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 데바스톤 산맥
“후아아…….”
“…….”
=…….=
=…….=
조용히, 소리 없이.
거의 양푼에 가까운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긴 냉국수가 국물까지 몽땅 지하율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데는 불과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먹는다기보단 삼키듯이 쑤셔 넣는 수준.
“이실리테 씨 요리 솜씨는 200년 넘게 살면서 만나본 어떤 요리사보다 훌륭하네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단 세 번의 젓가락질로 5인분에 가까운 면을 몽땅 먹어치우고 그릇을 들어 국물까지 게눈 감추듯이 비운 지하율이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짓자 이실리테가 질린 듯 살짝 더듬거리며 물었다.
=대…현자님, 국수 더 드릴까요? 부족하신 거 같은데요.=
“더 있어요?”
=네. 육수는 아직 많이 남았고 국수는 더 삶으면 되니까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너희도 더 먹을 거지?=
=어어. 많이 삶아줘.=
=옙!=
「나도 더 먹을 거야!」
지하율의 극찬에 살짝 기분 좋아진 이실리테가 면을 삶으러 들어가자 슬금슬금 환인과 지하율의 눈치를 살피던 아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지하율에게 묻는다.
=글고보니 이실리테 언니한테는 존칭을 쓰시네요?=
“나보다 잘하는 분야가 있는 사람은 존경스러우니까. 그리고 요리는 일종의 예술이잖아?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타인을 즐겁게 만드는 능력을 대성한 사람은 존중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어…… 그럼 다른 분야는요? 비술이나 성술 같은 거요. 성술은 다른 사람의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하고 비술은 부여 술법으로 사람들을 편하게 만드는 능력이잖아요.=
그 질문에 지하율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거 알아?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의 유전적인 질병은 성술로 치료하지 못해. 심각한 질병은 연구하면 치료할 수 있지만, 과연 그만한 노력을 귀족이나 호족도 아닌 일반인에게 할 성술사가 있을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무상으로 성술을 베풀 성술사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
보통 촌락의 주민이 성술사로 각성하면 보통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인근 호족이나 고족, 귀족이나 준귀족이 소식을 듣고 어떤 수를 써서든 끌고 가거나 아니면 인근의 교단에서 나와 아이를 데려가 버린다.
촌락의 주민 평균 연 수입은 동화 십수 닢 남짓. 그러나 성술사의 치료는 기본으로 1은화다.
그들 처지에서 성술 치료 한 번을 받기 위해서는 10년 단위로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런 돈이면 약초 같은 것을 구해서 쓰거나, 약초를 구하지 못하던가 약초로 해결하지 못하는 병은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다 죽는다.
아니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정도의 희박한 운에 기대 신전을 찾거나.
멀리 갈 것 없이 아영 자신의 경험만 되돌아보아도 알 수 있다. 그녀도 카락스의 암살자 시절 촌락민에게 성술을 베푼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은 임무에 지장이 있어 환자를 봐도 무시하거나 귀찮고 피곤해서 못 본 척했다.
아영의 안색이 흐려졌지만, 비틀리고 뒤틀려 균열이 생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율의 검은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비술사의 부여술로 만든 마도구의 혜택? 그것도 따져보면 몇이나 혜택받을 수 있을까? 성술만큼은 덜하겠지. 돈과 권력을 가진 놈들에게 고용된 비술사들이 마도구를 공장처럼 찍어대니까. 하지만 가장 싼 마도구도 동화 십수 닢은 해. 물어볼까? 촌락에서 마도구를 쓰는 주민들이 몇이나 될지?”
=안 쓰죠. 마도구는 번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을 조금 더 편리하게 하고자 만들어지는 물건이니까요. 마을의 주민도 ‘비싼 마도구를 살 바에는 귀찮아도 내가 조금 더 움직이고 말지.’ 이러는 사람이 많은데 촌락의 주민은 어떨까요.=
유르파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은 식탁을 슥 둘러본 지하율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도 이게 극단적인 시선이라는 건 알아. 지적하고 태클 걸 부분이 많다는 것도.”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알겠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절대다수는 그렇지 않기에 난 직업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실리테 씨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
=예…….=
저 주관은 틀림없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수십 년 넘게 은둔 은거하며 복수에 매진하고 삭막한 생활을 하진 않을 테니까.
아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성향을 살짝 엿보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녀의 마음속 어둠만 들여다본 기분이다.
지하율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잘 익은 김치를 맨입으로 먹으며 사과했다.
“밥상 앞에서 싫은 소리 해서 미안해.”
=엣? 아님다! 제가 눈치 없이 이상한 거 물어서… 죄송했슴다.=
그때 달그락, 어른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릇의 냉국수를 10여 분에 걸쳐 겨우 다 먹은 환인이 젓가락을 놓는다.
=오라버니, 더 안 드세요…?=
“배도 부르고 입맛이 없어서 더 못 먹겠다.”
=그렇지만 작은 그릇으로 한 그릇 밖에 안 드셨는데…….=
“나중에 다른 걸 간식 삼아 좀 더 먹으면 되겠지.”
“뭔데. 아저씨 더위 먹었어?”
어느새 음울한 기운을 감춘 지하율이 이죽거리면서 묻자 환인도 좀 전의 무거운 대화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대꾸했다.
“그래.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초봄 날씨 속에 있었는데 한순간 한여름 날씨로 들어와서 그런 것 같다.”
“하긴. 애들은 예민한 데가 있어서 조금만 환경이 변해도 쉽게 배탈 나고 그러니까. 그보다 지구는 이제 봄인가 보네.”
“여의도에 벚꽃이 활짝 폈더군.”
“벚꽃인가~. 벚꽃 활짝 필 때면 엄마랑 자전거 타고 한강 둔치로 꽃구경하러 가고 그랬는데…….”
지하율이 아련한 눈빛으로 추억을 더듬기 시작하자 유르파가 그의 옆으로 자릴 옮기며 묻는다.
=자기,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고? 더위 약 만들어 줄까?=
“괜찮습니다. 안느의 정수를 마신 덕에 저녁쯤 되면 적응될 거 같군요.”
=도령. 그럼 정수 좀 더 마실래?=
“이번에는 얼음 빼고 온수에 섞어다오.”
유르파가 구리 컵에 물을 담아 살짝 끓이고 안느는 지하율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젖을 꺼내 정수를 한 차례 더 짜낸다.
환인은 핑크빛 유두에서 송글송글 투명한 정수가 맺혀 흐르는 걸 바라보다가 지하율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젖을 짜는 안느를 세상 기괴한 것을 보는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역시 그녀에게 묻는 건 대성녀와 통신을 한 뒤로 미뤄야겠군.’
잠시 후 이실리테는 국수 면을 말 그대로 산더미같이 삶아왔고 얼음을 동동 띄운 육수도 대접이 아니라 대야 같은 곳에 전부 담아왔다.
“잘 먹을게요!”
=잠시만요. 이렇게 드시면 살짝 마른 면에 육수가 스며들어서 더 맛있을 거예요.=
이실리테가 젓가락과 집게로 솜씨 좋게 돌돌 말아 주먹 크기로 만들어주자 지하율의 눈이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멸치 육수에 면 한 덩어리를 넣고 토핑을 좀 더 올린 뒤 간장을 살짝 뿌리는 지하율.
그대로 양 볼이 가득 찰 정도로 후루룩 먹고서는 살짝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마시써어어……!”
=너희들도 먹어. 유리 언니, 좀 더 드릴까요?=
=난 많이 먹어서 괜찮아, 아가씨.=
면을 차례대로 말아 여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먹으라는 듯이 5~6초마다 한 덩이씩 잔뜩 만들어놓은 이실리테도 환인의 옆에 앉아 국수를 먹기 시작한다.
환인은 안느 토닉 워터를 조금씩 마시면서 재개된 여자친구들의 식사를 바라보다 지하율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네 말에서 조금 신경 쓰인 게 있었는데. 니오네브레스로 납치당한 지구인들은 각성할 때 희귀 직업자가 될 가능성이 큰가.”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국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지하율이 육수를 한 모금 더해 꿀꺽 삼키곤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 니오네브레스인은 2~300명 당 1명꼴로 각성하는데 지구인은 그보다 훨씬 낮은 확률이지만, 각성하면 10명 중 7명이 희귀 직업을 가지는 편인 데다 희귀 직업을 가지지 못해도 이중 직업이나 삼중 속성을 가져.”
혹시 차원의 벽을 넘은 영향이 아닐까. 벽을 한 번 넘으며 영혼과 육체가 조화롭게 재조립되니 뛰어난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커지는 거다.
“…놈들이 지구인을 계속 소환하고 모으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건가.”
“희귀 직업이라고 일반 각성자들처럼 실용적인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전력 증강이 목적이라면 소환에 들이는 비용을 니오네브레스인 각성자 육성에 돌리는 게 훨씬 싸게 먹힐걸.”
“…….”
“우연히 탑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을 때는 뭔가 시간? 차원? 관련 술식을 연구하는 느낌이었어. 페이즈 오더로 각성하고 사부님의 눈을 이어받은 뒤에 그걸 조사해보려했지만, 너무 경계와 감시가 삼엄한데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부족해서.”
정보를 더 알아내는 것은 실패했다는 이야기.
환인도 곰곰이 생각했다.
소환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그걸 별다른 성과가 없어도 수백 년 동안 지속해왔다는 건 무언가 포기할 수 없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고 봐야 한다.
‘목적을 정확히 알아내야 놈들 중 일부가 도망쳐서 어둠 속에 숨어들어도 추적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목적을 알아낼 방법이 안 보인다. 내부 정보를 캐내기에는 인맥도 너무 얄팍한 데다 이용하기에 애로사항이 깃든 인물들뿐이고.
「배불러~.」
눈을 감고 생각을 이어가던 환인은 노른이 냉국수를 배불리 먹어 만족스러워하는 걸 보고 그녀를 호출, 신수화 시켜 등에 타고 날아올랐다.
맛있는 밥을 배부르게 먹고 환인과 함께 비행까지 하는 게 무척 신난 노른이 해맑은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며 묻는다.
「어디로 갈 거야?」
“통신 수정구를 쓸 수 있는 곳까지 나가자.”
「우리가 들어왔던 산맥 입구로 가면 돼?」
“아니, 감시의 눈길이 있을 수 있으니…… 저기 보이는 구름 위로 올라갈까.”
「알았어!」
“이모렐, 잘 따라와라.”
=예, 성제님.=
노른이 녹색의 아지랑이 같은 바람을 휘감고 하늘로 솟아오르니 호위 역할의 이모렐이 여섯 장의 날개를 활짝 펼쳐 바짝 뒤따른다.
불러낸 바람에 힘입어 어려움 없이 두껍게 발달한 뭉게구름 위로 올라오자 저 멀리 수직으로 발달해 탑처럼 거대하게 솟은 적란운이 시야에 들어온다.
구름 위에서 거대 뱀과도 싸워본 경험 때문일까. 저 적란운 속에 날아다니는 성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이다.
환인은 자기 다리 사이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환연을 잠깐 본 뒤 노른의 등을 토닥였다.
“난 통신하고 있을 테니 마음대로 날아다녀도 된다. 단 주변을 너무 벗어나지는 말고.”
「응!」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는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고 통신 수정구를 꺼내 위상력을 흘려 넣자 10초 후, 수정구 안에서 익숙한 외모의 금빛 미소녀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눈을 크게 뜬다.
[성제?]
“예. 잘 지내셨습니까.”
[소녀야 영도에 콕 박혀있는데 문제가 생길 일은 적지. 그보다…… 성제는 잠시 못 본 사이 제법 젊어지셨군?]
“젊어졌다기보단 어려진 거지요. 자애신께서 내린 시련을 이겨냈더니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연락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소식을 가져오시는군. 아무튼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오.]
살포시 어른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닌실=아나그, 대성녀의 얼굴에 약간 그림자가 낀 것을 알아차린 환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고민이 있으신 얼굴입니다. 제가 부탁드린 일에 심력을 소모할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렇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답을 드려야할지, 성제의 부탁은 하얀 늑대들의 보조 덕에 매우 뛰어난 성과를 냈을 만큼 완벽히 이루어졌소. 간략히 요약하면 그대가 퍼트린 소문에 라드세아, 벨티칼, 히스론드 삼국이 연합하는 결과가 나왔으며 메리아놀 종족연합국가 협의회에 진상규명 정식으로 요청하여…….]
히스론드 왕실과 라드세아 왕실이 합작해 차원 방랑자 강제 소환 건에 관하여 삼국연합의 조사단 파견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플뢰족의 자국 입성을 전면적으로 무기한 금지하는 것, 그리고 기술 및 무역 교류를 무제한 금지한다는 성명을 공식 발표하였다고.
“라드세아도 그에 찬동하고 나설 줄은…… 예상 이상으로 적극적이군요. 역시 흐라스린드 사태가 계기였습니까.”
[아니, 성제 때문이었소. 그 발표에 앞서 호작약 성왕과 기밀 통신을 5분가량 하였는데 성왕은 성제와 긴밀한 사이가 되고 싶다 직설적으로 알리시더군.]
“……그렇습니까? 그러면 대성녀님의 고민은 역시 아드네빌라겠습니다.”
[맞소…….]
환인의 지적에 대성녀는 시름이 가득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성제. 신수에게 영성이란 무인지 아시오?]
“정확히는 모르고 어느 정도 짐작만 하는 정도입니다. 사람의 인간성보다 한층 높은 개념의 무엇인가가 아닐까, 하고.”
[거의 맞소. 영성이란 신수라는 존재의 개념 그 자체지. 소녀의 영성은 자애와 선을 행하며 자신의 마음에 거짓이 없을 것이오. 바다신님의 신수인 백청룡께서도 비슷한 영성을 지니고 계시겠지. 그러한 영성이 꺾인다는 것은 그 존재로서의 격이 떨어진다는 뜻이며 그것은 크나큰 오염이 발생하여 영혼이 쉽게 더러워질 수 있음을 가리키오.]
“아드네빌라의 영성이 꺾였단 말씀입니까?”
살짝 놀란 그의 표정에 닌실이 안타까워하는 작은 미소를 짓는다.
[그렇소. 거기에 백청룡께서는 그대를 변호하고 도움을 주고자 메리아놀을 강하게 압박하는 수단을 골랐소.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 근방에 비를 끊임없이 뿌려 포기를 유도하려한 것이지.]
“그 소식은 복귀하자마자 대현자를 만나 들었습니다. 그 수해로 인해 수백 명의 사상이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하더군요.”
[수백 명이 아니오.]
“…설마…….”
[얼마 전, 막대한 수량의 호우로 인하여 패시지 인근 해안가에 형성된 휴화산의 화산호가 범람, 산 귀퉁이가 무너지며 수천억 톤의 물이 일제히 쏟아져 산 아래 도시를 덮쳤지.]
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만 쏟아진 게 아니다. 물의 무게, 무너진 토사와 바위의 무게를 합친다면 조 단위의 질량이 도시를 덮친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 입장에서는 산채로 무너지는 빌딩에 깔린 셈.
[도시 방벽은 제 기능을 다 하였으나 압도적인 재해에 1초조차 막아내지 못하였고 도시는 그대로 폭류에 휩쓸려버렸소. 추정 사망자는 수만 명, 실종자는 십수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재해였소.]
다시 시름에 잠긴 대성녀가 말문을 잇지 못하였지만, 환인은 그 뒤에 이어져야 할 이야기를 짐작했다.
“그 일로 아드네빌라가 영락한 거군요.”
[……소식을 듣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그녀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소. 여전히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백청룡께서는 이미…… 이지를 잃고 한낱 짐승이 되어 한 가지 행위만 반복하게 되었을 거라 짐작하고 있소.]
“비를 뿌린다는 행위 말입니까…….”
비가 내리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인도양에 가까울 만큼 넓은 알류겔 호수 가장자리에 죄다 비를 뿌렸던 아드네빌라다. 절대 작지 않은 범위일 터.
4개월째 내린 비로 패시지 주변은 정령을 동원하더라도 복구에만 수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할 만큼 토지가 유실되었겠지.
유실된 토지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흙탕물이 되어 앞바다를 물들였을 것이고 그로 인해 바닷속 생태계도 파괴되어 수중 생물이 모두 떠나버렸을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메리아놀 입장에서는 막대한 피해를 지금도 실시간으로 입고 있다는 이야기.
대성녀는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지를 잃은 신수는 매우 위험하오. 영락하여 신력은 발휘할 수 없게 되었을 터지만 본신의 권능은 여전할 것이니 위험성으로만 보면 10급을 넘어서겠지. 만약 패시지에 큰 힘이 움직인다면 거기에 자극받은 백청룡이 포악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소.]
“…….”
일이 간단히 진행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뒤틀릴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고민하던 환인은 대성녀에게 질문했다.
“아드네빌라가 어디서 소식이 끊겼는지 아시는 것 있습니까.”
[소녀도 정확히 알 수 없소. 인연이 있는 초월급 정령들에게 물어보아도 알지 못하거나 맹약에 따라 알려줄 수 없다고만 하여…… 현재로서는 패시지 인근 바다가 아닐까 추정하는 정도뿐이오. 혹시……?]
“그녀의 영락에 제 책임도 일부 있는 듯하고, 약간이지만 신세 진 것도 있으니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드네빌라가 무서운 것은 신력과 신통력을 바탕으로 비상식적인 지성과 미지의 능력을 뽐내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미쳐서 제정신을 잃고 신력도 쓰지 못한다면…….
‘신식 영혼의 파동이나 신식 회령주로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니 시도해볼 것은 시도해봐야지.’
[알겠소. 소녀도 전력을 다하여 백청룡이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겠소.]
환인이 나서겠다는 이야기에 대성녀도 각오를 다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한결 표정이 나아진 대성녀는 이어서 그에게 벌어졌던 일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자애신의 시련과 몸이 어려진 이유 같은 것들.
[허, 허어……!]
그녀는 니오네브레스에서 가장 큰 후원자이자 지지자이며 그녀 또한 자애신의 신수로 짐작되는 만큼 비교적 소상히 오르빈치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대성녀는 탄복과 감탄과 흠모의 감정을 표정에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자애신님께서는 온화하고 상냥하신 분, 성제가 그리 정했다면 그분께서는 뜻을 존중하여주실 테지만……. 마냥 마음 놓고 있지는 말아야 할 것 같군. 성제 그대의 능력이 오죽 출중하여야 말이지.]
네 자질이 너무 뛰어나 신께서도 내버려 두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환인은 그저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렇다 하여도 그분께서 내리신 시련을 통과하다니, 과연이라 할지……. 경하드리오, 성제.]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음…… 나이를 빨리 먹는 방법이라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오. 다만 나이를 자연스럽게 먹는 것처럼 성장하는 방법은 소녀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군.]
“그렇습니까.”
[연약한 아이 모습으로 계속 있는 것도 곤란하겠지. 소녀도 영성들을 불러다 수단을 찾아볼 것이나,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하율의 집으로 되돌아온 환인은 백려강의 도움을 받아 이실리테와 함께 몸을 씻었다.
꽤 긴 시간 하늘 위에서 통신을 이어갔기에 햇빛을 가리지 못한 팔이 약한 화상을 입은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데다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푹 젖었기 때문.
“몸이 이렇게 허약해서야 아드네빌라를 찾더라도 가까이 가는 건 무리겠군.”
욕조에서 알몸의 이실리테에게 안겨 그녀의 젖가슴을 베개 삼아 미지근한 물에 잠긴 채로 중얼거리니 백려강이 외뿔을 빛내며 수온과 욕조물의 정화를 유지하다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아드네빌라님이 영락하셨다니 마음이 아파요. 목숨을 잃은 분들도 안타깝구요…….=
“…….”
그럴 만도 하지. 백려강은 아드네빌라에게 큰 은혜를 느끼고 있을 테니까.
환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가 몸을 돌려 물에 둥둥 뜨는 이실리테의 뽀얀 젖가슴을 주물주물 만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이실리테도 자세를 고쳐서 그가 어깨까지 물속에 잠기도록 하는 한편 그를 살짝 안아 마음껏 만지도록 가슴을 내밀며 묻는다.
=주인님, 그러면 대성녀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실 때까지 기다리실 건가요?=
“그럴 수는 없다. 지금은 메리아놀이 진상규명 조사단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지만, 상황은 제법 나빠. 언제 문을 열고 조사단을 받아들일지 모른다.”
문을 연다는 것은 내부의 정보를 모두 숨긴 이후가 되겠지. 조사단도 그 점은 주의하고 있을 것이지만 환인은 그런 점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조사단의 이동으로 아드네빌라가 자극받아 날뛸 경우.
4개국이 힘을 합친다면 이성을 잃고 신통력마저 상실한 아드네빌라 정도는 역으로 토벌해버릴 수도 있다.
만약 그녀를 토벌한다면 해도 자신이 해야 한다. 용인 그녀의 신체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그녀의 티 없이 깨끗하던 육체에 깃발을 꽂은 것은 자신이니까.
‘신식 청령주를 난사하면 이길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지.’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이요?=
이실리테의 손이 안마하듯 자신의 등이며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걸 느끼면서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율에게 물어봐야지. 전지의 눈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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