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684화 (684/813)

684 산 옆 마을 체블리프

환연이 팔려가던 그 시각 마구간.

체블리프의 목장의 도움을 받아서 마차를 수리한 안느는 말끔해진 마차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도움을 준 체블리프의 목장과 악수했다.

=덕분에 새것처럼 고쳤네. 고생했어.=

=아이고 별말씀을요. 애들 서넛은 달라붙어서 힘써야 하는 걸 영혼 기사님께서 전부 해결해주신 덕분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인리족 비버 종 남자는 황공하다는 듯이 장갑 낀 안느의 손을 공손히 잡고 허리를 넙죽넙죽 숙였다.

=자, 이건 자재비고 이건 수리비야. 목장 씨 덕분에 알게 된 마차 수리 기술도 있어서 사례비로 좀 더 넣었어.=

무려 열은화 세 닢. 평범한 마차 한 대를 만들 수 있는 큰돈이다.

돈도 돈이지만 다른 이유로 목장은 펄쩍 뛰어오르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닙니다요! 성제님의 최신식 마차를 수리하면서 저도 얼마나 많이 배웠는데요! 세상에 이런 기술이 있다곤 생각도 못 했을 정돕니다! 오히려 제가 수업료를 드려야 하는데요!=

=그래? 그럼 수업료를 받을까?=

안느가 웃으며 농을 던졌지만, 서민에게 귀족의 농담은 농담으로 다가오지 않는 법.

=예입. 여기 있습니다!=

=아냐아냐! 농담이니까! 자, 성제님은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주의시니까 얼른 받아.=

목장이 정말 주머니를 꺼내는 모습에 깜짝 놀란 안느가 목장의 손을 잡고 힘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은화 세 닢을 쥐여주었다.

=아, 아이고…….=

중년을 넘어 갈색 모피가 희끗희끗해지고 있는 목장은 심히 난감해졌다.

그는 정말로 대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영혼사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그인데 그런 영혼사님보다 더 훌륭한 분께 돈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때 공방에서 데려온 젊은 목수가 그의 귀에 속닥거렸고, 목장은 동그랗고 작은 귀를 쫑긋하고서는 반색한 얼굴로 안느를 돌아보았다.

환인을 따라다니며 그런 반응을 자주 본 안느는 당연히 요령 좋게 시도를 원천차단한다.

=받은 걸 그대로 기부금으로 주겠다는 건 아니지? 우리 성제님은 가진 자들하고 부자들한테 기부금 받아내는 건 좋아하시지만 이런 건 안 좋아하셔. 그리고 고위 모험가, 탐험가처럼 미궁도 돌파하는 분이라 3열은화는 큰돈도 아니니까.=

=에고…….=

그렇게 송구스러워하는 목장 일행을 돌려보낸 안느는 상쾌한 달성감에 기지개를 한껏 켠 다음 지저분해진 주변을 정리했다.

쓰다 남은 목재는 장작불용으로 챙기고 작업하느라 파헤쳐지고 흐트러진 땅도 꼼꼼하게 원상복구 시킨다.

‘자, 그러면…….’

탁탁, 손을 턴 안느는 성수포로 대충 몸을 닦고 유르파의 작업실을 찾았다.

똑똑.

=나야. 안에 아영이 있어?=

=있슴다. 무슨 일이에요?=

평범한 셔츠에 바지를 입은 아영이 문을 열고 나온다.

그녀의 자주색 머리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이리저리 재료며 설계도, 책과 두루마리 등으로 어지럽혀진 방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방 한가운데 앉아 기름과 잉크로 찌든 토시를 한 채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유르파.

안느는 아영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토닥이며 유르파에게 물었다.

=율이 언니. 그 수목화 연구 어디까지 진행했어? 저번에 들으니까 문신 작업만 하면 끝난다고 들은 거 같은데.=

=조금씩 시험적으로 새기면서 신체 거부반응을 검증하고 있어. 왜 그러니?=

=잠깐 생각해보니까 어머니가 투르시온 왕가 출신이거든. 투르시온이 술법으로 이름 높으니까 그쪽으로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러 가려고. 언니도 같이 갈래?=

=갈래!=

=언니님!=

유르파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토시를 벗고 아영은 답삭 그녀의 팔에 매달려 글썽글썽한 눈으로 맹세한다.

=저, 평생 언니를 따를게요……!=

=그, 그래…….=

왠지 민망하고 양심이 콕콕 찔린다. 도령의 수목화는 자신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서 아영한테 못된 짓을 한 거나 다름없는데…….

두 명의 수목화가 그의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라서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지만, 안느는 줄곧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아영이 고통받고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자각하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그를 향한 독점욕.

‘으…….’

아영의 순진한 반응에 양심의 가책이 거세어진 안느는 얼른 둘을 데리고 슈아나데를 찾았다.

=엄마. 물어볼 게 있는…… 연이가 왜 거기 있어?=

요즘 자신들에게는 어느 정도 관대해졌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어지간해서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환연이 얌전히 머리카락을 내어주고 빗질을 하게 두다니?

게다가 저 옷은 뭐야. 그녀들의 시선이 뚱한 표정의 환연을 눈에 담는다.

희고 푸른 프릴 드레스를 입고 반으로 접은 최고급 레이스 손수건 위에 앉은 모습.

하얀 오버니삭스에 광이 나는 백색 발목 스트랩 구두를 신고 있는 그 모습은 귀엽고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치렁치렁한 게 싫다고 늘 가벼운 옷만 입던 환연이었는데 드레스까지 입다니…….

「거기서~!」

삐삣!

노른 또한 무릎까지만 가리는 예쁜 녹색 드레스에 공주님처럼 틀어올린 머리로 실루와 함께 방안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중.

여자들의 놀란 시선에 환연이 우울하게 대꾸한다.

「……환인이 나 팔았어.」

얼굴이 반쯤 썩은 그녀의 대꾸에 세 명은 웃음을 꾹 참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연이 저렇게 투정을 부리는 걸 보면 심각한 일은 아니겠지.

방 안으로 들어간 안느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싫었으면 도망가지. 왜 그러고 있어.=

환연은 팩- 고개를 돌리려다가 슈아나데의 부드러운 손길에 멈칫하곤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녀라고 왜 도망을 생각 안 했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잘 된 건지 잘 못된 것인지, 환연은 환인과 여러모로 비슷한 취향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갓 태어났을 적에는 말투마저 비슷해 여자들의 원성까지 샀을 정도다.

지금은 자아가 확립되고 개성이 생겨 그와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한 게 있다면 변하지 않은 것도 있기 마련.

환인이 선하고 모성애가 가득한 여성에게 약한 것처럼 그녀도 슈아나데 같은 여자에게 무척 약했다.

자신도 그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흑단처럼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세공품이라 해도 어울릴법한 빗으로 빗겨준 슈아나데가 섬세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땋기 시작하며 사과한다.

=후후후. 억지로 붙잡아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은 전혀 안보인다. 환연은 정말 행복해하는 얼굴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공주님처럼 땋는 슈아나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했다.

「됐어…….」

저러면 문제는 없을라나. 안느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엄마. 수목화에 대해서 좀 알아?=

=음~ 어느 정도는? 거기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으렴. 유르파와 아영도 앉아요. 티레네, 흐밀튼에서 만든 쿠키랑 하빌산 홍차를 준비해주겠니?=

=네, 마님.=

=이야기는 티 타임 준비가 끝나고 해.=

잠시 후 차와 매우 고급스러운 과자가 준비되고 노른도 탁자 앞에 앉았을 때, 환연의 머리 땋기를 거의 끝내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던 슈아나데가 물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수목화의 어떤 게 궁금할까?=

=둘 이상의 수목화가 한 사람한테 집중되면 안 좋은 점 있어?=

=당연히? 유르파는 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죠? 약은 어떻게 써야 하나요?=

=…용법에 맞춰야 해요. 적게 쓰면 약의 효과를 못 보고 과하게 쓰면 약이 독으로 변하기도 하니까요.=

=맞아요. 인스트리엠의 물망초 생화즙에 욜트바리아의 달맞이풀 가루를 섞으면 어떻게 될까요?=

=…극독이에요. 다섯걸음도 못가고 죽는 식물성 자연독…….=

아영의 굳은 대답에 슈아나데가 빙긋 웃으며 =정답이에요.= 칭찬해준다.

=수목화가 된 플뢰의 몸은 반려자에게 있어 약초랍니다. 딸아이가 물망초라면 아영은 달맞이 풀이지요.=

=그, 사례가 기록되어 있넜어?=

아무리 봐도 실제 있었던 경험담처럼 보여 물었던 안느는 슈아나데의 조용한 끄덕임에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지난 일천 년간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야. 희소 종족 남자를 사랑하게 된 자매에게 내려진 지독히도 슬픈 비극.=

먼 옛날 자매의 사랑을 받게 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진심으로 자매를 아끼고 사랑해주었고, 자매도 그 사랑에 화답하듯 수목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남자는 20년 동안 자매의 정수에 천천히 중독되었고, 이상함을 눈치챘을 땐 메리아놀의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도저히 사람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일어나 있었던 것.

변화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암도 원래는 신체 일부, 세포가 정상적인 조절 기능을 잃고 무차별적으로 증식하거나 주변으로 침투하거나 새로운 혈관의 형성을 촉진하거나 하는 게 암이니까.

차분한 목소리가 슈아나데의 앵두같은 입술에서 계속 흘러나온다.

=두 사람의 정수를 한 사람이 섭취하면 몸의 변화를 유발하게 돼요. 그건 9등급 성술 신성 치유와 9등급 비술 시간 되감기로도 어쩌지 못하는 변화죠. 치료할 수 없는 독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

=…….=

유르파와 아영은 심각함에 겨우 숨만 쉬는 모습이었다. 안느는 그런 그녀들을 힐끔 보고 슈아나데에게 재촉하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수목화를 안 하는 방법은 없어?=

=안타깝지만 현재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단다. 미궁을 돌파해 그 소원으로 한 명의 종족을 바꾸는 것,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 등이 있지만 그것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잖니? 엄마가 알기로 네 수목화도 90년 만에 벌어진 일인걸.=

「수목화 현상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나 보네. 그 기간까지 알고 있단 건 수목화에 줄곧 초점을 잡고 있었단 뜻이잖아.」

소프트한 우유맛의 쿠키 하나를 잡고 먹던 환연의 이야기에 슈아나데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마지막 땋기를 끝낸 뒤 환연의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사라락— 빛을 반사하듯 반짝이며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환연의 흑발.

자연스러운 펌이 살짝 들어간 데다 좌우 귀 뒤에서부터 시작된 두 갈래 땋기를 뒷머리에서 모아 장미처럼 올려묶어 청초하면서도 귀여움을 포인트로 준 헤어 스타일이다.

여기에 예쁘고 귀여운 드레스까지 입고 있으니 말 그대로 깜찍함이 넘쳐흐를 지경이라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임에도 여자들은 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푸른 나뭇잎의 탑은 줄곧 수목화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면요?=

=수목화는 종족의 배신과 타락의 증거라고 여겨 사냥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 흔적이 지금까지 내려오며 수목화의 연구라는 형태로 굳어진 거지요.=

아영과 유르파는 그 이야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그걸 이토록 잘 알고 계시는 걸까. 혹시 슈아나데 님이…….

같은 생각을 한 환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슈아나데는 극단주의자야?」

=사랑은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들어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극단주의자네요.=

방긋방긋 웃는 것을 보면 농담이 분명한데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이게 플뢰식 농담이라는 건가?

안느는 미안한 얼굴로 유르파와 아영에게 사과했다.

=미안. 방법이 없대.=

=엇 아니에요! 제가 수목화 했으면 오빠한테 큰 문제가 생겼을 거란 이야기잖아요. 오히려 말려줘서 고마워요, 언니.=

두 사람의 대화를 방그레 웃으며 지켜보던 슈아나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으음~. 엄마는 방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엥? 수목화를 안 하는 방법은 알려진 게 없다고 했잖아.=

=맞아. 하지만 딸은 수목화를 안 하는 방법을 물었잖니?=

=……아니. 하…….=

방실방실 웃는 엄마를 보다 이마를 감싸 쥐는 안느를 대신해 아영이 흥분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질문했다.

=어, 어떤 방법인가요? 저, 무엇이든 할 테니까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후후. 요점은 두 명의 수목화로 상대에게 나쁜 효과가 나지 않는 것이예요. 물론 자세히 가르쳐줄거구요. 하지만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은 처녀가 막 해서는 안 되는 말이랍니다.=

=윽……. 죄, 죄송합니다.=

슈아나데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아영을 나무란 뒤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검지를 세웠다.

=엄마가 가르쳐줄 것은 이거예요. 혈액 조작술.=

=혈액 조작술….=

유르파의 얼굴에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가고 아영의 표정은 반드시 배우고 말겠다는 것처럼 비장해졌다.

“…….”

보석쥐가 든 유리병을 잡고 영기와 심핵의 순환을 이어가던 환인은 슬슬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환연이 늦는다.

그의 예측으로는 못해도 4시간 전에 날아와서 때리려 들어야 했다. 게다가 유르파의 작업실에 유르파도 없고 아영도 없다. 마구간에도 다 고쳐진 마차만 있고 안느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황.

주방에서 백려강과 함께 사 온 식재료를 손질하던 이실리테가 물었다.

=주인님. 안느를 찾아올까요?=

“아니. 곧 식사 시간이니 연락을 하던가 돌아오겠지.”

=네. 그러면 저녁 준비를 시작할게요.=

“부탁한다.”

환인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 멀리 가거나 피치 못할 이유로 자리를 비워야 했다면 하다못해 쪽지라도 남겼을 것이다. 안느, 유르파, 아영 셋 다 지혜가 뛰어나니 그 정도도 생각 못 할 리 없으니까.

그 예상대로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저녁으로 산채 정식 준비를 거의 끝마쳤을 때 여자들이 그라파든 부부와 돌아왔다.

=사위. 오늘 저녁은 술 한잔 어떻습니까? 마침 깨끗한 술이 있습니다만.=

“술이라면 저희도 나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인어른께 독특한 풍미가 될 겁니다.”

=그거 매우 기대되는군요. 오! 세상에 이렇게나 화려하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라니, 눈이 즐거울 정도로군요. 이실리테 양과 려강 양의 솜씨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무척 정갈해보이는 음식이네요. 어마, 향기가 어쩜 이렇게 선명하고 강렬할까…….=

그라파든 부부가 안으로 들어가자 안느가 여자들과 함께 들어오며 환인에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도령, 우리 다녀왔어.=

“두 분께 가 있었던 건가.”

=응. 아영이 수목화 건으로 엄마한테 조언을 듣고 왔지.=

=자기, 오늘내일로 준비가 끝날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유르파의 자신만만한 장담에 아영을 바라보니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히다가 안느의 뒤에 숨는다.

그런 세 명도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이 금방 복작복작해지지만, 환인은 거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환연 때문이었다.

시선이 마치 ‘죽기 전에 남길 말은?’ 하듯이 묻고 있었기에 환인은 작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손바닥으로 받쳐주며 말했다.

“미안하다. 장모님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알아?」

“할 말이 없군.”

환연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불만스레 그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고 흥, 코웃음을 쳤다.

「말 돌리거나 궤변을 늘어놓으려 했으면 가만 안 있으려고 했는데. 솔직하게 사과해서 봐주는 거야.」

“그래. 그리고 그 모습 무척 예쁘군. 잘 어울린다.”

「…….」

몸을 띄워 거실로 들어가려던 환연은 멈칫하고는 그를 새초롬하게 흘겨보았다. 색마, 말은 잘하지.

별일 없이 넘어갔다는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쉰 환인은 닫힌 현관문을 바라봤다.

그런데 노른은 어디 갔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환연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노른이 땅거미가 지는 마당에서 폴짝폴짝 뛰며 실루와 노는 모습이 보인다.

“노른, 실루. 저녁 준비 다 됐으니 돌아와라.”

「응!」

삐!

노른이 도도도 달려가 마중나온 환인의 품에 뛰어들었다.

뺨에 살짝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주자 눈을 감고 있던 노른이 활짝 미소를 지어준다.

구김살이나 고뇌, 근심 등은 전혀 없는 맑고 순진무구한 미소.

「환인. 슈아나데 엄마가 옷 줬어. 나 예뻐?」

“그래. 올린 머리와 매우 잘 어울린다.”

「헤헤. 아! 고기 냄새다!」

노른이 실루와 후다닥 뛰어 들어가자 환연이 먼지 난다고 빽— 고함치는 소리, 여자친구들이 웃으며 말리는 소리, 음식을 차리고 옮기느라 분주한 소리가 들려온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자 불빛이 차단되며 환인이 서 있던 곳이 어둠에 잠겨 들었다.

환인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어두컴컴해진 마당에서 거실 창문을 통해 환하게 쏟아지는 빛과 그 안에서 웃고 떠드는 이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이실리테, 안느, 유르파, 환연, 백려강, 아영, 노른에 실루, 거기다 장인어른과 장모님까지.

화기애애하고 떠들썩한, 그림으로 그린 듯 따스한 가족의 모습.

“…….”

자신이 니오네브레스로 넘어온 지도 어느덧 4년째다.

그전에는 온기라곤 한 줌 없는 집에서 적막과도 같은 침묵과 어둠에 파묻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남은 평생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죽게 될 거로 생각했었다.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고 자신의 최후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았었다.

커다란 전골냄비를 옮기다 시선이 마주친 이실리테가 웃으며 ‘어서 오세요.’ 입 모양으로 말한다.

다른 여자들도 뭐하냐며 그에게 빨리 오라 손짓하고, 성미가 급한 안느는 창문을 열고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어두운 곳에서 멀뚱히 서서 뭐해? 어서 들어가자! 아빠가 도령이랑 마시겠다고 1100년된 와인을 꺼냈단 말이야!=

활짝 웃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어둠의 경계선을 벗어나 따스한 황금빛 속으로 들어간다.

환인은 점점 다가오는 따스한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옛날처럼 살지는 못할 거라고.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가끔 보여주시던 걱정어린 표정을 이해했다.

부모님은 이 따스함을 알고 계셨던 거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따스함을 모른 채 살아가다 모르고 죽는 것을 걱정하셨던 거겠지.

=자, 사위!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셔봅시다!=

=아앗. 이건 71년산 카데발 아우론산이잖아요? 세상에 100병 정도밖에 만들지 않았다던 신의 물방울이…… 이, 이건 츄푸로호른의 적포도주 773년산!=

=이실리테 언니, 이건 그쪽으로 가져갈까요?=

=그건 안느가 먹을 거니까 저쪽이네요.=

「나 손 씻고 싶은데.」

=노른 이리와. 언니가 물 정령 불러줄게.=

“…….”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렇다. 지구에서 살았다면 이런 따스함, 죽을 때까지 몰랐을 거다.

거실에 들어서자 평범하게 예쁜 옷에 새하얀 앞치마를 한 새댁 차림의 이실리테가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오른쪽에서 그의 팔을 잡는다.

=주인님, 이쪽으로 오세요.=

왼쪽에서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안느는 환인의 표정을 보곤 살짝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도령 좀 이상해. 감회를 느끼는 노인 같은 표정이야.=

=너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왜~. 도령 아까 밖에서 세상 살 만큼 산 노인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해. 주인님, 이쪽이 주인님 자리에요.=

=진짠데!=

자신을 가운데 두고 평소처럼 아웅다웅하는 그녀들의 모습.

가족이란 이렇게 따스하기에 보통 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하는 거겠지.

왠지 자신도 보통 사람이 된듯해 환인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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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너무 늦어서 일단 올립니당

바로 맞춤법 검사 교정 들어가겠습니당!

교정 끝!(am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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