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85화 (685/813)

685 산 옆 마을 체블리프

저녁 식사 자리는 모두에게 무척 화기애애하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체블리프의 환경이 환경인지라 플뢰족이 좋아하는 어류 요리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 외 채소와 각종 육류의 50여 가지나 되는 곁요리에 10가지가 넘는 주요리는 모두를 만족시켜주었고.

=꺄아아…!=

=우왓! 이거 콜파라의 193년 묵은 황금 이슬주예요!=

그라파든의 아공간 지갑에서 반주로 나오는 라인업은 그야말로 명품 프리미엄마저 한 수 접어주는 수준.

특히 1100년 숙성 와인이 나와 다들 한 모금 했을 때는 4초 정도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으으음……!=

=하아…… 술이 아니라 생명수라고 해도 믿겠어요…….=

=1100년 숙성 와인이라고 해서 식초 친구일 줄 알았는데 어떻게…….=

“……환상적인 맛이군.”

자수정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이 액체는 환인조차도 마땅히 표현할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표현이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 고급 과일주에 안느의 정수를 섞어 칵테일로 만든 걸 성수 한 방울 첨가해 약간의 시간을 들여 다시 양조한 느낌이라고 할까.

여자들의 감탄에 그라파든이 흐뭇해하며 설명해준다.

=하하하. 실제 시간으로 1100년이 흐른 것은 아니란다. 실제로는 300년 정도인데 비술과 술법으로 특수 숙성시킨 와인이지. 이걸 땄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것은 여섯 병뿐이군.=

=히엑. 그렇게 적으면 한 병에 막 금화 수백 닢씩 하는 거 아녜요?=

아영이 1/3 정도 남은 와인을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 병에 대충 500금화로 환산하면 이 자그마한 술잔에 55금화의 값어치가 부여될 테니까.

“그건 아니다. 이만한 양조 와인이라면 프라이스리스가 당연하지.”

=네? 어째서인가요? 오히려 가격이 없는 게 더 곤란한 게 아닌지…….=

살짝 혀끝만 다시 축인 이실리테가 하아, 애틋한 한숨과 함께 이해가 안 가는 얼굴로 물었다.

환인도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와인을 잔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내를 삼켰다.

부호는 자신의 허영과 사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값을 매기기 어려운 걸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자랑한다.

하지만 진짜 부자는 그러한 행위조차 천박하다고 여기며 자신과 동급의 부자에게만 알게 모르게 선물하거나 하는 게 바로 ‘진짜’ 보물.

이런 신랄한 말을 그라파든 앞에서 어떻게 할까.

환인은 그라파든의 기대감이 듬뿍 묻어나는 시선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을 선물로 주는 것이 무엇보다 뜻깊은 선물이 될 테니까. 이런 와인이라면 사용처는 오직 일부의 극소수를 위한 선물용일까.”

=환인 군은 역시 잘 아는군요. 그 말대로 이 와인에는 이름도, 가치도 매겨지지 않았습니다.=

=이실 언니? 높은 계급 사이에서는 어중간한 고가품의 선물은 선물 항목에서의 순위가 제법 낮아요. 호족도 마찬가지지만, 진짜 귀한 선물은 귀족 본인의 막대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수제품이 진짜 선물로 취급되거든요.=

백려강의 설명에 안느도 작은 칵테일 잔에 절반가량 남은 자줏빛 액체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덧붙인다.

=응. 귀족의 시간, 특히 아빠처럼 왕족쯤 되는 사람의 시간은 돈으로 환산하지 못해. 그런 시간을 들여 만든 물건에 가치를 부여해 돈으로 가늠하려 들면 명예를 모욕한다고 결투를 신청할 정도? 팔라툼에서 도령을 만나려고 귀족들이 기부금으로 금화를 바리바리 싸서 가져왔던 거 기억나지?=

=흐엑. 죄, 죄송합니닷!=

방금 가치를 재려 했던 아영이 발딱 일어나 그라파든에게 12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자 그라파든이 파하하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힐 정도로 웃음을 터트린다.

=괜찮습니다. 저도 이해 못 할 풍습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 그러면 이 술은 그라파든 님이 직접 담그신 건가요? 술 담그는 솜씨가 굉장하시네요.=

=하하하. 내가 좀 늙어 보이지만 그 정도로 나이가 많진 않습니다. 이건 선대께서 취미로 담근 술이에요.=

=아빠. 그런 걸 함부로 따도 돼?=

=당연하지. 이 한 병은 네가 사위를 데려오면 그때 열기 위해 쭉 보관하고 있던 거다. 그런데 사위뿐만 아니라 언니 동생에 친구까지. 나에게는 딸이 다섯이나 더 생긴 기분이란다. 이 기쁜 날에 이걸 따지 않으면 언제 따겠니.=

그러면서 찡긋, 윙크하는 그라파든에게 여자들이 존경스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상적인 왕족이면서 이상적인 아버지이기까지.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저녁 식사 자리는 2시간이나 이어졌을만큼 좋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1100년 숙성 와인 이후로는 증류주, 담금주 가리지 않고 계속 나왔으며 안느도 한국에서 가져온 얼마 남지 않은 술을 전부 꺼냈다.

그라파든도, 슈아나데도, 다들 분위기를 안주 삼아 즐겁게 술을 마시는 시간.

「안느의 술고래 특성이 어디서 온 건가 했더니. 범인은 아저씨였네.」

=하하하! 딸이 아저씨에게 물려받은 건 그뿐만이 아니란다! 이 얼굴도 있지!=

=진짜. 내 얼굴이 아빠랑 닮지 않았으면 난 어디 나무뿌리 아래에서 주어왔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럼그럼. 이 아빠는 정령왕과도 대화를 나눠봤을 만큼 정령술의 대가에 엄마는 술법과 정령 친화력만으로 땅의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을 정도인데 딸은 정령술에도, 술법에도 끔찍할 만큼 자질이 없었으니까.=

=그만큼의 자질이 신체 능력에 전부 집중된 게 아닐까 했었죠. 딸의 몸은 그야말로 땅신님께서 내리신 축복 그 자체인 신체인데…….=

=응?=

=어?=

술이 조금 들어간 뒤부터 실눈이 되어있던 슈아나데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싸늘해지며 그녀의 손에 들린 크리스털 잔에 빠지직 금이 간다.

=내 귀여운 딸을 우르거라느니 질리언트라느니…….=

포용감 넘치던 상냥한 목소리가 차가워지고 그녀의 어깨너머로 아지랑이가 일듯이 살기가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한다.

안느와 그라파든은 술기운이 확 날아가는 걸 느끼며 다급히 그녀에게 붙었다.

=어! 엄마! 난 괜찮으니까! 도령 덕분에 힘은 그대로면서 이렇게 슬림하게 변했으니까?!=

=맞, 맞소! 부인, 아무래도 술이 조금 과한 거 같으니 조금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이실리테 양, 냉수 부탁합니다!=

=네? 네!=

그라파든과 안느만큼은 아니지만, 여자들도 당황했다.

만난 후부터 줄곧 온화하고 상냥해서 이상적인 엄마 같던 분이 이렇게나 살기를 드러내시다니.

슈아나데는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스산한 살기를 줄기차게 내뿜는다.

=정말 말이 안 되는 행위에요. 어떻게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를 향해 그런 폭언을 던질 수 있죠? 특히 타르반시올 그 아이,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감히 내 딸을 마귀라고 욕하며 약혼을 파기하고, 그 때문에 우리 딸은 친구는 한 명 만들지도 못하고 결국 메리아놀에서 추방당하게……!=

최상급 정령사의 살기와 기백에 여자들이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을 때 환인만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 저런 점까지 어머니를 닮으셨을까.

안느가 핍박받을 때를 떠올리며 분노하는 모습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유 없는 시비에 욕을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으셨던 어머니였지만, 자신이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고 욕먹으면 누구보다 분노하셨었지.

탕!

탁자를 가녀린 두 손으로 내려친 슈아나데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역시 돌아가야겠어요. 적어도 타르반시올을 뭉개놔야 다음에 딸 같은 경우가 또 생기더라도 슬픔을 겪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부인! 다른 아이들이 무서워하니 기운을 조금만 다스려주시오!=

=엄마 목마르지?! 물 마셔 물!=

=슈, 슈아나데 님! 안느 언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요…! 저, 저와 아영이도 있고…! 그치?!=

=그럼요! 안느 언니님한테는 우리도 있고 이실리테 언니도 있고 유르파 언니도 있슴다! 환인 오빠도 있으니까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요!=

여자친구들이 슈아나데를 말리는 걸 희미하게 웃으며 구경만 하던 환인은 불현듯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슈아나데처럼 진득한, 그녀보다 몇 배는 더 흉흉한 살기를 흘리면서.

“투르시온 왕가의 타르반시올입니까. 그 친구 덕에 안느를 만나게 되었지만…… 장모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저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드는군요.”

=환인 군?=

=사위.=

“그렇지않아도 메리아놀에 쌓인 감정이 많습니다. 다음번 투르시온 왕가의 인물을 만나면 그때 묵은 감정을 좀 풀어도 재미있겠습니다.”

=역시 사위에요. 그땐 저도 함께……!=

=히에엑……! 오빠도 취했다!=

=아, 아아아! 야, 다들 뭐해?! 도령 말려! 이슬이하고 노른이는 도령한테 붙고…… 엄마도 그만해~!=

=주인님!=

「아하하! 환인 화났어!」

=자기, 자기! 여기 물! 물 좀 마시지 않을래?!=

웃음과 살기가 난무하며 더욱 떠들썩해지는 술자리였다.

거실 창문을 열고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음식 냄새, 술 냄새로 피로해진 후각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후우.”

그 상쾌함에 환인이 폐 속의 묵은 숨을 내뱉자 그를 따라 나왔던 안느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정말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도령이 그러니까 장난처럼 안 느껴지잖아. 10년 감수했어.=

“흠. 내가 언제 장난이라고 했던가.”

=어……?=

“…큭큭큭.”

=아잇, 도령이 그러면 장난처럼 안 보인단 말이야! 그만해 그거!=

진짜 엄마한테 이상한 거 옮은 거 아냐? 안느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환인은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야기 듣기로 안느는 올해 66살. 18살에 성인식을 치르고 얼마 안가 집을 나왔으니 30, 40년 만에 부모와 재회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긴 시간 가족과 이별해있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별과 박해의 상처가 흐려진 건가.

‘그럴 리가.’

눈 부신 빛 앞에서는 온갖 흠결이 감춰지는 법이다. 그리고 유소년기에 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커서도 뚜렷한 법.

더욱이 그녀의 나이는 인간으로 환산했을 때 20대 초반이다.

한창 예민할 시기임에도 아픈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밝은 성격이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감추고 있는 거겠지.

환인은 더운지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느.”

=응?=

“네 마음은 이해한다.”

=…….=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메리아놀의 왕가와 멀쩡하게 합의를 보고 협의를 끝낼 가능성도 적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날 이 세계에 강제로 끌어들인 놈들과 엮여있을 테니까.”

=도령…….=

“그리고 이제는 널 괴롭힌 자들도 거기 섞여 있다는 걸 들었다.”

=…….=

그녀가 보내오는 애달픈 시선에서 고개를 돌린 환인은 작은 불빛 몇 개만 떠 있는 마을 거리로 시선을 주며 말을 이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메리아놀을 나오셨지만, 네게는 친오빠가 있다지.”

=그, 그런데?=

“그분은 내게 형님이 될 테니 패시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형님과 가문에 중요한 인물들에게 접촉해 여러 핑계를 대서라도 주도를 떠나게 해라. 최악의 상황에 내가 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응. 알았어…….=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절대 담담하지 않은 내용에 안느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렇지않아도 그의 대량학살을 막고 싶은데 자신 때문에 그가 부추겨진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던 것.

세상의 흐름이 그의 학살을 유도하는 기분이 든다. 이게 운명이라는 걸까.

‘……아냐. 메리아놀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

율이 언니나 이슬이, 아영이는 이런 거에 크게 신경 안 쓸 테고 환연이라면 오히려 옆에서 얼른 하라며 부추길 테지. 려강은 심약해서 도령이 가는 대로 따라갈 아이다.

막으려면 자신뿐인데 자신이 포기하면 어쩌자는 건가.

도령이라면 희대의 살인마로 이름을 남길만큼 대놓고 사건을 벌이지 않을 거다. 모종의 공작으로 후세가 그를 영웅이라 생각하진 않더라도 나쁘게 기억되는 일은 없게 하겠지.

그렇다 해도 그의 손에 막대한 피가 흘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가뜩이나 피와 살기에 예민한 그가 대량의 피를 손에 묻힌다면 어떻게 변할까.

안느는 점차 사람처럼 변해가는 그의 지금 모습이 좋았다. 이제 와서 피 맛을 보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은 싫다.

‘대량학살을 저지르지 않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안느는 오싹할 정도의 정령력이 바로 앞에서 뭉치는 걸 느끼고 그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척 봐도 최상급 수준의 막대한 정령력. 이 정도 정령력이면 메리아놀에서도 나이 많은 순혈의 플뢰족이나 펼칠 수 있는 수준이다.

뭐지? 설마 메리아놀이 벌써 암살자를 보낸 건가!?

삽시간에 인간 형상을 잡는 거대한 흙덩어리를 노려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천벌의 망치를 꺼내려던 안느는 수 미터의 사람 형상 흙덩어리에서 나오는 목소릴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느인가. 오랜만이군.」

=……어? 나, 날 알아?=

「나는 아감간, 네 어미 슈아나데와 계약한 최상급 땅 정령이다.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 왔지.」

=아. 엄마의 정령…….=

암살자가 아니었구나. 안도하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던 안느가 이어진 아감간의 이야기에 살풋 웃었다.

「정령력을 제법 쌓았군. 그간의 여정이 하등 도움 되지 않았던 건 아닌가.」

=그야 많은 걸 경험했으니까. 그런 거보다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한 엄마의 정령하고 대화하는 건 어쩐지 신기한 느낌이네.=

「그야 당연하다. 예전의 너는 모든 정령이 피할 정도의 추물이었으니.」

=……그거 내 정령력이 낮다는 이야기지? 맞지?=

뚱해진 안느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아감간을 째려보지만, 아감간은 이미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환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너, 인간아. 두 번 다시 슈아나데에게 그런 부탁을 하지 마라. 이번에는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었지만, 다음에는 널 묵사발로 만들어서라도 막을 테니.」

“그러겠습니다. 그보다 하루 만에 다녀오시다니, 그사이에 천암 산맥을 다 훑어보신 겁니까.”

「본다는 행위는 우리 정령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너희 인간처럼 보고 행동한다면 이 땅을 둘러보는데 1년이란 시간으로도 모자랄 터.」

“그 말씀대로입니다.”

「흥. 인간,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꺼내라.」

헬루멘에서 획득한 니오네브레스 전도를 꺼낸 환인이 야외 탁자에 펼치자 아감간이 다시 말했다.

「이곳의 위치와 사방위를 표시해라.」

“이렇게 보면 됩니다.”

지도의 북위를 현실의 북쪽과 맞추자 아감간은 손가락 끝을 송곳처럼 만들어 어느 한 점을 쿡 찔렀다.

체블리프와 스프라울드 사이에서 북쪽으로 살짝 치우친 지점. 이어 6곳 정도를 그 주변에 쿡쿡쿡 더 찍는다.

「그곳이 전부다. 그럼.」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녹아내리듯 모습을 감추는 아감간. 두 가지 정도 물어보려던 환인은 인사할 틈도 없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다 축적 지도를 꺼내 아감간이 표시한 곳에 마킹해놓는다.

=도령? 엄마한테 뭔가 부탁한 거 있어?=

“어쩌다 보니 대현자를 찾는 것에 장모님이 도움을 주셨다. 아감간이 지금 표시해준 곳은 천암 산맥에서 사람이 사는 장소인데…….”

찍어준 곳 중 한 곳만 유달리 크기가 크다. 그만큼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란 뜻일까.

=확실히 사람을 수색하는 건 땅 정령하고 바람 정령이 제일이긴 해. 아무튼 이 일곱 곳 중에 대현자가 있다는 거지? 여기 가장 크게 표시해놓은 데가 유력한 거 아냐?=

“정령이 실수로 크기를 나눠 찍을 리는 역시 없겠지. 일단 이곳을 먼저 찾아보고 나머지를 둘러봐야겠군. ”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지도를 다시 돌돌 말아 아스펜드에 수납했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하으… 아아앙…… 흑…! 하아아앙…!

흣… 가슴… 그렇게 당기면… 안대애……!

응아앗…! 하으앙……!

칠흑처럼 어두운 방 안. 기쁨과 열락으로 가득 찬 교성이 두껍고 튼튼한 벽을 뚫고 희미하게 흘러들어온다.

이제는 익숙한 환경 속에서 아영은 알몸으로 맨바닥에 앉아 두 손의 손바닥을 위로한 채 배꼽 아래에 두고 감각을 활성화했다.

감각 과민증이 깨어나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주변의 기척을, 감각을 낱낱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감각은 벽 너머의 광경까지 어렴풋이 보이게 했다.

옆으로 누워 왼쪽 다리를 천장으로 세운 안느 언니님. 그리고 언니님의 뒤에서 그녀의 목과 허리를 감싼 채 무자비하게…… 흠흠.

아영은 그러한 감각의 수용을 천천히 반전시켜 몸 안으로 향하게 했다.

꾸르르륵— 두쿵- 두쿵- 콰르르르—

꼴롱꼴롱… 뚜둑, 둑, 둑—

끼이이이잉— 스스스, 투두둑.

몸 안에서 울려 퍼지는 다양한 소리. 그중 혈액이 흐르는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천천히 다른 소리가 사라져간다.

아영은 혈액의 흐름에 집중하면서 슈아나데가 해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수목화는 이종족을 반려로 둔 플뢰족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필요한 것은 운명에 순응하며 결과를 바꾸는 것.’

‘수목화의 구조와 원리는 알고 있나요?’

‘반려자의 생체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분석, 감별하여 반려자에게 가장 필요한 성분을 제공하기 위한 육체의 변화를 수목화라고 해요.’

‘수목화 할 경우 눈물과 침과 젖, 음부에서 만들어지는 애액까지 모든 체액은 정수가 되는데, 아영 양이 집중해야 할 것은 이 부분이에요.’

정수는 몸 안의 어느 한 부분에 저장된다. 그렇게 저장된 정수는 필요에 따라 젖샘으로, 방광으로, 자궁으로, 침샘과 눈물샘으로 이동한다.

혈액 조작술은 정수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술, 정수가 몸 안의 샘으로 가지 않고 몸 안을 순환하게끔 하는 것이다.

‘아영 양의 상황이 수목화를 강제로 멈춘 상태라는 게 주효했어요. 오늘부터 혈액의 흐름을 최대한 머릿속에 새겨두세요.’

‘수목화를 진행하며 정수가 몸의 어디에 모이는지, 정수의 그릇이 어디에 생성되는지 그 위치를 기억하세요.’

‘정수의 그릇이 완성되면 그 주변의 혈액을 조작하여 정수가 어디로, 어떤 식으로 이동하는지 파악하고, 혈액 조작술로 정수의 흐름을 조종하세요.’

그렇게 하면 몸 안의 샘에 수분이 차올라도 그것은 정수의 효능이 없는 평범한 액체가 된다.

아영은 교육을 받으며 생겨난 의문점을 물었다.

‘그럼 정수가 몸 안에 너무 쌓일 텐데 그렇게 쌓인 정수는 어떻게 해요?’

‘정수의 활용 방법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반려자를 위해 정수를 원액 그대로 제공하여 건강과 활력을 증진하고 무병장수하게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꽃에 정수를 뿌려 순수화로 만드는 것이지요.’

유르파는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안느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영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깜짝 놀랐었다.

물론 안느도 자신이 들었던 것과 달랐기에 슈아나데에게 수목화에 관하여 다시 질문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어쩐지 도령한테 정수를 한가득 먹이면서 정수를 꽃으로 피워보려 했지만 꽃이 안 피더라니.

그땐 도령이 정수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랬나 했는데…….

아무튼, 순수화의 꽃잎은 불로장생, 만병통치의 약으로 알려진 엘릭시르의 핵심 재료다.

그 순수화는 각국 주도의 대형 경매장에서 수십 년에 한 번, 아주 가끔 출토되는 신비의 꽃으로 어디에서 피는지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는데 설마 수목화한 플뢰의 정수로 피어나는 꽃이었다니.

순수화로 만든 엘릭시르는 비록 정수의 흡수보다 효능은 떨어지지만, 반대로 반려자에게만 통하는 정수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것.

그 말은 환인과 그의 여자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모든 걸 설명해준 슈아나데는 깜빡했다는 듯이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건 왕가에서 전해지는 대외불출의 기밀 중의 기밀인데 깜빡하고 알려드리고 말았네요. 비밀로 해주세요?’

……라고.

아영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슈아나데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역시 언니님의 어머님이셔.’

슈아나데의 지식은 아영에게 단순히 수목화를 하고도 환인과 동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있을 자리를 무엇보다 확고부동하게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녀에게 있어 슈아나데는 그야말로 성모.

아영은 슈아나데와 안느에게 재차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감각 과민증으로 몸 안의 혈관과 혈류의 흐름을 파악해나갔다.

피는 신체 부위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달랐기에, 혈관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길고 세밀했기에 혈관을 전부 파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해낼 거야!’

아영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자신이 있을 장소를 위해, 이런 지식을 무상으로 알려준 성모님과 언니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술식을 짜내며 자신 전용 문신을 만들던 유르파 언니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자신이 순수화를 만들면 그걸 엘릭시르로 만드는 것은 유르파 언니가 해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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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수목화에 대해 궁금증을 묻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살짝 언급해보려고 합니당

"아니 근데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수목화가 체식하면서 몸에 독기를 빼고 정수가 나오는 그런거 아닌가?

처음 수목화 나왔을때는 되게 정성들이고 극단적인 체식주의를 해야된다고 나왔던것 같은데 그럼 수목화 하지 않는 방법은 그냥 육식하면 그만 아님?"

이렇게 질문하셨는데

되게 정성들이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하게 된 이유 = 환인이 먹을 정수니까, 좋은걸 먹이면 그만큼 깨끗하고 좋은 정수가 나오지 않을까싶어 이실리테가 노력하는 거

수목화 할 때 육식을 하게 되면? = 중병을 크게 앓고 겨우 회복세에 들어섰는데 막 뛰어다니면서 활개치고 삼시세끼 패스트푸드에 날밤까면서 폭음폭식하는 식.

...입니당!

아영의 수목화가 더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환인과 아영의 접촉을 완전 차단중이기 때문입니당.

고기를 막 먹어서 수목화가 중단된게 아니에용!

[작품 설정]

아감간의 마킹

●ooo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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