을 겪을 때마다 신식 영혼의 눈에 보이는 그녀들의 혼이 점점 단련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방금 하늘에 대고 한 일갈一喝은 그녀들의 혼을 단련해주기 위한 것 외에도 다른 의도가 있다.
‘만엽과 청도 제대로 눈치가 있다면…….’
방금 신언에 느낀 게 있겠지.
내일 아침이 기대되는군.
* * * *
우르르르릉— 꽈과광!! ……우르르르르—
쏴아아아아-!
밤하늘이 번쩍이고 우렛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한다.
환인의 거처 인근, 귈탐 여족장이 내어준 거처에서 알몸으로 뒹굴고 있던 청은 팔이며 몸에 거꾸로 일어난 비늘을 쓸어내리며 옆에서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는 만엽에게 고갤 돌렸다.
=……곰탱아. 방금 그거… 들었냐?=
=…….=
대답 대신 하얀 연기를 브레스처럼 푸우욱- 뿜어내는 만엽. 그런 그의 몸 곳곳에도 비늘이 일어난 상태다.
만엽과 한차례, 종의 보존 본능에 따른 격렬한 정사를 치렀던 청은 그 모습에 한숨을 작게 내쉬며 슬쩍 가늘고 긴 꼬리를 뻗어 그의 팔뚝에 곤두선 비늘을 차분히 쓰다듬어주었다.
그 위로하는듯한 행동에 만엽은 굵고 큰 손으로 그녀의 꼬리를 고양이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어루만졌다.
아닌척하면서 자신을 신경 써주는 여자. 못된 소리를 하지만 자신에 대한 걱정을 바탕으로 하기에 밉지 않은 여자.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여자.
=청,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돌아가라.=
=쪼다 새끼.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삐 안되나?=
날 선 그녀의 말투에 만엽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다.
=그……분에게 죽지 않더라도 주술사제 후보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에 입장이 매우 난처해질 거다. 적굉의 부족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 테지.=
=이미 늦었거등여~. 니랑 가치 라펩에 왔다는 거 이미 쫙 퍼졌을 낀데 내 혼자 돌아가 봐라. 무슨 개소릴 들을지 모른다. 글고! 니랑 내랑 같이 붙어만 있으면 씨발 그깟 상위 부족 따위 알게 뭐고. 덤비는 새끼들 대가리 다 뽀사뿌면 그마이지.=
호전적으로 내뱉는 청이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들은 맨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최고 전사가 된 연놈들. 배경이 없기에 상위 부족들의 파상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
성제같이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이길 방법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대족장님도 그 점을 우려해 만엽 저 곰탱이 시끼를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부득불 우겨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서약서까지 쓰고 넘어오지 않았던가.
그래도 뭐, 좋아하는 놈이랑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만엽은 툴툴거리는 청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깔았다.
‘너까지 함께 죽을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만엽은 그 말을 입에 담는 대신 달의 여신처럼 매혹적인 그녀의 나신을 잡아 자기 몸 위로 끌어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고맙다.=
=……할 게 그 말 삐 읎나.=
=……사랑해.=
=빙시 새끼……. 참 빨리도 말하네.=
둘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어둠 속에 파묻혀 교미를 나누는 뱀처럼 또다시 끈적하게 몸을 섞기 시작했다.
=만엽 교장님!=
그날 새벽, 라펩 족장 거처의 지하 감옥으로 이동한 만엽은 대가리만 내놓고 땅에 묻혀있는 적굉을 찾아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와 알아본 결과, 역시 성제라는 이교도는 벨티칼을 깊은 수렁에 빠트— 읍?! 우그극, 어걱!=
=씨발. 귀가 썩겠다.=
만엽을 따라 함께 지하 감옥을 찾은 청은 적굉의 개소리를 한껏 찌푸린 얼굴로 듣다 참지 못하고 적굉의 주둥이에 흑철목으로 만든 입마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긴 주둥이를 천잠사로 짠 끈으로 묶어버리자 적굉은 안구 출혈로 새빨개진 눈을 부라리며 살기 어린 기색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저 새끼들은 어쩔 거고?=
=내가 하지.=
푸우욱— 깊은 시름이 깃든 숨을 내쉰 만엽은 그의 비늘처럼 녹색으로 빛나는 창을 꺼내 적굉과 마찬가지로 머리만 내놓고 땅에 박혀있는 정교 기관원들의 정수리를 푹푹 깊게 찔러나갔다.
=뭐? 꺽!=
=사, 살려주십시오! 교장, 저는 적굉을 따라나섰을 뿌으게그극……???=
=안돼! 안돼!! 나는 오르판 부족의 장남이다! 이 날 죽이면 부족이 가만히 있지 않을끄게엑.=
=대족장께 전권과 책임을 받았다. 너희가 고를 수 있는 길은 명계의 문으로 이어지는 길뿐이야.=
이어 번쩍, 녹색섬광이 한차례 지나가자 뇌가 휘저어져 버르적거리는 기관원 넷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지고, 빨간 피가 푸화확 뿜어져 나와 좁은 감옥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만엽은 쏟아지는 피의 비를 피하지 않고 맞으며 한발 뒤에 물러서 있던 귈탐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여족장. 감옥을 더럽혀버렸군.=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감옥이란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곳이니까요. 그보다 저자도 마찬가지입니까?=
고작 하루만에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귈탐은 재갈이 물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적굉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가, 돌아온 만엽의 대답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성제님의 앞에서 참수할 것이오. 책임은 본인이 모두 가져갈 것이니 뒷일은 걱정하지 마시게. 물론 도시에 내린 비와 불어난 물도 아무 문제 없음을 확인하였소. 여족장이 짊어져야 할 죄의 무게도 없을 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찾아온 정교 기관원이 저 적굉만 아니었어도 헤뷜트의 가뭄 또한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터인데…….=
=…….=
만엽도 피에 물든 창을 쥔 채 눈을 감으니 청은 라펩의 전사단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녀의 지시에 완벽히 제압된 적굉을 땅에서 끄집어낸다.
=여족장, 성제님에게 안내해주시겠소?=
=예. 이쪽입니다.=
* * * *
새벽같이 일어난 환인은 몸을 움직여보며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컨디션이 더할 나위 없군.’
여자친구들이 밤새도록 교대해가며 안마해준 덕분에 몸 상태는 정상에 가깝다.
거기다 키가 이제 슬슬 140cm에 달하고 있고 근섬유도 늘어 어느 정도 페널티를 감수한다면 근접 전투도 할 수 있는 시기.
‘근접은 이제 의미가 없지만.’
불확정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적이 붙기 전에 날려버리는 게 가장 좋다. 그런 의미에서 점차 근접전의 중요성, 비중을 낮추고 있는 환인이었다.
유르파가 체블리프에서 버전업 시켜준 방벽을 착용한 환인은 패널을 오랜만에 불러내보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엥? 자기, 그거 뭐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의 소매며 바짓단을 조절해주던 유르파도 그걸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만들어준 마도기에 저런 기능은 없는데?
그전에는 여유를 둔 소환 숫자가 12자루였는데 지금은 28자루가 그의 몸 주위를 호위하듯 둥둥 떠다니고 있다.
방벽은 정신력과 위상력에 영향을 받으니 숫자가 늘어도 이상하진 않은데 문제는 그 색.
원래 흰색에 가까운 빛의 검이었는데 지금은 푸른색에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다. 20자루는 푸른색이고 남은 8자루는 칠흑처럼 새까만 색이다.
“글쎄요. 나도 모르게 영기와 심핵력을 불어넣은 건가…….”
안느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검을 톡 건드리자 간지럽다는 듯이 부르르 떨며 환인에게로 돌아간다.
=뭔가 의지가 있는 것처럼 떠다니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오빠가 28자루를 전부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엔 뭔가 검마다 개성이 느껴져요.=
아영의 말에 신식 영혼의 눈을 켠 환인은 검에 보이는 혼의 색에 눈을 가늘게 떴다.
검과 자신 왼팔 사이에 영혼의 끈 같은 게 이어진 게 보인다.
“……나와 계약을 맺은 영혼이 패널에 깃들었다.”
=헉?=
=헐.=
이러면 한층 더 고차원의 이기어검술이라 불러야 할까.
의식을 더욱 집중하자 일반적인 패널 검이 12자루 더 떠오른다.
환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열둘의 패널 블레이드와 혼이 깃든 빛의 검 28자루. 총합 40자루의 검기.
여자들은 조금 신기해하다가 이내 관심을 끊고 자기 장비를 마저 챙긴다.
그라면 저것만으로도 일당백의 무쌍을 찍겠지만, 그정도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환인도 잠깐 고민하다가 저 형태를 영혼검이라 이름 붙여놓고 소환과 소환 해제를 몇 번 반복해보며 기능적인 요소를 점검해본다.
‘딱히 검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잠깐 영혼검을 가지고 놀던 환인은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 차림을 마저 정돈한 뒤 출발 준비를 끝마친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정리는 끝났나?”
=응. 짐도 다 챙겼어.=
「나도 준비 끝.」
그의 오른쪽 어깨에 환연이 매달리자 늑대 크기 정도로 자란 실루가 다다닷 뛰어와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삐이~ 삐삣.
비상처럼 한순간 확확 자라는 게 아니라 보통 생물처럼 천천히 자라기 시작하는 실루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저쪽도 준비가 끝난듯하니 나가지.”
밖에는 귈탐 여족장과 그녀의 전사단 열두 명, 그리고 기억에 있는 외모의 사비족 남녀가 마당에 늘어서 있었고…….
“…….”
적굉이 대역죄인처럼 포박되어 재갈까지 물려 처소 앞에 무릎을 꿇려져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어제 찾아왔던 정교 기관원 넷의 잘린 머리가 혀를 빼문 채 창에 꿰여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 선혈이 뚝 뚝 떨어진다.
불굴의 의지로 적개심과 살의를 피워올리는 적굉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만엽과 청에게 먼저 인사를 걸었다.
“두 분, 오랜만입니다. 거인숲 미궁 앞에서 뵌 이후 처음이군요.”
=예.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 부끄럽고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만엽의 담담한 태도와 대답에서 죽음을 각오한 자의 분위기를 읽은 환인은 그의 옆에 선 청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만엽처럼 죽음을 각오하진 못했는지 한 번 움찔했다가 애써 눈알만 움직여 시선을 딴데로 돌린다.
만엽을 따라온 건가.
“그래서…… 아침 일찍 이렇게 모여계신 이유는, 제 생각이 맞는다고 여겨도 되겠습니까?”
=예.=
짧게 대답한 만엽은 창을 들어 적굉의 뒤에서 그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등에서 파고든 녹색 창날이 적굉의 심장을 찢고 앞으로 튀어나와 땅에 박혀든다.
=그우웁! 꾸으, 커……르륵…….=
적굉이 신음을 토해낼 때마다 주둥이에서 선홍색 핏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심장이 찢어졌어도 수십 초간 살아 피를 토해내며 동시에 원독에 찬 눈빛을 환인에게 보내던 적굉.
정확히 49초가 지났을 때 적굉은 간헐적인 경련도 멈추고 주르륵, 창대를 따라 흘러내려 자신이 토해낸 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헤뷜트 8대 부족의 핵심 인물의 사망이었지만 자리에 있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
덧없고 무가치한 죽음이다.
쑤욱-
죽은 적굉의 등에서 창을 뽑은 만엽은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인 것처럼 앞으로 나가 환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창을 거꾸로 잡고 자신의 오른팔을 어깨에서부터 석둑 잘라버리는 만엽.
=……!=
팔을 자른 당사자는 담담한데 정작 뒤에 선 청이 오만상을 쓰며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정교 기관의 우두머리이자 이번 일의 전권과 책임을 대족장께 위임받은 몸으로써, 이 오른팔에 대고 맹세하겠습니다. 적굉으로 인해 일어날 분쟁과 다툼을 막고 원한의 화살이 성제님에게 향하지 않도록 정리한 다음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진하겠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시길 간청합니다.=
“행동과 사태 파악이 빠르군요. 사건이 벌어지고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
아침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정원에서 환인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제가 본 사비족은 하층 계급민들부터 똘똘 뭉쳐 외부 종족을 적대시하던데 말입니다. 높은 신분과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오죽하겠습니까.”
=못한다면 아신위를 목전에 두신 성제님의 노여움에 종족의 명운이 흔들릴 것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낼 따름입니다.=
긴장과 다짐으로 점철된 이야기에 환인은 잠깐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엽 님의 노력과 성의, 몇 안 되지만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준 분들을 생각해 일단은 지켜보겠습니다. 아영, 그의 팔을 치료해드려라.”
=옙.=
환인은 아영이 회복의 성술로 그의 팔을 감쪽같이 붙이는 걸 지켜보고 입을 열었다.
“만엽 님. 당신이 일의 총책임자이시지만 굳이 자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의외로 온건한 반응에 만엽과 청, 귈탐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제 몇 차례 터져 나온 신언, 특히 밤에 터진 신언에서 느껴진 노여움을 보면 메리아놀 다음으로 벨티칼을 쳐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는데…….
그 눈빛에 환인이 작게 웃음 지었다.
“설마 몇몇이 저지른 잘못으로 벨티칼을 메리아놀처럼 적대하겠습니까? 메리아놀은 그만한 짓을 저질러놓고 발뺌하고 있는 데다 절 암살하겠다고 직접 실천에 옮기기까지 했기에 그 대가를 받아내려는 것일 뿐입니다.”
=……!=
메리아놀은 비밀 결사 집단과 일부 가문이 날뛰어 상황이 이토록 악화하였다. 그 말은 벨티칼도 충분히 그 전철을 따를 수 있다는 이야기.
꿀꺽, 만엽이 살짝 창백해진 비늘 색으로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환인을 올려다본다.
“물론 벨티칼도 메리아놀과 비슷하게 군다면 저도 참지 않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만엽 님은 물론 다른 분들도 유명을 달리하시게 될 테니 굳이 자진하실 필요는 없으시고, 만엽 님이 일을 잘 해결하신다면 그걸로 잘된 일이니 책임지고 자진하실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순간 그의 얼굴에 깃든 웃음과 표정이 사라지며…….
『약속하겠습니다.』
신언이 그들의 영혼을 후려쳤고, 이어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의 존재감이 그들의 정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털썩, 풀썩. 전사단이 먼저 주저앉거나 쓰러졌고 이어 귈탐, 청 순으로 무릎을 꿇어 힘겹게 헐떡인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만 더 발생한다면, 저는 영혼사라는 직위를 반납한 뒤 여러분께 받은 적의를 고스란히 돌려드리겠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차별에는 차별. 간단하지 않습니까?”
=크, 윽……!=
하지만 참 안타깝습니다, 라며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여러분들은 용의 후예입니다. 스스로 고고해질 수 있는 종족이라는 뜻이지요. 타국의 얼간이에 머저리들이 종족을 차별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명예와 위신을 깎아내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며…… 명심하고, 그 뜻을…… 널리 전파, 하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빙긋 웃으면서 한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이대로는 머리가 굳어버린 벨티칼 상위층에게 여러분의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짝만 도움을 드리죠.”
도움? 무슨……까지 생각했던 만엽 일행은 순간 쿠궁— 심장이 떨릴 정도의 낮은 진동과 함께 성제의 손에서 시작된 빛기둥이 하늘을 찌르고는 이어 도시 전체를 덮는 걸 목격했다.
정신 무장이 해제되고 눈앞이 하얘지며 영혼이 표백되는듯한 느낌에 전율이 꼬리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거꾸로 치닫는다.
풀썩풀썩, 전사단이 정신을 잃고 기절해버리고 신언에 간신히 버티던 귈탐도 으억,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자빠진다.
청과 만엽은 금방이라도 정실을 잃을듯한 백색의 광무光舞 속에서 어떻게 30여 초는 버텼지만, 그 이상은 못 견디고 쓰러지며 생각했다.
어쭙잖은 교섭을 안 하길 잘했다고.
이런…… 영도의 모든 영혼사가 모여 펼쳐도 못할 것 같은 혼령주를 물 마시듯이 간단히 펼치는 성제와 교섭이라니.
눈앞의 인간은 폭풍이다.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면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 폭풍.
그리고 까무룩, 사이좋게 기절해버렸다.
* * * *
머물던 객客이 떠나고 남은 자리. 명예도, 체면도 없이 퍼질러 앉아있던 만엽은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행동에 비슷하게 주저앉아있던 청이 꼬리로 그의 등을 철썩 후려친다.
=일 잘 해결됐는데 복 나가게 웬 한숨이고.=
=정말…… 일이 잘 해결된 걸까.=
=성제가…… 성제님이 봐주고 떠난 거 아이가. 팔다리도 멀쩡하고 목도 잘 붙어있으니 잘 된 거지.=
=성제님이 마지막에 남긴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암시하고 있었다. 종족 내에 만연하는 종족 차별을 철폐하고 머리가 굳어버린 각 상위 부족들의 머리를 깨트려야 한다는 이야기지.=
=……시발. 죽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 그래도 우린 살았고, 성제님은 시간제한도 안 주셨다. 평생 과업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해나가야지. 물론 대가리 깨진 새끼들이 성제님한테 시비 안 털게 주시해야 할거고.=
불퉁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착실히 미래를 그리는 그녀를 돌아본 만엽은 빙그레 웃었다.
=와 그리 처웃는데?=
=청, 나와 결혼해줘. 역시 내 옆에는 네가 없어선 안 될 거 같아.=
=애미 씹. 낭만적인 고백까진 안 바랬는데 시발아. 여기서 꼭 해야 했냐?=
굴러다니는 대가리 넷에 죽어 자빠진 시체와 피 웅덩이. 더해서 기절해 널브러진 열세 명까지.
청은 짜증을 내며 꼬리로 땅을 탁탁 때리다가 피식 웃으며 꼬리를 내밀었고 만엽도 흐흐 웃으며 꼬리를 내밀어 그녀의 꼬리를 잡았다.
두 개의 꼬리가 한데 얽히니 그 모습은 하나의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 * * *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차기작은 벨티칼 재건기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대충 건치 콘)
욕심에 막간 써넣고 짤 뽑다가 너무 늦어버렸읍니당!
으헤헤
[작품 설정]
fell-ratio!
쬽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