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05화 (705/813)

704 현실 part2

현대로 잠시 넘어오며 가장 큰 변화를 체감한 사람은 단연 환인이다.

신체의 변화 - 능력의 전체적인 향상이 대폭 이루어졌으니까.

“짐작하기로 영혼술도 큰 폭의 변화가 있을 듯한데 말이다.”

=……변화? 강화가 아니라?=

“강화일 수도 있겠지.”

환인의 대답에 여자들은 10분 정도 환인의 종족을 두고 숙덕거렸지만, 이윽고 그러려니 했다는 후문.

그런 그보다는 덜하지만 제법 큰 변화를 체감한 사람이 둘 더 있으니, 한 명은 메리아놀 엘위드리스 시의 아르겐테아 정찰대 출신인 이모렐이었다.

평소에는 영혼 구슬 형태로 환인의 왼팔에서 대기하며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의 일부를 나눠 받다가, 특정한 임무를 하달받으면 팔라툼의 미궁에서 노획한 중핵의 신체 천인체를 써서 임무에 들어간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천인체에 들어간 이모렐은 그 즉시 천인체를 움직이는 게 매우 편해졌음을 깨달았다.

이전까지는 이빨이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천인체를 다루는 것이 어려웠다.

예를 들어 집게손가락만 움직이려 했는데 검지와 약지가 함께 움직인다던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는데 대각선 위를 바라보게 된다거나.

이런 것은 육체에 익숙해진 뒤에는 문제 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신체의 격통. 상처가 썩어들어가는 듯한 격통이 때때로 발작하듯 일어나 정신력을 갉아먹는다.

아드네빌라가 경고했고 환인도 유추했던 중핵용으로 제작된 천인체의 수명 문제다.

그랬는데 현대로 넘어온 뒤 그러한 문제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체 신경교란증 같은 것은 이빨이 딱 맞는 톱니바퀴가 굴러가듯이 매우 매끄러워졌고 날개도 잔뜩 의식해야 움직여지는 게 아닌, 무의식으로도 움직여질 만큼 신경 신호가 원활해졌다.

무엇보다 격통이 사라졌다.

몸 안 세포 어떤 것이 모종의 사유로 통증을 유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중이었는데 현대로 들어온 뒤 그러한 통증이 사흘째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

변화라면 하나 더 있다.

“식욕이 생겼다고?”

=예. 허기가 느껴집니다.=

이전에는 별로 먹지 않아도 몸에 문제가 없었고 허기도 느끼지 않았는데 이제는 먹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게 되었고 한 끼만 걸러도 신체 능력이 하락하는 게 느껴졌다.

시험 삼아 하루의 끼니를 거르자 거동이 힘들어졌을 정도.

그걸 자세히 조사한 유르파, 그리고 그런 유르파를 옆에서 보조한 아영은 환인이 꺼냈던 차원 이동의 효과 가설에 공감과 타당성의 한 표를 얹었다.

=신체의 비틀림이랑 왜곡이 차원을 이동하면서 모두 교정된 느낌이야. 식사 및 소화 기관 쪽에 문제가 있어 허기가 아닌 격통, 이 경우에는 신체를 소비해 에너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게 아닐까? 아무튼, 그런 문제가 차원 이동으로 해소되어서 정상 작동을 시작한 느낌이네.=

=오빠가 말한 대로 니오네브레스에서 지구로 넘어올 때 신체가 분해되었다 조립된다는 견해에 좀 더 힘이 가는 변화임다.=

=응. 자기 말대로 한 번 분해되었다가 조립되면서 신체에 안 좋은 부분, 뒤틀린 점이 전부 제자리를 찾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라는 뜻.=

장기적인 관찰이 필요할듯하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다. 천인체를 보다 오래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이런 변화도 마지막 인물의 변화에 비하면 빛이 바래는 수준이었다.

여의도를 다녀온 뒤 여자들은 각자 니오네브레스의 장비와 의복을 착용하고 귀환을 준비했다.

장비라고 해도 이실리테는 지하굴 미궁에서 획득한 그녀의 가슴을 크게 강조해주는 이름 없는 마도구, 안느는 등대의 빛, 아영은 자홍접에 약간 기모노 느낌이 나는 자주색 시스루 외투, 백려강은 운의복.

유르파, 노른, 환연 셋은 딱히 트레이드 마크 같은 옷은 없지만, 계절과 상황에 따라 많은 옷을 만들어두고 갈아입는 식이라 불만은 없었다.

「같은 옷을 계속 입는 게 오히려 센스가 무뎌지는 거 아니야?」

「저 옷들 전부 불편해 보여.」

환연과 노른은 오히려 같은 옷을 계속 입는 게 이해가 안 간다는 입장.

아무튼, 저번 경험으로 따지면 슬슬 귀환 현상이 일어날 시간.

사흘간 천천히 귀환을 대비해 이것저것 물건을 사거나 정보,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그걸 정리하는 시간이다.

지구용 특제 아공간 가방에 짐을 마저 챙겨넣은 유르파가 다른 여자들을 돌아보며 묻는다.

=아가씨들~ 이걸로 끝이지?=

=네.=

=저번보다 짐이 적네. 율이 언니도 이번에는 거의 안 챙겨가고.=

=비술이랑 술법이 있으면 전자기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구현하거나 재현할 수 있으니까.=

유르파는 화장품 성분표와 제조법을 어디선가 구해오고 영감 자극을 위한 유명 속옷 브랜드 잡지를 몇 부 챙긴 게 전부. 이실리테도 노트 하나에 새 요리법을 적은 게 다다.

안느는 주로 고급술을 아공간 주머니에 상당수 챙겼고 백려강과 아영은 서점을 들러 각자 자기가 선호하는 분야에 관한 기술서와 전문서적을 열대여섯 권 정도 구매한 상태.

=준비는 끝이지? 그럼 영화 튼다?=

=언니님, 어제 봤던 그거 2편 있대요. 그거 봐요, 그거!=

=앗, 난 이거 보고 싶은데.=

여자친구들이 선호하는 것은 최근에 나온 화려한 영화들.

뒤의 소파에 앉아 명상과 영기 순환 중이던 환인은 그걸 보고 영화 두 편을 추천했다.

“로마의 휴일과 사랑은 비를 타고 두 편을 추천하지.”

드라마를 두고 그런 건 안 본다고 말하던 그의 추천이었기에 여자들은 놀라워하며 영화를 확인, 둘 다 70년도 전에 나온 오래된 영화란 사실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래에 나온 여러 영화를 보고 고전 명화를 보면 감동이 반감되거나 여운이 짜기 마련이지. 지구 문화에 덜 익숙한 지금 너희라면 순수하게 감동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오…… 일리 있어.=

=그럼 이거 보자. 이게 더 일찍 나왔대.=

그렇게 언제 귀환 현상이 벌어져도 상관없도록 귀환 채비를 끝마친 여자들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영화가 중반을 지났을 때 백려강에게 이상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좀처럼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를 중심으로 갑자기 짙은 물색의 빛이 주위를 휘감은 것이다.

과자를 먹으며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던 유르파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뭐니 이거? 각성 현상?=

=아니, 각성 현상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아? 여긴 위상력이 엄청 희박한 장소인데.=

당황해서는 영화를 일시 정지시킨 여자들. 이 현상의 중심에 백려강이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린 여자들은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린다.

그러는 사이 백려강의 겉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그에 아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린다.

=히엑. 저, 저 얼굴은 그 백룡님 아님까……?=

=으음, 혹시 육체의 제약이 풀리는 걸까나.=

=그런 거 같네. 육체의 제약 해제가 성장이라는 뜻이었나?=

원래 용인체는 아드네빌라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육체. 그 몸이 성장하며 좀 더 아드네빌라를 닮아가는 느낌이다.

꾸우?

끡끠!

=앗, 야. 이리로 와.=

아영이 변화하는 백려강의 모습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작은 쿠에들을 끌어안고 뒤로 물러나며 말한다.

=조금 뜬금없네요. 영화 잘 보다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아까부터 영화에 영 집중을 못 하고 있던데……. 도령, 새벽에 벨하고 나갔을 때 얘한테 뭔가 말했었어?=

“별 것 없었다만.”

「기다렸다가 쟤가 정신 차리고 물어보면 알겠지. 소란 피우지 말고 다들 조용히 해.」

환연의 핀잔에 여자들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는듯한 백려강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인다.

그즈음 본격적으로 백려강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60 정도의 키가 조금 더 자라나 165cm인 유르파와 키가 비슷해진다. 슬렌더에 가깝던 날씬한 체구도 그간의 단련에 영향을 받은 듯 살짝 통통해지며 육감적으로 변해간다.

=잠깐, 뿔이…… 꼬리도…?=

사슴뿔처럼 귀 옆에서 길게 난 뿔이 점차 짧아지다 사라지더니 왼쪽 눈썹 위로 이마에서 길고 뾰족한 외뿔이 돌출된다.

엉덩이골 위쪽에 붙어있던 백청색 비늘의 용 꼬리도 몸 안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운의복도 전체적인 형태가 눈에 확 띌 정도로 변했다.

=어…! 운의복도 형태가 바뀌고 있어요…!=

=저것도 준유물이니까…. 이제야 소유자 각인이 새겨져서 특수 기능이 열리나 보네….=

노슬리브에 밑가슴을 노출한 패션이던 백색 전신 슈트가 검은색 조끼와 하나로 합쳐지며 밑가슴 대신 윗가슴을 노출하게 되었고, 바디 슈트와 합쳐진 조끼는 바니걸 재킷처럼 뒤로 늘어지는 형태가 되었다.

그 밑으로 금색과 청색의 기다란 띠 두 가지가 꼬리 럼 늘어진다.

백-청-흑-금색의 네 가지 색조가 잘 어울리는, 전체적으로 중세라기보단 근미래 느낌의 노슬리브 바디슈트다.

그 순간 화아악— 강풍이 일며 푸른 물빛 조각이 물색의 머리카락과 함께 사방으로 나부끼며 백려강이 눈을 떴다.

=오?=

=와.=

인상도 완전히 변했다.

이전에는 언제나 곤란해하는 느낌의 숫기 없는 미소녀였는데 지금은 눈썹 끝이 살짝 솟구친 데다 눈매도 날렵해져 순둥순둥한 백려강이 아니라 날카롭고 약간 신경질적인 아드네빌라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 눈썹 끝이 점차 내려가더니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해졌다.

=아, 벨이네.=

=역시 벨은 표독한 표정보다 저렇게 순둥순둥한 표정이 더 잘 어울리네요.=

=저, 저기……?=

=일단 여길 보렴!=

자신이 갑자기 왜 서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백려강은 유르파가 가져온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곤 깜짝 놀랐다.

이마 왼쪽에 치우친 외뿔을 만져보고 엉덩이에 꼬리가 사라진 것도 확인하고 운의복이 바뀐 것도 살펴본 백려강의 반응은…….

=어, 얼떨떨하네요……?=

……였다.

=뭐랄까, 려강이 아가씨다운 반응이긴 한데…… 어떻게 된 거니?=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는 여자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백려강이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오늘 새벽 환인이 지하율의 가족에게 한 행위는 거짓을 꾸며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당사자가 믿으면 거짓은 곧 진실이 된다는 경험이었다.

그게 백려강의 심령을 크게 자극했다.

=전혀 연관성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일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일이 생각나면서 지금 제 상태가 떠올랐어요. 아드네빌라님이 마련해주신 몸을 쓰고 있지만 원래 저는 조인족의 여자, 더군다나 한 번 스스로 목숨을 버린 어리석은 여자예요.=

“네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거짓이라 여기고 있었다는 거군.”

핵심을 짚어내는 환인의 말에 백려강이 조금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서 오라버니가 그분들께 보여주었던 행위를 계속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이런 제 생각 때문에 용인체와 제대로 하나가 되지 못했고, 용인체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요.=

“…….”

=…….=

=그건 오라버니와 이 육체를 주신 아드네빌라님께 저지르는 큰 실례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

안느의 어깨 위에 앉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환연이 아저씨처럼 음흉하게 웃음 짓는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한 단계 파워업했다는 거네. 백려강답다면 백려강다운 이야기야.」

=그, 그런……!=

「아냐?」

환연의 순진무구한 물음에 백려강은 그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닌 건 아니지만요…….=

「역시 사랑하는 소녀는 파워업하는 것도 소녀소녀하구만~.」

=……!=

그녀의 놀림에 백려강은 얼굴이 빨개진 채 부끄러워한다.

그 순진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킥킥 웃던 환연은 이내 그녀의 뿔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갔다.

「백려강. 뿔 만져봐도 돼?」

=네.=

「딱딱한데 매끈매끈하네. 조금 따뜻하기도 하고…… 이건 머리카락으로 묶인 거 같은데 뭐지.」

뿔의 중간쯤에 묶여있는 가느다란 매듭을 만지작거리는 환연. 그 옆으로 유르파가 다가와서 백려강에게 허락을 구한다.

=려강 아가씨, 나도 뿔을 만져봐도 될까?=

=물론이에요, 언니.=

=……응. 역시 뿔에서 힘이 느껴져. 사슴뿔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지만 이건 본격적인 능력 방출기관 같은데?=

=뭐 능력 방출이라면 물인 게 당연하겠지. 그 아드네빌라 님의 용인체고 벨 체모도 물색이잖아?=

=능력도 능력이지만 운의복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한데요. 벨,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여자들이 백려강 주위에서 그녀의 상태를 살필 때, 환인은 하나 의심 가는 점에 영혼의 눈을 열어 백려강을 살폈다.

“…….”

안느와 아영도 영혼의 색이 다채로워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였지만 백려강은 그보다 더 심하다. 5초만 봤을 뿐인데 안느와 아영을 30초 동안 살핀 것과 비슷한 부담이 눈에 가해질 정도.

안느가 약 열아홉 가지 색을 지녔고 아영은 열여섯, 백려강은 서른하나인가.

백려강 본인의 영혼 색에 용인체의 색까지 뒤섞여있어 눈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진 듯하다.

‘이래서야 확인도 못 하겠군.’

일단 색을 분간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거대한 도화지에 수십 가지 색을 빈틈없이 엉망으로 칠해놓고 그걸 하나하나 분간한 다음 얼마나 칠했는지 그 면적을 구하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한 수준.

거기다 색의 농도와 굵기, 장단에 위치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감각인데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환인은 안구 마사지를 한 뒤 다른 여자친구들도 신중하게 확인했다.

‘……내 가설이 맞는 게 아닐까.’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그리고 노른에게는 없지만 환연, 백려강, 아영에게 있는 것.

자궁에 맺힌 미묘한 황금빛이다.

환연과 아영은 황금빛이 제법 짙다. 환연이 가장 밝고 아영이 그다음, 백려강은 황금빛이 거의 사라져가는 느낌인 데 비해 다른 여자들은 아예 빛이 없다.

‘저 황금빛이 육합등약의 발동 여부로 생각하면 맞아떨어지는데…….’

백려강은 유르파 다음으로 환인에게 많이 안겼다. 환연과 비교하면 거의 7배, 아영과 비교하면 20배가 넘는다.

그렇게 잔뜩 쌓이기만 하고 풀어지지 않던 육합등약이 차원을 넘으며 녹기 시작했고, 백려강이 깨달음을 얻으며 시너지를 일으켰다. 이렇게 해석하면 현 상황에 맞아떨어지지만 자의식 과잉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떠나질 않는다.

시선을 내려 영혼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보지만 제 몸에서는 아무런 빛도 색도 안 보인다. 보이는 거라곤 왼팔에서 황금빛을 은은하게 흘리는 영혼 창고뿐.

잠깐 고민해봤지만 아무렴 좋은 일이라 환인은 신경을 껐다.

성장했으니 축하로 끝내면 될 일이고 환연과 아영은 좀 더 성장 가능성이 남았다는 식으로 여기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것은 니오네브레스로 넘어가서 해야 할 일.

자신의 예상대로 메리아놀이 코너에 몰려있다면 자신은 늦게 모습을 드러낼수록 좋은 일이다.

메리아놀 최상류층, 좀 더 폭을 줄이자면 투르시온 왕가와 푸른 나뭇잎의 탑이라는 조직이 3개월에 걸친 핍박과 모멸을 견디다 못해 눈이 돌아가 이쪽을 공격해오기라도 하면 더더욱 환영할 일이니.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니오네브레스 국가들은 각자 독자적인 생태와 자급자족을 이룬 나라들이다.

다른 나라들이 비우호적으로 나선다 해도 경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괴로울 일 따윈 없다. 신경 쓰지만 않는다면 그저 귀가 좀 간지럽고 말 수준이니까.

그러나 귀족이란 것들은 자의식 덩어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비교적 멀쩡한 자들도 적지 않다지만, 투르시온 왕가가 한 짓으로 짐작되는 일은 정신상태 멀쩡한 사람이 저지를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없는 데서 자신을 대놓고 욕하는 자들이 세상에 널려있다면 눈이 뒤집혀서 이를 갈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조사대가 국가 규모로 구성되어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귀환한 장소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대기 중이라면 상황을 보아서 적당히 대처하고, 아무도 없다면 지하율을 다시 만난 뒤 적당한 미궁을 찾아 심핵력을 쌓아볼까.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꼽아보는 그의 귓가에 여자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보던 거 마저 볼까? 한국에서는 능력을 시험하려 해봐도 불가능하니까.=

=아, 죄송해요 언니들. 저 때문에 괜히…….=

=려강 아가씨도 참. 성장했어도 섬세한 성격은 여전하네~.=

“…….”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환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백려강이 경험한 변화라면 다른 파티, 파티도 아니고 웬만한 집단이라면 발칵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변화다.

그런데도 다들 사소한 헤프닝인 양 금방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녀들이 저렇게 담대해진 것은 자신 때문이겠지.

작고 앙증맞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돌아가면 몸을 성장시킬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아드네빌라라면 방법 하나둘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함께 오래된 흑백 영화에 빠져들어 갔다.

* * * *

수령 수천 년의 나무 속에 지어진 메리아놀 종족 연합 협의회 회의장.

화려하다기보다는 거룩하고 엄숙한 회의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침묵에 잠겨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플뢰족의 청력으로만 들을 수 있는 희미한 빗소리가 회의장을 채운다.

주도에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지만, 주도의 외성벽을 벗어난 세상은 온통 먹구름에 뒤덮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

=무어라 말이라도 해보십시오들.=

상석, 당대의 국왕이 앉을 수 있는 옥좌에서 시린 얼음처럼 차가운 은발의 플뢰족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국토 유실률이 주도 패시지 주위에만 4%에 이르고 있습니다. 올해의 작황은 대흉이 예정되었다 하여도 국토가 유례없는 긴 장마에 유실되고 있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오프렘 환경정치부 장관님.=

=면목이 없습니다. 땅술사들과 땅의 정령사들을 모아 보수보강을 하여도 시시때때로 굵어지는 빗방울에 깎여나가기 일쑤라…….=

=그렇다고 손 놓고 경작지가 온통 쓸려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깨진 독에 물 붓기가 되더라도 사태가 최악이 되는 건 막아야지요.=

=하오나 재정이…….=

=이 상황은 누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힘을 모아야 하며 그게 환경정치부 장관이신 오프렘님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

=트라이알젠 왕립정령청장님.=

=죄, 죄송합니다.=

=현 회의에 죄송하다는 말은 꺼내지 말라 말씀드렸을텐데요. 그보다 언제쯤 호우의 원인을 특징지을 수 있겠습니까?=

=알세이시스 왕가의 최상급 물의 정령사이신 옌 님께서 계속 정령제를 지내고 계십니다만… 환령계에서는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오고 있습니다. 초월급 정령의 개입이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있는데…….=

=초월급 정령이 하나둘도 아닌데 아직도 의심만 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아, 아주 진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 장마의 원인으로 알류겔 대호수의 대청룡을 특정하고 있습니다만 라드세아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어 전적이 있는 해왕과는 도저히 접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외 이만한 호우를 유지할만한 신수는 나설 이유가 없기도 하고…….=

=후우…….=

차가운 은발의 플뢰 남자는 골치가 아픈 듯 쓰고 있던 황금 왕관을 내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서 패시지가 육지의 고도가 되길 기다리시렵니까? 뭐라도 해야지요.=

=외람되지만 현 상황에서 우리 메리아놀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있다고 봅니다.=

은색이 스며든 옅은 금발의 플뢰족 여자가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발언한다.

옥좌에 앉은 남자와 둥근 원탁에 앉은 의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현재 유실되는 국토 문제가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장마를 끝낸 뒤 땅의 정령과 땅술사를 동원해 보강하면 어느 정도 피해를 무마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성제의 실종에 관여한 데다 메리아놀의 악행이라 알려지고 있는 악의적인 소문을 일축하는 것이지요.=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래서요?=

다시 왕관을 쓴 남자가 깊어진 눈빛으로 묻자 타미레=네르드=엘르는 무테안경을 살짝 추슬러 올리며 의견을 피로했다.

=모든 협의회의 힘을 한데 모아 성제를 찾는 걸 우선해야 합니다. 그의 지능은 매우 비상하여 그와 한 번이라도 마주했던 자들의 말에 따르면 천재라 일컫길 망설이지 않았을 정도. 이 상황이 그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를 찾아내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해결될 것이라는 게 타미레 국가기록원장의 뜻이군요. 하지만 그걸 다른 국가도 몰라서 수색대와 조사대를 두 달째 놀리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 하지만 그자들은 세 곳 국가와 영도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조직된 곳.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다 하여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오합지졸입니다. 하지만 우리 메리아놀 협의회가 한데 힘을 모은다면…….=

이쪽에는 엘위드리스 출신의 고위 예언가도 있다. 급조된 조사대보다는 나을 거라는 게 타미레의 주장이었다.

=…….=

남자는 피로감에 눈 밑을 매만졌다.

실종된 성제를 수색하기 위한 라드세아-히스론드-벨티칼 삼국 협동조사대에서 메리아놀은 처음부터 빠져있었다.

그 이유는 빠르게 퍼지고 있는 차원 방랑자의 소환 및 학대살인과 관련된 소문 때문.

성제도 차원 방랑자이기에 의심의 눈길이 메리아놀에 쏠려있어서였다.

메리아놀은 자신들이 성제를 해코지할 이유가 없으며 차원 방랑자와 관련된 소문 또한 악의적인 발언이라고 부르짖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알려진 소문과 성제-메리아놀 사이에 있은 마찰만으로도 타국가 지도부가 메리아놀에 보내는 시선이 곱지 못한 것.

결국, 조사대는 메리아놀을 제외한 삼국만으로 꾸려졌으며 메리아놀은 잠재적인 범법국 취급을 받고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성제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거라면…….

왕위에 오른지 이제 100일이 갓 지난 투르시온 왕가의 타르반시올=톨마이어는 무표정한 타미레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의 이름으로 선언하겠습니다. 이시간부로 협의회의 장관, 국장, 청장 및 각 가문의 의원분들께서는 힘을 모아 타미레 국가기록원장을 지원합니다. 우리 투르시온 왕가가 앞장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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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내일은 가정상의 문제로 임시 휴재입니당...

큰일은 아니고 편도 4시간짜리 타지역을 가야하는데 왕복에만 8시간.... 글 쓸 시간이 없을거 같아요ㅠ

죄송합니당!!

[작품 설정]

백려강

부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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