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10화 (710/813)

709 사암 도시 스프라울드

그 후 지하율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얻은 환인은 하룻밤을 머물고 곧장 데바스톤 산맥의 유일한 도시, 스프라울드로 향했다.

물론 정보는 공짜가 아니었다.

“와, 구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못 구한 건데.”

린덴 폐촌에서 그를 끝까지 쫓아왔던 변종 바르둘을 해치우고 얻었던 적/청 2색 위상석을 정보의 대가로 건네준 것.

그런데 이걸 대가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지하율은 향후 진행할 계획에 이 다색 위상석을 쓸 거라고 하였다.

“다색多色 위상석은 위상력 외에 몇 가지 기운이 융합되어 만들어지는 희귀 물질이라 여러 기운을 다루는 내 직업이랑 궁합이 매우 좋거든.”

에너지를 충전하는데 이것보다 뛰어난 게 없다는 뜻.

=임시 동맹이라면서 대가를 받는 거야? 그럼 대현자님을 도령이 지구로 데려주면…….=

“내가 아저씨의 소원에 얹혀갈 수 있을 확률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0%가 안 돼. 만약 넘어가 진다면 그땐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야지. 가진 아이템으로든 몸으로든.”

안느의 순수한 의문에 지하율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대답했다.

오히려 여자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환인이 가져온 앨범을 넘겨주었을 때 그녀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엄청난 수준.

그런데도 지구로 넘어갈 수 있을 확률이 10%가 안 되고 그럼에도 그를 도와준다니.

이건 같이 가지 못하는 걸 상정하고 그냥 도움만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싶었던 거다.

아무튼, 2색 위상석을 대가로 그녀가 전지의 눈을 써서 알아낸 정보는 벨티칼의 권역에 있었다.

특정한 장소에 평범하지 않은 미궁이 있는데, 그 미궁에서 가끔 발견되는 어떤 열매가 신체의 나이를 부작용 없이 몇 년씩 먹게 한다는 것.

나이를 강제로 먹는다는 것은 대부분 부정적인 효과로 분류된다.

노화로 인한 기량의 감소, 수명의 단축, 신체 능력의 열화.

이 세 가지만 보더라도 성인이 일부러 그 열매를 복용할 일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열매를 먹어 몸이 성장한다고 근육도 거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단련되지 않는다.

사람이란 일상생활을 하며 천천히 성장하고, 근육도 그에 맞춰 질겨지고 단단해지는 법이다.

일례로 우주 공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란 실험에서 실험 참가자가 2달간 누워 지낸 결과 온몸의 근육이 다 사라져 건강이 극히 나빠졌으며 일상생활에 복귀하기 위해 몇 달간 재활 훈련을 했다는 결과가 있다.

강제로 나이를 먹어 신체가 커진다는 건 그런 식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것.

그런데도 그 열매가 조금이지만 알려진 이유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그 열매를 먹여 강제로 키운 뒤 순결의 징표로 삼아 산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기 때문.

“우선 흑령주를 터트린 곳으로 간다.”

지하율과 헤어진 환인은 흑령주를 터트린 곳으로 되돌아와 신식新式 평온의 파동을 펼쳐 산맥 초입에 뿌려진 죽음의 기운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다른 곳이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지하율의 거처 인근이다.

이번 메리아놀 차원 방랑자 착취 사태가 종결되면 자신의 행적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텐데, 사건·사고를 불러일으킬 만한 장소가 그녀의 집 근처에서 있으면 그녀에게 적지 않은 민폐가 될 테니까.

해당 지역을 정화하며 강화 평온의 파동과 기본 평온의 파동도 펼쳐봤지만, 새까맣게 썩어버린 땅을 재생시키는 것은 황금빛이 섞여든 신식 파동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인은 여기서 자신이 내렸던 가설의 신빙성을 높였다.

‘역시 신식 흑령주의 여파는 신식으로만 해소할 수 있거나 아예 해소를 못 하겠군.’

자신의 영혼술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영기를 기반으로 쓰는 일반 영혼술. 심핵력을 얻은 이후의 강화 영혼술. 그리고 파편인을 녹이고 반로환동을 이룬 현재의 신식 영혼술.

데바스톤 산맥 초입에서 펼친 흑령주는 분류상 강화에 해당하지만, 어느 정도 신식에도 발을 걸친 상태의 능력이다.

그 증거로 강화 평온의 파동으로는 검은 기운을 억누르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신식 흑령주로 남은 흔적에 신식 평온의 파동을 쓰면 흑령주의 여파를 억누르는 정도밖에 안 될 거라는 말이지.”

신수화 노른을 탄 환인이 오른손을 뻗으니 손바닥을 중심으로 팔꿈치까지 마법진처럼 황금빛 띠가 여러갈래 생겨나며 금은빛의 아우라가 일렁인다.

이어 신식 평온의 파동이 발동하자 황금빛이 깃든 회색 안개가 전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의 가느다란 팔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파동을 뿌릴 때마다 그 범위에 있던 대지에 죽음의 기운이 지워지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에 안느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강화 흑령주가 이런데 신식은 진짜로 위험하겠네.=

=진짜요. 7급 성역은 미궁의 특급 마기도 안전하게 막아주는 결계인데 성역으로도 다 못 막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니까요.=

아영이 맞장구치자 백려강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숨 쉴 때마다 안 좋은 공기가 맡아지는 느낌이었어요. 현대에서 자동차 매연을 맡는 느낌이랑 비슷하게…….=

그리 말하다 벼락활을 든 백려강은 300m 떨어진 곳에 난 검붉은 나무 둥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나무둥치로 의태하고 있던 거미가 화살을 피해 하늘로 솟구쳐오른다.

마차 크기에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몸에 두른, 굵고 짧은 다리가 온몸에 기형적으로 난 괴물 거미.

일부러 피하길 유도한 공격이었지만 저렇게 알아서 하늘로 뛰어오르다니. 백려강은 사양 않고 활에 물 속성을 부여한 뒤 벼락 화살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꽈과과과과광—!!

우렛소리를 곁들인 벼락 줄기가 괴물 거미를 향해 발사될 때마다 백려강의 외뿔에서 푸른색 빛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 덕에 낙하하는 동안 무수한 벼락 줄기에 적중당한 괴물 거미는 땅에 내려섰을 때 말 그대로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다.

흡사 초고압 전선에 얽혀 죽을 때까지 지져진 모습.

그런 괴물 거미가 있는 곳에 신식 평온의 파동이 훑고 지나가자 검은 아지랑이가 걷혀나가며 괴물 거미의 끔찍한 실체가 드러난다.

방사능으로 변이된 것처럼 불결한 종기에 뒤덮인 몸뚱이, 거기서 살을 찢으며 돋아난 듯한 수많은 다리들.

아영이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린다.

=진짜 끔찍하게 생겼네.=

=벨, 방금 물 속성을 곁들어서 쏜 거야? 벼락 위력이 더 오른 거 같은데.=

=네. 각성한 뒤로 물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져요. 물을 다루는 것도 마치 바람 술사일 때 바람을 다루는 것처럼 쉽게 느껴지고요.=

자신의 외뿔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대답하는 백려강의 표정은 이전과 달리 조금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늘 아침, 언니들과 체력 단련 및 아침 훈련을 하며 대폭 늘어난 신체 능력과 예리해진 감각을 그녀도 느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활이 조금, 진심으로 힘을 줘서 시위를 당기면 활대가 부러질 것 같아서 조금 그러네요…….=

=유리텔이 마도기였으면 내가 장력과 활대에 강화를 걸어줬을 텐데. 유물이라서 개조를 못하는 게 아쉽네.=

「저쪽에서 괴물이 또 와-.」

노른의 경고에 맞춰 우렛소리에 이끌린 괴물들이 하나둘 검은 아지랑이에 뒤덮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괴물들의 돌격은 100m 안으로 들어올 새도 없이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와 백려강의 화살, 아영의 성술 보조로 빠르게 토벌되었고 그사이 환인은 신식 평온의 파동을 사방으로 뿌려 죽어버린 땅을 되살려 나갔다.

「야. 저쪽에 한 마리가 도망가고 있어.」

=어디? 저기?=

=멀어서 안 보이는데요.=

“이모렐. 가서 죽이고 와라.”

=네, 성제님.=

환인의 지시에 색이 바래듯 물빛이 빠지고 있는 여섯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친 이모렐이 환연이 가리킨 방향으로 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녀의 손에는 이실리테의 레드릭 얼터가 들려있어 2.5m에 달하는 체격이 2m에 가까운 적색 대검과 기묘한 매치를 이루고 있었다.

밀려오는 구름바다의 미궁에서 노획한 천인체와 융합해버려 되살아났다고 해도 무방한 이모렐도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실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천인체가 자신의 몸인 양, 노른과 비행을 겨룰만큼 세 쌍의 날개를 다루는 실력이 대폭 향상됐으며 사지를 움직이는 것도, 천인체의 위상력을 끌어올려 다루는 것도, 천인체의 신체 능력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영혼과 육신의 합일 때문일까. 천인체의 몸뚱이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머리카락의 색과 날개가 이모렐의 생전 체모의 색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드네빌라나 백려강보다 더욱 짙어 파란색에 가깝던 머리카락과 날개 깃털 색이 점차 옅은 금색으로 바뀌는 중인 것.

레드릭 얼터를 쥐고 날아가는 이모렐을 바라보던 안느가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묻는다.

=레드릭을 쟤가 쓰게 해도 괜찮아? 너 그거 엄청 아꼈잖아.=

=주인님이 주신 거니까. 하지만 주인님이 말씀하신 것도 있고, 이제 나보다 이모렐이 더 유용하게 쓸 것 같아서 양보한 거야.=

=음…… 하긴, 네 검술도 힘으로 분쇄하는 거에서 점점 기교 쪽으로 바뀌고 있으니까…….=

이실리테의 검술은 주인을 닮아가듯 무력 위주의 분쇄 형태에서 검술 위주의 기교 형태로 바뀌는 중이다.

그렇다고 공격력이 낮아졌냐면 그런 것도 아닌 것이,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에서 얻은 고대 기사검을 수리해서 쓰고 있는데 거기에 다중 검기 한 자루를 덧씌우면 안느도 기겁할 정도의 절삭력과 강도를 자랑하게 된다.

여기에 그녀의 다중 검기 컨트롤은 거의 손발처럼 다루는 수준에 이르러 그녀에게는 팔다리가 세 개 더 있는 것과 마찬가지.

환인과 매일같이 훈련하며 그의 최상급 방어술 핵심을 고스란히 익힌 데다 신체 단련도 빼먹지 않는 이실리테는 실질적으로 환인을 제외, 일행 중 최고 실력자와 다를 바 없다.

문득 떠올린 생각에 환인의 시선이 허리에 기사검을 찬 이실리테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모습은…….’

어렸을 적 아버지의 취미인 비박을 따라다니며 외국의 유명 sf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었다.

광선검이라 부르는 무기를 들고 포스를 사용하며 제국과 싸우는 기사들. 현재 이실리테의 모습은 그 나이트라고 불리는 이들과 닮은 점이 많다.

튜닉이라 부를법한 가벼운 옷차림에 손가락만 드러나는 살짝 오버핏 코트를 입고 타이트한 바지를 입은 차림. 저기에 검을 들면…….

“이실리테. 검을 뽑고 검기를 씌워보겠나.”

=네.=

갑작스러운 주문이지만 이실리테는 의문을 품는 일 없이 시키는 대로 기사검을 뽑아 다중 검기 한 자루를 씌운다.

그러자 폭이 얇고 긴 기사검의 검신이 빛에 잠겨 들며 정말 광선검을 든 여기사와 비슷한 느낌이 되었다.

“됐다.”

=……?=

=??=

혼자 만족한 환인을 향해 여자들이 궁금증을 드러냈지만, 환인이 이유를 알려주는 일은 없었다.

영화에서 본 게 생각나 시켜봤다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펄럭— 펄럭—

그 후 도망치는 괴물을 해치우고 돌아온 이모렐에게 신식 평온의 파동을 한 번 펼쳐준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숲에 만연한 죽음의 기운을 꼼꼼히 지운 뒤 곧바로 스프라울드를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도령. 마차 안 꺼내도 괜찮아?=

“마차를 꺼내면 속도가 줄어드니까. 지금은 시간이 중요하니 빠르게 스프라울드로 이동한 뒤 벨티칼로 가서 나이를 품은 열매를 구하록 하지.”

=스프라울드도 중급 도시니까 공간이동장치를 쓰면 벨티칼의 주도 헤뷜트로 곧장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유르파는 구름 한 점 없어 뜨겁고 후끈한 날씨에 우려를 드러냈다.

이렇게 더운 데서 이동하다 환인이 또 더위를 먹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이다.

“안느의 정수 덕분에 신체가 여름에 적응했으니 괜찮습니다. 유르파가 만들어준 삼베옷에 모자에 체온 조절 마도구도 있고 아영도 열기로부터 보호 성술을 걸어주고 있으니까요.”

또 노른이 달리거나 날 때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다.

=그래도 몸 상태가 나빠지는 거 같으면 곧장 말씀해주세요. 바로바로 성술을 걸어드릴 테니까요!=

“그래.”

대답하며 환인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웅크려 허벅지를 벤 채 눈을 감고 있는 환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오자마자 릴라이스와 무언가 대화한다 싶더니 유충이 번데기가 되는 것처럼 점차 외부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게 되어가고 있었다.

‘릴라이스와 계약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지하율의 집에서부터 이러고 있으니 조금 신경 쓰인다고 할까.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녀를 향한 믿음을 드러내며 환인은 쉬지 않고 스프라울드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추적자나 삼국 연합 조사대, 상단 등과 마주치는 일 없이 밤까지 달린 일행은 가도에서 살짝 빗겨나 방랑자의 안식처를 설치했다.

“의외군요. 우리가 사라진 장소 주변을 있는 대로 헤집으며 수색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을 줄이야.”

=여기서 흔적이 사라져가지고 이전 행적을 좇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님 저 멀리 수색 범위를 넓혔을 수도 있고요.=

=아영. 하얀 늑대들한테 연락은 안 해봤어?=

=오빠가 지금은 연락하지 말래서요.=

=그래? 왜?=

“내가 화나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응답 무반응이 가장 좋으니까. 혹시 네게 땅신 교단에서 연락이 오더라도 내가 언급하기 전까지는 연락을 받지 않도록 해라.”

=어어. 그럴게.=

“그럼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하지.”

=네.=

=옙.=

보통은 10시 넘어서 잠든 뒤 새벽 5시~6시 즈음에 일어난다. 4시간은 여자친구들을 안는데 시간을 쓰고 나머지 2~3시간동안 잠을 자는 것.

하지만 지금은 밤 8시. 지금 잠자리에 들면 새벽 3~4시즈음에 일어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렇게 동도 트기 전의 새벽.

알몸의 아영과 백려강 사이에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난 환인은 작게 하품하며 거실로 나갔다가 유르파가 이모렐과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르파 님. 이 옷은 저와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냐아냐. 무척 잘 어울려.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분위기의 옷이니까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걸? 내가 입던 거라서 조금 마음에 안 들겠지만 그점은 이해해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옷은 좋습니다만 천인체에는 잘 안 어울리는듯해서.=

=흐흥. 그럼 자기한테 직접 물어볼까?=

환인이 거실로 들어서는 걸 본 유르파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묻는다.

=자기, 어때? 저 옷, 이모렐한테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유르파가 함께 여행을 시작할 무렵에 입던 옷이군요.”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배꼽을 드러낸 저런 치녀 같은 드레스는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우니까요.”

=앗, 아하하.=

환인은 어두컴컴한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이모렐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난 밤사이 영혼과 육체의 동화가 좀 더 진행되었는지 머리카락도, 날개도 물색이 거의 다 빠져 금발에 아이보리색 날개로 변했다.

거기에 몇 컵일까 싶은 가슴을 완벽하게 감싸는 검은색 민소매 레이스 드레스를 입으니 예전 유르파의 색기를 그대로 복사해서 옮겨놓은 듯한 매력이 풍긴다.

환인은 키가 2배 이상 차이나는 이모렐에게 다가가 치파오처럼 앞으로 늘어진 옷자락을 옆으로 치워보았다.

그러자 밑이 트인 엷은 커피색 팬티스타킹에 V자로 서혜부 위쪽 골반까지 올라가는 형태의 끈팬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개를 들자 물색에 금색이 위아래로 뒤섞이는 독특한 안구가 살짝 홍조를 머금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으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머리를 내미는 이모렐.

환인은 부드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군. 그 몸은 이제 네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주인의식을 가지고 아껴 써라.”

=예, 성제님. 제 몸처럼 조심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모렐을 천인체에서 뽑는 방법이 없진 않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비록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찾아왔던 아르겐테아 정찰대 소속이지만, 부관에 불과한 그녀는 정찰대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고 지금은 반성과 함께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주고 있으니까.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포상 개념으로 내버려 두어도 되겠지.’

유르파는 환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이모렐의 뒤를 살짝 돌아보곤 변태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쪽 눈을 감은 얼굴은 약간 무표정에 가깝지만, 커피색 스타킹에 감싸인 그녀의 발가락은 한데 얽히면서 수줍은 듯이 꼼지락거리고 있다.

표정이 저런 이유는 선천적으로 표정 근육이 적어 무표정에 가깝기 때문이지, 그녀가 배신을 마음먹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밤 특이사항은 없나.”

=네. 거동 수상자는 없었으며 짐승 몇 마리가 방벽을 느낀 듯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온 것을 제외하면 괴물이나 마수의 접근도 없었습니다.=

“그래.”

아영의 말대로 조사 범위가 넓어져 등잔 밑이 어두워진 상태가 아닐까한다.

그렇다 해도 스프라울드에 도착하면 이쪽의 동태가 4개 국가에 전부 알려지겠지.

환인은 하나둘 일어나 방을 나오는 여자친구들을 재촉해 출발을 준비시켰다.

「마음에 안 들어.」

등에 환인과 이실리테를 태우게 된 노른이 불퉁한 목소리로 꿍얼거린다.

그걸 들은 이실리테는 환인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히고 자신에게 편히 기댈 수 있게 하며 조그맣게 웃음 지었다.

=주인님이 힘드시다잖아. 노른 네가 이해해줘.=

「이해해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니었으면 태워주지도 않았거든!」

=그래. 고마워.=

어제 온종일 노른을 타고 달린 결과, 환인은 밤에 약간의 피로와 근육통을 호소했다.

아무리 노른의 등이 최고급 세단처럼 편하다지만 어린아이 몸으로 10시간을 내리 타고 달리는 건 가혹한 일정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은 이실리테가 동승해서 환인의 살아있는 등받이 의자 역할을 하기로 했다.

쿠핀을 탄 안느가 부럽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나도 도령 등받이 잘 할 수 있는데. 이슬이는 젖이 커서 기대기도 어렵잖아.=

「넌 무거워서 싫어!」

=……나 그렇게 안 무거워!=

「거짓말! 이실리테 두 배는 무거우면서!」

=야이, 치사하게 팩트로 공격하냐!=

안느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평을 토로하자 아영이 실실 웃으면서 묻는다.

=그럼 난 어때? 플뢰고 이실리테 언니보다 체구도 작고 가벼운데.=

그 물음에 노른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감히 너 따위가?’ 하는 거만한 얼굴로 아영을 내려다보기만 한다.

시무룩해지는 아영의 옆에서 비행 빗자루 대신 이실리테의 쿠르티에 탄 유르파가 쿡쿡 웃었다.

=이슬이 아가씨는 노른이 밥도 챙겨주고 깃털도 다듬어주고 챙겨주잖니. 그게 가산점이 크지 않을까? 안느 아가씨 몸무게 정도는 노른이한테 전혀 부담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거야?=

「응.」

새초롬한 대답에 여자들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노른은 흥흥거리다가 훌쩍 날아올라 느긋하게 비행을 시작했다.

그러자 안느를 선두로 자연스럽게 대열을 잡고 길을 따라가는 여자들.

이실리테는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자신에게 등을 기대고 있는 환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어떠세요?=

“확실히 어제보다는 편하군.”

그녀의 I컵에 이르는 젖가슴이 좀 방해되지 않을까 했지만, 조금 뒤로 누우니 어깨 위로 그녀의 젖가슴이 닿는다.

게다가 바람의 힘을 이용한 활공식으로 하늘을 날고 있어서인지 희미하게 올라오던 진동도 사라져 이보다 편할 수가 없다.

덕분에 이것저것 계획을 구상하고 검토하며 편하게 3시간을 보낸 환인은 데바스톤 산맥을 배경으로 온통 상아색 건물 천지의 중급 도시 스프라울드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고.

=대장님! 저 여자 플뢰가 탄 회색 쿠에, 실종 신고가 들어온 마그나르 가문의 회색 쿠에입니다!=

=뭐라고!? 빌어먹을 플뢰년들 같으니! 당장 탈것에서 내려라, 이 범죄자들아!!=

성난 도시 위병들의 창이 겨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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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호랑이 콧털을 건드리는 중....

[작품 설정]

이모렐 (feat.천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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