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08화 (708/813)

707 데바스톤 산맥

여자친구들과 집을 나와 근처 잔디밭의 나무 아래로 이동한 환인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은 3월 말이었지만 니오네브레스는 이제 한여름이다. 강한 햇살 아래에서 움직이니 따스함을 넘어 피부가 따갑고 숨도 턱턱 막힌다.

산길을 탈 때는 노른이 등에 태워주기도 했고 나무가 울창해 햇빛을 많이 가려주었지만, 이곳은 햇볕을 가릴 장소도 별로 없어 무더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어린아이의 몸이라 이런 건가.’

여자친구들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멀쩡하다. 유르파도 살짝 손부채를 부칠지언정 크게 더위를 타지 않는 모습이다.

자신도 성인 상태에서는 더위나 추위를 크게 느끼지 않았으니 몸이 어려지며 각종 내성과 신체가 덩달아 약해진 것으로 봐야겠지.

긴소매 겉옷을 벗어 이실리테에게 넘겨준 환인은 통신 수정구를 켜 영도의 대성녀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지지직거리며 방해 전파를 받은 TV처럼 흐릿한 노이즈만 낀다.

“지하율이 주변에 통신 방해 염파를 뿌려놓은 건가.”

데바스톤 산맥 초입에서는 통신을 할 수 있었으니 지하율이 이곳의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 손을 써놓은 게 맞을 거다.

어쩔까 하던 환인은 그냥 아스펜드에 수정구를 집어넣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축 늘어졌다.

너무 덥군…….

=주인님, 땀이 많이 나요.=

“음.”

힘없이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간 이실리테가 최고급 실크 손수건으로 이마며 목에 난 땀을 살살 닦아준다.

옆에서 안느는 컵을 꺼내 물을 따른 뒤 보존용 식재 주머니에서 얼음을 몇 조각 띄우더니 등대의 빛 코트 앞을 열어 한쪽 젖가슴을 깐다.

그리고 태연스레 젖을 짜 정수를 물컵에 흘려 넣었다.

햇빛을 받아 더더욱 하얘진 그녀의 젖가슴 첨단에서 맑고 투명한 정수가 방울방울 흘러내려 얼음물에 섞여들자 마치 지중해의 투명한 바다처럼 얼음물이 반짝반짝 빛난다.

=이거 마셔. 도령 안 그래도 몸이 어려져서 더위 먹기 쉬울 텐데 이거 마시면 덜 탈 거야.=

“…….”

그걸 받아서 한 모금 마신 환인은 위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청량감에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얼음물에 톡 쏘는 듯한 탄산감과 뇌까지 청량하게 만들어주는 정수가 섞여 더위로 일그러진 신체 밸런스를 단숨에 바로 잡아주는 느낌이다.

‘안느 토닉 워터인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표면에 살얼음이 낀 컵을 두 손으로 잡고 조금씩 마시고 있으니 가방에서 모자를 꺼낸 유르파가 여기저기 깁고 꿰매서 바느질해 그의 머리에 맞는 모자를 만들어온다.

=자기, 이것 쓰고 이것도 입어. 직사광선만 막아도 조금은 나아지니까.=

그녀가 내민 삼베옷 같은 리넨 재질의 얇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자 햇빛이 차단되고 통풍이 뛰어나 시원함이 배로 는다.

여기에 백려강이 손바닥에서 바람을 일으켜 불어주고 물의 정령으로 체온을 서늘하게 만든 아영이 생체 의자가 되어주니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을 정도.

“아주 왕후장상이 따로 없네.”

뒤늦게 나와 그걸 본 지하율은 붉어지고 퉁퉁 부은 눈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결정은 내렸나.”

“……아저씨 파티를 따라갈 생각은 없어. 하지만 도와는 줄게.”

검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하얀 니삭스에 검은 구두.

저렇게 입고 덥지 않은가 생각하며 그녀의 의중을 나름 파악한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쪽 계획은 별다른 게 없다. 메리아놀의 상황을 확인하고 영도를 중심으로 라드세아, 히스론드, 벨티칼 삼국을 움직여 정치적으로 압박하도록 조작한다. 그 후 물리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거지.”

“괜찮네. 메리아놀을 압박해서 차원 방랑자 관리 건을 빼앗아 삼국이 골고루 나누고 영도가 그들의 관리를 담당하게 하면 메리아놀 빼고 다 이득 볼 테고. 하지만 주도의 방어 역장은 어떻게 할 건데?”

“일단은 스스로 해제하게 할 생각이다만 실현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본격적인 절차는 이렇게 될 거다.”

메리아놀의 주도 시민들에게 그들의 왕족이 어떤 자들인지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후 자신이 가진 증거를 바탕으로 차원 방랑자 강제 소환 범죄와 관련된 자들을 내놓으라 한 뒤, 저쪽의 대응 경과와 절차에 따라 방어 역장 내부를 부수는 쪽이 될 것이다.

출입구는 당연히 존재할 것이고, 자신의 영혼술은 조그마한 틈만 있다면 내부를 말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으니.

환인의 설명에 발갛게 부은 눈 주변을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식히던 지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을 대전제로 깔아놨네. 하긴 그 작자들이 순순히 나와서 모가지를 내밀진 않을 테니까.”

“패시지 공격에 앞서 투르시온과 푸른 나뭇잎의 탑 귀족들의 영지를 공격하는 게 선행될 수도 있다.”

“……영지 공격은 그네들 방어벽 수준을 생각하면 아저씨 혼자로도 충분할 테고, 아저씨가 내부에서 손을 쓰면 난 외부에서 손을 쓸게. 결행 하루 이틀 전에 연락 줘. 거기에 맞춰 움직일게.”

“어떤 식으로 손을 쓴다는 거지.”

“골렘을 동원할 거야.”

“……저 산맥 입구에 있는 여성형 골렘 말인가.”

“응. 방어 역장은 요격 반사 기능이 있는데 그거 문제도 있고, 역장에 부하를 가장 크게 주는 건 위력보단 질량이거든.”

“너와는 꽤 상성이 나쁜 기능이군.”

“맞아. 내 직업, 페이즈 오더는 세 가지 에너지를 교차해서 이미지를 현세에 구현하는 희귀 직업이야. 아저씨 그린 랜턴 알아? 히어로 영화.”

“모른다. 하지만 대강 알 것 같군. 넌 파괴 쪽에 상상력을 집중한 단순한 타입이라는 거겠지.”

아까 만든 푸른 다리도, 환상으로 이곳을 숨긴 것도 페이즈 오더 능력으로 만든 거였나. 제법 훌륭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하단 평가에 뚱한 표정을 지은 지하율이 뭔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상상력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할수록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직업이 페이즈 오더인데 난 때려 부수는 거만 잘해. 아무튼, 아저씨가 혼자서 안쪽에 날뛰는 것보다 안팎으로 잡고 흔들면 여휘도 막대한 과부하에 피를 토하지 않을까? 마력 역류로 머리가 터져나가 뒤지면 쌩큐고.”

=…….=

안느의 표정이 시무룩해진 걸 환인도 눈치챘지만, 지금은 지하율과 의견을 나눈다.

“확실히 골렘으로 지원한다면 요격 기능이 분산될 테니 이쪽에 가해지는 부담이 덜하겠지. 그전에, 넌 꽤나 여휘를 싫어하는군. 그 사도의 입장이 어느 쪽인지 밝혀진 게 있는 건가.”

“아저씨. 다른 나라 사도 봤어?”

“히스론드의 광상녀라면 직접 만났다.”

“다른 두 나라도 비슷해. 라드세아의 굉호제는 밥보다 싸움을 좋아하는 미친 고양이고 벨티칼의 대사주는 신의 뜻 외에는 길거리 돌멩이 취급하는 뱀 대가리야. 하지만 메리아놀의 여휘는 틀려. 메리아놀의 지배 계층은 여휘를 정점으로 그 아래 플뢰하고 프라우드가 있는 식이야.”

“정황 증거라는 거군. 차원 방랑자를 두고 실험하는 작태는 여휘의 용인이 없다면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니.”

“응.”

일련의 대화에 환인은 한 가지, 위험한 가설을 떠올렸다.

“그럼 일련의 상황은 땅신의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사도는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하니까.”

“…….”

=……?=

=……!!=

각양각색의 반응들이 주위에서 터져 나온다. 여자친구들은 환인의 말뜻을 이해하고 창백해지거나 흠칫 놀라고 지하율은 떠올리기 싫은 일을 기억해낸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환인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그 가설을 부정했다.

“아니, 실언이다. 정말 차원 방랑자로 실험하는 게 신의 뜻이라면 여휘는 대대적으로 국가를 움직였겠지. 지금처럼 뒤에서 숨어 사건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신들끼리 경합이 있을 수 있고 신이 여휘의 사고를 유도했을 수도 있으니까.”

“신이 그런 식으로 개입한다면 니오네브레스는 지금보다 한층 더 개판이 되어있었을 거다. 신의 뜻을 곡해한 자들이 일으키는 환난에 정신이 나가버려 신의 뜻을 받들었다며 나라를 세우려 하거나 자신의 정통성을 두고 왕실과 싸우려 든다거나.”

특히 각 교단의 세를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개판의 중심에 교단도 한몫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불안정하고 불합리할지언정 개판은 아니다. 신들의 성향은 기본적으로 무관심이고 때에 따라 그 신의 성향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지하율이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얼마 전 오르빈치에 발을 내디뎠다. 거기서 자애신의 뜻을 엿볼 수 있었지.”

“……그런 거면…….”

“네가 젬카인드라고 부르는 종족은 예지 능력이 뛰어나다지. 여휘는 너와 나, 현실적으로 본다면 너겠지. 너와 관련된 미래의 편린을 접하고 경각심에 역장을 펼쳤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본다. 물론…….”

사정은 둘째치고 무능한 것은 사실이다.

지배 계층의 정점에 있다면 그러한 예지를 했을 때 이유부터 확인해야지, 다짜고짜 역장을 펼쳐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그러느라 침묵 상태에 빠져 국정에서 제외되면?

소환 사건에 연관되어있는 놈들이 활개 칠 기회만을 주게 된다.

즉 메리아놀이 이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은 전면적으로 여휘의 판단 미스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거다.

“…….”

“무식과 무지는 잘못이 아니다. 물론 무식과 무지에서 나온 선택이 불러일으킨 결과에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저씬 신이랑 얽히고 싶지 않은 거 같네.”

“나는 현재 자애신과 얽혀있다. 이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여기에 땅신과도 얽히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내 목적은 안전한 지구 귀환, 여휘를 박살 내는 건 그자의 태도와 반응을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시에 역장을 펼친 건 여휘가 방어적이며 수동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자가 앞장서서 악의 축이나 할 법한 일을 태연히 저지르지 않을 테니 이쪽의 행동 여하에 따라 이쪽 편으로 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가 이쪽에 가세한다면 원흉을 뿌리 뽑고 쓸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무작정 적으로 상정하는 것은 미뤄두자는 이야기지.”

“그러니까 공격 과정에서 피를 토하거나 자빠지는 건 상관없지만, 여휘의 소멸을 목적으로 움직이진 말자는 거네……. 이해했어. 그쪽이 훨씬 타당하고.”

설마 여휘를 용서하고 놔두자는 이야긴가 싶어 살벌한 기운을 뿌리던 지하율이 기운을 갈무리하며 멋쩍게 중얼거린다.

“거기 패시지에 있는 차원 방랑자들은 어쩔 셈이야? 수백 명은 될 텐데 그중에 직업자는 한둘 정도…… 하나둘이라 해도 직업을 각성하면 높은 확률로 희귀 직업을 갖게 돼. 저쪽에 제대로 가스라이팅 당했으면 우릴 공격할 텐데 그것들은?”

지하율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환인은 왠지 더위에 숨이 막힌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눈에 장막이 드리워져 사리분간을 못 하고 이쪽을 죽이겠다는 식으로 달려들면 죽여야겠지. 그 외에는 그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래.”

“계획의 기본 골자는 이렇다고 기억해두고 있어라. 중간에 변경될 수도 있는데 네가 알아둬야 할 변경 점이 발생하면 따로 연락을 주지.”

“알았어. 메리아놀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는 자리가 있으면 나도 설 테니까 연락해줘. 이거 내 통신 수정구 코드.”

암호화가 되어있는 복잡한 코드를 받아 챙긴 환인은 조금 현기증이 나 눈썹을 찡그렸다.

나무 그늘에 있다고는 해도 뙤약볕이 내리쬐는 후끈후끈한 밖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

환인의 그런 기색을 읽은 지하율은 힐끔 하늘의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곤 자기 집을 뒤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더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해. 집안은 어느 정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시원할 거야.”

“…그래.”

아영의 허벅지 위에서 일어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옆에 따라붙은 지하율이 골반으로 툭, 환인의 몸을 친다.

그 바람에 한 번 휘청인 환인이 어이없어하는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아저씨, 컸을 때는 되게 재수 없고 얄미웠는데 그렇게 작아지니까 귀엽네.”

“……좀 전까지 가족사진을 보며 힝힝 울고 짜던 200살 여고생보단 덜하겠지.”

“뭐, 뭐! 질질 안 짰거든!”

“200살 여고생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 건가.”

“익……!”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환인과 지하율을 따라가던 여자들은 복잡한 심경의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신이 어쩌고 사도가 어쩌고.

아영은 자기 뺨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엄청 아프다. 꿈은 아닌데 왜 이렇게 꿈결처럼 멍할까.

=저…… 언니들. 오빠가 하는 일의 규모가 어째 점점 커지는 거 같지 않아요? 사도님들에 신님까지 언급 나오고 오르빈치에 천원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애초부터 신님의 가호를 받은 느낌이기도 하고…… 다행인 건 자기도 신님하고 싸우겠다는 말은 안 하는 거긴 한데…….=

아영과 유르파의 대화에 안느가 혼이 반쯤 빠져나간 표정을 짓는다. 이실리테는 그걸 보고 안느의 등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안느. 정신 차려.=

=응…….=

이실리테에게 힘없이 대답한 안느는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하아,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요즘 들어서 난 소시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오라버니 앞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로 생각해요…….=

=아니아니. 난 여러 미궁도 돌아다녀 봤고 죽음의 문턱도 한두 번 경험해보면서 꽤 대범해졌다고 생각하는 축이었거든? 그런데 도령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으니까 막…… 물러나고 싶고 여기서 적당히 멈춰도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신이랑 사도랑 싸운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막 튀어나오니까.」

=…….=

=…….=

환연의 대꾸에 여자들이 입을 꾹 다문다.

앞서가며 깩깩거리는 지하율의 고성에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가 밀려오지만 무언가 고요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따가운 햇볕 속에 있지만, 한기가 살짝 드는 기분이다.

이실리테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먼저 한 발 나아가며 도발하듯 툭 말을 던졌다.

=겁나면 여기서 여행을 멈추고 돌아가도 돼. 주인님께는 내가 잘 설명해 드릴게. 주인님 곁에는 나만 있어도 괜찮으니까.=

……뭐?

=야! 누가 멈춘대? 너 혼자 도령 독차지하는 거 두고 못 봐서라도 끝까지 도령 쫓아갈 거다!=

=맞아요! 전 이제 와서 갈 곳도 없다고요! 죽을 때까지 오빠 곁에 붙어있을 거예요!=

=저, 저도예요…!=

대항심을 불태우듯 환인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여자들.

뒤에 남아있던 유르파는 이실리테의 도발 한 번에 일변환 분위기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러다 이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유르파. 안 가?」

=응. 가야지.=

「……너무 신경 쓰지 마.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날개 찢어진다잖아.」

다 안다는 얼굴로 심드렁하니 말하는 환연을 향해 유르파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해도 휴식은 해야 한다. 그에게는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필요하고, 그건 멀리 볼 것도 없이 자신들이니까.

지하율의 집으로 돌아와 아영의 무릎베개를 하고 누운 환인은 노른이 부쳐주는 바람을 맞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도 패시지 인근에 4개월째 비가 내리고 있다면 상황이 심각하겠군.”

“정령들을 동원해다가 비를 뿌리는 원흉이 백청룡인 건 알려졌어. 사람들의 원망은 백청룡하고 이 사달을 만든 협의회를 비난하고 있고. 뭐 이쪽은 큰 문제가 아니야. 아저씨, 그 백청룡이랑 잘 아는 사이지?”

“그래.”

“그 백청룡, 지금쯤 타락했을지도 몰라.”

“…….”

느닷없는 이야기에 환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검은 방석에 양반다리로 앉아있던 지하율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에 다리를 다시 꼬아 앉는다.

파란색 줄무늬 팬티.

“아저씨, 신수들의 최종 목적은 오르빈치로 가는 거 알고 있어?”

“광상녀에게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신수들의 가장 큰 목적이자 과제는 우주수를 지키는 거라더군.”

“응. 그런 신수는 정갈함이 가장 중요해. 우주수 주변에 오물을 묻히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정갈함에 이유 없는 살생은 큰 걸림돌이 되거든.”

4개월간 이어진 수해에 죄 없는 사망자들이 대거 발생했다는 건가.

“그전에 앞서 알류겔 주변에 홍수를 일으키기도 했다만.”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알류겔 대홍수에 대해서 전지의 눈으로 일부 살펴봤는데 그건 괜찮아. 루크랑들이 백청룡을 먼저 이용하려 들고 공격했다가 반격받아 몰살당한 거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달라. 정보가 제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전지의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선제공격이자 화풀이야. 4개월간 못해도 수백 명이 죽었을 텐데 그 충격은 신수의 영성을 더럽히기에 충분할 걸?”

환인은 눈을 감고 노른이 부쳐주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해가 안 간다. 그 아드네빌라가 메리아놀에 홍수를 일으켰다니, 왜? 무슨 이유로?

‘혹시 그 일 때문인가.’

팔라툼에서 있었던 그 날, 한 번 숨이 멈췄을 때 그녀의 영성에 문제가 생겼다면 나름대로 설명이 되지만…….

주위를 둘러봤지만 환연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하율 앞에 나서기 싫어 쿠에들에게 가 있는 걸로 보인다.

릴라이스에게 질문하더라도 그 정령의 성격상 순순히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몸을 일으킨 환인은 지하율에게 요청했다.

“이 근방을 뒤덮고 있는 통신 방해 염파를 잠깐 거둬줄 수 있나.”

“싫어. 이건 단순한 방해 신호가 아니야. 온갖 신비적인 측면에서 날 찾아내는 걸 막아주는 영역이라고. 날 찾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잠깐이라도 거뒀다간 온갖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거든?”

질색팔색하는 그녀의 거절에 환인은 주방에서 냉국수를 만드는 이실리테와 백려강, 유르파를 잠깐 돌아보다가 다시 아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물정령으로 체온을 낮추고 있는 덕분에 최고급 물베개를 한 기분.

‘어쩔 수 없지. 점심 먹고 잠깐 나가서 통신을 한 뒤에 돌아오는 수밖에.’

=안느, 준비 다 됐으니까 거실에 상 좀 펴 줘.=

=엉. 이모, 좀 도와줘.=

=예.=

문득 환인의 시선이 세간에서 대현자라 불리는 지하율에게 향했다.

“노을색 쿠에는 성격이 사납기 짝이 없는데 넌 순하네.”

삐?

꽁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실루의 머리며 등을 쓰다듬고 있는 지하율.

신체의 성장 방법에 대해 아드네빌라에게 물어보기 어려워졌으니 지하율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게 좋겠지.

먹는 것에 약한 면모가 있으니 이실리테가 만든 냉국수를 잔뜩 먹고 배불러 할 때 이야기를 꺼내보자. 대가는 차원 이동 간 현상에 대한 정보면 충분할 거다.

‘아니면 대성녀에게 물어볼까.’

그녀도 오래 산 신수이고 영도의 수장, 육체를 빨리 성장시키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녀도 아드네빌라를 좀 아는 듯하니 릴라이스를 통해 아드네빌라의 상황을 묻는 것보다 그녀에게 알아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환인은 좀 더 몸에 힘을 빼고 편히 누웠다.

때때로 밀려오는 바깥의 후끈한 공기에 그늘아래 서늘한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섞인 멸치 육수 냄새와 양념장의 냄새가 한여름의 풍취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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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지하율: 뭐? 내가 아저씨랑 야스하는 거 기대한다고? 에이씹.. 야설 좀 그만봐! 더러워죽겠네! (호감도 -10)

환인: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

지하율: ? 아저씨 표정 왜 그래? 나같은 초절 미소녀랑 하는 거 싫어? (호감도 -10)

환인: (여자친구들에게 향하는 시선)

지하율: ...아저씨 개짜증나 (호감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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