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 현실 part2
쇼핑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온 환인은 인터넷으로 온달 탐정사무소를 검색하던 중 묘하게 몸이 찌뿌둥한 것을 느꼈다.
진을 다 써서 기진맥진했다가 겨우 회복될 때의 찌뿌둥함이 아니다. 안느의 정수는 언제나 몸을 건강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데 그런 그녀의 정수를 매일같이 섭취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헬루멘에서 딱 한 번 감기에 걸린 것 외에는 컨디션 난조를 겪은 적이 없다.
“……?”
지금 상태는 오히려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흐트러지는 것 같다고 할까. 잠을 너무 오래 자서 두통과 몸살이 온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쇼핑한 물건을 늘어놓고 정리하던 여자친구들이 스마트폰의 조그만 액정을 들여다보며 속닥인다.
=우리가 했던 게 쇼핑 데이트라는 거야…?=
=응응. 여기 봐봐. 쇼핑 데이트라는 항목을 보면….=
=그러고 보니 가게에 남녀가 많았어요….=
한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스마트폰을 켜서 능숙하게 만지는 유르파. 그런 그녀의 좌우에 붙어서 그녀의 스마트폰을 같이 구경하는 안느와 이실리테, 아영.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걱정 없이 돌아다닌 건 이번이 처음 같아요….=
=진짜 별천지네요…. 세상에 이런 장소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세상은 아니고 자기네 세상이지….=
「뭐 보는 거야…?」
=앗…! 노른 너 손이 소스로 엉망이잖아. 가서 씻고 와….=
=언니들…. 과자랑 차 가져왔어요….=
눈을 감고 있으니 속닥거리는 여자친구들의 목소리가 살짝 아련하게 들려온다.
멍한 상태로 그 백색 소음 같은 그 소리를 듣던 환인은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군. 백화점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몸이 왜 이럴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 안을 관조한다.
「환인?」
캐시미어 코트 안주머니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옷걸이에 옷을 걸어놔도 거기서 나오지 않던 환연이 기어 나와 물었지만, 환인은 딴 데 신경이 쏠려 대답을 못 했다.
‘……파편인이?’
목 아래로 해서 명치 부근 사이, 넓게 포진되어있던 남은 파편인이 절반은 녹아 사라졌고 나머지 절반도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다.
관조하고 있는 와중에도 파편인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그때마다 그 주변의 영기, 훈기와 한기가 힘을 얻은 것처럼 소리 없이 맹렬히 용트림 친다.
그렇게 난폭해진 영기는 세맥까지 굽이굽이 들이치고 있는데 그게 거의 몸 전체를 뒤덮어가는 중이다.
‘이것 때문이었나.’
여자친구들과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기감을 몇 시간이나 펼쳐댄 게 원인인가.
원인을 생각하던 환인은 그제야 몸 상태가 이렇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파편인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온몸에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허덕였다.
시간이 흐르며 그러한 감각에 익숙해지고 영기 순환을 진행하면서 몸 상태,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왔기에 그때부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디버프가 해소되며 정상인 컨디션에 절호조가 더해지면, 당연히 컨디션 과잉으로 나빠지겠지.’
힘에 힘이 더해진다고 그 힘이 몇 배로 더 강해지는 건 만화나 소설에서 등장할법한 편의주의적인 전개다.
힘에 힘이 더해졌을 때 그릇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면 깨져나갈 뿐이고, 신체는 준비되지 않은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파편인이 천천히 녹았다면 신체가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가며 천천히 몸 상태가 호전되었을 거다. 그러나 처음 파편인이 생겼을 때의 2/3에 달하는 파편인이 단숨에 녹고 있다.
환인은 위기감을 느끼고 영기의 컨트롤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이대로 가면 에너지가 과잉 충전된 영기는 전신의 영적인 혈맥을 거칠게 흐르다 혈맥을 찢어버리거나 터트려버릴 테고 그 결과는 아드네빌라나 닌실이 예견한 것처럼 최소 폐인, 높은 확률로 사망에 이르겠지.
“……!”
그런 징조가 벌써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 안 곳곳이 욱신거리고 찌릿거린다.
근육통처럼 어디 한 곳이 집중적으로 아픈 게 아니라 몸 안의 혈관,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
환인은 필사적으로 영기를 머리부터 손끝, 발끝까지 통로란 통로를 모두 사용해 순환시켜 나간다.
중간중간 기운끼리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혈맥에 과부하를 주지 않도록.
그리고 여자들은 갑자기 변한 환인의 상태에 당황하면서도 섣불리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긴장 어린 기색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 그러니까 지금 오라버니 상태는 기운이 지나쳐져서, 기운이 몸 안을 날뛰고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나도 이야기로 듣기만 해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만약 그런 상태라면 외부 충격이 가해지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가뜩이나 자기가 기운을 다스리려 애쓰는데 옆에서 충격을 주면 제어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아니더라도 오빤 기운으로 영기를, 우리 여자들의 기운을 쓰시니까……. 우리가 괜히 거들겠다고 오빠를 만지면 폭주 중인 기운이 더욱 힘을 얻을 수 있겠네요.=
=응.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눈을 뜰 때까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애타는 유르파의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쿠에들을 방에 몰아넣고 와서 조용히 근처에 무릎 꿇고 앉아 짐승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영과 안느는 터져 나오려는 탄식을 억누르며 그녀들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성술을 조심스레 준비했다.
만약 그가 기운의 제어에 실패한다면 틀림없이 육체에 크나큰 손상이 가해질 텐데 적어도 성술로 그 손상을 억눌러볼 셈인 것.
유르파도 비슷한 생각으로 영도의 심처에만 존재하는 현월수玄月水, 환인이 조금 얻어온 그걸 연구해 얼마 전 간신히 제작한 프로토타입 열화버전 엘릭서를 꺼냈다.
진짜 엘릭서, 엘릭시르는 만병통치 불로장생의 영약이지만 자신이 만든 건 불로장생은 몰라도 반쯤 저승에 발을 걸친 사람도 살려낼 거라 믿을 만큼 제대로 만들어진 비약이다.
아직 연구와 분석이 다 끝나지 않아 환인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그가 순환에 실패해 그 반동으로 육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면 이게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환인이 지구에서 뜻밖의 사태에 맞닥트렸을 때, 니오네브레스에서도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려 하고 있었다.
* * * *
너무나 맑아 도무지 물속 같지 않은 심해.
《…….》
어군魚群이 물속이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심해의 어떤 해저 동굴에서 아드네빌라는 5일째 사색에 잠겨있었다.
환인이 말한 대로 그가 황금빛에 휩싸여 사라진 뒤 관조의 신술은 끊어졌고, 아드네빌라는 눈을 감아도 그를 볼 수 없는 상황.
이전의 그녀였다면 약속이 다르다며 펄펄 뛰거나 쌍심지를 켰겠지만, 그녀는 별반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사람처럼 과거를 추억하듯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의 기억을 회상했다.
수천 년을 산 신수의 영지靈知는 사색과 회고를 동시에 허락한다.
소규모 용궁龍宮처럼 호화롭고 화려하게 꾸며진 전당의 용좌. 인간의 형상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던 아드네빌라는 쇠하지 않는 기억을 들여다보던 중, 어느 시점에 흠칫 가녀린 교구를 떨었다.
붓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물색 눈썹이 찡그려지며 자그마한 한숨이 설익은 앵두 같은 입술에서 조그맣게 흘러나온다.
《망할 인간…….》
얼굴은 빨갛게 익었으며 숨결도 살짝 거칠어져 진땀을 조금씩 흘린다.
가녀리지만 연약하지만은 않아 보이는 육체는 애타는 소녀처럼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이 성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홀려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미색.
소멸하지 않아 불멸자라 불리는 그녀는 얼마 전 수천 년 생에 있어 단 한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 충격은 막대하였고 아드네빌라는 사흘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망각의 축복이 희박한 용에게 그러한 경험이란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는 정도의 충격적인 기억.
《못된 인간…….》
그 기억에 파묻혀버린 아드네빌라는 자궁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 불길은 홍수가 되어 그녀의 사타구니를 흠뻑 적신다.
조용히 헐떡이던 아드네빌라는 홀린 듯이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
갈라지고 충혈되고 축축이 젖어 열기를 내뿜는 그곳에 검지가 닿자마자 오싹오싹한 감각이 등허리를 사정없이 치고 올라간다.
멈추지 않고 틈새를 사악, 뒤에서부터 앞쪽까지 쓸어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아랫배를 헤집고 꼬리에는 벼락이 내려꽂힌다.
《읏, 으응~~.》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작은 살덩이를 짓누르며 소리 없는 절정에 바들바들 떨던 아드네빌라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곤 왼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에게 물렸던 뿔의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카득-
《하아아—…!》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세로로 가로지르는 별똥별에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휜다.
그때의 감각에는 비할 수 없는 하찮은 자극이지만, 아드네빌라는 그날의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며 첫 수음을 배운 아이처럼 정신없이 손장난에 빠져들었다.
《앗…… 안돼…! 흣, 조금만… 더……! 아앗…!》
하지만 자궁에서 시작된 불길은 그런 손장난으로는 잠재울 수 없는 부류.
자궁을 불태우는 것 같은 이 감각을 재우려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
결국 화려하게 불태우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절정의 언덕에서 내려와 버리고 만 아드네빌라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피어났다.
어쭙잖은 손장난이 화가 된 걸까. 자그마한 불길은 이제 업화가 되어 몸안을 활활 불태운다.
아드네빌라는 인내심을 갉아먹는 정념의 불길에 짜증이 확 치밀었다.
내게 그런 식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다니, 내가 뭐 그리 잘못했다고!
잘못하긴 했지. 더욱이 그 인간의 성격이면 자기 여자를 괴롭힌 놈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나도 여자고 살을 섞은 사이인데 그런 취급은 아니잖아!
그저 살을 섞었을 뿐이고 정서적 교감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첫인상도 안 좋았고.
그만큼 선물도 안겨주었고 나름의 조언도 주었는데!
셋 다 선물이라기보다는 보상이었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보상.
그를 향해 분노를 토해내는 감성. 그리고 냉철하게 지적하고 반박하는 이성.
몸 안을 불태우는 정욕의 불길에 한참을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다 힘이 빠진 아드네빌라는 축 늘어져 물속을 헤엄치는 무지갯빛 물고기 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타고 남은 재처럼 몸 안에 불쾌감이 가득하다.
그로 인해 신수의 영성靈性이 깎여나가고 고고한 지성이 꺾여 불멸자에서 필멸자로 격하되는듯한 감각.
이는 틀림없이 죽음을 한 번 경험하였기에 벌어진 일이겠지.
이러한 불쾌감으로 인한 분노는 응당 그러한 경험을 주게 한 대상(환인)에게 향하는 게 옳지만…….
《……그놈들.》
아드네빌라의 분노는 환인이 아니라 메리아놀로 향했다.
본인도 이상한 일이고 말이 안 되는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신수의 고고한 정신은 그러한 행동의 핑계를 마련해주었다.
《외계의 타 차원에서 인간을 소환하다니, 오만불손한 불신자 놈들!》
비록 하계에서 수행하다 딴 길로 빠져버린 신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신수로서의 본능적인 질서 추종 성향이 있다.
환인의 기행을 관조하며 알게 된 차원 방랑자의 진실은 그녀의 분노에 마땅한 핑계로 충분하다.
자고로 차원 간의 벽은 견고하여야 하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양 차원의 물질은 무엇하나 오가지 않는 것이 정상이며 옳은 상황인 것.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고 뜨거움이 있다면 차가움도 있기 마련.
벽은 항시 완벽하고 온전한 것이 아니라, 여느때보다 단단해지는 시기가 있다면 어느때는 무척 헐거워지는 시기도 있다.
그리고 그런 헐거움이 최고조에 달하면 다른 차원의 물질 일부가 넘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거기까지는 자연의 섭리라 하여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인간들이 저런 실험으로 다른 차원의 생물, 그것도 고등 생명체가 수시로 넘어오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차원의 벽은 물질이 자주 오갈수록 헐거워지며 불안정해진다.
차원의 벽이 심각하게 불안정해지면 최악의 경우 양 차원이 융합해 공멸共滅하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다.
그래. 이몸은 그 망할 인간이 이몸을 방치하고 몇 달이나 떠나버린 것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신의 뜻을 제멋대로 거스르고 세계에 멸망을 초래하는 저 불신자 놈들에게 화가 난 거야.
몸을 일으킨 아드네빌라의 쪽빛 눈동자가 세로로 쭈우욱 갈라지며 백청용龍의 흉성이 깃들었다.
《알류겔의 주인께서 영산까지 납시다니, 유례없고 전례 없는 일이라 당혹스럽기 그지없소.》
《뭘 아닌 척 발뺌하는 거냐. 네년도 그 망할 인간의 손에 희롱당해 홀려버린 아녀자가 아닌가.》
《……백청룡께서도 그 남자에게 홀렸단 말씀이시오?》
그래서 자신을 찾아왔다고?
청초한 신수 기린의 질문에 백청룡은 심술이 난 것처럼 고개를 팩 돌렸다. 그 행동이 뜻하는 것에 신수 기린이자 영도의 대성녀인 닌실은 쓴웃음을 지었다.
‘성제는 참으로 대단하시오. 저 용마저 굴복시키다니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극히 오만하여 다섯 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올려다보지 않는 용이 필멸자인 인간을 동등한 눈높이로 바라보게 된 것일까.
《…이몸의 영성이 꺾였다.》
《예에?!》
《이를 회복하려면 수성이 가득 찬 신비에서 수천 년은 수양에 힘을 써야 하겠지.》
닌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알류겔의 해왕이나 되는 백청룡의 영성을 누가 꺾었단 말인…….
호, 혹시 성제가? 하지만 어떻게? 수천 년을 산 신수의 영성은 꺾고 싶다고 꺾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러기에 앞서 망할 인간을 관조하다 알게 된 한 가지, 세상을 혼돈과 멸망으로 몰아가는 쓰레기들을 징치하고자 한다.》
《…백청룡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만저만한 사건이 아닐 거라 생각하오만…….》
《기린, 차원 방랑자가 저쪽 세계에서 계속 넘어오는 것을 너도 불가사의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아드네빌라의 말에 닌실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메리아놀에 인위적으로 고의를 행하여 방랑자를 강제로 소환하는 작자들이 있다.》
《무슨?!》
그것은 세상의 평온을 바라는 다섯 신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짓이다. 그런 짓을 메리아놀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닌실은 매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백청룡께서 그만한 사건의 경중을 모를 리는 없을 터이니 거짓을 입에 담으리라 생각하지 않소. 그렇다 해서 무작정 믿을 수만도 없소. 신통으로 확인을 해보신 거요?》
《너는 아직 그에게 듣지 못하였지. 그 강제 소환 사건의 피해자이자 장본인이 환인, 그 인간이다. 확고한 물질적 증거 또한 그의 수중에 있다.》
《……!》
아드네빌라의 발언에 닌실은 한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며 까매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그가 동쪽으로 여정을 이어가는 데다 메리아놀과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움직인다 싶더니……!
그게 사실이라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눈을 번쩍 뜬 닌실은 신통력으로 아드네빌라의 영성을 눈에 담았다. 아드네빌라도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막지 않는다.
닌실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탄식했다. 그녀의 영성은 흔들림 없이 올곧다. 방금 한 말이 거짓 없는 진실이라는 뜻.
《사실……이군요. 아니… 세상에 어떻게, 메리아놀의 사도는 어찌 그걸 보아 넘기고 있단 말인가……!》
《듣자 하니 그년은 30년째 침묵하여 처소에서 봉행 중이라 하더군.》
그리 대답한 아드네빌라는 충격과 경악에 잠긴 닌실에게 제 뜻을 전달했다.
《율리는 본신에 타격이 없는 한 신수의 사바세계 간섭을 금지한다. 그러나 이몸은 환인 그 망할 놈과의 인연 탓에 사바세계와 인연이 깊어지고 말았으니 직접 나서더라도 율법과 이치에 저촉되는 것이 없는바. 그 망할 놈의 계획에 이몸 또한 편승하겠다.》
《무슨…….》
《네년이 꾸미고 있는 계획에 이몸의 이름을 얹는 것을 허락한다. 아니…… 백청룡이 다섯 신의 뜻에 역행하는 메리아놀의 주구들에게 잘못을 이실직고할 최후통첩을 전한다고 덧붙이는 쪽이 나은가.》
신수의 영성이 오롯할 때면 신력과 신통력으로 이보다 더 나은 수를 찾아냈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사고가 멀리 뻗어 나가질 않는다.
지능이 절반 넘게 깎여나가 바보가 된듯한 기분이 그녀의 분노를 부채질한다.
닌실은 고고한 자태로 우뚝 서 있는 아드네빌라를 올려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청룡이 직접 나섰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세상에는 평지풍파가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어 나갈 것이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역적도당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쌓을 덕보다 지상에 혼란을 불러일으켜 깎여나갈 영지가 더욱 클 수도 있다.
분노에 잠겨 사리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제에게 홀린 백청룡이 한낱 아낙으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어느 쪽이든 성제에게는 희소식이겠소.’
백청룡의 최후통첩이 더해진다는 것은 그의 정당성을 드높여 계획에 큰 힘을 실어준다는 뜻이니까.
고심에 잠겨있던 닌실은 아드네빌라가 몸을 돌리는 걸 보고 다급히 물었다.
《자, 잠깐. 백청룡, 어딜 가시려는 것이오?》
《이몸은 망할 놈처럼 말로만 떠들 생각은 없다.》
뭐? 설마?
닌실은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닌실이 몸을 일으켰을 때 아드네빌라는 이미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진 후였다.
그날부터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에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 * * *
=…….=
=…….=
침묵이 내려앉은 현대풍 집 거실.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여자들은 자신의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순간 시력이 사라질 정도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진 이후 변한 환인의 모습.
처음에는 자신들을 두고 환인 혼자 니오네브레스로 귀환한 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광채가 사라진 뒤 나타난 환인의 모습에 여자들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환인은 환인대로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지하율이 안전한 곳에서 파편인을 녹이라고 경고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자리에서 일어선 환인은 잠깐 몸의 균형이 달라져 휘청였지만 금방 적응하고 두 팔을 들어보았다.
“이게 대체…… 하.”
목소리도 가늘어졌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온다.
입고 있던 검은색 목티의 소매가 팔꿈치 부근부터 축 늘어진다. 팔다리 길이만 봐서는…… 대여섯 살? 그쯤 될 거 같은데.
바지도 훌렁 흘러내렸지만, 목티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가 있어 하반신이 노출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몸이 작아진 이유가 뭘까. 나름 성공적으로 영기를 순환해서 진정시켰는데 왜 이런 꼴이 된 거지.
도무지 자신의 손 같지 않은 작고 앙증맞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환인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파편인이 연달아 녹으며 생기는 기운을 영기가 삼키며 더더욱 강맹해지고 난폭해졌지만, 환인이 근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니오네브레스를 기행하며 몸에 체득한 영기 순환은 달인 수준에 이르러있었다.
온몸의 영기 세맥을 활용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기를 순환시켜 나가던 환인.
‘분명 마지막 파편인이 녹기 전까지는 피해가 없었다.’
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피해라고 할 수 없는 수준. 그랬는데 마지막 남은 파편인이 녹은 순간 온몸의 영적 혈맥이 영기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한순간 의식이 끊겼었다.’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는 몸이 이런 꼴이 되어있었다.
여자친구들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상태를 빠짐없이 지켜보았겠지.
원인을 찾기 위해 그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또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질문하려 고개를 든 환인은 코앞에 보이는 일곱 쌍의 눈빛에 흠칫하고 뒷걸음쳤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환연, 백려강, 아영에 노른까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호박색, 은색, 백색, 흑색, 청색, 자주색에 녹색 눈동자들.
여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모양새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뭔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번들 번쩍거리고 있었던 것.
왠지 위험한 느낌에 환인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러지?”
=…도령 맞아?=
“내가 맞다만…….”
=귀.=
“……귀?”
=귀여어어엇!!=
=꺄악!=
=아아……!=
“흡?!”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가 덮치듯이 달려들어 그녀들의 품에 반강제로 안기게 된 환인은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떠올렸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이 가슴은, 유르파인가? 이 말랑거림이 이때만큼은 독이 될 줄이야!
가슴 한쪽이 자신의 머리보다 1.5배는 더 큰 여자들의 젖가슴 세 쌍에 파묻혔더니 진짜로 숨을 쉴 수가 없다.
“큭…! 지, 진정해라! 이실리테, 둘을 좀 막아… 으풉!”
허우적거리며 두 손이 파묻힐 만큼 부드러운 가슴을 필사적으로 밀어내 호흡을 확보하는 동시에 이실리테를 불렀지만.
=주인님…! 아아, 주인니임……!=
이번에는 상태이상 매료(모성)에 걸린 것처럼 제정신이 아닌듯한 이실리테의 가슴골에 머리가 끼어버렸다.
뒤통수에는 안느의 것으로 판단되는 조금 단단하지만 말랑한 젖가슴이 닿고 옆머리에도 유르파의 가슴으로 짐작되는 젖가슴이 눌린다.
그녀들의 격렬한 포옹에 환인은 팔을 허우적거리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가락을 잡았다.
‘이건, 백려강의 손가락인가?!’
다급히 그 손가락을 잡아당기다시피 하며 손등을 탁탁 때리자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언니들! 오라버니 숨 막혀 죽겠어요! 아영, 언니들 좀 뜯어내서 말려봐……!=
=아이고, 언니들 눈이 돌아갔네. 노른아 넌 유르파 언니 잡고 벨 넌 이실 언니 붙잡아. 안느 언니님, 정신 차려요!=
=이실 언니!=
백려강과 아영, 노른이 셋을 붙잡고 떼어내는 통에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된 환인은 호흡 곤란으로 얼굴이 빨개진 채 헐떡였다.
여자친구들 가슴에 얼굴이 파묻혀 질식사할 뻔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원.
‘오늘은 진짜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군.’
고작 한나절 지났을 뿐인데 무슨 나흘은 족히 흐른 기분이다.
=핫?! 내, 내가 무슨 짓을……?=
=어어, 어라?=
“…….”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가 정신을 차리는 걸 본 환인은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와 잠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진짜 정신을 잃을 것처럼 피곤하다. 가뜩이나 영기 순환에 심력을 다 쏟아부었는데…….
여자친구들도 정신을 차렸으니 걱정할 일은 더 안 생기겠지.
「환인!」
=앗, 주인님!=
자세한 건… 일단 한숨 자고 나서…… 물어봐야겠다.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힘없이 뒤로 벌렁 쓰러져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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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대주천... 성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