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28화 (728/813)

728 소도시 라펩

환인이 환연에게 붙잡혀있는 사이, 여자들은 몇 개나 되는 이불과 깔개를 보곤 무엇을 어떻게 깔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이불이 뭐 이렇게 많아?=

=두껍고 얇고 거칠고 부드럽고…… 한쪽은 거친데 한쪽은 부드러운 것도 있네요? 크기도 제각각이고…….=

=뭐부터 깔아야 하는 거니…?=

침대 생활만 해왔기에 이불과 요의 차이, 홑이불과 겹이불, 차렵이불의 차이도 모르는 여자들에게 수십 개나 되는 침구는 그녀들을 고민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밤의 침구 시중을 들기 위해 찾아온 노예 하녀들은 그런 장면과 마주하곤 크게 당황했다.

=아앗, 귀하신 분들께서 어찌 손수……!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이, 이건 노예들이 쓰는 침구예요. 귀하신 분들께서 쓰실 것은 이쪽에 있답니다.=

=아…… 작은 방에 있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

하녀들은 환인의 여자들이 가져온 이불을 삽시간에 정리해 작은 방, 노예 대기방으로 가져다 놓고는 매우 고급스러운 궤짝에서 척 봐도 고급스러운 비단 침구를 가져와 일행의 숫자에 맞춰 깔기 시작한다.

딱딱한 침구를 좋아하는지 부드러운 침구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푹신한 침구를 좋아하는지.

여자들의 취향을 물어보곤 거기에 맞춰 여러 장의 요를 겹쳐 깔고 이불도 세 겹이나 올려 정갈한 잠자리를 만드는 하녀들.

세 겹을 덮어 50cm에 가까워진 두께의 이불을 본 안느가 기함했다.

=아니, 이렇게 더운데 이불을 그렇게 두껍게 써?=

=밤에서 새벽이 지나는 시간에 날이 쌀쌀해집니다. 더우시면 이불을 한 겹씩 걷어내며 주무시면 돼요.=

=그런가……?=

=이거 침대랑은 다른 느낌으로 푹신하네. 좋은걸?=

=와~.=

유르파와 백려강은 침대만큼이나 푹신한 이부자리의 느낌에 반색했다.

라펩에 들어온 뒤에 사용했던 잠자리는 솔직히 너무 딱딱해서 힘들었던 것이다.

좌식 형태의 마차 여행을 할 때도 바닥에서 잤지만, 장거리 여행용으로 디자인된 마차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기에 요를 적당히 깔면 푹신하다.

하지만 라펩의 건물은 전부 돌로 지어져 있었던데다 돌의 냉기가 이불을 뚫고 올라오기 십상이었고…….

아무튼, 요약하자면 자신들이 사용해오던 마차보다 못한 잠자리였다는 것.

여자들이 침구의 푹신함을 확인하며 만족하고 있을 때 노예가 아닌 하녀가 공손히 허릴 숙이며 물었다.

=귀하신 분들. 지하 대욕탕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용하시겠습니까?=

=대욕탕?=

안느가 귀를 쫑긋하며 반색한다.

라펩에서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잠자리와 목욕이었다.

청결이야 백려강과 환연이 깨끗하게 씻겨주고 성수포도 있다. 하지만 환인 덕분에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는 쾌감을 알아버린 여자들은 내심 목욕을 못 하는 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대욕탕이라니!

금방이라도 하녀를 따라갈듯한 여자들의 모습에 사비족의 문화와 풍습을 어느 정도 아는 아영은 엇, 하고 안느와 여자들을 붙잡았다.

=저기요, 잠시만요. 언니님들, 사비족 대욕탕은 공용 시설이에요. 부족장님 저택의 대욕탕이니까 아무나 들어오진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어요.=

=어? 그, 그건 좀 그런데.=

=그러하오나 귀하신 분들께서 쓰실 대욕탕은 족장님과 후계자분만 사용하시는 탕이옵니다. 약초탕, 과일탕, 온천탕 등 탕의 종류도 다양하오니 한 번 써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혹시 남자도 들어와?=

=남성용은 따로 있사오며 후계자님도 여성이시니 혼욕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도령도 못 들어가는 건 좀…….=

어른 환인은 알아서 잘 하지만, 어린 환인은 팔이 짧아 옆에서 목욕 시중을 들어주어야한다. 그런걸 넘어 환인은 여기서 대충 성수포로 닦고 정령의 힘으로 씻는데 자신들만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애초에 선택조차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여자들이 어느새 작은 인어 정령 형태로 돌아간 환연과 함께 있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니 하녀는 방긋 웃으며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여족장님께서 허가하셨으니 같이 들어가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환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밑에 달을 그린 무늬의 하녀가 하는 말의 뜻을 눈치채지 못할 환인이 아니다. 아무리 대정령의 친구라지만 족장 전용 대욕탕을 내어준다는 것은 뭘 뜻하는 것일까.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거겠지.’

알아차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긴 했지만, 평민이나 서민 사비족은 확실히 다른 종족의 핫한 소식에 관심이 없다는 걸 라펩에서 느꼈다.

라드세아나 히스론드에서도 이실리테와 안느의 아우라를 모르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길 가다가 이쪽의 구성에 ‘아!’ 하고 알아차리는 평민들은 10명 중 2~4명 정도.

하지만 라펩에서는 누구도 성제 일행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뷜트의 고등 수로역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공간이동술법진을 관리하는 노예 사비족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점을 고려했을 때 여족장이 자신의 대욕탕에 대정령도 아니고 자신을 초대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자신을 매개로 대정령과 친해져 보려는 수단일 수도 있지만…….

‘멍청하지 않았단 말이지.’

연회장에서 자신을 챙겨주던 세심함, 그러면서 좌중을 둘러보며 분위기의 흐름을 짚어내 악단에게 지정곡을 요청하는 거나 조금 소외되어있던 식객을 언급하며 그를 띄워주는 등의 화술은 멍청하다면 나올 수가 없다.

그런 지혜라면 자신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꿰뚫어 보지 않을까.

“여족장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는듯하니 같이 가도록 하지.”

그 말에 이불 위를 뒹굴고 있던 노른과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던 이모렐도 일어나고, 하녀는 일변한 환인의 분위기에 순간 당황했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우와아?=

=굉장해요…!=

탈의실에서 알몸이 되어 대욕탕으로 들어간 여자들은 내부를 보자마자 감탄부터 터트렸다.

300평은 될듯한 거대한 지하 공간에 다섯 개나 되는 온천식 바위탕.

곳곳에 있는 녹색의 활엽 관목이나 관상목, 관상수는 회백색으로 삭막하게 보일 수도 있는 대욕탕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조성하고 있다.

여기에 온천 휴양지 특유의 냄새와 탕에서 모락모락 피어난 수증기가 구름처럼 군데군데 모인 풍경은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조금이지만 풀어줄 만큼 괜찮은 곳이었다.

은은하게 떠도는 온천탕 특유의 톡 쏘는 향기에 감탄하던 여자들은 일단 근처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알몸으로 흩어진다.

=이거 유자 맞니?=

=네에. 탕에 유자 열매를 띄워놨네요…?=

=하아아, 향기 좋다…….=

=유리 언니. 우리도 들어가 봐요.=

=응.=

=와, 진짜 온천탕이네 이거.=

=유황 냄새가 나는 거 보면 확실함다!=

=앗흐…….=

=우아아… 꼭지랑 뷰지가 찌릿찌릿해…….=

유르파와 백려강은 유자가 둥둥 떠 있는 탕에서 유자를 보며 신기해하다가 들어가고, 안느와 아영은 다른 것보다 유황 냄새가 자극적인 온천탕엘 들어가 헤롱거리는 표정을 짓는다.

머리까지 흠뻑 젖은 노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심이 깊은 욕탕으로 눈을 빛내며 달려갔다.

무난하고 평범하지만 커다란 직사각형의 욕탕으로, 한쪽은 물이 깊어 수심이 1.5m나 되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얕아 50cm가량.

키와 덩치가 큰 종족을 위해 만든 기색이 역력한 탕이다.

풍덩!

「꺄아!」

깊은 쪽에 뛰어든 노른이 세상 행복한 강아지처럼 개헤엄을 치며 노는 모습에 환인은 같은 탕의 가장 얕은 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얕다고 해도 지금 환인의 키로는 앉았다간 코 위쪽까지 잠기는 깊이.

따라 들어온 이실리테가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환인을 불렀다.

=주인님. 이쪽에 앉아주세요.=

“음.”

그녀의 허벅지에 앉아 젖가슴에 등을 기대자 적당히 어깨까지 잠기는 깊이, 그리고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적당한 물 온도가 기분 좋게 전신을 휘감는다.

거기에 그녀의 탄력 넘치면서도 말랑말랑한 허벅지가 엉덩이를 받쳐주고 등도 그녀의 부력 주머니가 부드럽게 받아주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여자들도 각자 온천욕을 느긋하게 즐기기 시작한다.

환연은 해달처럼 물 위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고 이모렐은 환인과 적정 호위 거리에 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목욕을 즐긴다.

=향기가 정말 좋네. 이 유자, 까서 먹어도 될까?=

=냄새랑 성분만 온천물에 스며들게 하기 위한 거 같은데…… 먹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으어어. 녹아내릴 거 같아….=

=이거 질 좋은 온천이네요오….=

유자탕에 들어간 유르파와 백려강은 샛노란 유자에 호기심을 보였고 안느와 아영은 욕탕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대고 녹아내릴듯한 표정으로 축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중.

그렇게 환인과 그의 여자들이 유유자적 온천을 즐기던 중, 환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환인. 여족장이 오고 있어.」

이실리테의 몸을 의자 삼아 탕 속에서 반쯤 떠있던 환인은 그 경고에 참방거리며 헤엄치는 노른을 불러들였다.

“노른, 수영은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라.”

「더 놀면 안 돼?」

“우리만 있으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그러면 민폐다. 목욕탕은 수영하는 곳이 아니야.”

「알았어.」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성스러운 체격의 라펩 부족장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무직자인 그녀는 잠깐 환인의 일행이 내뿜는 아우라에 물든 욕탕을 둘러보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촤아악— 물을 머리부터 몇 차례 끼얹은 뒤 성큼성큼, 환인의 맞은편에 몸을 담갔다.

마주보고 앉았지만 욕탕이 워낙 컸기에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앉은 모양새.

=후우우…….=

아저씨처럼 두 팔을 가장자리에 걸치고 고개를 들어 긴 한숨을 내쉰 여족장은 촤악, 촤아악- 두어차례 데포르메한듯 약간 동글동글한 왕도마뱀 두상에 물을 끼얹었다.

그럴 때마다 흑갈색 비늘이 분홍색으로 살짝 물들었다가 흑갈색으로 돌아간다.

몇 차례 뜨거운 물을 끼얹은 여족장의 표정이 나른하게 변했다. 머리와 몸을 뒤덮은 흑갈색 비늘은 열기를 머금은 것처럼 차츰차츰 분홍색이 올라오고, 그에 따라 몸 전면부의 비늘도 연해지며 커다란 비늘에 감춰져 있던 유두와 음부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여족장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의 목욕에 만족스러워하기만 하는 얼굴.

반쯤 젖혀지다 멈춘 유두 비늘을 활짝 벌려 꼿꼿해진 분홍색 젖꼭지를 드러낸 여족장은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욕탕은 마음에 드시나? 성제.=

“온천 성분이 섞여 있는 게 마음에 드는군요.”

=다행이군. 기껏 당신을 위해 청소하고 물을 받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적잖이 상심했을 테니까.=

“…우리를 위해서였다는 겁니까?”

=그럼. 40년 전에 내가 직접 지시해서 만든 장소라 애착이 큰데 요즘은 가뭄 탓에 통 쓰질 못했거든. 대충 2년만인가…….=

그러면서 두 손으로 다시 머리에 온천물을 끼얹은 여족장은 물에 둥둥 떠다니는 환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드립니다, 대정령님. 덕분에 오랜만에 몸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그쪽을 한 번 흘긋한 환연은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고 수심이 깊은 곳으로 천천히 떠내려간다.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노른도 환연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여족장, 귈탐은 그런 둘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환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 요즘 말 많은 성제께서 무슨 일로 라펩을 방문하신 거지? 족장인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라펩은 정치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 텐데.=

“짐작하신 대로일 겁니다.”

=……포영과 때문이라고? 젊어지다 못해 어려진 것은 수명이 늘어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 혜택을 어찌하여 제 손으로 깎아 먹으려는 거지?=

“어려진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입니다. 그렇다고 반로환동하기 전의 나이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아니고, 현재 나이에서 대략 10살 정도만 더 들고 싶군요.”

=모르겠군. 내 머리로는 성제가 뭘 꾸미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비록 소도시의 부족장이라지만 나름대로 귀는 있어 성제 당신이 북방에서 한 일 정도는 들었지. 듣자 하니 땅 하나를 죽음의 대지로 만들어버렸다던데…….=

귈탐의 호박색 도마뱀 눈동자가 환인을 살핀다.

=후유증 같은 게 남은 거로는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그런 걸 쓸 수 있다면 혼자서도 메리아놀을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내색이었지만, 환인은 작게 웃음만 지어주었을 뿐 답은 들려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머리의 비늘을 쓱쓱 쓸어내린 귈탐은 어깨를 으쓱하곤 탕에 좀 더 몸을 깊이 담그며 입을 열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어쨌든, 대정령님까지 거둔 성제와 척을 지거나 대립하고 싶진 않아. 대정령님께 받은 은혜도 있고 하니 포영과는 충분히 내어주지. 더불어 수백 년간 습득해온 경험에 따른 정확한 용법도 알려주겠어.=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뭘. 대신이라고 할까……. 내키지 않는다면 들어주지 않아도 좋아. 거절한다고 앙심을 품거나 하지도 않겠다고 그분께 맹세하지. 그러니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면 좋겠는데.=

“가뭄 현상이 심각한가 보군요.”

=……맞아. 벨티칼 전역에서 가뭄 현상이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지고 있어. 헤뷜트의 대족장께서 몇 년째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으시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더군.=

그리 말한 귈탐은 라펩을 둘러싼 산맥 깊은 곳 몇 군데를 언급하며 그곳의 수원지에도 물을 가득 채워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환연이 라펩 지하 호수와 인근 수원지를 가득 채워주었지만, 그걸로는 1년도 버티기 어렵다고.

=술사들을 동원하고 절수를 시행하면 2년, 3년까진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가뭄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 근처 산맥의 수원지까지 보충해주면 8년…… 길게는 10년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만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벨티칼은 대대적으로 규모를 축소해야할 것이고 인구수도 지금의 반토막이 날 거라고 귈탐은 조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 상황에 소도시에 불과한 라펩이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8년이 마지노선인 거야.=

“…….”

=라펩의 주인이자 수만의 시민을 거느린 족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고 싶어. 부탁할게.=

“환연.”

「다 채우려면 이틀은 걸려.」

“들으셨습니까.”

=물론이지! 고마워, 성제! 대정령님도 감사드립니다!=

얼굴이 환해진 귈탐은 하아아, 시름을 내려놓았다는 듯이 주르륵, 흘러내려 욕탕에 턱 밑까지 잠겨 들었다. 진심으로 큰 걱정을 덜어낸 모습이다.

환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뒤통수를 이실리테의 젖가슴에 기댔다. 그러자 그녀의 가늘고 섬세한 손이 뺨이며 어깨를 어루만지듯 마사지해준다.

만약 귈탐이 귀족적 의무를 저버리고 향락을 탐하는 자였다면 환인도 돕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도시와 시민들의 삶을 걱정하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절수와 단수를 언급하고 대책을 이야기하는 것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듯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었었다.

연회 때도 물을 많이 쓰는 것은 최대한 줄인 상차림이었고 음료나 술도 물을 아끼려는 듯 몇 종류 되지 않았다. 대욕탕을 2년 동안 쓰지 않았다는 것도 진심이었고.

고작 욕탕을 2년 정도 안 쓴 게 뭐가 대수냐고 하겠지만, 축축하고 습하고 더운걸 좋아하는 데다 물과 가까운 종족이 사비족이다.

귀족이 서민의 삶을 걱정해 취미를 끊는다는 건 니오네브레스 상식으로 대단한 일인 것이다.

환인은 뒤통수로 이실리테의 젖가슴 감촉을 즐기고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히며 나른하게 있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귈탐에게 눈길을 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음? 어, 조금 의외라서. 솔직히 욕먹고 비난받으면서 무릎을 꿇을 각오까지 했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온건해서 말이야. 그…… 사비족이 타종족을 배척하는 건 유명하잖아?=

“인종차별은 당신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비족 전체, 나아가 니오네브레스 인간들의 문제니까요.”

사비족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여족장에게 푸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저열한 쾌감밖에 탐닉하지 못한다. 남는 것은 찝찝함과 원한 관계 뿐.

그럴 시간에 여자친구들 몸을 탐하는 게 수십 배는 건설적이지.

=성제는 성제라는 건가…….=

귈탐은 적잖게 감탄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다 그 뒤로 입을 다문채 조용히 목욕을 즐겼다.

이런 제대로 된 목욕은 환인도 오랜만이었기에 여자친구들과 사심 없이 건전한 목욕을 만끽했다.

=여기, 최상급 포영과 48개. 특급 보존 상자 안에 담아놓은 거라 언제 꺼내도 갓 딴것처럼 싱싱할 테니까 상자까지 챙겨둬.=

목욕을 끝내고 나온 귈탐은 목욕 후의 온기를 보존하려 차도르 같은 것으로 온몸을 꽁꽁 감싼 채 포영과를 가지고 직접 환인의 침소를 찾았다.

환인과 귈탐이 마주보고 앉으니 주변으로 여자들이 모여든다.

=복용법은 간단해. 주의 사항만 기억하면 복잡하게 신경쓸 건 없어.=

그리 말한 귈탐은 용과dragon fruit와 비슷하지만, 보라색이라는 점이 틀린 성인 주먹만한 열매를 하나 들어보였다.

=예를 들어 지금 성제의 몸무게가 20kg이라면 이 포영과를 20g 먹는 것으로 약 1년 정도의 나이를 먹을 수 있어.=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거 하나가 400g 정도인데 한 번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200g 정도의 효과 밖에 못 봐. 그렇다고 한 번에 200g을 다 먹는 것도 권하지 않아.=

“몸이 한 번에 성장하는데서 오는 반발력 때문이군요.”

=맞아. 한 번에 몇 살씩, 10여cm를 하루 만에 자라는 고통은 진중한 자도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며 땅을 구를 정도지.=

“…….”

성장판이 닫혔을 때는 200g을 한 번에 다 먹더라도 몸에 부담은 덜하다. 성장은 없고 노화만 있으니까.

그러나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아이가 먹는다면 1년에 걸쳐 몸이 성장하는 것을 한순간에 경험하니 몸에 크게 무리가 간다는 이야기.

포영과를 내려놓은 귈탐이 검지를 세웠다.

=그리고 하나 더, 먹을 것. 포영과의 효과가 이어지고 있을 때 계속 뭔가를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부실하게 몸이 커져서 제대로 단련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게 돼. 제법 일정이 촉박한 성제에게 무의미한 시간 낭비는 곤란하지?=

“먹으면 하루동안 몸이 성장하는 겁니까. 몸무게의 1/100을 1살로 치환한다면…… 200g을 한 번에 먹을 경우 5살은 자라겠군요.”

=이봐, 내가 한 말 못들었나?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더욱이 키가 40cm나 자랄 정도의 음식을 하루에 다 먹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비쩍 마른 미이라에다 뼈도 안쪽에 구멍이 숭숭 난 모습이 될테지.

=실제로도 그렇게 단번에 나이를 먹이는 건 특별 식육용 고기를 키울 때나 하는 짓이야. 권장하는 일일 최대 복용량은 2살이라는 걸 알아둬.=

환인도 딱히 200g을 한 번에 먹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계산만 해보았을 뿐.

“먹은 뒤에 신체가 안정되길 기다려야 한다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까.

=근력을 생각한다면 최적의 복용 방법은 1살을 먹고 한 달의 체력 단련 후 다시 1살을 먹고 체력 단련을 반복하는 거지. 인내심과 참을성만 있다면 그런 거 없이 연달아 복용한 뒤 몰아서 죽을 정도로 신체 단련을 해도 괜찮아. 실제 라펩의 노예 병사는 그런 식으로 육성하니까.=

“그렇군요. 복용 중, 그리고 복용 후 직업자의 능력에 대한 변화도 기록되어있습니까?”

=노예 직업자들 중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하는 자들만 뽑아서 먹인 뒤 그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그자가 죽을 때까지 능력적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기록에 나와있어. 등급의 성장도 꾸준했고 신체적인 문제도 벌어진 적은 없었다더군.=

하지만 복용 효과 적용 중에는 능력을 쓰기 어렵겠지…….

환인이 생각에 잠기자 시간을 확인한 귈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포영과 복용 주의 사항은 이게 전부야.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하도록 하고, 먹을 계획을 세우면 하녀를 통해 이야기하도록 해. 필요한 영양분 공급을 위한 식사는 이쪽이 준비해줄 테니까.=

“식재만 준비해주면 음식은 이쪽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하긴 너희가 먹는 음식은 너희가 더 잘 알겠지. 알았어, 엄선한 고기와 야채, 과일을 잔뜩 보내주지.=

귈탐을 배웅하고 돌아온 환인은 자신의 앞에 놓인 포영과를 응시했다.

현재 자신의 신체 연령은 대략 5살 남짓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장판이 닫히는 것은 대체로 18살 남짓이니까, 하루 1살을 기준으로 한다면 18살까지 13일이 걸린다.

하지만 그렇게 빡빡하게 성장할 필요는 없으니 대충 16살까지만 해도 성인과 비슷한 키가 될 것이고 그리모암의 유물을 쓸 수 있게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 나이별 평균 체중을 합산해보면 필요한 포영과의 무게는 520g 정도.

환인은 자신의 몸무게를 대강 확인 한 뒤 20g정도의 과육을 잘라내었다.

그걸 본 여자들이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도령? 지금 바로 먹게?=

“미룰 것 없이 바로 시작해야지.”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꽤 무방비해지는 거 같은데 안전한 장소에서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영도라거나…….=

“먹는다고 활동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영도로 돌아가기에는 거리도 멀다.”

무엇보다 자신이 영도에 되돌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4개국에서 인간들이 벌떼같이 몰려들 것이다.

일부 메리아놀의 과격분자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성제 일당을 일망타진하겠다며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도 적지만 있다.

물론 여기서 먹는것도 위험 요소는 있다. 메리아놀도 이제는 자신이 라펩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고, 여기서 뭘 하려는 건지도 짐작하고 있겠지.

“그러나 여족장은 어리석지 않다. 우리를 배신하면 라펩이 어떤 꼴이 될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테니 메리아놀과 작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환연을 대정령님이라 꼬박꼬박 부르는 것만 봐도 신뢰성은 올라간다. 배신했다간 흑령주가 떨어질 거라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을테니 오히려 도시에 플뢰족이 들어오는 걸 막지 않을까.

“일단 1살을 먹어보고 여파를 확인한 뒤 그 후 방침을 정하도록 하지.”

「환인. 저수지 물 채우는건? 네가 쉬고 있을 때 내가 할까?」

“아니. 너에게는 주변 감시를 부탁해야 하니까. 내일 하루 경과를 지켜본 다음 다시 이야기하자.”

「알았어.」

여자들도 각오를 다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쥔다.

=우리가 지켜줄테니 도령은 우리만 믿어.=

=누구도 주인님께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하도록 하겠어요.=

“그래.”

그녀들의 의욕에 작게 웃어준 환인은 망설임 없이 보라색을 띠는 20g의 과육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포영과는 포도즙에 절인 배 같은 맛과 식감이었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당...

한글로 맞춤법 교정하고 있는데 이게 자꾸만 튕겨서 시간을 잡아먹네요 ㅠㅠ

2만원이나 주고 산 건데... 이건 교정 문제라기보단 한글 문제인가?

다른 교정 프로그램을 알아봐야겠습니당!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