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88화 (688/813)

688 데바스톤 산맥

출발 전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환인 일행은 마저 정리를 끝마치고 망설임 없이 체블리프 마을을 떠났다.

목표는 체블리프와 산맥 도시 스프라울드 사이의 천암 산맥 어딘가.

마을을 나와 병풍처럼 늘어선 천암 산맥을 배경 삼아 마차를 몰던 이실리테가 입을 연다.

=왠지 마차 진동이 좀 부드러워진 거 같네.=

=마차 하부 프레임을 좀 더 보강해서 그럴 거야. 체블리프 목장 씨 실력이 대단하더라. 비자룩스에 이 마차를 만들어준 아저씨보다 더 뛰어난 거 같더라고.=

마차 지붕에서 성술 서적을 읽던 안느가 그 말에 대꾸하며 옷차림이 바뀐 그녀의 어깨너머 젖가슴으로 시선을 준다.

‘어쩐지 도령이 “안 되겠군.” 하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라니.’

약간의 요동을 따라 출렁출렁하는 어마어마한 모성애 주머니. 같은 여자가 봐도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아영이도 힐끔힐끔 계속 쳐다보는 수준.

누구보다 풍만한 모성의 증거지만, 환인은 자신들과 감상이 다르지 않을까.

=응. 확실히 진동도 줄었고 그 덕분에 쿠에들도 마차를 끌기 편해진 거 같아.=

=그런데 조금 곤란하네.=

=뭐가요?=

이실리테의 옆트임 가슴을 힐끔거리던 아영이 안느를 돌아본다.

=목장 씨하고 제자들이랑 마차를 수리하면서 데바스톤 산맥에 대해서 좀 물어봤거든. 산세가 너무 험해서 마차는 당연하고 말이나 기룡騎龍 같은 걸 타고 올라가는 것도 무리래. 쿠에를 타고 올라가거나 아니면 걸어서 이동해야 할 만큼 험하다는데…….=

여자들의 시선이 천암 산맥으로 향했다가 마차를 끄는 쿠에 세 마리로 옮겨간다.

일행은 노른과 환연을 빼도 여섯. 쿠에는 노른을 포함해 넷.

노른은 환인 말고는 등에 안 태우려 하니 다섯에 세 마리, 유르파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 해도 쿠에 한 마리가 부족하다.

=짐도 좀 있으니까 쿠에들이 아무리 튼튼해도 사람 싣고 짐까지 챙기는 건 힘들죠…….=

=음. 실루가 아성체까지 크면 타고 다닐 수 있을텐데.=

=지금 실루도 아성체까지 크면 주인님만 태우려 들 거 같지 않아?=

=아냐. 보니까 쿠라한테 배우는 것도 있고 도령이 실루한테 엄하게 가르치더라. 노른이는 비상일 적에 너무 오냐오냐한 것도 있고 우두머리 출신이라 자존심이 강한 것도 있어서 교정은 못 했지만, 실루는 그렇게 안 키울 건가 봐.=

둘의 이야기에 아영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인다.

=이제 불을 뿜을 수 있게 됐으니까 다음 성장은 아성체일 거 같은데 만약 아성체가 되는 거도 지금까지 걸린 시간만큼 든다고 하면 적어도 반년 뒤네요. 역시 저만이라도 빨리 돌아가서 쿠에 하나 사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주인님께 생각이 있으실 테니까 일단 기다려보자. 아니면 안느가 걸어도 되고. 그런데 천암 산맥을 여기서는 데바스톤이라고 불러?=

=어? 응. 하늘에서 천인이 내려와 플라비우스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이 남아서 데바스톤이라더라.=

이실리테의 질문에 대답해준 안느는 자신하고 눈이 마주친 아영의 플뢰족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슬랜더한 몸매를 구경하며 약간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몇 달만에 도령이랑 완전 안심 섹스한 기분이 어땠어? 보니까 거의 밤새도록 안겼던 거 같은데.=

=읏, 엑 아니. 그게요……?=

=온전히 널 위해서 일부러 시간 만들어준 거다 너?=

실실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그 내용은 배려로 충만했다.

아영은 그걸 가감 없이 피부로 느꼈다. 어쩐지 자정도 안 지나서 오빠가 찾아왔더라니, 언니들이 날 위해서 시간을 빼준 거였구나…….

=……그야 뿅 가서 기절할 만큼 좋았죠. 그런데 언니들, 오빠 거 너무 크지 않아요? 오빠가 약초액으로 먼저 어루만져주었는데도 받아들이는데 힘들고…… 오랜만에 보니까 어째서인지 더 커 보여서 완전 식겁했거든요. 윤활액을 안에 직접 한 움큼 짜 넣었는데도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진짜.=

어젯밤에 있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상세한 경험을 들려주니 이실리테의 귀가 쫑긋하고 안느도 ‘대박.’하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하다 보면 좀 풀려서 괜찮지 않아?=

=어어 안 그래요. 진짜 끝까지, 더 들어오면 찢어질 것 같은 곳까지 깊게 들어왔는데도 2/3이나 남던데요!=

아영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이야기에 안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그건 깊이 한계라서 어쩔 수 없겠네. 도령 물건은 진짜 흉기니까……. 속이 좁은 건 여러 번 하면 늘어나면서 도령 거기에 딱 맞춰질 테니 시간이 답이야. 그러고 보니 귀속 인장은? 어떻게 됐어?=

=오빠가 유르파 언니한테 말해서 지워줬어요. 보세요. 베에…….=

혀를 있는 대로 내밀어 아무 문양도 없는 매끈한 분홍색 혀뿌리를 보여주는 아영. 안느가 그걸 보고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그렇게 육체에 밀접하게 관여하는 비술 문양은 수목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엥? 안느 언니님은 아랫배에 자궁 문신 새겼잖아요.=

=상시 발동형이 아니라서 도령하고 할 때만 켜니까 괜찮아.=

허리띠를 풀어 하얀 아랫배를 보여주는 안느. 기묘한 황금빛 문양이 매끄러운 피부에 반짝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와, 나도 유르파 언니한테 새겨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따라 나아가던 일행.

노을이 지는 시간에 야영지를 확보하고 주변 땅을 정리하고 있을 때 탈것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왔다.

“지나가는 길에 노른을 타고 잠깐 날아가서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만.”

=엥?=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노른을 옆으로 돌려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고봉과 그 주변에 어지럽게 난립한 하얀 모자를 쓴 봉우리 산맥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도 축적을 고려해도 거리는 대략 150km 정도. 노른을 타고 조금 재촉하면 왕복에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저렇게 험준한 산악 지형에 일부러 모두를 데리고 갈 필요는 없지.”

=연이를 데리고 가면 멀리서도 대강은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대현자가 있다면 그때 돌아와서 다시 다 함께 가면 되겠네.=

“예. 그때도 모두 함께 갈 필요는 없습니다. 소수로 빠르게 주파하면 하루이틀로 충분할 테니까요.”

=…….=

=…….=

마냥 다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들은 아쉬움과 조바심을 느꼈다.

그녀들이라고 왜 모를까. 환인이 걸어가는 길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인생과 전혀 다르다.

한걸음 한걸음에 세상의 분란과 분쟁과 신비와 기이가 조금씩 스며드는 여행길.

이번에 대현자를 만나는 과정에 또 괴이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비록 그에게 도움은 별로 되지 못하더라도 곁을 지키고 싶은 것이 그녀들의 솔직한 마음이었던 것.

「응?」

그때 땅의 중급 정령을 시켜 안식처를 불러낼 땅을 다지던 환연이 해가 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문에 찬 소릴 냈다.

언제나 명확한 상황 설명 아니면 아예 언급을 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인 환연의 반응에 여자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그녀를 돌아본다.

「무리에서 떨어진 쿠에인가……? 환인, 저쪽에 쿠에 한 마리가 마수한테 쫓기고 있어.」

=어디야?=

=어느 쪽인데?=

안느와 아영이 동시에 나서며 묻자 환연은 말없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주인님,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그래.”

그녀들의 속내를 짚은 환인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기사검을 꺼낸 이실리테가 F1 머신 버금가는 속도로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앗, 늦었다. 아영아 너도 따라가. 혹시 성술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

=옙! 오빠, 다녀올게요!=

성투술을 끌어올린 아영도 쏜살같이 뛰어나가고, 혹시 몰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남은 안느가 환연을 돌아보며 묻는다.

=그런데 웬 쿠에야?=

「나도 몰라. 정령이 시야 감시 범위에 뭐가 들어왔다고 알려줘서 봤더니 쿠에가 도망치는 게 보였던 거니까.」

=제가 한 번 볼게요.=

바람술로 몸을 띄운 백려강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거의 200m 가까이 상승했던 백려강이 잠시 머물다 내려와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해주었다.

=회색 쿠에가 2~3급 정도 되어 보이는 늑대 계통 마수 다섯 마리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이실 언니랑 아영을 보자마자 그쪽으로 방향을 꺾은 걸 보면 사람 손을 탄 쿠에 같아요.=

=엥. 회색 쿠에? 그런 게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니?=

=근처에서 귀족 마차가 습격당한 거 아냐?=

회색 쿠에는 가장 흔한 밀짚색 다음다음, 주황색보다 높은 등급으로 충성심도 남다르고 밀짚색 쿠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용맹도 뛰어나기에 라드세아나 메리아놀에서 기사단의 기승용으로 주목받는 고가의 쿠에다.

밀짚색 - 주황색 - 회색 - 검은색 - 노을색 - 초록색으로 희귀하다지만 검은색부터는 개방형 미궁에서만 발견되기에 실질적으로 상용화가 된 것은 밀짚색끼리 교배해서 태어나는 회색 쿠에까지.

그런 회색 쿠에는 교육에 따라 그 가치가 금화 40닢을 호가한다.

안느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색 쿠에는 충성심이 뛰어나서 주인이 살아있거나 주인이 죽어도 일행이 있으면 안 도망치는데…… 몰살당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것도 좀 이상해. 벨, 그 회색 쿠에 혹시 안장하고 있었어?=

=죄송해요.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였어요….=

=아냐. 그럴 만도 하지. 보통 유색 쿠에는 깃털 색에 맞춰 안장 색도 색깔 맞춤하는 편이니까. 으음, 야생 쿠에 무리에서 탈락한 거려나. 그런 거면 좋겠는데.=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15분 정도 뒤, 환인이 방랑자의 안식처까지 설치했을 때 회색 쿠에의 등에 탄 이실리테와 아영이 돌아왔다.

쿠엑!

사람을 만난 게 기쁜지 힘차게 우는 회색 쿠에는 밀짚색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쿠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수준이었다. 머리 높이만 두고 보면 신수인 노른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험한 고생을 많이 했는지 회색 깃털은 윤이 다 빠져 푸석푸석한 데다 헝클어졌고 부리에도, 다리에도 상처가 제법 나 있었다.

이실리테가 회색 쿠에의 부리를 어루만져주며 환인에게 보고했다.

=그다지 잘 먹지 못했는지 비쩍 골아서 갈비뼈가 만져질 정도예요. 그래도 저랑 아영을 태우고도 잘 달릴 정도로 강골에 뼈도 튼튼해서 잘 먹이고 푹 쉬게 하면 바로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상처는 없었나.”

=옙.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벼운 치유하고 질병, 독 해제 성술을 걸어줬슴다.=

백려강은 무척 허기져 보이는 회색 쿠에를 보곤 환인에게 허락받아 다른 쿠에들의 먹이인 과일과 채소를 약간 꺼내 먹이기 시작했다.

회색 쿠에가 정신없이 과즙이 많은 과일을 뜯어 먹는 사이에 옆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안느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썹 끝을 살짝 늘어트렸다.

=역시 주인이 있는 쿠에였네. 사고로 주인과 일행을 모두 잃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아서 주변을 돌아다녔나 보다.=

회색 쿠에의 목 깃털 안쪽을 더듬다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광택의 금속 명판이 들려있었다.

이게 있다는 건 주인이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원래는 소유주의 뜻이 아니면 풀 수 없는 물건이다.

보유자의 귀속 보증이 유지되고 있는지 푸른빛의 광택이 도는 명판에 유르파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안느 아가씨, 그거 부순 거니?=

=아니. 충격이 있었는지 손대니까 이음매가 저절로 부서졌어.=

그녀가 손을 들어 검은색 사슬 줄의 중간 부분이 부자연스럽게 파열된 것을 보여준다.

유르파는 그걸 살짝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다 일행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다들 신분증부터 확인해봐. 명판의 위상력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마도구의 파손으로 범죄 기록이 새겨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각자 신분증을 꺼내 확인했지만, 범죄자를 뜻하는 붉은 빛은 누구의 신분증에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뜻.

=다행이네.=

그리 말한 유르파는 환인의 손에서 금속명패를 건네받아 마도구 봉인을 걸었다.

이미 목걸이 줄이 파손되어 마도구 기능이 불안정해진 상황이다. 언제 오류를 일으켜서 주변에 범법자 파장을 뿌려버릴지 모른다.

아영이 그걸 불안하다는 눈으로 보며 물었다.

=유르파 언니, 그거 그렇게 해도 돼요? 위증죄가 더해질 수 있는데.=

=이쪽에는 성제님이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냥 이거 보여주면서 사실대로 말해주고 인계하면 그만이야. 그래도 불안하면 명판을 이대로 파기한 다음에 회색 쿠에를 우리가 가져도 되고. 자기?=

“귀속 명패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범식이지만 그래서 강력한 수준의 술법이 걸려있지. 여기에 보면 발행처가 스프라울드 행정관으로 명시되어있으니 그곳에 인계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거다. 저 녀석은 그때까지 잠시 데리고 다닌다.”

하긴…….

일반인이나 모험가들이야 신분증이 범죄자를 뜻하는 적색이 되면 오인이나 오해라 해도 해제에 엄청나게 고생하지만, 오빠 정도 되는 사람은 도시 위병소에서 가볍게 한두 마디만 해도 그 자리에서 해제 절차에 들어갈 거다.

이실리테와 안느, 아영은 1단계 계획이 뜻밖의 장소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쿠, 켁?! 쿠엑!

「너 건방져!」

켁!

안식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옅은 안개가 낀 밖으로 나온 환인은 노른이 신수 형태로 어제 데려온 회색 쿠에를 걷어차고 밟고 몸통 박치기를 먹이며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했다.

머리 높이야 비슷하지만, 몸길이로 보면 1.5배 가까이 차이난다.

그런 노른이 몸에 위상력을 감고 몸통 박치기를 하니 날개를 파닥거리며 애써 저항하던 회색 쿠에가 차에 치인 고라니처럼 꾸엑! 비명을 토해내면서 나동그라졌다.

환인은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회색 쿠에를 사자 같은 녹색 앞발로 짓누르는 노른을 잠시 바라보다 불렀다.

“노른.”

「환인! 이거 무지 건방져!」

“무슨 일 있었나.”

「이게 마구간에서 쿠르티랑 쿠핀하고 쿠라를 찍어누르고 자기가 대장인 양 행세하고 있었어!」

쿠, 쿠에엑…….

노른에게 등이 밟혀 일어서지도 못하는 회색 쿠에가 환인을 향해 힘없이 운다.

바깥의 소란에 무슨 일인가 하고 임시 흙벽 마구간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쿠에들을 본 환인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쿠에는 서열 동물이고 쿠르티는 밀짚색이니 그 녀석이 보기에는 그게 당연한 일이지. 잘못이라면 미리 서열을 주지시켜놓지 않은 네 잘못이다.”

「……그런 거야?」

“쿠르티는 네 양부모고 쿠핀과 쿠라는 실루의 친부모다. 회색 쿠에는 사회 관계성과 미래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는 지능을 지녔으니 네가 경고만 해주었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

노른이 슬그머니 앞발을 치우자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회색 쿠에. 후들거리는데다 눈빛도 혼탁한 걸 보면 혼이 달아난 듯한 모양새다.

삐!

푸확—!

근처에서 그걸 지켜보던 실루가 앙증맞은 날개를 활짝 펴며 제법 커다란 불길을 확 뿜어내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회색 쿠에.

자기 반의반도 안 되는 실루를 보곤 완전히 주눅이 들어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낮춘다.

아침 훈련을 위해 언니 동생들과 나오던 안느가 그 장면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깨끗하게 씻겼던 회색 쿠에는 흙먼지투성이가 되어 후들거리고 있고 노른은 신수 형태가 되어 조금 뚱한 기운을 풍긴다. 실루는 어째 신난 것처럼 삐삐거리며 불의 숨결을 연이어 토해내는 중.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야?=

「안느. 이 애 치료해줘.」

=……때렸어? 왜?=

의아해하며 회색 쿠에에게 성술을 걸어준 안느가 이유를 듣곤 깔깔 웃으며 노른의 날갯죽지를 탁탁 때렸다.

=그건 네가 잘못했네! 쿠에들의 대장은 너니까 서열은 네가 정해줬어야지.=

「너랑 안느는 따로 서열 안정했잖아. 아영하고 백려강도 환인이 서열 안정해줘도 알아서 막내가 됐고.」

=……야. 평범한 쿠에랑 사람을 비교하는 게 어딨냐!=

「흠. 아무튼 너 따라와.」

쿠, 쿠엑…….

성큼성큼 앞서가는 노른을 뒤따르는 회색 쿠에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머뭇거리며 이실리테와 아영을 돌아본다.

그건 명백한 도움 요청의 눈빛이었지만, 둘은 작게 웃으며 다녀오란 듯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시 후 한창 아침 훈련 도중에 돌아온 노른은 사람 형태가 되어있었고 회색 쿠에는 조금 침울해져 있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잘 해결했나.”

「응. 저게 제일 막내야. 싫다고 반항하길래 좀 더 혼내줬어. 그러니까 막내 하겠다고 했어.」

그야 그렇겠지. 조금 전에 집 뒤편에서 섬뜩한 칼날 폭풍이 한차례 하늘로 치솟았으니까.

그렇게 자그마한 소동을 뒤로하고 아침 훈련을 끝마친 안느는 흥건한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지하굴 미궁에서 한차례 변화한 천칭을 살피는 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인가? 지금 말해?

유르파와 이실리테, 아영, 백려강과 눈을 맞춘 안느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후우우. 도령, 있잖아. 어젯밤에 모두랑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역시 도령 혼자 보내는 건 좀 그렇다는 이야기가 됐거든?=

메리아놀에서 소식이 없는지 영도와 통신할 때 이야기를 나눈 건가. 환인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윗가슴골을 바라보다 물었다.

“날 혼자 보내는 건 걱정이라는 거군.”

=도령의 무위야 의심할 나위 없지만, 팔라툼에서부터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잖아. 대현자도 인세를 초월한 지식을 지녔다고 하니까 길을 알아본다고 해도 혼자 보내는 건 우려스럽다는 게 우리 생각이야.=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건가.”

=응.=

그녀의 조리 있는 의견에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친구 전원의 뜻이라면 거부할 수 없다. 중요한 안건도 아니고 단지 시간을 좀 아껴볼까 하는 마음에 세웠던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면 짐을 다시 조율할 필요가 있겠군. 마차와 무거운 짐은 아스펜드에 전부 수납하고 각자 짐을 나눠 싣도록 하지.”

마침 운 좋게 회색 쿠에 한 마리도 생겼으니 유르파가 비행 빗자루를 타면 인원도 깔끔하게 맞아떨어진다.

그의 허락에 여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짐을 재분배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인은 그런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다 잔디밭에 배를 깔고 앉아 편히 쉬는 회색 쿠에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자친구들이 따라오겠다고 나선 건 저게 왔기 때문이겠지.

‘같이 간다면 심심하지는 않겠군.’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출발준비를 하는 사이 노른을 타고 선행 정찰을 나섰다.

쿠에의 가장 큰 장점은 산과 평지를 가리지 않고 길이 없어도 요리조리 재주 좋게 나아간다는 점이다.

마차를 넣으면 기동성이 대폭 상승할 테니 곧장 산을 타고 넘어 가장 가까운 표식 지점을 찾아가는 게 시간을 단축하는 지름길. 그렇다해도 절벽이나 넓은 강, 절벽을 건너는 것은 어려우니 최대한 이동 경로를 잡아야 한다.

노른을 타고 까마득히 높은 창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환인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현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파편인을 녹이는 속도도 제법 빨라져 이제 절반가량 남았다. 이 속도대로라면 앞으로 한 달 정도면 거의 다 녹일 수 있겠지.

“…….”

그렇다 해도 파편인에 대해 정보는 필요하다.

대성녀와 대화를 나누며 대충 이유는 추측해냈지만 확신이 필요하고, 이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으니 그에 대한 확실한 예방법도 필요하니까.

‘무엇보다…….’

천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아드네빌라나 닌실은 그곳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하니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어주겠지.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음... 저는 마냥 머릿속에 든 이미지를 꽤 고퀄리티로 독자님들한테 보여줄 수 있어서 AI그림이 나왔을때 환호했습니당

글쟁이가 좀 커뮤니케이션이 약해 사람 상대하는게 스트레스였기도 했고 매번 일러를 뽑자니 그 가격도 부담스러웠고요 @[email protected];;

안느 표지 일러 한 장에 xxx만원이었으니까...

아무튼 삽화때문에 완결로 연재 종료한 다음 그림하고 포샵을 본격적으로 배워볼까했던지라 그래서 AI를 열심히 했는데

우연히 접한 글을 보고 어? 싶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검색해보니까 은근히 AI 그림에 대해서 부정적인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즉!!

AI 그림에 대해서 독자님들의 호불호 의견을 댓으로 살짝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이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풍경이나 미궁 내 분위기 같은건 앞으로도 AI로 뽑아볼 생각입니다.

특정 장면의 경우에도 AI로 계속 뽑을 생각이고요.

다만 독자님들의 의견이 부정적으로 치우치면 삽화 넣는 빈도를 줄이는 걸 고려해보겠습니다.

늘 미궁기담을 사랑해주시고 구독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당!!

꾸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