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 현실 part 2
=셋을 세지. 하나.=
정체불명의 괴인이 내리는 최종 선고에 기우혁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시간을 벌 수 있지?
환인, 그도 기억하고 있는 조사 대상이다.
선천적인 감정 결핍증 환자로 태어나 고도의 훈련을 받아 일반인인 척 살아가는 사이코패스.
특이한 대상이기도 했고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일을 기억력이 좋은 그가 까먹을 리 없다.
사회화된 사이코패스, 제법 특이한 대상이지만 척 봐도 같은 바닥의 굴강한 동업자가 신경 쓸 대상은 아니다.
아니면, 자신이 조사에 놓친 것이 있단 이야긴가?
“매형, 제가 막을 테니 도망치십쇼.”
식은땀으로 목욕한듯한 유철승이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나선다. 그 모습에 기우혁은 감동하는 한편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씹었다.
=둘.=
“아니. 네가 도망쳐라. 여기서는 내가 죽어야 소현이와 소은이가 살아.”
“매형.”
“네 누나와 조카를 부탁하마.”
“……!”
매형의 비장한 부탁에 유철승은 어금니를 피가 날 정도로 씹었다. 왜, 노릴 거면 본가의 원로들이나 노리지 심부름꾼이나 다름없는 우리를……!
=셋.=
착—
마지막 숫자가 나오자마자 특수 주문한 잭나이프를 번개같이 뽑은 기우혁은 내력을 끌어올려 백왕검결의 3식 수평 찌르기를 펼쳤다.
백왕검결 초식 중 시전도, 전개도 가장 빨라 기습에 쓰이는 쾌속의 검격.
자신의 인지 속도를 벗어난 공격을 해오는 적이다. 방심하면 한순간에 죽는 건 물론 처남까지 죽게 된다.
과거 이만큼 집중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집중력으로 단검을 내지르는 기우혁.
자신도 한때 백왕검도의 차기 후계자로 거론됐을 만큼 집안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던 실력. 목숨을 걸면 시간 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하지만 과신이었다. 오만이었다.
단 2초.
자신이 내력을 폭발시켜 뛰어들어 1초가 지났을 때 괴인은 눈앞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고, 1초 뒤 쿵— 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꺼헉…! 처남의 비명이 오솔길에 울려 퍼졌다.
살짝 움푹 팬 땅. 거기서 괴인에게 등이 밟힌 채 벌레처럼 처박혀있는 처남.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다. 터프하기로는 도관에서 제일로 꼽는 녀석이 일격에…….
“으아악!”
한순간 넋을 놨던 기우혁은 괴인의 거대한 손바닥이 자신을 움켜쥘 듯이 다가오는 착시에 발작을 일으키듯 달려들었다.
46년 평생 수만 번 반복한 검결이 한 뼘 남짓한 잭나이프를 통해서 펼쳐진다.
쉭— 쉬식- 쉬쉬쉭—
어둠이 내려앉은 오솔길, 달빛을 반사하는 은색 단검이 허공에 잔상을 빠르게 수놓지만…….
‘미……친!’
잭나이프는 괴인의 망토 끝자락조차 건들지 못했다.
슬쩍슬쩍 움직일 뿐인데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자신의 공격이 모두 빗나간다.
말 그대로 어른과 아이 수준의 격차, 아니 격차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실력차.
퍽!
“끄컥!”
순간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듯한 격통과 함께 뒤로 튕겨 날아간 기우혁은 나무에 등으로 충돌해 털썩 쓰러졌다.
“끄……으어어걱….”
발차기를 먹었다는 것도 맞고 나서야 알았다. 46년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기우혁은 걷어차인 배에서 올라오는 고통보다, 쳐 날려져 나무에 충돌해 금이 간 것 같은 등뼈의 통증보다 자신과 괴인의 실력 차이가 더욱 괴로웠다.
저벅저벅 다가온 괴인이 목을 칼로 찢은듯한 칼칼한 목소리로 말한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아니면 네 가족이 죽는 것을 네 눈으로 보게 될 거다.=
“……!”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난도질당하는 환상에 기우혁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자신만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은 무사할 거다. 아니, 무사할까? 무사해야 할 텐데.
다른 방법이 없다.
기우혁은 숨을 참고 잭나이프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순간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해 번개같이 단검을 찍었지만.
탁!
“…씹……!”
반사신경마저도 자신을 뛰어넘는단 말인가.
손을 쳐 날려져 잭나이프를 놓친 기우혁은 손뼈가 조각조각 부러진듯한 고통보다 자살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으걱!”
이어 입안에 천 뭉치가 처박혀 혀를 깨무는 것도 방지되었고.
으적, 뿌득.
“꺼어억……!”
두 팔이 부러져 자해하는 것도 막혔다.
‘아, 안돼. 안돼!! 소현아!! 소은아아!!’
곧이어 찾아올 미래를 예감한 기우혁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순간이었다.
=!?=
콰광!!
갑작스러운 충격에 기우혁의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충격에 튕겨 나갔던 기우혁은 부러진 두 팔의 고통도 잊고 눈앞에서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쓴 괴인이 갑자기 나타난 은색의 후드 망토를 입은 거한과 싸우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쿵, 콰광! 콰구구궁.
수준을 알기는커녕 움직임을 쫓기도 어려울 만큼 초고속의 공방.
검은색 덩어리와 흰색 덩어리가 격돌할 때마다 수류탄이 터진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땅이 터지며 흙먼지가 일어나고 진동에 몸이 흔들린다.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거다.
기우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괴한들을 바라보며 저 하얀 후드로브의 괴한이 부디 착한 사람이길, 그리고 검은 괴한을 물리치길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께 기도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두 괴한의 싸움은 그의 시력으로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야말로 천외천天外天의 대결.
사람이 어떻게 저기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 어렵다.
가문 내 역사서에 기록된 시조께서는 단숨에 큰 강을 뛰어넘고 집채만 한 바위도 가르며 말만큼이나 빨리 달렸다고 하는데, 저 괴한들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지 않는가.
“아저씨. 괜찮으세요?”
“어걱?! 헉, 거헉.”
그때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어린아이의 소리에 경기를 일으켰던 기우혁은 부러진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침을 질질 흘리며 식은땀을 쏟아냈다.
이, 이 아이는 어디서…?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요.”
“으버버, 그어억!”
위, 위험해. 얘야, 어서 도망가라! 어서!
기우혁은 이제 자기 딸과 동갑처럼 보이는 아이의 출현에 기겁해서 소리쳤지만, 더러운 천으로 막힌 입에서는 우거걱 어버법 입이 막힌 소리 밖에 안 난다.
설상가상으로 두 팔이 부러져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상태.
“잠깐만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이 제거된 기우혁은 그제야 두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식은땀을 비처럼 쏟으며 헐떡였다.
“얘, 얘야. 어서 도망가거라…! 여, 여긴 위험해……!”
“괜찮아요. 우리 누난 엄청나게 세거든요. 으아, 그런데 아저씨 팔이…….”
“끄윽!”
아이의 말에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 자신의 팔을 인식한 기우혁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런 것보다.
“누, 누나라니. 저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네 누나라는 말이니?”
“예. 저 검은 사람은 누나가 퇴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기우혁은 다시 멍한 얼굴로 수준조차 짐작할 수 없는 두 괴한의 격돌을 바라봤다.
그리고 과연.
콰광!!
=큭!=
숲으로 쳐 날려져 나무 서너 그루를 박살 내며 처박혔던 검은 후드 망토의 괴인은 이딴 타격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씹어내 뱉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쉭—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사, 살았나?
기우혁은 수명이 10년은 깎여나간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갑자기 실력을 어림짐작할 수도 없는 괴인이 습격해오더니 그런 괴인을 격퇴한 정체불명의 인물까지 나타나고…….
자신이 무슨 싸구려 무협 소설 속에 들어온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쪼르르 달려간 아이가 눈처럼 하얀 후드 망토에 마스크를 쓴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누나. 내 스맛폰 줘.”
……저 괴한을 누나라고 부르는 아이의 정체가 급격하게 궁금해진 기우혁이었지만, 그보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일어날 기색이 없는 처남이 더 걱정된다.
“끄으윽!”
온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처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킨 기우혁에게 아이가 다시 다가가 말했다.
“아저씨. 911…이 아니고 119 불러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크…… 아, 아니다. 119 말고 이… 아저씨 품 안에 휴대폰이 있거든? 그, 그거 꺼내서…… 긴급 통화로, 1번을 꾹… 눌러 주겠니?”
“……이걸로요?”
아이의 작달막한 손에 꺼내진 것은 반으로 꺾인 자신의 휴대 전화였다.
눈을 감고 한숨을 쏟아낸 기우혁은 자기보다 20cm는 더 커 보이는 은인에게 말했다.
“도,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례는 나중에 꼭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저기… 쓰러진 녀석을 좀 확인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안주머니에 휴대폰이 있을텐데, 그걸 좀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 보시다시피 팔이 이런 꼴이 되어서…….”
“저 아저씨도 살아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그러니.”
기우혁의 부탁으로 휴대 전화를 가져온 아이는 그가 부탁하는 대로 휴대 전화를 켜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두 번 신호가 가다가 연결이 끊기는 스마트폰.
그걸 본 기우혁은 폐를 쥐어짜듯 긴 한숨을 내쉬며 나무 기둥에 기대앉았다.
어떻게, 지금은 죽지 않고 살았지만 그만한 인물이 다시 찾아올 것을 생각하면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일어난다.
“아저씨가 기우혁이라는 탐정 아저씨 맞죠?”
뒷일의 걱정에 휩싸여있던 기우혁은 아이의 질문에 흠칫하고 몸을 떨며 긴장과 경계의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그 모습에 아이는 곤란하고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우연히 아저씨를 도와주긴 했는데 다른 날에도 도와줄 수 있다고 약속은 못 해요. 저랑 누나도 엄청 바쁘거든요.”
“그, 그러니…?”
과묵한 것인지 말을 못 하는 건지.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후드 로브 탓에 체형도, 외모도 알 수 없는 키 2m의 여자를 힐끔거리는 그에게 아이가 계속 말했다.
“아저씨도 탐정이니까 슬슬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겠죠?”
“…….”
걱정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기우혁은 다시 보았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판단력도 뛰어난 데다 저런 사람과 함께 다니는 아이.
이 아이에 비교하면 자신의 딸은 침팬지나 다름없지 않을까. 아니, 자신의 딸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아이들이 유인원으로 추락할 것이다.
말로만 듣던 아이큐 180 이상의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아이와 여자의 정체가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그…… 저기, 도움받은 처지에 이런 말하기 미안한데 너는…….”
“우리가 누군지 알려드리면 아저씨는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하는 물음에 기우혁은 말문이 막혔다.
“으응~. 그래도 공격받은 이유는 알아야 덜 억울하시려나? 우리가 뒤쫓던 그 사람이 아저씰 공격한 이유는 아저씨가 짐작한 대로에요.”
아이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기우혁의 가슴 속에서 불안이 피어올랐다. 부러진 두 팔의 고통마저 잠깐 잊을 정도로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 환인이라는 사람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거구나.”
“네. 그 사람은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어어엄청나게 더 위험한 사람이에요. 얽혔다간 곱게 죽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할 만큼이요.”
검은 괴인을 물리칠 정도의 실력자와 함께 다니는 아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인지 부조화가 더욱 강해져 두려움이 말 못 할 만큼 커진다.
“우린 이제 그 사람을 쫓아야 해서요.”
산 중턱에서 사람들이 달려내리오는 소리와 손전등의 불빛이 마구 춤추는 움직임에 시선을 준 아이는 하얀 로브의 여자에게 두 팔을 뻗었다. 그러자 여자는 소중한 아기를 품는 것처럼 들어서 품에 안는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기우혁에게 아이의 경고가 날아들었다.
“탐정 아저씨. 앞으로 그 사람한테 상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그건.”
“도망친 사람은 우리가 쫓을 거니까 다시 아저씰 노릴 일은 없을 걸로 생각하지만요.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또 주목받으면 그때야말로 끝이에요.”
“…….”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고 싶으면 여기서 멀리 떨어지는 걸 추천할게요. 그럼 바이바이.”
짧은 작별 인사와 동시에 바람처럼 산속으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아이와 여자.
기우혁은 여우에 홀린 것처럼 두 사람이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축 늘어졌다.
그의 귓가로 도관의 제자와 문하생들이 달려내리오는 소리와 자신들을 찾았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나는……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어.’
그리고 자신은 서서히 끓어오르는 냄비 안의 개구리였고.
세상에 저렇게나 강한 사람들이 있다니, 세상의 이면 세계는 어쩌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욱 깊고 어두운 게 아닐까.
별 생각 없이 받았던 의뢰가 죽음으로 향하는 특급열차 티켓이었다니.
‘잠적하자.’
아이 말대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자.
기우혁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면 곧장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넘어가 모든 연락을 끊고 10년 정도 숨어지내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적어도 이번처럼 불시에 사신이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주인님.=
“고생했다. 안느도 수고했어.”
=이슬이랑은 천 번도 넘게 대련했으니까 방금 같은 건 눈감고도 할 수 있어. 어렵지도 않고.=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이실리테와 다시 만난 환인은 그녀가 쓴 검은색 후드 로브와 암행복을 받아 아스펜드에 넣고 원래 그녀의 옷을 돌려주었다.
어둠 속임에도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나신은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
참지 못하고 이실리테의 속옷 차림을 스마트폰으로 찍는 환인에게 안느가 물었다.
=도령, 아무것도 안 묻고 이렇게 돌아와도 괜찮은 거야? 도움을 준 핑계로 습격받은 이유를 묻던가 하면 안 됐나?=
“그랬다면 그 사람 성격에 의심을 품었을 거다. 기우혁의 반응과 성향으로 내가 원하는 건 전부 파악했으니 이 정도로 끊는 게 의심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환인. 남자 둘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
“아르겐테아 영혼을 붙여놨으니까 그만 정령은 철수시켜도 돼.”
환연에게 지시한 환인은 궁금증이 눈에 가득한 이실리테와 안느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기우혁은 아홉 가지 성향으로 분류했을 때 혼돈 선과 혼돈 중립 사이에 있다. 이타적인 개인주의자라고 할까. 그렇게 정의롭진 않지만, 정의감은 있으며 소중한 사람들 대신 자신이 희생하려는 결단력과 책임감도 있지.”
=확실히 그랬어요. 설마 자신이 희생하려 하고 처남을 도망가게 할 줄은…….”
그랬기에 환인이 안느를 데리고 난입한 거지만, 만약 기우혁이 도망쳤거나 도망치려 했다면 환인은 이실리테 측에서 움직였을 거다.
“하지만 지위 상승 욕망은 희박하고 주변 환경 안정에 대한 욕구는 큰 편이야. 그런 인간이 무겁고 중한 안건을 받아 움직인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그건 처음 습격했을 때 기우혁이 보여준 반응에 드러나지.”
=어어. 자신이 왜 습격당했는지 정말 모른다는 게 목소리에서도 드러났었어.=
“날 조사하라고 지시하거나 의뢰한 것은 십중팔구 삼안 물산과 관련된 사회 지도층의 재벌 혹은 정치가 쪽, 나 자신은 위상력이 없지만 위상력을 가진 집단과 연이 있는 일부 인사일 거라고 본다.”
거기서 이 세계의 위상력 잠식 수준이 대강 드러난다.
“즉, 위상력을 다루는 단체가 있어봤자 위상력을 다루는 건 백왕검도와 비슷한 단체뿐이란 거다. 그보다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단체가 존재했다면 기우혁이 내게 접근했을 때 저 둘만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니오네브레스와 지구를 오가는 사람을 추적하거나 감지해내는 수단은 없다.
만약 정말로 위상력 측정이나 감지 수단이 있고 그런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이 존재한다면 첫 번째 귀환 때 저들에게 포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사라진 뒤 국가 기관이든 관련 단체든 사람을 보내 집안을 수색하던가 집주변을 감시했겠지.
하지만 지난 33일간의 감시카메라 비디오 내용에는 누구도 감시하거나 집안에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우리가 지구를 떠나있던 33일이라는 시간이 그러한 사실을 재차 증명한다. 이 이유가 가장 컸지.”
SNS에 여자친구들의 쌩얼이 노출되어 트랜드 이슈까지 먹었으니 더욱더.
그런데도 33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두 번째 귀환했음에도 누가 접근하거나 하는 흔적이 없다는 것은…….
“대국적, 대승적인 단체가 없다는 뜻이 되지.”
=으, 음. 그렇구나아.=
환인의 시선이 이해 못 했지만 이해한 척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안느에게서 벗어나 산 중턱에 있는 백왕검도관으로 향한다.
저만한 집단이 국가 중추에 스며들 정도라면 저 곳의 수준이 이 세상 위상력의 표준으로 봐도 될 거다.
환인은 후, 냉소적으로 웃고는 이실리테에게 두 팔을 뻗었다. 그러자 기뻐하는 얼굴로 살짝 얼굴을 붉히며 환인을 안아 드는 이실리테.
“집으로 돌아가지”
백왕검도관 수준이 지구 직업자 기준이라면 걱정할 일 따위는 없다.
위상력이 매우 희박하다고는 해도 여자친구들의 신체는 희귀 5급, 7급 직업자다.
위상력의 소모 효율은 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데다 위상력의 용량도, 신체 단련 수준도 까마득한 수준이며 특별한 기술까지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이쪽은 위상력의 회복 수단이 존재해.’
니라인으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포획한 무지갯빛 보석쥐, 영기와 심핵력을 조금 먹여주면 기분 좋다는 듯이 위상력을 마구 퍼트리는, 살아있는 위상력 발산 기관.
여자친구들의 위상력 조작 실력이면 그 위상력을 몸 안으로 흡수해 축적하는 일 따위 식은 죽 먹기다.
여자친구들을 안아서 영기를 회복하고, 그렇게 회복한 영기를 보석쥐에게 먹이고, 영기를 먹은 보석쥐가 위상력을 발산하고 발산된 위상력을 여자친구들이 흡수하고.
무한 동력의 완성이다.
‘다른 나라 상황은 어떤지 모르니 차분히 조용하게 정보를 수집할 필요는 있겠어.’
기우혁이 잠적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도주한다면 찾아가서 납치한 뒤 정보를 캐낼까.
탐정 일을 하는 뒷세계 주민이니 그를 조지면 기초 정보는 깔끔하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잠적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친 기우혁이면 붙잡아서 죽이더라도 시선을 받지 않을 테고 말이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간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모아놓고 보석쥐를 가져와 영기를 먹였다.
쮸우우~
배부르게 영기를 먹은 보석쥐는 포만감을 드러내며 벌렁 드러눕는다. 그리고 잠시 후 순도 높은 위상력이 보석쥐의 몸에서 흘러나와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방을 가득 채우는 위상력.
“자, 시작하지.”
위상력이 거실을 가득 채워서일까, 각자의 아우라를 되찾은 여자들이 환인의 이야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몸 밖의 위상력을 조작해 몸 안으로 이끄는 식으로. 그래, 그렇게.”
가장 먼저 검희 직업을 가진 이실리테가 뛰어난 위상력 감응을 바탕으로 보석쥐가 발산한 위상력을 몸 안에 차곡차곡 쌓는다.
이어 안느와 아영이 동시에 물길을 튼 것처럼 위상력을 빨아들이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르파와 백려강도 위상력을 몸안으로 받아들인다.
환인은 눈을 감고 조용히 위상력을 받아들이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노른과 환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친구들을 흉내 내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연신 고개를 기우뚱거리는 노른과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하듯이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환연.
의도적으로 위상력을 축기해야 하는 여자친구들과 다르게 환연과 노른은 피부호흡 하듯이 자연스럽게 대기 중의 위상력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른은 신수, 환연은 반정령이라서 그런 거겠지.’
=으응~!=
위상력을 다 채운 유르파가 슬림한 캐미솔을 입은 채로 기지개를 한껏 켜니 H컵에 이르는 한 쌍의 젖무덤이 보기 좋게 출렁인다.
하아~ 살짝 야한 숨결을 내뱉은 유르파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위상력 회복 수단이 생겼으니까 지구에서는 충전형 마도기를 만들어야겠네에. 음, 위상력 충전 마도구도 괜찮겠는걸?=
=후우우……. 그런 마도기도 있어?=
두 번째로 운기를 마친 안느가 돌핀 팬츠를 입은 상태로 다리를 쭉 뻗으며 묻자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 충전한 위상력은 쓸 수 없고 회복도 대기 중에 축적한 위상력을 방출해서 다시 흡수하는 방식이라 거의 사장된 기술이야.=
=아, 물약처럼 직접 흡수는 못 하는 거구나. 그런 거면 의미가 없겠네.=
=응응. 내가 만든 충전식 마도기도 거기서 개념 힌트를 얻어서 만든 건데 아무튼, 니오네브레스에서는 하등 쓸모없고 지구에서도 그다지 의미가 없었지만, 보석쥐가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 굉장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러네.=
그녀들이 대화하는 사이 각자 축기를 끝마친 여자들이 한결 개운해진 모습으로 낮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러던 중 아영이 스툴에 앉아있는 환인에게 엉금엉금 기어가서 물었다.
=오빠오빠.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여자들이 환인의 주변에 모여들었기에 환인은 그녀들의 무방비한 옷차림을 구경하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럼 어지간해서는 걱정할 일 없겠네요. 남은 건 오빠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거 뿐인가?=
“그리고 저쪽에서 내게 관심을 끊을 방법이겠지.”
=아, 천원…….=
순수純粹가 천원 입장의 핵심이라면 그런 순수를 의도적으로 더럽히는 것도 괜찮을 거다.
“흠. 순수를 적당히 오염시킨다면……. 역시 그건가.”
=그거?=
짐작 가는 게 없는지 동그랗게 눈을 뜬 안느에게 환인이 빙그레 웃었다.
“교미.”
=교……!=
아기 천사 같은 외모에서 튀어나온 적나라한 단어에 여자들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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