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704화 (704/813)

703 현실 part2

유르파의 뽀얀 목덜미,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살짝 달콤한 우유 냄새 같은 체취에 흠뻑 젖을 수 있겠지.

뒤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한 쌍의 유방은 만지면 푸딩처럼 마약 적인 촉감을 제공해줄 테고, 그쯤 되면 유르파는 수줍게 웃으며 복숭아처럼 완벽한 엉덩이를 벌려 자신이 발산하려는 모든 성욕을 성모처럼 받아줄 것이다.

그녀의 뒤태에서 고개를 돌린 환인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너무 풀어지는군.’

환인은 언제나 20%가량의 긴장을 유지하며 지냈다. 조금 중요한 사안이 있거나 신경 써서 처리해야 할 안건이 있다면 긴장은 40%까지 올라가며 산란못 미궁이나 거인숲 미궁 같은 곳에서는 60%까지 올라갔었다.

야미오코와 공중전을 벌였을 때는 70%까지 올라갔었으며 역대급으로 긴장이 최고치를 찍었을 때는 85%, 첫 미궁인 삼림형 미궁에서 푸른 불꽃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였다.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방심을 억누르고 최선이자 최적의 선택지를 고르는 그의 방식인 것이다.

그랬는데 외형이 어려진 이후 긴장감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사고마저도 단순해지는 기분이다.

여자친구들의 품에 안겨있으면 절로 그녀들의 젖가슴으로 신경이 쏠렸고 그녀들의 아리따운 자태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녀의 품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새끼 원숭이도 아니고.’

마음 같아서는 여자친구들의 보드랍고 따스한 육체에 종일 파묻혀 지내고 싶다.

그 어떤 부탁도 들어주는 여자친구들이다. 조금 짓궂고 얄궂은 부탁도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하루종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사람이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면 원숭이 침팬지와 다를 게 무언가.

환인은 부엌에서 흘러들어오는 맑은 된장국 냄새를 맡으며 유르파와 그녀 곁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안느, 아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한 번 더 외출할 거다.”

=어딜 가려고?=

마도구 도면을 작성하는 유르파를 옆에서 구경하던 안느가 돌아보며 묻는다.

“국회의사당.”

=국회……?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

“메리아놀의 의원협의회관 같은 곳이지. 마침 오늘 무언가 의제가 있어 의원들이 모인다고 하고 참관도 가능하다 하니 가볼 생각이다.”

=아.=

그곳에 방문하려는 이유를 눈치챈 안느와 아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종족 의원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여느 곳보다 방비가 철저하다. 어떻게 보면 왕족이 기거하는 왕실지구보다 뛰어날 정도.

지구에서 위상력을 다루는 숨겨진 세계를 보는 데는 거기만큼 적합한 곳이 없을 거다.

“귀환 현상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오전 중으로 마지막 확인 작업을 끝마칠 계획이다. 이번에는 안느와 아영이 따라와다오.”

=알았어.=

=옙!=

이실리테가 정성껏 준비한 한국식 아침 식사로 배를 채운 환인은 그녀들과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환연은 안느의 하얀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안느. 그냥 티셔츠 입어.」

=왜? 이 옷 이상해?=

「이상한 건 없어. 네 가슴이 안주머니를 누르는데 그 장식 많은 옷이 날 찌를 뿐이니까.」

=아. 그럼 바꿔입고 올게.=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 환인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하며 작게 푸념을 흘렸다.

“내가 어른 몸이었으면 자가용을 써서 편히 갔을 텐데 조금 불편하군.”

=옆에서 가르쳐주면 안 돼? 금방 배울 자신 있는데.=

“조작이야 간단하니 너나 아영이라면 10분 안에 숙달되겠지. 하지만 자격증 없이 차를 모는 건 범법 행위다.”

=자격증인가~.=

자연스럽게 환인을 아이처럼 품에 안아 든 안느는 이제 도시가 완전히 익숙해진 듯,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지하철을 향해 걸어간다.

오늘 그녀의 차림은 하얀 더블자켓에 하얀 브이넥 티에 하얀 청바지.

온통 하얀색이라 평범한 외모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패션이지만 그녀는 넝마를 걸쳐도 패션으로 승화시킬 육체의 소유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돌아볼 정도.

그런 그녀와 비슷하게 아이보리색 자켓과 검은색 셔츠, 검은색 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은 아영이 옆을 걸으며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나저나 차 뒤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거 몸에 안 좋은 거네요. 오래 지내면 독기가 몸에 축적될 것 같아요.=

“매연과 공해는 인류가 마주한 중대 문제이긴 하지.”

=이해돼요. 저런 걸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개발하는데 안 좋은 점이 없을 수 없으니까요.=

=응……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거처럼 양면성은 어디에나 있으니.=

=근데 진짜 굉장하지 않아요? 이런 술법이나 비술 같은 일들을 위상력은 하나도 없이 두 손으로만 쌓아 올리다니……. 기술이랑 산업이 발달해서 그런 문화도 번성한 거겠죠?=

환인이 당면한 문제 때문에 밖을 돌아다닐 때, 집에 남아있던 여자들은 현대의 온갖 화려하고 자극적인 문화를 접했다.

특히 그녀들이 몰입한 것은 영상매체 관련 문화들.

시간만 나면 환인이 결재해놓은 OTT 사이트에서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들여다보고 있다.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간 것보다 현대 소재의 드라마가 주류인데 인간군상극이 너무 재미있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젯밤에도 거의 밤새다시피 하며 영화, 드라마를 감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들이 어떤 드라마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환인은 기우혁과 유철승에게 붙여놓았던 영혼을 불러내 이야기를 들었다.

「기우혁은 가주의 질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자라고만 했으며 성제님과 관련되어있거나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깨어난 유철승이 기우혁과 만나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내용은 ‘이제 한국에서는 못 살겠다. 나는 이민 간다.’, ‘매형. 저도 같이 갑시다. 그런 사람을 적으로 돌렸으니 한국에서는 더 못살 겁니다.’ 였습니다.」

‘백왕검도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던가.’

「가주로 보이는 노인은 둘의 습격자가 누구인지 용모파기를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우혁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모른다. 목소리도 남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카랑카랑하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라며 대략적인 키와 체형만 언급했습니다.」

「유라가 기우혁과 유철승의 상태를 감시하고 저는 가주를 따라다녔습니다. 가주 노인은 아랫사람을 다그쳐 주변 영상 기록 장치를 조사하라고 화를 냈지만 밤새도록 영상을 돌려보아도 알아낸 것이 없자 정체불명의 강적의 등장에 큰 고뇌에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과 연계되어있는 다른 단체의 유무는 짚어내지 못했나.’

「상호 대등한 지위로 보이는 자와 통신을 하는듯한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상대 단체도 위상력을 다루는 단체인지는 제 지식으로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통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영혼이 통신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대화를 들려준다. 백왕검도 가주와 통화한 쪽은 전화 통화 때문에 통역 현상이 벌어지지 않아 아예 대화를 외워왔다.

대강 중요한 것만 추리면…….

이쪽에 SSS+ 랭크로 추정되는 괴한이 습격해왔다. 그쪽에는 습격이 없었나.

원한을 많이 쌓으니 공격받는 것이다(조롱과 비웃음).

원한이라면 네년도 적지 않게 쌓지 않았나(역정).

너만큼 흉흉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폭소). 이쪽은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잘 대처해라(조소).

“…….”

상대는 단순한 원한 관계로 인한 습격으로 치부한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노괴물이라는 말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백왕검도와 정체불명의 저쪽 집단은 이제부터 몸을 사리며 자신들을 조사하는 건 예견된 수순이겠지.

거긴 신경 쓸 필요 없다. 기우혁은 자신의 경고에 잔뜩 위축되어 잠적할 생각밖에 없으니 이쪽 신원이 알려질 일은 없을 터.

이쪽만 조심하면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없다.

‘너희도 돌아와라.’

지하율 가족에게 붙여놓은 영혼도 불러들인 환인은 그 가족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보고 받았다.

「세 명 전부 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다는 요지의 대화가 오갔습니다. 아들 쪽은 개꿈,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는 듯하였지만 부부는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용에 의심하는 기색이 없지는 않았지만요, 식사 후에 가족 앨범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아내 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행이다.’를 반복해서 말했어요.」

「남편은 계속해서 지하율을 찾으려고 시도할 것처럼 보였지만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낸 것처럼 안도한 것 같았습니다.」

그 정도면 됐다.

병 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속병이라는 말이 있다. 온갖 걱정에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따라 약해지고, 그렇게 몸이 약해지면 무거운 병이 찾아온다는 논리다.

건강만 유지되면 지하율이 지구로 돌아온 뒤 그녀가 알아서 가족을 챙기겠지. 만약 그녀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가족은 죽을 때까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이고.

지하율은 트립 당시와 외모가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그상태로 지구에 귀환한다면 소란이 일겠지만, 그 일은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마지막 화 내용에는 진짜 깜짝 놀랐어. 그 모든 게 꿈이었다니, 어떻게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다 할 수 있을까 싶었다니까?=

=으음. 기발하긴 했지만요……. 전 설마 15편이나 가서 앞에 있었던 전부를 없던 거로 치부할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란 쪽이에요.=

=넌 마음에 안 들었어? 나는 신비로워서 좋았는데.=

=좋을 수가 없죠. 그 많은 노력이 전부 없던 일이 되었잖아요.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일 아니에요?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고.=

드라마 이야기인가.

환인은 안느의 품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며 여의도역에 도착, 주위를 살핀다.

월요일에 아침 출근 시간이 지나서일까 지하철 내부는 한산하다. 가끔 검은 정장 차림의 서류 가방을 든 남자, 여자들이 조금 피곤한 얼굴로 오갈 뿐.

여의도역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안느와 아영이 결판나지 않는 토론에 결국 그를 끌어들였다.

=오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정이 좋으면 결과야 큰 상관 없는 쪽이세요?=

=도령은 어떻게 생각해?! 과정이 나빠도 결과가 좋으면 상관없는 쪽이야?!=

“난 그런 거 안 본다.”

=엑. 진짜요…?=

=엥? 왜? 도령 인생 절반 손해 보고 있는 거 아냐? 엄청 재밌는데.=

안느의 너스레에 환인은 살짝 인상을 썼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지.

“…과정이 나빠도 결과가 좋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건 자기위로의 최면이라 생각한다. 보통은 최악의 과정이 이어지다 그나마 용인하고 받아들일 결과가 나왔을 때나 하는 말이지.”

=윽…….=

“마지막에 가서 조지는 게 명작의 조건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진정한 명작은 과정도 좋고 결과도 좋은 법이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닌가.”

=으음. 그건 그렇지만여.=

“그리고 과정이 좋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모든게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다. 결실이 없는데 과정이 좋았다며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소한 일에나 통용될 내용이지. 수십 수백의 목숨이 걸린 일에 결과를 망쳤다는 건 그 사람들 전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약 그 결과에 자신의 목숨도 걸려있다면?”

=웃.=

단검에 배를 찔린 듯한 표정이 되는 안느와 할 말 없다는 표정의 아영.

재킷 안으로 안느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발 늦게 깨달은 환인은 그녀에게 내려달라고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땅에 내려선 환인은 옷을 탁탁 털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픽션은 픽션으로만 봐라. 픽션의 내용을 두고 타인에게 자신의 줏대를 들이밀면 싸움만 일어날 뿐이다.”

=예에….=

=응…….=

시무룩한 것도 잠시, 그의 보폭에 맞춰 뒤를 따라가던 아영이 근처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발견하곤 눈이 동그래졌다.

옆을 걸어가던 안느의 팔을 다급히 잡아당기며 [톨 사이즈 아.아 2,900원!!]이라고 적힌 입간판을 가리킨다.

=언니님, 저기요. 아아라는거 팔고 있어요!=

=……어? 진짜네! 도령! 우리 저거 사 먹어보면 안 돼?!=

아.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면 여름에 이실리테가 종종 타줬던 건데…… 아영이라면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겠지만 안느는 몇 번 마셔보지 않았나.

‘……그런 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아아를 시켜먹는 게 신기했나 보군. 여자들은 줄임말을 눈치채지 못한 거고.

대충 이해한 환인은 그녀들을 데리고 월요일 아침 출근으로 지친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안느와 아영이 뒤에 서자 피로에 찌든 남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그녀들을 힐끔거리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은 여자들은 환인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다.

“어, 어서 오세요!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그녀들의 차례가 돌아오자 주문을 받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빨개진 얼굴로 소리친다.

=아아 둘하고…… 여기 어린이가 마실만 한 것도 있어?=

“네 여기 초코라떼도 있고요. 과일 좋아하면 오곡 바나나 주스나 딸기 주스도 좋고 밀크셰이크도 있어요!”

=그럼 따뜻한 쵸코라떼 하나하고…….=

=언니님, 저기 흑당 버블 밀크티라는 것도요!=

안느가 메뉴판을 보며 주문을 하고 아영이 옆에서 추가 주문을 넣고 있을 때였다.

부우우웅— 자동차가 급가속하는 소리에 더해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 멀리서 들려온다.

카페 안에서 음료가 만들어지는 걸 신기해하며 구경하던 둘은 즉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인은 이미 대폭 넓어진 기감 범위를 뻗어 그쪽을 주시하는 중.

벤츠 S클래스 한 대가 도로에서 폭주하는 것처럼 속도를 점점 끌어올리고 있다. 신호 무시에 차선까지 삐딱하게 타고 달린다.

그 차량의 운전자를 인식한 환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며 눈에 희미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음주 졸음운전.’

커피를 사기 위해 줄서있던 사람들이 술렁인다.

“어, 어어? 저거 이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

“피해야 하는 거 아냐…?”

“뭐…….”

고작 몇 초지만 환인에게는 분석에 충분한 시간. 영혼 화살 하나가 최소한의 위력을 품고 소리 없이 날아가 차량 앞바퀴의 타이어를 찢어버린다.

끼이이이익—!!! 꽈과광!!

그 충격에 제동력을 잃은 차량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스키드 마크를 짙게 남기며 확— 방향이 꺾여 인도로 돌진, 인도의 가드레일을 부수고 빌딩 앞에 세워진 콘크리트 구조물을 운전석 쪽으로 들이받았다.

차체가 운전석까지 압착되어 척 봐도 탑승자는 즉사한 광경. 압착된 차체 사이로 시뻘건 피가 기름과 섞여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으악!”

“꺄아악!”

“엄마…!”

끔찍한 사고 장면을 목격한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영이는 도령 안아 들어. 저기, 우리 주문 아직이야?=

“네, 넷? 아 네. 여기 주문하신 톨 사이즈 아아 두 잔과 흑당 버블…….”

=여기 계산.=

안느와 아영은 환인의 작은 뒷머리를 힐끔 보곤 카페 알바를 재촉해 음료수를 챙긴 다음 그 자리를 떴다.

횡단보도를 건너 국회의사당 쪽으로 향하면서 안느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는 사고 장소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환인에게 물었다.

=저거 도령이 했지?=

“그래. 그냥 봐도 사람 여럿 다치게 할 것 같았고.”

무고한 시민 여럿의 사망사고 vs 음주 운전자 1명의 사망.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설령 후자가 위인이거나 국보급 인간문화재라 해도 환인은 고민 없이 후자를 고른다.

그의 목소리가 몇 번 들어본 적 없을 만큼 차갑다는 사실에 안느는 잠깐 생각하다가 아영의 품에 안겨있는 환인에게 초코라떼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분노한 건지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달콤한 걸 먹으면 조금 화가 가라앉지 않을까.

=도령, 따뜻한 거 좀 마셔.=

“……초코라떼보다 아메리카노 쪽이 좋은데.”

=안돼. 어린아이 몸에 커피는 안 좋다잖아.=

=근데 아아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임말이었나보네요. 난 또 뭔가 했네.=

=음. 이슬이가 타준 것보다 맛이 못한데?=

=그래요? 돌아가면 이실리테 언니한테 아아 하나 부탁해봐야지.=

벚꽃이 폈다 해도 이상기온 탓에 조금 추운 날씨.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코라떼를 후후 불며 조심스레 마셨다.

그가 운전자를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는 개인적인 분노가 있어서기도 했지만, 마침 가장 궁금하던 한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기도 했다.

어제 지하철 성추행남을 자살시켰을 때에는 너무 멀었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것, 바로 지구인의 사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퍼벙!

작은 폭음과 함께 차체에서 확— 불길이 일어나고 놀란 시민들이 허둥거리며 휴대 소화기를 가져와 뿌린다.

그리고 그런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는 희뿌연 회색 빛무리.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환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니오네브레스의 영혼 형성 직전의 빛무리보다 절반 이상 옅고 흐리다. 게다가 빛무리가 불타는 차량 주변에서 잠시 일렁이다 그대로 허공에 스며들듯 흐려져 사라졌다.

“…….”

니오네브레스에서는 희뿌연 영靈처럼 흐늘거리다 승천하는 경우마저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고 그대로 사라지다니, 이건 뭘 뜻하는 걸까.

환인이 확인한 니오네브레스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예 영혼 모습으로 일어나거나, 아니면 희뿌연 안개처럼 일어나 일렁이다 사람 형상을 갖게 되거나, 그도 아니면 안개처럼 일렁이다 그대로 하늘로 치솟아 승천하는 식이었다.

순서대로 영혼의 힘이 강한 사람, 영혼의 힘이 약하거나 생전 의지가 약한 사람, 마지막은 의지도 약하고 영혼의 힘도 약한 사람이었는데…….

‘신의 존재가 없다거나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단 건가.’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안경점을 발견하곤 아영의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며 그곳을 가리켰다.

“잠깐 안경점에 들르지.”

=옙.=

거기서 영혼의 눈을 쓰면 흘러나오는 황금빛 안광을 감추기 위해 어린이용 짙은 선글라스를 사서 쓴 환인은 영혼의 눈을 열자마자 움찔, 어깨를 굳혔다.

안느와 아영의 몸안에 온갖 색이 뒤섞여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던 것.

일반인이 본다면 현기증이 나는 데다 뭘 뜻하는지 알 수도 없겠지만, 환인은 그 색 하나하나의 의미를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수명, 태어나고 자란 시각, 가진 능력의 유무와 강함, 건강의 척도에 성격과 성향, 그녀들의 마음까지.

저걸 전부 이해하면 상대와 상대의 삶에 대해 전부 다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영혼의 눈을 닫고 눈을 비볐다.

‘힘들군.’

마치 4일간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날밤을 새운 것처럼 눈이 아프다.

=도령, 왜 그래? 우리한테서 뭔가 이상한 게 보였어?=

=오빠 능력이 영혼의 눈에도 영향을 끼친 거죠?=

“그래.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익숙해지면 상대의 운명도 알 거 같은 느낌이군.”

안느와 아영은 입을 살짝 벌렸다. 뭐야 그게. 영혼사의 극에 이르면 그런 것도 알게 되는 거야?

=……영혼은 곧 그 사람의 본질이나 다름없으니까 영혼을 보는 눈이 하늘에 닿으면 운명을 볼 수 있는 것도…… 말이 되긴 하네.=

“눈에 피로가 극심해서 오래 쓸 수 없는 데다, 무척 복잡해서 쉽게 알 수는 없을듯하다.”

=운명이잖아요. 그걸 막 손바닥 들여다보는 것처럼 간단히 해내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아영의 이야기에 후 웃은 환인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이번에는 지나다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혼의 눈을 열었다.

“……?”

앞에서 다가와 지나치는 OL룩의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여자친구들에게 돌린다. 그리고 다시 앞에서 다가오는 회색 정장의 남자를 본다.

그렇군. 영혼의 힘이 강할수록 색도 다양해지고 화려해지는 건가.

지구인은 대부분 탁한 잿빛이나 옅은 회색에 칙칙한 색으로 서너 종류뿐이다.

알 수 있는 것도 무척 적다. 건강 상태, 태어난 시기와 죽는 시기, 희미한 성향 따위다.

“…….”

정령 구슬 하나를 꺼내 해방하자 「으익?!」 콘크리트의 숲에 기겁하고는 하늘로 줄행랑친다.

그 정령은 생사의 색은 보이지 않고 성향과 힘의 강약 정도 밖에 안보였다. 니오네브레스 출신의 영혼은 성향과 축적된 영기 정도뿐이다.

환인은 각자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영혼의 힘이 약한 자를 보는 건 영혼의 눈에 피로가 적게 쌓이는지 제법 오래 사람들을 살핀 환인은 수백 명 중 가장 영혼의 힘이 강한 사람이 니오네브레스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절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들 희미하기 짝이 없는 영혼의 힘이다. 안느와 비교하자면 태양 앞에 반딧불 수준. 저러니 죽어서 그냥 흩어지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영혼의 힘이 강한 지구인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환인은 먼저 국회의원회관 두 곳을 멀리서 둘러보듯 살펴보았다.

안에 들어갈 것까지 없이 외부에서 기감을 퍼트리는 정도로 살피는 건 어렵지 않았기 때문.

“……의사당으로 가지.”

전날 예약을 하면 본관 본회의장 참관이 가능하다지만, 여자친구들은 신분증은커녕 국적도 없고 자신은 겉모습이 다르다.

일단 인터넷으로 참관 예약이 되기에 어제 짬을 내 참관신청은 했지만 들어가지는 못하는 상황.

마침 벚꽃을 구경하러 통행로를 오가는 노인, 엄마와 아이들이 제법 있어 환인과 그의 여자들은 ‘외국인?’ 같은 시선 정도만 받을 뿐, 행동 자체를 의심받는 일 없이 국회의사당을 산책하듯 다니며 기감으로 의사당을 살폈다.

=참 평화롭네요.=

=그러게. 메리아…… 고향보다 더 평화로운 느낌이야. 사람들 얼굴에도 근심이나 걱정은 하나도 안 보이고.=

“한국은 치안만큼은 자랑할 수준이긴 하지. 그만 돌아가자.”

=다 살펴봤어?=

“그래. 딱 예상한 정도다.”

=잘됐네. 돌아온 뒤에도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음.”

그것도 니오네브레스에서 일을 잘 끝마쳤을 때의 이야기지만.

환인은 오면서 여자친구들이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과정이 좋았지만, 결과가 나쁜 경우.

과정은 나빴지만, 결과가 좋은 경우.

환인은 그런 최악과 차악의 이지선다를 고를 생각은 없다. 선택한다면 과정도, 결과도 좋은 쪽이다.

니오네브레스에서는 이제 3개월가량이 흘렀겠지. 슬슬 자신이 퍼트린 소문의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올 시기다.

솨아아아—

약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벚꽃을 휘날린다.

=와, 예쁘다~.=

=보기 좋네.=

“…….”

환인은 그런 벚꽃잎의 난무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여자친구들과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수만, 수십만 명의 피로 강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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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연달아 19금은 쵸큼... ㅎㅎ;;;

두 번째 현실편도 이걸로 끝. 이제 니오네브레스로 돌아감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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