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 라펩으로 가는 길
치링— 치리링—…….
환연의 몸 주위로 떠오르던 맑고 투명한 물방울들이 서로 닿을 때마다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물방울은 빛을 산란하며 거실을 마치 남국의 바닷속처럼 바꾸어나간다.
여기에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섞이니 이루 말 못 할 신비로운 감각이 오감을 채우는 게 느껴졌다.
=너무 아름다워요…….=
=이건 물의 정령력…?=
계속해서 생겨나던 물방울은 거실을 채울 정도로 많아졌고 일부 물방울은 서로 합쳐지기까지 한다.
큰 물방울 속의 작은 물방울들. 물거품처럼 한데 뭉친 물방울들. 고고하게 홀로 떠다니는 물방울들.
까르르르—
아하하하……!
꺄하하~
거실을 가득 채울 것처럼 계속 나타나던 물방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환연의 위쪽으로 모여들며 점차 압축되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압축될수록 사람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환연이 누워있는 주변도 무언가 다른 세계가 뒤섞이는 것처럼 흐릿해지고 투명해지더니 그녀의 아래쪽에서도 물방울로 이뤄진 사람이 끌어올려 진다.
=차원 침경 현상?! 세상에!=
그걸 목격한 유르파가 놀라 파다닥거리다 아까까지 뭔가 적고 있던 노트를 들어 휘갈겨 쓰기 시작하고, 아영도 그 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리저리 목을 빼며 환연의 아래에 펼쳐진 영역을 들여다보려 애쓴다.
안느나 이실리테는 저게 뭔지 보고 있어도 몰라 바빠 보이는 유르파 대신 아영을 불러 물었다.
=야. 저게 뭔데? 정령력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나오고 있는 거 보면 그거인 거 같은데…….=
=언니님이 생각하는 게 맞을걸요? 아래쪽에 열린 통로는 환령계일 거예요. 현계랑 환령계가 겹치면서 통로가 열린 거죠.=
=아, 그래서 루모도 아까부터 기웃거리고 있었구나.=
=저긴 물 정령의 환령계라서 기웃거리기만 하는 거지 빛 정령의 환령계였으면 아마 신나서 날아다녔겠죠. 그보다 정령 합체도 막바진가 보네요.=
아영의 말대로 환연의 육신 위아래로 형성된 사람 모양의 물방울이 점차 육신에 가까워져 간다.
아마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은 환연의 영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초월급 물 정령 릴라이스겠지.
물거품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상이라 이목구비를 알 수 없지만, 다리 형태가 달랐기에 분간이 간다.
그러는 사이 점점 육신으로 다가들던 물거품 인형 둘이 생육에 닿은 순간. 파아앗— 물 냄새를 담은 강한 파동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와 거실을 가득 메워버렸다.
정령력은 물론 술법적 소양도 없는 이실리테가 신기해하며 손을 들어본다.
=이게 정령력인가요? 물의 향기가 물씬 느껴져요.=
=정령력은 아닌데…… 기운이 너무 짙어서 감각이 실체화한 걸 거야. 이런 현상도 처음이네.=
유르파가 원리를 짐작해 설명해주는 것을 듣던 환인은 그러한 감각이 자신은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살짝 눈매를 찌푸렸다.
‘위상류는 정령력 과다로 인한 감각 오류까지 막아내는 건가.’
위상류를 실감할 일이 거의 사라져서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확실히 위상류는 남아있나 보다.
그런데 뇌의 문제도 해결해주었던 반로환동이 위상류는 어쩌지 못한 걸 보면 위상류는 의외로 신체 문제가 아니라 능력 쪽일 수도 있겠군.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짙은 감각 속에서 둥실 떠오르는 환연의 육체. 그리고 그런 육체를 중심으로 불길처럼 일렁이는 물의 아우라.
거실을 푸른색으로 물들이던 아우라가 점차 줄어간다. 정령력의 과잉 때문일까, 발동되어있던 마도구가 강제 종료되어 어두워진 거실에서 스스로 빛을 내던 환연은 천천히 탁자에 내려서서 후우~ 작은 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아~ 길었다.」
산 정상 오른 산악인처럼 두 팔 벌려 깊게 심호흡하는 그 모습에서 몇 가지를 짚어낸 환인은 탁자에 가까이 다가가 환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합체 계약은 어땠지.”
「두 개체의 합일이잖아? 당연히 주도권을 가져가는 쪽이 있는데, 릴이 자기가 주도권을 가져가려 했지만 내가 뺏어왔어.」
“의식의 융합 쪽은 아니군. 두 의식이 공존하며 육체를 번갈아 쓰는 건가.”
「응. 그래도 릴 덕분에 정령력을 어마어마하게 쌓을 수 있었어. 지금이면 상급 정령을 하급 정령 부리듯이 할 수 있고…… 최상급 정령도 부탁하면 들어주려 할 거야.」
마치 잠깐 놀러 나갔다 온 것처럼 여상한 대화에 여자들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환인은 두 손을 뻗어 환연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손안에 가득 느껴지는 환연의 따스한 체온. 생명을 들고 있다는 실감이 손바닥을 통해 가슴까지 와닿는 느낌이다.
살아있는 바비 인형처럼 들린 환연은 그의 엄지를 매만지며 싱긋 웃음 지었다.
「걱정했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으니까. 환령계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거지.”
「3년 정도.」
“하루에 10개월이었나. 지루했겠군.”
그녀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검지로 건드리며 묻자 환연은 그의 엄지에 뺨을 문지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엄~청나게 지루했지. 아무것도 없는 물속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으니까.」
잠시 손안의 온기를 느끼다 탁자 위에 내려놓아 주니 여자들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환령계는 어땠니?=
=힘들지 않았어?=
=계속 잠만 자는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합체는 잘 된 것 같네.=
=릴라이스가 괴롭히지 않았음?=
「하나씩 물어봐, 하나씩. 뭐 엄청나게 재미없는 곳이었지. 지루한 거 빼면 괜찮았고. 나도 반은 정령인데 며칠 자는 것쯤이야 상관없어. 합체는 내 의도대로 잘 됐고 치근덕거린 거 빼면 릴은 잘 대해줬어.」
한 발 떨어져 그 광경을 주시하며 환연의 대답을 유의 깊게 분석하던 환인은 그녀가 릴라이스에게 침식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한없이 0%로 내려놓았다.
행동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게 보이지만, 저건 두 개체의 융합으로 서로의 성격에 영향을 끼친 수준의 변화일 터.
적어도 지금 말하는 것과 행동을 보면 예전보다 성숙미가 좀 더 느껴질 뿐, 기본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바뀐 그녀에게 적응하면 될 뿐인 일이다.
중요한 것은 릴라이스와 환연의 화합, 그리고 자신의 태도.
솔직히 말해 환인은 릴라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만남 때부터 안좋은 이미지가 콱콱 박혔는데 좋을 리가 없다.
만약 환연이 릴라이스와 합체해 좀 더 강해지고 싶고, 강해진 힘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고히 다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정령 합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 릴라이스하고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느껴?=
「응.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몸은 정령력을 담아두는 그릇이야. 그릇 속에는 나와 릴의 정령력이 동질화되어서 담겨있고. 그래서 릴과 내가 같이 쓰는 식이야.」
안느의 질문에 대답한 환연은 여자들에게 좀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여자들이 환인을 들어 안고 적당히 거리를 벌려주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알몸이 되는 환연. 그리고 자신의 젖가슴과 배에 그려진 이상한 표정의 그림을 발견하곤 어이없어했다.
「이게 뭐야.」
=풋!=
=괴, 굉장히 전위적인… 미술이네요.=
=큭큭큭.=
자신의 몸에 낙서해놓은 범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환연은 부자연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환인에게서 심리적 확신을 느끼곤 물었다.
「너지. 네가 했지.」
“노른에게 이상한걸 가르친 보복이었는데 잊고 있었군.”
「이상한 거라니? 이상한 거 가르친 적 없는데?」
“날더러 색정광이라고 하지 않았나.”
「…….」
=…….=
=…….=
환인의 지적에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찔끔한 표정을 짓는 환연과 민망해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여자들.
자신의 몸에 그려진 이상한 표정 그림으로 다시 시선을 준 환연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걸로 쌤쌤인거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정령력을 집중하는 환연.
그러자 아까의 신비로운 물방울이 또 잔뜩 나타나더니 환연의 몸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어 물방울이 거침없이 그녀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오?=
=와아.=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변신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물방울이 그녀의 몸에 흡수되는 양만큼 형상이 일렁거리며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키 170의 성숙하면서도 어딘가 개구쟁이 느낌이 드는 보브 컷의 미녀가 된 것이다.
머리카락은 칠흑같이 새카만 색에서 아주 약간 푸른색이 깃들었고, 머리카락 안쪽은 선명한 물빛이 드러나는 투톤의 헤어.
낙서는 크기가 커지며 씻겨나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뜬 환연은 안느의 품에 안겨있는 환인에게 다가가 씩- 웃음 지었다.
「어때?」
이전의 나른하고 권태감이 느껴지던 흑요석 눈동자는 약간의 장난을 담은 또렷한 눈망울이 되었고 살짝 올라간 입매에는 표정 그대로의 장난이 담겨있다.
당연한 듯이 두 손으로 밑가슴을 받쳐 올리며 유혹하듯 짓궂은 미소를 짓는 환연.
「가슴이 좀 작아서 환인 취향에는 안 맞으려나.」
“……그 정도면 충분히 크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이실리테나 유르파한테는 반도 안 되고 백려강한테도 지는데?」
=나는 언니들 반의반도 안 되는데…….=
뒤에서 아영이 우울해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팔을 뻗어 환연의 가슴을 만져보았다.
“물거품으로 만들어진 몸이지만 촉감은 실제 가슴과 같군.”
「릴하고 합쳐지며 물로 할 수 있는 일이 대폭 늘었어. 이것도 물과 내 몸을 매개로 재현한 거. 아, 그래도 아이는 못 가져. 그만큼 신체 기관 구현도는 높지 않거든.」
“그런가. 그 정도라면 속성 친화력에도 변동이 있었을 거 같은데.”
「맞아. 정령 친화력이 이전에는 고루 균등했다면 지금은 물의 친화가 다른 속성에 비해 1.3배 정도 높아졌어.」
“큰 문제는 아니겠군. 릴라이스는?”
환연의 작고 귀여운 젖꼭지를 한차례 잡아당겨 본 환인이 묻자 훗, 하고 웃더니 눈을 감고 무표정이 되는 환연. 직후 울상과 함께 금방이라도 눈물을 방울방울 흘릴 것처럼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변한다.
이어 두 팔로 환인에게 잡아당겨진 젖꼭지를 가리더니 항의하듯이 소리친다.
〈이, 이 나쁜 놈! 너도 환연도 못됐어. 진짜!〉
……릴라이스인가?
표정만 바뀐 게 아니다. 언제나 여유로운 둘째 누나 같은 분위기가 지금은 약간 정신연령이 낮은 소꿉친구처럼 변했다.
환인은 피식 웃으면서 씩씩거리는 릴라이스, 환연의 얼굴을 한 초월 정령에게 물었다.
“계약에 불공정 사항이 있었나.”
〈없었지만! 없긴 했지만! 그래도 너랑 환연한테 속았단 말야!〉
“그러면 피장파장이군.”
〈뭐가!〉
“앞으로 잘 부탁하지. 지난 일은 잊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자.”
〈……이이~!〉
제 말만 하는 환인의 모습에 더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은 이 상황이 릴라이스는 억울해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차마 눈앞의 인간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뭔 놈의 인간이 처음 만난 그때부터 줄기차게 성장만 한단 말인가.
아니 그냥 성장만 하면 모르겠는데 미치기라도 했는지 신의 시련을 고작 몇 달 만에 돌파해서는 아신격에 도달해버렸다.
저 인간이 작심하고 영혼술을 쓰면 자신도 진지하게 완전 소멸을 걱정해야 할 판.
억울하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고 자신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는 이 상황에 릴라이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씨잉거리기만 하다가 눈을 감더니, 환연과 교대했는지 환연이 전면으로 나와 키득거렸다.
「릴이 어린애처럼 버둥거리면서 떼쓰고 있어. 계약 물리라고.」
본의 아니게 흘린 눈물을 닦는 환연에게 환인의 주의가 떨어졌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릴라이스와 사이가 어긋나는 일 없이 잘 지내도록 해라. 토라져서 인성질이라도 부리면 귀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걔도 잘 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으니까. 이제 와서 합체 계약을 끊으면 걔한테만 손해니까 계약을 끊을 생각도 안 할 거고. 그보다, 환인?」
“왜 그러지.”
안느의 품에서 내려온 환인은 사람 사이즈로 커진 환연의 사슴처럼 탄력 넘치는 다리며 매혹적인 아랫배를 만져보다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환연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벨티칼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환영하지 못할 손님이 찾아오고 있어. 대강 20분 정도면 여기에 도착할 거 같네.」
20분 거리라니, 정령의 지배 범위가 더 늘어난 건가.
“사비족인가.”
「아니. 일부 사비족을 앞세운 플뢰족이 다수야.」
“……마침 잘됐군.”
메리아놀의 조사대가 삼국 연합 조사대보다 조금 더 빨랐나. 조금 신경 쓰이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환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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