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 데바스톤 산맥
데바스톤 산맥에서 히아리드 대평야로 나가는 울창한 숲속 공터.
그곳에서 마차를 꺼내고 짐을 정리해 싣고 쿠에를 마차에 묶어서 출발 준비를 끝마친 여자들은 그 뒤로 20분이 지나도록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 이슬이 네가 가서 불러봐. 명색이 주인님이잖아.=
=시, 싫어……. 네가 나보다 스스럼없으니까 안느 네가 가서 주인님 불러봐.=
=아니 나도 요즘 도령한테 면목이 없어서……. 율이 언니? 언니, 귀 막고 눈 감는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 아니니까? 언니?=
=아~~ 몰라 몰라~~ 안 들려~~ 안 보여~~.=
=어, 언니드들. 제, 제졔제젯, 제가, 제가 마마말씀드드드듯듣듯……!=
=아… 아니! 됐어됐어. 벨 너한테 시키면 숨넘어갈 거 같아. 아영아?=
=윽, 역시 제가 해야 하나요……?=
=이럴 때 막내가 나서야지.=
=마, 말 걸었다간 목이 뎅겅 떨어질 거 같은데…….=
살기도 아니고 위압감도 아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웃음에 서릿발처럼 냉랭한 눈빛으로 먼 곳을 보는 그에게 다가가 말 걸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에 무리가 온다.
그렇다고 뺄 수도 없다. 자신이 안가면 벨이 가려고 할 거 같으니까. 노른은 마차 지붕에서 실루를 붙잡고 뭔가를 가르치느라 이쪽에서 불러도 대답도 없고.
‘내 밑으로 하나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들어올 만한 인물이면 지하율, 대현자뿐인가? 걔가 들어오면 힘에 눌려서 그대로 계속 막내 하게 될 거 같은데.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갈수록 기묘한 압박에 아영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대체 뭘까. 무슨 기운이지? 그녀도 나름 암살자로 폭넓게 활동하며 보고 들은 게 많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생경하기 그지없다.
아니……. 지하굴 미궁에서 오빠가 영혼술을 펼쳤을 때랑 비슷한가?
괜히 언니들이 안 가려고 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된 아영이었다.
언니들이 그냥 분위기가 무섭다고 오빠한테 말을 걸기 싫어할 리가 있나. 언니들은 이 정체 모를 기운이 오빠한테서 막 흘러나오는 걸 먼저 느낀 거였어!
‘……여자는 배짱!’
지하굴 미궁에서 그 배짱을 발휘하지 못해 못난 꼴을 보였단 기억이 떠올랐지만, 금방 치워버린 아영은 후읍—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오, 오빠앗. 추, 춥랄, 출발 준비 다 끝났는데효오…?!=
“…음.”
말을 걸자마자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영문 모를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표정도 평소처럼 담담하게 변한다.
덕분에 아영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딴생각하는 사이 준비를 다 해버렸군.”
그제야 슬금슬금 다가오는 언니들과 친구를 본 아영은 작게 뺨을 부풀렸다가 한결 편하게 환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하셨는데요? 아까 누군가랑 통신하시던데 하얀 늑대들한테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왔어요?=
“하얀 늑대들은 아니고, 대성녀님이 그다지 환영하지 못할만한 이야기를 하셨지. 다들 모여봐라.”
여자친구들을 한데 불러모은 환인은 약간의 부연 설명을 곁들여 대성녀와 나눈 대화를 토대로 자신이 꾸민 계획을 들려주었다.
“이쪽이 폭력으로 나가는 것은 저쪽이 그만한 빌미를 주었을 때뿐이다. 명목 없는 폭력은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니까.”
현재로서는 폭력을 동원하기에 무언가, 2%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메리아놀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짓만 알려도 천인공노할 놈들이라면서 분노를 터트리겠지만, 국가 지도부쯤 되면 겨우 그정도로는 이쪽의 정당성에 동조하지 못한다는 뜻.
‘암살시도 그 정도는 뭐 할 수 있지 않나? 직접 진행한 것도 아니고 죽지도 않았고 저쪽도 나름대로 사과의 기색을 내보이려 하는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 보겠지.
정치라는 게 다 그런 식으로 두루뭉술 뜨뜻미지근하기 마련이니 보다 확실한 스탠스를 잡게 하려면 그만한 임팩트가 필요한데…….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그 임팩트를 주기 위한 장치다.”
=충격.=
작게 중얼거리는 안느에게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메리아놀 주도는 현재 투르시온이 장악하려는 기색이 짙다. 투르시온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메리아놀을 조종하려들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투르시온 입장에서는 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저들을 부추기려는 거예요? 대현자한테 들은 거랑 오빠가 가진 증거물을 은밀하게 대중에 퍼트리는 식으로요. 메리아놀이 차원 방랑자들을 이계에서 납치해와 이용해먹는다, 대충 이 정도?=
아영의 의견에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인은 그런 거라며 말을 받았다.
“단순 소문만으로는 허튼소리라고 일축할 거다. 그런 악의적인 소문은 이미 다른 나라의 귀족, 호족들이 공공연하게 입을 담는 수준이니까.”
메리아놀이 차원 방랑자들을 모아 보호하고 있는 걸 아니꼽게 보는 자들은 많다. 그런 자들에게서 시작된 악의와 헛소문이 비교적 상류층에 퍼져있는 것이다.
그걸 이번에는 대중에다 퍼트린다.
“물론 그냥 소문만 퍼트려서야 효과가 작지. 그래서 몇 가지 장치를 추가한다.”
먼저 흑옥으로 혼령주를 거하게 터트린다. 그리고 자신들은 지구로 며칠 숨고 영도는 성제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알음알음 전한다.
대성녀와 영도에서 시작된 소문은 발 빠르게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대성자 후보인 성제가 대현자와 만남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소문이 말이다.
며칠 뒤 ‘성제의 소식이 두절된 장소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라는 소문이 또 돌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문이 합쳐진 순간 메리아놀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될 거다. 메리아놀에서 차원 방랑자들을 강제로 소환해 처분하고 있다는 사실 여부가 모호한 소문 하나, 성제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한 소문 하나, 성제가 사라진 근방에서 정체 모를 폭발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성제도 차원 방랑자 출신이라는 소문 하나.”
=…….=
=…….=
=…….=
여자들은 오싹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상상력이 빈곤한 자신들로도 그 소문이 합쳐졌을 때 메리아놀이 겪을 혼란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 모든 소문은 하나로 합쳐져 메리아놀이 성제를 해쳤다는 식으로 와전되겠지.
메리아놀은 라드세아-히스론드-벨티칼-영도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비교적 선량한 종족이 다수인 메리아놀 시민들이 나서서 진위를 확인하려들 수도 있다.
푸른 나뭇잎의 탑, 그 속에 숨어있다는 암약 단체인 결명자決明子는 환장하겠지.
거짓이더라도 그 사실을 해명하는데 엄청난 곤욕을 치를 텐데 그건 전부 사실이잖아?
“지구에서 돌아오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반년이 흘러있겠지. 그때부터 나는 활동의 선택지가 넓어진다.”
=어, 어떻게 넓어지는데?=
“투르시온의 영지나 푸른 나뭇잎의 탑 소속 귀족들의 영지를 직접 공격한다는 선택지다.”
=엑?!=
=엥? 어떻게요? 여론 때문에 직접 타격은 오빠도 고민하고 있었잖아요.=
“반년간의 실종에 앞서 내가 독촉장과 공식 입장문을 발표한 것이 있다. 그게 내 타격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거다. 거기다 메리아놀의 악행을 증명할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환인이 서순으로 사건의 발생을 나열해준다.
1. 메리아놀의 엘위드리스 ‘예언자’ 가문이 성제를 마왕이라 단정, 암살하려 했다.
2. 사건 이후 메리아놀은 반년 동안 사건을 질질 끌며 확답을 내지 않았다.
3. 성제가 독촉장과 공식 입장문을 발표했다.
4. 이후 성제는 대현자와 만났고 실종되었다.
5. 성제의 실종 장소에 대규모 정체불명의 현상이 발견되었다.
6. 메리아놀이 차원 방랑자 소환 실험을 하고 있단 소문이 퍼진다.
7. 성제도 차원 방랑자 출신.
여기서 여자들은 헉, 하고 경악성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먹물을 먹은 사람이라면 메리아놀을 의심하지 않고 못 배긴다.
특히 투르시온이 엘위드리스 가문 내전의 생존자들을 품어버린 것이 의심에 부채질할 것이다. 더해 메리아놀의 현재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내부 상황.
또 하나 더 있다.
“8. 약 반년간의 실종 이후 등장한 성제가 분노해 푸른 나뭇잎의 탑 소속 귀족과 투르시온 가문을 공격한다.”
……반년간 각국 수뇌부는 온갖 상상을 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종 되었다는 성제가 나타나 갑자기 메리아놀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에 온갖 상상이 사실로 다가오는 걸 느끼겠지.
거기에 결정적인 증거, 차원 유인용 종족연합 주화를 증거로 제출하면?
=만에 하나를 떠올리며 신중론을 펼치던 자들도 ‘메리아놀은 악의 축이다’는 소문에 진실이란 쐐기를 박아버리겠네.=
“예. 제가 거칠게 날뛸수록 메리아놀은 궁지에 몰리고 다른 국가들은 메리아놀을 물어뜯을 좋은 핑계를 얻을 겁니다.”
=……으음.=
=어음….=
그러니까, 20분 동안 그가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한 전쟁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있었다는 거지?
여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갈렸다.
대체로 귀족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르파, 백려강과 안느의 ‘도령, 무서운 남자!’ 쪽.
다른 쪽은 나름대로 사회 경험은 많지만 귀족의 생리에 무지한 이실리테, 차기 어금니로 수행 중이었지만 아직 어려 고관대작의 습성을 다 이해 못 한 아영의 ‘아무리 그래도 소문만으로 그렇게나 될까?’ 쪽.
“중간중간 예기치 못한 문제가 더 튀어나올 수 있고 메리아놀을 제외한 삼국이 이쪽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삼국이 메리아놀을 적극적으로 압박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삼국의 지도층 머리에 의심암귀만 박아넣어도 성공인 계획이니까.”
메리아놀의 왕가 하나와 메리아놀 무력 삼대 산맥 중 하나로 꼽히는 푸른 나뭇잎의 탑을 박살 내는 일이다. 메리아놀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겠다고 결정을 내렸으니 메리아놀의 반응 따윈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남은 삼국의 반응. 라드세아와 히스론드, 벨티칼이 나서지 않고 적대하지만 않으면 된다.
자신의 추가 설명에 이실리테와 아영도 납득하는 걸 본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부탁했다.
“그럼 짐을 다시 정리하지. 유르파는 쿠에들과 마차에 걸 축소화 비술을 준비를 해주십시오.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은 짐을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이고 아영은 하얀 늑대들에게 연락을 넣어 방금 내가 말했던 ‘소문’을 퍼트리라고 전해라.”
=응. 아가씨들, 먼저 마도구랑 마도기는 전부 이 주머니에 담아주렴.”
=응.=
=네.=
통신 수정구를 들고 조용한 곳으로 가려던 아영이 엥? 하고 유르파를 돌아본다.
=마도구는 왜 따로 담으시는 건데요?=
=아영이는 모르겠구나. 지구는 위상력이 무척 희박한 세계야. 이때문에 특수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금방 못쓰게 돼. 재료로 사용한 위상석을 순식간에 소모해버리는 거야.=
=아…….=
=그리고 지금 다들 입고 있는 옷은 벗고 이 옷으로 갈아입어~.=
=대현자님이 입고 있으시던 옷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응. 한국의 트랜드에 맞춘 옷이거든. 대현자님도 고향을 잊지 못해서 그런 옷을 입으신 게 아닐까?=
여자친구들이 짐을 줄이고 부피를 정리하는 사이 환인은 들개 전사단의 흑옥 여덟 개를 꺼내 살폈다.
밤하늘을 오려 만든 것처럼 온통 검은색에 무수히 작은 십자광十字光이 떠있는 구슬.
처음 들개 전사단을 흑옥으로 만들었을 때는 모든 빛을 흡수할 것처럼 무광의 오직 검은색뿐인 구슬이었다.
하지만 알소프의 사태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일을 겪고 환인의 영혼술도 성장해서일까. 제법 변했다.
환인의 이야기가 진행될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환연이 그의 어깨에 올라가며 묻는다.
「뭐야. 그거 흑옥이야?」
“그래.”
「꽤 변했네. 엄청 싫고 꺼림칙한 느낌도 많이 줄었고. 그 구슬 안에 십자광이 더욱 많아져 구슬이 백색으로 변하면 악령에서 정화되어 성불하게 되는 거 아냐?」
“…….”
그런 식이라면…… 상관없겠군. 그날이 오기 전에 니오네브레스를 떠날 테니까.
「그걸로 혼령주를 터트릴 거야?」
“회옥과 청옥으로는 써서 흔적을 남겼다. 여기서 쓰려면 흑옥뿐이겠지. 문제는 흑옥이 어떤 효과를 낼지 모른다는 건데.”
「각 구슬의 성질을 생각하면 흑옥은 부패 쪽이겠지.」
“그래. 위력이 심각하다면 지하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을텐데…… 으음.”
「하지만 알아볼 시간은 없잖아. 뭐 지하율도 능력이 있어 보였고 전지의 눈이란 거도 있으니까 적당히 해결하겠지.」
“안되면 돌아와서 사과하던가.”
지하율이라는 이름은 특징적이기도 하고 16년도에 실종된 고등학생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그녀의 가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녀의 가족을 찾아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해두고 가족사진을 구해놓는 것도 좋겠군.’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흑옥을 구경하는 환연에게 부탁했다.
“바람 정령과 땅 정령으로 탐색 가능한 영역을 샅샅이 살펴봐다오.”
「추적자 때문이야?」
“이쪽의 행적이 지금 드러나는 것은 곤란하니까.”
「응……. 없어. 특별히 위상력의 흔적까지 살펴봐도 바람 정령의 시야가 닿는 30km 내에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래.”
그렇다면 남은 건 흑옥 혼령주를 펼치는 것뿐이다.
=자기~ 잠깐 여기 좀 봐줘~.=
유르파의 호출에 그쪽으로 가자 잔뜩 쌓인 짐가방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건 지구로 가지고 못가겠는데, 어떻게 할까?=
“식재료를 따로 모아둔 가방과 주머니입니까.”
=응. 거기 넘어가면 아공간 확장 주머니랑 가방도 거의 못 쓰게 될 거잖니? 자칫 길 한복판에서 터져 내용물이 쏟아질 수도 있어.=
살펴보니 쿠에들의 식량과 이실리테가 열심히 손질해서 보관해둔 식재료가 대부분이다.
“음……. 환연, 추적이나 탐색에 걸리지 않을 만큼 땅속 깊이 파묻을 수 있겠나.”
「가능해.」
=어머? 그런 거면 잠깐만! 아가씨들, 짐 다시 풀자!=
환연의 대답에 여자들은 즉시 소지품을 다시 재분류했다.
지구로 가져가는 것은 갈아입을 두어 벌의 옷과 속옷, 그리고 무구武具와 약간의 소지품.
다들 작은 가방 하나 정도 되는 양만 챙긴다.
나머지 소지품과 식량 및 식재료, 야영에 필요한 기타 용품 일체를 전부 아공간 보존 주머니와 확장 주머니에 담자 환연은 상급 땅의 정령을 불러내 지각 깊숙이 묻어버렸다.
「과학까지 고려해 심혈을 기울였으니까 최상급 땅의 정령이 와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거야. 초월급은 와야 눈치챌 거라고 릴라이스가 확답해줬어.」
=소재도 소재니까 15년까진 땅에 파묻혀있어도 문제 없을 걸? 안심해도 돼.=
그외 귀중품과 내려놓을 수 없는 마차는 아스펜드에 수납하니 모두의 차림이 극히 간단해졌다.
도심지로 나가면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차림의 여자친구들.
각자 고양이 정도 크기로 줄어든 쿠에들을 안고 있고 유르파는 장난감처럼 변한 마차를 조심스럽게 들고 있다.
축소화 비술을 건 마차를 아스펜드에 집어넣었더니 공간을 차지하는 비중이 원래 크기와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
그녀들의 차림을 확인한 환인은 마지막으로 백려강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아드네빌라. 관음 신술이 차원까지 넘을 거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돌아온 뒤 당신이 하루 안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제가 당신을 찾아 알소프로 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주십시오.”
여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환인은 미리 꺼내두었던 흑옥 여덟 개를 한데 중첩하고 20%의 심핵력과 80%의 위상력을 밀어 넣었다.
으르르르릉—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진동이 일어나며 중첩 흑옥이 원자핵처럼 울룩불룩해진다.
=히에엑. 저, 저거 또…….=
=으읏…….=
=꿈에서 볼까 무섭게 생겼어…!=
“…….”
대체 어떻게 보이길래 지하굴 미궁에서부터 영혼 구슬을 다룰 때마다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여자친구들과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환인은 개량형 방벽 마도기로 패널을 소환, 밟고 뛰어올라 숲 위로 나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환인은 적당한 지점을 확인, 심핵력을 위상류로 흘려보내 강화한 뒤 짐승처럼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는 흑옥 혼령주를 던졌다.
쉬익—
약 20여 km를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간 혼령주는 잠시 후, 두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아닌 팽창 현상을 일으켰다.
「으엑…. 뭐야 저게.」
마치 수천, 수만 개의 검은색 세포를 한데 뭉친 뒤 지름 백수십 미터로 키운듯한 끔찍한 모양새.
그 순간 검은색 덩어리가 한차례 경련하더니 고슴도치처럼 무언가가 삐죽삐죽 솟기 시작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빛도 안에서 새어나온다.
「으악……. 난 더 못 보겠다.」
이어서 썩은 고름이 흘러내리듯 검은 것이 숲으로 줄줄 흘러내리니 환연이 신음을 흘리다 환인의 안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
폭발은 그 순간 벌어졌다.
————
소리도, 진동도 없는 조용한 폭발.
끈적한 질감의 표면은 폭발과 함께 퍽— 하는 느낌으로 퍼져 나와 지름 수백 미터 정도로 확장되더니 뭉클거리듯 하늘로 치솟는다.
지상의 숲에 허연 안개가 퍼지기 시작하더니 푸르던 하늘이 삽시간에 안개 끼듯 흐려져 검게 물들었고 검은색 안개…… 연기 기둥은 조금도 가라앉을 기색 없이 조용히 꿀렁거린다.
그리고 초록색 녹음이 우거진 숲이 연기 기둥을 중심으로 천천히 갈색으로 변해갔다.
보고 있던 환인도 섬뜩함을 느꼈을 만큼 조용히 숲에 죽음이 내려앉는 광경.
그러다 한순간 연기 속에서 보인 장면에 환인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연기 기둥 속에서 우주 일부를 본 것 같은데.
“…….”
잠시 기다렸지만 똑같은 것은 더 볼 수 없었다.
신경 쓰였지만 알 방도가 없는 현상에 골치를 싸매기보다는 일단 덮어둔다.
환인은 좀 더 기다리며 죽음을 뿌리는 허연 안개가 어디까지 퍼져나오는지 지켜보았다. 확장 범위가 넓다면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뒤로 더 멀리 피해야 하니까.
하지만 약 1km 반경 정도만 뒤덮은 안개는 더 확장할 낌새는 없다. 더더욱 짙어지며 여전히 뭉클거리는 검은색 연기 기둥을 점차 감춰갈 뿐.
환인은 만족한 얼굴로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 지구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어, 도령. 안 쏘고 그냥 내려온 거야?=
“아니, 쐈다. 흑옥 혼령주는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느낌이더군.”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안느는 잠깐 살펴봐도 돼? 하고 허락을 받고는 가까운 나무를 타고 뛰어 올라갔고, 그 뒤를 따라 다른 여자들도 제각기 능력으로 숲 위로 올라간다.
잠시 후 내려온 여자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자기…… 저게 혼령주야…?=
“예. 악령을 영혼 구슬로 만들어 펼친 모습답지 않습니까.”
=으응……. 적흑 혼령주가 어떻게 엘위드리스 시를 모래더미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어. 악령 구슬로도 저 정돈데 혼재를 구슬로 만들어서 거기다 섞으면…….=
상상이라도 했는지 말하다 말고 우욱, 헛구역질하는 유르파.
쉬이익—
환인은 들개 전사단의 영혼 구슬이 돌아와 왼팔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할 테니 다들 붙어라.”
말이 끝나자마자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는 재빨리 그의 좌우와 뒤에 붙고 노른은 실루를 안은 채 환인의 앞에서 찰싹 달라붙는다.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어물거리는 백려강과 아영을 부른 안느가 그의 손과 팔을 잡게 했을 때, 환인은 조용히 심호흡했다.
정말 될까. 여자친구들과 함께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지구, 한국, 거기서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몸 안의 훈기와 한기를 가슴의 문양으로 흘려보내자 문양이 새겨진 가슴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환인. 가슴에서 빛이 나.」
=앗, 왼팔도 빛나기 시작했어요……!=
천릉의 조끼와 코트를 뚫고 새어 나오던 백색광이 점차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가슴의 열기는 이제 통증이라 해도 될 정도로 변했다.
그와 함께 심장이 살짝 조이는 느낌.
그 통증에 환인은 직감했다.
이런 임시 지구행은 여러 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가능하다고 해봤자 앞으로 두 번, 적으면 한 번이 한계일까.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으앗?!=
=꺅…!=
눈을 멀게 할듯한 섬광이 환인과 여자들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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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네빌라: ^#($%@!!
(대충 유일한 스트리머가 몇 달 휴방 때린다는 공지를 본 시청자의 반응)
[작품 설정]
흑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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