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19화 (719/813)

719 바다신께 바치는 도시, 헤뷜트

한순간 섬광이 세상을 집어삼키며 환인은 감각 기관을 어지럽히는 극심한 파장을 느꼈다.

유원지의 여러 가지 어트랙션을 한데 섞어 끼얹는 듯한 감각 혼란.

하지만 반로환동을 겪으며 감각 기관 또한 강화되었는지 그러한 파장 속에서도 환인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윽고 세상이 한차례 물결친다 싶었을 때, 빛이 사라지며 스프라울드 공간 이동의 방과 동일한 풍경의 실내가 드러났다.

환인의 시선이 내부를 한차례 훑는다. 펠드릭스 조손이 방을 나갔나 싶을 만큼 똑같은 풍경.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법진의 좌표가 기입된 부분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여자들이 이마를 짚거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쉰다.

=으에엑, 멀미…….=

=공간 이동술법은 처음인데 느낌이 되게 이상하네.=

=초장거리 이동이라 감각 혼란이 극대화 됐을 텐데 아가씨들은 다들 멀쩡하구나? 보통은 위장 안에 든 거 다 쏟아내는데 말이야.=

=이 정도는 별것 아니니까요.=

=아니 그럴 수 있는 건 이슬이 너뿐이니까……. 대부분은 위상력으로 혼란을 가라앉히거나 저항하는 거고.=

=려강도 멀쩡하잖아.=

=쟤는 튼튼한 용인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실루를 안고 있던 노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환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환인. 술법 실패했어? 아까랑 똑같은 곳이야.」

“좌표계가 달라졌으니 성공했겠지. 나가자.”

환인 일행이 술법진을 벗어나자마자 달칵, 출입구 문이 열리며 푸른색의 펑퍼짐하지만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은 일단의 인물들이 들어왔다.

푸른색 도마뱀 머리, 초록색 이구아나 머리, 노란색 악어 머리, 회색 뱀 머리.

다종다양한 파충류의 머리를 하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비늘로 뒤덮인 종족들.

사비족이다.

2~5급의 술법사 아우라를 몸에 감은 사비족 다섯이 로브의 소매에 두 손을 마주 넣은 자세로 환인 일행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인다.

인사는 다섯 중 단 한 명뿐인 5급 물 속성 술법사에게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바다신께 바치는 도시, 헤뷜트는 여러분들의 입도를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입도 절차는 따로 없습니까.”

=스프라울드 가문의 인증이 있으시기에 입도 절차는 생략되었습니다. 밖으로 안내하여드릴 터이니 이쪽으로…….=

귀빈으로 분류되어서 5급 직업자가 안내를 나온 건가.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푸른 비늘의 사비족을 따라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이 얼마나 밝은지, 공간이동술법진이 설치된 방도 대형 광석光石 덕분에 밝은데 문이 열린 곳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바깥이 보이질 않는다.

=우와.=

=와…….=

쿠우~!

삣?

그런 출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가자 어마어마한 풍경이 일행을 덮쳤다.

머리 위에 펼쳐진 눈이 아릴 정도로 푸른 하늘. 반대로 눈이 시원해질 정도의 녹색 수림樹林이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

그리고 완만하게 휘어져 보이는, 푸른 하늘과 녹색 땅을 나누는 지평선.

대기질이 얼마나 좋은지 하늘과 땅을 구분 짓는 지평선이 쨍할 만큼 선명하게 보인다. 시야를 가리는 무엇도 없으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폐부가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호연지기를 듬뿍 키울 것만 같은 풍경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의 시선이 산 아래로 향했다.

극세필로 찍은 점보다 작게 보이는 사람들. 쌀 한 톨보다 작게 보이는 건물들로 이뤄진 문명이 산비탈에서부터 산 아래 수림까지 닿아있다.

그의 시선이 방금 빠져나온 석조 건축물을 눈에 담는다.

덩굴과 수풀로 뒤덮인 피라미드식 건축물인데 무언가 익숙한 게, 곰곰이 생각하던 환인은 지구의 고대 잉카, 마야 문명의 양식과 비슷해서라는 걸 깨달았다.

단차 곳곳에 뱀 같은 게 새겨져 있고 뱀을 숭상하는 도마뱀 머리 인간이 조각되어있는 회갈색의 피라미드.

척 봐도 대충 쌓아 만든 게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바람 하나 통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각을 맞춰 세운 정교한 건축물이다.

그러한 건축물은 이곳, 고도 5km는 될법한 산 중턱에서부터 저 아래 도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산 위를 올려다본다.

경사가 90도에 이를 만큼 급격해지며 하늘을 송곳처럼 찌를 듯이 솟아오른 산은 체감상 높이만 보자면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2배는 될법하다.

=이쪽입니다.=

환인 일행이 장대한 절경을 구경할 시간을 준 푸른 비늘의 사비족이 부드럽게 웃으며 환인 일행을 다시 안내했다.

그의 흔들리는 푸른 도마뱀 꼬리를 따라 돌포장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평저선平低船과 비슷한 배가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수로였다.

수로라기보다 운하에 가깝다. 보통은 폭 15m에 깊이 5m나 되는 것을 수로라고 부르지 않을 테니까.

=이것을 타고 도시까지 내려갈 것입니다.=

도시까지의 비탈은 경사가 40도에서 80도까지 다양했는데, 그 때문인지 수로는 S자로 지그재그로 나서 내려가는 식이었다.

수로의 유속도 빨라 보이고 수심도 깊어 보이는데 이만한 수량이 어디서 흘러나오는 걸까.

‘술법과 정령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어떻게든 수단을 냈겠지.’

귀족 전용인 것처럼 마감까지 산뜻한 평저선에 올라타자 일행을 수행하던 술법사 넷이 평저선의 모서리에 각각 자리를 잡아 손으로 수인을 맺는다.

그러자 배 밑에서 물로 이뤄진 수달에 육지 거북을 섞은듯한 물의 짐승이 나타나더니 배를 받쳐 들었다.

=조금 흔들릴 것이니 귀빈들께서는 의자에 편히 앉아 바다신님께 바치는 도시를 구경하시지요.=

일행이 갑판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니 평저선이 천천히 움직이며 수로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소환된 생명체가 배를 들고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수로의 경사가 가파르고 물살도 빨랐지만, 배의 속도는 적당한 수준.

덕분에 일행은 점점 커져가는 헤뷜트, 벨티칼의 주도를 여유 있게 구경할 수 있었다.

=왜 헤뷜트를 바다신께 바치는 도시라고 부르는지 알 거 같네.=

=그러게. 수로가 거미줄처럼 도시 곳곳을 잇고 있어.=

말 그대로 건물 반, 수로 반이다. 거기다 수로의 관리를 철저히 하는지 그 흔한 물이끼조차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것은 오직 투명하다고 할 만큼 깨끗한 물 뿐.

안느와 유르파의 자그마한 대화에 배의 방향을 조타하던 푸른 비늘의 사비족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나라의 도시에 있는 도로의 역할을 수로가 하니까요. 배를 타면 헤뷜트의 어디든지 갈 수 있답니다.=

도시를 빈틈없이 수놓은 수로 때문일까. 내려갈수록 사비족의 아이, 어른할 것 없이 수로를 따라 헤엄쳐 어디론가 오고 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좀 넓은 수로는 해마 같은 탈것과 투박한 평저선, 카누를 옆으로 늘린 배가 짐이나 사람을 싣고 많이 오가고 있다.

신기해하며 라드세아, 메리아놀, 히스론드 어디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던 안느가 웃는다.

=그거 굉장한걸. 그런데 우리가 누군지는 안 물어보네?=

=극 귀빈용 공간이동사원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명망 높은 분들이십니다. 저 같은 노예가 함부로 존함을 여쭐 분들이 아니십니다.=

노예라는 말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껏 이완된 표정을 짓고 있던 백려강이 놀랐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5급 술법사이신데도 노예…신분이시라는 건가요?=

=예. 노예들은 얼굴과 몸에 무늬를 그려 넣는 것이 금지되어있으니 알아보시기 쉬우실 거예요.=

그 이야기대로 드러난 푸른 비늘 어디에도 페인트의 흔적이 없지만, 그런 분류 방법을 물은 게 아니었는데…….

당황하는 백려강을 대신해서 아영이 대수로울 것 없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이야기해준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노예인 게 아니야. 그냥 부모님이 노예니까 자식도 노예인 거고, 한 번 노예는 죽어서도 노예로 다루어지니 5급 직업자라도 노예인 거지.=

아영의 말이 맞는다는 듯이 작게 웃고 있는 푸른 비늘의 사비족.

=하, 하지만 5급 직업자면 다른 나라에서는 기사급으로 대접받을 텐데…….=

=벨티칼의 노예는 라드세아에서 남자가 여자를 취급하는 거랑 같은 문화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의문을 제기해봤자 의미가 없어.=

=성술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또, 다른 국가에서 준기사 취급을 받을 수 있다지만 사비족은 벨티칼을 벗어나면 살기 힘드니까요.=

사계절이 뚜렷한 곳일수록, 남쪽이나 북쪽으로 치우친 곳일수록 사비족은 살기 팍팍해진다. 어느 정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지만 토대가 변온 동물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그나마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여름이라도 일교차가 심한 곳은 아침마다 힘들고 겨울에는 신체 능력이 80% 가까이 감소한다.

이뿐만 아니라 습기가 적다면 비늘이 쩍쩍 갈라져 피가 흐르기도 하고,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 심각한 비늘 병이 발생하며 탈피하는 것처럼 일어나 비늘이 온통 떨어져 나간다.

거기서도 계속 내버려 둘 경우 비늘이 자라는 게 아니라 가죽이 경질화 되며 최악에는 석화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끝내는 죽고 마는 것이다.

벨티칼이 아닌 열대지방이라 해도 물이 적은 곳은 역시나 살기 힘들고 그건 돈 없고 신분 낮고 능력이 없을수록 두드러진다.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비족은 수분이나 체온을 유지할 마도구, 연고 같은 걸 쓰지만 그게 안 되는 사비족은 그냥 쇠약해지다가 죽는 길뿐이니까. 생김새도 대륙 주류 인종에서 벗어나 있는 편이고.=

무덤덤하게 설명하는 아영의 이야기에 백려강이 당황해서 여러 가지 표정을 짓다가 푸른 비늘의 사비족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말한 걸 용서해주세요….=

=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만 노예이지, 아가씨 말씀대로 5급 술법사인 저는 평민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분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요.=

사과가 정말 난감한 듯 난처하게 웃는 사비족.

환인은 잠시 사과하는 백려강과 난감해하는 사비족을 바라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시로 고개를 돌렸다.

공간이동술법진 부근에서 일하는 사비족이다. 말이 노예지 평민은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겠지.

옛날에도 정승 집 머슴은 평민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 했으니까.

‘그보다 술법진 관리는 국가에서 맡는 게 아닌가.’

아무리 봐도 저 노예 사비족은 국가 소속 공인 노예가 아니라 특정 가문이나 인물에 소속된 개인 노예 느낌인데.

도시에 거의 도착하니 도시 전체가 좀 더 눈에 잘 들어온다.

환인은 사비족에게서 고개를 돌려 헤뷜트를 눈에 담았다.

지구의 어떤 도시처럼 물의 도시라고 부를만한 풍경이다.

구획마다 크고 작은 수로가 지나가고, 구획과 구획을 이어주는 아치형 다리에 수로를 오가는 평저선, 그리고 그런 풍경이 일상인 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비족들까지.

여러모로 다른 나라의 도시와 차별성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게다가 아무리 주도라지만 눈에 띄는 인종의 99%가 사비족이라는 게 조금 특이하다.

직접 가본 니오네브레스의 주도는 히스론드의 팔라툼뿐이지만, 그곳에는 플라비우스, 루크랑, 플뢰, 프라우드 같은 기타 종족도 적지 않았다. 물론 가장 많은 숫자가 플라비우스긴 하지만 말이다.

=고등 수로역참에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척 봐도 고위 신분이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형 선착장에 배가 도착했다.

선착장이라기보단 현대의 기차역 플랫폼 같은 느낌.

환인이 먼저 내려 플랫폼의 가장자리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여자들은 쿠에들을 이끌고 차례대로 평저선에서 내린다.

환인은 본격적으로 수림과 도시를 살폈다.

아까는 단순한 풍광의 감상이었다면 지금은 정보 수집을 위한 분석. 고등 수로역참이 제법 높은 지대에 있어 살펴보기에는 문제가 없다.

‘고층 건축 문화는 없나.’

대부분 2~3층이고 그보다 높게 올린 건물은 제단이나 피라미드 비슷한 소수의 건물뿐이다.

사비족은 부족국가다. 헤뷜트도 벨티칼에서 가장 강성한 부족이 기타 부족을 이끌며 다스리는 거로 알고 있는데…….

‘왕실이나 왕궁 같은 건 안 보이는군.’

도시 공공 기관 시설도 잘 눈에 안 띈다. 저 피라미드 비슷한 건축물이 그런 역할을 하는 걸까.

어쩌면 저건 묘지 같은 거고, 공공기관이나 부족장의 저택도 마찬가지로 저층이라 다른 건물에 가려져서 안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환인이 영도에서 각국에 대해 조금 공부하긴 했지만, 시간이 적어 지배 체계나 영혼사로서 기억해둬야 하는 것 정도로만 습득했기에 발생한 문제.

‘대부족에서 사람을 보내 대기시킨 것도 아니고 벨티칼에서는…….’

환인은 잠시 벨티칼의 문화에 대해서 떠올리다가 도시를 포옹하듯 펼쳐져 있는 수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습지대와 섞여 있는지 숲 사이사이 녹색의 아름다운 저수지 등이 곳곳에 자리 잡은 게 눈에 띈다. 숲과 도시를 나누는 성벽이 없어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다.

성벽 대신 존재하는 것은 둘 사이에 500m에 달하는 공백 지대뿐.

그러한 공백 지대를 무질서하게 오가는 사비족과 사비족이 끌고 다니는 공룡 같은 짐승들. 환인은 수림을 이동하는 게 제법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수림과 도시 사이 공백지를 오가는 사비족은 많은데 그들은 전부 길을 이용하지 않고 습지나 저수지를 가로질러 똑바로 걸어오고 있다는 뜻은, 길을 이용하는 풍습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도시와 이어진 가도의 규모는 소수의 물자 운송용 정도에 그마저도 두엇밖에 없다.

이런 성벽이 없는 대도시라면 폭이 십수 미터에 달할 만큼 넓은 폭에 그 숫자도 많았을텐데 말이다.

‘제대로 된 물자 수송은 도시를 가로지르다 수림 안으로 사라지는 저 강을 이용하겠군.’

폭만 600m에 달하는 거대한 강과 그런 강을 오가는 범선, 갤리선을 잠시 구경하던 환인은 팔짱을 끼려다 짧은 팔 때문에 풀고 허리에 올렸다.

마차를 타고 이동은 가능하겠지만, 여러모로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할 거 같다.

비슷한 걸 생각한 안느가 환인의 옆에서 으음, 침음성을 흘린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도로도 안 보이고…… 사비족은 도보 이동이 주류인가?=

=네. 그래서 독충 대비를 많이 해야 해요. 특히 밤에는 무서운 독충이 활동을 많이 해서 방충 마도구가 필수죠.=

=너 그런 거 잘 알지 않아?=

=옙.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저한테 맡겨주세요. 엣헴.=

아영이 귀엽게 으스댄 순간. 바로 옆에서 못마땅해하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징그럽게 왠 민둥 피부들이래니…….=

=정말. 어쩜 저렇게 못생겼는지 잘도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네.=

=어휴~ 저 비늘 없는 가죽 좀 보라지. 불결해!=

여과 없는 인종차별 발언에 환인과 여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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