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27화 (727/813)

727 소도시 라펩

잠깐 고민했지만, 환인은 인식 저해 후드 로브를 벗고 가는 걸 선택했다.

릴라이스가 한 짓으로 라펩에 밀어닥쳤던 곤궁이 해소되었다면 그건 도시 전체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컸고, 그렇다면 이후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을 때 라펩 내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확 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은인이라는 타이틀이 있다면 아무리 민둥 피부에게 적대적인 사비족이라 해도 헐뜯거나 비하하지 않고 협조적으로 나와줄 테니까.

단순히 라펩 내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라펩의 소식을 들은 다른 도시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이쪽의 인식을 바꾼다고 해서 얻을 이득은 없지만, 나중 일은 모르니.’

흠칫흠칫.

얼굴을 드러내고 윤오를 따라 이동하고 있으니 사비족의 반응이 참 다채롭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도시의 모든 사비족이 수로로 나온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기뻐하는데, 그러는 와중 자신들을 발견하고는 해괴한 것,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앞서가는 윤오가 기뻐하는 걸 보곤 ‘뭐지?’ 하고 얼굴을 펴서 의문을 띄운다.

=어이 윤오! 거기 민둥…… 크흠, 그자들은 왜 데리고 가는 거야?!=

=라펩의 친구가 되는 분들입니다!=

=어엉?=

=아까 대정령님의 친구분들이라고요!=

=……진짜?!=

윤오의 외침에 언제 찌푸렸냐는 것처럼 얼굴을 활짝 피고 크하하 웃으며 달려와 여자들의 어깨를 팡팡 때리는 사비족들.

=너희! 무린족이면서 대단한데?! 다시봤어!=

처음 말걸었던 그자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비족들도 우르르 몰려와 웃음을 터트리며 환인 일행을 향해 최대한의 호감도를 드러낸다.

명칭도 민둥 피부라는 멸칭이 아니라 무린족無鱗族, 비늘 없는 종족이라는 일반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반응은 도시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내내 이어졌다.

=지금 저 녀석들 저기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윤오가 왜 민둥 피부를 데려가는 거지?=

=…아까 대정령님이 저 민둥 피부…… 아니, 무린족의 친구라는데?=

=뭐? 대정령님이 저 무린족들이랑 같이 왔다고?=

=대정령님이 저 무린족이 머무르는 집에서 나온걸 본 사람이 있대!=

=헐?!=

=가보자!=

……같은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던 거다.

덕분에 도시 중심부의 수상 공원 같은 대분수를 지나 상위 계층 거리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인파가 남미의 축제 퍼레이드마냥 일행의 뒤를 따르며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흥겨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얼떨떨해하면서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정신이 나간 건가 싶을 만큼의 태도 변화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던 거다.

=……??=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한테 그런 짓을 하던 사비족 맞아?=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러던가 말던가 환인의 신변 안전만 중요한 이실리테는 환인의 눈빛이 깊어진 걸 눈치채고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뭔가 알아내신 게 있으신가요?=

“그래.”

=어? 저 사람들이 저러는 이유를 알겠다고? 뭘 봤길래?=

자신들하고 같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뭘 본 거야? 안느와 여자들이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릴 때 환인의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수로의 수위가 처음 라펩에 들어왔을 때보다 3배 가까이 높아졌다.”

=……어, 진짜다. 거의 수로에 가득 흐르고 있네.=

건기와 우기 때의 수량에 차이가 있기야 하지만 그건 호수나 저수지의 수량에나 관계가 있지, 도시 안에서 인위적으로 흐르는 수로의 수위가 들쭉날쭉한 경우는 드물다.

수위가 높아졌다는 것은 어딘가 수원지가 가득 찼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사비족이 날 찾아와 아드네빌라에 관해서 물으려 했던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아! 아드네빌라 님이 물을 다루시니까……?=

“그래. 하나의 나라를 수몰시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물을 다루는 신수가 아드네빌라니까.”

슥— 온갖 걱정이 날아간 듯한 얼굴을 하는 거리의 사비족들 표정을 본 환인은 흠, 짧게 숨을 내뱉었다.

“사비족에게 물, 수위는 목숨과 직결된 문제다. 물이 중요한 건 생명체라면 다 똑같지만, 습식 생활을 하는 사비족에게 가뭄은 그야말로 종족적인 문제로 엮이겠지. 헤뷜트에서 뱃사공이 했던 말 기억하나.”

=그러니까, 우기가 다가오고 있어 다들 먹을 걸 장만하기 위해 분주하다는 거요?=

뱃사공이 했던 말을 기억해낸 아영의 대답에 환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기가 시작되면 식량 재배나 목축이 조금 어려워질 것이다.

그랬는데 가뭄 때문에 물이 부족해 흉작이 들어 먹을 것이 좀 부족한 상황이라면?

니오네브레스 문명 수준을 생각해봤을 때 대규모 기아가 벌어져 아사자가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다.

“나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헤뷜트가 있는 인근은 열대몬순기후라고 생각한다. 월평균 강수량이 60mm이상이며 연평균은 수 미터에 이르는 사시사철 무더운 지역을 말하지. 하지만…….”

자신들이 헤뷜트에 도착한 이후 라펩에 머무른 오늘까지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지.

비를 확인하는 것처럼 손을 내민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시기적으로 이 무렵에는 우기가 다가와 막대한 양의 비가 내리는 게 정상일 텐데 오늘까지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도시 수로의 수위가 대폭 낮아질 정도로 가뭄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헤뷜트 수로는 수위가 높았는데요……?=

=명색이 주도니까 가뭄 대책 정도야 있겠지? 하지만 소도시가 이정도 수준이면……. 다른 곳은 더 심각하겠, 아!! 그래서 아드네빌라 님을 찾으려 하신 거구나!=

거의 나라 전체에 비를 뿌리는게 가능하한 백청룡, 용의 신수니까!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손뼉을 작게 치는 아영.

“…….”

이것저것 셈해보던 환인은 이 상황을 두고 성제라는 신분을 내세워 가뭄의 해갈에 뛰어든다면 이득보단 귀찮음이 더 크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환연의 힘을 이용해 벨티칼의 각 도시와 수원지를 돌아다니며 수원지를 보충해준다면 영도와 성제의 명성은 드높아질 테지.

벨티칼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인식의 개선 및 이미지의 확립을 이룰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다.

흙탕물과 구정물에 아무리 깨끗한 물을 퍼부어도 자정작용은 어렵다. 막대한 물이 쏟아지면 더러움이 침전되고 옅어져 깨끗해 보이기야 하겠지.

문제는 더러움이 국가적인 수준이라는 거다.

종족 전체가 영혼사와 영도에 안 좋은 시선을 갖고 있는데 그러한 인식이 깨끗해지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들 것인가.

이미지를 바꾼 뒤에도 문제다. 타 종족에 대한 사비족의 인식 개선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타 종족이 사비족을 대하는 태도까지 완전히 변하지 않는 한 종족 차별의 갈등은 계속해서 이어질 테고 그러한 마찰이 지속되면 바뀐 인식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금방일 터.

‘무엇보다 우기가 조금 늦는 것일 수도 있지. 그리되면 진행하던 계획은 전부 헛수고가 될 뿐.’

환인은 벨티칼의 가뭄 현상 해결에 깊게 발을 들이는 선택지는 지우고, 환연이 도시에 도움을 준 대가로 나이를 품은 열매 몇 개만 확보해야겠다 생각하며 파충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윤오의 뒤를 따라갔다.

라펩의 주인이 기거하는 저택으로 향하는 도중, 환인은 윤오에게 한 가지를 은근슬쩍 떠보았다.

도시의 일부 사비족에게서 무언가 고차원적인 영적 순도가 느껴졌는데 혹시 이것이 정령과 관련이 있는가, 하고.

=정령은 저희의 삶을 가호하고 앞날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주는 등불 같은 존재들이죠!=

돌아온 대답은 확신을 위한 마지막 한 조각이 되어주기 충분했다.

플뢰족의 정령, 그리고 사비족의 정령.

같은 정령이라 부르지만 양측의 본질은 전혀 다르다.

플뢰족의 정령이 각 속성을 담당하는 자연체의 화신이라면 사비족의 정령은 선조령, 수호령에 가까운 정령.

죽어서 정령이 되는 것은 사비족에게 있어 굉장한 영광이다.

혼의 흔적과 자취를 보고 장례를 주관하는 주술사제는 사비족에게 있어 정령을 다룬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로 주술사제는 족장을 넘어서는 명망과 발언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영혼사가 벨티칼에서 홀대받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가 큰데 아무튼.

정령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성과 이지를 갖추고 강대한 자연력을 쌓는다면 스스로 실체화할 수 있다.

이 정도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종족적인 관점에서 대단한 일인데 릴라이스의 탈을 쓴 환연은 도시의 가뭄을 일시에 해소해버릴 정도로 강한 물의 힘을 지녔다.

윤오가 릴라이스(환연)을 대정령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오와 나눈 짤막한 대화에서 그러한 사정을 대부분 짚어낸 환인은…….

“놀러 나간다고 하더니, 도시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라펩 부족장의 저택에 도착해 족장으로 보이는 사비족의 앞에서 키 20cm 정도의환연을 만나자마자 핀잔을 주는 척 연기했다.

눈치 빠른 환연은 그런 환인의 장단에 맞춰 준다.

「……응? 왜? 놀다가 곤란한 사람이 보이면 도와줘도 된다고 한 건 너였잖아.」

“그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었지. 떠받들어지기 위해 하는 선행은 위선이야. 위선도 선이라지만…….”

「몰래 했거든! 그런데 인간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떠받들어준 거야! 내 잘못은 없어~.」

흥흥거리며 릴라이스를 흉내 낸 환연은 라펩의 여족장matriarch이 마련해준 최고급 비단 쿠션 위에서 훌쩍 날아올라 환인에게 엉겨 붙으며 보란 듯이 친근감을 뽐낸다.

「암튼 일루 와. 이거 먹어. 아까 먹어봤는데 맛있더라!.」

그러는 환연의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치골에서부터 골반 위로는 평소의 환연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밑으로 하반신은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형태에 자그마한 물방울들이 환인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물의 정령이라는 점을 어필하고 있는 건가.’

이런 장면에 대정령을 맞이하여 연회를 준비하면서 온갖 신선한 과일과 음료 등을 바쳐 대정령의 환심을 사려던 여족장 및 가신들의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

서아시아의 아랍권 문화에 가까운 전통 가옥Bait Morjan, 점토와 산호 석회암 등으로 지은 저택의 상석에 앉아있던 여족장은 흑갈색의 왕도마뱀 얼굴에 큰 기쁨을 드러내며 맨발로 달려와 환인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런가, 그런가! 소년이 대정령님께서 믿고 따르는 친우로군! 어찌하여 대정령님과 친우가 되었는지 궁금함이 치밀어 몹시도 참기 어려우나 손님을 초대하여놓고 궁금증을 해소하려 할 수는 없는 일! 자자, 이쪽으로 오시게! 그대들도!=

“하, 하지만 저희는 다른 종족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니오네브레스에서 신의 가호 아래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가 친우이거늘! 자아자아, 사양 말고 이리로!=

아랍 쪽 남자들이 입는다는 칸두라 비슷한 백색 옷을 입은 여족장은 크게 기뻐하는 기색으로 환인을 상석으로 안내하고 이어 하인들을 시켜 더욱 많은 음식과 과일을 가져오게 한다.

중정中庭처럼 위쪽이 훤히 뚫려있는 장소에 삽시간에 준비되는 산더미 같은 음식들.

잘 구운 빵에서부터 향신료를 듬뿍 뿌린 구운 고기와 저온 숙성시킨 고기, 과일 찜에 온갖 생선 요리 등, 족히 수십인 분의 음식이 줄지어 들어와 거대한 테이블에 마련된다.

연회의 시작이란 소식에 부족장의 저택에서 머물던 식객, 가신, 손님들도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고, 무희처럼 차려입은 매끈한 비늘의 여자 사비족이 음식을 잘라 가신과 식객, 손님들에게 날라주기 시작한다.

무희와 악단도 어느새 자리 잡아 춤추고 음악을 연주하며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 흥겨운 연회가 시작되었다.

=소년은 아직 어리시니 술은 안 되겠고, 이걸 드셔보시게. 라펩에서만 나는 과일로 살짝 숙성시켜 만든 과실 음료라네.=

가장 상석인 여족장의 옆자리, 화려하고 풍성한 방석에 앉은 환인은 여족장이 연신 권해주는 음료며 고기 등을 맛보고 이국적인 음악과 춤사위를 구경했다.

“아, 이거 맛있네요. 너도 이거 먹어봐.”

물론 환연과 친분을 자랑하듯 자신이 먹어보고 맛있는 것을 손수 잘라 먹여주는 환인, 그리고 환인의 다리 사이에 앉아 스스럼없이 음식을 받아먹는 환연.

여족장과 가신들의 눈빛이 더더욱 빛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여자친구들도 나름 친구의 호위 대접을 받으며 연회의 한 자리에서 음식과 음료를 맛보고 있었다.

특히 환인의 옆에서 음식을 조금씩 맛만 보던 이실리테는 드라이 에이징한 고기 한 점을 먹어보곤 상상을 초월하는 부드러움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손가락 두께의 고기임에도 흡사 젤리를 씹는 것처럼 부스러져 녹아내리는 살점들. 그러면서도 고기의 감칠맛은 그대로라 입안에 묵직한 풍미를 가득 채운다.

이실리테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음식을 들고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 물었다.

=이건 무슨 고기로 만든 건가요?=

=포영과를 먹여 키운 아르함 새끼 고기에 키위와 파인애플을 갈아서 재워 만든 요리입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이런 반응을 여러번 본 하녀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포영과包齡果, 환인이 노리는 나이를 품은 열매다. 그 사실에 이실리테는 환인을 힐끔 보았고, 환인은 문제없다는 듯이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 저였다.

이후 연회는 흥겨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릴라이스인 척하는 환연이 때때로 연회장 안을 날아다니며 물을 뿌리기도 했고 연회장 한켠의 아름다운 분수대에서 물이 콸콸 흘러넘치도록 하는 등의 장난을 쳤지만, 옷이 젖고 발이 물에 잠겼음에도 연회 참석객들은 하나같이 즐거워했지 누구도 싫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정령님의 청령수를 맞고 발을 담그다니, 몇 년은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살겠구만!=

=하하하. 저도 오랫동안 자랑할 거리가 생겨 매우 기쁩니다.=

하녀들도 알게 모르게 분수에서 흘러넘친 물을 밟으며 기쁘게 음식을 나른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이어지던 연회는 환연이 지루하다는 듯이 툭 내뱉은 말 한마디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피곤해.」

“그러지 마. 다들 즐거워하고 있으시잖아.”

「그래도 이제 배부르고 재미없어.」

아마도 이건 환연의 의사겠지. 이런 흥청망청 떠들썩한 연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몇 시간이나 흘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에는 환인도 동감이다.

“그럼 들어가서 쉴래?”

「응. 인도 같이 가자.」

환연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여족장이 어흠, 하고 크게 헛기침을 터트린다.

=어흐흠! 다들 좋은 시간 되셨나? 내일도 다들 할 일 있을 터이니 오늘 자리는 여기서 파하는 게 좋을 거 같군!=

=명안이십니다!=

=예에!=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가신과 식솔들.

환연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분위기는 일견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환인은 당연하고 여자들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얼굴로 자신들에게 말을 거는 여족장을 돌아보았다.

=인 소년, 윤오에게 듣자 하니 그대들과 맞지도 않는 습식 주택을 빌려 창고에서 머물고 있다 들었소. 괜찮다면 본인이 기거할 곳을 마련하여주고자 하니, 오늘은 본인의 집에서 쉬는 게 어떠한가?=

“폐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듭니다만…….”

=폐라니! 그렇게 따진다면 라펩이 대정령님께 받은 은혜는 본인의 재산 반절을 뚝 떼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일이었네! 부탁이니 사양하지 말고 머물러 주시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족장님의 제안에 따르겠습니다.”

=그래그래! 잘 생각하였네! 본인의 집에는 자네들처럼 건식 생활을 하는 자들을 위한 거처도 잘 준비해놓았거든! 마음에 들걸세!=

여족장에게 직접 안내받은 처소는 그녀가 호언장담할 정도였다.

아라비아 생활 문화가 많이 반영된 듯 큰 방 하나에 작은 방 두어 개가 붙은 좌식 구조의 내부에 벽과 바닥을 장식하는 화려한 양탄자들.

창이 달리지 않은 창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데다 밖에서 달빛에 밤새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지라 운치와 풍류 또한 뛰어나다.

=대정령님, 그리고 인 군, 그러면 편히 쉬시게! 필요한 게 있다면 이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르도록 하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얼! 아참, 자네들 짐은 아랫것들을 시켜 가져다 놓으라고 할 터이니 신경 쓰지 말게! 하하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여족장이 사라지자마자 어리고 순진한 어린아이를 연기하던 환인은 표정을 평소대로 바꾸었다.

환연도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하반신 물고기 지느러미를 다리로 바꾼다.

=작은 방은 창고처럼 쓰는 방인가 봐. 침실이 아니네.=

=도령네 현대에서 거실이랑 방을 합친 용도인가? 아무튼 여기다 이부자리부터 깔자.=

=오늘 밤은 오빠랑 야한 거 못하겠다.=

=넌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있냐. 창문도 안 달렸는데 했다간 신음이 온 저택에 다 퍼질걸?=

=그것도 하나의 재미? 가 아닐까요?=

여자들은 잠깐 객실 내부 구조를 확인하곤 작은 방에서 이부자리를 가져와 큰 방에 깔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영혼의 눈으로 엄한 수작질은 없는지 확인한 뒤 근처에서 여유롭게 둥둥 떠다니는 환연에게 물었다.

“환연. 낮에 무슨 일이 있었지. 릴라이스가 사고 친 것 같지는 않은데.”

「오면서 대충 짐작 안 했어?」

“직접 듣는 것보다 확실한 일은 없지.”

슈르르르릉—

물방울을 잔뜩 만들어내며 성인 여성으로 크기를 키운 환연은 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서 환인에게 날아가 그를 껴안는다.

이어 해달처럼 그를 배 위에 올린 채 공중을 둥둥 떠다니며 설명했다.

「릴라이스는 작은 인어 모습으로 도시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했어. 사비족은 처음부터 우리한테 무척 호의적이었는데 아마 다리를 물고기로 바꿔서 더 그랬던 거 같아.」

그러한 반응은 도시의 커다란 시장에서 정점에 달했다.

릴라이스가 지나가면 마냥 좋다며 헤벌쭉 웃거나 상인들이 팔던 물건을 가져와 그녀에게 선물로 안겨주었던 것이다.

승인 욕구가 강한데다 관심이 고팠고 세상 구경에 진심이었던 릴라이스는 사비족의 그러한 호감과 공물을 바치는 모습에 우쭐해졌다.

급기야 도시 중앙의 수원지, 밖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줄기의 강이 도시 중앙에 모였다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곳에 자리 잡고서는 본격적으로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공물을 바치러 온 사비족에게는 세례라는 명목으로 물줄기를 뿌렸고 (환연의 조언이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를 올리는 사비족들에게는 물로 만든 꼬리지느러미를 허공에 생성해 그들의 머리며 몸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럼에도 대정령의 축복을 받았다고 좋아하던 사비족들.

환연의 이야기를 듣던 유르파가 손가락을 딱, 튕긴다.

=아하. 그래서 도시 외곽에 사람들이 많이 없었구나?=

「응?」

=나랑 이슬이 아가씨는 변장하고 도시 외곽에서 정보를 수소문하고 있었거든. 사람이 적기도 해서 탐문이 좀 쉬웠는데 릴라이스가 중심가에서 이목을 끌어준 덕분이었나 봐.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는데?=

「난 안에서 릴라이스가 우쭐거리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기도하는 사비족들이 하는 말이 좀 신경 쓰이더라.」

물이 부족하다고, 몇 년째 가뭄이 이어지고 있어 힘들다고. 비를 뿌려달라고 하는 기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릴라이스가 노는 걸 지켜보면서 힘을 써서 근처의 수맥이랑 수량을 확인해봤는데 확실히 수량이 좀 낮아져 있었어. 수원지의 물이 줄어드니까 물의 수질도 미세하지만 조금씩 나빠지는 게 보였고.」

“그래서 릴라이스에게 말해 물을 채워 넣은 거군.”

「응. 네 굉장한 힘으로 부족한 물을 보충해주면 사람들이 널 더 좋아할 거라고 하니까 더욱 우쭐해져서는 정령력을 절반 넘게 써서 이 도시랑 연결되어있는 수원지하고 지하 수맥 공동에 물을 다 채워버렸어. 반응은 뭐, 네가 상상하는 대로야.」

폭발적이었겠지.

「참, 난 그냥 비구름을 불러다가 비를 뿌리게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대한 위상력을 써서 그냥 물을 만들어내 버리다니. 초월급 정령의 사고방식은 원래 이런가?」

“오히려 그 덕분에 더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본다.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더 기적처럼 보일 테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비족은 얼마나 놀랐을까.

얍, 하고 힘을 쓰자마자 수로의 수위가 최대로 오르다니, 뭘 잘 모르는 촌무지렁이라면 신앙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그 뒤에는 부족장이 보낸 사람이 찾아와서 정중히 초대했는데 릴라이스는 저런 머리 좋아 보이는 인간들하고 어울리기 싫다며 떠나려는 걸 내가 바꿔서 릴라이스 흉내 낸 거야. 그 뒤에는 네가 본 대로고.」

……머리 좋아 보이는 인간하고 어울리기 싫다는 게 왠지 자신을 두고 한 말처럼 느껴지는 환인이었지만, 딱히 티는 내지 않았다.

환연 말대로라면 지금 환연의 안에서 릴라이스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손을 뻗어 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잘했다, 릴라이스. 네 덕분에 하려는 일이 조금 쉬워지겠어. 환연 너도 잘해주었어.”

머리를 쓰다듬어진 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쿡 웃었다.

「릴라이스도 고맙대.」

내가 언제!! 환연의 속에서 빽- 고함을 지르는 릴라이스였지만, 환연이 보기에는 뜻밖의 칭찬에 당황해서 부끄러워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환연의 위에 엎드려있던 환인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아랫배에 앉아 풍만한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소모했던 정령력은 얼마나 회복됐지.”

초월급 정령의 위상력 통은 모르지만, 매우 클 거다. 그만한 양의 절반을 썼다면 회복되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을까.

「쓴 양의 절반 정도? 내일 아침쯤이면 다 회복될 거야. 왜, 뭐 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환인은 예상보다 빨리 라펩에서의 볼일을 끝마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늘에 비구름을 불러서 비를 뿌릴 수 있겠나. 하루 정도.”

「응. 그정도면 가능해. 온전한 초월급이라면 하루가 아니라 한 달 내내 뿌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나랑 합체하면서 등급이 조금 떨어졌으니까.」

“그럼 내일 하루, 라펩 전체에 비가 내리도록 해다오. 비를 뿌릴 시기는 내가 정해주지.”

초대량의 물을 만들어내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비까지 뿌린다면 호의가 최대치를 찍는 건 기정사실.

갑작스레 불어난 수량은 시각적인 정보만으로 판단하니 잘 실감 나지 않겠지만, 하늘에서 추적추적,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면 그건 라펩의 최하층민인 노예부터 최상층민인 부족장, 전사, 사제들까지도 감동에 젖을 터.

나이를 품은 열매, 포영과를 얻어내는 데는 이정도면 충분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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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환연 + 릴라이스 합체로 1인분 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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