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 산 옆 마을 체블리프
* * * *
=부인. 이제 출발할까요.=
=네…….=
=……딸은, 안실라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아이의 곁에는 우리 대신 세계수만큼이나 굳건하고 믿음직스러운 반려자가 있을 테니까.=
=사위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더 못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그것이 땅신님께서 그 아이에게 내린 운명입니다. 설령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곳에서 친구들과, 동생들과,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갈 테니…… 미소로 이별을 받아들입시다.=
* * * *
=……나, …영아! 아영! 일어나!=
=응헥?!=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는 느낌에 화들짝 몸을 일으킨 아영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깨운 사람을 쳐다보았다.
=……안느 언니님?=
=응, 나야. 자 앞 가리고 들어가서 옷 입어.=
=네? ……앟읏!=
따스한 햇볕 아래 젖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단 걸 한발 늦게 알아차린 아영은 황급히 덮고 있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어, 뭐지? 으응??
주위를 둘러본다. 여긴 거실이다. 주방에는 이실리테 언니와 벨이 아침을 만드는 중이고 노른과 실루는 발치에서 ‘왜 여기서 자고 있어?’하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중.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었지?
=얘가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네. 빨리 정신 차리자?=
=우풉.=
안느에게 양 뺨을 격하게 주물러진 아영은 겨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감각 과민증으로 혈류를 기억하던 중 환인에게 덮쳐진 것.
엄청난 공세에 체력 회복의 성술을 네 번이나 펼친 것.
새벽이 찾아올 무렵에 결국 기절해버린 것.
기억이 떠오르니 신경이 절로 몸으로 쏠린다. 그리고 그제야 질이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야 그렇겠지. 족히 6시간은 오빠한테 깔려있었으니까!
인식하고 나자 자궁이 묵직하다는 게 느껴진다. 이유가 뭘까?
‘……꺄아악!’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쓴 아영은 유령 같은 모습으로 허우적거리면서 이부자리를 그러모아 방으로 도망쳤다.
그걸 실실 웃으며 구경하던 안느는 주방에 서 있는 이실리테와 백려강을 향해 브이를 그렸다.
=어때? 내 계획대로 됐지?=
=그러게. 이걸로 아영도 주인님의 하렘에 정식으로 편입되었겠네.=
=후후 안느 언니 정말 훌륭한 모사였어요.=
그녀들의 칭찬에 안느가 개구쟁이처럼 히히 웃었다.
=아빠가 몽들랑 에드브리즈를 꺼낼 때 딱 느낌이 왔었거든. 그건 한 잔만 마셔도 기분이 막 불끈불끈해지는데 도령은 반병이나 마셨잖아.=
무슨 말인가 하면 어젯밤 이실리테가 겨우 두 번만 환인의 성욕을 받아주고 안느, 백려강이 각각 한 번씩만 받아준 건 모두 안느의 계획이었다는 뜻.
=도령이라면 알아서 했겠지만, 그래도 밤에 혼자 안기는 거하고 이동 중에 밀린 일을 해치우는 것처럼 하는 건 다르니까.=
=맞아요. 오늘내일 중으로 체블리프를 떠날 텐데 그때부터는 산을 타야 하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험준한 산맥에 방랑자의 안식처를 설치할만한 곳이 많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환연이 땅 정령으로 땅을 다지면 되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오붓하고 아늑한 시간을 가질 기회가 줄어든다는 뜻. 그러니까 거사를 치르려면 어젯밤밖에 기회가 없었다.
아침 식사 준비를 다 마친 이실리테가 깨끗한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안느에게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영이 수목화를 해도 괜찮아?=
=응. 아영이가 만들 순수화는 약으로 지으면 되니까.=
=다행이네. 넌 순혈 왕족이라서 정수도 서민들보다 좋을 테니 주인님한테도 더 잘맞겠지.=
=엄마 말로는 별 차이 없다는 거 같지만…… 그 말을 들으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묘한데……. 잠깐, 너 내가 먹을 채소를 이상하게 깐깐하게 고른다 했더니 설마……?=
=응. 젖소도 좋은 풀을 먹어야 맛있는 우유를 만드니까.=
그러니까 난 도령의 젖소라서 좋은걸 먹였다는 건가…….
안느가 복잡한 심경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실루를 안고 아침 식사를 기다리던 노른이 그녀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안느. 아영도 환인이랑 잤어?」
=맞아. 왜, 노른이 너도 관심 있어?=
「모르겠어. 하면 뭐가 좋아?」
아저씨처럼 웃으며 물었던 안느는 예상 밖의 질문이 돌아와 잠깐 얼을 탔다.
뭐가 좋냐고? 어, 기분 좋다는 건 좀…… 설명으로 부적절한 거 같은데. 교감? 사랑?
「몰라?」
=으음. 조금 복잡한 거라서 간단하게 설명이 어려워.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게 돼서 서로를 향한 마음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데…….=
「사랑은 뭐야?」
=사, 사랑? 그건…….=
난감한 질문의 연속에 안느는 백려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머슴 쪽으로 기울어진 자신보다 소녀소녀한 영애 출신의 백려강이 더 설명을 잘하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사랑은 자기 헌신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상대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며 그런 상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웅…… 백려강은 환인을 보면 행복해?」
=네.=
망설임 없이 화사한 미소로 대답하자 그 미소를 목격한 노른도 뭔지 모르겠지만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의 표정은 행복에 물들어있었던 거다.
노른이 생각에 잠기고 안느가 백려강에게 잘했다며 엄지를 척 세우고 있을 때, 그라파든 부부를 아침 식사에 초대하러 갔던 환인이 손에 편지 한 장만 가지고 되돌아왔다.
=어? 도령 왜 혼자 와?=
“…….”
드물게 조금 씁쓰레한 표정의 그에게 편지를 건네받은 안느는 내용을 읽고 눈썹을 일자로 한 번 만들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무슨 일인데? 하고 묻는 이실리테에게 편지를 넘겨주는 안느.
환인은 조금 실망은 했지만 상심하지 않은 그녀의 표정에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별로 상심하지 않은 거 같군.”
=설마 수기로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날 줄 몰랐지만…… 독립한 아이를 대하는 어른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니까. 그리고 도령도 느꼈지? 우리 부모님의 범상치 않은 성격.=
“…….”
=눈에 밟히던 딸의 번듯한 남편감도 봤고 친구 하나 없던 딸내미한테 친구하고 언니 동생도 생긴 걸 확인했겠다, 부모님으로서는 뭐 여한이 없으셨을 거야. 인연에 질질 끄는 성격도 아닌 데다 술잔까지 나눴으니 홀가분하게 떠나신 거겠지.=
환인은 턱을 괸 채 한숨짓듯 말하는 그녀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얌전히 그 쓰다듬을 받던 안느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눈부신 은발이 차르륵 흘러내리며 그녀의 옆얼굴을 가린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제 두 번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는데…… 마지막으로 인사하지 못한 거뿐이려나.=
부모님은 이제 집이고 국가고 상관없이 니오네브레스를 유람하며 살아가시겠지. 통신 수정구 일련번호 같은 것도 남기지 않았을 테니 연락할 방도도 없을 거다.
사실상 인연이 끊어진 것과 다를 바 없다.
=…….=
=어, 언니…… 울지 마세요. 이실 언니랑 저희가 있잖아요…….=
이실리테가 조금 안쓰러워하고 백려강이 안타까워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자마자 안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다.
=응? 안 우는데?=
그 멀쩡한 얼굴에 되려 백려강이 당황해서 입을 살짝 벌리니 안느가 아하하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부모님 연세가 좀 있으시거든. 겉보기엔 젊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님의 정원으로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정도야. 조금 일찍 사별했다고 여기지 뭐.=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한 안느는 거실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행 중 백려강을 제외하면 모두 부모님이 안 계신다.
그런 백려강마저 모친은 일찍 돌아가셨고 부친만 남아있는 데다가 집안과 인연이 단절된 것과 마찬가지. 자신이 상심을 드러내기에는 그녀들에게 면목이 없다.
안느는 창밖의 따사로운 아침 햇살 너머로 부모님의 모습을 그리며 속으로 작별인사를 남겼다.
‘아빠 엄마. 절 낳아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살짝 초췌해진 아영과 늦잠 잔 유르파까지 불러 아침 식사를 마친 환인은 이실리테, 안느, 노른을 대동해 체블리프 마을을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쌓인 영혼은 없군요. 오염되고 타락한 혼도 보이지 않고 기운이 묵힌 곳도 많이 없습니다.”
=그, 많이 없으시다는 말씀은…….=
“저곳과 저곳, 그리고 저곳은 지리학적으로 음기가 쉽게 쌓이는 장소입니다. 주변을 넓혀 땅이 햇살을 고루 받게 한다면 부정한 기운이 쉽게 쌓이지 않을 것입니다.”
건물에 둘러싸여 1년 내내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뒷골목. 항시 습기가 차 있어 미끈거리는 이끼에 정체 모를 버섯까지 자라는 곳을 가리키자 유르나하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환인이 지목한 곳을 기록해나간다.
승령천제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배회하는 영혼은 말 그대로 자의식도 없어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채 바람 따라 흔들리는 영혼들뿐.
살해당하거나 한이 남은 게 아니라 노쇠하여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의 영혼들이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성불할 것이기에 환인은 딱히 손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800여 명 정도가 사는 마을을 전부 둘러보았을 때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의 숫자는 700명에 가까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방랑 영혼사의 성불행이라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왔다가 영혼사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생업도 팽개치고 따라다닌 사람들.
전부 혹시라도 성제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따라다닌 사람들이다.
=도령의 아우라가 감춰져 있을 때는 인파를 제어하는 게 문제였는데 이제는 알아서 거리를 두고 쫓아오니 편하네.=
=응. 주인님의 눈에 벗어날까 봐 사람들을 밀치거나 끼어드는 염치 없는 사람도 없었고.=
“…….”
환인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의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을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수백 명이 단 한 명을 위해 무릎을 꿇는 장관.
평판과 명성의 관리를 위해 그들에게 평온의 파동을 펼쳐준 환인은 감격하고 감동해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동장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안 계시니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마을도 한차례 둘러봤으니 땅의 최상급 정령이 알려준 장소를 조사하러 출발해야겠지.
안식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운의복으로 갈아입은 백려강이 살포시 미소지은 얼굴로 다가와 방긋 웃는다.
=오라버니, 다녀오셨어요?=
“그래. 출발 준비는 끝났나 보군.”
짐이 사라져 조금 휑해진 거실을 둘러보며 묻자 백려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차에 전부 실었어요. 그리고 유리 언니도 지하굴 미궁에서 획득한 마도기 감정이랑 개조가 끝나셨다고 해요.=
지하굴 미궁에서 중핵을 잡고 얻은 옷가지의 감정은 그렇다 쳐도 방벽의 개조가 벌써 끝났다는 건가.
똑똑, 유르파의 방문에 노크하자 달칵 문이 열리며 자홍접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매혹적인 차림의 아영이 나왔다.
=오. 벌써 다녀오셨슴까?=
“그래. 마도기 개조가 끝났다고 들었는데.”
제비꽃 색 소매를 팔에 걸고 있지 않아 얼핏 봐선 알몸 에이프런처럼 보여 야하기 그지없는 자태.
환인의 노골적인 시선에 어색하게 미소지은 아영이 안에다 대고 말했다.
=유르파 언니. 오빠 오셨슴다.=
=으앗, 벌써 왔니? 방 정리 아직 다 못했는데!=
=정리는 제가 할게요. 오빠한테 가보세요.=
=아냐아냐. 돌아와서 같이 하기로 하자.=
후다닥 달리는 소리와 무언가를 챙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콩-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꺅하고 유르파가 작게 비명 지르는 소리도 연달아 들려온다.
잠시 후 옷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절뚝거리면서 나타난 유르파가 아하하 웃었다.
=새끼발가락을 가구 모서리에 찍어버렸네.=
“빨갛게 부었군요. 아영, 와서 치유를…….”
=으응. 놔두면 괜찮아지니까.=
그리 말하며 환인의 등을 밀어서 거실로 나간 유르파는 차를 내리던 이실리테와 노른하고 놀어주던 안느도 소파에 앉힌 뒤 모두의 앞에서 옷상자를 열고 한 벌의 옷을 꺼내 들었다.
매우 얇은 시스루 소재의 하얀 롱재킷에 토가 느낌이 나는 하얀 바탕의 겉옷, 그리고 검은색 비단 재질의 바지.
=자기랑 아가씨들이 지하굴에서 중핵을 해치우고 얻은 아이템이야.=
“제가 그때 본 것과 조금 다르군요. 검은색 비단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거 말이지?=
유르파가 살짝 옷을 털자 하얀 시스루 소재의 겉옷과 롱재킷이 순식간에 까만색으로 변해버린다.
=어! 뭐야? 위상력감응 실?=
=응. 기능은 별거 없어. 위상력을 흘려 넣으면 그 양에 따라 색이 변해. 흰색-회색-검은색으로. 내구성도 조금 늘어나고 위상력으로 자체 수복도 되고.=
“그렇군요. 그 옷은 예식 자리에 구애받지 않을 듯하니 이실리테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그녀에게 잘 어울릴듯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안느는 등대의 빛이 갑옷이자 제복이나 다름없어 팔라툼의 천공성에도 부담 없이 입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영은 자홍접에 시스루 망토를 두르면 매혹적이기도 하고 우아하기도 해 어디에서 입어도 무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백려강의 운의복 또한 예스러운 느낌이라 약간의 장신구와 겉옷만 걸치면 격식 높은 자리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
환인의 천릉은 두말할 나위 없고 유르파도 격조 높은 로브 드레스가 있는데 이실리테만 비키니 아머에 가까운 천상의 장막뿐이다.
갑주를 입고 들어가기 어려운 곳에서는 입을만한 옷이 없는 것.
=그러네. 겉옷의 수실 무늬색하고 목깃의 장식도 이슬이 머리카락 색하고 잘 어울려 보이고.=
안느의 평가에 다른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봐도 저 옷은 이실리테를 위해 만들어진 거로 보였던 것.
=결정 났네, 이슬이 아가씨, 이거 가지고 가서 입고 나와보렴.=
=하지만…… 저한테 어울릴지…….=
조금 숫기 없어 보이는 행동에 환인은 그녀의 손에 옷을 들려주고 그녀의 귀에 마법의 문장을 속삭였다.
“이실리테, 네가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
=~~.=
환인이 보고 싶다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이실리테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옷을 들고 바로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사라지고 유르파가 꺼낸 것은 이전과 별반 바뀐 게 없는 마도기-방벽이었다.
=방벽의 위상석을 교체하면서 회로를 확장하고 출력을 더 높였어. 일시적이라면 이슬이 아가씨의 다중 검기를 모방할 정도라고 장담할 정도야.=
“다중 검기 모방이라니, 기대되는군요.”
그래서 개조가 금방 끝난 건가. 유르파가 채워주기 쉽게 팔을 내밀어주는 그의 귀에 안느와 아영, 백려강의 속삭임이 오간다.
=오빠 패널 조작 실력에 이실리테 언니의 다중 검기가 주어지면 그건 진짜 사기 아니에요…?=
그의 영혼술이 무섭게 성장하며 방벽은 금방 빛이 바랬지만, 그래도 그가 이따금 선보이던 패널 조작의 정밀도와 속도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실리테가 쓰던 다중 검기를 더하면…….
=…와,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이실 언니의 다중 검기가 무서운 건 맞지만 그래도… 저는 오라버니의 영혼술이 수십 배는 더 무서워요.=
=아니아니 분류가 다르잖아. 영혼술은 전략급 술법 느낌이고 도령이 다중 검기를 쓰는 건…… 살육 병기? 인간 백정?=
=프흡. 성제가 인간 백정…… 프히힉.=
=……야. 웃지 마. 전직 암살자인 아영이 네가 그렇게 웃으니까 좀 소름 끼쳐.=
=엑. 언니님 너무 하심다.=
여동생들의 소곤거림에 속으로 동의하며 방벽을 그의 팔에 채운 유르파가 물었다.
=자기, 착용감은 어때?=
“착용감은 여전히 좋군요.”
=안감을 조금 바꿨거든. 무게 조정도 해서 조금은 더 편해졌을 거야.=
유르파가 말한 부분 외에는 바뀐 건 거의 없다. 무늬가 조금 더 늘어나 예술적인 가산점이 더 붙은 정도일까.
=일단 한 번 패널을 소환해볼래?=
시험 삼아 방벽에 위상력을 보내며 패널을 가볍게 소환하니 빛의 장검 12자루가 약간의 섬광과 함께 출현해 은은한 빛을 뿌리며 그의 몸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안느가 헉하고 탄성을 지른다.
=숫자가 2배로 늘었네. 평범한 근접 직업자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되겠는데?=
=패널도 더 밝고 선명해졌어요. 위력이 더 높아졌다는 뜻이겠죠?=
=자기, 12자루가 끝이 아니야. 정신력과 위상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얼마든지 계속 소환할 수 있으니까 더 해보렴.=
그 말과 동시에 12자루가 더 떠올라 24자루의 검이 위성처럼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미쳤다.=
=저걸 누가 뚫어요. 안느 언니님도 가다가 고슴도치 되겠다.=
20평 남짓한 거실을 일부 빛의 검이 슁슁 날아다니고 일부 빛의 검은 호위하듯 그의 몸 주변을 떠다닌다.
이어 검의 형상을 한 패널이 이제는 창, 단검, 화살로 변하고 바늘처럼 얇게 변했다가 방패처럼 커지기하고 숫자도 늘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검의 형상을 잡으며 등 뒤에 배경처럼 배치되는 10자루의 검, 그리고 그를 호위하듯 둥둥 떠다니는 7자루의 검.
조용히 검을 조율하는 환인의 모습에 여자들은 검의 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만큼 17자루의 검이 유기적으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진짜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졌기 때문.
“현재로서는 17자루가 한계군요.”
난 그때 1자루도 겨우 움직였던 거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안느는 이어진 환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어? 뭐야, 이제는 올라가서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네?=
패널을 전부 치우고 지름 1m의 원형 패널을 만들어 올라간 환인은 쿵쿵, 발바닥으로 패널을 몇 번 두드려보곤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구성도, 위상력 감소도 큰 폭으로 줄었군. 이 정도라면 노른을 타고 날아다니며 전투하다 추락사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으음~.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내가 비술을 걸어줄 거지만……. 혹시 모르니까 따로 안전장치는 해두는 게 좋겠네.=
아이디어 노트를 꺼낸 유르파가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고 환인도 여자친구들과 패널의 내구성 확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옆방의 문이 열리며 이실리테가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저어……. 유리 언니, 이거 이렇게 입는 게 맞나요?=
그런데 그 모습이 자못 충격적이다.
=……헉.=
=헐.=
=우와아.=
“…….”
그야말로 모성이 흘러넘칠 듯한 모습.
입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던 환인도 설마 저 정도나 될 줄 몰랐기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의 I컵에 이르는 젖가슴이 흘러넘친다고 표현해야 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매혹적인 것은 그녀의 흘러넘치는 모성뿐만이 아니었다.
목의 옷깃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더욱 부각하고 시스루로 팔의 연약함을 더욱 강조하니 젖가슴이 더더욱 크게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까만색의 비단 바지 또한 그녀의 단련을 드러내듯 가죽바지 버금가는 탱탱함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그게 천박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순백에 금색 자수가 놓인 겉옷의 기능덕분이 아닐까.
=주인님……?=
“아, 음. 확실히 이실리테가 불안해할 만하군.”
인우족이 아닐까 싶은 저 대용량의 젖가슴을 얇고 가벼워 보이는 천 하나로만 지탱하려니 자칫 쏟아지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유르파가 아, 짤막하게 탄성을 흘리며 그녀의 불안을 종식했다.
=괜찮아~ 그거 체형과 보정 기능도 약간 들어있으니까, 손 떼보렴?=
밑가슴을 받치고 못내 불안한 듯 가슴 가리개를 만지작거리던 이실리테는 그녀의 말대로 두 손을 뒤로 돌린다.
그러자 유르파가 이 세상 모든 호기심을 담은 얼굴로 그녀의 밑가슴을 잡고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어때? 가슴이 안 삐져나오지? 원래 이만한 얇기라면 꼭지도 비쳐 보여야 하는데 안보이잖니. 다 이 옷의 기능이란다?=
설명하면서도 손을 흔드는 걸 멈추지 않고 두 눈도 이실리테의 가슴에서 떼지 않는 유르파.
출렁출렁…….
=우와아아….=
=…….=
=와아…….=
저게 가슴이 보일 수 있는 율동인가?
여자들이 순수한 감탄을 흘리며 이실리테의 가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욕망에 솔직한 인물이 환인의 안주머니에서 기어 나왔다.
「이, 이건 못 참아.」
=앗.=
그리고 이실리테의 가슴골로 뛰어드는 환연.
환인은 세상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눈을 섬뜩하게 빛냈다.
나중에 유르파에게 축소화 비술을 따로 받아야겠군.
그리고 아영은 환인과 다른 의미에서 이실리테의 옷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이실리테 언니가 검폭으로 막타 날려서 언니한테 맞는 게 나온 건가 싶은데, 착각이 아니겠죠?=
=그야…… 그렇겠지. 중핵을 해치울 때 가장 큰 기여를 한사람 장비가 변화할 가능성이 크고 그러니까.=
안느의 대답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백려강과 아영도 하나씩 소원을 추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음 중핵의 막타를 자신이 칠 수 있도록.
누가 아는가. 그러면 그의 저 뜨거운 시선을 자신도 받을 수 있게 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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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실리테 찌찌 말랑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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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 찌찌 말랑
이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