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 사암 도시 스프라울드
환인은 은연중에 기세를 흘리며 유르파의 품에서 내려와 흠칫거리는 영주에게 말을 걸었다.
“스프라울드의 영주 되십니까.”
=그… 그렇…….=
=저기 계신다!! 기사단! 몸을 던져서라도 막앗!=
마악 대화가 이루어지려던 찰나, 뒤늦게 도착한 도시의 기사단이 중무장 차림으로 출현하며 고함을 지른다.
기사단장을 포함한 남은 사암 기사단 79명의 총출동에 뮬트라크 영주는 찹쌀떡으로 명치가 꽉 막힌 것처럼 어버버거렸다.
막는다니 누굴?! 공성용 방벽 술법진이 새겨진 8.5m 두께의 성벽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저들을?!
=어헉. 아, 아…니! 멈추……!=
멈춰, 이 병신들아……!
영주가 허걱하고 침을 튀기며 막으려 했지만, 이실리테와 안느가 귀신같은 살기와 패기를 뿌리며 사암 기사단과 충돌하는 게 먼저였다.
꽈과과광!!
=으아악!=
=끄악…!=
=아아아악……!=
팔다리가 잘리거나 사지가 부러져 기승룡, 혹은 기승용 쿠에와 함께 볼링핀처럼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가는 스프라울드의 핵심 전력들.
특히 영지 유일의 7급 전사인 기사단장은 검조차 뽑지 못하고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 세 자루에 일순간 전신 76곳을 베여 무력화되었다.
허옇게 빛나는 세 자루의 검이 휘몰아치는 그 모습은 하나의 칼날 폭풍.
=이, 이탈하……!?=
단 한 번의 격돌로 최강 전력인 기사단장을 포함, 16명이 박살 나자 화들짝 놀란 기사들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지만.
=…….=
전투를 포기하지 않는 모양새에 뿌득, 이를 간 이실리테는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다중 검기를 발판삼아 뛰어오른다.
이어 기사들을 징검다리삼아 날아다니며 추격, 검집으로 기사검을 휘둘러 얼굴을 박살 내거나 허리를 분지르고 날개를 꺾어 내동댕이친다.
=…….=
그때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던 백려강도 살기를 버무린 눈빛으로 벼락 화살을 쏘아 날아오른 플라비우스족 기사들을 총 맞은 참새처럼 떨구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우르르릉— 꽈과과과광!!
끄가가각……!!
사,살려… 아갸갸갸갹!
비교적 사지 멀쩡하게 추락한 기사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콰광, 퍽! 콰직!
으기기긱…!! 살려… 으아아악…!
꽈르르릉! 터덩, 콰과광! 쿠궁!
살기를 뿌리는 안느에게 사지가 부러지거나 뭉개져 피떡이 되는 것이다.
기사들이 추락하며 내지르는 비명에 우렛소리와 감전당해 토해내는 악다구니, 갑옷이 부서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무하며 아름답던 정원이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데는 불과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 두 명에게 기사단이 박살 나는 것을 직관 중인 영주 일행이 다리를 후들거린다.
환인은 그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는 유르파와 아영, 이모렐, 노른.
「너희들. 나와서 환인 좀 지켜줄래?」
거기다 노른의 깃털 속에 숨은 환연이 부탁하자 물, 바람, 땅, 빛, 번개, 풀, 꽃, 수목의 상급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환인의 뒤에서 배경처럼 늘어선다.
도시 하나는 가뿐하게 밀어버릴 전력에 그것만으로도 영주와 가신 일동은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
환인의 분노에 감응한 심핵력과 더더욱 순수해진 영기가 아신격의 초월자 풍모를 자연스럽게 뿌리기 시작했다.
영주와 가신들은 파리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비 오듯이 줄줄 흘리며 비틀비틀 무릎을 꿇었다.
그들도 중급 도시의 지배자 가문의 주인이자 가신들. 영웅이라 부르거나 직업자를 초월했다고 평가받는 자들과 얼굴을 몇 번 맞댄 경험이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한 기도를 가진 일대 영웅이라 칭하기 부족함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눈앞의 소년은, 성제는 그런 자들과 궤를 달리했다.
마주 서 있기만 해도 심령이 위축되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그야말로 절대자의 기백.
디전=펠드릭스와 리민=펠드릭스는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만 한 수준인지를 비상한 눈치로 꿰뚫어 보곤 영주의 근처에서 슬쩍 떨어져 눈치껏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스프라울드의 영주는 식은땀으로 목욕하는 것 같은 몰골로 환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뒤로 아직도 하늘을 꿰뚫으며 웅장한 기파를 뿌리는 거대한 빛기둥이 보이고, 그 탓에 성제의 얼굴에는 기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데…….
=허억, 헉. 허어억.=
황금빛으로 빛나며 황금색 광채를 줄줄 흘리는 살벌한 두 눈과 마주했더니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진짜 숨통이 잡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거기다 고개는커녕 눈조차 돌릴 수가 없다.
=허어억, 허어어억…… 흐어어……….=
영주는 가슴을 움켜쥐고 까매진 얼굴로 1km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어깨로 숨을 몰아쉬다가 눈을 까뒤집고 흙먼지가 묻은 잔디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초월격인 아신의 영격을 달성한 환인의 기운 집중과 주시를 일반인인 영주가 견디지 못하고 까무러치고 만 것.
가신들의 상태도 까무러치지만 않았을 뿐이지 영주와 상태가 비슷했다.
하나같이 퍼렇게 질렸거나 안색이 까매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부들부들 떤다. 일부는 게거품까지 흘리고 있다.
환인은 반쯤 죽어가는 자들을 조용히 응시하다 푸른 머리카락과 피부가 아름다운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보았다.
“이들에게 물 좀 뿌려주시겠습니까.”
「후후훗.」
펑! 촤아아악—!
그녀의 웃음과 함께 허공에서 수백 킬로그램 무게의 물덩어리가 떨어져 영주와 가신들을 타격했다.
=으켁!?=
=어커걱…!=
=푸아아압?!=
파도 풀에 휩쓸린 것처럼 떠내려가는 영주와 가신들.
첨벙첨벙첨벙.
그사이 기사들을 모조리 박살 내고 돌아온 이실리테, 안느가 떠내려오는 자들의 멱살이나 목줄을 잡아 환인의 근처로 휙휙 집어 던진다.
털썩, 쿵. 철퍼덕—
=으억! 컥.=
=악…!=
흙먼지가 뒤섞인 구정물에 구르고 굴러 눈부신 금발도, 구름처럼 하얀 날개도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덕분에 정신은 차린 자들은 구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벌벌 떨면서 환인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들의 뒤통수로 환인의 여리지만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꽂혔다.
“다시 묻겠습니다. 스프라울드의 영주가 맞으십니까.”
=예에옛! 맞, 맞습니다! 제, 제가 여여영, 영주, 영주입니다!=
“찾아갈 수고를 덜었군요.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과분하게도 많은 분의 사랑을 받으며 성제라 불리고 있지요. 아, 지금 이 모습은 자애신님의 시련을 통과하며 변한 모습이니 오해는 마시길.”
=……?!!=
=………!!!!=
“영주께 묻겠습니다. 제가 왜 당신을 찾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자애신의 시련을 통과해 은혜를 입은 모습.
그 문장에 가주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것 같았지만,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뿌드득- 잔디를 쥐어뜯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성제가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는 저 녹색의 짐승, 아니 짐승이 아니라 성제가 데리고 다닌다는 신수……에게 들었다.
자신의 도시 감옥에 갇혔다. 심각하다 못해 자신의 귀족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성제는 무척 온화하고 욕심 없는 성품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주도의 천왕 폐하 두 분을 사심 없이 치료한 뒤 별다른 대가조차 바라지 않고 주도를 떠나셨을 정도로(루머다).
그런 분이 착오로 감옥에…… 물론 죽을죄를 저지른 거지만! 그, 그런 분이 착오로 벌어진 일에 이토록 분노하실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럼 왜?! 설마 휘하 가신이나 기사…… 아니면 병사가 엄청난 모욕을…….
연상작용으로 가주는 얼마 전 올라왔던 하나의 보고를 기억해내곤 이제는 죽음의 공포에 날개까지 벌벌 떨기 시작했다.
‘간수 하나가 여죄수에게 손을 댔고, 그사이 방심한 간수와 병사를 살해한 여죄수가 탈주하였으나 추적 후 사살 조치하였습니다.’
‘(한숨) 알아서 처리하고 같은 일 안 일어나게 해.’
‘옛!’
설마아…! 성제님의 영혼 기사에게……!!
성제의 주변 여자들은 단순한 영혼 기사를 넘어 그가 아끼는 여인들이란 소문이 무성하다. 만약 그런 거라면…….
=요, 용서, 용서해주십시오…! 어리석고 불민한 자들이 벌인 일을 전심전력으로 사죄드리…겠, 습니다……!=
“…….”
=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하여… 그에 걸맞은 벌을 내릴 테니 부디, 부디 자비를…….=
“…….”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가주와 가신 일동은 입안이 바짝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뒤통수로 쏟아지는 위압감에 고개를 들기는커녕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 거기다 환인의 기백에 위축당해 사고력은 물론 감각도 절반쯤 마비되어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자신이 제대로 엎드려 있는지 감각 기관에 혼란까지 오고 있다.
1분 1초가 하루 1시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자결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릴 채울 무렵 환인의 입술이 떨어졌다.
“제가 스프라울드를 방문한 이유는, 대평야에서 주인을 잃고 홀로 헤매는 회색 쿠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속 명판을 보니 스프라울드 행정처에서 발행한 것이라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
참방참방.
환인은 머리를 젖은 땅에 처박고 있는 기사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가방, 당신이 가져가셨지요. 돌려주십시오.”
=…….=
기사는 옆에서 날아오는 가주와 가신들의 수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에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영주에게 바치려다 시기를 놓쳐 주지 못했던 고급 손가방을 덜덜 떨며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그 가방, 아스펜드를 받아 허리에 찬 환인은 “고개를 드십시오.” 가주 일동이 자신을 보게 한 뒤 아스펜드의 출납 기능을 이용해 금속 명판, 유르파가 봉인해놓은 마도구를 소환해냈다.
=……!!=
유물 손가방의 증거에 가주와 가신들은 다시 한차례 떨었다. 성제의 소지품, 그것도 유물인 가방을… 갈취했다니…….
춥다. 추워서 이빨이 딱딱거리고 몸이 벌벌 떨린다.
“이것이 반쯤 부서져 회색 쿠에의 목에 걸려있던 겁니다.”
=헉, 허억. 헉…….=
숨을 몰아쉬며 검은색 계통의 금속 명패를 받아든 가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패를 뒤집어 보았다.
맞다. 자신의 도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그나르 가문의 표식도.
“아시겠지만 회색 쿠에가 귀중하다고는 하여도 돈이 있다면 구하지 못할 쿠에는 아닙니다.”
쫘라라라랑, 쫘랑, 땡그랑, 탱—
갑자기 허공에서 쏟아지는, 하급 백작인 그로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인 금화의 산.
저 정도면 회색 쿠에로 기사단을 꾸릴 수도 있을 정도의 거금이다.
“그리고 제게는 여행 초기부터 함께 해온 가족 같은 쿠에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쿠에를 잃어버렸을 분의 슬픔을 생각해 선의로 데려왔지만…….”
으득—
환인이 이를 가는 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던 가주 일동은 기운으로 온몸을 난자당하는 느낌에 눈동자가 극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저의 해명조차 들으려 하지 않고 우리를 포박, 구속해서 재갈까지 물려 지하 감옥에 집어넣으시더군요.”
=…….=
=…….=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소를 맡은 분의 이야기에서 마그나르 가문의 귀중한 후손이 살해당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자식이 살해당한 슬픔은 부모를 잃은 아이에 비견될 테니 이해합니다. 하지만!”
화들짝.
여자친구들에게 폭언을 쏟아붓던 장면을 떠올린 환인은 한순간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분노에 영기와 심핵력을 손에 맺어 마치 허공을 할퀴듯, 무의식적으로 영주성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과과곽……!!!
그러자 허공에 네 줄기의 거대한 황금빛 발톱 자국이 생겨나며 성의 언저리 일부를 잡아 뜯어버린다.
쿠궁, 콰과과광—!
작은 산만한 호랑이가 할퀸 것처럼 굉음과 먼지, 돌가루를 뿌리며 일부가 붕괴하는 성.
영주와 가신들은 등 뒤로 성이 무너져내리는 소리에 뒷골이 쭈뼛거려 숨도 쉴 수 없었다.
내성벽의 수성용 방어 술법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의 파괴를 막기 위한 강화 술법이 곳곳에 걸려있는데 그걸……!
=……??=
=……?!=
그 현상에 놀란 것은 환인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라 저건 또 무슨 능력인가 하고 눈을 크게 뜨는 여자들.
환인도 잠깐 놀랐지만, 먼지만큼도 티를 내지 않고 분노한 기색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런 죄 없는 순결한 제 연인들에게 간수들은…… 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쏟아붓더군요. 갈보니 창녀니, 함부로 다리를 벌리는……!”
주먹을 꾹 쥐고 분노와 모멸에 찬 목소리로 살기를 쏟아붓는 환인의 모습, 그의 손목에 일순간 시선이 간 영주의 안색은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이어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뻐끔거리다 땅에 이마를 퍽퍽 박기 시작한다.
가신들도 똑같은 것을 목격하곤 영주와 같이 이마 살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퍽퍽 땅에 이마를 찍기 시작한다.
=죄송…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아악!!=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예하아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아!!=
쿵! 쿵! 쿵! 쿵쿵쿵!!
저 손목에 쓸리고 부어오른 자국, 밧줄로 인한 흔적이 틀림없다.
영혼 기사가 그런 모욕을 당한 것도 영도와 외교 분쟁이 벌어질 만큼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도 성제의 몸에…… 5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된 자애신님의 시련을 이겨낸 성제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거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진짜, 진짜 왕실 기사단과 영도의 영혼 기사단이 군대를 꾸려 일제히 쳐들어와 영주 일족의 목을 매달고 구족을 멸해도 이상할 게 없는 대사건.
아니, 왕실군과 영혼 기사단이 아니라 성제의 손에 영지와 영주 일가가 정화되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인 것이다.
“…….”
환인은 이마 가죽이 찢어져라 박는 귀족들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뭐, 목적이 분명한 몰아붙이기였고 협박이긴 했지만 이렇게 발악하듯 사죄를 구하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
‘그러고 보면 자애신에게 인정받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을 때부터 상태가 조금 이상해졌지. 그거 때문인가.’
신과 신비와 마법이 실재하는 세상. 그리고 신의 인정을 받은 인물.
그렇군.
환인은 아직 빨갛게 부어있는 손목, 밧줄에 묻은 세균이 살짝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빨갛게 부은 손목을 보고 머리를 쿵쿵 박는 자들에게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다면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뚝.
머리를 박던 자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춘다.
똑, 또옥… 똑…….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원에 내려앉은 침묵을 간신히 밀어낸다.
평범한 자들이 이런 소릴 했다면 귀족의 명예를 모욕하느냐며 펄펄 뛰었겠지만, 상대는 메리아놀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싸우려는 인물.
게다가 방금 보기에는 정말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무위를 선보였다.
상대는 신의 시련을 받은데다 신분도, 능력도, 힘으로도 밀린다. 여기에 명분마저 없으니 뮬트라크 영주는 정말 목에 칼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입을 열거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칼이 휘둘러져 목이 뎅겅 하고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
그 속에서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힘으로 탈출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오해가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제 연인들도 영주의 폭도 같은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
“저와 제 기사들이, 연인들이 이런 일을 겪을 정도인데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은 어느 정도겠습니까.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한 채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영주는 결단코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 개라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런 일이 없다고 하늘신님의 신상 앞에서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
새, 생각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영주는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졌다. 생각하기 무서워졌다.
환인은 그런 영주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주며 그가 산채로 지옥을 충분히 구경할 시간을 준 뒤 말을 이었다.
“영주께서는 조금 전,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하여 그에 걸맞은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지요.”
=그, 그, 그렇습니다…….=
“이틀 동안 영주께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시는지 지켜보겠습니다.”
=……!=
먹구름으로 가득한 앞길에 광명이 비추듯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한 영주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아온다.
그런 영주에게 환인의 사형 선고가 날아가 꽂혔다.
“대충 겉핥기로만 관계자 일부만 적당히 처벌하고 넘어갈 생각이라면,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부탁드릴 수 있는 모든 분께 부탁드려 영주가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처벌을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
“그렇다고 죄 없는 이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여 해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제가 걸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잘 아실 영주님이시니, 그러지 않으시겠지만요.”
=아…….=
영주는 깨달았다.
성제는 지금 ‘저들의 책임자인 너 또한 처벌 받아야 할 것이다.’고, 자신을 비롯해 조금이라도 죄가 있는 자들은 죽음이나 죽음에 가까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일가친척들 모두 대대적인 역모 혹은 내란 선동죄 같은 죄목으로 주도 팔라툼에서 처형되어 광장에 효수되겠지.
그리되면 자신의 대에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스프라울드 가문이 사라지게 된다.
금발이 멋지게 찰랑대던 뮬트라크 영주의 머리카락이 급격하게 푸석푸석해지며 바람에 숭덩숭덩 빠져 흩날린다.
잘 먹어서 매끈하던 얼굴은 축축 늘어지는데다 노화의 증후인 주름살이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체격까지 왜소해지며 순식간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몰골이 되었다.
환인은 쏟아놓은 금화를 손짓만으로 간단히 수납한 뒤 원기가 크게 상해 한순간 수십 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영주,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넋이 나간 가신들을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려 시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스프라울드는 환인의 눈에 지중해의 아름다운 마을처럼 온통 상아색 벽에 원색적인 지붕을 덮어 밝고 화려한 도시였다.
근처 산맥에 노천 광산 등이 보이던데 그곳에서 채굴한 석재로 도시를 만들고 꾸민듯한 풍경.
=그, 그그그럼 펴, 편히 쉬시길 바라오며 요, 용무가 있으시면 이곳의 끈을 당겨 불편사항을 말씀하여주십시오! 즉시 룸 메이드가 교정을 하여드릴 것입니다!=
=응. 우린 조용히 쉬다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예, 예엣!!=
=그리고 도시의 기사 아무나 좋으니까 하나둘 좀 불러줄래? 성제의 호출이라고 하면 될 거야.=
=예엣!!!=
그런 도시의 크고 단정하며 숙박객 보호 서비스가 뛰어나 보이는 고급 호텔에 투숙한 환인은 안느가 지배인과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소파로 가서 앉았다.
‘몸이 정말 약해졌군.’
다리가 아프다. 걸어 다녀서 아픈 게 아니고 영혼을 강령한 뒤 간수와 병사들을 걷어찬 충격이 다리에 남은 거다.
허벅지와 무릎을 조물조물 만지고 있으니 여자들이 회수해온 소지품의 확인 작업을 개시한다.
=언니들. 이쪽 잡화 가방은 괜찮아요….=
=식자재와 음식 가방에 손댄 흔적이 있네요. 여기 든 건 전부 버리고 새로 장만해야겠어요.=
=손대면서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르니까. 으음, 판매용 마도구 가방도 건드렸나 보네. 위치가 좀 바뀌었는데…….=
=어! 술 가방 안의 술이 몇 병 없어졌어!=
=네가 마시고 깜빡한 거 아냐?=
=아니거든! 다들 사라진 거 잘 확인해서 나한테 말해줘. 좀 있다 기사놈들이 오면 찾아내라고 해야 하니까.=
언니들과 함께 자기 소지품 가방을 확인하던 아영은 옆에 앉은 백려강에게 속닥였다.
=벨. 아까 오빠 완전 대박이었지 않아?=
=응…? 아 응. 하급 백작이면 정치 괴물이라서 언변도 능숙했을 텐데…….=
그의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시종일 허둥거리다 마지막에는 사람이 폭삭 늙은 것처럼 변해버렸다.
얼마나 힘과 신분, 화술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사람을 그렇게 숨죽은 채소처럼 만들어버릴 수 있을까?
=그거 보니까 별 얄구진 소릴 들어서 쌓이던 짜증이 확 풀렸다니까 진짜.=
=후후. 나도 그랬어. 그러고 보니 아영은 카락스 출신이니까 더 그랬겠네.=
=응응.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욕심 많은 그런 귀족의 뒤통수를 치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 그래도 백작급정도 되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보복이 진짜 뱀처럼 집요해서 위험해지니까. 그랬는데 그런 백작이 그 꼴이 되니까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거 있지?=
그녀가 히히덕거리는 소릴 들으며 없어진 술을 세던 안느는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나 환인에게 달려갔다.
=도령! 팔……. 아니다, 옷 벗어!=
“잠깐. 뭐 하려고?”
카락스의 암살자 영혼들과 나사라트의 암살단 영혼을 소환해 영주성으로 보내려던 환인은 갑자기 달려들어 자신의 윗옷을 벗기려 드는 안느에게서 옷을 지키며 물었다.
안느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소리친다.
=뭐하긴! 도령 손목 밧줄에 쓸려서 빨갛게 부었잖아! 몸도 그렇지 않으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렇지! 저항하지 말고……! 에이 참. 이슬아! 노른아! 와서 도령 잡아!=
=주인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잡으면 돼?」
“잠깐잠깐! 내가 알아서 벗을 테니까! 좀 놔라!”
버둥거리면서 여자친구들의 팔을 뿌리친 환인은 일말의 사심도 없이 그저 걱정만 가득한 안느와 여자친구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평소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안느가 벗기게 놓아뒀을 텐데, 내가 왜 저항했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며 웃옷을 벗으려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에 왠지 옷을 벗는 것에도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웃옷을 벗자 이실리테와 안느는 물론 다른 여자들도 다가와 인상을 잔뜩 썼다.
그의 몸 곳곳에 밧줄이 파고든 자국이 있었던 것. 그중 더러운 밧줄이 직접 피부에 닿은 손목이 가장 상태가 나쁘다.
=이…… 개자식들. 그냥 대가리를 밟아 터트렸어야 했는데.=
=…….=
안느가 플뢰족 성기사답지 않은 험악한 소릴 내뱉고 백려강도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실리테도 흉흉한 눈빛을 줄줄 흘린다.
아영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다가 회복 성술을 펼치려는 안느를 제지했다.
=안느 언니님. 지금 오빠 몸에는 회복보다 치유하고 치료가 더 좋아요. 딱히 극독이나 술법적 질병이 아니니까 면역력을 위해서라도요.=
=아, 그래?=
=네. 혹시 모르니까 질병 치료와 질병에 대한 내성을 걸고 몸 안쪽에서부터 치유와 치료를…… 성법의 등급은…….=
환인은 그녀들의 성술을 받으며 영혼들에게 영주와 가신 일가의 행적을 감시하란 지시를 내린 뒤 먼저 치유와 치료가 끝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 감정이 순간적으로 격해졌을 때 나타나 성을 잡아 뜯어버린 그 현상은 뭐였을까.
심핵력과 영기가 일부 감소하긴 했지만 그건 영혼술을 쓸 때에 비해 극히 적은 양이었는데.
‘뭔가 공간을 잡아 찢는 듯한 느낌이었지…….’
턱.
“……?”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아까 있었던 감각을 떠올리던 환인은 그런 손 위에 턱하고 얹어진 안느의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왜?'하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안느.
=가슴 만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직 엄마 젖을 떼지 못한 늦둥이?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아니라고는 말 안 하며 그녀의 도드라진 젖꼭지를 만지작 거리는 환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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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각 교단의 교황조차도 어지간해서는 못 받는 신의 시련[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