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 데바스톤 산맥의 은거 기인
=그런데 여기서 저기로 어떻게 넘어가지?=
안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비탈길의 고갯마루. 여기서 저 앞에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
환인이 도원향이라 말했던 곳은 이를테면 산속의 섬이라고 할까. 분지 속에 탁상지가 불쑥 솟은 모양새다.
올라가는 길 없이 사방이 가파른 벼랑이라 저곳으로 넘어가려면 날아서 가는 수뿐인데…….
비행 빗자루에서 내린 유르파가 오랜 시간 빗자루를 타 알이 배긴 엉덩이를 주무르며 물었다.
=자기. 영혼의 눈에 보이는 건 없니? 여기까지 오면서 본 걸 생각하면 함정이 없다고는 생각 못 하겠는데…….=
“딱히 함정 같은 것은 안보입니다만 중급 바람 정령들이 반쯤 정신을 놓고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함부로 다가갔다간 날려버릴 듯한 분위기입니다.”
「환인 말대로야. 말 걸어봐도 들은 척도 안 해.」
=아까처럼 상급 정령을 불러보면 안 될까?=
이실리테가 묻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환연이 한쪽 눈썹만 찡그린다.
「저 정령은 저기 사는 인간의 마지막 방어 기제일 텐데 그걸 건드려봐. 화만 내면 다행이겠다 싶을걸.」
=음…….=
날아가는 게 안되면 밑에서 벼랑을 타고 오르는 건?
그녀들의 시선이 산비탈 아래로 향한다.
골짜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깊은 골짜기 밑바닥에도 나무가 빼곡해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도 곳곳에 안개가 솜사탕처럼 맺혀 흐늘거리는 게 보인다.
농도 짙은 독안개가 끼기 좋아 보이는 지형이다.
=저 벼랑을 타고 오르는 것도 안 되고 날아서 넘어가는 것도 힘들고…… 여기서 불러보는 건 어떨까? 율이 언니, 성량 증폭 비술 있지?=
=응. 있기야 한데…….=
=부르기 전에 저기 사는 사람이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일 거 같은데요? 불렀다가 ‘내 땅에 맘대로 들어오다니, 죽어라!!’ 하고 무작정 덮치면 어째요.=
=저, 저도 아영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독안개에 거대 골렘에 정령이랑 잡령도 붙들어 매 놓은 사람이잖아요…….=
=그건…… 그런가?=
여자친구들의 의논을 듣던 환인은 왼팔의 영혼 창고에서 나사라트의 암살자 영혼 하나를 불러냈다.
니라인에서 습격해온 암살자들의 조장, 소위다.
실체화는 시키지 않고 영기만 주입해 가시화만 시킨 환인은 소위에게 전령의 임무를 맡겼다.
“가서 집주인에게 뵙고 싶다는 전언을 전해라. 무례한 언행은 엄금이며 정중한 태도를 보이도록.”
「예, 성제님.」
가시화만 한 영혼은 영혼사의 기술이 아닌 다른 공격에는 거의 면역이기도 하고, 영혼을 사역하는 것은 상급을 넘어 영성의 전매특허.
니오네브레스에서 영혼사의 평판을 생각하면 적어도 적의는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적의를 가진 데다 사령술사 같이 영혼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나사라트의 암살자라면 잃어도 그리 아깝진 않고.
그렇게 보낸 영혼은 20여 분 뒤 산마루에 해가 걸렸을 때 잔뜩 곤란해하는 얼굴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술에 잔뜩 취했는지 아무리 부르고 소리쳐도 잠에서 깨질 않았습니다.」
“……가서 본 것을 설명해봐라.”
「예. 먼저…….」
집주변이나 근처에는 비술, 주술의 흔적은 없었다.
집은 지은 지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새집 같았다. 여섯 명 정도가 지내기에 적당해 보이는 넓이의 집안 가재도구는 나무와 돌을 깎거나 조각한 것들이었는데 외부와 오가는 일이 있는지 기술자의 솜씨가 보였다.
내부는 깔끔했으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인기척은 주인 같은 여자 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거실에서 술병에 파묻혀 자는 모습으로 거실에 드러누워 있을 뿐.
「여자는 약 160 정도의 신장에 10대 후반의 외견이었으며 흑단색 긴 장발이 특징적이었습니다. 짐승 귀와 짐승 꼬리는 없었고 날개 또한 없었으며 귀는 이실리테 님과 같은 둥근 모양, 착용 중인 의복은 아마색 로브였으나 고품질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마도기 혹은 유물로 짐작되었습니다. 아우라는 매우 옅어 어느 직업인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으음. 반로환동한 고위 직업자…일까?=
안느가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자 이실리테는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현자의 제자일 수도 있어. 술을 퍼마신 채 자고 있다면 사부를 잃고 상실감에 그랬을지도 몰라.=
=여섯 명이 살 정도로 큰 집이라고 했으니까요. 집안에 그분 말고 없다면 이실리테 언니 말씀대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안느 아가씨처럼 술이 좋아서 진탕 마시고 잠들었을 가능성도 배제는 못 해.=
잠깐 의견을 주고받던 여자들은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바라는 얼굴로 환인을 돌아봤다.
환인은 점차 어두워져 가는 분지와 작은 탁상지를 바라보다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이모렐, 영혼 상태로 소위와 함께 가서 집주인이 깨길 기다려라. 깬다면 정중히 방문 요청 의사를 전달하도록.”
「네, 성제님.」
천인체의 몸에서 빠져나온 이모렐은 환인에게 영기를 듬뿍 받고 소위와 함께 탁상지의 집으로 날아갔다.
찌륵찌륵—
밤이 찾아오자 분지 안의 탁상지는 더더욱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평화로운 풀벌레 소리에 간간이 들려오는 밤새의 울음소리, 무수한 반딧불이 날아다니며 빛을 뿌리고 그런 반딧불 빛에 물드는 벚나무와 희미한 안개구름.
작게 불을 피워 끓인 수프에 구운 주먹밥과 김밥으로 저녁을 해소한 일행은 주변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밤의 절경을 감상했다.
=굉장히 아름답긴 한데 저기서 살겠냐고 물으면…… 난 못 살 거 같아.=
=안느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걸 좋아하니까.=
=이슬이 넌 괜찮아?=
=주인님이 옆에 계신다면 얼마든지.=
=와, 이슬이 완전 여우 다됐네. 나도 도령이 옆에 있으면 살 수 있거든!=
=진짜?=
=도령이라면 종종 밖으로 데리고 나가줄 거 같으니까. 글고 동생들이랑 율이 언니도 있으니 따지고 보면 혼자도 아니잖아.=
=그런데 언니들. 저 집에 산다던 여자는 왜 저기서 혼자 사는 걸까요? 그러니까 제자라던가 후계자가 아니라 대현자 당사자라는 가정을 했을 때요.=
아영의 질문에 여자들은 잠시 생각하다 자기 생각을 들려주었다.
=이런 데서 사는 거라면 사람을 꺼리는 거니까 안 좋은 일을 겪었다거나 아니면 중범죄를 저질러 지명수배당했다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지명수배자 소식 중에 거대 골렘이나 저런 풍경을 만들 정도의 실력자는 없었으니까 사람이 싫어서 은거했단 설 쪽이 유력하겠네요.=
=저는…… 마음에 상처가 많아서, 혼자서밖에 살 수 없는 분이 아닐까 해요.=
=으응? 려강 아가씨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저렇게나 아름다운 장소를 만든다면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 이상한가요?=
백려강의 이야기에 여자들이 다시 몽환적인 분위기의 탁상지로 시선을 주었다.
어두운 밤 드문드문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비추는 달. 연한 은빛의 커튼이 흐를 때마다 반딧불이 사라졌다 나타나며 빛을 밝힌다.
그 풍경을 잠시 넋 놓고 감상하던 아영이 백려강을 돌아보며 웃었다.
=벨은 너무 소녀적인 감성이 강하다니까. 예술성이랑 인성은 비례하는 게 아닌데. 보르드작의 아가씨라는 명화 알아?=
=응. 무명의 작가가 피를 토해가며 그렸다는 인물화잖아? 약간 빛바랜듯한 적색감이 수많은 사람의 감성을 흔들었다고 알려지는 명화.=
=틀려. 어마어마한 미친놈이 산채로 여자의 심장을 뽑아낸 뒤 그 피에 물감을 녹여 그린 게 그 보르드작의 아가씨야.=
=……!=
백려강의 두 눈이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크게 떠졌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표정 변화에 여자들이 실소를 흘리고 환인도 이실리테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재능과 인성은 같을 수 없지. 끔찍한 인종차별주의자가 소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날 수 있고 계몽주의에 재능과 삶을 쏟아붓지만, 누구보다 선민사상을 피력하는 인간도 있으니까.”
=…….=
어른과 세상의 더러운 면을 알게 된 청순가련한 처녀처럼 시무룩해지는 백려강. 그런 그녀를 불러 옆에 앉힌 환인은 그녀의 옅은 물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탁상지로 시선을 돌렸다.
“…밭의 흔적은 있지만 일구지 않는지 족히 십수 년은 되어 보인다. 물길의 흔적 또한 있는 데다 긴 시간 손질받지 못한 과실나무도 있고 창고였지만 관리하지 않아서 무너졌다 삭아버린 터도 보이는군. 거기에 주체하지 못해 술을 마시다 거실에서 쓰러질 정도라면,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백려강의 이야기가 일부 맞을 수도 있겠지.”
=아, 저 잔디에 덮인 땅이 전부 논밭이야?=
=벚나무 말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과실수였나 보네요.=
=마음의 상처가 심해서 모든 걸 손 놓아버렸다면…… 같이 살던 연인이 죽고 사라졌다거나?=
=바깥으로 나갔다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혼자 돌아와서는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 거라면 너무 슬픈 이야기에요. 둘을 위한, 가족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가족은 사라지고 혼자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면…… 저 같으면 가슴 아파서 못 견뎠을 거예요…….=
제각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여자친구들의 이야기에 백려강도 상심을 잊고 용의 꼬리를 살살 흔들며 이야기에 끼어든다.
환인은 사이좋은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언을 위해 보내놨던 이모렐과 소위가 집을 빠져 나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
환인은 안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둘의 표정이 당혹과 난감함으로 버무려져 있었던데다 이쪽으로 날아오지 않고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중이었으니까.
이유는 금방 알게 되었다.
“이쒸밝!!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보자 새뀌들아아악!!”
얼핏 카페라떼 색처럼 보이는 로브의 소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째지는 괴성을 지른다.
펑, 퍼벙— 소녀의 손에서 시퍼런 불길이 포탄처럼 쏘아져 이모렐과 소위의 영혼을 향해 날아가고 피비비빙— 쏜살같은 소리와 함께 짙푸른 에너지탄 수십 발도 확산 유도탄처럼 쏟아진다.
이 소란에 환인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지고 여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외침…… 한국어 아니니?=
=어어, 나도 한국어로 들렸는데…….=
“다들 여기서 기다려라. 노른, 가자.”
환인은 폭음에 무슨 일인가 하고 자다 깬 노른을 신수화시킨 뒤 타고 날아올랐다.
일단 소위는 둘째치고 이모렐을 여기서 잃을 수 없다. 가시화 상태의 영혼이라 대부분의 공격에 면역이라지만 예외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니까.
쒸씻— 콰과광…!
직격 코스로 날아가는 집채만 한 푸른 불덩어리를 향해 개량 방벽 패널을 날려 터트린 환인은 소녀의 어그로가 자신에게 곧장 향하는 것을 느끼고 비상을 조종해 급히 선회 운동을 펼쳤다.
직후 자신과 노른의 비행 코스에 일렁이던 무색투명한 아지랑이가 곧 색을 입더니 푸른 화염으로 변해 허공을 집어삼킨다.
화르르르륵-!
계속 날았다면 제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형태가 되었을 위치 선정.
“넌 또 모야이쉿파알!”
퍼버벙, 콰과과광— 우르르릉, 꽈광!!
혀 꼬인 욕설과 함께 쏟아지는 온갖 속성의 공격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불덩어리는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지며 허공을 수놓고 이쪽의 궤적을 예측하듯 날아오는 얼음 칼날은 중간에 파열하며 산탄처럼 쏘아진다.
벼락도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지며 앞을 가로막고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가 척력과 인력을 만들어 비행을 방해하는 데다 바람 정령까지 덮쳐드는 상황.
그 모든 공격을 노른이 가속과 감속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가볍게 회피하는 사이 환연은 바람 정령에게 지배력을 발휘해 무력화시킨다.
“어쭈우, 다 피해애? 쒸이, 뒤졌다 너…… 어어?”
환인은 이제 익숙한 노른의 곡예비행 속에서 틈을 봐 발악하듯 술법을 쏟아내는 소녀를 향해 평온의 파동을 강하게 터트렸다.
1차로 회백색 빛의 파동이 자그마한 탁상지 상공에서 터져 나와 사방을 물들이고 2차로 황금색이 깃든 강화 평온의 파동이 다시금 분지 전체를 뒤덮는다.
쥐새끼처럼 자신의 공격을 전부 피하는 모습에 짜증과 울화가 가슴에 가득 찼던 소녀는 수인手印을 맺어 마력까지 끌어올려 아예 주변을 싹 날려버리려다 회백색과 황금색 파동에 휩쓸리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뜻밖의 정신적 충격에 움직임이 멈추고 몸 안의 위상력과 마력의 유동도 멈춘 모습.
환인도 비행을 멈추고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자신을 큰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에게 담담하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응. 으으, 머리 쪼개질 거 가테….”
대답하다 말고 얼굴을 찌푸린 소녀는 골치라는 듯이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휘청이듯 탁상지로 내려갔다.
멀리서도 술 냄새가 느껴질 만큼 취한 그 모습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던 환인은 조심스레 다가오는 소위를 회수하고 이모렐에게 여자친구들을 데려오라고 지시한 다음 탁상지로 향했다.
「으이야아악~!」
「끼요오옷!!」
「으딜가아아~!」
그러자 귀따가운 소리를 지르며 광풍처럼 몰려드는 중급 바람 정령들.
“…….”
소녀의 공격보다 이쪽이 더 짜증나고 성가셨던 환인은 그런 바람의 정령을 죄다 붙잡아 정령 구슬로 만들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여자친구들이 탁상지로 넘어오는데 이 정신 나간 바람 정령들이 난동을 부리면 위험하겠지.
강제력까지 발휘해 싹 다 포획해버린 환인은 그제야 탁상지의 풍취가 넘치는 고즈넉한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한옥인가.’
멀리서 봤을 때는 나무에 가려져 잘 안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잘 몰라서 어수룩하게 만든 한옥 느낌이 강하다.
라드세아의 여러 문화가 조금씩 섞인 짬뽕 한옥이 아니라 한국인이 애써 기억을 떠올려 만든듯한 한옥.
출입구는 없다. 툇마루를 통해서 오가는 건가.
노른의 등에서 내린 환인은 툇마루에 가까이 다가갔고 그와 함께 안쪽, 어둠에 잠긴 너머에서 소녀의 목소리…… 고딩 정도 느낌의 지치고 힘들어하는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올라와도 돼.”
“제 일행도 괜찮습니까.”
“응. 손님 같은 거 안 받는데 방금 공격한 거 사과하는 뜻에서 허락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아직 신수화 상태로 기다리는 노른에게 여자친구들을 여기로 데려오라고 부탁했다.
「알았어.」
부츠를 벗고 툇마루로 올라간 환인은 내부를 잠깐 살폈다.
바깥은 옛 한옥 느낌이었는데 안쪽은 현대식 한옥이었다. 장지문으로 방을 나누고 유리로 만든 창문을 쓰는 한옥 하우스.
이윽고 장지문 너머에서 눈 밑이 퀭한 10대 중후반의 소녀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장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스르륵, 반쯤 드러누운 모양새로 환인을 응시했다.
손님 접대 따위는 생각도 없다는 모습이지만, 환인도 그런걸 신경 쓰는 인간은 아니었기에 말없이 그녀를 응시한다.
한동안 시선이 오가다 소녀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몇 살이야?”
“넘어오기 전에는 스물여섯. 지금은 서른입니다.”
“난 열일곱. 넘어오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 몇 살인지 까먹었어. 한국인 맞지? 몇년도에 넘어왔어?”
“2023년입니다. 당신은?”
“16년.”
“…….”
“…….”
다시 대화가 끊기고 찌륵, 찌르륵, 귀뚜라미와 비슷한 풀벌레 소리가 툇마루를 통해 들려온다.
조용하고 고즈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환인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 아닌 소녀는 눈을 내리깔며 힘없이 물었다.
“메리아놀에서 온 거 아니지?”
“예. 메리아놀에 원한이 있나 보군요.”
“킥킥. 이 좆같은 세계에 넘어온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돼. 여길 진절머리나게 싫어하는 인간, 그리고 진절머리나게 사랑하는 인간. 참고로 난 전자야. 아저씨는…….”
=도령!=
=주인님!?=
=자기!=
다시 입을 열려던 소녀는 우르르, 여자들이 달려와 소리치는 모습에 입을 헤 벌렸다.
이 세상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몇 번 보지 못했을 정도의 미녀들. 그녀들을 바라보던 소녀가 비웃음과 어이없음이 반쯤 공존하는 얼굴로 환인에게 물었다.
“헐~ 아저씨는 여길 좋아하는 쪽의 인간이었나보네?”
“이 세계에 호불호는 없습니다.”
“그런 거 치고는 본격적으로 하렘을 차렸잖아. 루크랑에 플뢰에 뭐야, 정현족도 있고 저 여잔 용린족…은 아닌데? 안주머니에 정령도 있고—”
화아악—
「유르파. 나 옷 줘.」
“……녹색 그리핀인가 했는데 저건 무슨 종족이래?”
이래놓고 호불호가 없다고? 하듯이 손을 들어 보이는 몸짓에 환인은 뭐 문제라도 있냐는 시선으로 되돌려주었다.
“그래~ 아저씨가 어떻게 살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방금보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 환인은 명백히 한 단계 기분이 나빠진 여자의 심리 상태를 읽으며 살짝 곤란함을 느꼈다.
외모만큼이나 행동거지도 어리다. 원래 어리진 않았을 거다. 이 정나미 떨어지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성격이 괴팍해졌기 때문이겠지.
남의 기분을 맞추는 일은 사회생활을 하며 익숙하다.
소녀의 정체를 반쯤 확신한 환인은 찰나의 순간 할 말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세상에 호불호가 없다고 한 이유는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입니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이런 세계 따위, 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데만 집중했겠지요.”
“…….”
“강제로 끌려온 사람이 제정신이라면 불합리한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을 좋아할 리 없으니 말입니다.”
“……흥.”
눈앞의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심기가 한층 진정된 것을 느낀 환인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물었다.
“저희는 대현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찾는 중입니다.”
“어 그거 나야. 그래서?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 따위를 물으려고 온 거면 한참 잘못 짚었거든요?”
“그런 것 따위를 묻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이실리테, 숙취에 좋은 차를 부탁하지.”
=네? 네…….=
소녀는 눈앞의 남자에게 조금씩 말리는 느낌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쪽 세계에서 제법 여자를 갖고 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반반한 면상.
왠지 배알이 꼴린다. 생긴 것도, 여자들을 잔뜩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런 상황에도 담담하고 침착한 것도, 4년 만에 저게 뭔가 싶을 만큼 힘을 쌓은 것도!
나는, 이 세계에 넘어왔을 때는 진짜 죽도록 구르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그러는 사이 소중한 사람은 전부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전부 덧없이 사라졌는데…….
저 아저씬 뭔데 아우라까지 가지고 있어?
“질문이 있습니다.”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 그럼 이제 돌아가.”
괜한 마음에 사이비 종교쟁이를 대하듯이 손을 쉿쉿 내저은 소녀는 반대쪽 장의자 등받이로 돌아누워 버렸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애새끼 같은 반응에 여자들이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하지만, 환인은 별 반응 없이 주위를 잠깐 둘러본 뒤 구석에서 방석을 가져와 여자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자리에 앉는다.
‘뭔데 저 아저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힐끔 뒤돌아봤던 소녀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태연한 태도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까 자신이 문답무용으로 공격한 거에 지금 보여주는 띠꺼운 태도라면 화를 내던가 감정을 드러내는 게 정상이다.
짜증을 내거나 동료들을 동원해 자신을 억누르거나 겁박하려 들었다면 그걸 핑계 삼아 당장 대륙 반대편으로 날려버릴 생각이었는데, 다 찢어서 다시 모이는 데만 몇 년씩 걸리게 만들려 했는데.
‘왜 자기 집처럼 태평해?’
짜증 나.
소녀, 지하율은 저 남자 때문에 몇 명의 기억을 떠올리다 괜스레 눈물이 나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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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요즘 뱃살이 증식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읍니다...
건강때문이라도 운동을 해야하는데 시골에서는 할만한 운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