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91화 (691/813)

691 대현자의 제자를 자칭하는 현자

달그락달그락, 달칵, 사박사박, 토다닥.

환인 쪽으로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 지하율은 괜히 돌아누웠나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뒤에서 들려오는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이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엄청 좋은 향기…….’

차 향기는 틀림없는데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다. 니오네브레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신 차가 제법 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달콤하면서도 톡톡 튀는 쓴 향을 머금은 향기. 자신이 좋아하는 쪽의 향기다.

=향기 좋다. 무슨 찻잎으로 끓였어?=

=슈아나데 어머님이 알려주신 꽃잎에 프루귀니 잎을 말린 걸 잘게 빻아서 섞은 거야.=

아, 프루귀니. 확실히 그 노란 잎이 톡 쏘는듯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지.

……그런데 슈아나데? 그 투르시온의 슈아나데?

지하율은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시선에 멈칫하는 두 여자가 보인다. 호박색 머리에 젖소처럼 가슴이 큰 루크랑 여자와 왕가의 증거인 은색 머리카락의 키 큰 플뢰 여자.

어느 쪽이 아까 그 말을 한쪽이지?

아니, 생각할 것도 없다. 투르시온은 메리아놀의 플뢰족 왕가. 가문의 인간은 전원 순혈의 증거인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지하율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직전, 이실리테가 그녀를 향해 찻잔을 내밀었다.

=여기 숙취에 좋은 차에요. 마시면 속이 조금 풀리실 거에요.=

“으, 어…?”

지하율은 플뢰 쪽이 아니라 루크랑 여자 쪽에서 아까 들은 목소리가 나와 살짝 당황했다.

“…….”

세상은 넓다. 슈아나데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지하율은 자신의 사고 오류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내밀어진 약간 노란 빛을 머금은 약초차를 잠깐 응시하다 말없이 찻잔을 받아들었다.

‘따뜻해…….’

그 따스함에 또 다른 기억이 심층에서 떠오른다. 그 탓에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은 참았지만 대신 눈 주변이 불타듯이 뜨겁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울까. 틀림없이 지끈거리는 머리와 쓰린 속 때문이겠지.

달그락,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지하율은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날 선 어조로 말했다.

“……내 집 어지럽히지 마. 날 밝으면 바로 나가고.”

좀 씻자. 뜨거운 물에 씻고 나면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이 기분도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그녀가 벚꽃이 새겨진 장지문 너머로 사라지고 이실리테는 살짝 침울한 얼굴로 환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대현자님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 같아요…….=

대현자라는 소녀의 언행과 반응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내느라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그런 이실리테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어주었다.

“네 잘못은 없다. 대현자는 과거를 보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듯하니.”

과거? 방금 대현자의 과거를 유추할만한 행동이 있었나?

여자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환인은 천천히 식어가는 노란색 차를 바라보다 자신의 몫으로 나온 찻잔을 들었다.

“안느. 투르시온 왕가가 적을 많이 만드나.”

=어? 아니 오히려 반댄데. 타 왕가하고 두루 친하고 협의회 소수민족 대표들이랑도 사이가 되게 원만해. 풍년이 들면 주도 내 담당 영역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은혜를 베풀어서 시민들하고 주민들 인망도 높고…… 왜? 대현자 님이 투르시온을 증오해?=

괜히 이런 질문을 했을 리 없기에 안느가 조금 놀랍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실리테가 장모님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대현자에게서 희미하지만 살의가 느껴졌었다.”

=으음. 엄마 이름에 그랬다면…… 아까 이슬이가 엄마 이름 말하자마자 일어난 게 그럼 투르시온을…… 그러면 나한테 화내야 할 텐데 왜……?=

“이실리테 목소리를 듣고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여자들의 표정이 복잡해지고 심각해진다.

아영이 비교적 남 일 같은 느낌으로 살짝 손들며 속삭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대현자…님은 메리아놀 출신이란 거죠? 투르시온을 싫어하는 거랑 오빠한테 날을 세운 걸 보면 메리아놀의 투르시온 가문에게 뭔가 몹쓸 꼴을 당했나?=

=그럴 가능성이 큰데…… 엄마가 미리아스툼 가문으로 넘어오신 건 200년도 전의 일이야. 엄마가 투르시온 가문에 있을 적 이야기면 대현자는 지금 몇 살… 아니, 언제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왔다는 거야?=

=안느 아가씨 잠깐만. 그러니까 대현자님은 자기랑 같은 한국인이고…… 지구 시간으로 2016년에 넘어왔다고 했지? 도령은 2023년에 넘어왔고 저쪽의 하루가 이쪽의 한 달이니까 대충 7년이라고 하면…… 힉, 210년 넘게 니오네브레스에서 살았어?=

유르파의 계산에 여자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대현자의 직업은 알 수 없지만, 최소 세 가지 속성에 정령력 거기다 마력까지 다뤘다. 무영창으로 술법을 난사한 것을 보면 최소 희귀 직업자가 아닐까. 대현자라 자칭할 정도이니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수명을 늘릴 방법이 전혀 없는 세상이 아니니까.

=자기…… 괜찮겠니? 대현자님은 질문을 받아줄 생각도 없으셨고 내일 아침이 되면 바로 나가라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 대현자를 찾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냐는 유르파의 우려에 환인은 대현자라는 소녀가 보여주었던 반응을 다시 생각했다.

코가 삐뚤어질 만큼 술에 취해있었지만, 평온의 파동에 이쪽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곧장 공격을 멈췄다.

정신력과 이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속상하고 울분에 차 있음에도 최소한도의 예의를 발휘해 이쪽을 집안으로 들였다.

집안에서 공격받더라도 되받아칠 자신과 실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이쪽의 상황과 정체를 몇 가지 단서만으로 어느 정도 유추해낼 만큼 지성과 지혜가 있다는 증거.

그녀의 성격과 능력을 분석하던 환인은 조금 전 잠깐 나눴던 이야기에서 느꼈던 의문을 다시 상기했다.

‘대현자는 왜 지구로 귀환하지 않았지.’

그녀가 니오네브레스로 트립했다는 시기를 듣자마자 그녀의 나이를 계산해내고는 의문을 품었었다.

니오네브레스에서 상처를 잔뜩 받았다면 환멸을 느껴서 지구로 돌아가 버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200년 넘게 살아왔다지만 겉모습은 고등학생 정도. 지구로 돌아가더라도 별문제 없이 살 수 있을텐데.

‘그 분노에 찬 모습을 생각하면 소중한 사람이 이 세계에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지구로 귀환할 방법을 못 찾았다고 보기에는 대현자가 가진 무위, 이 세계에서 살아온 시간이 터무니없이 길다.’

대현자가 지구에서 살아온 환경이 이곳보다 더 나쁘다던가. 아니면 특정 원한이 너무나 강해서 영혼이 속박되어있을 가능성도 있고…… 이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확인할 수 있겠군.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에 생각을 정리한 환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친구들에게 입을 열었다.

“대현자님이 허락한 시간은 내일 아침까지니 그때까지 시간이 있다. 이실리테, 늦었지만 저녁 식사를 부탁하지. 고춧가루를 푼 콩나물국에 쌀밥과 묵은지 김치찌개, 추어탕은…… 호불호가 갈리나. 된장찌개를 끓여다오.”

환인의 구체적인 식단 요청이 뜻하는 바를 읽은 이실리테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식재 준비는 다 되어있으니까 금방 준비할 수 있어요.=

“부탁하지.”

뜨거운 물에 잠깐 몸을 담그고 차가운 물로 열기를 씻어내린 지하율은 숙취가 어느정도 가는 걸 느끼며 욕실을 나왔다.

‘하아…… 나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추태를 저지르다니.’

영혼이 너무 살아있는 사람 같아서, 제멋대로 집안에 들어와 있는 꼴에 또 그 자식들이 사람을 보냈구나 싶어 다짜고짜 공격했다.

조금만 제정신이었다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고 그랬다면 뺀질뺀질하게 생긴 남자를 집안에 안 들여도 됐을 텐데.

“…….”

생각하니 속 쓰림에 더해 짜증이 울컥 솟았다.

어떻게 이 세상에 넘어온 남자란 족속은 다 저럴까. 조금 예쁜 여자만 보이면 껄떡거리기 바쁘다. 라드세아에서 온 놈들은 한술 더 떠서 자기가 무슨 왕인 양 거들먹거려 꼴도 보기 싫다.

저 뺀질이 남자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질이 나쁘다. 여자를 둘도 아니고 여섯이나 데리고 다녀? 완전 색마 바람둥이잖아!

“아 속 쓰려.”

안주도 없이 깡술해서인지 입을 열 때마다 술 썩은 내가 흘러나와 괴롭다. 위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에 신물까지 올라올 지경.

이럴 때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가 있으면…….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가족이지만 엄마가 해줬던 김치찌개만큼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이래서 어렸을 때 길여진 입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겠지.

“끄어억.”

트림이 나오자마자 음식물 쓰레기장에서 나는 것 같은 끔찍한 냄새에 지하율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코를 잡았다.

세상에, 이게 내 속에서 나는 냄새야? 뭐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리콜리 열매가 얼마나 남았더라…….”

요리 솜씨가 괴멸적이기에 자의 아닌 자의로 선식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 그에 대해 불만은 없지만, 이럴 때면 사람 손길이 닿은 따뜻한 음식이 사무치게 그립다.

주섬주섬 아무 옷이나 꺼내 입으며 지하율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람 손길이 미치도록 그립긴 하지만, 그보다 이제 더는 싫다. 이별도, 작별도, 헤어짐도, 전부다…….

그렇게 옷을 챙겨입고 지하실에서 1층으로 올라온 지하율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 냄새는…….”

얼큰하면서도 칼칼한 냄새, 맡자마자 침샘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돼지고기 묵은지 김치찌개의 냄새.

청량고추를 썰어넣은 듯한 매우면서도 구수한 된장 끓인 냄새.

지하율은 홀린 듯이 휘청거리며 냄새가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도 사무치는 향수병 때문에 고향의 음식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끔찍한 요리 실력이지만 당시 동료의 손을 빌려 배추와 고춧가루를 구해 김치도 담가봤고 대두를 찾아 두부에 된장도 만들어봤다.

하지만 그 모든 건 2%가 아니라 98%는 부족한 것들이었다.

김치랍시고 만든 건 빨갛게 물들인 사우어크라우트였고 된장이라고 끓인 건 대두를 조려서 끓인 수프였다.

어쩔 수 없었다. 트립되기 전에는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집과 학교 학원만 오가며 공부만 하던 잼순이였으니까.

“……!”

냄새를 따라 복도 모퉁이를 돌아 거실로 나간 지하율은 거실의 큰 탁자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하얀 쌀밥.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넘쳐흐르는 매콤 얼큰한 돼지고기 김치찌개.

위장이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듯한 고추 썰어 넣은 두부 된장찌개.

아빠가 술 마신 다음 날 보면 좋아하던 고춧가루 콩나물국에 시선을 마구 잡아당기는 갈비찜과 계란 장조림, 정갈하게 썰어놓은 김치에 소박한 나물무침과 깍두기 두부 전에 계란찜까지.

전부 꿈에서까지 본 음식들.

고향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기만 해 단단히 굳어버려 이제는 그리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던 그녀는 눈앞에 차려진 한 상에 쌓이고 쌓여 퇴적되었던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는 걸 느꼈다.

“미안합니다. 대현자님을 찾느라 저녁 끼니도 대충 한 터라.”

“…….”

움찔움찔, 멈칫멈칫.

그 때문에 환인의 말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건드렸지만, 지하율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자제심이 풀려 음식에 달려들 것만 같아서.

“아무래도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듯해서 해장 겸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같이 들지 않겠습니까.”

“…….”

만약 그를 손님으로 받아 그럭저럭 예의를 갖춰 대했다면 저 말을 못 이긴 척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율은 예의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저 쪽에게 얼마나 재수 없고 무례한 행동이었는지도.

그래서 저 권유에도 달려들 수 없었다.

저 권유를 받아들였어 봐라. 얼마나 꼴불견이겠나. 돼지처럼 식탐이 얼마나 강할 것처럼 보이겠나.

그렇지만 되돌아서지도 못했다.

200년 가까이 그리워한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뒤돌아설 수 있을까.

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고민을 읽은 안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고 당겼다.

=대현자님? 넉넉하게 차렸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봐. 숙취가 심한 거 같던데 뜨거운 거 조금 먹으면 속도 풀릴 거야.=

“…….”

어린아이도 뿌리칠 수 있을만큼 약한 힘이었지만 지하율은 거인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끌려가서 자리에 앉았다.

상 앞에 앉자마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앞에 놓인 음식은 자신이 어쭙잖은 지식으로 재현한 한식 코스프레가 아니라 한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의 손에 재현된 진짜 한식이라고.

“먹지.”

=잘 먹겠습니다!=

=이슬이 아가씨, 잘 먹을게~.=

=어? 야, 아영이 너 고기 먹으면 안 되잖아!=

=앗 맞다……! 크으윽! 갈비찜을 눈앞에 두고 먹지도 못하다니……!=

지하율은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분위기로 식사를 시작하는 그녀들의 틈바구니에서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1인용 뚝배기에 나온 김치찌개에 숟가락을 올렸다.

“…….”

빨간 국물 한 숟가락이 혀끝에 맴돌다 식도로 넘어간 순간 위장에서 시작된 전류가 온몸을 타고 흐르다 머리에서 폭발한다.

이…… 이 맛이야. 꿈에서 먹다 깨고 우울해했을 정도로 그리워한……!

“……!”

채 썬 고추까지 들어간 얼큰한 묵은지 김치찌개 국물 한입에 자제심이 풀린 지하율은 그때부터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 입 한 입 매콤 얼큰한 김치찌개와 얼큰 구수한 된장찌개가 사라질 때마다 그녀의 생각도 사라져간다.

주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저질을 할 때마다 사라져가는 음식에 그녀는 눈물이 차올랐다.

쌀밥 한 수저에 김치찌개 한 숟갈, 쌀밥 한 수저에 된장찌개 한 숟갈.

쌀밥도 적당히 찰져서 밥알의 식감이 느껴지지만 결코 퍽퍽하거나 꼬들꼬들하지 않아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와 함께 먹으면 입안에서 알알이 흩어질 만큼 잘 되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야들야들한 갈비찜은 직접 손으로 뜯어먹고 탱글탱글 짭조름한 계란 장조림은 아예 한입에 통째로 씹어 삼킨다.

김치도 갓 담근 싱싱한 김치와 잘 익은 묵은지 두 종류여서 어느 쪽을 먹을까 고민까지 들 지경.

맛? 맛이야 두말할 나위 없을 정도였다. 추억보정이 더해진 엄마 손맛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게눈 감추듯 쌀밥 한 그릇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밥공기 리필이 더해졌다.

고봉밥이었지만 부담스럽긴커녕 이것도 적지 않나 생각이 든다.

“큭, 켈록! ……하으으!”

허겁지겁 먹다 목이 막혀 가슴을 치는데 옆에서 차가운 물이 담긴 유리컵이 내밀어졌다.

그걸 단숨에 비운 지하율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 ……!!”

울음소리는 억눌렀지만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휘이이잉-

툇마루를 통해 산을 타고 넘어온 거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뿌린다.

지하율은 그 바람 속에서 가족과 집의 환상을 보았다.

단란한 4인 가정, 생일날 점심이라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차려준 엄마. 저녁은 나가서 외식하자며 꼬드기는 아빠. 돼지같이 처먹는다고 놀리는 남동생까지.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일상 풍경이 어둠 속으로 아득하게 멀어져간다.

200년 만에 접한 고향의 음식 맛과 수십년만에 떠올린 가족의 기억 속에서 지하율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꾸역꾸역, 정말 표현 그대로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그리고 배가 터질듯한 포만감과 텅빈 음식그릇 앞에서 지하율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자신이 얼마나 추접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웠는지 깨달은 것.

=아~ 잘 먹었다. 온종일 주먹밥 몇 개로 때워서 배고파 죽을 뻔했는데.=

=그래도 잘 시간에 이렇게 잘 먹으니까 왠지 모를 배덕감이…… 이상한 기분이에요.=

=밥을 다섯 공기나 먹은 벨 네가 할 말이야?=

=……아영이 너도 네 그릇이나 먹었잖아…!=

=그래도 난 채식했으니까 너보단 덜하지롱.=

=으으~.=

=이슬이 아가씨, 그릇은 나중에 씻을 거니?=

=네. 여긴 너무 아름답고 깔끔한 곳이라서, 산을 나간 뒤에 씻으려고요.=

“…….”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아니, 신경을 안 써주고 있다.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친 지하율은 힐끔, 눈을 감고 물 탄 성수로 조용히 가글하는 환인을 보고서는 상 위를 훑어보았다.

다들 식사 매너가 얼마나 깔끔한지 음식 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먹은 자리만 지저분하게 밥풀이나 국물이 떨어져있을 뿐.

…….

귀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재빨리 짧게 수인을 맺었다.

푸른 물빛이 그녀의 손에서 퍼져 나오더니 식기를 덮었고, 잠시 뒤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만 남았다.

“자, 잠은 거실에서 자. 이불은 저기… 벽장 안에 있으니까.”

자신에게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참지 못한 지하율은 도망치듯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유지했다면 환인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알아차렸겠지만,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했다는 수치심과 남들 앞에서 울었다는 민망함만 남은 그녀에게는 그만큼의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탁자의 그릇을 정리하면서 안느가 ‘역시 도령’하는 표정으로 환인에게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

저 까탈스러워 보이던 대현자를 겨우 위장으로 공략하다니.

이실리테는 그런 안느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것처럼 입술에 검지를 세웠다.

=와, 이불이 되게 폭신폭신하네요. 오랫동안 안 쓴 거 같은데 냄새도 좋고…….=

식기를 다 정리한 뒤 벽장에서 이부자리를 가져온 백려강이 거실 바닥에 깔면서 작게 감탄한다.

유르파도 뽀송뽀송하고 폭신폭신한 이부자리를 가져와 옆에 깔면서 놀랍다는 듯이 더듬었다.

=이거 전부 마도기야. 그것도 순환형 영구 유지 비술식인거 같은데…… 청결하고 원상복구인가?=

=네에? 그 부여식은 어렵기로 한 손에 꼽히는 거잖아요…….=

=잘 보면 집 전체도 비술이 부여되어있어. 이건 충전식 같긴 한데 먼지를 안 쌓이게 하려고 집에 비술을 걸어놓다니, 대단하네…….=

훌렁훌렁, 자홍접을 벗고 가벼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영이 정령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정리하면서 유르파에게 물었다.

=대현자님으로 불릴만한 실력은 갖추고 있다는 거네요. 3종 속성에 정령술에 비술에……. 상위 에너지인 마력까지 쓴다고 했으니까 희귀 직업이 아니라 유일 직업 아니에요?=

=그렇다고 보기에 아우라가 너무 희박했는데……. 자긴 어떻게 생각해?=

“범상치 않은 실력자인 것은 확실하겠지요. 어딘가에서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귀찮을 정도로 사람을 보내는 것 같으니까요.”

=여기 지리를 생각하면 히스론드려나. 아무튼 이슬이 음식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 거 같던데 질문 하나 정도는 받아줬으면 좋겠다.=

등대의 빛 상의와 장신구만 벗어 옆에 두고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이불에 들어간 안느가 중얼거리자 화장을 정리한 아영도 슬금슬금 안느의 옆에 가서 누우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을 흘려서 놀랬어요.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먹어서 그런거겠죠?=

=아무래도?=

=주방에 음식을 한 흔적이 없었어. 요리할 때 보니까 식재료도 과일이나 약초, 염장해서 말린 고기 같은 거뿐이던데…… 대현자님은 아마 음식을 못 하시는 분이 아닐까 해. 주인님, 여기 누우세요.=

=아, 가끔 그런 사람 있지. 센스랑 재능이 너무 지나쳐서 독이 된 거 같은 사람들. 그러면 고향의 맛을 200년 만에 접한 거겠네. ……우와 그거 울만 하겠는데?=

=으음. 전 그거 이해가 안 돼요. 요리도 하나의 배합이잖아요. 이실리테 언니처럼 엄청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건 감각이라지만 그냥 정량만 딱 맞춰도 그냥저냥 먹을만한 음식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독 아냐?=

=그런가……?=

양치를 끝낸 환인도 천릉의 코트와 재킷을 벗어 옆에 걸어두고 이실리테와 안느 사이에 눕는다.

솔직히 대현자가 저 정도로 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저 숙취 상태니까 고향의 맛으로 속을 풀어주면 조금 호의를 느끼지 않을까 했는데 설마 눈물까지 보일 줄이야.

대현자가 먹어치운 양이 족히 4인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주인님. 내일 아침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생선은 얼마나 남았지.=

=바다 생선 큰 거 4마리하고 민물 생선 작은 거 15마리가 있어요.=

“구운 생선을 위주로 간을 가볍게 한 채소 무침에 맑은 된장국 정도면 되겠지.”

=네. 그렇게 할게요.=

이실리테의 말대로 대현자는 요리치가 분명하다. 방법을 알든 모르든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틀림없다.

=이렇게 달빛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한데 모여 자는 거 왠지 좋네요!=

=나도…….=

=집이 라드세아 식이랑 비슷해서 안정감도 좋… 하아아암……. 좋은 거 같아….=

=배 부르고 이부자리도 편하고…….=

여자친구들이 작게 속닥이는 걸 들으며 환인은 대현자와 적당히 거래를 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실리테의 한식 요리 레시피와 양념 제작법에 재료를 거래 품목으로 제안하면 질문 하나 정도는 받아주지 않을까. 보석쥐를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 좌우에 누워있는 안느와 이실리테를 끌어안고 그녀들의 부드러운 가슴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마지막에 잠자리를 안내해준 걸 보면 이쪽에 빚이 생겼다 느낄 수 있을테니 내일 협상은 기대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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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우는 여자는 이상하게 꼴리... 어흐흠!

[작품 설정]

차원 방랑자

힝구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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