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92화 (692/813)

692 대현자의 제자를 자칭하는 현자

다음 날 아침, 환인의 여자들이 아침 일찍 침구를 정리하고 있을 때 2층에서 검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무지 스커트를 입은 대현자가 조금 뻘쭘하고 무안한 얼굴로 내려왔다.

대현자는 여자들만 움직이며 침구를 정리하고 환인은 의자에 앉아 실루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내 이름은 지하율이야. 어제 공격한 것에 관해서 사과할게.”

이제 와서 왁왁거리며 자신의 줏대를 상대에게 들이밀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도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술도 깬 마당에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사과에 환인도 자신의 실수를 겸허하게 인정했다.

“저도 아무리 영혼이라지만 멋대로 보내 당황케 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지하율은 점점 자리가 껄끄러워졌다. 어제 일을 생각할수록 수치심에 귀가 뜨뜻해질 지경이라고 할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들 앞에서 질질 짜면서 돼지처럼 꾸역꾸역 먹다니.

환인은 1인용 소파에 앉아 조금 찡그린 얼굴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지하율을 응시했다.

어제 입은 옷은 여러모로 이세계스러운 옷이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평범하고 단정한 옷차림. 저렇게 보니 진짜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보인다.

대화가 없어 어색함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도 우리가 준비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응. 수납함에 이런저런 과일하고 재료가 있으니까 필요하면 써도 돼.”

그리 대답한 지하율은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좀 전까지의 심란함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은 눈빛. 200년이라는 세월의 풍파가 눈빛으로 변한듯한 시선으로 환인에게 말한다.

“아저씨가 날 찾아온 이유는 뭐야? 보아하니 아저씨도 제법 잘 적응하고 있는 거 같은데.”

“평범한 질문을 가지고 지하율 씨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알고 계실지는 둘째치고 질문을 하는 저도, 질문에 대답할 지하율 씨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은 내용이 될겁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겉모습은 이래 봬도 니오네브레스에서 200년 넘게 살았어. 사부님의 적전제자라고 자부하고 여럿한테 현자라 불릴 정도의 지식도 있어. 경험한 것도 많으니까 일단 물어봐.”

그 말에는 자만심도, 교만도 없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태도가 가득하다.

환인은 대현자의 사부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며 한 단어만 입에 담는다.

“천원.”

“천원?”

이건 모르는 건가. 환인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천원을 모르는 상대에게 질문해도 괜찮을지, 연륜은 있다 해도 10대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상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고심하는 표정.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표정에 지하율도 미간을 찌푸렸다. 관자놀이에 약한 핏대도 선다.

“아저씨 기분 나빠.”

“……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까.”

“다른 인간들처럼 아저씨도 내 겉모습에 휘둘리고 있잖아.”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행동도 그렇지 않았냐는 우회적인 발언에 지하율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눈을 질끈 감고 파닥파닥 손부채로 얼굴에 바람을 부친다. 필사적으로 분통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분통을 가라앉히는 데 실패했는지 눈썹을 치켜뜨고 아르릉거리기 시작했다.

“난 아저씨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뺀질거리게 생긴데다 여자를 한둘도 아니고 여섯이나 데리고 다니잖아. 난봉꾼 쓰레기 색마도 아니고.”

“…….”

이건 갑자기 무슨 인신공격이지.

환인이 살짝 어이없어하고 여자들은 하던 일을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인과 지하율을 번갈아 본다.

“그래도 난 그 생각을 속으로 안 드러냈는데 아저씬 뭐야? 표정에 속이 다 드러나고 있잖아! 이게 기분 나쁘지 않으면 뭐가 기분 나쁜 건데?!”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으르릉거리는 지하율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뭔가 웃겨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카가 있다면 지하율 씨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생각도 재수 없거든!”

“진짜 조카였다면 엉덩이를 두들겨서라도 버릇을 고쳐놓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말하는 투도 기분 나빠!”

“버릇없는 꼬맹이의 훈육은 어른의 의무 아니겠습니까.”

“틀딱! 꼰대! 지공!”

틀딱하고 꼰대는 알고 있는데 지공은 무슨 줄임말이지.

평상시 안면도 없던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성가시고 짜증 나기만 할 텐데 어제 음식을 두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허겁지겁 밥 먹던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아서일까.

‘귀엽군.’

사이가 험악해져서는 안 되는 애하고 싸워봤자 자신만 손해. 환인은 눈앞의 대현자 나이에서 212년을 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것과 지하율 씨가 알고 있는 것의 단어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요. 파-레 사의 신전기행이라는 서적은 아십니까.”

“알아. 나도 어렵게 구해서 읽어봤으니까.”

지하율은 또 자신이 말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화내지 않는 상대에게 계속 화를 내는 것도 바보짓이다. 후우 울분을 숨결로 뱉어내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파-레 사는 희대의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게 저와 그녀들의 의견입니다.”

“사기꾼은 그 사람을 묻어버린 종교 교단 놈들이겠지. 신을 만나고 왔다면 선지자로 받들어서 지식을 탐구해야지 이단이네 뭐네하며 붙잡아 고문하고 죽여버리다니. 한심한 머저리가 따로 없어.”

=…….=

침구 정리를 끝내고 근처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안느의 얼굴이 빨개진다.

“아무튼, 그 천원이라는 게 오르빈치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하지만 그만한 단어라면 내가 모를 리 없는데…… 인외 신적인 존재한테서 들었나? 신수라면, 영도의 대성녀님?”

눈을 감고 감정을 다스리는 안느는 알 바 아니란 듯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던 지하율은 흥, 하고 재수 없다는 시선으로 환인에게 물었다.

“아저씨. 오르빈치라고 들어봤어?”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신전기행에 나오는 지역과 관련된 명칭입니까.”

“신의 정원은?”

“…….”

천원 = 오르빈치 = 신의 정원이란 뜻인가.

환인은 본능적으로 그게 아닌 것 같아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지하율이 계속 말한다.

“적어도 인간들 한정으로, 파-레 사가 본 것은 오르빈치라고 일부가 이야기해. 천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신의 정원과 오르빈치가 같은 겁니까.”

“그건 성직자에게 신성과도 같아서 연구하려는 인간을 보지 못했어. 그러다 보니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거의 없고 나도 신의 정원과 오르빈치는 같지 않을까 하는데……. 무삭제 신전기행본에서는 그곳을 이렇게 가리키거든. 신수의 땅, 오르빈치라고.”

신수는 신의 애완동물이라고 하니까, 라는 지하율의 말에 환인의 시선이 백려강에게로 돌아갔다.

“백려강. 네가 읽은 신전기행의 판본은 어떤 거였는지 기억하나.”

=그으, 평범하게 녹색 가죽 질감의 장정판에 완전 민무늬로 제목도 저자도 적혀있지 않은 거였어요.=

“3쇄 본이네. 알음알음 7쇄 본까지 나왔는데 제목도 저자도 없고 염료를 먹인 녹색 가죽 질감이면 당시 종교가 탄압할 적에 몰래 베껴나온 3쇄 본이야. 내가 본 건 5쇄와 6쇄 사이에 진실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초판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모아 적은 게 무삭제본이고.”

“3쇄 본의 내용 신빙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2쇄 본은 잡설과 견해가 너무 많이 들어가 신뢰도는 최하, 무삭제본이 신뢰도 80% 정도라고 보고 3쇄 본은…… 40~60% 정도겠네. 책의 문구에서 천원에 대한 언급이 있었어?”

“…….”

환인이 작게 고개를 젓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백려강이 입을 다물어버린다.

당연히 대답을 기다리던 지하율은 심통 난 여고생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기분 나빠.”

환인은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2016년이면 여성권 문제로 한창 예민하던 시기, 거기에 한창 예민할 나이인 한국 여고생이 이세계에서 하렘을 꾸린 남자를 우호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여고생의 정신상태가 이상한 걸 테니까.

“알려주지 않겠다는 게 아닙니다. 당신도 사람인 이상 기억력에 혼선이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이쪽의 이야기에 기억이 위조되지 않도록 잠시 기다리라는 뜻이었습니다.”

“…….”

“어느 부분의 묘사를 두고 오르빈치라고 했는지 먼저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먹을 것만 아니었으면…….”

뚱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린 지하율은 품에서 백과사전처럼 커다란 책 한 권을 꺼내 환인의 탁자 앞에 툭 던졌다.

무척 두꺼운 표지가 넘어가고 이윽고 고급 재질의 종이가 파라라락 자동으로 펼쳐지더니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거기 6번째 문단을 봐.”

“……「오르빈치, 순결한 신목이 자라는 모든 신수의 고향이자 다섯 신의 출생지. 신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빛을 내뿜는 순백의 나뭇잎과 나무 기둥이 백여 킬로미터까지 자라나 잉크처럼 칠흑의 하늘을 떠받치니 그 이름은 길리아미, 태초의 한 갈래일지니. 신의 뜻이 깃든 대지는 그분들의 정원이라.」 ……조금 다르군.”

당시 백려강은 「스스로 빛을 내뿜는 하얀 나뭇잎과 하얀 나무 기둥이 수십 킬로미터까지 자라나 검은 하늘을 떠받치니, 우주의 진리와 신님의 의지가 그 하얀 몸에 깃들어있도다. 뭍 성수의 경외와 존외를 한 몸에 받으며 세계에 빛을 뿌리는 우주수 그 이름은 길리아미.」 라고 했었다.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신수와 성수, 태초와 우주수……. 무삭제본의 해석이 진위에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무슨 근거로? 그보다 천원이라는 건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팔짱을 낀 환인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본 것과 알게 된 것을 알려줄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일. 지하율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에 관한 일.

눈을 뜬 환인은 자신을 약간 분홍색이 깃든 검은 눈동자로 응시하는 지하율에게 질문했다.

“지하율 씨…….”

“그냥 이름을 불러. 아저씨한테 씨씨 계속 들으니까 두드러기 날 거 같아.”

“……하율. 천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제가 이곳 니오네브레스와 연관된 모든 걸 알려준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 안 해주면 아저씨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하율의 불퉁거리는 대꾸에도 환인은 철없는 조카를 바라보듯 그녀를 차분히 응시하며 물었다.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

‘율, 널 믿어도 될까?’

지압하듯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불쑥 떠오른 기억을 마음속에 파묻어버린 지하율은 고개를 주방 쪽으로 돌렸다.

아까부터 어제만큼 구수하진 않지만 맑은 된장국 냄새에 생선구이 냄새가 위장을 쿡쿡 찌르는 중이다.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해.”

환인도 주방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백려강과 유르파가 식사를 내오는 걸 보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백한 생선구이보다는 된장국과 나물무침, 김치에 집중하며 아침을 먹은 지하율은 식사와 함께 정리한 생각을 환인에게 말했다.

“아저씨를 이해해. 나도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많으니까. 그러니…….”

힐끔힐끔, 가슴인지 주머니인지 모를 거대한 지방 덩어리 한 쌍을 가진 이실리테를 곁눈질하던 지하율은 자박자박 그녀에게 다가갔다.

“요, 요리법 몇 가지만 알려주면 저 아저씨가 궁금해하는 천원에 대해서 다 알려줄게. 어때?”

=요리법이라면…….=

“한식 만드는 법 발이야. 김치하고 김치찌개, 된장찌개는 꼭 알려줘야 해.”

자신보다 20cm 정도 더 큰 이실리테를 보며 말하던 지하율은 뒤에서 팔랑팔랑, 종이 다발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환인의 손에 들려 살랑살랑 흔들리는 노트 한 권.

팔락거리는 틈새로 보이는 건 분명 요리 레시피였다.

“요리치라도 할 수 있는 김장하는 법 A-Z. 초보자도 손쉽게 만드는 김치찌개.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할 수 있다, 대두로 수제 된장, 간장 만들기. 그 외 니오네브레스에 맞춰 편집한 7종의 반찬 레시피. 요리 솜씨는 순수한 그녀의 실력이지만, 레시피 제공은 내가 했습니다.”

약간의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 표정에(지하율의 착각이다) 굴욕감을 느낀 지하율은 부들부들 떨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다. 어제 그렇게 약점을 보이고 만 이쪽 잘못이니까.

꿍한 얼굴로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책자를 낚아채려던 지하율은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무슨 짓이냐는 눈빛을 환인에게 발사했다.

“그냥 가져가려는 겁니까. 이쪽은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적었는데 말입니다.”

“…….”

“참고로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제가 기억하고 그녀가 니오네브레스의 재료만으로 만들 수 있는 한식은 20여 종이 넘어가니까요.”

“……부탁할게. 나 줘.”

“…줘입니까.”

“이씨…….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90도로 팍 숙이며 외치는 모습에 환인은 큭큭 웃으며 그녀에게 책을 내밀었다.

“김치와 된장, 쌀도 여분이 있는 만큼 나누어주겠습니다. 이실리테가 옆에서 요리하는 것도 가르쳐줄 테니 당신이 지닌 지식을 제공하는 게 아깝진 않을 겁니다.”

단숨에 요리책을 완독한 지하율은 김치볶음밥, 김치 국수, 김치전, 두부김치, 김치찜, 김치 김밥 등을 만들어 먹을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며 책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밉상이지만 그렇게 밉상은 아닌 환인을 째려보았다가 흠흠, 헛기침한 뒤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 번 말 안 할 거니까 똑바로 들어. 오르빈치는…….”

지하율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사부에게 듣고 배운 것을 망라해 오르빈치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르빈치가 존재하는 이유, 오르빈치의 풍경, 오르빈치의 정체성, 니오네브레스 인간에게 있어 오르빈치가 어떠한 의미인지.

“……해서 신수들은 태초의 나무, 한국에서라면 세계수라고 부를법한 나무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어. 다섯 신이 태어난 곳, 그 성역을 지키기 위해서.”

“그곳에는 신수만 존재합니까.”

“아니. 신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성수들도 살아. 그리고 신수와 성수로만 어떻게 하지 못 하는 일을 위해 그들을 받드는 인간……도 살고 있을 거라는 게 사부님의 생각이셨어.”

“신의 땅인데 정작 신은 없다고 보신 거군요. 신뢰성은…….”

“단순하게 추리한 게 아니야. 그 추리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세상에 여럿 존재하거든. 아저씨는 영혼사의 유일 직업이라고 했지? 그럼 영성경을 알 텐데 그 영성경을 사람이 타고 다녔다는 목격담이 존재해.”

“…….”

이야기를 전부 들은 환인은 신의 정원이 곧 천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오르빈치는 뭔가 의혹이 치민다.

앞선 두 단어, 신의 정원과 천원하고 같은듯하면서도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이 컸던 것.

‘어쨌든 천원, 신의 정원은 우주에 떠 있는 한반도 규모의 거대한 섬이라고 봐야겠군. 신수는 그 섬과 신목, 태초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환인은 이실리테가 타준 커피를 마시는 지하율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줄곧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천성이 남을 속이고 헐뜯고 뒤통수 치는 것과 안 맞아 뒤에서 헐뜯기보단 마음에 안 들면 앞에서 들이 받아버리는 성격.

속으로 결정을 내린 환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천원에 대한 지식을 찾는 이유는 천원의 누군가가 절 지목한듯했기 때문입니다.”

“…….”

잠시 환인을 바라보던 지하율은 커피잔을 내리고 손을 뻗어 환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

환인의 눈빛이 냉랭해지자 물러난 지하율이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아저씨도 허튼소리 할 타입처럼은 안 보여. 그런데 하는 말이 허황한 소리라서 그래.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데?”

“하율은 근래에 이곳을 나간 적이 없나 보군요.”

“응. 최근 1년은 다 내팽개치고 술독에 빠져서 살았어.”

속사정이 깊어보이는 이야기에 환인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옆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만 듣던 유르파가 팔라툼에서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주었다.

“…광상녀가 아저씨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거기다 하늘에 눈이 열렸다니…….”

심각해지는 지하율에게 환인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할 일을 정리한 뒤 지구로 귀환할 예정인데 천원…… 신의 정원 같은 곳에 붙잡히는 것은 사양입니다.”

“그래서 천원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려 했던 거였구나. 겸사겸사 몸에 벌어진 현상도 알아보려 한 거고.”

커피를 마저 비운 지하율은 찻잔 가장자리를 매만지면서 생각을 이어가다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하면 며칠은 피곤한데…….”

식탐 강한 게 죄지.

찡그린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 지하율은 허리를 곧게 펴고 합장하듯 두 손을 맞댔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벌리기 시작하는데, 그러자 손바닥 사이에서 푸르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 주변을 푸르게 물들여나간다.

이윽고 한 뼘 정도로 벌어진 손바닥 사이에 빛줄기가 사납고 빠르게 오가다 정사각형의 푸른색 빛줄기로만 이뤄진 복잡한 문양의 큐브로 완성되었다.

푸른빛을 방출하며 느릿하게 빙글빙글 도는 큐브.

얼굴에 기묘한 음영이 지는 줄도 모르고 3분가량 집중하던 지하율은 다시 손바닥을 마주 붙였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지하율은 엄청나게 지친다는 듯이 소파에 축 늘어졌다.

“아…저씨 예측이 맞아. 천원의 관리자로 아저씨가 예정됐어.”

“……방금 그것은.”

“아카샤의 기록이라고 들어봤어?”

“오컬트에서 초차원 정보 집합체라고 부르는 겁니까.”

“응. 이것도 일종의 허공 지식 단말이야. 전지의 눈이라고 하는 건데 이 세상의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단말이야. 단지 접속하기 위해서는 일정량 이상의 지식이 필요한 게 진정한 아카샤의 기록하고 다르지만…….”

그러니까 0에서부터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아카샤의 기록과 달리 전지의 눈은 해당 항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

환인은 잠깐 사이 몰골이 확 변한 지하율을 살폈다.

겨우 3분, 그사이 보기 좋던 얼굴은 마치 100일은 금식한 것처럼 볼살이 홀쭉해지고 눈 밑이 퀭해져 있었다.

“전지의 눈을 쓰는데 생체 에너지를 쓰는 거군요.”

“지인……짜 피곤해…….”

말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힘겨워 보이는 모습에 환인은 그녀의 이마에 검지를 대고 원기와 영기를 살짝 흘려 넣어주었다.

이대로면 대화도 어려울 테니까. 그리고 안 해줄 것처럼 굴면서도 다 해주는 그녀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표시할 겸.

그러자 과장 보태 해골 같던 외모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조금 야윈 모습이 되었다.

“…….”

그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한 지하율도 그가 이런걸 해줄 줄은 몰랐는지 이런저런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환인을 바라보다 숨을 내뱉듯이 말했다.

“아저씨가 우려하는 일은 아저씨의 마음이 단단할수록 일어나지 않을 거야.”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천원이라는 곳으로 끌려갈 확률이 낮아진다는 건가.

광상녀가 한 말을 떠올려봐도 강제라는 느낌은 없었고 지하율은 지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자신의 목적은 원한의 보복과 지구로 귀환뿐이니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을 생각은 없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려면 그에 걸맞은 지위나 신분, 재력이나 무력이 필요한 법. 미궁을 좀 더 많이 돌파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8대 미궁이라던가.

환인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들숨 날숨을 내쉬던 지하율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걸로 됐지? 끝이야, 끝. 더는 말 안 해.”

손을 휘휘 젓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지하율이 아, 맞다. 하고 환인을 돌아본다.

“아저씨 몸에 일어난 현상, 마지막 조각을 녹일 땐 안전한 곳에서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해줄 말은 이게 다야.”

“…….”

대놓고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하는 말에 환인은 턱을 쓸어내렸다.

미궁에 들어가는 건 좀 더 미뤄야겠군.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영화관 가본지 넘나 오래됐네용

극장판 슬램덩크는 어떻게 참았는데 이번에 한국 개봉한 아니메는 진짜 참기 힘드뮤

그래도 갈 시간이 없어서 글쟁이는 손가락만 빨고 있읍니당

따흐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