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 산 옆 마을 체블리프
안식처의 거실에서 파편인의 융화 작업을 이어가던 환인은 창밖에서 들려온 여자들의 웃음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안느의 모친, 슈아나데와 여자친구들이 야외 원목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슈아나데가 데려온 시녀는 다소곳한 몸짓으로 그녀들의 찻잔이 비면 찻잔을 채워주고 노른이 학살하는 쿠키 쟁반에 쿠키를 보충하거나 하고 있다.
여자들은 시종일 웃음 짓고 있는데 안느만 민망해하는 얼굴로 뚱한 표정인 걸 보면 그녀를 소재 삼아 대화를 이어나가는 중인 거겠지.
“…….”
솔직히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장모님이 되실 분께서 여자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될지 허락을 구해오는데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더욱이 슈아나데는 지금 모습에 조금만 더 활발한 모습을 덧씌운다면 환인의 죽은 모친과 놀랄 만큼 흡사한 분위기를 지녔다.
환인에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
그는 탁자 위에서 열심히 버피 테스트를 반복하는 자그마한 아가씨에게 시선을 내렸다.
“환연. 넌 저기에 끼지 않아도 괜찮나.”
기본 4카운트 버피에 제자리 뛰기와 팔굽혀펴기를 더한 운동.
이실리테와 안느의 엄격한 코칭에 완벽한 자세로 버피 테스트를 습득한 환연은 그걸 쉼 없이 반복하며 숨 차 죽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헤엑, 헥, 흐에. 별…로! 할, 말도, 없고! 저런, 헥헥, 자리는! 불편햇!」
30분이 지난 현재 300개를 넘은 상황. 어깨며 등허리, 허벅지 등 밖으로 드러낸 피부는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달아오른 피부 곳곳은 체지방이 많이 줄어 아름다운 육체의 굴곡까지 보일 정도.
“…….”
그녀의 몸집은 20cm 정도에 몸무게도 불과 수백 그램이다. 그리고 질량이 적으면 적용 중력도 적은 법.
그녀가 버피 테스트를 시작할 무렵에는 그 운동이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저렇게 심박수가 높아지고 땀을 뻘뻘 흘릴 만큼 부하를 받는 모습을 보면 운동이 안된다는 말은 못 한다.
실제로 니라인에서 막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20개 1세트도 못해서 발발거렸는데 지금은 326개, 327개나 하고 있을 정도니까.
「끄앙?!」
제자리 뛰기를 했다가 자기가 흘린 땀을 밟고 미끄러져 찰푸닥, 엎어진 환연이 그대로 늘어져 죽을 듯이 헐떡인다.
2주 만에 300개를 늘리다니. 몸집이 작다 보니 단련 효과도 높아진 건가 아니면 환연의 자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건가.
발라당, 돌아서 드러누운 환연은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했다.
「응……. 어. …그래? 뭐 그런 거면 괜찮은데. ……무슨 소리래? 안돼! ……안— 돼—! 금지! 그거 금지! 시끄러시끄러! 계속 그러면 계약 고려할 거니까!!」
니라인을 나온 뒤의 또 하나 변화라면 환연이 종종 저렇게 릴라이스로 짐작되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대화의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계약의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릴라이스가 뭘 요구했길래 저러는 걸까.
‘부정적인 의도는 아닌듯하고, 그녀의 수비 범위를 벗어나는 일종의 취향 고려 요청인가.’
자신만큼이나 수비 범위가 넓은 환연인데 그런 그녀가 저렇게나 정색할 정도면 어떤 요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약간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포근한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여자친구들 누구와도 다르지만, 어쩐지 어머니가 생각나는 냄새.
일어나 현관 쪽을 돌아보자 벽 너머로 자그마한 머리가 빼꼼 내밀어지더니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눈웃음친다.
“장모님.”
=환인 군~.=
여자친구들과 이야기를 다 나눈건가.
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라파든과 커플룩인 듯, 약간의 레이스와 나뭇잎의 은색 자수가 추가된 분홍색-백색의 로브를 살랑이며 그에게 다가간 슈아나데는 그의 손을 잡고 상냥하게 말했다.
=여자친구들을 제가 빌려가서, 심심하지 않았나요?=
“괜찮았습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네에. 참 착한 아가씨들이에요.=
“안느와 마찬가지로 제게 햇살과 같은 아가씨들이지요.”
그의 말에 대답 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슈아나데는 이윽고 성모처럼 미소지으며 그를 향해 팔을 뻗어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환인은 살짝 당황했다. 아까도 자신을 가볍게 포옹해주었지만, 지금은 마치 아들을 안아주듯 품에 꼭 안아주고 있지 않은가.
그 때문에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되었으나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모습도, 체취도, 인종마저도 전혀 다른데 어째서 그녀의 품에서 어머니가 떠오르는 걸까.
=환인 군. 환인 군에게는 어떤 말로도 다 전하지 못할 큰 은혜를 받았어요.=
“…….”
=딸을 맞이해주어서, 그 아이가 밝은 햇살 아래 나올 수 있도록 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그 아이의 엄마로서 이 말을 꼭 환인 군에게 하고 싶었답니다.=
“저는…….”
입을 열던 환인은 뒷머리를 살짝 누르는 손길에 다시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
그러자 왠지, 왠지 정말 어머니에게 포옹을 받는 기분이 들어 환인은 말없이 슈아나데의 심장 고동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차분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서, 보듬어주는 몸짓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모두 해소되는 느낌이다.
모순적으로 그랬기에 친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더욱 샘솟았다.
어머니도 여자친구들을 만나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장모님과도 좋은 친구가 되셨을 텐데.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뒤따라 들어온 안느가 빽 고함을 지를 때까지 환인은 슈아나데의 품 안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그라파든 부부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여자들은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졌다.
뜻밖의 만남에 즐거웠지만 쉬는 것은 하루면 족하다.
자신들은 유람을 다니는 것이 아니며 조만간 큰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도 확실하게 인지한 상황. 미래를 향한 대비를 하거나 현재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2주에 걸쳐 소비한 식재를 보충하거나 교환하러 나갔다.
니라인에서 반년치 식재를 담았지만 200명이나 되는 기플라족의 식사를 사흘 정도 제공한 덕분에 지금은 한 달 치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식사량이 적은 기플라족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식량으로 곤란한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안느는 유르나하 동장이 호출한 목수와 함께 마차를 수리하기 시작했고 유르파와 아영은 비술 부여 도구 일체를 갖고 방에 틀어박혔다.
환인도 동장의 저택으로 찾아온 요단 상회의 상단주와 니흘라 행수에게 어제 넘겼던 부산물의 대금을 받는 한편 주변 도시, 마을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스프라울드에 메리아놀에서 온 왕족이 방문하였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메리아놀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자못 흉흉한 이 시국에 왕족의 방문이라 진위가 의심스럽습니다만…….=
“높으신 분의 행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겠지요. 그 외에는 특이하다거나 하는 소식은 없습니까.”
=으음. 히아리드 대평야에 불지옥이 열렸다는 소문도 있고 니라인에 2만 이블팩션 대군이 나타났지만, 대영웅이 대군을 괴멸시켰단 소문이 있습니다. 3대 암살 조직 중 두 곳이 모종의 이유로 괴멸했으며 한 곳도 잠정적으로 영업을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귀족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상단주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소문은 전부 환인 자신의 이야기거나 한 다리 건너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뿐이었다.
상단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신이 이렇게나 거창하게 사건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메리아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
만약 자신의 잠재적인 적이 이런 일을 벌이고 다녔다면 자신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계획과 음모를 꾸며 상대를 지워버리거나 어떻게든 회유했을 텐데.
‘그게 개인과 집단의 사고방식 차이겠지.’
=……아! 오래된 이야기이기지만 성제님께서는 이쪽 지방에 대해 모르실 테니……. 천암 산맥 어딘가에는 어린 여자아이만을 납치하는 마녀가 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실제로 몇 명 실종되기도 하였으나…….=
진위 확인을 위해 스프라울드 영주가 바람매 기사단을 출병시켜 대대적으로 수색까지 벌였지만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그렇습니까. 제법 오래되고 유명한 괴담인가 봅니다.”
=예에.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여자아이를 납치하는 마녀. 일단 체크해놓은 환인은 그 뒤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상단주가 가진 소문은 약간 과장된 측면이 적진 않지만 대체로 사실이었기에 그가 제공하는 정보에 어느 정도 신뢰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얻을 정보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환인은 원기 방출과 평온의 파동으로 상단주에게 축복을 가장한 평온의 파동을 펼쳐주며 감사를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요단 상단주님 덕분에 근방을 돌아보기 더 편해질듯합니다.”
=벼, 별말씀을…….=
평온의 파동이 주는 심신 안정효과, 거기에 원기 방출이 주는 급속 체력 회복 효과까지.
상단주와 니흘라는 환인이 펼친 원기 회복 평온의 파동에 영혼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체블리프에서 가장 큰 상단을 소유해 마을에 완전히 정착했지만, 그도 젊었을 때는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몇 번은 영혼사를 가까이서 본 적도 있고 멀찍이서 본적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가능한 영혼사가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8급 성술사도 이런 일은 불가능할 거다.
정화의 성법과 치유 촉진의 성법을 쓰면 비슷한 느낌이야 들겠지만, 이렇게 영혼까지 깨끗하게 씻겨주는 느낌은……!
영혼 정화의 축복을 받았다고 착각한 두 사람은 성제를 중심으로 한 소문까지 들었기에 단박에 성제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콩깎지가 제대로 씌여 이후 환인과 관련된 소문을 어마어마하게 퍼트리기 시작하지만 그건 환인이 영원히 모를 이야기.
안식처로 돌아온 환인은 상단주를 통해 획득한 메리아놀의 인근 마을, 도시의 동향을 정리했지만 딱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엘위드리스 가문의 몰락으로 메리아놀 내에서 불안이 팽배하다는 것은 잘 가공하면 쓸만한 무기로 탈바꿈시킬 수 있지만, 이걸 무기로 쓴다는 것은 메리아놀 전체와 적대한다는 이야기니까.
무엇보다 정보 공작을 펼치고 중앙 정부의 잘못으로 돌리게끔 사보타주하는 것은 귀찮기도 귀찮고 하얀 늑대를 전원 동원해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
‘플뢰족, 프라우드족, 그 외 기타 종족들이 서로 이간질하고 물어뜯고 싸우는 꼴을 보는 것은 재미있을 거 같지만…….’
……역시 지금 해야 할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은 대현자를 찾고 파편인을 녹이는 것뿐이겠지.
‘공식 입장문을 발표한 지 하루. 샤스라 영성은 답이 나올 때까지 최소 나흘은 걸린다고 했지.’
국가 행정이 움직이는 일에 4일이라면 빠른 편이라고 해야 할까.
소식이 들어오면 샤스라가 직접 통신을 준다고 하였으니…….
“…….”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체블리프의 동장, 유르나하를 찾았다.
=예, 예? 천암의 마녀… 말씀입니까?=
가뜩이나 심약한 그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황금빛 베일의 아우라를 두르고 찾아온 환인을 맞이해 필사적으로 떨림을 억누르며 응대했다.
“스프라울드와 체블리프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괴담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금 신경이 쓰여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데, 아시는 것이 있으실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런 거라면…….=
유르나하는 힐끔힐끔, 환인이 몸에 두른 아우라를 곁눈질하며 잠깐 생각하다가 마을 인명부를 뒤적였다.
여기에 있을텐데…… 있다.
=마을 가장자리에 필로리라는 주민이 삽니다. 그…… 주민의 할머니의 여동생이 어렸을 때 실종되었는데 마녀의 짓이 아닌가 의심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족이 사라진 일이니 어쩌면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성제님이 괜찮으시다면 그 주민을 불러보겠습니다.=
“제가 궁금해 알아보는 일에 당사자를 오라가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성제님이 찾아뵈시면 주민이 더 곤란하지 않을, 않겠습니까…?=
“음……. 알겠습니다. 사례를 드릴 테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예, 예!=
그 주민이 찾아온 것은 그라파든과 슈아나데에게 지구, 한국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1시간가량 시간을 보낸 뒤였다.
“노른, 실루. 두 분 귀찮게 하지 말고 안느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해라. 아니면 마을로 내려가서 놀다 오던가.”
「안느 엄마. 나 귀찮아?」
삐이?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귀찮을 리가~. 환인 군, 하나도 안 귀찮아요.=
“정말 귀찮지 않으십니까. 예를 들어 지금이라던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슈아나데의 무릎 위는 그녀보다 조금 더 작은 노른과 실루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슈아나데의 체취가 노른에게도 좋았는지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는 모양새.
슈아나데도 그런 노른과 실루를 웃음과 미소가 끊이질 않는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볼을 비비 거나하며 귀여워한다.
노른이 인간화하면 체중이 30대 후반 정도 된다지만 슈아나데도 50kg을 넘기지 않을 것처럼 가녀리다.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는데.
하지만 노른을 정말 귀여워하는 것도 사실이라 환인은 노른에게 너무 엉겨 붙지 말라고 한 뒤 안채를 나섰다.
=첫, 처츳츷, 츠츠, 츠허흠 보, 뵙게쓤늬드하아앗!=
그리고 필로리라는 단쌍익의 남자가 기다린다는 응접실로 들어간 순간 오체투지를 하다시피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떠는 남자의 필사적인 인사를 받았다.
“…….”
환인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유르나하를 돌아보았다. 혹시 불러다 협박하거나 위협한 것은 아니냐는 뜻으로.
=선천적으로 심약해서 그러합니다. 영도의 차기 대성자 후보이신 성제님을 뵙는데, 긴장하지 않는 서민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물론 지금부터 만날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하게 알려준 것은 자신이지만, 촌무지렁이가 멋도 모르고 성제님에게 반말하거나 ~~입니다요, ~~이고말굽쇼, 이따위로 말하는 쪽이 더 큰 일 아닌가.
“…….”
날개 깃털이 잘게 떨리는 것만 봐도 이야기를 나눌 상태가 아닌 게 분명하다. 어찌나 떨고 있는지 숨까지 거칠어지고 있을 정도니까.
환인은 어쩔 수 없이 평온의 파동에 원기 방출을 섞어서 뿌렸고, 필로리라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꺼림칙한 숭배의 빛이 깃든 걸 느끼며 천암의 마녀에 대해서 질문했다.
“혹시 조모님께서 살아생전 하시던 말씀은 없으셨는지.”
=그…… 자세히 들은 것은 없, 없습니다. 할매가 가끔 술을 먹으면 취해서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게야.’라고 중얼거리시는 건 들었지만…….=
이 촌놈이 성제님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는 걸 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상대하겠다는 생각으로 유르나하가 질문을 던졌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고? 친동생이 실종됐는데 나쁜 일이 아니었다는 겐가?=
=그으, 동장님도 아시다시피 그 괴담은 유명하지 않습니까요. 병에 아파하면서 오래 살지 못할 바에, 차라리 잡아먹혀서 빨리 신님의 정원으로 올라가는 쪽이 더 편하다고…….=
=응? 병에 걸렸었다고? 그런 기록사항은 인적기록부에 없네만.=
파라라락— 넘어가는 종이 소리 사이로 필로리의 더듬거리는 말이 끼어든다.
=저… 그때는 마을에 가뭄이 들어서, 다들 아픈 것이 있으면 숨기고 그랬던 터라…….=
=아. 평년 대기근 말이군……. 하긴. 그때는 어디를 가나 입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였으니. 그래서, 동생이 실종될 당시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들은 적은 없나?=
=…없, 없…….=
필로리라는 녹색 머리의 남자가 아주 짧게 망설이는 것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걸 간파한 환인이 유르나하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필로리 씨.”
=예, 예엡!=
“마녀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필요합니다. 만약 마녀가 정말 사악하여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해 잡아먹는다든가 하면 반드시 찾아내 퇴치하여야 하니까요. 그러니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면 제가 전부 책임지고 동장님과 이야기해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환인의 한가득 믿음 가는 진지한 목소리에 필로리는 오만 울상을 지으며 고민했다.
이걸 진짜 말해도 되나? 성제님이 아무리 대단한 분이라고 해도 한평생 여기서 살 것도 아닐 텐데.
숭배의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집안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저런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 리 없다.
“동장님. 신의 이름에 맹세코 이분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동장님도 여기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필로리 씨에게 나쁘게 대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예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놈아! 뭘 하고 있어? 얼른 성제님께 다 말씀드리지 않고!=
=예엣!! 저는 마녀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요! 그게 그러니까! 할머니의 동생이 사라진 날 동생의 침대에 금화 2닢이 놓여있었거든요!=
=뭬야?=
“동장님.”
=크, 크흠.=
=그으, 거기다 할매는 동생이 제발로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글자를 뗀 동생이 멍청하게 아무나 따라갈 리도 없고, 금화는 그때 큰 병을 앓고 있던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약값으로 거의 다 썼는데 그게 꼭 금화 2닢 치라…….=
“마치 집안이 어려운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다는 말씀이군요.”
=예에…….=
“…….”
이 사례 하나만으로 그 마녀라는 자의 품성을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후 마녀가 언제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었기에 환인은 필로리의 조모 대에서 취득한 재산세를 그간의 이자율까지 더하여 유르나하에게 지급한 뒤 필로리에게도 사례비로 열은화 한닢을 쥐어 돌려보냈다.
금화를 줬다간 동장이 필로리를 눈빛으로만 난도질할 것 같았기 때문.
‘전투 능력이나 힘이라곤 전혀 없는 일반 농민의 기척을 피하는 일은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사람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그 마녀가 정말 대현자라면 소리 없이 오가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터.
여러 변수를 가정해봐도 마녀가 당시 필로리의 조모 집을 찾은 것은 틀림없겠지.
=환인 군. 그 마녀를 찾고 싶은 건가요?=
허리에 노른을 매단 채 안채로 돌아와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을 찾은 슈아나데는 자초지종을 듣곤 찾는 것을 도와줄까요~? 하고 물었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모든 사람은 땅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답니다. 그리고 저는 최상급 땅의 정령, 아감간의 계약자예요.=
그러더니 마당에 최상급 땅의 정령을 소환해버리는 슈아나데.
환인은 잘 마른 황갈색 마당에서 진흙이 솟아올라 키 5m의 거인 형상으로 잡히며 폭발적으로 번지는 정령력에 목덜미로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아드네빌라와 릴라이스의 충돌 때를 비교하면 별 것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기운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니까.
‘저런 정령사가 패시지에는 한가득하겠지.’
각종 최상급 정령의 공격을 환인이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소환이 완료되었고, 슈아나데가 손을 흔들며 땅의 정령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감간~.=
「전부 듣고 있었다. 천암 산맥을 전부 수색하는 건 인간 한정이라 해도 시간과 힘이 제법 든다. 그래도 괜찮나.」
=괜찮아. 그동안 모아둔 기운, 제법 있잖아?=
이럴 줄 알았다면 며칠 기다려달라고 한 뒤 스프라울드까지 정보를 수집할 걸 그랬나.
조사해야 할 범위가 좁을수록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줄어들테니 말이다.
아감간은 슈아나데의 이야기에 마뜩잖다는 티를 진흙 얼굴로 한껏 드러냈다.
「몇 년을 모아둔 에너지인데 쓸데없는 곳에 쓰려 하는군.」
=귀여운 사위의 시간을 아끼는 길이니까~ 부탁해?=
계약자의 부탁에도 땅의 정령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환인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말투를 던지기 시작한다.
「저것에는 나보다 더 강한 정령의 흔적이 묻어있다. 거기 너, 인간 같지 않은 인간아. 왜 그 정령에게 부탁하지 않지.」
“……초월급 정령을 말하는 거라면 말 그대로 흔적일 뿐, 저와는 관계없는 존재입니다.”
「그럴 리가. 그만한 흔적은 관계없는 자에게 새겨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나의 계약제에게 솔직하게 대답해라. 아니라면 부탁을 거절하겠다.」
생각보다 더 인간 같은 정령이군. 최상급이라서인가.
아감간이라는 이름의 정령이 하는 요구는 전부 슈아나데를 위해서라는 게 느껴졌기에 환인은 품 안에서 400회의 버피 테스트 피로로 반쯤 기절한 환연을 꺼내 보여주며 이유를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저와는 관계가 없으며, 부탁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와아…….=
「……어처구니없지만 릴라이스라면 그럴 만도 하지. 이해했다. 수색에는 하루 이틀 정도 걸릴 거다.」
그 말과 함께 아감간은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고, 환인은 슈아나데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이기지 못해 환연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연약하니 조심해주십시오.”
=응응.=
「응얽?! 머, 머야……?」
=안녕? 네가 환인 군에게서 느껴지던 정령향의 주인이었네.=
기절에 가깝게 잠들어있던 환연은 자신이 슈아나데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신감에 물든 얼굴로 환인을 노려보았다.
「……야! 환인 나 팔아 넘긴 거야?!」
“팔아넘기다니. 듣기 안 좋은 말은 하지 마라.”
「릴라이스가 다 말해줬어! 팔아넘긴 거 맞구만!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자아자아~ 진정하세요~.=
「히이! 가, 간지러워…! 자, 잠깐! 옷 잡아당기지 마! 옷은 왜 벗기려고……!」
=옷에 땀 냄새가 베였으니까요. 아, 이왕 이렇게 된거 함께 씻을까요?=
「뭐?! 안돼! 싫어, 환인 도와줘……!」
“…….”
최대 2일 정도 걸린다고 했나. 그때까지 파편인이나 계속 녹여야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자신을 부르는 환연의 외침을 못 들은 척, 빠르게 안채에서 벗어났다.
나중에 몇 번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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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아 한반도 넓이를 이틀만에 조사해주는데 어떻게 참냐고 ㅋㅋㅋ
-환연의 분노가 10pt 증가했습니다.
-환연이 환인을 향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