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18화 (718/813)

718 사암 도시 스프라울드

다음 날 아침.

영주가 자결했단 소식이 본격적으로 퍼지며 도시 전체가 새벽부터 술렁이고 있을 때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쿠에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향했다.

=멈ㅊ…….=

=멍청아, 관둬…! 시, 실례했습니닥! 지나가시면 됩니다악!!=

“통행세가 있지 않습니까?”

=여, 영혼사님들께는 모든 통행세 및 도시 세금이 면제입니다앗!!=

“그렇습니까. 그러면 지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악!!=

신수화 노른을 탄 환인이 여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2차 내성벽 관문에 도착하니 병사들이 학질에 걸린 것마냥 덜덜 떨며 그를 곱게 보내주었다.

멀어져가는 이쪽을 겁에 질려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에 안느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멀쩡하게 병사복을 입고 있는걸 보면 그나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인가?=

=한쪽은 급하게 모집한 신병 같고…… 다른 쪽은 언니님 말대로 같네요.=

=……?=

이실리테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녀들을 돌아보니 아영은 관문쪽을 힐끔 돌아보며 설명해주었다.

=어, 이실리테 언니는 객실에 계셨으니까요. 심각한 죄를 저지른 놈은 사형, 그보다 덜하지만 중한 범죄를 저지른 놈들은 도시에서 쫓겨났지만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병사는 파면과 벌금으로 끝났거든요. 남아있는 숙련된 병사는 그만큼 법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는 뜻이겠죠.=

=아.=

환인의 성불행을 따라나설 때 외에는 식재료 확보와 정리 때문에 계속 호텔 객실 주방에만 있던 이실리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이른 아침의 푸른 기운이 휘감고 있는 영주성에 도착하자 무너진 영주성문과 성벽 대신 임시로 세운 흙벽과 초소에서 하급 기사 하나가 사색으로 뛰쳐 나왔다.

=서, 서서서, 성제님!=

“연락을 받으셨을 줄로 압니다만.”

=물…론입니다! 이,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왼손과 왼발이 같이 나갈 정도로 긴장한 기사를 따라 정원에 들어서자 회색의 뿌연 흙먼지가 내려앉은 꽃의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총천연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던 정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너져내려 흉물이 된 성의 일부도 땅술사가 소환해둔 높은 키의 흙판으로 가려두기만 한 상태.

일부러 촉박한 시간을 주었으니 이곳을 다시 단장하고 꾸밀 생각은 하지도 못한 거겠지.

그나마 청소해놓은 듯한 영주성의 정문에 도착한 환인은 노른의 등에서 내려 사암석으로 이루어진 높은 천장의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 가로질렀다.

빛이 있었다면 밝았겠지만, 조명이 다 꺼져있어 침침한 회색의 복도를 걷고 있자니 냉기가 몸을 휘감는다.

인기척도 없고 사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오한에 가까운 서늘함.

“…….”

환인의 기감이 성을 훑는다.

범위가 대폭 늘어나긴 했지만 단단하고 두꺼운 벽을 뚫을 정도는 아닌지라 멀리 까진 살펴볼 수 없으나, 적어도 느껴지는 곳에는 성을 관리하고 손질할 하인 하녀들이 한 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영주가 자살한 마당에 멀쩡히 일상 업무에 들어갈 수 없는 일.

디전=펠드릭스가 일단은 시종인들을 전부 영주성 밖으로 내보낸 거겠지.

쇳소리를 내며 앞서서 걷는 기사를 따라 십자 모양의 갈림길 복도에 도착했을 때, 환인은 건너편 코너에서 강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멈춰 서자 고전 판타지 소설에서나 등장할법한 백발의 노인 플뢰가 보행용 지팡이를 짚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휘황찬란하다고 표현할 만큼 고고하게 회오리치는 성술사의 아우라. 그리고 순백에 황갈색의 무늬가 복잡하게 수 놓인 고색창연한 법복을 보자마자 안느가 살짝 짜증이 섞인 탄성을 작게 흘린다.

=켁.=

그 품위 없는 소리에 노인은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안느를 지그시 쳐다보며 나무랐다.

=안느 공.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늘 상기하며 행동거지를 조심하여도 부족할 판국이 아니오. 품위를 지키시게.=

=…….=

지적받은 안느가 뚱한 얼굴을 하는 사이 아영이 환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땅신 교단의 비프론 오우거투스 네메이 상급 추기경임다……. 어제 안느 언니님을 말로 제일 괴롭힌 사람이에요….=

=아영 경, 본관은 안느 공을 괴롭히지 않았소이다. 그저 신분에 걸맞은 몸가짐을 요구하였을 뿐.=

찔끔하는 아영을 응시하며 입을 열던 비프론 추기경은 한순간 환인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일렁이듯 흐르다 사라지는 것을 보곤 지팡이의 머리를 강하게 쥐었다.

방금 그 빛은 자애신을 상징하는 고귀하고도 거룩한 광채였다. 거기에 일부지만 신력神力까지 느껴졌으니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하여 신력을 품었다는 소문은 한 치 거짓도 없는 이야기임이 틀림없겠지.

비프론 추기경은 속으로 경탄했다.

‘저 나이에 아신격의 위업까지 이루다니…….’

신력이란 무엇인가. 아신격亞神格란 무엇인가.

신의 힘을 일부나마 모방할 수 있는 힘이며 신력을 쓸 수 있는 자격이다.

자격이 없는 자가 쓰려 했다간 혼이 소멸하는 고통을 느끼거나 사멸하게 되는 것이 신력이거늘, 저 어린 나이에 벌써…….

멀쩡해 하다못해 담담한 환인을 지그시 바라보던 비프론 추기경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애신님의 성은을 받드신 성제 예하께, 땅신 교단의 늙은 종이 인사 올립니다.=

“땅신 교단의 상급 추기경을 뵙습니다. 주위에서 성제라 추켜세워지는 미력한 영혼사입니다.”

=흐이익….=

앞에는 땅신 교단의 상급 추기경. 뒤에는 자애신의 시련을 통과한 영도의 대성제.

자신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누는 두 거물의 모습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달달 떨던 기사는 환인의 손짓을 보고 황급히 한쪽 벽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가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간 환인은 약간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의존하고 있는 비프론 추기경을 올려다보았다.

“들은 소문에는 깐깐하기 그지없는 분이라 들었는데 뜻밖에 성품이 강직하시군요.”

=없는 소문이 귀에 흘러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의 충고도 잔소리로 들으며 종달새처럼 지저귀기 십상이니까요.”

이야기를 뒤에서 듣던 안느의 표정이 묘해진다.

맥락만 보자면 도령이 말한 어린아이는 자신이고…… 그러니까 할배는 날 생각해서 쓴소릴 해줬다는 거야?

‘하지만 우르거 같은 녀석이라는 말은 저 할배가 먼저 했는데. 그게 다른 훈련생들 귀에 들어가서 내 별명이 됐고.’

“바쁜 와중이나 결례를 저지를 수 없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질문을 들어드리려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월의 저편으로 묻힐 작은 별이 어찌 떠오르는 태양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지나가시길.=

“…….”

=늙은이는 그저 말 안 듣는 천둥벌거숭이를 마지막으로 보려 했을 뿐입니다.=

그리 말하고는 환인의 뒤에 서서 알게 모르게 주둥이를 내밀고 있는 천둥벌거숭이를 불렀다.

=우르거 같은 녀석아.=

=아! 그렇게 부르지 말랬는데 또!=

=시끄럽다. 세상 혼자 모든 상처를 짊어진 것처럼 굴던 어린 녀석에게 이만큼 잘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느냐. 기댈 수 있는 거목을 만난듯해 좀 성장하였나 싶었더니…… 쯧쯧.=

못마땅한 듯 눈썹을 있는 대로 찡그리는 안느를 향해 끌끌 혀를 차던 비프론 추기경은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주도로 돌아갈 때에는 마음 단단히 먹어라.=

=왜요.=

반항아처럼 추기경에게 대꾸한 안느지만, 비프론은 그 대꾸를 무시하고 환인에게 안느를 잘 부탁한다는 듯이 머리를 낮추었다가 천천히 복도에서 멀어져갔다.

상급 추기경이 수행원도 없이 혼자 나왔다 돌아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뚱한 얼굴로 추기경이 사라진 복도를 째려보는 안느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어른 몸이었다면 이마에 꿀밤을 먹였겠지만, 키가 작아서 어쩔 수가 없다.

=윽! 도, 도령?=

“우르거 같은 녀석.”

=아~! 잉…….=

자신이 무척 싫어하는 별명에 입술이 댓발이나 튀어나왔지만, 안느는 차마 불평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프론 추기경의 감춰져 있던 심중을 이해 못 할 만큼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갑시다.”

=예, 예악!!=

꽁꽁 얼어있던 하급 기사를 재촉해 다시 걷기 시작하는 환인과 여자들.

안느는 환인에게 맞은 자리를 주무르며 비프론 추기경이 사라진 복도로 다시 눈길을 던졌다.

=…….=

환인이 때린 충격은 꽃잎이 내려앉은 것만 못한 정도였지만, 안느는 왠지 맞은 자리가 무척 아프다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성제 예하.=

“이른 아침부터 미안합니다. 부탁드린 것은…….”

=물론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스프라울드 영주의 집무실을 차지한 디전=펠드릭스 백작은 환인 일행이 찾아오자마자 수천 장이 넘어가는 서류의 산에서 빠져 나와 그를 영주성 뒤편의 엄중한 장소에 지어진 작은 신전으로 안내했다.

대형 광석光石을 아낌없이 써서 밤낮 구분 없이 환한 내부는 그리스 신전의 페리스타일peristyle과 흡사한 구조였다.

중앙에 약 100평가량의 방이 있고 열주가 그런 방을 빙 둘러싼 신전 식.

=이곳입니다.=

하늘과 날개를 문양화해놓은 문을 열고 들어간 환인은 먼저 리민이 적잖이 지친 모습으로 회색 쿠에, 젤프리와 함께 대기한 것을 발견했다.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지쳤지만 깔끔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완벽한 귀족 예법으로 환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리민.

하지만 그런 예법이 무색하게 젤프리가 쿠엑! 날개를 퍼덕이며 환인과 노른을 향해 날아가 격한 반가움을 드러내느라 가려지게 되었다.

‘왜 이제 왔어.’라며 반가워하는 젤프리의 부리를 쓰다듬어주고 노른에게 보낸 환인은 리민과 그녀의 뒤에서 빛을 뿜어내는 21단계의 술법진을 눈에 담았다.

21단계라는 것은 21개의 크고 작은 원이 법칙에 맞춰 배열된 공간이동 술법진의 등급으로, 이곳에 그려진 술법진은 그 지름만 십수 미터에 달할 정도.

그런 술법진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간이동에 필요한 위상력이 채워져 있다는 뜻이다.

“네가 술법진에 위상력을 채워 넣고 있었던 건가.”

=네. 선생님께…….=

선생이라 불렀다가 환인의 눈치를 살핀 리민은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 해드리고 싶어서 제가 자원했어요.=

=성내 술법사를 동원해 채워도 되는 일이지만, 성제 예하께서 가실 곳은 당분간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을듯하여 손주에게 술법진의 위상력을 보충하도록 하였습니다. 폐가 되는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각 교단의 추기경들께서 제 종적에 대해 궁금해하실 것인데, 굳이 감추려 하지는 마시고 제가 헤뷜트로 간 것을 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남긴 이야기가 없느냐 물어오실 것이니 그때는 메리아놀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에나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주십시오.”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디전=펠드릭스는 그 이야기로 자초지종을 유추하고 이후 여파까지 짚어내고서는 살짝 몸을 떨었다.

놀랍기 그지없다. 한순간 생각해낸 계획인가? 아니, 적어도 스프라울드 입도 이전…… 실종 사건이 알려지기 전부터 계획해오신 것 같은데 만약 거인숲 미궁에서부터 꾸며온 계획이라면…….

대체 얼마만큼 넓은 밑그림을 그려서 정국政局을 내다보고 있다는 말인가.

잠깐 상상해본 디전=펠드릭스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메리아놀과 영도를 포함, 라드세아와 히스론드의 움직임을 상정해야 한다면 국가별 중요 핵심 요인의 움직임을 읽어야 한다. 문제는 그들을 다 합치면 족히 수백 명.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다 예측했단 말인가.’

절대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생각에 디전 펠드릭스는 성제를 향한 두려움을 감추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시길.=

“예. 그리고 리민, 술법진을 충전하느라 고생했다.”

=네, 네.=

할아버지가 저토록 깊게 허리를 숙이는 걸 처음 본 리민도 덩달아 긴장하며 가슴께를 눌러 똑같이 허리를 숙인다.

그런 두 명에게 영기를 흘려 넣어주어 나름의 보답을 주자 그 강한 에너지에 커다란 축복을 받았다 여긴 리민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공간이동 술법진의 준비를 시작했다.

=리민 아가씨, 나도 도와줄게.=

=아, 네. 이 술법진은 아카르노라크식 21등급 극귀빈용 광역 초장거리 공간이동 술법진이에요. 이쪽에 이동할 장소의 좌표식 목록이 있고 이걸 에노렘 파장의 x37.495673, y126.543460, z37.501482, 기밀 신호 1q2w3e4r에 맞춰 변환한 뒤 공명식을 설정하면…….=

혹시나 리민과 디전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의심한 유르파가 리민에게 붙어 술법진 설정을 빠르게 맞춰나간다.

유르파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환인도 눈치챘지만,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 쓰여 확인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으니까.

두 사람이 술법진을 준비하는 사이 환인은 옆에 서 있는 디전=펠드릭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펠드릭스 백작님. 젤프리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것이…….=

환인은 그 일이 있고 바로 젤프리를 주인에게 돌려보냈었다. 사건을 일으킨 핵심 소재를 데리고 있으면 이래저래 문제가 될 여지가 많으니까.

그랬는데 젤프리를 돌려보낸 다음 날, 마그나르 가문에서 곤란하다는 연락이 영주에게 올라왔었다.

돌려보낸 젤프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삼아버려서 이쪽의 인사들 누구도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영주에게까지 보고를 올려야 하나 싶지만, 그 젤프리가 주인으로 삼은 대상이 성제다.

=거기다… 돌아와서는 옛 부하들을 두드려 패고 새 대장을 공격해 때려 눕혀놓고서도 성을 향해 울기만 하는 데다 툭하면 탈출하려고 한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상담을 요청하더군요.=

쿠에 대장을 때려눕히기만 하고 대장 자리를 빼앗지 않으면 쿠에 축사의 질서가 엉망이 된다.

그렇다고 젤프리의 위상을 깎아내는 것도 어려운 게, 히아리드 대평원에서 몇 달간 홀로 생존한 데서 알 수 있지만 젤프리는 회색 쿠에 중에서도 굉장한 우량종이다.

그 사고가 있기 전에는 쿠에 축사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던 개체였던 거다.

또 엉망이 된 분위기에 위축된 서열 낮은 쿠에들이 번식을 안 하려 하는 것도 큰 문제.

쿠에를 번식시켜 기승용으로 키워내는 것을 업으로 삼은 마그나르 가문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아니라 운석이 떨어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 상담이라니, 일견 이해가 가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작정 환인에게 젤프리를 바치자니 스프라울드 사태를 촉발시킨 게 마그나르 가문 소속의 초소장이다.

당시 초소장과 그와 연관된 병사들 전원 참수되는 것을 본 환인은 마그나르 가문에 대해서 신경을 껐었다. 연좌제로 관계자 전원을 처벌한다면 범법 기록을 살펴보고 재판을 치르는 게 아니라, 청령주로 스프라울드를 지워야 한다.

향후 계획을 생각하면 무작정 그럴 수는 없었던 거다.

그랬기에 죄가 있다면 재판에서 목이 떨어질 것이고 없다면 살아남을 테니 환인은 초소장의 오체분시 이후 마그나르 가문에 대해서는 신경을 껐다.

영양가라고는 없는 일, 더욱이 짜증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만큼 성가시고 귀찮은 일은 없으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여자친구들의 품에 안겨 휴식하는게 100배는 능률적이지.

그러나 마그나르 가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프라울드 사태를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영주만큼이나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욕을 먹고 있는 곳이 마그나르 가문이다.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성제와 관계를 회복해야한다.

마그나르의 가주는 필사적으로 환인과 면담해서 상납품을 올리고 사죄하고 싶어 했지만 환인은 받아주지 않았고, 이러한 과정 끝에 마그나르 가문의 가주가 젤프리의 건으로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대신 좀 어떻게 해달라고.

쿠에~, 쿠쿠.

쿠엑?

쿸쿠. 쿠에엣.

쿠엑!

환인은 이런 역학 관계를 생각하며 쿠르티와 뭔가 사이좋게 쿠쿠거리는 젤프리를 보았다.

현대에서 쪼끄만 사이즈로 돌아다닐 때 어쩐지 쿠르티와 붙어있더라니 뭔가 사이가 잔뜩 진전된듯한 모습. 젤프리가 쿠르티에게 구애하는 형태지만 쿠르티도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는지 젤프리의 치근덕을 은근히 즐기는 투다.

환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펠드릭스 백작에게 물었다.

“마그나르 가문에서 초소장 이후로 참수당한 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내키지 않지만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금화를 꺼내 젤프리의 값을 넉넉히 치르려는데, 오히려 펠드릭스 백작이 먼저 귀중해보이는 아공간 주머니를 두 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자진한 뮬트라크 스프라울드 영주의 비자금과 사적 자금 전체로 성제님께 영주 일가가 바치는 기부금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그나르 가문이 성제님께 바치는 기부금입니다.=

“…….”

이걸 받고 용서해달라는 뇌물이 아니냐고 환인이 눈빛으로 찌르자 펠드릭스 백작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그나르 가문은 차치하고, 죄를 지은 부모를 둔 것이 죄라면 영주 일가의 식솔도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영주 일가는 선량한 귀족이었습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내지 않고 가벼운 실수는 용서로 넘어가며 시종인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결정은 자신이 할 일이라는 이야기에 환인은 영주의 기부금 주머니만 집어 들어 아스펜드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마그나르 가문이 바치는 기부금 주머니 위에 금화 100닢을 올려놓는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그나르 가문에 전하겠습니다.=

하얗게 센 얼굴의 디전=펠드릭스가 작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한순간 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는 걸 봤지만 환인은 신경을 껐다.

그가 마그나르 가문을 집어삼키든 쿠에 육성 유통권을 마그나르 가문에서 빼앗든 그가 알 바는 아니니까.

그 과정에 마그나르 가문의 입지가 스프라울드에서 매우 좁아지다 못해 명맥이 끊어질 테지만 알게 무언가.

쿠엑~

크흥.

쿠르티와 젤프리가 꽁냥거리는걸 구경하며 잠시 기다리자 유르파와 리민이 만지던 거대한 술법진이 분홍빛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웅웅웅웅— 금방이라도 발동할 것처럼 몸이 살짝 떨릴 정도의 묵직하고 낮은 음파를 흘리는 술법진 앞에서 유르파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기, 준비 끝났어. 시동어만 외우면 술법진이 발동할 거야.=

그런 그녀의 뒤에서 리민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다. 그녀의 박식함에 굉장히 놀란 눈치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일행을 끌고 술법진의 중앙에 올라가자 디전=펠드릭스와 리민=펠드릭스가 술법진에서 멀찍이 떨어진다.

“빼먹은 건 없나.”

=없어요, 주인님.=

“잊은 것은?”

=없어. 이슬이랑 율이 언니하고 세 번 네 번 확인했어.=

여자친구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상태를 살핀 환인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디전=펠드릭스 백작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펠드릭스 백작도, 리민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그러자 오른손을 들어 위상력을 결집시켜 파장을 술법진과 연계하는 유르파.

정신을 집중해 술법진의 발동 키를 위상력으로 완성해갈수록 그녀의 손에 결집된 위상력은 점차 푸른 빛의 동그란 3차원 마법진으로 변형되어가고, 그와 함께 술법진에서도 분홍색의 빛이 방출되는 양이 점차 많아진다.

이윽고 술법진의 광량이 절정에 달해 방 전체가 분홍색으로 물들었을 때.

=kar thveudamnaer avkas!=

유르파가 짧게 세 단어를 입에 담았다.

* * * *

파앗—!

=……푸우우.=

환인 일행이 술법진 위에서 섬광과 함께 사라지자마자 디전=펠드릭스는 체면도 없이 쭈그려 앉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제의 존재감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로가 이틀 철야 서류 정리를 한 것보다 더욱 크다.

비슷한 상태인 리민도 그의 옆에서 쪼그려 앉아 하아…… 짧게 숨을 내뱉었다.

=선생님은 작아졌어도 여전히 거대해 보였어요. 아니…… 작아지기 전보다 더욱 크게 느껴진 거 같아요.=

=인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니 그럴 수밖에. 오죽하면 8급의 벽에 다다랐다고 알려진 땅신님의 주먹께서 홀몸으로 성을 찾아왔겠느냐.=

비프론=오우거투스=네메이 상급 추기경은 맨주먹으로 우르거를 일격에 때려죽이는, 땅신 교단을 대표하는 3인 중 1인이다.

그런 사람이 혼자 움직였다는게 무얼 뜻하겠는가.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인 리민은 선생님이 전달하라 한 말을 추기경들에게 전달하면 사대 교단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생각하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전쟁 물자를 매점하실 거예요?=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리 조건을 검토하고 역대 전쟁사를 고려해봐도 일반적인 전쟁이 벌어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전쟁 물자를 사놓는 것은 빚을 떠안는 지름길이라 판단돼요.=

=정확하다. 이미 일반적인 전쟁 양상의 구도가 아니야. 신의 대리인이 되실 성제님이시다. 그러기에 충분한 힘과 역량도 이미 갖추셨으니 앞으로 벌어질 일은 일방적인 철퇴가 메리아놀에 쏟아지는 식일 테지.=

=메리아놀에도 대영웅, 영웅들이 많고 사도님도 계신데요?=

=정치와 가문과 혈연과 인맥과 종족에 얽매인 그들이 얼마나 연계를 할 수 있겠느냐. 그마저도 4대 교단이 참전하기 전의 이야기다.=

디전=펠드릭스의 머릿속에 시커멓게 죽어가던 데바스톤 산맥 초입, 환인 성제가 실종되자마자 나타났던 지역을 떠올렸다.

그건 틀림없이 성제님이 펼친 기술일 터. 그런 게 메리아놀에 몇 개만 생겨도 국가로서 몰락할 수밖에 없다.

주도는 사도와 영웅들의 영역이라 제외해도 최대 곡창지대에 항구, 항만마다 하나씩만 펼쳐도 메리아놀은 한여름 가뭄이 든 밭의 작물처럼 메말라버리겠지.

스윽, 몸을 일으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디전=펠드릭스.

도저히 그 나이대의 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정함이 몸에서 흘러나온다. 환인이 부여해준 영기 덕분이다.

=산사태는 이미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얼마나 적절히 대응하느냐의 문제이지만, 나로서도 성제님이 얼마나 많은 계략을 꾸며놓으셨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메리아놀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피해는 산더미처럼 불어나겠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함께 일어나 할아버지의 이어질 말을 잔뜩 긴장하며 귀 기울이던 리민은 잠시 후 들려온 이야기에 맥이 탁 풀렸다.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는 거다.=

=할아버지…….=

정말 그게 맞는 거냐는 의구심 담긴 손주의 표정에 디전=펠드릭스는 자상한 미소로 그녀의 머리를 다독였다.

=태풍이 몰아치는데 날아다니는 참새는 없다. 돈벌이와 신분 지위 향상의 기회를 잡는 것도 사람이 일으킨 인재일 때나 가능한 일. 규격 외, 천외천의 존재가 분노해 날뛰는데 곁에서 얼씬거리다간 벼락 맞아 죽기 십상이지. 리민, 기억해두거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어설 때와 엎드릴 때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조부의 경험담과 자신의 경험을 관통하는 이야기에 리민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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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다음 화부터는 벨티칼 편이 시작됩니당!

그리고 내일은 부모님의 기념비적인 생신이라 집안 행사가 예약되어있어서... 연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ㅠ

노력해볼테지만 만약 업로드가 불가능할 것 같으면 공지로 휴재를 올리도록 하겠읍니당.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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