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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725화 (725/813)

725 라펩으로 가는 길

방랑자의 안식처를 거두어들이고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춰놓은 환인은 신수로 변한 노른을 타고 반갑지 않은 손님들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아있는 환연의 뒤통수를 내려다본다.

그 시선을 느낀 환연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릴라이스와 합체했으니 너도 초월급 정령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렇지. 에너지가 깃들지 않은 일반 물리 공격은 이제 나한테 더 안 통해. 물 속성도 안 통하고.」

그래. 초월급 물정령과 정식 계약을 맺은 환연의 강함은 이제 파티 내에서 환인 다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겠지.

물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비를 소환해 뿌릴 수도 있고, 살아있는 사람의 몸 안에 수분을 뽑아서 말 그대로 미이라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정령 합체 계약을 끝낸지 20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 능력을 다루는데 시간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환령계에서 3년간 지내며 정령 합체에 대한 것을 계속 공부하고 있었기에 곧장 실전에 들어가도 될 정도의 숙련도까지 갖춘 상황.

“……인데, 이제 숨어있지 않아도 되지 않나.”

「뭐야. 내가 붙어있는 게 싫어?」

“싫었다면 떨어지라고 진작 말했다.”

환인의 대꾸에 킥킥 웃은 환연은 해먹에 누워있는 것처럼 환인의 허벅지 사이에 드러누우며 대답했다.

「나도 네 피를 이었다는 거지. 너처럼 남들 시선에 띄는 거 싫고 뒤에서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아. 릴은 나서서 날뛰고 싶어 하지만.」

“…….”

자신이 어려지기 전에는 늘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에서만 지냈는데 그게 원해서 한 거였나.

「으으음~!」

물로 만든 드레스 원피스, 노출이 적은 차림으로 팔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여유롭고 느긋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상상으로만 바라던 것을 대부분 이루었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여유인 거겠지.

「다 왔어. 이제 나타날 거야.」

휘이잉—

그녀의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지상을 감시 중이던 이모렐에게서도 신호가 내려왔다.

그리고 회색 쿠에로만 이뤄진 12인의 플뢰족 기사가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쪽의 전투 대비 태세를 짐작하지 못했는지 10여 초 정도 머뭇거리던 자들은 천천히 비탈을 내려와 일행에게 접근했다.

공격 의사는 전혀 없다는 것처럼 비탈 중간 즈음 허리에 패용하고 있던 무기들을 전부 떼어내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한 명에게 몰아주는 플뢰족 기사들.

차림이 가죽에 사슬을 덧대놓은 개량형 복합 방어구뿐이라 무기를 숨길만 한 장소도 없다.

그렇게 20m 정도까지 다가와 멈춘 기사들 중 다른 기사들의 무기 주머니를 받아 챙겼던 1명, 안느처럼 왕족의 증거인 선명한 은발의 여기사가 긴장된 안색으로 혼자 일행에게 다가섰다.

6급 전사의 아우라가 동요 중인 심기에 영향을 받아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에서 조직된 진상규명위원회 산하 직속 조사대의 대장, 루나리 루아 알세이시스, 알세이시스 왕가의 삼녀입니다.=

“경어와 예의는 생략하지. 메리아놀의 조사대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설마 날 쫓아왔을 리는 없겠지. 사람이 염치가 있다면 그러지 않을 테니.”

=……!=

시작부터 강경한 적대 반응에 루나리=루아=알세이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며칠 전, 헤뷜트 직통 공간이동술법진을 이용하기에 앞서 주도에서 폐관 중이던 오라비 크샤나리에게 받았던 주의사항이 떠오른다.

‘성제가 분노해있거든 절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절대 싸우려 들지 말고 물러나라.’

‘왜냐고? 신님의 시련을 돌파하기 전에도 괴물 같은 기량과 능력, 기술을 지닌 자였다. 신님의 시련을 돌파한 지금 아신격에 올랐다는 소문이 환령계에 파다해.’

‘그와 적대행위는 영혼의 소멸까지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해라.’

‘……현재 패시지에는 불온한 공기가 가득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 음모가 횡행하고 있어.’

‘미리아스툼의 그라파든 공이 부자연스럽게 하야하여 부인과 패시지를 떠난 것도, 미리아스툼 왕가가 문을 닫아걸고 칩거 중인 것도 그 연장선에 있지 않은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동생아. 현 협의회와 투르시온을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구색만 챙기며 몸을 사려라.’

오라비의 주의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게 뭔가. 성제가 어려졌다는 소문은 들어서 놀라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전해져오는 기운은 멀찍이서 뵈었던 여휘 님의 기세와 비교해 절대 밑돌지 않은 경지다.

거기다 숨이 막힐 정도의 이 짙은 정령력은 다 뭐란 말인가. 이 정도 정령력 농도라면 최상급이 아니라 초월급이 현현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환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영혼 기사들을 봤지만 정령의 존재는 안 보인다. 그렇다면…….

‘환령계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실감하며 심호흡을 한 루나리는 최대한 말을 골라 성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입을 열었다.

=성제 예하. 협의회와 현 메리아놀 연합 왕국의 국왕, 타르반시올 톨마이어 투르시온 전하께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은 오해에서 비롯된…….=

『그만.』

우르릉— 영혼이 울리고 하늘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에 쿠에들이 놀라 활개 치고 기사들도 잇소리를 내며 고통을 억누르고 날뛰려는 쿠에들을 다스린다.

루나리도 귀청이 찢어진 듯한 고통에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바, 방금 그건 아신급 사도들 이상만 쓸 수 있다는 신언…….

“오해, 오해라고.”

=…….=

“무엇이 오해라는 거지. 사실을 적시한 명예 훼손 같은 부류의 개소리인가.”

피부를 찌르는듯한 존재감과 살기가 뒤섞인 기백에 루나리는 진땀이 식은땀과 뒤섞여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차원 방랑자를 소환해 뭉개려고 했지만, 악의는 없었다? 메리아놀은 암살 건에 대해 사과하려했지만, 언제 하겠다는 말은 안 했으니 잘못은 없다? 내가 현재 하는 행동은 성질이 급해 참지 못하여 착각 상태에서 저지르고 있는 범죄 행위다?”

=그…….=

그건 오해라고 말하려던 루나리는 입을 다물라며 손가락을 세우는 환인의 행동에 목이 콱 막혔다.

“알세이시스라는 성을 쓰고 있으니 그대도 알세이시스 왕가 소속이란 말이겠지. 지금부터 그대가 하는 말은 알세이시스 왕가와 협의회를 대변해 하는 말로 간주할 테니, 잘 생각해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

상처입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루나리는 협의회와 타르반시올 국왕이 내밀었던 화해를 위한 조건들 따위로는 성제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고 직감했다.

금전적, 물질적 보상과 메리아놀의 이름으로 하는 사과, 작위 수여 및 기타 최상위 귀족에 준하는 혜택 따위, 아신격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덧없는 것이니까.

=…….=

루나리가 식은땀과 진땀을 흘리기만 하고 말을 잇지 못하니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부대장이 이마에서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면서 서글서글한 웃음을 띠며 나섰다.

=저희를 향한 불신은 가슴 절절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노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믿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메리아놀의 뜻은 성제 예하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어떻게든 관계를 보다 긍정적이며 선한 사이로 쌓아 올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후, 하고 환인이 웃음 지으니 그 겉모습만큼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와 닮아있어 무척이나 보기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루나리와 부대장을 비롯한 조사대의 대원들은 9급 이형종의 앞에 선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만 부들부들 떨었다.

숨통을 죌 것 같은 살기와 존재감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던 것.

“나라 꼴이 참 잘 돌아가는군. 메리아놀의 한 축이라는 왕가 소속의 처자가 뒷골목 창녀와 다를 바 없이 아는 것 하나 없다는 게 이토록 희극적일 줄이야.”

환인의 조롱에 루나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날 추격하라 보낸 것을 보면 메리아놀 지도층의 핵심 정예라는 뜻일 텐데 하는 짓은 그저 위에서 시키니까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멍청하고 충직하기 그지없는 사냥개로군. 한심하고 어리석기 그지없어. 어깨 위에 달고 있는 것은 없으면 허전해서 붙이고 있는 건가.”

=무엇을, 모르는지, 부디 모자라고 부족한 저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살기를 이겨내기 위해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루나리였지만, 안느가 환인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루나리 왕녀, 오랜만이야.=

=……안실라 왕녀.=

=미리아스툼의 이름과 지위는 버렸으니까 안느 영혼 기사라고 불러주길 바랄게. 아무튼, 네 질문에는 내가 대답해주려 하는데, 괜찮을까?=

=예……. 부탁드립니다.=

=먼저, 루나리 왕녀의 눈에 여기 계신 분이 어떻게 보여?=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하여 아신급에 오르신, 대륙 유일무이한 성제 직업자이신 분……이잖아요.=

=맞아. 잘 알면서 왜 그래?=

=……?=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하기까지 한 성제님이야. 정말 불합리에 단순히 화가 나서, 오해와 착각 속에서 이러신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휘 님께서 침묵에 들어가신 뒤로 협의회 위원들이 전부 쥐약을 먹었다고밖에 생각 못 하겠는데. 물론 너도.=

=……….=

루나리는 요 며칠 극심하게 고민했던 점을 정통으로 찌르는 안느의 발언에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실종 전까지는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착각과 착오 때문에 메리아놀이 악의 축으로 묘사되고 차원 방랑자들을 학대, 홀대하고 있단 소문이 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며칠 전, 성제가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했단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급격하게 커졌다.

정말, 정말로 이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까?

신님의 시련을 통과할 정도의 인물이 오해로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리는 걸까?

만약 현재 니오네브레스 대륙에 널리 퍼지고 있는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면?

대현자를 만난 환인 성제가 메리아놀이 숨기려는 모종의 비밀을 손에 넣었고, 그로 인해 메리아놀의 공격을 받아 몇 달간 실종 상태에 빠졌었으며, 차원 방랑자를 메리아놀의 숨겨진 집단이 강제로 소환하고 있는 데다 그렇게 소환된 차원 방랑자를 실험 재료로 쓰고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일체의 과장 없는 진실이라면?

‘성제는 위의 소문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도 그럴 게 백청룡이 주도 패시지를 수몰시키려 벌써 수개월째 비를 뿌리고 있다.

신수가 자신의 영락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하는 게 단지 착오 때문일 리 없다.

루나리의 입술이 파리해진 걸 본 환인은 비슷하게 충격받은 기사 11명을 쓱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조사대 중 투르시온 가문 소속이 있나. 있다면 거수하도록.”

멈칫, 멈칫하면서 손을 드는 5명의 기사들. 전원 4급 이상의 직업자들이다.

“푸른 나뭇잎의 탑 소속도 있나.”

손이 두 개 더 올라온다.

환인은 불안한 얼굴을 하는 일곱 기사들을 향해 언제 기백과 살기를 쏘아냈냐는 듯이 평온하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들의 표정과 반응으로 보아서는 가문과 탑의 어둠에 닿지 않은 결백한 자들이겠지. 그렇다해도 본인은 다짐에 따라 그대들을 놓아줄 수 없다.”

=……!=

환인의 이야기에 담긴 뜻을 깨달은 기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지만, 그들의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것보다 그들의 심장을 보이지 않는 화살이 꿰뚫고 지나가는 게 먼저였다.

투확! 퍼헉!

일곱 번의 파열음과 함께 기사들의 등 뒤로 피와 살점이 터져나간다.

=……컥, 억….=

=아윽…….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난 주먹만 한 구멍을 피를 토하며 보던 일곱 명의 기사는 그대로 쿠에의 등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졌다.

=…….=

루나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죽어버린 부대장을 보다가 어깨를 떨었다.

설마, 투르시온과 푸른 나뭇잎의 탑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는 이야기?

화아아아아—

혼란에 빠진 기사들을 황금빛을 머금은 빛의 파문이 휘감고 지나간다.

루나리와 기사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영기를 머금은 평온의 파동에 휩싸이며 헝클어진 정신도, 뒤죽박죽 엉망이 된 마음도 정상을 되찾았다.

“이 일련의 사태가 전부 해결되었을 때, 당신들은 해방되어 신의 정원으로 떠날 수 있을 겁니다.”

「흑…….」

「으윽…, 으으…….」

「아아아…….」

그렇다고 해도 충격적인 진상을 알게 되어 받은 정신적 충격은 매우 컸다.

그랬기에 살아남은 다섯 기사는 죽은 자들의 시체에서 영혼이 일어서는 것, 그리고 그 영혼들이 눈물을 흘리며 성제와 혼의 계약을 맺는 걸 멍하니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메리아놀이 차원 방랑자를 강제로 소환, 이용해 사익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희생된 숫자가 족히 수백 명이 넘어간다는 이야기.

신의 시련을 넘어 아신의 격에 다다른 성제도 그러한 음모의 피해자라는 소식.

살아남은 다섯의 메리아놀 조사대가 본국으로 귀환하려다 삼국 연합 조사대에 붙잡혀 이실직고한 정보에 니오네브레스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일단은 지구로 귀환하기 전, 환인이 세운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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