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99화 (699/813)

699 현실 part2

풀먼 식빵, 흔히 사각 식빵이라 부르는 것에 속을 파내고 아이스크림과 생크림, 과일과 꿀 등을 뿌린 허니 토스트의 비주얼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크게 감동했다.

이실리테는 막혀있던 요리의 방향성 추가로, 안느는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가 있을 수 있구나 해서 감동으로.

=우와아…. 이슬아 이거 봐, 엄청 폭신폭신한 빵 속에 아이스크림이랑 생크림이 잔뜩 들어있어.=

=꿀도 뿌려져 있고 이건…… 계피 가루? 넣은 과일도 굉장히 신선해.=

=으음~! 달아~. 너도 얼른 먹어봐.=

=……맛있다.=

둘은 쉴 새 없이 카페의 디저트를 주문하고 나온 음식을 맛보았다. 물론 그러면서 길거리에 시선을 떼지 않고 환인이 내린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생크림과 아이스크림, 꿀을 열심히 퍼먹다가 식빵 귀퉁이를 찍어 남은 내용물에 찍어 먹어본 안느가 뺨에 손을 올리고 하아~ 감동의 한숨을 흘렸다.

=대단해. 나 우유를 못 마셨으면 울 뻔했어.=

“그러고 보면 안느 너의 식습관은 완전한 채식주의자라고 보긴 힘들군.”

=어째서?=

냠냠, 허니 토스트를 학살하던 안느가 눈만 살짝 돌리며 묻는다.

“단백질도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나뉘는데 너는 우유도 마시고 치즈도 먹지 않나. 섭취량이 극단적으로 감소할 뿐 아예 못 먹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러네요. 우유하고 달걀에도 동물성 단백질이 포함되어있고 치즈도 송아지의 신체를 일부 사용하는데 치즈, 우유는 먹을 수 있지만, 달걀은 못 먹으니까요.=

=어…… 그런가?=

환인과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안느가 스푼을 입에 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안느는 수목화한 이후 냄새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분류를 해왔다.

냄새를 맡고 두드러기가 올라오면 먹을 수 없는 것, 맡고 괜찮으면 먹어도 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가장 큰 협력자인 이실리테가 말하는 거니 맞겠지.

=도령, 저기 저 사람 제법 무술 배운 거 같은데 어때?=

키가 작아져 바깥을 보기 어려웠던 환인은 의자에 일어서서 그녀가 가리킨 남자를 보고 다시 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아까부터 기감으로 계속 지나가는 사람을 감지하고 있는데 위상력은커녕 흔적이 느껴지는 사람은 아예 없다.

자신의 우려는 기우였던 건가.

=주인님. 밖이 보기 어려우면 제 허벅지 위에 앉으세요.=

환인이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자 이실리테는 한순간 가슴이 뀽—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를 안아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힌다.

“방금 봤어? 진짜 귀엽다~.”

“저런 아이라면 다섯도 키울 수 있을 거 같아…….”

“그런데 방금 여자가 애한테 주인님이라고 안 불렀어?”

“잘 안 보이는데… 어디 외국에서 온 사람인가?”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환인은 젖가슴의 말랑말랑함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듣기 좋고.

그런데…….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옆에 앉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곁눈질하는 것을 발견했다.

음흉하거나 불쾌한 시선이 아니라 그냥 이실리테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한 것 같은 모습.

숫기가 없는지 곁눈질만 하는 모습에 환인은 이실리테의 다른 젖을 주무르며 그를 바라보니 남학생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허둥지둥 짐을 챙겨 카페를 나간다.

그렇게 다소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환인은 의뢰했던 뒷조사의 보고서 메일을 받게 되었다.

‘역시 빠르군.’

부모님의 유산과 보험금을 노리고 친척과 사촌이라 주장하는 인간들이 나타났을 때 좋은 방법이 없을까 찾던 중 알게 된 곳인데, 의뢰 처리 속도가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온달 탐정사무소와 기우혁 탐정이라는 남자에 대한 보고서는 5만 자 분량에 지하율과 그녀의 친인척은 5천 자 분량.

의뢰를 넣은 지 5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이만한 양이라니.

‘국가 단체 수준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던가 그런 단체의 망에 접속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가.’

이런 집단을 이용하는 것은 손잡이까지 칼날로 이뤄진 검을 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때문에 이 집단을 이용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너무 성급하게 접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든다.

세상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어서일까 언노운 데이터, 통칭 UD라고 불리는 이 집단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든 것이다.

“…….”

온달 탐정사무소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 나면 좀 더 확실한 대응 방향성을 정할 수 있겠지.

먼저 지하율의 보고서부터.

자신이 찾아낸 SNS의 주인은 역시 대현자인 그녀였고, 부친이라 생각했던 계정 주인 역시 그녀의 부모가 맞았다.

본가는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부모 양친과 남동생은 건강 양호, 생활도 안정되어있다.

지하율은 현재 실종 신고 상태로 매년 2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그녀를 찾는 데 쓰고 있다.

그녀의 양친은 지하율을 찾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에게는 5억의 보상금을, 정보를 제공한 사람에게도 일정량의 사례금까지 지급하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건 상황.

‘가족사진은 돌아가는 길에 찍으면 되겠지.’

그녀의 부친은 전도유망한 회계사에 모친도 피부과 의사다. 남동생은 유명 국립대에 재학 중이니 집안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하율의 보고서를 닫은 환인은 다음으로 온달 탐정사무소와 기우혁 탐정에 대한 보고서를 열었다.

……기우혁. 46세. 한국 고무술古武術 백왕검도 가문인 백주 기씨(魄州 奇氏) 집안의 차남으로 40살까지 직업 군인으로 종사하다 상관 폭행 및 하극상으로 불명예제대, 탐정으로 전업하였으며 3년 전 정식 탐정 면허를 획득했다.

온달 탐정사무소의 소장 기우혁(46세), 경리이자 아내인 유소현(37세), 파트너이자 백왕검도의 수제자이며 유소현의 동생인 유철승(36), 탐정 보조이자 아르바이트생인 김희민(23세), 최재정(21세)와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백왕검도는 고려말 친원파 권문세족의 방계에서 시작된 가문이며…….”

이어지는 백왕검도의 역사는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질 만큼 유구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알만한 사람만 아는, 하지만 정·재계에서 호위나 경호원이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문하생, 제자들이 자리 잡은 무술가 집안이라고 나와 있었다.

=…도령, 어때?=

“애매해.”

웹브라우저 앱을 켜 백왕검도, 백주 기씨를 차례대로 검색해본 환인은 그럭저럭 상세하지만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보고서만 보면 백주 기씨 가문의 시조가 니오네브레스 경험자일 가능성이 90%다.

그런 백주 기씨 가문이 위상력으로 이어진 뒷세계의 주민일까 싶냐면 그건 또 아니다.

자신이라면 가문의 정보를 철저하게 숨겨 일반 대중이 접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진정한 힘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을 때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봐도 집 주소와 도관의 위치, 관장과 문하생 정보까지 나오는 이 집단이 정말 뒷세계와 연관이 있는 걸까?

환인이 확보한 정보, 그리고 주말인 일요일 한낮에 도심지를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세상이 니오네브레스와 얼마나 연관되어있는지를 가늠하고 있을 때 이실리테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주인님. 빌딩에서 두 명이 나왔어요.=

환인도 빌딩 안에서 위상력을 지닌 두 명이 나오는 것을 느꼈기에 고개를 들었다.

기우혁과 그날 그의 뒤에 서 있던 30대 초중반의 남자, 보고서 프로필에 적혀있던 유철승이다.

두 명이 건물을 나와 도로변에 주차되어있는 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환인은 안느의 품에 안겨 카페를 나와 그녀의 안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환연에게 물었다.

“바람 정령한테 하늘에서 저 차를 쫓으라고 할 수 있겠나.”

「30km거리까지는 쫓을 수 있을 거야.」

전에 해본 적도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저들이 출발하면 그때부터 부탁하지. 이실리테, 안느. 너희가 보기에 저 남자들 수준은 어느 정도 같지.”

=흐~응. 앞에 선 남자는 검술을 조금은 배운 수준? 마을 자경대장 정도가 아닐까 싶어. 저 정도면 2급 이형종하고 1:1은 가뿐할 테고 1:2는…… 조금 힘들겠네. 뒤에 있는 남자는 아영이처럼 격투술을 익힌 체간인데 젊은 쪽이 조금 더 강한 정도야.=

=젊은 쪽이 수제자라고 했는데 수제자가 저 정도면 관장은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아요. 위상력이 이만큼이나 희박하니까 신체 능력보다 기술로 승부를 보려 할 테지만……. 관장의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려강을 능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돼요.=

=아, 출발한다. 도령, 어떻게 해?=

“천천히 뛰어서 쫓지. 내가 길 안내를 지시할 테니 둘은 주변에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달려라.”

「환인. 차가 저쪽으로 가고 있어.」

저쪽이면 대로로 나가는 길이다. 한강을 넘을 생각인가.

스마트폰을 켜 지도 앱을 실행한 환인은 화면을 스카이뷰로 전환한 뒤 환연이 전해주는 정보에 따라 그녀들에게 가야 할 길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주말 서울 시내는 차가 무척 많다.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어 날씨도 쾌청한 상태.

환연의 정령 감응 범위인 500m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70km 너머까지 볼 수 있다. 이론상 서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뜻.

하루종일 달릴 수 있는 여자친구들의 신체 능력으로 길이 막혀 다소 느릿한 이동속도의 차 한 대를 추적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기우혁과 유철승이 탄 차는 다소 느릿하게 강동구와 송파구 행정 경계선을 따라 이동하다 천호대교를 타고 광진구로 넘어갔고, 안느와 이실리테는 환인의 지시에 맞춰 사람 눈이나 카메라가 없을 땐 시속 40km 정도, 있을 땐 20km 정도로 달리거나 걸으며 광진교를 따라 광진구로 이동했다.

도심에서는 빌딩으로 시야가 가려지기도 하고 너무 높은 곳에서는 정령의 눈이라 해도 지상을 분간하기 힘들기에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가며 움직인다.

기우혁이 탄 차는 광진구를 지나 동대문구, 성북구를 건너 강북구의 북한산으로 향했다.

중간부터 행선지를 의심하던 환인은 강북구로 넘어온 순간 기우혁 일행의 목적지를 확신했다.

“본관으로 향하는군.”

=집이라는 말이지? 마침 잘됐네.=

“그래.”

본관에는 백왕검도관도 붙어있다. 멀리서 살펴보면 그 수준을 알 수 있을 터.

예상대로 정릉동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터널 관리사무소, 그 근처에 차를 세운 기우혁과 유철승은 걸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환인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안느의 말랑말랑한 찌찌… 가슴을 만지며 마음을 다스렸다.

「감시 카메라 몇 대가 나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긴 하지만 틈이 많아. 납치하려면 지금이 제격인데?」

여기서 저 둘을 납치해 아르겐테아 영혼을 빙의시켜 정보를 캐내면 속이야 편하겠지만, 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효율을 생각하면 기우혁의 아내와 3살 된 아이를 납치한 후 조종한다는 방법도 있고.

「저쪽. 나무 뒤를 돌아서 위로 올라가.」

환연이 알려주는 감시 카메라를 피해가며 백왕검도관이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올라간 환인은 조선 시대에 있으면 어울릴법한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기숙사 느낌의 기와 건물을 눈에 담으며 아르겐테아 영혼들을 불러낸다.

“가서 집의 구조와 인원을 샅샅이 살피고 와라.”

「예, 성제님.」

「넷.」

어린아이 모습이 된 환인이지만 영혼들은 일체의 의문도 품지 않고 날아가 백왕검도관과 본관으로 보이는 대궐에 스며들었다.

환인도 기감을 넓게 퍼트렸다.

50m 정도가 한계던 기감이 전방에 집중하자 200여 미터까지 뻗어 나간다.

다른 요소는 제외하고 위상력 감응에만 집중하자 자연 속이라서인지 그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가 백왕검도관과 본관을 통째로 뒤덮었다.

보통 시멘트 건물이었다면 기감이 차단되었을 텐데 친환경적인 나무 건축물이라 조금 방해를 받긴 하지만 그럭저럭 안쪽이 파악되는데…….

“……위상력을 지닌 사람이 많군.”

=어느 정도로?=

“양으로 따지면 1급 직업자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60여 명 중 42명이 미약하게나마 위상력을 몸에 담고 있다.”

그 정도라 해도 일반인을 뛰어넘어 전문 체육인을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발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기우혁과 유철승 정도라면 기본적으로 전문 체육인 수준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고 위상력을 동원하면 그보다 훨씬 더 강해지겠지.

환인의 의식이 개중 일부로 향한다.

위상력의 흔적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설마 무협처럼 토납법을 통해 몸 안에 위상력을 모으는 건가.’

저런 집단이 한 국가의 일부 산업 중추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니까,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집단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그러한 집단이 얼마만 한 수준으로 사회에 침투해있느냐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가장 많은 위상력은 3급이 되지 못한 2급 말석 수준. 그만한 수준이 사회 최상류층의 경호를 전담하는 수준이라면 다른 나라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단 뜻.

이걸로 니오네브레스의 기술이 얼마나 현대에 스며들어있는지 대강 견적이 나온다.

섣부른 속단은 금지지만 크게 다를 일은 없겠지.

=그 정도라면 기본적인 기술도 겨우 펼치겠네.=

“인간의 탐욕과 잔머리를 얕보지 마라. 늙은 호브가 매섭다는 속담이 니오네브레스에도 있지 않나.”

=음…….=

물론 2급 언저리의 위상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상력으로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

“과학과 위상력이 만난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지는 나도 모른다. 경계심을 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도령 말이 맞아.=

=네, 주의하겠습니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단단해지며 방심의 기색이 사라진다.

잠시 후, 환인은 영혼들이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아스펜드에서 꺼낸 노트에 대궐과 백왕검도관의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숨겨진 방이 있고 내부에는 몇 권의 책이 소중하게 보관되어있었습니다.」

이모렐 대신 그다음으로 똑똑한 플뢰족 영혼에게 원기를 흘려 넣어 실체화시킨 뒤 환인은 펜을 내밀며 노트에 따라 적어보라고 지시했다.

“백왕검결, 백주 기씨 보첩 1~4권인가.”

전부 한자로 적혀있어 영혼이 어색하게 한자를 따라 그렸지만, 특징은 살아있기에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첩은 한마디로 족보를 담아놓은 책자다. 검결은 백왕검도관의 기술서일테고.

환인은 도관과 본관의 전개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차남이라 가문을 잇지 못해 나와서 탐정일을 하고 있다면, 기우혁이 날 찾은 것은 단순히 우연인가 아니면 기업이 삼안 물산 폭로에 내가 있음을 알아채고 조사를 지시한 건가.’

어느 쪽이든 말이 된다.

후자의 경우 각 정·재계 인사들이 백왕검도관 출신 제자들을 호위로 삼고 있다면 백왕검도관 – 기씨 가주 – 기우혁 탐정으로 선이 이어지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테니.

3시간 정도 더 흘러 서서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을 무렵, 기우혁과 유철승이 기씨 가문 본관을 나서는 모습에 환인은 이실리테를 불러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터벅터벅.

“으~. 노망난 노친네 같으니. 도대체 언제 죽으려는지 원.”

“매형도. 장문인께서 돌아가시면 매형만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철승아. 난 노친네가 죽으면 내 몫의 재산을 환전해서 소현이랑 소은이 데리고 외국으로 튈 거다.”

“아이고 또 그런 소리 하신다. 매형이 없으면 도관 망한다니까요.”

“임마. 그 정도로 망할 거면 차기 관주였던 네가 도관을 나왔을 때 망했다.”

“저야 도관의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형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관 서열 2위 시면서.”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냐? 그리고 도관이 망하든 말든 알 바냐? 형이란 작자가 알아서 자~알 하겠지.”

몇 시간이나 부친의 잔소리와 설교에 학을 뗀 기우혁은 처남과 산을 내가며 연신 투덜거렸다.

일주일의 마지막인 일요일, 가뜩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딸내미랑 보낼 시간도 적은데 노친네의 듣기 싫은 쇳소리를 3시간이나 들었더니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누가 앞을 가로막고 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멈춰.=

어둑어둑해지는 숲길,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새카만 후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의 카랑카랑한 살기 어린 목소리에 기우혁과 유철승은 목덜미로 소름이 쭈뼛거리는 걸 느꼈다.

기우혁의 시선이 삽시간에 정체불명의 사람을 훑는다.

키는 175 정도, 어깨는 잘 단련된 것처럼 벌어졌으며 자세는 마치 1000년 된 고목이 우뚝 선 것마냥 꼿꼿하기 그지없다.

힐끔, 옆을 본 기우혁은 유철승이 자신처럼 식은땀을 살짝 흘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내가 방심해서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다.

‘어디서 이만한 실력자가 나타났지?’

흔들림 없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사람은 자신들이 동시에 덤벼도 못 이긴다.

그런데 왜 나를? 집안이 원한을 맺은 곳에서 보낸 습격자인가?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우리 앞을 막는 겁니까?”

쉿—

기우혁은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깨달았고, 이어서 뺨이 화끈하며 피가 타고 흐르는 걸 느끼곤 두 번째로 경악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 소중한 사람을 버리겠다면 소리지르거나 도망쳐도 좋다.=

“……!”

=환인이란 남자의 조사, 누가 사주했나.=

“……의뢰인은 밝힐 수 없습니다.”

=아내와 딸의 목숨보다 의뢰자의 비밀이 중요한가.=

살기가 더욱 짙어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기우혁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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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빌런)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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