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11화 (711/813)

710 사암 도시 스프라울드

부우우우—!

도시 정문 초소장의 성난 외침과 함께 무겁고 둔중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문 안, 굵기만 2m에 가까운 금속 격자가 앞뒤로 쾅 소리를 내며 내려와 길을 막는다.

“…….”

=어?!=

=앗…!=

뒤에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던 상단, 행상인들, 여행자 및 모험가, 용병들이 어맛 뜨거라 하고 후다닥 물러난다.

직후 성문 좌우 쪽문을 통해 금속 격자 너머로 통일된 차림의 병사 스무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위상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지팡이를 들어 일행을 겨누었다.

환인의 시선이 그 지팡이로 향한다. 그리고 온몸이 경직되다시피 긴장한데다 공포심을 눈빛으로 드러내는 병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

그사이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행동에 적지 않은 위협을 느낀 여자들이 각자 무기를 뽑으려는 기색에 환인은 조용히 고개를 게를 저어 그런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 사이 5등신에 가까운 프라우드족 초소장이 뻘게진 얼굴로 재차 고함을 지른다.

=당장! 탈 것에서! 내렷!!=

“…….”

험악한 분위기에 환인이 먼저 노른의 등에서 내리자 여자들도 불만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쿠에들의 등에서 내려온다.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땅에 엎드렷!!=

=…이봐. 지금…….=

=닥쳐!! 한 번만 더 입을 열었다간 무력 저항이라 간주하고 문답무용으로 공격하겠다! 당장!! 엎드려어—!!=

초소장의 고성에 말허리가 잘린 안느의 고운 얼굴이 노여움으로 가득찬다. 이실리테는 당장이라도 병사들의 목을 쳐날릴 것처럼 살기등등했지만…….

=……!=

=…….=

환인이 먼저 엎드리는 것을 보곤 살기를 억누르곤 북극의 만년빙하보다 차가운 얼굴이 되어 뒷머리에 손을 올리고 엎드렸다.

그에 다른 여자들도 속으로 분노를 감추며 엎드리고, 노른도 성난 눈빛을 감추고 지금은 짐승인 척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프라우드족을 노려본다.

그러자 금속 격자 일부가 올라가며 위상력을 강제로 억압하는 목줄 마도기를 든 두 명의 병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격자 안으로 진입했다.

병사 둘은 확연히 어린 환인을 제외한 여자들의 목에만, 특히 이실리테와 안느의 목에 먼저 목줄을 채웠고 환인은 가장 마지막에 손목에만 밧줄을 꽁꽁 묶어놓는다.

이어서 금속 격자문이 좀 더 올라가며 지팡이를 겨눈 병사들이 4인 1조로 우르르 들어와 여자들의 팔과 다리에 구속 마도기를 채우고 입에 재갈까지 물린다.

노른은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걸려는 병사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

환인의 조용한 시선에 꾹 참았다.

흉악 범죄자를 안전하게 포박했다고 생각해서일까. 병사들이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쿠에들을 이제 완전히 열린 금속 격자문 너머 초소로 끌고 가는 등 분주하게 움직인다.

=……?!=

“…….”

환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운 병사는 그의 눈을 보곤 흠칫 어깨를 떨었다.

흡사 심연의 어둠을 새겨놓은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동자를 봤더니 심장이 벌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환인 일행을 무력화시킨 뒤 초소장은 화려한 보라색에 금색, 은색으로 수놓은 로브 차림의 3급 적술사 플라비우스족과 함께 젤프리, 회색 쿠에에게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맞습니다. 체내에 마그나르 가문 표식 마도구가 삽입되어있습니다.=

적술사의 이야기에 초소장은 땋아 묶은 턱수염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로 노여워하는 얼굴로 으득, 이를 갈았다.

=감히 스프라울드 가문의 친척 가문인 마그나르의 마차를 습격해 후계자 일가를 살해해놓고 4개월이나 지나 천연덕스레 도시를 찾아와? 네년들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라!=

“……몇 마디만 나누어보면 오해라는 걸 알 텐데.”

무직자인데다 어린아이인 환인의 담담한 목소리에 초소장과 병사들이 자그마한 그의 머리통을 돌아보았다.

변성기는커녕 아직 1차 성징도 오지 않았을 듯한 아이의 말인데도 왠지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라도 없고 이제 5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애. 입고 있는 옷도 후줄근한 리넨으로 얼기설기 만든 물건.

저런 애새끼가 귀족일 리 없겠지.

초소장은 개소리로 치부하고 병사들에게 거칠게 손짓했다.

=끌고가서 특수 감옥에 쳐넣엇!=

철컹!

복도에 걸어놓은 횃불의 붉은 빛을 제외하곤 빛 한 점 없는 축축한 지하 감옥.

그 안에 소지품을 다 빼앗긴 채로 떠밀린 환인은 밧줄에 묶이고 쓸려 새빨개진 손목을 어루만지며 철창을 닫아걸고 떠나가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

그리모암의 유물이 너무 커 착용할 수가 없었기에 벗고 있어 위상력은 전무, 영기와 심핵력뿐인 그에게 위상력이 검출되지 않아 이렇게 평범한 감옥에 가둔 거겠지만.

치밀한 듯하면서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고개를 돌려 감옥 안을 둘러본다. 곳곳에 이끼가 낀 데다 불쾌한 썩은내가 가득하다.

잘 보면 구석에 인간의 배설물로 보이는 게 쌓여 파리가 들끓고 있다.

「이게 무슨 소란이래.」

병사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한 환연이 그의 품 안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와 중얼거린다.

아무리 릴라이스와 계약이 진행 중이더라도 지금 상황은 도무지 무시할 것이 못 되어서 계약 진행을 멈추고 의식을 일깨운 것이다.

그녀의 귀로 환인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굴었군.”

「그건 아니지. 여기도 중급 도시인데 정령 기사나 검희의 직업 아우라를 알아볼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잖아. 노른도 되게 특색있는 모습이고. 거기다 네가 빼앗긴 소지품, 척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데 그거까지 무시하는 건 암만 봐도 이상한데.」

말단 병사들이야 무지렁이 같은 무직자 나부랭이들이니 모를 수 있다 쳐도 초소장은 3급 전사였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지?

“초소장이라는 놈이 마그나르라는 가문과 관계된 인간이라 눈이 돌아가서 알아차리지 못한 거겠지.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하면 사람의 시야는 극히 좁아지니까. 그보다 환연, 그녀들 상태는 어떻지.”

「심각한 중범죄자로 여겨서인지 위상력을 억제하는 특수 감옥에 갇혔어. 사방이 개방된 곳에 매달린 데다 이상한 지팡이 든 놈들이 눈도 안 떼고 노려보는 중이야.」

“지켜보다가 만약 누구라도 그녀들에게 성적인 접촉을 하려 하거나 폭력을 쓰려 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이곳을 날려버려라.”

「응.」

환인도 병사들의 막무가내 대응에 분노 스위치가 적지 않게 들어간 상태지만, 아직은 초월적인 이성으로 ‘그럴 수도 있지.’하고 참는 중이다.

회색 쿠에를 탈것으로 쓰던 귀족이 몰살당했다. 눈이 돌아가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그랬기에 인내심을 발휘해 오해를 풀 시간을 기다리고 있지만, 놈들이 그의 여자들에게 헛짓거리하는 순간…….

환연은 작게 콧방귀를 꼈다.

‘스프라울드는 사라지는 거지, 뭐.’

자신이 직접 나가서 이곳의 영주를 찾아가 오해를 풀어도 되는 일이지만, 어차피 저쪽이 선을 먼저 넘어도 한참 넘어버렸다.

윽박질러 말도 못 하게 막고 재갈로 입도 틀어막았고 이렇게 더럽기 짝이 없는 감옥에 처박기까지 했는데 온건한 사태 해결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지.

아니나 다를까 그나마 깨끗하고 마른 바닥에 주저앉은 환인의 주변으로 청색의 희뿌연 안개 같은 것 여섯이 나타나더니 잠시 후 사라졌다.

정황상 청색 영혼을 불러내 여자들에게 보내서 빙의 시킨 거겠지.

‘릴하고 계약을 진행 중이라서 그런가…… 영혼도 희미하게 볼 수 있게 됐네.’

환연은 잠깐 눈을 감고 있는 환인을 바라보다가 그의 옷자락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푸줏간의 고기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여자들을 정령의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마침 영혼이 빙의되었는지 여자들의 어깨에 힘이 잠깐 들어갔다가 풀리는 게 보인다.

얼마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지 이실리테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상황.

‘저 정도면 위상력을 못 써도 근력만으로 사슬을 끊고 탈출할 수 있겠네.’

아무리 봐도 일이 좋게좋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분쟁을 피하고자 스스로 머리를 낮추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환인이지만, 상대가 명백하게 선을 넘으면 망설임 없이 목을 쳐날리는 것도 환인이다.

게다가 지금은 메리아놀 건으로 한창 머릴 쓰느라 예민한 상태이지 않은가.

‘어떻게 정리되려나.’

환연이 그 점을 궁금해하고 있을 때, 스프라울드가 발칵 뒤집힐 전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성벽 정문 경비초소의 연락을 받아 초소를 찾은 스프라울드 가문과 마그나르 가문의 기사 둘은 환인 일행에게서 압류한 물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무슨 아공간 가방과 보존 가방이 이렇게 많지?=

=전부 사람들을 습격해서 노획한 장물이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척 봐도 고급 식재가 담긴 가방이 이렇게 많습니다. 귀해 보이는 옷들과 이 가방에는 마도구가 이렇게나 많으니 지금껏 용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람들을 습격하던 강도들이 틀림없을 겁니다.=

마그나르 가문의 기사가 분노한 얼굴로 환인의 여자들이 입는 옷과 속옷 가방, 유르파의 마도구 가방을 들고 흔든다.

뭔가 석연치 않아 살짝 얼굴을 찌푸린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는 유르파의 마도구 가방 속에서 여러 종류의 마도구를 꺼냈다.

=그렇다기에 마도구는 뭔가, 같은 브랜드로 보일 만큼 유사성이 다수 보이잖는가.=

여럿에게서 빼앗은 것들이 이런 유사성을 지닐 수 있나? 하는 의문에 마그나르 가문의 기사가 울분을 토해내듯이 대답한다.

=마도기나 마도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단을 습격해서 강탈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그 해석도 나름 타당했기에 스프라울드 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급 직업자라던데 뭐가 아쉬워서.

‘아니, 고등급이라서인가.’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귀찮은 일을 싫어한다. 이형종과 싸우는 것보다 인간을 공격하는 게 훨씬 돈이 잘 벌리니까.

실제로 질 낮은 기사 몇몇은 양민들의 뒤통수를 치거나 윽박질러 상납금을 뜯어내고 있다 들었고.

마도구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 눈에 환인의 아스펜드가 맺혔다.

척 봐도 귀족들이나 쓸법한 손가방.

보고용으로 그걸 챙긴 기사는 차렷 자세로 선 초소장에게 말했다.

=쿠에를 보러 가지. 초소장, 극히 위험한 범죄자들이니 영주님께서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간수들이 헛짓거리 안 하게 각별히 주의하라고 해라.=

=옛, 기사님!=

대답이 내키지 않았던 마그나르 가문 기사가 윽박지른다.

=저번에도 얼굴 반반한 범죄자를 갖고 놀다 병사들이 죽고 기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벌어졌었지. 이번 놈들은 더 위험해 보이니 절대 그런 일 없게 하란 말이다. 알아듣겠나?=

=옛! 아랫것들에게 단단히 을러놓겠습니다!=

그리 경고를 한 두 기사는 초소를 나서며 한탄 섞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렇게나 강한 직업자가 강도로 날뛰다니, 세상 참 뒤숭숭하군.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여태까지 정의감만큼은 높다고 생각하던 메리아놀에서 성제님을 습격하질 않나 차원 방랑자를 강제로 소환하며 산제물로 연구하질 않나…… 남부의 미개한 도마뱀들과 다를 게 뭔가 싶습니다 진짜.=

=그 일 때문인지 도적과 야적들의 출몰도 빈번하고 데바스톤 산맥에서는 또 정체불명의 검은 괴물도 돌아다닌다고 하고……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저희가 이렇게 술렁임을 피부로 느낄 정도인데 귀족님들께서는 어떠실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아, 회색 쿠에는 저기 있군요.=

초소를 나와 뒤쪽 연무장으로 향하니 마침 스물 남짓한 병사들이 녹색 짐승 한 마리에게 매달려 우왕좌왕하는 게 기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녹색 짐승은 뭐지? 녹색 그리핀도 있나?=

=그리핀이라기에는 좀 작습니다만 그래도 신기하게 생겼군요. 묘하게 기품도 느껴지는 거 같고.=

부리와 깃털이 멋진 녹색 짐승은 목줄을 잡고 늘어지거나 몸에 매달린 병사들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막 걷어차고 부리로 잡아 내동댕이치며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도 크게 다치는 병사는 없다.

걷어차인 병사는 에구구하며 땅을 뒹굴다가 멀쩡히 일어나고 부리에 물린 병사는 옷자락이나 갑옷을 물린 채로 나가떨어진 뒤에 고개를 붕붕 흔들며 정신을 차리곤 다시 일어난다.

=굉장한 힘입니다. 장정들을 모포의 먼지를 터는 것처럼 손쉽게 날려 버는군요.=

=그래. 힘 조절도 훌륭해. 앞발톱을 보게. 짐승이 마음먹으면 병사들 정도는 간단히 해치울 수준으로 보이는데 일부러 발톱을 모은 채 후려치고 있어.=

=길들인 마수일까요?=

=아무튼 가까이 가보세.=

기사들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가 새삼 녹색 짐승의 위용에 감탄했다.

카악! 하며 간간이 위협하지만, 숨소리는 조금도 거칠어져 있지 않다. 자신들이 본 것만 병사들을 스무 번 가까이 쳐 날렸는데 멀쩡한 거다.

체력도 굉장하고 근력도 뛰어나고 적의를 구분할 만큼 지능도 높아 보인다. 녹색 날개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두꺼워 보이는 데다 뒷다리는 말 그대로 대지의 힘이 느껴질 정도.

뒷다리로 일어서면 평범한 쿠에를 아성체로 만들 만큼 크다. 옆에서 눈을 말똥말똥 뜬 회색 쿠에가 작아 보일 지경.

그 강인하고 멋진 모습에 반한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는 네 장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라 제압하려다가…….

=……!=

녹색 짐승이 보내오는 칼날 같은 시선에 움찔했다.

20년 차 기사로서의 직감이 경종을 울린다. 저 짐승의 등에 올라탔다간 큰 사고가 벌어질 거라는 직감이다.

=허, 영물인가?=

=저 짐승이 턴유 님을 거절한 겁니까?=

=그러하네. 제압하려 했더니 기세를 더 끌어올리는군. 함부로 다가갔다간 경을 칠 거 같은 느낌일세.=

=정말 영물인가 보군요…….=

기사들은 진이 빠져 헐떡이는 병사들에게 손짓해 그들을 물리고 녹색 짐승에게 다가갔다.

몸에 매달리려던 병사들이 떨어지자 목줄이 걸려 병사들 여럿에게 잡힌 상태임에도 네 다리로 우뚝 서서 고고한 눈빛을 이쪽으로 보낸다.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는 그 고고한 자태에 경탄을 터트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멋진 생물이군! 영주님께 진상해야겠어. 초소장.=

=옛! 서류를 작성해놓겠습니다!=

=부탁하지.=

기사는 적대 의사가 없다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는 한편 근처에 모여있는 밀짚색 쿠에들과 회색 쿠에를 보았다.

이 녹색 짐승이 저 쿠에들을 이끄는 건가? 기사는 손을 내밀어 늘어져 있는 녹색 짐승의 고삐를 잡으려 했지만, 짐승이 고개를 홱 돌려 고삐를 채갔기에 허공에 빈 손질만 해버렸다.

이어 살짝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

방금 짐승의 눈빛이…… 자신을 뭔가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설마 지능도 높은 건가?

그러고 보니 스물에 가까운 병사를 몸에 매달고도 펄쩍펄쩍 날뛰었지.

지금 목줄을 잡은 여덟 병사쯤은 몸에 매달고도 날아오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시선이 녹색 짐승의 선명한 녹색 깃털로 향했다. 저만한 깃털 색이라면 바람도 다루지 않을까 싶은데…….

기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녹색 짐승의 목에 걸린 밧줄을 잡고 늘어지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거 놔 보게.=

=어, 하지만…….=

=괜찮네. 내가 책임질 테니 한 번 놓아보게.=

병사들은 지엄한 기사님의 명령에 당혹해하면서도 밧줄을 놓고 물러선다. 저 짐승이 날아 도망치면 기사님도 날아서 쫓아가실테니까.

병사들이 목에 걸어놓은 로프를 놓고 물러섰지만, 상대로 녹색 짐승은 날아서 도망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앞발을 들어 발톱으로 목을 맨 밧줄을 가볍게 끊어버린다.

그걸 본 병사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기사가 호기심과 관심을 담아 물었다.

=날 따라오겠느냐?=

「…….」

=영주님께 널 데려갈 것이다. 따라 올 테냐?=

두 번 말을 건 기사는 녹색 짐승이 그러겠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기분 좋은 소름이 살짝 돋았다.

=좋다. 가자.=

뛰어난 영물이 가문 소속이 되면 여러 가지로 가문의 위명과 명망에 득이 된다. 그건 과거 역사를 봐도 분명하다.

이렇게나 훌륭한 영물이 따르는 가문의 가주는 인품이 얼마나 훌륭할 것인가.

이런 영물을 길들이고 따르게 할 정도로 저 가문에는 훌륭한 인재가 많겠지.

어지간히 정착하는 일 없는 영물이 정착할 정도라면 저 가문의 토지는 보지 않아도 훌륭할 거다.

가문의 명성이 오를수록 그러한 명성에 이끌리는 인재는 많아진다.

인재가 몰리면 영지는 더욱 살기 좋아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살기 좋아지면 이주해오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영지민의 숫자는 곧 영지의 힘.

기분 좋게 초소 연무장을 나와 기승룡을 타고 영주성으로 복귀하던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는 문득 든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뒤를 돌아보자 녹색 짐승이 회색 쿠에와 밀짚색 쿠에 세 마리를 끌고 따라오며 도시를 살피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도시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도시를 평가하는 것처럼 일체의 들뜬 기색 없는 차분한 눈길.

=……저 영물은 그자들과 함께 도시에 들어왔다고 하였었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영물이 악당을 따른다던가?=

=……그렇단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만, 영물이 저렇게 순순히 턴유 님을 따라나선 걸 보면 그냥 우연히 같이 다닌 게 아닐까요?=

=으음. 뭔가 꺼림칙한데…….=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진다.

이런 직감은 중요하다. 전장에서 생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부류의 감각이니까.

하지만 여긴 전장도 아닌데 왜…… 감옥에 갇힌 그자들 때문에?

스프라울드 가문의 기사가 턱을 쓸어내리며 계속 신경 쓰는 모습에 마그나르 가문의 기사는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턴유 님. 그러면 돌아가서 범죄자들을 소상히 알아보시겠습니까? 무리 중에는 아이도 있다고 하니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하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초소에서 멀리 왔으니. 일단 성으로 돌아가 영주님께 영물을 진상하고 다시 알아보도록 하지.=

=예.=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며 두어 번, 땅을 치며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턴유는 설마 자신이 그 분기점을 넘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녹색 짐승, 노르스리넨을 영주성으로 데려갔고…….

=영물이 도시를 찾아왔다고?=

=그렇습니다. 영물에게 묻자 주군을 뵙길 원하여 날아 떠나지도 않고 따라왔기에 보고드립니다.=

=무척 관심이 가는 이야기로군. 그대들도 함께 나가지.=

보기 드문 영물이 도시를 찾아왔다는 기사의 보고에 스프라울드 영주는 지대한 관심을 내비치며 영지 운용 회의도 중단하고 가신들과 함께 영물이 기다린다는 성의 꽃잎 정원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정세가 혼란스러운 판국에 영물이 찾아오다니, 가문에 영광이 깃들 징조인가 봅니다.=

=하하하. 간리 원로의 마음은 이해하나 너무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영물은 다르게 요물이라고도 부를 만큼 마음이 갈대라 하니 말입니다.=

=세드나 원로의 말도 옳군요. 하지만 이 시기에 바람이 깃든듯한 날개의 영물이라니, 무언가의 인연이 아닐까 들뜬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허허허.=

원로들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스프라울드의 영주, 뮬트라크 하급 백작도 웃음을 머금다가 14살 남짓한 여자아이 외모의 프라우드족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믹타 남작. 가문 후계자 참살 사건의 주요 범인이 정문에서 잡혔다지? 원통하게 죽은 아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겠군.=

=말씀대로입니다.=

=범죄자들의 신병 결정권은 그대에게 줄 터이니 아들딸들이 구천을 헤매지 않도록 잘 쓰기 바라네.=

=영주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죽은 아이들도 영주님의 뜻에 한을 풀고 성불할 것입니다…….=

=음.=

그렇게 가신들과 정원으로 나가던 뮬트라크 영주는 마지막 복도에서 두 달째 손님으로 기거 중인 주도 출신의 상급 백작과 마주쳤다.

=뮬트라크 영주.=

=펠드릭스 상백님? 산책가시는 길입니까.=

=그렇소. 성의 꽃바람 정원을 하루도 보지 않으면 이제는 깃털이 빠지는 듯 허전하여서 말이오.=

=그 말씀을 처가 듣는다면 무척이나 기뻐할 것입니다.=

=하하하.=

노회한 외모와 달리 정정하고 담담하게 웃음 짓는 백작에게 영주가 부드럽게 권유한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가문에 영물이 찾아왔다 하여 지금 보러 가는 길인데, 펠드릭스 상백님도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리민 영애도 부르시고 말입니다.=

=드문 영물이 직접 찾아왔다니 축하드릴 일이군. 영주의 뜻에 따라 리민도 부르도록 할까.=

=영애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영물은 좀처럼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아아……. 보편적으로는 그리하겠지만 딸도, 이 늙은이도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영물을 딱 한 번 본 적 있어서 말이오.=

=오. 그러셨습니까? 어떤 영물인지 궁금증을 참기 어렵군요.=

=숨겨서 무얼 할까. 그 유명한 성제의 녹색 쿠에였소. 최고급 비단조차도 옆에서는 빛을 잃을듯한 선명한 녹색에 두 눈동자는 푸른 하늘을 담은 듯이 총명하였고 기세는 뭍 쿠에들의 여왕이라 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뛰어났지.=

=아아…!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새라더군요.=

하녀가 펠드릭스 상급 백작의 손녀를 부르러 간 사이 담화를 나누던 두 백작은 잠시 후 도착한 영애와 함께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상급 백작, 하급 후작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으며 그 인맥 또한 주도의 왕실에 닿아있다는 노회한 백작은 시종 예의 있게 영주를 배려해주었고 영주 또한 모자람 없이 그의 연륜에서 가르침을 청하는 모습이었으니까.

=이 문 너머에 영물이 있겠군요.=

=어떤 영물일지 참으로 기대되오.=

=저도 같은 기분입니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문이 열리며 화사하게 핀 꽃으로 가득한 정원, 그곳에 도도하게 서 있는 한 마리의 녹색 짐승이 나타난 순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

디전=펠드릭스 백작의 손녀, 리민=펠드릭스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짧게 내뱉은 외마디 교성 때문이었다.

평소 다과 때 한 마디나 할까 싶을 만큼 말수 적고 가녀린 미소만 짓던 소녀가 저렇게나 놀라다니.

뮬트라크 영주가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리민 영애. 괜찮으신가?=

=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뮬트라크 영주는 살짝 놀라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말수가 적고 조금 덧없는 분위기만 풍길 뿐, 몸가짐이 한치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데다 침착하고 영민하고 어린 나이에 6급 빛술사가 된 그녀다.

내심 마음에 들어 장남의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는데 그런 소녀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영물로 보이는 녹색 짐승에게 달려간다.

=비상, 비상 맞나요? 환인 선생님의 비상, 맞지요?=

=음?=

=엇, 리민 영애가 저 영물과 안면이 있는 겁니까?=

쩌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불온한 균열이 더욱 가해진다.

「……나 알아? 넌 누군데?」

=……?!=

=헉?=

노른의 한 마디에 경악이 좌중에 퍼져나간다.

짐승, 영물이 말을 한다? 그건 영물이 아니라 성수, 그것도 신수에 가까워지거나 신수라는 이야기.

게다가 방금…… 리민 영애가 뭐라고 했지? 환인… 선생님? 그 이름, 성제의 이름이 아니었나?

리민도 설마 비상이 말을 할 줄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가 이내 살짝 미소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 리민이에요. 선생님께 못난 꼴을 많이 보여드렸던…….=

「아. 그게 너였어?」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 계신가요? 혼자서 어떻게 여기에 온 건가요?=

「잘됐다. 너 신분이라는 거 높지? 이 땅 주인 좀 불러줘.」

유창한 노른의 이야기에 리민은 얼떨떨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뮬트라크 영주와 펠드릭스 백작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예감에 서둘러 노른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노른을 여기까지 데려온 기사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며 안색이 밀랍처럼 하얗게 변했다.

=내가… 아니, 제가 이 땅과 도시의 영주, 뮬트라크 에반 스프라울드입니다.=

「나쁜 놈! 내 친구 풀어줘!!」

뮬트라크 영주의 자기 소개에 노른이 분노와 노여움을 잔뜩 드러내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녀의 분노에 주변 자연과 바람의 정령이 동화, 거친 광풍을 일으킨다.

느닷없는 분노에 뮬트라크는 당황해서 손바닥으로 얼굴에 밀어닥치는 광풍을 막아내며 물었다.

=치, 친구를 풀어달라니 무슨 말입니까? 저는 당신의 친구를 가둔 적이 없습니다!=

당연하다. 영물…… 아니, 성수? 신수? 의 친구라면 친구도 당연히 성수나 영물이고 신수일 텐데 그런 존재를 어떻게 감옥에 가두겠나.

그러나 이어진 이야기에 영주는 당황을 넘어서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내 친구! 환인! 네 부하가 내 친구를 감옥에 가뒀단 말이야!!」

성, 성제가, 내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뮬트라크 영주를 비롯한 스프라울드의 가신들, 거기에 더해 디전=펠드릭스와 리민=펠드릭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을 때였다.

쿠우우우우우우웅……!!

그들의 평온에 종말을 내리는 거대한 빛기둥이 초소 지하 감옥이 있던 자리에서 치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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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조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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