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 데바스톤 산맥
드라우닐이 연 공간의 문은 검은색에 푸른색 잉크를 한 방울 떨어트린 듯한 계란형 포탈이었다.
환인은 그 포탈에 몸을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그녀가 말한 ‘신에게 직접 말해라.’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나중에 신이 직접 말을 걸어오는 건가? 교단이 존재하는데 대리자를 보내는 게 아니라?
신이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나서는 경박한 성격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수인 닌실과 아드네빌라의 경우만 보아도 그에 걸맞은 격이 있어야만 제약이든 후유증이든 소통에 문제가 없어지는 건 확실한 상황. 천원에서 겪은 경험으로 미뤄봐도 그건 확실하다.
그 말은 자신의 격이 신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가?
……드라우닐이 공간의 문을 열어주기 전, 분명 그녀는 자신을 탐색했었다. 희미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거기서 유추해보자면 자신의 능력은 아드네빌라를 초월하는 존재감을 가진 그녀 기준에서도 합격점이었고, 자신의 거절로 포기하기에는 아까워 신에게 직접 말하라는 의도로 느껴진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신 앞에서 자기 뜻을 피력하고 관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역시 성장뿐이군.’
누군가의 부탁은 비슷한 입장, 사회적 신분이 어느 정도 수준이 흡사할 때나 거절할 수 있다.
회사의 사장이 일개 사원에게 직접 부탁을 건넸을 때 그걸 거절할 사원이 몇이나 될까.
물론 거절은 할 수 있다. 입이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절한다고 칼이 날아와 목을 날려버리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사장의 부탁을 거절하면 훗날을 이래저래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승진이나 연봉협상 때의 불이익, 좀 더 나아가면 사장의 눈 밖에 나서 보복성으로 닥쳐올 고생, 비속어로 표현하면 사장이 좆같이 굴어 회사를 제 발로 나가게 만들 수도 있다.
가정이 있고 살림이 빡빡해 한 달 한 달 월급이 중요한 집안의 가장이라면 더러운 부탁이더라도 피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 달을 놀면 처자식이 한 달을 굶게 된다는 말과 같으니까.
하지만 부장이나 전무라면 사장의 부탁 정도는 한두 번 거절해도 부담이 없다. 사장도 막무가내로 부탁을 들어달라 떼쓸 수 없고.
한마디로 거절을 하려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단 이야기.
환인은 드라우닐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를 탐색할 때, 환인도 그녀를 탐색했었다. 표시가 확연히 드러나는 영혼의 눈을 쓰진 못했지만, 영시와 영혼의 눈을 쓰며 익힌 짬밥으로 그녀의 수준이나 에너지량 같은 것을 짚어낸 것.
일단 위상력의 양은 많지 않았다. 다른 기운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양이다. 그리고 다른 기운은 말해서 무얼 할까. 닌실이나 아드네빌라가 가진 신력이다.
아드네빌라도 신력과 위상력의 비율이 2:8정도였는데 드라우닐은 무려 8.5:1.5 정도다.
그것만 보아도 드라우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신의 부탁을 거절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생각 이상으로 온건한 분위기였지.’
드라우닐은 교단의 지위로 표현하자면 교황이었다.
교황이란 어떤 존재인가. 신의 뜻을 받아 가장 앞장서서 신의 말씀을 퍼트리는 자다.
그런 자의 앞에서 자신은 신앙이 없으며 신의 뜻을 거절하겠다 선언했음에도 격노하지 않았다. 어이없어하고 기막혀하긴 했지만 이쪽의 뜻을 존중해준 것이다.
신을 추종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신의 성향을 따르기 마련. 드라우닐이 그러한 성향이라면 자애신도 그 명칭에 걸맞은 자애를 품고 있겠지.
그 성향에 기대 자비를 바랄 수 있지만, 자신에게 그런 수동적인 태도는 안 어울린다.
어떻게 생각하든 힘을 지금보다 더욱 쌓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인데, 좀처럼 이동이 끝나지 않는군.’
공간의 문에 들어온 지 10초가 지났는데 목적지에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무빙 워크에 올라와 있는듯한 이상한 감각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이동 중인 건 확실한데 언제 도착하는 걸까.
후욱—
그리 생각한 순간 막혀있던 귀가 트이는 것처럼 오감이 선명해지며 죽음이 자욱한 냄새가 후각을 강렬하게 찌르는 걸 느꼈다.
=오, 도령 왔다!=
=주인님.=
눈을 번쩍 뜬 환인은 전투를 치른 듯 무기를 쥔 채 자신을 바라보며 휴우 안도하는 여자친구들, 그리고 산불이 났다가 진화된 듯 새카만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오라버니,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도착했는데 오빠가 안 보여서 심장이 철렁했다고요. 어딜 가셨던 거예요?=
“걱정을 끼쳤군.”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친구들에게 걸어가니 환연이 로브 드레스를 입은 유르파의 젖가슴 사이에서 쏙 빠져나오며 찌푸린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된 건데? 차원 이동 중에 도착 지연 현상도 있어?」
“오르빈치에 강제로 끌려갔었다.”
「……엑?」
환인은 죽어 널브러져 있는 괴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거기서 천원과 오르빈치를 관리하는 관리자 종족을 만났고 자애신의 뜻을 전달받았지. 그러느라 늦은 거다.”
머리 둘 달린 괴물 사슴, 플래시 골렘처럼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거대 멧돼지, 머리는 하나인데 몸통이 둘인 아나콘다 같은 괴물의 시체들.
전부 방사능에 오염되어 변이를 일으킨듯한 모습이다.
땅도 까맣게 물들어있고 나무도 불탄 것처럼 나무둥치만 삐죽삐죽하다. 아영이 징표를 손에 들고 성스러운 호박색 보호막을 펼치고 있는데 그런 보호막에 뭔가 검댕이 같은 것이 조금씩 묻어나는 걸 보면…….
“이건 흑령주의 여파인가.”
=으응? 아, 응. 그런 거 같아. 생물은 전부 변이를 일으켜서 마물로 변한 거 같고 흉폭성도 대폭 늘어난 느낌.=
=마물도 거의 4~5급 이형종 정도로 강해요.=
「……괴물이 슬금슬금 계속 모여들고 있어. 어찌할 거야?」
신의 뜻을 전달 받았다는 이야기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춰있던 여자들이 대답하고 묻는다.
주위를 잠시 둘러본 환인은 조금 생각하다 평온의 파동을 전면으로 살짝 펼쳤다.
그러자 회색의 파동이 아닌 황금빛이 맴도는 은은한 빛무리가 아름답게 퍼져나간다.
=엇?=
=아?=
거기에 황금빛의 파문이 지나간 자리는 녹색의 파릇파릇한 새싹과 잔디가 다시 피어난다. 죽음이 생명의 광채에 밀려나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다.
그것을 목격한 여자들은 말하고 싶은 게 잔뜩이라는 표정을 감추고 일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 시간을 끄는 것은 좋지 못하니까.
“평온의 파동이 이렇게 변했나……. 우선 짐을 회수하고 지하율을 찾아간다. 환연, 땅에 파묻은 물건을 전부 끌어 올려라.”
「알았어.」
땅속 깊숙이 파묻었던 물자는 4개월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멀쩡했다. 흑령주의 여파가 땅속을 침식하고 있지만 4개월 정도로는 지표에서 30cm 정도밖에 물들이지 못한 것이다.
4개월간 30cm인지 아니면 최초 며칠만 침식하고 그 뒤로 30cm 정도를 유지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라면 회옥으로 혼령주를 펼치면 다 정화될 것이다.
여자들이 재빨리 짐을 잘게 나누고 원래 크기로 돌아간 쿠에들의 등에 싣는 사이 환인은 영혼의 눈으로 백려강을 살폈다.
‘지구에서 있을 때와 지금 상태에 차이가 없는듯한데…… 아드네빌라와 연결은 다시 시도해야 하나.’
차원 이동 시에 육체가 한번 재조립된다는 가설이 조금 더 힘을 얻는다.
그때 여자친구들을 도와 짐 정리를 마친 이모렐이 조금 긴장한 듯 여섯 장의 푸른 날개를 바짝 모은 채 환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성제님.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뭐지.”
=빙의를 풀 수 없습니다.=
“……?”
=엥? 빙의가 안 풀려?=
=천인체하고 융합했다는 거?=
이모렐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백려강은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당혹한 얼굴로 환인에게 말했다.
=오, 오라버니. 저도 용인체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차원 이동 때문이겠군. 일단 이 장소부터 벗어난다. 환연, 정령을 날려 보내서 주변 정찰 가능한가.”
「땅 정령은 땅속에 있어서 괜찮은데 그 외에는 없어. 하늘에 날아다니는 바람 정령을 불러도 무섭다며 안 오려고 해.」
“이 지역을 벗어나면 바로 정찰을 시작해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봐라.”
「알았어.」
「환인. 내 등에 타.」
전투를 생각해 안느와 이실리테 대신 이모렐에게 안겨 이동하려던 환인은 신수 형태로 변신한 노른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환인을 등에 태우고 나서야 무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노른.
보아하니 자신이 어려졌을 때부터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을 안아 들고 싶었지만, 키 차이가 40cm도 나지 않아 무리였던 게 못내 속상했던 것으로 보였다.
‘한동안 어울려줘야겠군.’
일행은 계속해서 덮쳐드는 괴물을 해치우며 새카맣게 죽어버린 숲을 나아가 데바스톤 산맥에 들어서고서야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길도 없는 가파른 산을 타고 올라 해발 2km는 되는 정상에서 뒤를 돌아본 안느가 휴우, 감탄의 한숨을 흘린다.
=생각 이상으로 범위가 넓게 퍼졌네.=
=그러게요. 저 정도면 작은 도시가 들어갈 정도인데…… 흑령주가 도시에 떨어지면 그냥 멸망이겠는데요?=
지평선 가까이 펼쳐져 있는 녹색의 장대한 수해樹海, 그 한가운데 마치 황산 용액을 톡 떨어트린 것처럼 지름 수 킬로미터의 시커먼 구멍이 나 있다.
「저쪽, 동쪽 편에 주둔지의 흔적이 남아있긴 한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대충 1달 전쯤에 철수한 거로 보여.」
“조사대가 결성되었지만 저 오염된 영역 안으로 정밀 수색은 펼치지 못했나.”
=저 안에서 멀쩡하게 있으려면 7급 성역은 필요한데 7급 성술사가 전 대륙에 남아도는 건 아니니까요. 성역 안에서 전투를 하는 것도 어렵고요.=
아영이 설명을 끝내자 유르파가 환인을 보곤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자기. 그…… 자애신님의 뜻 말이야. 뭐라고 대답을 드렸어?=
“제게 무언가 막중한 임무를 맡기고 대리자가 되길 바라신다기에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히엑. 시, 신님의 대리자…….=
아영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안느는 어지럽다는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쥔다.
신님의 뜻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건데 그, 그걸 거절? 사의를 표명하다니…….
=그, 그래도 괜찮니? 신님, 신님의 뜻이잖아!=
“아직은 멀쩡한 걸 보면 괜찮나보지요. 그보다 능력이 이래저래 변한 것에 생각이 깊어집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여자들은 할 말과 걱정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가 저렇게 대범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신들이 설레발치며 걱정해봤자 상황에 아무런 도움 되지 않으니까.
=……아까 펼친 황금빛 운무가 평온의 파동이었지?=
“예.”
=으음…… 그러면 흑령주도 효과가 더 바뀌었을 수 있겠네.=
“십중팔구는 그렇겠지요.”
흑령주의 폭발 방식에 침식 오염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효과는 환인의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4개월이 지났어도 유지될만큼 지속시간이 긴데다 고작 4개월 만에 생물의 변이를 그 정도까지 일으켰다는 건…….
‘지금 흑령주를 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안 가는군.’
간단하게 생각하면 침식 범위 증가, 유지 시간 증가 정도다. 하지만 침식 오염에 폭발이 더해질 수도 있고 전염성까지 더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흑령주에 심각하게 오염된 생물이 밖으로 나가 전염을 퍼트린다면?
“흑령주의 효과 강화에 침식당한 생물의 강화도 더해지면 4~5급이 아니라 6~7급 이형종 정도가 될 수 있는데 그런 게 멀쩡히 활개 치며 오염을 퍼트렸다간 니오네브레스의 멸망도 볼 수 있겠지.”
=으음…….=
=…….=
“저 흑령주의 영역은 평온의 파동으로 정화할 수 있지만…… 일단 구식과 신식이라고 구분할까. 구 흑령주는 신식 평온의 파동으로 정화가 되지만 신식 흑령주는 신식 평온의 파동으로도 해주할 수 없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간 정말 세상이 멸망할 수 있겠네요.=
조용조용한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닭살이 솟아 팔을 문지르거나 목덜미를 주물렀다.
평범한 주술사의 저주는 평범한 성술사나 비술사가 해주할 수 있지만, 일반 직업자가 희귀 직업자의 저주를 푸는 것은 확률도 낮고 효과도 떨어진다.
그런데 환인은 유일 직업자다. 그것도 신이 눈독을 들였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직업자.
그런 그가 펼친 신식 흑령주를 그가 해주하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 이 세상에 흑령주를 해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한다.
유일한 방법을 꼽자면 미궁의 심핵을 마주해 소원을 빌어 해주용 아이템을 얻는 쪽이겠지.
“그만 출발하지”
일행의 상념을 끊은 환인은 노른의 등을 팡팡 때려 신호를 주었고, 노른이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하자 여자들도 각자 쿠에에게 박차를 가해 그의 뒤를 쫓았다.
한 번 가보았던 길이기에 일행은 빠르게 지하율의 도원향으로 향했고, 불과 반나절 만에 함정으로 가득한 험난한 지형을 돌파한 그들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한 인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아저씨, 미쳤어? 남의 집 앞마당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건데! 똥을 투척해도 저것보단 깨끗하겠다! 거기에 똥파리까지 꼬여서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주변을 헤집고 다녔는지 알아?!”
자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흥분해서 잔뜩 빨개진 얼굴로 펄펄 뛰는 지하율에게 환인은 솔직한 마음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저도 저 정도일 줄은 짐작을 못 했습니다.”
“……으~! 그 모습은 또 뭐야! 화를 못 내겠잖아!”
=지금 화내고 있는 거 아닌가…?=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화내는 지하율의 모습에 아영이 백려강에게 작게 속닥였다가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 찔끔한다.
“아무튼, 일단 들어와.”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그녀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평범하던 산길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분지 형태에 불쑥 솟아있는 도원향이 드러난다.
그리고 거처로 이어지는 푸른색 빛의 다리.
놀란 여자들의 웅성임에 지하율이 못마땅한 얼굴로 노른의 등에 올라가있는 환인을 째려보았다.
“아저씨 때문에 4개월을 숨어있어야했거든? 이유, 설명해줄 거지?”
“예. 그런 것도 있고 지하율, 당신에게 전해줄 것도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요.”
“……꼬맹이 모습으로 그런 말투 쓰지 말지? 막 애늙은이 같아서 소름 돋아.”
“그럼 반말을 할까?”
“그게 훨씬 낫네. 그래서? 뭐 때문에 저 난리를 쳐놨는데?”
반투명한 다리를 건너 그녀의 집으로 가며 환인은 적당히 간추려 흑령주를 펼친 이유를 들려주었다.
“역시 아저씨 제법이네.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해서 상대를 코너에 몰아붙이는 게 여러 번 해본 솜씨야.”
“지구에 있을 때 적을 처리하기 위해 몇 번 쓴 적이 있어 익숙하다.”
“혼령주를 펼친 건 이해했어. 메리아놀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획 단계란 것도. 그러면 지금쯤 메리아놀에 있어야지 여긴 왜 왔어?”
“조금 전까지 지구에 있었으니까.”
앞서 걷던 지하율이 그를 잠깐 돌아본다.
“아직 영구 귀환식은 구하지 못했나 보네.”
“구하는 건 시간문제지. 그 시간이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고.”
환인은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역시 이쪽이 지구에 귀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군.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 귀환할 수 없는 거고.
다리를 건너 연분홍색에서 짙푸른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벚나무를 잠깐 돌아본 환인은 노른의 등에서 내려 툇마루로 올라가며 지하율에게 물었다.
“하율. 미궁에서 소원을 이룬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원에 얹혀갈 수 없는 건가.”
“쓸데없는 호의는 내버려 둬. 필요 없으니까.”
훤히 보이는 주방에서 술과 잔을 꺼내고 잘 익은 김치를 잘라 안주로 만들던 지하율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내가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 사람으로 보이나.”
“…….”
“전지의 눈으로 볼 때 나에 대한 것도 봤을 텐데…… 틀린가?”
가벼운 술상을 봐온 지하율이 그와 여자들 앞에 내려놓곤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잔을 내민다.
그걸 옆에서 이실리테가 가로챘다.
지하율이 뭐하냐는 시선을 보내지만, 이실리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주인님은 어린 몸이십니다.=
“……뭐 됐어. 난 지구로 못 가.”
“왜지. 가족이 안 그리운가.”
환인의 질문에 지하율은 킥킥 웃다가 소주잔 크기의 자기 술잔에 술을 따라서 단숨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에 적응한 괴물이 지구로 돌아가 봐, 어떤 일이 벌어질 거 같아?”
“돌아가 봤는데 별일 없었다만.”
“…….”
“…….”
“……아저씨 진짜 또라이 같애.”
사회화 교육이 잘 된 진짜 미친놈이 저렇게 말하니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지하율은 말을 돌리며 김치를 한 점 집어먹고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게임 졷같이 하시네요’급의 칭찬에 피식 웃은 환인은 아스펜드에서 가족 앨범을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
“네 부모님도, 남동생도 잘 지내고는 있지만 널 찾는데 매년 수천만 원씩 쓰고 계시더군. 네가 사라진 뒤로 매년 네 번씩 가던 여행도 어쩌다 한 번씩 가는 정도였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떨리는 손으로 가족 앨범을 받아든 지하율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다.
“네 부모님은 혹시라도 네가 돌아올 자리가 사라질까 걱정하시면서 집을 지키는 모습이셨다. 남동생은 방에 너와 찍은 사진을 작은 액자로 만들어 책상에 올려놨고.”
“…….”
“네가 사라지고 지구는 7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네 겉모습은 여전히 여고생이지만, 세상을 살펴보면 그런 외형으로 성장이 멈춘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
“네가 이곳에 남더라도 복수할 틈은 없을 거다. 너와 나의 복수 대상이 엇비슷한 이상 내가 모두 짓밟아버릴 테니. 그래도 여기에 남을 건가. 죽은 사람을 추억하면서? 살아 널 기다리는 가족들은 무시하고?”
탁. 앨범의 마지막을 넘긴 지하율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찡그린 얼굴로 술잔 속의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 바람에 눈에 맺힌 눈물이 방울져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술잔 속에 퐁- 떨어졌다.
“아저씨가 뭘 안다고 그딴 말을 지껄이는데?”
“난 부모님을 차 사고로 잃었다. 내 눈에 새겨진 마지막 부모님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였지.”
“아니 시발 근데 진짜. 아저씨 존나 치사한 거 알아?”
뭘 말을 못하게 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씩씩거리는 지하율에게 환인은 약 올리듯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은 가족들 곁에서 해도 되지 않나 싶은 게 내 생각이지만, 네게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아저씨 복수에 나도 손을 거들라 이거잖아! 메리아놀의 그 개새끼들 엿처먹이는데 동참하라고!”
“그 대가로 지구에 데려다주겠다는 거다.”
탕, 소리 나게 술상에 팔꿈치를 올린 지하율이 얼굴을 감싸 쥔다.
“누가 그걸 몰라……?! 이런 기회는 일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것도 안단 말야! 하지만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
4개월 만에 다시 본 저 인간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겉모습 이야기가 아니다. 내면에 보이는 기운이 사람 맞나 싶을 만큼 미쳐 돌아가고 있다.
만약 처음 저 인간을 봤을 때 지금 모습이었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신수라고 착각했을 거다.
저런 인간이 작심하고 메리아놀을 조지려고 하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복수는 저 인간이 대신해주겠지.
그 뒤에는? 목적을 잃어버린 자신은 나무가 말라죽듯이 천천히 말라가다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될 거다.
허무하게, 허망하게, 삶의 보람도 없이.
하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믿을 수 있는 동료도, 친구도, 성질 괴팍한 사부님까지.
대현자라는 이명을 믿을 수 없게 선뜻 내려놓으시고는 자신이 말릴 틈도 없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자신보다 몇 배는 훌륭하고 귀중한 삶을 살았을 그런 수많은 사람의 목숨 위에 서 있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고 구해준 이유가 그런 거였나.”
“……남 생각이나 마구 읽고, 아저씨 진짜 기분 나빠.”
“그 사람들이 널 위해 목숨을 던진 건…… 진부하지만 네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네가 이토록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 행복을 찾으라고? 그거 너무 뻔히 보이는 설득 아냐?”
“뻔한 게 뭐가 나쁜가. 네 선택 한 번이면 적어도 세 명의 삶이 구원받는다. 그것도 널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같이 버릴 두 사람과 좀 고민하겠지만 결국 널 선택할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데 그만한 이유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
지하율의 흔들리는 시선이 가족 앨범의 표지로 향한다.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나.
원래 봄·여름·가을·겨울, 매년 4번씩 바뀌던 사진첩의 표지는 벌써 7년째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빛이 바래진 상태.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지하율을 바라보던 환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득이 조금 미묘하긴 한데…… 저 정도면 8할 정도는 넘어왔다고 봐도 되겠지.
여자친구들에게 손짓해 지하율을 혼자 있게 내버려 둔 환인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통신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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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형 주인공이 이러니까 글쟁이가 죽어납니당..
첫작 주인공일때가 속편했는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