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12화 (712/813)

711 사암 도시 스프라울드

시간을 되돌려 노른이 기사를 따라 나갈 무렵.

음침하고 축축하고 악취 나는 지하 감옥, 며칠만 지내도 병에 걸릴 듯한 장소는 환연이 정령을 부려 적당히 청소한 결과 그럭저럭 쾌적하게 변했다.

환인은 눈을 감고 분노를 다스리는 한편 삼국 연합 조사대와 메리아놀에서도 조직했을 게 틀림없는 조사대 두 집단을 생각하며 계획의 재조정을 진행하던 중.

「환인. 노른이 기사를 따라가는데?」

환연의 보고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어디로 가고 있지.”

「영주성 같아. 노른이 영물 흉내를 내다가 기사가 걔한테 영주한테 가자고 하니까 애들 데리고 따라갔어.」

“……노른도 똑똑하니 이 땅의 주인에게 내 정체를 말해서 꺼내려 시도하려는 거겠지.”

그의 대답에 환연은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말이야.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그냥 아까 갇혔을 때 초소 대장 같은 놈에게 정체를 밝혔으면 됐잖아.」

“위험 요소가 있었다.”

「흐응……. 병사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그렇게 위협적이었어?」

현대인인 환인에게는 20명이 기관총으로 조준하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마땅한 비유가 생각나지 않아 대충 설명을 흘렸다.

“위력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게 위협이었지. 거기다…….”

좁으면서도 넓은 듯 절묘한 넓이의 검문 통로에 그녀들과 쿠에들이 모여있었던 것, 그리고 그녀들의 등급이 높았던 게 불확정 요소였다.

초소장도, 병사들도 그녀들의 직업 등급에 경계심 심한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이실리테는 척 봐도 화려한 희귀 직업자의 아우라. 안느도 7급의 찬란한 희귀 직업자다. 아영도 7급 성술사이며 유르파도 7급 비술사.

이모렐의 몸은 육익의 천인족. 그러나 머리 위의 헤일로도 물색이 빠지며 반쯤 투명하게 변해서 그냥 대충 보면 플라비우스족의 삼쌍익으로 밖에 안 보인다.

삼쌍익은 매우 뛰어난 직업자이거나 무언가를 대성大成했다는 증표.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했다간 극도로 긴장한 병사가 실수로 지팡이를 발사해버릴 수 있다.

그리되면 다른 병사들도 반사적으로 지팡이에 맺힌 에너지를 쐈을 가능성이 크다.

마도기를 든 20명의 병사로 7급 셋을 포함한 다수의 직업자를 포위했다는 건 사살할 자신이 어느정도는 있다는 이야기다.

승률이 없는 일에 무모하게 달러들만큼 이 시대의 직업의식은 높지 않으니까.

즉, 환인은 그것들을 영혼 방패로 피해 없이 막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팡이에서 공격이 쏟아지면 다른 여자친구들은 몰라도 유르파와 쿠에들은 위험하니까.”

이실리테, 안느, 아영이라면 어떻게든 몸을 지킬 수 있을 거다. 백려강은 조금 걱정이지만 강인한 용인체니까 즉사할 일은 없겠지

그러나 유르파는 장담을 못 한다. 지팡이의 공격에 휩쓸린다면 쿠르티, 쿠핀, 쿠라, 그리고 어린 실루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병사들을 죄다 쳐죽인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다. 그를 포함한 그녀들에게는 그 정도 숫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참살할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메리아놀을 친다는 거사를 앞둔 상황.

“여러모로 생각해본 결과 그때에는 순순히 따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거다. 거기다 플뢰족에 대한 적개심이…… 예상 이상이었지. 메리아놀의 삽질이 여기까지 전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으음.」

“그래서 내가 너무 순진하게 굴었다고 한 거고.”

안이하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다. 명성이 드높아졌으니 이쪽을 대강 알아보고 알아서 머리를 숙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었다면 이실리테나 안느를 먼저 보내 ‘평원을 돌아다니는 회색 쿠에를 습득하였으니 신고하려 한다.’고 했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일이니까.

그랬는데 불행에 불행이 겹쳤다.

하필 회색 쿠에의 주인 가문 소속 초소장이 있었다니.

하필 안느와 이실리테의 아우라를 못 알아보다니.

하필 플뢰 성술사의 불신이 매우 커진 상황이었다니.

하필 성벽의 방어 기능이 제법 훌륭해 단숨에 병사들을 제압할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니.

하필 4개월이 넘도록 회색 쿠에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니.

하필 젤프리의 몸 안에 인식 칩 같은 마도기가 삽입되어있었다니.

하필 환연이 릴라이스와 계약을 진행 중이라 침묵한 상황이었다니.

저 중 하나만이라도 해당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

환연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는 말이 이해는 가지만 좀…… 생각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던 거다.

좀 단순하게 생각해도 됐을 텐데.

「그래서? 어쩔 거야? 지금 병사를 불러서 평온의 파동만 보여줘도 사태는 다 해결되잖아. 아깐 위험해서 그렇다 쳐도 지금은 괜찮고.」

“삼국 연합 조사단과 메리아놀 조사단 말이다.”

갑자기 다른 주제를 꺼내는 환인이었지만, 환연은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관관계를 눈치채고 으음, 표정을 귀엽게 찡그렸다.

「그쪽을 이 상황과 연계 지어서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하는 거야?」

“그래. 지금 혼령주를 쓰고 강하게 나가는 것, 평온의 파동을 써서 신분을 입증하고 온건하게 나가는 것. 둘 다 일장일단이 있어 조금 고민이 되는군.”

전자로 진행한다면 힘이 약한 여자친구와 쿠에들의 목숨을 위협한 짜증 나는 스프라울드 측에게 따귀를 날리는 한편 사국의 관심을 자신에게 끌어모을 수 있다. 자신이 매우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자신은 거인숲 미궁 앞에서 딱 한 번을 제외하곤 매우 온건적이고 평화로운 방식만을 골라 움직여왔으니까. 사람 상대로도 이쪽이 성질을 부릴 수 있다는걸 똑똑히 보여줄 기회다.

“그 결과 아드네빌라도 한결 안전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단점이라면 내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리게 된다는 거지.”

「뭐? 그게 왜 그렇게 연결되는…… 아아! 삼국 연합이 정신 나간 아드네빌라를 자극해서 메리아놀 주도를 날려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딜 가나 있는 과격분자를 생각하면 없다고는 못하겠지. 후자의 경우는 이쪽에 신경이 덜 쏠릴 테니 지금 아이가 된 상황을 알리지 않고 편하게 나이를 품은 열매를 얻기 위해 움직일 수 있단 장점이 있다. 단점이라면 아드네빌라가 이용당할 가능성이지.”

「…으~음. 확률이 되게 애매하네. 후자는 또 메리아놀 쪽 조사단이 널 조지려고 본격적으로 수작 부릴 수도 있고…….」

팔짱을 낀 채 감옥 안을 둥둥 떠다니며 생각을 거듭하던 환연이 그에게 물었다.

「넌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데?」

“혼령주를 터트리고 마주치는 병사 기사들을 죄다 박살 내면서 영주성에 쳐들어가 영주까지 무릎 꿇리는 거지. 명분은 차고 넘칠 만큼 이쪽에 있으니까.”

「아 그래.」

어려진 뒤로 조금 개구쟁이 같아졌지만, 크라빈 마을에서 유르파를 모욕한 놈의 목을 뎅겅 쳐버린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네.

환연은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보기에 환인 너 너무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거 같아. 그냥 간단하게 가지? 너희 나라에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도 있다며? 우리 힘이 약한 것도 아니고 아드네빌라 일은 조금 안타깝지만, 우리가 그렇게까지 신경 써줄 의리는 없잖아. 걔가 그렇게 된 건 걔의 선택이고 잘못되면 안타깝지만 뭐 그런 거지.」

그러니까 환인은 후자, 적당적당히 이쪽 소식을 감추며 이동하는 쪽을 추천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우릴 이 꼴로 만든 대가는 받아내야겠지만.」

환연의 의견에 환인의 마음속 저울도 확연히 기울었다.

그런 그에게 환연이 땅 정령의 눈으로 보고 있는 여자들 감옥 상황을 전해준다.

「마침 간수들이 애들한테 엄청 모욕적인 말을 쏟아붓고 있어. 손대지 말란 경고를 받았는지 손가락 하나 대고 있지 않은데 쓸데없이 더럽게 큰 젖탱이로 남자들 얼마나 후리고 다녔냐, 개걸래처럼 가랑이 벌려보면 썩은 고기마냥 보지가 너덜너덜한 거 아니냐, 재판 끝나면 네 년들 목을 잘라서 쓸데없이 음탕한 몸뚱이는 개돼지한테 돌림빵당하게 만들고 목구멍으로 자지를 쑤셔서 아가리로 정액을 토해내게 해주겠다, 뭐 이딴 개소리들. 어, 채찍 손잡이로 이모렐 가슴도 찌르고 그러네. 겉보기엔 플라비우스족 같아서 열등감을 드러내는 건가? 직접 손은 안 대고 있…….」

뚝—

「……지만, 응?」

뭔가 끊어지는 소리에 그를 돌아본 환연은 얼음 귀신을 형상화한듯한 그의 모습에 ‘앗, 실수’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유르파가 욕먹었다고 사과 세 번 요구한 뒤 거절한 모험가의 목을 단숨에 쳐버린 환인이다.

터치만 안 당하면 큰일은 아니지하고 생각 없이 말한 게 그의 인내심 게이지를 모두 날려버린 모양새.

후자로 기울었던 저울이 전자로 확 넘어가 버렸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두 손에 희끄무레한 영혼들이 모여들며 뭔가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기운이 풍기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간다.”

「어, 응.」

환연은 조용히 속으로 스프라울드의 불특정 다수에게 사과했다.

아니, 사과할 건 아닌가? 성제의 영혼 기사들한테 쌍욕도 한 수 접는 개소리를 쏟아부은 놈들이니까.

응. 인과응보야.

위상력을 억압하는 목줄, 신체 능력을 저하시키는 밧줄에 안대로 눈이 가려지고 재갈로 입도 막힌 여자들은 30분째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간수들의 저열한 폭언을 듣고 있었다.

귀족 영애 출신인 백려강을 제외하면 그런 욕설 따위, 그녀들의 멘탈에 흠집도 내지 못한다.

환인을 들먹이며 욕설을 퍼부으면 효과 만점이겠지만…….

=개갈보 같은 년들! 보나마나 순결 따윈 시궁창 부랑자 좆트래기 사이에 처박아놓은 것처럼 수십 명 자지를 물고 빨고 박히면서 더러운 정액을 좆집에 꾸역꾸역 처받으면서 살아왔겠지! 네년들 같은 쓰레기들은……!=

자신들의 정체도 모르고 이처럼 순결을 두고 퍼붓는 욕설은 저열한 도발이나 다를 바 없다.

전직 도적 두목, 전직 시궁창 경험 많은 고등급 자유 성투사, 전직 최대급 암살자, 전직 흡정족, 전직 뒷세계 정찰병인 그녀들의 역린을 건드리기에는 모자란 것이다.

이런 데 내성이 없는 백려강만 재갈을 잘근잘근 물며 분노 게이지를 쌓고 있을 뿐.

그런 그녀들의 걱정은 오직 하나.

‘주인님 괜찮으신 걸까…….’

스물의 병사들이 들이 밀은 지팡이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좀 신경 쓰면 피해 없이 막을 자신이 조금은 있었다. 유리 언니나 쿠에들이 다치더라도 안느하고 아영이 있으니까 죽을 일까지는 없을 테고.

하지만 주인님은 막 싸우려는 자신들을 말리고 순순히 병사들에게 포박당하셨다.

뭔가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셨을 테지만, 좀 전에 주인님의 영혼들이 찾아와 빙의해서 신체 능력을 올려주고 있지만, 이제 5살 정도의 몸이 되신 주인님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하 감옥이라면 매우 불결하고 험악한 곳인데, 주인님 몸에 안 좋을 텐데…….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우우웅——!!

=버러지에 인류의 해악 같은 좆집년들이으으어어어어…….=

=아흐응…….=

=흐에에에…….=

뭔가 큰 진동과 함께 욕설을 퍼붓던 간수들, 에너지 방출 지팡이를 겨누고 있던 병사들이 흐물거리면서 마치 영혼이 탈색된 것처럼 풀썩 털썩 주저앉는다.

환인의 여자들도 뭔가 영혼이 찌릿찌릿한 느낌이었지만, 안 좋은 쪽이 아니라 정신을 한껏 일깨우는 이로운 효과 쪽.

혼령주?!

팍, 파박! 우두둑.

위상력 감응으로 자신들에게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자들이 죄다 쓰러지는 걸 포착한 이실리테는 온몸을 꽁꽁 묶고 있는 직업자 포박용 특제 밧줄과 쇠사슬을 말 그대로 뜯어버리고 안대를 풀며 감옥 바닥에 착지했다.

안느도, 이모렐도 거의 동시에 포박을 풀고 내려선 직후 이번 혼령주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일반 혼령주나 강화 혼령주와 다르게 빛은 있지만, 눈이 부셔서 앞이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던 것.

=으브븝!? 퉷! 뭐야, 혼령주?! 이슬아!=

=난 주인님을 찾아갈게! 넌 언니랑 애들 풀어줘!=

목을 묶고 있는 위상력 억압구를 두 손으로 잡고 콱, 잡아 뜯자마자 퍼벙— 일반인은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갈 위력의 작은 폭발이 그녀의 목에서 발생했다.

=이슬……! …이 멀쩡하네. 아니 어떻게 무사한 거지?=

퍼벙—

=뜯는 동시에 목에 위상력을 집중해 위력을 감소시킨 것입니다.=

뒤에서 이모렐도 억압구를 풀며 원리를 설명해준다.

=넌 그냥 뜯은 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그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아르겐테아 정찰대 탈출 교범에 나와 있는 기술이니까요. 그리고 이 몸은 중핵으로 만들어진 육체입니다. 이 정도 폭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란 눈으로 다중 검기를 소환하는 이실리테의 목을 본 순간 안느는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완전히 멀쩡하진 않고 목줄이 매여져 있던 곳의 피부가 다 벗겨져 시뻘건 생살이 드러난 데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던 것.

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중 검기를 소환해 몸 상태를 빠르게 점검한 이실리테가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쿠과과과광!!

감옥의 한쪽 천장이 무너지며 환인이 환연의 정령에게 보호받으면서 내려온다.

=주인님!=

=도령!=

=자기?!=

환인은 이모렐과 안느의 손에 풀려나는 유르파, 백려강, 아영을 살펴본 뒤 이실리테의 목 상처를 보고 인상을 와락 썼다.

“이실리테. 그 목…….”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영에게 치유를 받으면 되니까요. 그보다 주인님은 괜찮으세요? 병사들이 폭력을 쓰진 않았나요?=

“……어린아이 몸이라서 그런지 폭력을 쓰진 않더군.”

폭력을 쓰려 했다면 난리는 훨씬 더 빨리 벌어졌겠지. 환인은 고개를 돌려 유르파에게 물었다.

“유르파, 목의 구속구를 해제할 수 있겠습니까.”

=후에, 응. 자기가 등을 밟고 있는 인간이 해제 열쇠를 가지고 있어.=

시선을 내린 환인이 비켜주자 아영이 재빨리 달려와 간수의 품을 뒤져 젓가락보다 조금 더 굵고 짧은 금속 막대기를 꺼내더니 자기 목의 억압구에 가져다 댄다.

그러자 연분홍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목줄을 한 바퀴 돌고 직후 가죽 목띠처럼 생긴 억압구가 저절로 풀렸다.

=언니.=

바로 이실리테의 목 상처에 회복을 건 아영은 이어서 안느와 유르파, 백려강 순으로 목의 억압구를 풀어준다.

그사이 환인은 병사들이 들이밀었던 지팡이를 하나 들고 찬찬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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