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 데바스톤 산맥
대현자의 집을 나와 귀환길에 오른 뒤 여자들은 심각한 분위기의 환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가장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안느였다.
아니, 여자들은 환인의 분위기와 지하율 사이에서 오간 심각한 대화에 그저 눈치만 살피는 중이라면 안느는 김장하며 먹은 김치말이 국수와 상추김치쌈이 명치에 꽉 틀어막혀 체한 기분.
=안느, 괜찮아?=
얼굴이 밀랍처럼 변한 그 모습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이실리테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어…… 괜찮아…….=
그도 그럴 것이 최소 두 곳이 신의 뜻에 위배되는 범죄를 최소 200년 전, 최대 수천 년 전부터 저질러오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투르시온 왕가, 푸른 나뭇잎의 탑은 가담이 확정이고 협의회도 얼마나 투르시온 왕가에 회유됐는지 모른다.
‘그래서 투르시온 왕가가 협의체하고 두루 친했나.’
그렇다면 미리아스툼 왕가를 제외한 다른 다섯 왕가는 어떻지? 아니, 미리아스툼 왕가도 투르시온과 밀약이 오갔을 가능성은?
아빠는 도령한테 질러버리라고 했는데 설마 이걸 전부 알고서 그랬나? 엄마랑 패시지를 나와 소리소문없이 시녀 몇 명만 데리고 유랑을 떠난 이유도 곧 큰일이 벌어질 걸 예측해서?
역시 안 되겠다. 정황이 밝혀질수록 문제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어. 말대로라면 주도의 최고위 인사 절반 이상이 가담하게 된 일이란 건데 이걸 온건하게 해결하려면…….
퍽!
=아윽!? 어… 도, 도령?=
등에 가해진 충격에 허리가 꺾이는 줄 알았던 안느는 환인이 노른의 등에서 쿠핀의 고삐를 잡은 채 자신을 살짝 화난 얼굴로 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 거지.”
=응? …앗!=
바로 앞에 뿌옇게 낀 짙은 회색의 안개. 그제야 친구와 언니 동생들이 뒤에 있고 자신은 쿠핀과 함께 독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 미안! 쿠핀 미안해!=
쿠에~.
“…….”
환인은 그런 안느의 안색을 보곤 퍽퍽, 퍽, 세 번 더 후려쳤고 그때마다 악악 비명을 지른 안느가 울상으로 잘못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한눈팔지 않을 테니까 용서해…….=
“이제 체한 게 내려갔나 보군.”
=아, 정말이에요. 혈색이 돌아오고 있네요.=
=……응?=
환인과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자기 뺨을 만져보던 안느는 유르파와 아영이 드러내는 걱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안느 아가씨. 조금 전까지 진짜 시체처럼 얼굴이 하얬어.=
=양초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도 아까 안느 언니님보단 훨씬 생기가 있었을걸요.=
그러고 보니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던 가슴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다. 그럼 도령이 내 등을 때린 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체한 게 내려가라고 두드려 준거구나.
어느새 환인의 어깨 위에 안정적으로 앉아있던 환연이 흥, 하고 신랄한 말을 쏟아낸다.
「쟤 성격에 정신이 말짱할 리 있겠어? 환인을 이 세상에 끄집어당기고 지구인을 온갖 수단으로 끌어오면서 죽든 말든 상관 하지 않은 데다 끌고 온 애도 수틀리면 죽여버려 왔던 곳이 메리아놀이란 게 다 들통났잖아. 거기에 투르시온 왕가도 가담해있다는 게 밝혀졌고 메리아놀이 개판 날 거 같으니 슈아나데하고 그라파든도 줄행랑쳤고.」
=…….=
=…….=
「모국이 차원 방랑자를 모아 안전하게 지키고 세상에 독이 풀리지 않게끔 보조하고 관리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러운 곳이었네? 쟤가 정신 놓을 만도 하지.」
=으으.=
울상을 짓는 안느에게 환연이 이때까지 보여준 적 없을 만큼 냉랭하고 차가운 얼굴로 안느를 비롯해 다른 여자들에게 말했다.
「마침 이야기가 나왔고 환인이 너희한테 험한 소리 안 하는 걸 아니까 내가 대신 말하는 건데, 너희들 일이 생겨도 막 혼자 해결하겠다느니 환인하고 일행에게 폐 안 끼치게 파티를 나가겠다느니, 이딴 생각하지 마라?」
움찔.
「특히 안느 너. 방금 움찔했지? 보나 마나 혼자 메리아놀로 가서 왕가랑 협의회를 설득하겠다느니 너희 가문 힘을 빌려서 여휘를 만나 모든걸 알려야겠다느니 이딴 생각을 한 거겠지. 죽는다 진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환연의 말은 하나하나가 안느의 속내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어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환연의 속사포가 유탄 되어 다른 여자들에게도 쏟아진다.
「안느뿐만이 아니야. 아영 너도 하얀 늑대 쪽에 문제가 생기면 돌발 행동을 저지를 게 뻔한 요주의 대상이고 이실리테 너도 환인한테 문제가 생기면 미친년처럼 사건을 일으킬 확률이 100%야. 아닐 거 같지?」
=…….=
=…….=
=…….=
「너희들이 생각하는 수준이래봤자 거기서 거기니까, 일이 생겼을 때 혼자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환인하고 다른 애들한테 의지하란 말이야. 지금 환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는 건 어림도 없을 수준이니까.」
지하율처럼 환인도 인정할법한 힘을 가진 인간도 문제를 해결 못 해서 저런 산속에 칩거하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사태 정도면 인맥으로 군대급 병력이나 국가 지도부의 발언력을 동원할 정도는 되어야 해결의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생긴다.
「너희가 강한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직업자라는 범주 안의 이야기야. 이번 일을 개인이 어거지로 편법까지 사용해 사태를 해결하려 하면 환인 정도는 되던가 초월급 정령 정도는 부릴 수 있어야 해. 내 말뜻 알겠어?」
=응…….=
=아, 알았어.=
환연의 팩트 폭행에 시무룩해진 세 명이 고개를 숙인다.
그런 여자친구들을 환인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환연의 말이 적나라하긴 하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이 움직여 국가에게 자신의 주장을 들이밀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테러리스트, 테러범들이 인질극을 벌이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아무리 좋게좋게 떠들어봤자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니 폭력을 들이밀며 이쪽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다.
목소리를 내더라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만 될 뿐. 이쪽의 목소리에 주목하게 하려면 상대가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아영, 독안개 정화를 부탁한다. 건너간 뒤 안전한 곳에서 야영하도록 하지.”
=옙.=
아영이 성술을 펼치자 대지를 뜻하는 황갈색의 빛과 성술을 의미하는 순백의 광채가 드넓게 퍼져나가며 짙은 회색의 안개를 지워나간다.
환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피해 확산을 신경 쓰지 않을 경우, 전 공격 무효화 역장은 주도에만 펼쳐져 있으니 주변을 싹 쓸어버리고 피 말리기 작전으로 간다는 방법을 쓸 수 있다.
메리아놀의 왕가가 주도에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본거지는 다른 지역에 존재하니 왕가를 따르는 신하의 도시를 치고 내부 분열을 유도한다는 막장 테크도 있다.
‘이 방법은 최후에 써야겠지…….’
현재 지하율의 말을 100% 믿진 않는다. 거짓말하고 위증을 펼칠만한 성품은 아니라는 걸 확인했지만, 사람이 원한에 휩싸이면 사고가 단락적이고 편향적이 되기 마련.
그녀가 한 말의 진위를 먼저 파악한 뒤에 그게 사실이라면 죄를 부풀려 덧씌워야지.
흐라스린드의 차원 방랑자 및 플뢰족 인신매매 사건은 영도의 중재 끝에 라드세아 측이 한발 물러서서 메리아놀에 일부 배상을 하는 것으로 얼마 전 완결지어졌다고 들었다.
그랬는데 메리아놀의 최상위 술법사 집단인 푸른 나뭇잎의 탑이 이계에서 다른 종족을 소환해대고 있단 사실이 알려지면?
라드세아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 오히려 강하게 메리아놀을 압박하고 히스론드와 벨티칼을 설득해 한편으로 끌어들여 비난할 것이다.
차원 방랑자의 보호 역할을 각국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말도 덧붙여서.
“이런 계획을 진행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물이 있으니까.”
독안개를 지우고 조금 더 나아가다 적당한 자리에 야영지를 꾸린 환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여자친구들에게 증거물을 보여주었다.
대현자인 지하율마저도 보자마자 알아차린, 유인誘引의 특이술식이 새겨진 종족연합 주화.
모닥불 빛에 불그스름한 색으로 물든 유르파가 새하얀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쓸어넘기며 말한다.
=확실히 그것만 증거로 제출해도 메리아놀은 국격에 크나큰 타격을 입을 거야. 안느 아가씨랑 아영이 각국 지도자들 앞에서 대현자님에게 들은 걸 진술하면 파괴력은 더 높아질 거고.=
=지금까지 우연히 들러 들어오는 차원 방랑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게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니까요……. 거기다 수많은 사람이 차원의 회랑에 갇혀 죽었다니…….=
충격이 큰 얼굴로 중얼거리는 백려강의 이야기에 안느는 여느 때보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투르시온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쪽을 생각했는데 이쪽은 잠정 보류한다. 주도에 그만한 무효화 역장이 펼쳐져 있는 이상 직접 타격은 불가능하니까.”
=저기, 오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영이 손을 들어 질문의 허락을 구했다.
“왜 그러지.”
=으음, 이건 너무 억측인가……? 대현자님이 말했잖아요. 여휘가 침묵에 들어간 건 30년 전 일이라고요. 젬카인드 능력 중에 예지 능력도 있고 혹시 침묵하면서 어마어마한 방벽을 세운 게 오빠를 경계해서인 게 아닐까 하는데요.=
환인도 그걸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지만, 3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애매하다.
차라리 4~5년 전이라고 했다면 전견시로 이엘카타가 본 미래를 그녀도 예지했다고 보겠지만…….
“26년이라는 시간이 무척 애매하지 않나.”
=오빠가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오기 전에 26살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26년이 아닐까요?”
그 의견의 오류를 유르파가 지적한다.
=여기의 한 달이 지구에서의 하루야. 그 말대로라면 여휘님은 794년 전에 침묵했어야지.=
=……앗! 으, 취소할게요!=
단순한 계산 실수에 아영이 민망한 듯 보라색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춘다. 하지만 백려강은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다.
=만약 30년 전에 표식 소환 방식을 만들어냈다면요? 그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여휘님의 예지 능력이 발휘되어서 오라버니가…….=
“내가 메리아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예지를 보고 방벽을 세웠다는 건가.”
=…헤읏.=
말하고 난 백려강은 그를 마왕 취급했단 사실을 깨닫고 허둥거리다 혀를 깨문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은 환인은 모닥불에 장작을 넣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틈이 많은 가설이군. 지금이라면 내 미래를 예지하지 못하니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갈 법하지만, 당시의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여휘님이 무슨 이유로 침묵에 들어가신 건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겠네…….=
몇 차례 등을 두드려져 정신을 차린 안느가 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환연의 말대로 자신이 메리아놀로 돌아가봤자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다.
집을 나온 지도 수십 년, 가문에 가뜩이나 미약하던 자신의 발언력은 소멸했을 것이다. 우르거 같던 자신도 귀여워해 준 오빠라면 부탁과 애원을 병행할 경우 들어주려 하겠지만, 그 길은 미리아스툼도 전란에 휩싸이게 만드는 일이다.
오히려 자신이 혼자 주도에 들어가봤자 문제만 더 키울 게 뻔하다.
톨마이어 그 자식의 편력과 성격이면 자신에게 들러붙는 건 확정일 테니까.
도령은 매우 너그럽다.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었다지만 리민과 목욕하는 것까지 허용할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너그럽지만은 않다. 여자가 된 리민과 혼욕을 허락한 것도 리민의 상황과 반응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였겠지.
톨마이어 그 자식처럼 대놓고 껄떡거리다간 도령의 분노가 터져 나올 게 틀림없다.
‘일이 그렇게 되면 진짜 엉망진창이 될 거야.’
현재 자신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도령이 무방비해졌을 때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
=자기, 그럼 이후 계획은 어떻게 할 거야?=
연락이 없는 통신 수정구를 매만지던 환인은 아스펜드에 수정구를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스프라울드로 가서 파편인을 전부 녹일 때까지 체류합니다. 그 후 몸 상태의 변화를 점검하고…… 제 기준 미만이라면 미궁을 돌며 심핵력을 좀 더 수집할 예정입니다.”
=메리아놀에 가는 건 미룬다는 거구나.=
“예.”
이쪽 공식 입장문 발표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지하율의 의견에 사고가 좌우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생각이 재개편되는 것은 정보의 경중이 워낙 무겁기 때문이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눈비탈을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한 가지 생각이 덩치를 급격히 불리며 환인의 머릿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역시 이 세상에서는 힘의 논리가 정점인가.’
지혜를 짜내어 구축한 복잡한 계획도, 은밀하고 음습한 음모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한낱 잡기술로 전락한다.
그 증거가 구주의 독니, 나사라트의 암살단, 카락스의 암살자 사건들.
자신의 힘이 워낙 강대하니 카락스의 암살자는 그 힘에 굴복해 밑으로 들어왔고 구주의 독니는 제풀에 항복해왔다.
나사라트는 하얀 늑대들과 구주의 독니 양측 맹공에 절찬 절멸로 질주하는 중.
힘은 빛을 만든다. 큰 힘은 더욱 큰 빛을 만들겠지.
그리고 그 빛은 자신과 여자친구들을 평화로 이끌 것이다.
=주인님, 식사하세요. 다들 밥 먹으러 와.=
조용히 생각을 이어가던 환인은 저녁을 완성한 이실리테의 부름에 생각을 끊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왔던 길을 거슬러 데바스톤 산맥의 초입에 도달한 순간 통신 수정구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신호에 환인의 눈썹이 작게 찌푸려졌다.
‘혹시…….’
[이제야 연결되었군! 성제, 어디에 있었기에 이때까지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오?]
수정구가 연결되자마자 대성녀의 안도가 가득한 얼굴이 나타나며 푸념을 흘린다.
“대현자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 근방에서는 통신 기능이 마비되나 보군요.”
[그러하였군. 나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오.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는지?]
“예. 덕분에 알아야 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 적이라는 표현에 대성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토록이나 강경한 표현을 쓰는 것은 독촉장과 공식 입장문 외에 처음이었던 것.
[으음…….]
=얘들아, 고삐 묶게 이리와.=
쿠우~ 쿠엑! 쿠쿳.
=이실리테 언니. 이건 이쪽으로 실을까요?=
=거기에 갓 담근 김치가 있으니까 마차 뒤쪽 수송함에 넣어두면 돼.=
=유리 언니, 이쪽은 마도기 발동 준비 끝났어요.=
=그럼 바로 켜주렴.=
대성녀가 생각에 잠겨 들었기에 여자들이 마차를 꺼내 설치하고 쿠에를 마차에 묶고 짐을 정리하는 것을 구경하던 환인은 대성녀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기에 수정구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연락이 되지 않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려주겠소. 먼저 성제의 공식 입장문에 찬동한 것은 히스론드 왕가뿐이오.]
라드세아는 성제의 뜻에 깊게 공감한다 연락을 보내왔지만, 대외적으로는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벨티칼 대부족장 모임은 흘러가는 상황을 관망할 생각인듯하였소.]
“메리아놀은 어떻습니까.”
[……대답이 좀 늦어졌기로서니 적대 행위를 행사하겠다는 것에 깊은 유감을 표시하였소. 유감‘만’ 표시하였다고 해도 되겠지.]
“이쪽이 뭘 하든 신경 안 쓴다는 뜻이군요. 그렇게 나올 거라 대충 짐작했습니다.”
[그런 결론을 내게 된 경위가 있는듯하오만? 소녀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소?]
“며칠 전 체블리프에서 미리아스툼 왕가의 가주 내외분과 만났었습니다.”
그라파든과 슈아나데하고 만난 이야기를 해주자 대성녀의 얼굴도 자못 진지해진다.
[메리아놀의 외교대응이 늦어지는데에 지휘 체계가 마비된 게 아닌가 했었지. 그 예상대로였군. 외유하는 국왕이라니.]
“아마도 투르시온이 모종의 영향력을 발휘해 미리아스툼 왕가를 왕위직에서 하야시키고 패시지를 장악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만…….”
[소녀가 하얀 늑대들과 동조하여 정보를 수집해 나온 결과도 비슷하오. 투르시온 왕가의 가주, 볼레보스가 왕좌에 오르려 한다는게 확실시 되고 있소. 또한 메리아놀이 반년 가까이 암살건에 대응이 없었던 것은 투르시온이 엘위드리스 가문의 실력자들을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하얀 늑대들의 조사 결과 거의 확정되었소.]
“…….”
고위직은 내전 도중 대부분 살해당했다고 전달받았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일부가 남아있단 뜻이고…….
환인의 표정이 굳는 것에 대성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말이 나올지 알아차린 얼굴이군. 그렇소, 은거 중이던 전대 엘위드리스의 최고 예언가가 일부 제자 및 가문 인원과 함께 투르시온에 투신하였다는 듯하오.]
“현 영주가 멀쩡한데도 그렇다는 것은, 영주에게 엘위드리스의 몰락 책임을 전부 뒤집어씌웠다는 뜻이군요. 덩달아 저에 대한 원한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맞소.]
“이엘카타를 보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군요.”
[성제…….]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됐군요.”
[……그 말뜻은?]
그의 표정이 스산해지며 살기 어린 미소가 떠오르는 것에 대성녀, 닌실=아나그는 등줄기를 타고 닭살이 솟는 것을 느꼈다.
환인은 빙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닌실, 부탁이 있습니다.”
[그, 그대가 그렇게 나오면 무섭소만…….]
“하하. 별거 아닙니다. 이엘카타가 예견하고 저들이 믿고 있는 미래를 이뤄주려는 것뿐이니까요.”
[그게 별것 아니란 말이오?!]
경악하는 대성녀에게 환인은 농담이라며 작게 웃어주고 다시 말했다.
“성제 일행이 대현자를 만나러 간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는 것만 슬쩍 흘려주십시오.”
대성녀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신수로 수천 년을 살아왔고 대성녀로도 수백 년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눈앞의 남자가 대체 뭘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제, 흉계가 가득한 얼굴이오!]
“저쪽이 저리 나온다는 것은 절 어떻게든 하겠다는 뜻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멀쩡히 활동한다면 더 큰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지요.”
[사건이라니…….]
“제가 죽으면 영식이 대륙급으로 광범위하게 퍼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걸 메리아놀 역시 알고 있을 겁니다. 니오네브레스의 고위층 치고 그 점을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 자가 없다면 거짓말일터.”
[……동조하는 자들을 모아 성제를 타차원으로 날려버리려 들거란 말이군. 영도는 절대 그러한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예.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하여야지요.”
울분과 당혹으로 버무려진 얼굴의 대성녀. 환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시 부탁한다.
“누구도 절 찾지 못할 만큼 꼭꼭 숨을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환인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좋아한다.
그랬기에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를 떠올릴 만큼 해맑았다. 닌실이 오들오들 떨면서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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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고 오들오들 떠는 신수 기린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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