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 바다신께 바치는 도시, 헤뷜트
환인은 잠깐 구주의 독니 암살자 앞을 서성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헤뷜트, 사비족 국가 벨티칼의 주도에 도착하고 사비족의 타종족 불신과 적개심에 한 가지 가능성이 매우 큰 가설을 내놓았다.
‘사비족이 영혼사를 우대하지 않는다는 점과 거인숲 미궁 앞에서 암살 시도를 당하던 당일 찾아왔던 사비족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들은 백청룡과 인연이 있는 자신을 초대하려 했다. 모종의 평판 작업을 시도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만약 메리아놀의 암살 시도로 분위기가 살벌해지지 않았다면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았겠지.
자신을 초대해 무엇을 하려 했을까. 아드네빌라와 소통할 기회? 그걸 얻어내서 아드네빌라에게 뭘 하려고 계획을 꾸몄을까?
‘대사주와 관련된 일.’
지하율은 벨티칼의 사도, 대사주는 바다신의 뜻을 제외하면 사비족을 돌멩이 취급하는 뱀 대가리라 평가했다. 히스론드의 사도는 아예 정체를 감추고 노파처럼 지내고 있었다.
여기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끼워 맞춰볼 경우…….
‘사비족은 모종의 목적을 위해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를 밀어버리려는데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건 현재 이지를 잃어버린 아드네빌라를 이용하는 쪽일 텐데 현재 니오네브레스 구도는 라드세아, 히스론드, 벨티칼 vs 메리아놀이다.
삼국이 조직한 나의 실종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결성된 조사대가 메리아놀을 압박하는 형국인 것.
지난 4개월 동안 움직이지 않았으니 벨티칼은 현재 다른 국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하지만 사태가 일변했다.
스프라울드 사건으로 이제 자신의 생존이 지도부에까지 전달되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당황한 삼국 지도부가 이견 조율을 끝내고 대응 방침을 정한 뒤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겠지.
이러한 판국에 생각 있고 규모 있는 여타 세력이라면 태풍의 핵이 된 자신의 진행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거다. 태풍 이동 경로에 있다간 풍비박산 날 테니까.
암살 집단은 무엇보다 세계정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러한 판국에 구주의 독니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조언자, 쿠클린이 전갈을 보냈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환인의 생각이 깊어지는 장면에 암살자가 두려움 속에서 미미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신들이 얼마나 강한 모험가인지는 아우라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언자님의 전언을 가지고 왔는데도 이런 태도…….=
=야. 그냥 입 다물어.=
카락스의 차기 어금니 출신인 아영이 얼음송곳 같은 살기를 내뿜자 이제 4급 엽사인 칠흑색 비늘의 암살자가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노여움이 피어난다.
혀로 맡아지는 냄새만 보면 저것들은 비늘 피부가 아니라 민둥 피부들이다. 그런데 사비족의 안마당에서 이따위로 안하무인처럼 굴어?!
암살자는 현재 종족 일부만 가지고 태어나는 야콥슨 기관으로 상대를 파악하고서는 분노를 드러냈지만,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비늘이 거꾸로 일어서려 했다.
“관둬라. 돌아가면 처분당할 놈에게 심력을 쓰는 건 낭비다.”
=……?!=
=……?=
구주의 독니 암살자는 눈을 부릅떴고 아영은 ‘엥?’ 하는 표정을 잠깐 드러냈다가 ‘아!’ 하고 감탄했다.
일부러 이쪽 정체를 알려주지 않고 전언만 전달시키려 한 것을 보면 애초에 구주 내에서 별로 뛰어난 인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제 생각을 내뱉어 이쪽의 경계를 샀고 이쪽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까지 품게 되었다.
지시를 어기고 돌발, 독단 행동을 저지른 암살자.
머릿속에 귀속 비술이라는 폭탄이 심어진 조언자가 주시자의 눈으로 현재 지켜보고 있을텐데 저 암살자를 어떻게 할지는 뻔한 일이다.
“전언은 뭐지.”
=……밤, 달이 머리 위를 지날 때 뱀니가 빛을 발할 것이니. 도시에 머무르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이상입니다.=
전언을 들은 환인은 바로 돌아서서 골목을 나가버렸고, 이실리테는 일행 모두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암살자를 노려보다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도령. 헤뷜트에 암살자가 있을 거란 이야기야?=
걷는 속도 탓에 안느의 품에 안겨 약재상을 찾아가던 환인은 그녀의 질문에 평소와 다름없게 대답했다.
“뱀니가 빛을 낸다는 건 아이보리색이 드러날 거란 말이겠지. 쿠클린이 찾아올 거라는 전언이라고 본다. 도시에 머무르지 않는 걸 추천하는 것은 말 그대로일 테고.”
=어째서인가요?=
주인님이 떠나자고 하자면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만, 조언자라는 암살자의 이야기를 따를 필요가 있을까. 이실리테가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환인은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입을 열었다.
아직 그녀들은 헤뷜트의 실상이 피부에 닿지 않나 본데, 당분간 벨티칼에서 지내야 하니 확실히 알아듣게 이야기해주는 게 좋겠지.
“벨티칼에서 영혼사의 입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매우 낮다.”
=엥?=
=네?=
전혀 생각 못 한 이유가 그의 입에서 나와 이실리테, 안느가 그를 돌아본다.
그녀들의 머릿속에 영혼사란 부모님과 비슷한 급의 절대 영역인데 그런 영혼사의 입지가 낮다니?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중 두 가지를 꼽자면 하나는 사비족이 박해받아온 역사, 다른 하나는 영혼사를 대체하는 직군의 존재 이유가 크지.”
=오빠 말씀이 맞아요. 벨티칼의 장례 풍습은 다른 나라하곤 좀 다르거든요. 죽음과 사후에 대한 이미지가 좀 심한 느낌? 그런 장례 제사는 주술사제라는 직업이 도맡아 하는데 사비족은 주술사제에게 축성 받으면 사후에 바다신님의 자유로운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어요.=
=그, 그래서 영혼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단 거야? 영혼의 저주 따윈 별거 아닌 일이라고?=
=네. 혼재가 나타나도 ‘혼재? 그거 마물화 한 악령이잖아. 소멸시켜버려!’ 이러고 마는 거예요.=
환인은 그게 당연한 대응이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아영이 안느 네가 화내려던 것을 말렸던 것도 그에 기인한다. 그자들과 우릴 안내해줬던 사비는 이쪽을 평범한 타국 귀족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혼사라는 게 밝혀진다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사람은 때때로 생각이란 걸 안 하는 건가 싶은 일을 저지르기도 하니 말이다.
안느가 으음, 뺨을 긁적이며 자신이 이해한걸 정리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머무를수록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커지고 그리되면 인간 출신 영혼사라는 것 때문에 말썽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네. 그래서 빨리 도시를 벗어나란 거고.=
“그렇게 생각한다.”
뱀니가 빛을 드러내는 게 조언자가 찾아올 거라고 했지? 그러면…….
안느는 조언자의 겉모습을 생각하며 유르파를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그녀는 이미 비술 추적으로 귀속 비술 대상자를 탐색 중이다.
감지 되는 것은 총 세 명. 한 명은 바로 옆에 있는 아영이다. 그리고 아영에게 걸린 것보다 좀 더 심각하고 비인도적인 기능의 복잡다종의 귀속 비술이 걸린 두 명.
=……응. 저쪽으로 110km 지점에 있어. 그 능력에 특정 인물 주시 기능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긴 해.=
앉은 자리에서 1000리를 내다보는 능력이 특징인 주시자의 눈.
주도에서 세계정세, 국가 정책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게 당연하니 주시자의 눈 사정거리 안에 주도가 있는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쪽이 헤뷜트에 도착한 지 40분이 다 되어간다.
자신들의 목에 채워진 폭탄 목걸이의 주인이 나타났다면 사람을 보내 접선시키는 것은 당연함을 뛰어넘는 거지.
안느가 후드 아래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뭔가 조금 기분 나쁜데. 이쪽을 언제부터 추적하고 있었을까.=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이쪽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겠지. 우리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간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터질 테니 말이다.”
=하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있는 적당히 허름한 약재상, 바깥에서부터 온갖 풀냄새가 진하게 나는 상점에 도착한 아영은 서슴없이 후드를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르파는 입구에부터 걸려있는 온갖 말린 약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하는 중.
=영감 있어?!=
=어떤 미친년이 아침부터 고함을…… 뭐야, 너였냐.=
=이야, 영감 아직도 안 죽었네.=
=너야말로 안 뒤지고 용케 살아있군.=
회색에 언뜻언뜻 녹색빛이 맴도는 비늘의 사비족이 두꺼운 로브를 입고 나와 컬컬 웃다가 켈룩거리며 마른기침을 토한다.
그런 사비족에게 원기 회복의 성술을 지나가듯이 걸어준 아영은 주위에 있는 약초 무더기 상자에서 솜씨 좋게 가장 뛰어난 품질만 쏙쏙 빼 들며 말했다.
=일렉토 한 무더기하고 토랑, 입생, 얄다트 각각 세 줌씩 줘. 늘 사던 것도 챙겨주고.=
=흥…….=
힐끔, 일행 쪽을 돌아보고는 느릿하게 어두컴컴한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사비족. 잠시 후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큼직한 주머니가 들려있었고 속에는 약초가 가득 담긴 상태였다.
아영은 군말 없이 주머니를 받아들여 내용물을 살핀다.
=네 주인의 짓이냐?=
밑도 끝도 없는 사비족의 질문에 아영은 흐,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웃음 지었다. 그 웃음에 노인은 의자에 앉으며 하얗게 백태가 낀 눈으로 아영을 응시했다.
=3대 암살 조직 둘이 한 명의 손에 무너져버렸군. 남은 건 하나인데…….=
=그쪽도 멀쩡하진 않아. 영감 소원도 이뤄졌으니 이제 묫자리에 들어갈 때가 됐지?=
=크크크.=
=아무튼, 나 이제 여기 못 와. 마지막 작별 인사 겸 찾아온 거야.=
유르파가 가져온 약초와 함께 계산해서 1금화를 팅- 튕기자 영감이라 불린 사비족도 나지막이 대꾸하며 금화를 받았다.
=오냐.=
=……잘 가.=
=너도 잘 가라.=
담담하다 못해 메마른 인사를 나눈 아영은 망설임 없이 약재상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유르파는 아영과 함께 약재상을 나서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옆모습에서 뭔가 안타까움과 씁쓸함? 아련함? 그런 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헤어져도 되겠니?=
=옙. 영감이랑 저 사이에는 이 정도가 딱 좋아요. 이래저래 얽힌 게 많은 사이거든요.=
이 대답으로는 부족하다 느꼈던 아영이 말을 덧붙인다.
=제 독술 스승인데 절 상대로 독을 엄청 시험했거든요. 몇 번은 진짜 죽을뻔하기도 했고요. 아! 아우라 감추는 약도 저 영감 작품이에요.=
=…….=
악연도 인연이라 하는데 아영과 저 노인의 관계는 애증이 더욱 깊고 진한 것으로 느껴졌다.
좀 더 미련이 남지 않는 이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유르파였지만 입 밖으로 그 생각을 꺼내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영이 마냥 어린애도 아니고 이별 방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니까.
장거리 이동 준비는 스프라울드에서 모두 끝내놓은 상황이었기에 일행은 곧장 쿠에를 타고 주도의 동쪽으로 난 작은 가도를 따라 달렸다.
목적지는 주도 헤뷜트의 동쪽으로 400여 km 떨어진 라펩이라는 소도시.
밀림을 통과해야 하기에 마차는 꺼내지 않고 쿠에를 타고서 이동한다.
이모렐은 날아서 쫓아올 수 있다지만 이모렐을 빼고도 인원수와 쿠에의 숫자가 맞지 않기에 이번에도 환인은 이실리테와 함께 노른의 등에 탑승한 상태였다.
「환인. 쿠에 하나 더 구하자.」
그래서일까. 출발하자마자 노른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저번으로 누굴 태우는 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실리테를 등에 태운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환인은 노른의 불평에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
“짐은 괜찮은데 이실리테는 왜 안된다는 거냐.”
「짐은 그냥 짐이잖아. 이실리테는 사람이고. 내 등에 탈 수 있는 사람은 환인 너뿐이란 말이야!」
“…….”
그전에도 몇 차례 노른의 등에 누굴 태운 적은 있지만 지금만큼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다.
노른이 이렇게 떼를 쓰는 것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환인이었지만, 여기서 이러면…….
쿠르티를 타고 옆을 달리다 노른의 불평을 들은 유르파가 어색하게 웃는다.
=자기~ 나 비행 빗자루 타도 되는데?=
“이런 숲에서 비행 빗자루는 위험합니다. 어쩔 수 없지, 다들 잠시 멈춰봐라.”
일행을 길가에 세운 환인은 젤프리에 유르파와 아영이 탈 수 있도록 하고 젤프리의 등에 실어놓은 짐을 노른의 등으로 전부 옮겼다.
쿠르티의 등에는 원래 주인인 이실리테가 올라탔다.
“이제 됐나.”
「흥흥.」
이실리테의 몸무게 두 배를 가뿐히 넘기는 무게의 짐인데도 노른은 오히려 이게 낫다며 쿠흥, 만족스러운 콧김을 내뿜는다.
다리 사이에 실루를 올려놓은 채 그걸 전부 보고 있던 안느가 장난스레 실루의 등을 토닥였다.
=실루야~ 넌 커서 저런 어른이 되면 안 돼. 알았지?=
삐?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드는 실루의 모습에 노른은 뭐가 나쁘냐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난 아성체가 됐을 때부터 친구 말고 누구도 안 태울 거라고 결심했었어. 오히려 친구 부탁에 결심을 몇 번 꺾은 게 대단한 거지! 실루 너도 명심해. 훌륭한 쿠에면 친구 말고는 아무도 등에 안 태우는 법이야!」
삣!
=앗, 야! 애한테 뭔 이상한 걸 가르치고 있어!=
「쿠에의 자존심이 뭐가 이상한 건데! 실루는 나만큼이나 희귀한 쿠에잖아!」
=어…? 아니 그건 그런데……!=
정론에서 밀린 안느가 당황하고 실루는 노른의 말이 맞다며 날개를 파닥인다.
척 봐도 자신의 말보다 노른의 말에 더 따르는 모습. 안느는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실루가 컸을 때 날 거부하지 않도록 실루를 더 챙겨줘야하나? 하지만 그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쿠에랑은 어떻게 친해지는 거지?
안느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과 관계없이 환인은 중간에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 최대한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라펩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잘 달리고 추위, 더위에도 강한 쿠에라지만 400km나 되는 거리를 한나절 만에 돌파할 수는 없다. 그것도 열대우림이 빼곡한 지대를 통과하는 거라면 더더욱.
특정 약초를 재료로 벌레와 독물을 내쫓는 성술을 써가며 달린 지 한나절.
매우 습하고 더운 데다 길도 거의 없는 열대우림을 통과했을 때 하늘은 이미 달과 별빛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으아~. 온몸이 푹 젖었어.=
=후우…….=
이따금 덮쳐드는 겁 없는 밀림 표범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 벨로키랍토르에 좀 더 악어 모습을 첨가한 마수하고 싸워댄 덕분에 열대우림을 빠져나온 일행은 환인과 노른을 제외하고 쿠에들까지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습기와 땀에 푹 젖은 상태였다.
쿠엣~!
쿸크!
비에 홀딱 젖은 독수리처럼 볼품없어진 쿠에들이 온몸을 털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이모렐을 경계로 내세운 여자들은 인적 없는 초원에서 먼저 방랑자의 안식처부터 설치했다.
벨티칼에서 뻗어 나오던 가도는 밀림의 중간 즈음부터 길이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갈대 비슷한 풀이 허리 높이까지 자란 대초원에는 눈을 씻고 봐도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가는 사람, 인기척도 없다.
안심하고 방랑자의 안식처를 먼저 설치한 여자들은 거실 베란다를 통해 짐을 던져넣고 백려강과 아영의 물 술법과 하급 물정령의 도움을 받아 입고 있던 옷부터 벗어 물로 헹궜다.
습기와 땀으로 절여진 상태라 이대로 두면 여러모로 거시기해진다. 목욕탕에서 세탁하는 것도 어려우니 그냥 밖에서 한 번에 씻는 여자들.
다들 착용한 복장은 유물이나 마도기라 오염 방지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있다.
물에 적셨다가 털어내면 갓 빨래한 것처럼 깨끗해지기에 그녀들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밤중, 시리도록 하얀 달빛 속에서 속옷 차림의 미녀들이 옷을 세탁하고 빨래를 너는 모습은 달의 마력에 미쳐 환상을 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광경이다.
환인은 몽환적인 여자친구들의 속옷 차림을 구경하다 유르파가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기. 구주랑 쿠클린이 거의 다 쫓아왔어. 조금 있으면 저쪽 언덕에서 나타날 거야.=
“예.”
환연이 잠들어있으니 감시 색적 기능이 대폭 떨어진 게 와닿는다.
그녀가 깨어있었다면 유르파가 계속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헤뷜트에서 암살자가 다가오는 것도 거의 가까이 와서야 눈치채지 않았을 것이고.
유르파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이 망설임 없이 젖은 옷을 챙겨입고 얼마 후,
유르파가 가리킨 곳에서 도마뱀을 몇십 배나 키운 듯한 탈것에 탄 검은 비늘의 사비족과 상아색 비늘의 사비족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이 나와 있는 걸 본 두 사비족, 구주의 독니 대수령과 쿠클린은 일직선으로 환인에게 달려가 그의 앞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성제님을 뵙소.=
=성제님을 뵙습니다. 건강하신 듯해 안심입니다.=
희게 웃는 상아색 비늘의 동글동글한 쿠클린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구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 봤을 때도 주둥이 부분이 용을 닮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두상까지 전체적으로 서양의 용을 닮은 모양새다.
게다가 검은색 무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울퉁불퉁한 골격. 근육이 아니라 갑옷을 입은 것처럼 우둘투둘한 형태가 옷 위로 잡혀있다.
“상위종이 되었군.”
샤스라와 같이 진정한 상위 종족인 용린족이 아니라 여타 사비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용인龍人 형태의 용린족이다.
=성제님과 마주한 경험이 깨달음으로 다가왔었소. 감사드리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여전히 희게 웃고 있는 쿠클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뭐지. 연락은 아영을 통해서 하기로 했을 텐데.”
=나사라트의 암살단 괴멸의 성과를 보고하고 혹시라도 벨티칼 내부 사정을 모르실 것을 대비해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나사라트 따위는 관심 밖이다. 벨티칼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잠적해있던 4개월간 특별한 일이 발생한 건가.”
=특별한 일이라면 일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서두를 꺼낸 쿠클린은 환인에게 능력을 써도 괜찮을지 허락을 먼저 구했다.
그러라 하자 두 손에 달빛을 모으는 쿠클린. 이어 허공에 벨티칼 전도가 나타나며 곳곳에 사비족의 얼굴과 이름이 박힌다.
사진 중 일부는 푸른색으로, 나머지는 빨간색으로 테두리가 칠해져 있다.
그런 사진을 지침봉으로 가리키며 입을 여는 쿠클린.
=현재 벨티칼 내부는 두 가지 파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성제님을 규탄해야 한다는 파벌, 다른 하나는 성제님과 협력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는 파벌입니다. 둘 다 주제도 모르는 병신 놈들 집합소지요.=
히죽. 쿠클린이 웃자 안느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꼭…… 환인이 감정을 잃어버린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고 할까.
구주가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몇 가지, 사비족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성제님과 연관되어있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오. 이로 인해 규탄 파벌은 극렬하다 할 정도로 영도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있소.=
“내가 사비족에게 뭔가 했던가.”
구주는 성제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묻는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쿠클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해 조만간 아신의 영역에 들어갈 존재. 이런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
=샤스라 슈아우트 영성의 일이오. 사비족의 진정한 상위종인 용린족은 지금 내 모습이 아닌 샤스라 슈아우트 영성같이 인종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니오네브레스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지.=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인간과 닮은 모습이 진짜 용린족이란 이야기에 부족장들이 경기를 일으키는데 말입니다.=
더욱이 성제가 관여되어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 구주가 도달한 경지는 거짓된 경지라고 사비족이 아닌 다른 종족들에게 각인되어버렸다.
=규탄 파벌은 그 사실에 비늘이 곤두설 정도의 노여움을 느낀 겁니다.=
환인은 여전히 여상할 것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1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반응하다니, 참 빠르기도 하군. 나는 그자들이 전부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성제님이 다른 무지렁이들과 달리 무척이나 현명하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범인은 이 정도가 한계인 겁니다.=
키득키득 웃은 쿠클린은 또 하나 더 있다는 듯이 손가락을 세웠다.
=그러한 용린족 건에서 이어져, 백청룡 아드네빌라가 현재 미쳐서 메리아놀에 폭우를 뿌리고 있는 이 상황을 두고 성제님의 탓이며 샤스라 영성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이단이네 주장하고 있는 놈들, 그리고 샤스라 영성의 변화를 진정한 용린족으로 받아들여 성제님과 손잡고 백청룡 아드네빌라를 원상태로 돌려야 한다는 놈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냥 싸우는 건 아니겠지.”
=예. 규탄 파벌은 조사대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부족 용사들을 부추겨 패시지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드네빌라를 자극하기 위해서.”
=……맞습니다. 협조 파벌은 그런 규탄 파벌을 막아서고 있는 실정이죠.=
쿠클린이 싱긋 웃었다.
=그놈들의 암살, 저희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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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 뭔가 위쪽이 조금 시끄러운 거 같은데 일단은 평온함
귀족 - 뭔가 큰일 난 거 같음. 큰일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거 같음. 나보다 더 고위 귀족의 목이 슝슝 날아다니는걸 목격함
왕족 - 성제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개판나고 있는걸 느낌. 위쪽하고 아래쪽에서도 불온한 공기가 느껴짐. 자칫 선택을 잘못했다간 목이 달아날거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