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93화 (693/813)

693 대현자의 제자를 자칭하는 현자

떠나라는 말이 없었기도 했지만, 아직 이야기를 나눌 거리가 있어 보였기에 환인은 지하율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집 주변을 느긋하게 산책했다.

여자들은 제각기 흩어져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환연은 「얼마 안 남았어.」 진저리치면서 신체 단련. 유르파, 안느, 백려강, 아영은 지하율이 잊고 간 게 틀림없을 파-레 사의 신전기행 무삭제본에 붙었다.

솔직히 그녀들의 머릿속은 환인과 대현자 사이에서 오간 대화에 관한 질문거리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나중에 설명해줄 거야.’

그를 믿고 언제 책을 회수해갈지 모르는 신전기행을 읽는 걸 우선했다.

안느는 땅신 교단을 포함해 5대 교단을 싸잡아 모욕한 지하율이 조금 미웠다.

환인을 만나기 전의 그녀였다면 노기를 터트리며 교단을 모욕한 그녀를 향해 천벌의 망치를 꺼내 들었을 거다. 하지만 환인과 오래 하며 그녀도 생각이 깊어졌다.

‘혹시 대현자님도 도령처럼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가혹한 경험을 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고 지하율의 발언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세속에 물들거나 타락한 성직자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상처도 많아 보이고 척 봐도 메리아놀에 감정이 있어 보이는 그녀에게 따지면 환인이 곤란해할 것 같아 입을 다문 측면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그녀도 환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심경이 복잡한 지금 상태로는 그에게 투정만 부릴 것 같아 머릿속을 환기할 겸, 유르파와 함께 신전기행에 신경을 쏟았다.

아영과 백려강은 단지 무삭제판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폭발한 상태.

“…….”

여자친구들의 생각 면면이 보이는 모습을 환인은 한옥 앞 정원 속에서 잠시 구경하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색창연한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고 구수하면서도 매콤 쌉싸름한 냄새도 퍼져 나온다.

지하율이 일어나면 가르쳐줄 요리에 쓸 밑준비를 위해 주방에 틀어박힌 이실리테의 요리 솜씨가 발휘되고 있는 거겠지.

조금씩 사색하며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바람 속에서 벚꽃잎이 조금씩 흩날리는 집 주변을 걷던 환인의 눈에 노른이 쿠에들과 모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분홍색 벚꽃잎이 만개한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실루를 데리고 무언가 어지럽게 손짓하며 설명하는 노른.

「그러니까 파앗— 하고 힘을 쓰면 배에서 근질근질한 게 올라와. 그걸 쉬익~ 하면 핑— 하면서…….」

삐~? 삣—

쿠엑…?

의성어의 남발인데 실루도 그쪽 과인지 알아듣는 눈치로 자그마한 노을색 꽁지깃을 열심히 파닥거린다.

다만 회색 쿠에 젤프리는 노른이 하는 말을 열심히 주워듣고 있어도 20%를 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고, 밀짚색 쿠에들은 아예 노른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서로 등에 머릴 올리고 낮잠을 즐기는 중.

평화로운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환인은 가까운 벚나무 아래로 가서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회유하는 것은 어렵겠지.’

영혼의 눈으로 본 그녀의 위상력 총량은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술법의 위력은 얼음창 산탄의 경우 한 발 한 발이 철판을 가볍게 꿰뚫을 느낌이었고 벼락은 쇳덩이도 찢어발기지 않을까 싶은 위상력의 밀도.

그런 술법을 무영창으로 난사하는데 그게 술에 취해 반쯤 맛이 간 상태였으니 멀쩡한 상태라면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을까.

지하율이 손을 거든다면 계획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은데 메리아놀이 공격받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말은 그녀가 메리아놀을 공격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

적의는 있지만, 공격하지 않았다는 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무언가 계약의 굴레로 인해 메리아놀을 공격할 수 없는 경우, 능력의 부족으로 메리아놀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 정서적인 문제로 공격하지 못하는 경우.

만약 공격했는데 그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쪽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주도의 방위력이 대현자의 공격은 ‘그따위’로 해버릴 만큼 우수하다는 뜻이니까.

‘회유하려면 정보가 더 필요한데…….’

하얀 늑대들과 영도의 기관장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현자가 여자인 줄도 몰랐고 땅의 최상급 정령 아감간의 수색이 아니었다면 찾는 것도 매우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현자에 대한 정보를 더 수집한다는 건 불가능. 현재 주어진 정보로만 그녀를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벚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환인은 백려강이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떴다.

“신전기행은 안 읽는 건가.”

=언니들 읽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아영이 대신 보고 이야기해준다고 했어요.=

“그렇군.”

배시시 웃던 백려강은 다시 눈을 감는 환인을 보고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조심스레 앉으며 물었다.

=혹시 제가 오라버니의 사색을 방해한 건가요…?=

“아니. 대현자를 회유해서 영입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대답에 백려강은 어젯밤 대현자가 보여주었던 무위를 기억해냈다.

확실히 그땐 대단했었다. 언니들도 희귀 직업자가 아니라 유일 직업자가 아닐까 조심스레 점쳤을 정도로 공격의 밀도도, 전투의 예측도 훌륭했었지.

날개가 없고 따로 비행 마도구를 쓰는 것 같지 않음에도 자유로이 날던 모습 또한 무척 뛰어났다.

대현자님과 싸우려면 자신과 언니들, 아영까지 전부 힘을 합쳐야하지 않을까?

“관둬야겠군.”

=네?=

“대현자를 영입하는 건 역시 위험이 커 보인다. 메리아놀 주도의 방위와 전투력도 상향 조정해야 할 듯하니 그리되면 전술을 새로 수립해야겠지.”

하얀 연기를 길게 피워올리는 굴뚝을 바라보는 환인을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백려강.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죄송해요. 제가 이 몸의 힘을 전부 끌어내면 오라버니의 계획에 적게나마 도움이 될 텐데…….=

아드네빌라의 용인체 제약 사건 이후 백려강은 환인에게서 중력 조절 리스트밴드를 건네받아 가중 한계를 최대까지 늘려 신체를 단련 중이었다.

산소가 희박한 데다 중력까지 몇 배나 강하게 받으니 그녀가 바란 가혹한 신체 단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이전과 달리 힘과 신체 능력이 꾸준히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확 강해진단 체감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환인은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살짝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역할은 주도에 포격을 가한 뒤 돌아와 열을 식히느라 잠시 무방비해져 있을 때, 그 순간을 지켜줄 호위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잘하고 있다.”

지하굴 미궁이 몇 급인지는 이제 영영 알아낼 길이 없지만, 최소 5~6급으로 추정하고 있는 만큼 중핵을 자신의 도움 없이 그리 쉽게 해치운 것은 어지간한 대도시의 기사단을 뛰어넘는 실력이란 증거가 된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팔라툼의 미궁에서 주도 제2 천공기사단을 맨손이라 해도 때려눕힌 전적도 있으니까.

=그, 그런가요?=

“그리고 넌 주무기가 활이다. 활은 급진적인 실력 증가를 체감하기 어려운 무기지.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꾸준히 훈련하다 보면 어느 순간 훌쩍 강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네, 오라버니.=

자신의 격려를 솔직하게 받아들여 기운을 차리는 백려강의 모습에는 오만하고 콧대 높은 아드네빌라의 소녀 시절 육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순수한 귀여움이 있었다.

환인은 하얗고 보드라운 데다 쫀득쫀득한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활짝 열린 툇마루를 통해 2층에서 내려오는 지하율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1시간 정도 잠자고 내려온 지하율은 말짱해진 정신으로 이실리테가 옆에서 알려주는 대로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김장 속재료는 이실리테가 전부 준비한 상황.

이 기회에 대량의 김치를 만들어놓을 생각으로 재료를 준비한 이실리테는 다른 여자들까지 불러 대대적으로 배추를 치대기 시작했고 유르파와 지하율을 제외하곤 다들 힘이 세다 보니 200포기를 해치우는 데는 고작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들이 김장하는 사이 직접 수육을 삶은 환인은 쌈배추와 상추, 고추에 마늘과 쌈장까지 준비해 여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자기도 요리 할 수 있었어?!=

“간단한 요리라면 저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건 고기를 삶았을 뿐이니까요. 하율, 와서 드십시오.”

“…….”

파릇파릇한 상추, 녹색이 선명한 엄지 굵기의 고추와 코를 찌르는 생마늘에 달콤짭짤한 쌈장. 거기다 갓 만든 김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수육까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주룩 흘렸다가 황급히 소매로 닦은 지하율은 여자들 틈바구니에 섞여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보쌈을 해먹었다.

=대현자님 오늘은 안 우네.=

“어, 어제는 동요했을 뿐이거든!”

=응응. 나랑 아영이는 수육 못 먹으니까 대현자님이 우리 몫까지 먹어줘.”

=안느 언니님, 상추에 김치랑 고추하고 마늘 올려도 맛있는데요? 노란 쌈배추도 아삭아삭해서 맛있어요.=

=주인님도 드세요.=

“그래.”

이실리테가 싸주는 쌈을 먹으며 환인은 수육을 삶은 물로 국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수육을 만들 때부터 대파와 통마늘에 통후추, 양파에 간까지 해서 삶았기에 국물만 바로 쓰면 끝.

다진 마늘과 소금, 고춧가루와 간장, 술로 양념장을 만든 뒤 부추도 큼직하게 썰어 수육 국밥을 나누어준다.

=…….=

=…….=

도령의, 오빠의 첫 수제 요리…….

수육은 요리라는 느낌이 적어 괜찮았지만, 본격적인 요리인 국밥을 본 안느와 아영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이거 고기 들어간 거거든?=

=…….=

=…….=

경고해도 바뀌지 않는 눈빛에 이실리테는 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환인은 큭큭 웃기만 할 뿐이었다.

빼앗길세라 수육국밥과 수육 보쌈을 빠르게 해치워나가는 이실리테, 유르파, 백려강과 노른, 지하율.

그리고 그런 다섯을 나라 잃은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는 안느와 아영.

안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정말 행복한 얼굴로 수육 국밥을 세 그릇째 먹고 있는 지하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까.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주제라서 먼저 환인을 돌아보았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다.

=있잖아, 대현자님. 하나 물어봐도 돼? 조금 예민한 질문이 될 거 같은데 싫으면 거절해줘.=

“뭔데.”

=대현자님은 역시…… 메리아놀을 싫어하지?=

그녀의 질문에 지하율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가 1/3 정도 국물이 남은 그릇을 들고 훌훌 마신 뒤 입가심으로 보쌈을 싸먹으며 말했다.

“메리아놀 자체는 크게 감정 없어. 내가 싫어하는 건 협의회 새끼들, 그리고 그 협의회를 뒤에서 조종하는 투르시온 개새끼들이랑 푸른 나뭇잎의 탑 내에 있는 결명자 개잡년들이니까.”

욕지거리를 걸쭉하게 내뱉은 지하율은 탁,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 잘했다는 얼굴로 귀기가 피어나는 눈을 안느에게 향하며 물었다.

“너, 그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순수혈통 플뢰지? 어느 왕가 소속이야.”

“……난 미리아스툼 왕가 소속이었어.”

시무룩한 대답에 귀기를 피워올리던 지하율이 눈썹을 꿈틀하고는 귀기를 줄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라파든 아저씨 알아?”

=응. 내 아버진데…… 왜?=

“……됐어.”

귀기가 완전히 사라진 지하율은 다시 젓가락을 들고 보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두 눈만 환인에게로 향한다.

“아저씨. 메리아놀에 갈 생각이지?”

“예.”

“무슨 이유로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 거긴 생각 이상으로 좆같은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니까.”

“하율, 당신이 지구로 넘어가지 않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서너 다리 건너 연관이 있긴 하지. 그리고 난 않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어? 왜 못 가는데? 대현자님이잖아. 그 전지의 눈으로 방법을 못 찾은 거야?=

반사적으로 물은 안느는 인상을 팍 찌푸린 지하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에이씨. 맛있는 밥 앞에 두고 입맛 떨어지게.”

안느의 질문에 지하율은 기분 잡친다는 듯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도 보쌈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난 집으로 가는 거보다 복수를 선택해버렸어. 그런데 일이 참 좆같이 꼬여서 복수도 못 하고 집에도 못 돌아간 채 200년 넘게 이 모양 이 꼬라지로 이딴 곳에 처박혀 사는 거야. 이유를 들어서 속 시원해?”

“미안…….”

“아저씨. 저 여자가 투르시온 쪽 인간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게 투르시온 여자였으면 아저씨들하고 싸워서라도 저 여잘 가만두지 않았을 거니까.”

“반은 투르시온의 사람이긴 합니다. 그녀의 모친이 슈아나데, 투르시온 가문 출신이시니까요.”

우뚝.

움직임을 딱하고 멈춘 지하율은 5초 뒤 다시 수육을 쌈배추에 올리고 통마늘 3개와 김치를 잔뜩 올린 뒤 입에 처넣고 우걱우걱 씹는다.

중간중간 고추를 하나 통째로 베어 물기까지 한다.

청양고추만큼은 아니지만 꽤 매운 품종인데 매움으로 스트레스를 다스리려는 듯한 모습.

환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지만, 지하율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건 상관없어. 플뢰 여자는 출가하면 그쪽 가문 인간이 되니까. 그런데 잘도 투르시온 여자가 미리아스툼 남자랑 결혼했네.”

=어……. 엄마가 가문의 권리와 재산을 전부 포기하고 몸만 넘어와서 아ㅃ… 아버지랑 결혼한 거로 알아.=

“그렇겠지. 안 그랬으면 슈아나데 그 여자가 투르시온의 가주가 됐을 테니까. 어쩐지 그 개새끼가 가주가 됐더라니…….”

무의식중에 일렁이는 살기를 드러내고 있을 만큼 이만저만한 분노가 아니다.

저 정도면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슈아나데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지하율이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가.’

이실리테가 가져다주는 수육 국밥을 받아들고 콧김을 푹푹 내뿜으며 와구와구 퍼먹는 지하율의 모습은 스트레스성 폭식 그 자체였다.

정신도, 심기도 흐트러진 모양새.

환인의 눈빛이 조용히 빛을 발하더니 그녀의 앞자리로 자릴 옮긴다. 이어 품 안에서 종족 연합 주화를 꺼낸 환인은 달칵, 탁자에 내려놓았다.

매운 고추를 한입에 하나씩 먹어치우던 지하율은 그게 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추를 입에 문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주화를 노려본다.

“……이 개새끼들. 여휘가 침묵 중이라고 미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네. 아저씨 거야?”

“예.”

“어디로 트립 됐는데?”

“알류겔 대호수에서 서북쪽으로 대강 20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호수 근방, 6급 미궁 안이었습니다.”

“헐. 용케 안 죽었네. 아니 안 죽을 정도라서 그 정도로 힘을 쌓은 건가. 메리아놀로 가는 이유도 아저씰 소환한 놈들 족치기 위해서였구만.”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건너편 산자락으로 얼굴을 돌린 지하율은 주름이 강하게 질 정도로 인상을 쓴 채 후으으으으으,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미리아스툼 가문의 사냥터에 소환됐어. 학원 마치고 집에 가는 중이었는데 눈앞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싶더니 정신 차리고 보니까 엄청 아름다운 숲 한복판에 있더라고. 재수 없게 전이 현상에 휘말렸다는 게 패시지의 플레인스워커 컴패니언에 들어가서 들은 이야기야. 참고로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그라파든 아저씨였어.”

“실상은 재수 없이 전이 현상에 휘말린 게 아니라 푸른 나뭇잎의 탑에서 진행한 실험 때문이었겠군요.”

“눈치 대박이네……. 맞아. 그때 난 말 그대로 잼순이여서 음모론에 심취한 여고생이었거든. 어쩌다 보니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때 난 멍청한 짓을 저질렀지. 뭘 거 같아?”

“가서 따졌습니까.”

환인의 담담한 대꾸에 지하율은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킥킥, 사납게 웃었다.

“맞아. 멍청하기 짝이 없게 그랬지. 그랬더니 당시 책임자였던 투르시온의 개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죽지 않고 살아서 넘어온 걸 다행으로 알라는 말이었어. 나중에 알아봤더니 족히 수백 명은 죽인 거 같더라.”

“…….”

“그 말을 해준 이유는 어차피 죽을 거, 궁금증이나 해소하고 죽으라는 의도였더라. 마법에 꽁꽁 묶인 난 개새끼의 부하한테 짐짝처럼 들려서 도시 밖으로 끌려나갔는데……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거지.”

환인은 눈을 감고 그의 여자들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날 소환한 방식은 그냥 파장이 일부라도 우연히 맞아떨어지면 끌어당기는 식이었어. 그랬는데 이제는 특별하게 마킹한 주화를 지구로 날린 뒤에 그걸 집으면 소환되게 바꿨단 말이지……. 그사이에 얼마나 더 죽였고 얼마나 더 소환했을까…….”

“들어오면서 거대한 골렘의 흉상을 봤습니다. 그것도 당신이 만든 겁니까.”

“응.”

“역시 그걸 무기로 사용하려 했던거군요.”

“그땐 사부도 죽고 진짜 미쳐있어서 거대 골렘을 만들어서 레이드의 주축으로 삼아보려 했던 거야. 진정하고 봤더니 현실성이 너무 없어서 폐기했고 지금은 감시 카메라로 쓰고 있어. 독안개도, 환상진도, 귀신과 정령 지역도 메리아놀을 멸망시키려고 연구하던 중에 나온 결과물들이야.”

“…주도 패시지의 방위 전력이 상상 이상인가 보군요.”

탁자에 팔꿈치를 올린 환인은 주먹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가끔 나오는 그의 습관이다.

지하율은 아직 많이 남은 수육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여휘 때문이야. 다른 주도의 사도들과 달리 방어와 예지에 능력이 치우쳐져 있는데 여휘의 종족이 그런 능력과 상성이 너무 좋아서 말 그대로 사기거든.”

그의 시선이 안느에게 향하자 안느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도 여휘 님을 직접 뵌 적은 없어. 왕궁심처의 탑 꼭대기에 계시는데 왕가의 아이 중 정식 후계자로 책정된 아이만 알현할 수 있거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어. 성별도, 종족도, 외모도 말이야.=

“여휘는 여자야. 니오네브레스 전체를 통틀어봐도 다섯이 될까 말까 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희소한 종족인데 난 젬카인드라고 불러.”

보석인간, 젬스톤과 맨카인드의 합성어군.

“그 여자는 30년 전에 침묵의 시간에 들어가면서 방어 능력을 극대화했는데 그게 전 공격 무효화야. 그 말도 안되는 능력이 주도 패시지 전체를 뒤덮고 있어.”

=그, 그런 게 가능한가요……?=

백려강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지하율은 후루룩, 수육 국밥의 국물을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모든 활동이 강제로 중단돼. 움직이지 못하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지.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서 아무것도 안 먹어도 주변의 위상력을 흡수해 신체를 유지할 수 있어서 가능한 미친 짓이야. 그 전 공격 무효화가 왕궁 내벽, 주도 패시지 중앙벽, 외벽, 셋으로 나뉘어 보호해.”

“…….”

“최악인 건 그 침묵 중인 여휘도 어쩌지 못한단 거야. 독이나 저주, 질병에는 면역에 가까운 젬카인드고 여휘가 누워있는 침대는 주도 패시지 전체의 위상력 파이프하고 연결되어서 물리, 마법 공격을 대부분 감소시키거든. 여기에 젬카인드의 선천 능력도 물리 피해 격감을 패시브로 발동하는 식이야. 그리고 그만한 대마법을 펼치면 시전자 보호 시스템이 발동해. 아저씨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투르시온을 치려면 전 공격 무효 방벽을 셋 뚫고 주도를 지키려는 패시지의 병력도 뚫어야 하고 여휘도 해치워야 하는데, 여휘의 방어 능력은 초월자 수준이라는 겁니까. 하지만 그런 것도 사소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군요.”

“여휘를 해치우면 땅신을 공격하는 셈이 되니까. 메리아놀을 넘어 4개 국가가 전부 적으로 돌아서게 돼. 그다음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아저씨 말대로 여휘의 방어 능력이나 니오네브레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건 사소한 일이 돼.”

“신벌. 땅의 신이 내릴 벌.”

“응.”

여자들은 두 차원 방랑자가 나누는 이야기에 끼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사도를, 국가의 주도를 지키는 사도의 살해 계획이라니, 신벌이라니……!

특히 안느는 얼굴은 물론이고 입술마저 핏기가 사라져 밀랍 인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하율. 당신은 어떤 이유로 투르시온에 그만한 분노를 불태우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그렇게 정의롭게는 안보이지? 살해당할 뻔한 것도 뭐 반쯤은 내 잘못이고.”

수육을 세 점, 네 점씩 입에 집어넣어 씹으며 지하율은 흐, 하고 웃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야기야. 위기에 빠진 얼빠진련을 목숨 바쳐 도와주는 백마 탄 기사님. 그런 기사님에게 서서히 반하는 정신나간련. 좋아하는 사람이 살해당하고 동료였던 사람들이 하나둘 죽고. 그 원인에 투르시온하고 결사 같은 결명자 놈들이 있다는 거지.”

“중요한 일에 드물고 흔하다는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유일한 일이니까요.”

“…….”

어느새 텅 빈 수육 접시를 말없이 바라보던 지하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한테 협조를 구할 생각이라면 관둬. 아저씨를 도와줄 생각도 없고, 내 복수는 내가 할 생각이니까.”

그리고 잘 포장한 김치 200포기 중 일부를 챙겨 아공간에 집어넣은 지하율은 환인을 돌아보며 선심 쓰듯 말을 던졌다.

“맛있는 보쌈이랑 국밥 해줘서 말해주는 거야. 아저씨도 심핵력의 비밀을 접했나 본데 심핵력의 소원은 일생에 한 번만 가질 수 있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까지 전부 포함해서.”

“…….”

“이 정도면 밥값은 충분하지? 배웅은 안 할게.”

10대 소녀의 얼굴로 썩어빠진 50대 중년의 웃음을 지은 지하율은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찰랑이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타다다다닥-

환인 일행의 짐이 둥실 떠서 마당의 잔디밭에 착지하더니 이윽고 집의 문이 전부 닫히고 툇마루까지 벽이 세워져 집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전부 봉쇄되었다.

그 명백한 뜻에 환인은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김장과 수육 파티를 하느라 어지럽혀진 장소를 돌아보며 여자들에게 말했다.

“정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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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넵. 이제 짜둔 플롯의 2/3 지점에 도달했읍니당

딱 700편... 그럼 앞으로 1050편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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