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6 현실 part 2
턱, 터덕.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에 눈을 번쩍 뜬 환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먼저 살폈다.
집이다. 26년을 살아 익숙하다 못해 삶의 일부가 된, 부모님과 자신의 집.
‘역시 이동과 귀환은 이전 마지막 지점에 이뤄지는군.’
털썩풀썩.
뀨익!
꾸꾸~!
뀨웃…!
끡!
고양이 사이즈로 변해 여자들에게 안겨있던 쿠에들이 쓰러진 그녀들에게 깔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환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여자친구들을 거실에 차례대로 눕혀두니 그제야 풀려난 쿠에들이 살았다고 삑삑거리며 푸르르 몸을 털거나 뭉친 깃털을 다듬는 등 몸단장을 한다.
환인은 기절한 여자친구들을 보며 좀전의 일을 생각했다.
눈부신 황금빛에 뒤덮여 몸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까지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무언가 막을 통과하는 순간 의식이 사라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구.
‘의식의 소멸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의식이 끊긴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처음 지구로 넘어올 때는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못했지만, 지금 재차 경험해보니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이유가 뭘까.
문득 환연에게 생각이 미쳐 안주머니를 살핀 환인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축 늘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손수건을 이부자리처럼 깔아 그 위에 환연을 올리며 유일하게 말짱한 정신으로 여자친구들의 뺨이며 가슴을 콕콕 찔러보는 노른을 불렀다.
“노른. 넌 언제까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숲에서 빛에 휘감길 때부터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그사이 계속 정신 차리고 있었나.”
「응. 신기했어. 화악-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니까 막 하얀 선 같은 게 많이 다가와서 지나쳤는데 그리고는 물 같은 걸 통과하니까 여기였어.」
“……실제 물이었나. 아니면 물 같은 무언가였나.”
「물 같은 거?」
“……….”
환인은 턱을 잠깐 쓸어내렸다.
여자친구들은 빠짐없이 기절했다. 아마 깨어나더라도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자신은 중간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지만, 막을 통과한 직후 의식이 끊어졌었다.
노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건 쿠에들도 마찬가지.
짐을 뒤져서 보석쥐가 든 병을 꺼내자 그 속에서 세상 태평하게 뒤집혀서 자고 있던 보석쥐가 눈을 뜬다.
고슴도치 비슷한 주둥이를 쫑긋쫑긋하다가 밥을 줄 기색이 아님을 읽었는지 다시 늘어져 쿨쿨 잠드는 보석쥐.
다시 턱을 쓸어내린 환인은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등 지성체는 지구로 넘어올 때 신체가 분해되어 다시 재조립된다는 가설. 그 분해되었다 재조립되는 충격에 정신을 잃는다는 가설이다.
노른이 멀쩡한 것은 쿠에였다가 신수가 되며 지성에 눈을 떴기 때문이고, 쿠에들이 멀쩡한 이유는 짐승이라서?
가볍게 생각하면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거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문제가 많다.
타의에 의해 한 번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될 경우 그것은 철학적으로 동일한 자신이라 볼 수 있는가.
철학을 넘어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그런 분해 현상에 무언가 다른 의지가 깃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
노른이 말한 것도 신경 쓰인다.
그녀가 말한 것은 보통은 우주에서 웜홀을 이동하거나 초공간도약을 할 때면 으레 보여주는 장면인데 차원 이동을 할 때 그게 보일 수 있는 건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같은 세계인데 거리만 수천억 광년이 떨어져 있다든가. 그렇다면 흑옥 혼령주…… 흑령주를 터트렸을 때 보였던 그건 웜홀 현상이 맞나.’
맞았다면 흑령주는 질병과 부패, 죽음이 아니라 다른 속성이 붙어있다는 뜻? 아니면 자신의 문양, 심핵력에 부여된 속성이 이러한 공간 이동 계열이고 그 힘으로 흑령주를 펼쳐 벌어진 현상?
생각할 게 많지만, 환인은 일단 당장 해야 하는 것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양은…… 빛이 많이 줄지 않았군.’
천릉의 코트와 조끼를 열어 가슴을 확인해보자 나무처럼 그려진 문양이 은은한 금빛을 내뿜고 있다.
용량 면으로 보자면 총량에서 60%가량을 소모한 느낌.
산란못 미궁 당시보다 총량이 몇 배나 늘었음에도 이만큼이나 소모되었다면 인원수에 따라 소모량이 차등 적용된다는 이야기겠지.
천릉을 모두 벗어 아스펜드에 수납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환인은 그리모암의 유물을 만지작거렸다.
유물은 상관없다고 했으니…….
이어서 창문 커튼을 살짝 젖혀 바깥을 살펴본다.
대충 점심시간. 니오네브레스는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지만 한국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점심시간이지만 미세먼지가 심한지 하늘이 뿌옇고 날도 그다지 화창하지 않다. 누렇게 뜬 잔디는 거의 자라지 않았지만, 낙엽이 제법 쌓여 있다.
‘나중에 정원을 청소해야겠군.’
스마트폰을 꺼낸 환인은 유심칩을 끼우고 기기를 한 번 껐다 켠 뒤 비행기 모드를 종료했다.
‘2023년 3월.’
산란못 미궁을 깨고 넘어왔을때가 2월 9일이었고 지금은 3월 말이니 역시 이곳의 하루가 대강 니오네브레스의 한 달이다.
징— 징징징징징징징징—
동기화가 끝났는지 스팸과 광고, 재난 알림 문자들이 쏟아진다.
중간중간 친구 몇몇의 안부 확인도 있고 전 직장의 후배들이 건네는 생존 확인 문자도 보인다.
[ 속보) 환인 선배. 강 부장하고 강 부장 딸래미 구속됐어요.]
[수갑이 채워진 채 겉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끌려가는 두 명의 사진.png]
“…….”
그중 문자 하나를 확인한 환인은 브라우저를 켜 검색어를 넣어보았다.
[검찰 “삼안 물산 게이트” 강태형 부장, 주가조작·횡령·배임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검찰에 따르면 강 씨는 2010년부터 올해 초 1월까지 수차례 협력업체 합병 이슈로 주가를 조작한 데 이어 횡령과 배임 혐의…….]
휙휙 스크롤을 올려 내용을 전부 읽어본 환인은 강 부장과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딸, 그리고 사내에서 그를 따르던 인사 몇몇이 구속수감되거나 구속영장이 신청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꼬리 자르기에 당했군.’
아무리 검색해봐도 물산의 주력 임원 이름은 한 명도 언급되지 않았다. 바지사장이거나 힘도 세력도 없는 이름만 인원인 자들 몇 명뿐.
삼안 물산을 두고 무언가 거래라도 한 게 아닐까.
‘이렇게 언론까지 탔으니 강 부장은 더 재기할 수 없겠지.’
하더라도 상관없지만, 왠지 임원들이 무사하다는 게 꺼림칙하다.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여 신분을 숨기고 폭로했으니 고발과 폭로로 열 받은 인간들이 이쪽을 찾는 것은 어렵겠지. 하지만 혹시라도 찾으면…….
생각하던 환인은 피식 웃었다.
이쪽을 찾으면 뭐? 사적 보복을 우려한다니 누가 누굴 우려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신경 써야 하는 건 삼안 물산과 삼안 물산 게이트에 휘말려 손해를 본 기업의 보복이 아니라…….
‘위상력의 흔적을 가진 그 인간들, 있을지 모르는 그 인간들의 배후 조직이지.’
방범용 노트북을 가져온 환인은 전원 코드를 연결한 뒤 CCTV의 저장공간을 확인했다.
년 단위 영상 보관을 생각해 압축 효율이 높은 프로그램에 대용량 외장 하드까지 붙여놓았는데 용량은 거의 먹지 않았다. 파일 개수도 33개가 전부.
선을 끌어다 거실의 대형 TV에 연결해 영상 재생 준비를 마친 환인은 거실 카펫에 나란히 누운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가져와 그녀들을 덮어주었다.
“…….”
나란히 누운 다섯 여자친구와 천인체 하나.
한 명 한 명 경국지색인 그녀들이 한데 나란히 누워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던 환인은 주방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가져와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돌아간 그 날부터 cctv 영상을 재생시켜나갔다.
동영상 파일 16개를 한 번에 재생시켜 화면에 나눈 뒤 프레임 드랍이 일어나지 않는 한계 속도인 12배속으로 재생한다.
창 하나에 4개 화면, 그런 창이 16개나 화면을 뒤덮으니 보기만 해도 어지럽지만, 전체적으로 신체 스펙의 향상이 이뤄진 환인에게는 별문제 되지 않았다.
더욱이 환인의 집은 주택가 안쪽으로 통행량도 거의 없다. 가끔 이웃집 주민들이나 아이들이 오갈 뿐.
「환인. 뭐 봐?」
다가온 노른이 환인의 다리 사이에 앉으며 TV를 향해 눈길을 준다.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대충 CCTV의 동작 원리를 설명해주었지만, 이해가 어려운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노른.
노른이 그러고 있어서인지 쿠에 다섯 마리가 종종 다가와 그의 주변에 몸을 붙인다.
꾸?
뀨꾸.
끡!
「환인. 똑같은 화면만 계속되는데 보는 거 재미있어?」
“일이니까 하는 거다.”
칙— 캔맥주 하나를 따서 마시니 노른도 「나도 마실래.」 하고 손을 뻗기에 그녀의 입에 캔맥주를 물려준다.
꼴깍꼴깍 두 모금 마시더니 그녀의 예쁜 녹색 눈썹이 아까보다 더욱 찌푸려진다.
「……이거 맛있어?」
“큭큭큭. 니오네브레스의 맥주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맛이긴 하지.”
환인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여분의 리소스를 사고회로에 돌렸다.
니오네브레스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차원 방랑자는 3천 년 정도 전이라 했다.
지구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100년 전쯤.
‘그 정도면 니오네브레스에서 지구로 귀환한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즉 귀환자가 만든 집단 같은 것이 지구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건 기록된 역사가 모두 진실이라 가정했을 경우다.
만약 3천 년 이전…… 영도에서 보았던 니오네브레스 인류의 역사 1만 7천 년의 대부분을 차원 방랑자가 같이했다면 560년 정도.
‘560년.’
그의 머릿속으로 유명한 음모론 비밀결사 집단 몇 가지가 스치고 지나간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장미십자회 같이 환인도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단체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구에서도 속 편히 살 수 없을듯한데.’
힘은 중요하다.
힘이 중요하다.
니오네브레스에서 최대한 힘을 쌓고 넘어와야 혹시나 있을 지모를 집단과 마찰이 생겨도 대비할 수 있겠지.
다만 지구는 위상력이 극히 희박하니 귀환자가 있더라도 지하율처럼 마력을 쓰거나 정령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니오네브레스에서 만큼의 힘은 발휘할 수 없을 거다.
‘능력으로 발휘하는 기술보다 총화기가 더 무서운 법이지.’
어차피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 위상력이 넘치는 위상 세계에서라면 총알도 뚫지 못할 만큼 신체를 강화할 수 있으니 소용없겠지만 지구는 위상력이 희박하니까.
생각하며 자신의 몸 안을 대강 훑어본 환인은 눈을 한순간 찌푸리며 돌아가는 영상을 전부 일시 정지시켰다.
그리고 몸 안을 다시 면밀하게 살폈다.
‘……파편인이 전부 절반가량 녹아있다.’
집요하게 융화를 시도한 것처럼 남은 파편인 대다수가 흐릿하다. 작심하고 순환을 한다면 오늘 안으로 전부 녹여버릴 수 있을 만큼.
왜 갑자기 이렇게…….
‘차원 이동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심핵력은 지구에서도 계속 회복되지 않았던가.
여자친구들을 통해, 여자들을 안으며 영기를 채울 수 있고 자신의 기술은 영기와 심핵력으로 이루어지니 자신은 지구에서도 니오네브레스에서 만큼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뜻.
“…….”
지구에서 자신이 지닌 능력을 다 사용할 수 있으니 장거리 저격만 조심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목숨을 잃을 일은 없다는 건가.
환연이 정령을 매우 잘 다루니 도심지 밖 자연 속에서 지낸다면 암습을 걱정할 일도 없다.
시험 삼아 왼팔의 영혼 창고에서 이모렐을 소환해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성제님.」
멀쩡히 소환되는군. 영혼과 사후의 매커니즘이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영체 상태는 어떻지. 위화감이나 부자연스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나.”
「……평소와 다르지 않은듯합니다.」
“천인체에 빙의해보도록.”
=예.=
시킨 대로 천인체로 들어가 몸을 일으키는 이모렐. 그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더니 몸을 살피기 시작한다.
=성제님. 천인체가 변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변했지.”
=빙의한 상태에서 느껴지던 불쾌한 통증과 감각 둔화가 사라졌습니다. 위상력의 회복 속도 또한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위상력 회복 속도 감소는 알고 있는 사항이다. 하지만 천인체의 붕괴 증상인 통각은 왜…….
‘……파편인의 융화와 연관이 있는 건가.’
자신의 경우 신체가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며 파편인이 일부 정화된 것처럼 옅어졌고 천인체는 부정적인 신체 상태가 정상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빙의를 해제하지 말고 계속 유지해라. 그 과정에 변화가 발생하면 즉시 이야기하고.”
=예, 성제님.=
이모렐을 의자에 앉혀놓은 뒤 다시 영상을 재생시킨 환인은 24시간짜리 16개의 영상 파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파편인의 융화 작업을 이어나갔다.
“저녁은 외식할 생각이니 다들 옷을 갈아입고 와라.”
2시간 뒤 정신을 차린 여자들은 무사히 환인과 함께 지구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원이 는 탓에, 심핵을 부수고 넘어온 게 아닌 탓에 혹시라도 떨어지거나 낙오하면 어쩌나 다들 걱정했던 것.
물론 낙오하게 되면 영도로 돌아가 대기하도록 입을 맞춰놨지만, 그래도 그와 만에 하나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들을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던 거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르파는 거실에서 노트북을 정리하고 있는 환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2시간이나 잠들어있었다니, 깨우지 그랬어.=
“저번처럼 길바닥에 쓰러진 것도 아니니 깨울 것까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곤히 자고 있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딱히 할 것도 없고 목적도 시간 보내기이니 사흘간 휴식한다고 생각하고 쉬면 됩니다.”
환인의 부드러운 다독임에 유르파는 귓볼을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웃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뭔가 해야 할 게 있지 않을까 묻는 건 좀 아니겠지?
그냥 내가 알아서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게 낫겠다. 마침 시도해볼 것도 있고.
뀨뀨삑삑 거실을 뛰어다니며 노는 자그마한 쿠에들에게 시선을 주었던 유르파는 모두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걸 보곤 주머니에서 귀걸이형 특제 마도구를 꺼내며 말했다.
=안느 아가씨, 아영이랑 려강 아가씨, 노른이는 이리 와서 이거 받아.=
=어?=
=이게 뭔데요?=
「??」
=극소형 신체 변화 마도구. 안느 아가씨랑 아영이는 귀를 사람처럼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거고 려강 아가씨 건 뿔이랑 꼬리를 감춰주는 거야. 노른이는 날개를 감춰주고.=
소모 위상력은 착용자의 위상력을 끌어다 쓰는데 개량을 거듭한 거라 위상력 회복이 대폭 줄어든 이곳에서도 24시간 유지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오, 진짜 귀가 동그래졌네. 그런데 촉감은 원래 귀랑 같은데?=
=환영을 덧씌운 거니까. 육체 변화는 아가씨들한테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서 제외했어. =
=그런 거면 아영이랑 벨 머리카락 색도 바꾸는 게 낫지 않아? 지구에 보라색 머리는 없다고 들었는데.=
여자들이 마도구를 착용하는 사이 방에서 검은색 목티와 갈색 무지 바지, 황갈색 코트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연예인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염색도 있고 컬러 콘택트렌즈도 있다. 한국인 눈에 너희는 외국인 미녀로만 보일 테니 귀, 뿔, 꼬리만 안 보인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마스크를 끼면 위화감은 더 줄어들 테지.”
알아봤지만 중국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의무착용 해제 같은 말이 나오고는 있지만, 거리에 마스크를 끼고 돌아다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3년 전 우한 바이러스가 시작되었을 당시라면 마스크를 낀 걸 보고 유난을 떤다느니 말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일상생활에 마스크는 뗄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한 안느가 약간 스포티한 백색 점퍼에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팔을 벌린다.
=도령, 어때?=
“잘 어울리는군.”
저렇게 있으니 영락없는 지구 사람처럼 보인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외국 배구 선수나 농구 선수처럼 보이지 않을까.
환인이 옷 갈아입는 걸 옆에서 시중들어준 이실리테가 가방 두 개를 가져와 이모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모. 쿠에 애들 저녁은 이 가방 안에 있는 거 꺼내서 챙겨주고 여긴 도시락으로 만들어둔 게 있으니까 저녁은 여기서 꺼내 먹어.=
=예, 이실리테님.=
=그런데 오빠. 저랑 벨은 괜찮을까요? 여기 완전 처음인데…….=
다른 차원이라는 말을 듣고 걱정을 드러내는 아영에게 환인은 괜찮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는 산란못 이후 한글과 한국어를 열심히 습득해 지금은 좀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만큼 대화가 가능하다.
백려강과 아영도 언니들이 배우는 걸 보고 따라 배우기 시작해 회화는 좀 어색하지만, 대화에 무리 없는 수준. 그녀들의 외모는 서구 미녀이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생각해봤자 ‘되게 신기한 머리카락 색으로 염색했네.’ 정도겠지.
“이모렐, 다녀올 테니 쿠에들과 집 잘 지켜라.”
=예, 성제님.=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자마자 안느가 노른의 어깨를 잡아서 옆으로 데리고 오며 말한다.
=노른, 넌 나가면 말 하는 거 조심해야 해. 네가 말하는 건 귀를 찌릿찌릿하게 하니까.=
「환인한테 들었어. 말 많이 안 하면 되는 거잖아.」
=맞아.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있다가 할 말 있으면 옷 잡아당겨. 귓속말로 해주면 대신 말해줄게.=
「응.」
“…….”
환인은 주택가 근처인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여자친구들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는 걸 보고 역시 마스크를 씌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번에는 문제가 안 생긴 게 기적이었지.
의무착용 해제 말이 나오는 중이었다지만 마스크를 안 쓰다니. 시비 걸리기 충분한 일이었을 텐데…… 여자친구들이 정신 놓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던 걸까.
여자친구들이 기절해있을 때 예약한 고급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환인은 근처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낀 데다 대충 적당히 옷을 차려입었음에도 귀티 나는 그녀들의 자태는 사람의 시선을 마구잡이로 잡아끌었지만, 인원수도 인원수였고 환인의 존재가 걸그룹 매니저 같은 느낌이어서 사람들의 접근이 원천차단 되었기 때문.
=아, 이 옷 예쁘다. 이슬아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어.=
=나는 치마는 좀……. 바지가 더 좋아.=
=그러지 말고 한 번 입어봐. 도령! 도령도 이슬이 치마 입은 거 보고 싶지?!=
“……그래.”
안느의 외침에 고급 여성복 매장에 들어와 있던 여자들과 동행한 남자들의 시선이 환인에게 쏠린다.
“야, 남자도 존나 잘생겼을 거 같지 않냐.”
“레알 마스크 썼는데도 잘생김이 묻어나는 거 같음.”
“에이 그건 좀 에바다. 마스크 효과 몰라? 밑에는 흔남일듯.”
“……니가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시발. 갑자기 왜 시비야. 너도 모쏠이면서.”
“아니 그것보다 무슨 사이지? 보통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자신들을 두고 숙덕거리는 소리를 일부러 외면하며 즐겁게 옷을 보는 여자친구들을 구경하던 환인은 재차 기감을 널리 퍼트렸다.
환인이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번화가로 나온 이유는 그녀들에게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옷이며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선물해주기 위해 서기도 하지만…….
‘딱히 위상력이 느껴지는 사람은 없나.’
기감으로 위상력을 가진 사람이 혹시 얼마나 될까 싶어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주말, 토요일 저녁이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오가고 있어 한정식집에서부터 이곳 백화점까지 족히 천수백 명을 기감으로 훑었지만, 위상력의 흔적은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차별적이고 무대포적인 방식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위상력의 흔적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지구에 얼마만큼 니오네브레스와 관련된 사람이 퍼져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 시민은 약 1000만 명.
숫자로만 본다면 서울보다 인구수가 많은 나라는 많다. 그러나 면적당 인구밀도를 순위로 나열한다면 서울은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빼곡하다.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위상력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다른 나라는 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인 것.
“우왁, 방금 봤어?! 진짜 미쳤다…!”
“와, 우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지?”
갑자기 왁— 소란이 나기에 무슨 일인가하고 여자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실리테가 반쯤 코트를 걸친 모습으로 마스크를 다시 착용하고 있다.
보아하니 이실리테가 코트를 갈아입던 도중 실수로 마스크를 흘렸고, 그걸 본 손님들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기함과 탄성과 경악성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매장에 가득한 사람들. 지금까지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면 이제는 말을 걸어보려는 것 같아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고른 옷을 카드로 결제하고 다음 코스인 주류 매장으로 이동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나름 관리를 잘하고 있는 오프라인 주류매장이었는데 과연 이라고 할까. 주류 보관 방식에서부터 품질 관리까지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기에 눈을 반짝이는 안느와 함께 환인은 수십 종류의 와인과 동양주를 구매했다.
짐은 사람들의 시선과 cctv가 없는 곳에서 아스펜드 안에 수납해버린다.
이어서 명품 화장품 매장, 명품 속옷 매장, 명품 식재 마트에 인근 대형 서점까지.
여자친구들 모두가 만족하는 쇼핑 코스였고 지출금만 천만 원을 훌쩍 넘었지만, 환인을 난감하게 만든 것은 지출이 아니라 속옷 매장이었다.
=도령, 이거 어때?=
“…좋다고 생각한다. 네 머리카락 색과 대비가 돋보이는군.”
=히히.=
=주인… 환인 님, 이 속옷 색 마음에 드세요?=
“…그래. 하지만 노출이 너무 많지 않나.”
=주… 환인 님한테만 보여드릴 거니까요.=
=오빠오빠! 이거 어때요?! 입고 벨이랑 같이 엉키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 그래.”
=오빠가 괜찮대! 이거 사자!=
여자친구들이 하나같이 속옷을 들고 와 그에게 검사를 받으니 속옷 매장에 있던 점원은 물론이고 손님인 여자들과 몇 안 되는 남자들도 환인을 악당 보듯이 도끼눈으로 쳐다본 것.
쇼핑을 마치고 여자친구들과 백화점을 나온 환인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타인의 시선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함박웃음을 지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여자친구들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환인은 노른이 포장마차에서 과장 보태 팔뚝만 한 고기 말이 꼬치를 물끄러미 보는 걸 발견했다.
「우왕.」
두 개를 사서 노른에게 쥐여주자 양손에 고기 꼬치를 쥐고 행복해하는 노른.
소스가 흘러내리는 걸 보고 옆에서 챙겨주는 이실리테와 안느.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수많은 자동차가 오가는 걸 가리키며 속닥이는 유르파와 백려강, 아영.
환인은 뒤에서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 하얀 달이 뜬 밤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7천 명 가까이 탐색했지만, 위상력의 흔적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 거리는 하루 유동인구만 30만 명을 웃돈다. 여기서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은…….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한 걸까. 저번에 이쪽을 찾아온 탐정은 그저 우연이었다거나.
‘그럴 리가.’
이 세상에 마냥 우연은 없다. 우연이라 생각하는 것은 여러 복잡한 인간관계가 꼬여 발생하는 결과물일 뿐.
‘KCI 한국탐정연맹의 온달 탐정사무소라고 했었나.’
환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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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평온한 노후를 위해 움직이는 하렘왕 환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