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29화 (729/813)

729 소도시 라펩

=…….=

=…….=

빤—히.

=…….=

=…….=

“…….”

포영과 조각을 먹고 1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자친구들의 시선에 환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여덟 쌍의 눈길이 반응하니 뭘 하기 부담스러운 느낌.

=왜 그래? 도령, 몸 어디가 안 좋아졌어?=

=자기. 각종 치료약과 회복제가 구비되어있으니까 혹시라도 이상한 점이 느껴지면 말해줘!=

=주인님. 체력을 보충할 음식도 영양별로 준비해놓았어요. 허기가 느껴지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아니. 너희가 그렇게 쳐다보니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다.”

적당히 좀 보라고 핀잔을 주자 계면쩍은 듯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여자들.

하지만 아영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에게 물었다.

=그치만 오빤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여족장은 몸의 성장을 위해 먹을 걸 엄청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맞아맞아하며 소리 죽여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친구들의 반응에 환인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들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식사하라거나 몸 상태를 캐묻고 보채지 않는 것도 자신에 대한 믿음의 증거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믿는 거라면 좀 더 믿어줘도 되지 않을까.

환인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내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아까 먹은 주먹밥 하나가 아직 소화되지 않았다. 연회 때 먹은 것도. 이런 데 음식을 더 먹으면 과식해서 오히려 속이 안 좋아지겠지.”

=…자기, 혹시 육체 성장에 다른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이야기니?=

“예.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좀 더 집중해서 지켜봐야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눈을 뜬 환인은 이모렐과 이실리테, 환연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너희 셋은 옆에 있어 주고 나머지는 교대할 때까지 눈 좀 붙여라.”

=그…….=

“…….”

=…응.=

하루 정도는 안 자도 된다고 말하려던 안느는 ‘어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는 주지.’하는 환인의 눈빛에 입을 다물고 얌전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잠깐 이야기할 정도의 여유는 있는 모습. 이실리테는 그가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재빨리 물었다.

=주인님. 몸은 안 아프세요?=

“아프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진짜?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데.=

“통증은 의지만 있으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등대의 빛 코트만 벗고 이불 안으로 들어간 안느가 =그건 그렇지.=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백려강도 안느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고위 기사일수록 통각을 제어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저도 들었어요. 스스로 노력으로 감각을 통제하거나 아니면 마도구의 힘을 빌리거나 하기도 한다구요….=

=그렇지. 마수나 이형종, 괴수와 싸울 때면 통증으로 발생한 한순간의 틈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거든.=

=안느 언니는 통각 제어를 습득하셨어요?=

=난 태생적으로 통각이 무딘 편이야. 뭔가 이렇게, 아픔이랑 감각이랑 머리에서 따로따로 나뉘는 느낌? 팔이 잘리는 정도 통증은 의도적으로 무시할 수 있어.=

=와아……. 아영은 어때? 감각 과민증은 통증의 한계를 넘을 텐데.=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암살자는 가장 먼저 통증에 익숙해지는 훈련부터 해. 글고 벨 네 말대로 난 과민증 때문에 통증의 역치가 무진장 높아져서, 어느 정도 고통은 고통으로도 안 느끼는 편.=

머리맡에 장신구와 자홍접의 브래지어를 개어두고 상반신 알몸으로 이불에 들어간 아영은 허벅지 위에 기사검을 올리고 정좌한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난 이실리테 언니가 놀라워. 언니는 통각 제어 훈련 받으신 적 없죠?=

=응.=

=그런데 통각 무시 기술을 익힌 것처럼 보여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오빠처럼 의지로 무시하는 거?=

=아니. 주인님께 기술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많이 맞아서…… 다양한 통증을 익힌 것뿐이야.=

=아하. 이제부터 어떤 통증이 온다는 걸 알고 버티는 거네요.=

다소 흉흉한 이야기에 하얀 머리카락을 땋으며 잘 준비를 하던 유르파가 살짝 몸을 떨었다.

=전사들의 세계는 무섭네. 나도 통각 차단 마도구를 만들어야 하나……?=

=그게 또 오묘하단 말이지. 통각을 차단하면 감각이 같이 무뎌져서 손끝이 둔해지는 느낌이 드니까.=

=……?=

유르파가 이해 못 한 표정을 짓자 안느는 통각과 감각 사이의 연관성을 아는 지식 내에서 길게 풀어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환인이라면 ‘통각도 감각이기에 통각을 차단하면 감각 일부도 상실된다.’라고 짧게 설명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말재주가 부족한 안느는 몇 분에 걸쳐서 길게 설명한다.

옆에서 거들어줄 수 있지만, 환인은 안느의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감상할 생각으로 도와주지 않고 몸 안을 다시금 살피기 시작했다.

기운의 흐름이 뭔가, 조금 바쁜 느낌이다.

평소라면 도도하게 흐르던 영기가 지금은 몸 곳곳에서 이상한 정체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 정체라고 하기도 어렵다. 흐르던 영기가 미세 혈관을 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

덕분에 환인은 포영과의 효과로 정말 육체가 미세하게 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혈관이, 세포가 늘어나고 있지 않다면 영기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리 없으니까.

몸의 통증도 통증이다.

여자들에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일반인이었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드러누워만 있을 정도의 격통이다.

청소년들 열 중 여덟 정도는 잠자리에 들었을 때 팔다리 관절이 욱신거리거나 뻐근한 성장통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환인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런 통증을 수십 배로 뻥튀기한 수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관절을 날붙이로 썰고 비틀어서 잡아 늘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통증 내성이 높아진 건지 신경 둔해진 것인지.’

자신도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고 있는지 조금 의아할 지경이다.

=그래도 통증이 있다는 말씀은 몸이 커지는 중이라는 증거니까요……. 그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안심돼요.=

=응.=

대화 주제가 마무리 지어졌는지 여자친구들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대신 시선이 다시금 날아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잠시. 여자들은 하나둘 잠에 빠지기 시작했고, 풀벌레 소리만 고요한 밤에 울려 퍼질 즈음에는 이실리테가 등잔불도 꺼서 방이 완전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더 내면을 관조했던 환인은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심핵력이 포영과가 요구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거 같군.”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환인 주변을 둥실둥실 떠다니던 환연이 그의 혼잣말을 받았다.

「여족장은 위상력에 관해서 별 언급이 없었으니 심핵력만의 효능인가 봐?」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고 강한 에너지 같은데 어째서 지금까지 언급이 거의 없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심핵력을 다루기 시작하며 얻은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통상 영혼술에 심핵력으로 강화해 강화 영혼술의 힘이 나왔고, 영기의 회전과 순환을 가미해 신식으로 한층 더 성장했다.

지금 자신은 미사일 발사대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살아있는 사람 개인이 혼자서 그 어떤 지원도 없이 전술 핵미사일을 쓸 수 있는 셈이다.

심핵력이 없다면 현재 자신의 공격력은 절반…… 아니, 2/3가 깎여나가지 않을까.

거기에 차원 간 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원 역할도 하고 이제는 육체의 성장 에너지를 지원하기까지.

척 봐도 역할과 성질이 전혀 다른 분야를 커버한다. 이제는 심핵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위험함이 느껴지고 있다.

「왜 위험해? 강해지면 좋은 거 아니야?」

“대가 없는 강함은 없다. 기술을 성장시켜 강해지려면 노력과 시간을 써야 하고 재능이 필요하다. 능력을 성장시키려면 노력과 시간, 재능에 괴물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는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너도 막강한 정령력을 얻기 위해서 릴라이스와 합체해야 했지.”

현대에서도 편리함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거나 막대한 지적 능력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 태반이라 말하자 환연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니 뭔가 좀 위험하게 느껴지긴 하네.」

심핵을 부수고 얻어야 하는 힘이긴 하지만 그런 위험도에 비교해 얻는 힘의 총량이 너무 크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물렁해진 근육과 관절에서의 고통으로 한순간 휘청였다가 금방 자세를 잡았다.

깜짝 놀라 손을 뻗었던 이실리테가 민망해하며 슬며시 손을 거두는 모습에 웃어준 환인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고통과 감각에 적응해나간다.

그사이 눈을 감고 릴라이스와 대화를 나눈 환연이 입을 열었다.

「릴라이스도 아드네빌라처럼 심핵은 대자연의 결정체라고 하네. 그 힘을 의지로 쓸 수 있는 자는 극히 제한적인 존재들, 신이나 신수, 정절급 정령 같은 존재 뿐이라는데?」

“……라펩 입도 전날 만난 루나리를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하지. 꼭두각시 인형 플뢰 여자애.」

“그 여자는 나를 아신급이라고 지칭했었다. 자애신의 시련을 통과하여 아신급에 오른 성제. 신에 버금가는 존재라니, 당시에는 그저 관념적인 표현인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바아~보 아냐? 누가 그런 말을 관념적 용어로 쓴다고 그래?〉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이죽대는 소리에 환인은 릴라이스를 돌아보았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 시선에 움찔했던 릴라이스가 조금 얌전하게 말을 잇는다.

〈아신급이라는 건 말 그대로 아신위에 도달한 생명체를 말해. 하지만 넌 아직 아신급이라곤 못하는 수준이야. 영혼은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하고 수많은 영혼으로 담금질 되어 충분히 격에 다다랐지만, 육체가 너무 빈약하고 허접스러운 거지.〉

“…….”

〈인간들이 널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네 앞에서만 서면 인간들이 뱀 앞의 쥐새끼처럼 꽁꽁 얼어서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말도 못 하는 이유가, 네 말발이 죽여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사람은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해도 자존심 탓에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크지. 그 때문에 나 역시도 설득할 때면 폭력을 동원하고.”

〈그래. 폭력은 태곳적부터 유래된 유구한 설득 수단이니까. 하지만 또라이는 어딜 가나 있고 그런 또라이한테는 폭력도 통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기운을 뿌리기 시작하면 누구나가 순종적인 양이 된 이유는, 네가 영혼의 힘을 내세워 기백으로 억누르기 때문이었어.〉

몸을 풀다 말고 멈춘 환인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한순간 영혼이 아신격에 도달했을 리는 없고, 차츰 격이 오르다 자애신의 시련을 계기로 개화한 건가.”

릴라이스가 환연의 얼굴로 재밌다는 듯이 실실 웃는다.

〈역시 넌 재밌어. 그럼 이것도 알아? 네가 본격적으로 영혼의 힘이 상승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

“릴라이스 네가 우리를 처음 찾아왔을 때겠지. 투라드 마을 옆의 흑마술사 미궁.”

그때 자신은 릴라이스의 접근을 위협적인 무언가로 인지했었고 자신도 모르게 말에 힘을 담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종교와 교단에서 말하는 신언 이었을까.

아드네빌라가 쓰는 신언, 천통언과 느낌이 달라서 단순히 목소리에 에너지를 담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환인의 상념을 킥킥 웃으며 구경하는 릴라이스.

그녀가 새카만 어둠 속을 유영할 때마다 그 궤적에 아름다운 물거품이 사라락 흩어지며 몽환적인 물빛을 뿌린다.

〈넌 정말 재밌어. 응, 진짜로. 환연이랑 합체 계약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야.〉

그를 바라보는 릴라이스의 눈이 호기심과 재미, 열망으로 반짝인다.

환연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 그 시기가 저 인간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이고 있다.

설마 인간이 살아 아신위에 오르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실시간으로 직관할 수 있게 될 줄이야!

필멸자가 아신위에 도달하는 것은 수만 년 환령계 역사 속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적게 일어난 일이다.

그걸 옆에서 직접 구경하는 대가로 짧은 시간 동안 합체 계약을 유지하는 것쯤이야.

환연은 정령과 인간의 혼혈. 온전한 정령처럼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 부담도 적고 말이지.

‘역시 연이랑 계약하길 잘했어~. 오히려 더 잘됐나? 만약 그때 저 인간이랑 계약했다간 덤탱이 써서 내가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얽매였을 테니까!’

과연 그때가 되면 저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의 주관과 목표를 꺾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까 아니면 강대한 존재의 뜻에 의지를 꺾고 무릎을 꿇을까?

키득거리며 발을 동동 굴리는 릴라이스의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릴라이스가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걸 환인이라고 왜 모를까.

그럼에도 놔두고 있는 것은 그녀가 환연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에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다.

환인이 한숨을 내쉰 이유는 저 멍청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는 머리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튀어나와 아신에 대해서 언급하는 행동이 모든 걸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모르다니. 싸게 입을 놀리다 언제고 큰코다칠 타입이다.

아드네빌라한테 혼쭐 난 걸 벌써 잊은 걸까. 아무튼, 놀림당하였다면 갚아주는 게 인지상정.

적당히 몸이 풀렸고 급속 성장 중인 신체의 감각에도 익숙해진 환인은 허공을 헤엄치는 릴라이스를 몇 초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넌 초월 정령이란 이름값도 못 하는군.”

〈……뭐야! 그거 무슨 뜻인데?!〉

“관음룡에 이어 관음정령인가. 내 신세도 참 기구하기 짝이 없어.”

〈야 이……!〉

놀림이 역력한 환인의 말투에 마악 쨍알거리려던 릴라이스는 강제로 환연과 스위치 되어 그녀의 속에서 마구 날뛰었다.

야! 뭐 하는 건데! 당장 바꿔! 저 반푼이 아신한테 지금 당장 쏘아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말도 함부로 못 건단 말이야!

환연은 그런 릴라이스를 여동생처럼 다독이면서 환인에게 물었다.

「아무튼, 네가 판단하기에 몸은 어때?」

“몸이 조금씩 불어나는 게 느껴진다. 느낌이 과히 좋진 않아.”

욕탕에 오래 있었을 때 피부가 불어터지는 느낌, 그게 근육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

만져보면 그렇게 흐물거리진 않지만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무릎과 허릴 숙여 환인과 눈높이를 맞춰보곤 작게 웃음 짓는다.

=주인님 확실히 키가 크셨어요. 1.5cm 정도인가요?=

“내 몸에 직접 일어나는 일이라 잘 모르겠군. 키를 재봐야겠으니 도와다오.”

환인의 이야기에 줄자를 가져와 그의 키를 재는 이실리테. 환연도 곁에서 줄자에 나온 환인의 키를 확인한다.

「포영과를 먹기 전이…… 정말 1.5cm 정도 자랐네.」

“5시간에 1.5cm면 시간당 30mm 정도인가. 이대로라면 하루에 키가 7cm씩 자라겠군. 16살이 되면 180 정도 되겠어.”

물론 매번 7cm씩 자라진 않겠지만, 오차를 넣어도 175에서 ±5 정도는 되겠지.

「너 16살 때 키 몇이었는데?」

“그땐 거의 다 자라서 180 언저리였다.”

「그럼 이번에도 그 정도 자라겠지. 뭐.」

환연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하품을 하는 사이 줄자를 챙긴 이실리테가 물었다.

=주인님, 배는 안 고프세요? 뭔가 드시겠어요?=

“별로. 밤을 새울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하지.”

「이모렐, 너도 자. 주변 감시는 정령한테 시킬테니까.」

=예.=

여자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옷을 갈아입던 환인은 환연이 자기 침대 바구니로 들어가는 걸 보며 때마침 생각난 걸 부탁했다.

“환연, 내일 아침에는 상급 정령 몇을 좀 불러다오. 상급 정령에게 이야기해서 상급 구슬을 만들어보고 싶으니까.”

「음~ 애들 자존심 때문에 안될 거 같은데.」

“스프라울드에서 상급 정령이 내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지 않나. 가능성은 일말도 없는 건가.”

속이 다 비치는 네글리제 잠옷으로 갈아입은 환연이 꾸물거리며 이불 아래로 들어가서는 머리만 쏙 내밀고 말한다.

「릴하고 계약하면서 알게 된 건데, 중급 이하 애들은 태어난 근방에서 자의로 멀리 돌아다닐 수 없어. 루모처럼 누군가하고 계약을 맺어야만 가능한데 그거 때문에 중급 이하 애들은 너한테 붙잡혀도 좋아하지만…….」

상급 정도 되는 애들은 맘대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고 환령계도 맘대로 제약 없이 오갈 수 있으니까 구슬이 될 메리트를 느끼지 못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막무가내로 상급 정령을 구슬로 만들었다간 하급 정령들을 화나게 했던 때와는 비교도 못 할 후폭풍이 몰아치겠지.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에서 실수로 어둠 정령을 후려쳤다가 사이를 풀려고 제법 고생하지 않았던가.

“…….”

이번에야말로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환인은 살짝 실망하며 자신이 누우면 이불을 덮어주려 기다리는 이실리테의 손을 잡았다.

=주, 주인님?=

“같이 자지.”

=……네.=

정령 구슬은 깔끔하게 포기해야겠군.

이실리테와 함께 이불로 들어간 환인은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서 조용히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거처 앞마당이 분주하다 싶더니 하인들이 신선한 식재료를 짊어지고 줄지어 들어와 쌓기 시작했다.

과장 보태 산더미만 하다.

귈탐 여족장이 보낸 재료들로, 고기는 금방이라도 도축한 것처럼 싱싱했고 과일도 막 딴것처럼 싱그러움이 넘쳐흐른다. 거기에 각종 향신료와 조미료에 채소, 야채까지.

“…….”

자는 사이 조금 뻣뻣해진 듯한 팔다리에 아영의 마사지를 받으며 귈탐의 보여주기식 의도가 드러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실리테가 마당으로 나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귈탐의 시종장으로 보이는 사비족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곤 매의 눈으로 최상 품질의 식재료만 골라 보존 주머니에 담는 이실리테.

바깥을 내다보는 환인을 나름 눈어림으로 짐작하던 아영이 묻는다.

=오빠. 키가 3cm 정도 큰 거 같네요?=

“그래. 덕분에 관절이 조금 뻣뻣한 느낌이군. 포영과를 먹고 나서 계속 몸을 풀고 있는 게 좋아 보여.”

=오늘 밤에도 드실 거죠? 오늘은 안 자고 계속 마사지해드릴게요.=

“밤새 그럴 필요는 없다.”

=아뇨!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헤헤 웃는 아영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니 웃음에 수줍은 미소가 번져간다.

그때 릴라이스 성격을 빙의한 환연이 밖으로 나가 시종장을 불러 다그치기 시작했다.

「야. 이렇게 마구잡이로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챙기라는 건데?」

=죄, 죄송합니다. 저분께서 챙기실 만큼 챙기신 뒤에 대용량 보관함에 식재를 따로 담아 놓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해주면 되지. 왜 일을 두 번 해? 바보야?」

흥흥거리는 환연의 지적에 시종장은 그저 곤란하고 난처한 웃음만 짓는다.

아영의 안마로 어느 정도 몸이 풀린 환인은 슬슬 나서야 할 타이밍을 느끼고 둘의 사이에 끼어들며 환연에게 말했다.

“저분도 악의는 없으실 테니까 그쯤 해둬.”

환인이 끼어들자 환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들으란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오늘 하루 도시에 비를 뿌려줄 거고! 이제부터 주변 산맥의 수원지에 물도 채워줄 건데! 첨부터 신경 써서 챙겨주면 좋잖아!」

그녀의 말에 바삐 오가던 하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둥둥 떠다니는 환연을 바라보다 더욱 빨리 짐을 나르기 시작한다.

제법 입이 가벼워 보이는 사비족도 보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아침쯤 되면 소문은 빠르게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겠지.

환인은 일부러 상큼하게 웃으며 그녀를 손바닥으로 받아 어깨에 올렸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지?”

「……흥흥. 너! 인 덕분에 봐준 줄 알아!」

=예에. 감사드립니다, 대정령님. 인 님.=

공손히 환연과 환인에게 허릴 숙인 시종장은 사람들을 능숙하게 부려 마당을 정리해 나간다.

어느새 그의 뒤에 선 안느와 함께 복작복작한 마당을 바라보던 환인은 자신의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제 릴라이스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심핵력의 본질. 그런 심핵력을 에너지원 삼아 성장하는 육체. 그리고 릴라이스가 보여주었던 의미심장한 미소.

‘아신의 그릇……인가.’

아신이란 무엇일까. 아신이 되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못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미 자신의 혼은 아신이라는 것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늦든 빠르든 육체 또한 아신의 그릇에 걸맞게 성장할 거다.

‘그래서 육체가 어려진 건가. 인간의 쓸모없고 격이 떨어지는 부분을 모두 제거해 순수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환인은 식재 무더기에서 사과 맛이 나는 열매 하나를 챙겨 환연과 함께 라펩의 중앙 분수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오오. 비다. 비야!=

=이 얼마만의 비인지……!=

아침임에도 뙤약볕에 달아오른 라펩에 비가 뿌려져 대지를 촉촉히 적셔나갔다.

벨티칼에 속한 여러 부족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생명의 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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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릴: 아직은 아신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 놀려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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