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 산 옆 마을 체블리프
환인의 시선에 그제야 두 사람의 플뢰가 시야에 들어왔다.
‘과연.’
보자마자 과연이라는 말이 먼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를 만큼 은발의 남자 플뢰는 미청년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비단처럼 찰랑이는 은색 긴 머리. 약간 호리호리한 육체. 백색과 녹색이 세련되게 교차하는 트렌디한 로브 차림.
안느가 만약 남자였다면 저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은 남자가 신비로운 미소로 안느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오, 귀여운 나의 딸! 못 본 사이 더더욱 귀여워졌구나!=
=아빠가 왜 여기 있는 거…… 어, 엄마까지?!=
=네~ 엄마예요~.=
남자의 뒤에 반쯤 몸을 숨긴 것처럼 있던 여자도 역시나 안느의 모친이라는 것이 이해될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뭔가…….
‘머릿속이 꽃밭…… 평화로운 푼수 느낌의 귀부인이군.’
한국식 표현으로 법이 없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사람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환인과 여자들이 뜻밖의 사태에 입을 닫고 있으니 안느가 당황이 역력한 모습으로 소리친다.
=두 분이 왜 여기 있는 건데요?!=
=으음? 부모가 딸을 보러 오는 게 이상한 일인가?=
=그건 이상하지 않지만 신분이 끼어들면 엄청 이상하죠! 집은 또 어쩌고 두 분 다 오신 건데요?!=
=하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안 이상하게 되었으니까. 집이야 네 오빠가 잘하고 있고.=
=네? 안 이상하게 됐다는 건 무슨 뜻인데요?!=
=사소한 일이라는 거다.=
=우리 딸 키가 좀 작아졌네. 근육이 빠지면서 같이 줄어든 거니?=
=어 네. 그런 거긴 한데…….=
=어떻게 된 건지 나중에 엄마한테 들려주지 않으련? 르아 그 아이도 잘 모르니까 딸한테 직접 들으라고 해서~.=
=그…… 아 진짜! 그만 좀 쓰다듬어요!=
당황하는 안느와 그런 그녀가 마냥 귀엽다는 듯이 좌우에서 붙잡고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부부.
그 모습을 다른 여자들이 당황이 역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소곤거린다.
=아영… 안느 언니의 부모님이시면 역시 미리아스툼 왕가의…… 왕족이시겠지?=
=왕족을 넘어서 그라파든 사리올 미리아스툼 전하라면 당대의 국왕님이야……. 우와, 머리로는 안느 언니가 공주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완전 충격.=
=안느는 외동딸이 아니었구나…….=
=히에엑. 저, 저 로브! 상급 유물인 정령왕의 로브야! 팔찌도, 반지도 준유물이고……!=
조용히 가족 상봉을 응시하던 환인은 안주머니에서 톡톡, 가슴을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환인. 안느 아빠랑 엄마한테서 강한 정령력이 느껴져.」
“어느 정도지.”
「아빠 쪽은 최상급 빛 정령하고 상급 바람 정령. 엄마 쪽은 최상급 땅 정령이랑 상급 거울 정령이야.」
“집안에 다른 플뢰족은 없나.”
「두 명이 있는데 호위는 아니고 시중을 드는 사람 같아.」
왕족이 호위도 없이 유람을 나온 이유가 있군. 최상급 정령 2체라면 7~8급 술법사가 두 명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플뢰의 왕족다운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거울 정령은 어떤 정령이지.”
기본적인 속성의 정령 외에 나무나 풀, 꽃 같은 정령이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물의 정령이라니.
그녀에게 묻던 환인은 덜컹거리는 소리에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유르나하가 하인들과 허둥거리며 정문의 문을 닫아거는 것이 보인다.
「나처럼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난 정령이겠지. 방어……? 릴라이스가 피해 반사에 특화된 정령이라네.」
그래서 거울인가.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부모 이기는 자식도 없는 법.
좌우에서 쏟아지는 쓰다듬 공세에 안느가 귀를 축 늘어트리며 항복을 선언하자 장성한 딸을 둔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남자, 그라파든=사리올=미리아스툼이 그제야 한가득 만족한 미소로 안느를 풀어준다.
그리고 환인을 돌아보았다.
딸을 뺏어간 도둑놈을 보는 시선이 아니라 고마움을 비롯한 우호적인 감정이 가득한 시선.
그 시선에 환인이 다가가 그라파든과 그의 아내, 슈아나데에게 먼저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느의 남자 친구인 환인입니다.”
=듣던 것과 달리 예의가 바른 청년이군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느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안느의 엄마인 슈아나데에요.=
“안느의 부모님 되시는 분께 어떻게 건방진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까.”
그라파든 부부의 웃음이 한층 밝아졌다. 미리아스툼 왕가의 왕족이 아니라 딸의 부모라서 공경한다는 태도에 거짓은 한치도 없었던 것.
=아기오시스 추기경에게 넌지시 귀띔을 받은 이후 줄곧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환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 그라파든은 환인의 오른손을 잡고 그의 손등에 이마를 붙였다.
상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는 플뢰족 특유의 행동이다.
=딸에게 새 삶을 선물해주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당신은 저와 제 아내의 은인입니다.=
“…제 회색빛 삶에 색이 더해진 것도 그녀 덕분입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 합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서로 감사한 것으로 할까요.=
환인은 대답 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라파든과 악수를 나누었다. 안느의 모친인 슈아나데는 성모처럼 온화한 얼굴로 환인을 살짝 포옹해준다.
이들 부부와 몇 마디 나눈 환인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과 동류다.
동류라고 하면 어감이 안좋은가. 그러니까 선한 사람들이다.
성격이 삐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성장 환경임에도 안느가 저렇게 착하게 자란 것은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베풀어준 무상의 사랑 덕분이겠지.
=그런데 그쪽 아가씨들은?=
그라파든의 관심에 여자들은 뻣뻣한 모습으로 차렷 자세를 했고, 안느가 부담스러워하는 그녀들을 대신해 한 명씩 소개해주었다.
=여기 예쁜 애는 이슬이…… 이실리테야. 내 둘도 없는 친구. 이쪽은 상냥하고 온화해서 믿음직스러운 맏언니인 유르파. 여기 순둥순둥한 아가씨는 백려강인데 동생은 사연이 많아서 한 마디로 설명해줄 수가 없어. 여기 노출증 여자애는 아영…….=
=노, 노출증이라뇨! 언니 너무하심다…….=
아영의 울상에 그라파든과 슈아나데는 정말 기뻐하는 모습으로 고마움이 물씬 묻어나는 모습으로 그녀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딸과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플뢰답지 않게 너무나도 우람해 어렸을 때부터 친구 하나 없던 딸이다.
성투사로 땅신 교단에 들어갔을 때 언니 같은 사람이 한 명 생겼지만 늘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하는 인물.
여자들은 메리아놀의 왕족이 전하는 감사에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라드세아의 호천명도, 히스론드의 테이아무스 섭정도 눈앞의 두 명에 비하면 왕족으로서 손색이 있다고 할까.
그때 유르나하가 ‘지금 굉장히 곤란하고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저, 저기.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만…… 다과도 마련하였으니 안으로 드셔서 담소를 나누시는 것은 어떠신지……. 담과 대문이 있다고 하여도 밖에서 훤히 보이는지라, 귀하신 분들의 신변에 곤란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아, 반가움이 앞서 유르나하 공에게 폐를 끼쳤군요. 그리하겠습니다. 환인 성제, 그리고 딸의 친구분들. 들어가실까요?=
“예. 그리고 편히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하하하. 딸의 친구들은 몰라도 성제의 이름을 어찌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라고 불러도 될지 여쭈려고 했는데 안타깝지만 훗날로 미뤄야겠군요.”
=엑?!=
=으음! 그 이야기는 안에서 하죠!=
그라파든과 슈아나데가 환인과 먼저 안채로 향하니 혼란과 부끄럼과 난처함이 극에 달해 허둥거리는 안느를 다른 여자들이 그녀를 챙겨 뒤따랐다.
안느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얼굴에 약간의 부러움이 깃들어있는 것은, 그녀들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일 것이다.
체블리프의 동장 저택은 안쪽에 으레 그렇듯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안채가 존재했다.
800명이나 되는 커다란 마을의 동장답게 안채 또한 고가의 가구와 실내장식으로 구성되어있었지만, 왕족의 눈에는 많이 아쉬운 시설이고 환인은 애초에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부류.
10명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는 응접실에 자리한 환인과 그라파든 부부는 서로 망설임 없이 본론에 들어갔다.
“두 분께서 저희를 기다리신 것은 단순히 딸을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제의 예측대로입니다. 조만간 벌어질 소란을 피하고 아내와 유유자적 유람을 즐기기 위해서가 이유 대부분이군요.=
“역시 그라파든 공께서…….”
=장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으시는군요…….=
그라파든의 순수한 아쉬움에 잠깐 멈칫한 환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장인어른께서는 타의로 인해 왕위에서 내려오신 거군요. 혹시 투르시온 왕가가 개입된 겁니까.”
=환인 군이 어째서 그리 생각하셨는지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가진 정보 중 가장 가능성이 큰 쪽을 선택 취사한 결과이니까요.”
그라파든은 신비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차하고 지저분한 정치 다툼이 있었습니다.=
협의회는 현재 네 파벌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도 여휘를 추종하는 파벌은 유명무실하여 힘을 잃은 상황이며 나머지 셋 중 가장 발언력과 힘이 강한 곳이 푸른 나뭇잎의 탑을 같은 편으로 삼은 진보주의자 파벌.
그 파벌의 구심점은 투르시온 왕가, 슈아나데의 친정으로 이번 암살 사건을 두고 미리아스툼 왕가의 발언력을 깎아내리는 시도가 있었다고.
그라파든은 정말 재미없다는 듯이 눈썹 끝을 늘어트렸다.
=정쟁은 정말 피곤한 일입니다.=
=진짜 투르시온 왕가가 아빠를 공격한 거예요? 설마 엘위드리스 가문이 몰락한 걸 이쪽 탓으로 돌린거?=
=하하하. 돌렸다니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또 말 돌리려고 하지!=
=앞에서 대놓고 면박은 주지 않았지만 협의회를 앞세워 성가시게 구는지. 임기도 4년밖에 남지 않았겠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하면서 내려놓아 버렸지. 하하하.=
안느와 여자들은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왕위를 그런 이유로 그냥 내려놓았다고?
=그리고 안느, 세상을 너무 양면으로만 보면 안된다. 세상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법이야. 신분이, 지위가 높을수록 암투는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해지지.=
=…….=
그의 해맑은 대답에 안느가 두통이 치민다는 얼굴로 이마를 감싸 쥔다.
집에 혼자 남은 오빠, 엘레델이 얼마나 골치를 싸매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하다. 아빠까지 가문을 떠났으니까 정치적인 이유로 사방에서 못살게 굴고 있을텐데.
언제나처럼 빙글빙글 웃는 아빠의 모습에 안느가 발끈하면서 물었다.
=아빠랑 엄마가 이렇게 멋대로 방랑을 떠났으니 오빠가 대신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을텐데. 아빠는 걱정도 안 돼요?=
=으음? 엘레델도 이제 다 컸고 엄연히 자기 세력을 이끄는 성인이다. 이런 일도 젊을 때 겪어봐야 자기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기 쉽지 않겠니? 그리고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
자신은 끔찍한 무엇으로 취급하던 가문 장로회지만, 오빠인 엘레델은 세기에 한 명 나올법한 인재처럼 아끼고 감싸던 장로회다.
차기 가주인 오빠를 그런 장로회가 열심히 백업해주고 있을 테니 마냥 암담한 상황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아빠엄마도 이렇게 놀러 나왔을 테고.
그라파든은 포기한 얼굴로 한숨 쉬는 딸을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다 환인을 불렀다.
=환인 군?=
“예.”
=저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이 이상 해줄 수 있는 대답이 없어요. 환인 군과 이렇게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협의회나 여섯 왕가는 아마도 날 붙잡고 싶어 안달일 겁니다.=
“이해합니다.”
환인의 대답에 그라파든은 마음에 든다는 미소로 입을 열었다.
=대신 한 가지 조언을 드리죠. 환인 군의 판단은 그르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참지 말고 저지르세요.=
“메리아놀의 왕족으로서 보아넘길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질러버리라는 말씀입니까.”
그래도 괜찮냐는 환인의 담담한 질문에 그라파든은 다 알고 있다는 미소로 조용히 말했다.
=나흘 전 항의 서한을 협의회로 보냈다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건 당시 대답을 촉구하였다면 지금보다 더욱 간단하게 일이 해결되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늦은 걸까 하고.=
“…….”
최고급이라고 해도 부족할듯한 완벽한 품질의 홍차로 입술을 가볍게 적시는 환인의 행동에 그라파든도 같이 홍차를 한모금 마신다.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있던 여자들도 그제야 조심스럽게 차를 들었다.
평범한 대화인데도 두 사람의 지위가 더해지니 대화 속에 무수하게 숨겨진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녀들의 생각과 같았다.
환인은 안느의 질문과 그라파든의 대답, 그리고 지금 그라파든이 해주는 답변에서 메리아놀의 심층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하나하나 짚어내고 있었던 것.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겠더군요. 그리고 오늘 환인 군과 대화하며 확신했습니다. 환인 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찌 됐든 상관없었던 겁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환인은 메리아놀 측의 사과에 큰 관심이 없었다.
주적이라 할 수 있는 엘위드리스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제멋대로 망가졌고 암살 시도에 가담한 것들도 대부분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들었다.
복수할 대상이 없어졌는데, 아니 없어진 건 아니고 제풀에 망가져서 폐인이 됐는데 그런 폐인의 뺨을 때리고 걷어차봤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속으로 좀 더 파고들면 여러 이유가 더 생겨난다.
한 국가와 마찰을 빚어도 괜찮을까. 적을 만들면 자구책이 가능할까. 이쪽의 전력과 저쪽의 전력 차이. 본격적인 분쟁이 벌어질 경우 여자친구들과 영도에 발생할 피해 규모. 차후에 메리아놀에서 저지를 사건에 이번 일이 끼칠 영향 등.
이 때문에 직속 관리자라 할 수 있는 메리아놀의 협의회가 사과문만 짧게 보냈어도 환인은 수긍하고 암살 사건을 넘겼을 것이다.
만약 정말 사과를 받아낼 생각이었다면 팔라툼에 도착한 이후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영도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움직였겠지.
하지만 환인은 앞서 말했다시피 사과에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메리아놀이 사과로 어떤 보상을 줄지 약간 궁금했기에 방치하고 있던 것에 가깝다.
환인의 솔직한 인정에 그라파든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저와 처가 이곳에 있는 것으로 환인 군에게는 많은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그렇게 말한 그라파든은 아까보다 조금 더 신난 표정으로 환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안느와는 얼마만큼 진도가 나갔느냐. 안느와는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 아이는 얼마나 가질 예정이냐.
맥락없이 갑자기 대화가 끝나자 한참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자들은 황당해했지만, 이어진 그라파든의 이야기에 똑같이 눈을 반짝 빛내며 환인을 쳐다보았다.
좀처럼 들을 수 없던 그의 내심과 미래 설계를 볼 기회!
=환인 군은 인간이니 틀림없이 많은 아이를 안겨줄 수 있겠지요?=
=아, 아빠! 뭘 묻는 거예요!=
안느는 당황하다 못해 천벌의 망치로 아빠를 때리고 싶다는 폭력성이 치솟는 걸 느꼈다.
여기에는 친구와 언니 동생들이 다 있는데 아빠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으응? 장인으로서 사위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익……! 아, 아직 그런 질문을 하기에는 이르거든요!=
본국이 쑥대밭이 될 걸 알고 있으면서 그쪽으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
저건 대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안과 밖이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겠지.
환인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로 그라파든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주었다.
“제게는 안느만큼이나 소중한 여자가 더 있습니다. 결혼식은 그녀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서 치르고 싶습니다. 음, 아이는 가능한 만큼 부탁하고 싶습니다만 그녀의 뜻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꺅!
여자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메리아놀의 왕족인 두 사람 앞에서 저렇게 선언한다는 것은 자신들과 함께 하는 미래를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중간부터는 귀부인처럼 우아한 미소로 앉아있던 슈아나데까지 참여해 적극적으로 질문했으며 여자들은 그때마다 선명해지는 미래 설계에 속으로 꺅꺅 비명만 질렀다.
=어, 엄마 그만! 그만 물어요!=
=환인 군! 저 처녀들도 모두 아내 예정이라면 아이들을 한가득 안겨줄 수 있겠군요?!=
=아빠도 제발 그만……!=
하지만 안느만은 그런 흐름에 빠져들지 못하고 흥분한 그라파든과 슈아나데를 말리기 위해 진땀을 뺐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들과 거리감을 잘 못 재는 부모님이다.
자칫 눈치 없는 질문을 던져 도령과 언니 동생 친구들을 정색하게 만들면 자신은 일행 사이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겠지.
‘그것만큼은 안돼!’
안느는 언제 폭탄 발언이 튀어나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차라리 부모님을 집 밖으로 던져버리면 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 지쳤어…….=
동장의 저택 안채는 그라파든 부부에게 양보하고 공터에 방랑자의 안식처를 설치한 환인 일행.
안느는 안식처의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널브러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만큼 부모와 함께 한 자리는 그녀에게 정신적 피로를 듬뿍 안겨주었던 것.
짐을 거실 한쪽에 내려놓은 이실리테가 그런 안느를 조금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느의 부모님은 뭔가…… 독특한 분들이시네. 하지만 좋은 분들이셨어.=
=맞아. 내가 흡정족이었다는 사실을 들으셨으면서 다른 아가씨들이랑 똑같이 대해주시는 거 보고 정말 감동했지 뭐니. 안느 아가씨도 날 처음 봤을때는 어휴.=
=……응? 율이 언니, 나 처음에 언니한테 못되게 굴었었어……?=
=후후후후.=
=윽. 미안해!=
=농담이야 농담.=
처음 이실리테와 안느를 만났을 때 그녀들이 거부반응을 내비쳤던 것은, 자신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환인의 몸에 무언가 잘못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던 거다.
그런 걱정이 해소된 뒤에는 아무렇지 않게 언니처럼 대해주었는데 감정이 쌓일 이유가 어디있을까.
아영은 좀전에 환인과 그라파든의 대화를 떠올리며 말없이 짐을 정리하다가 라벤더색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거창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노른을 허리에 매단 환인 앞에 쪼르르 달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뒷목이 아플 지경인데요. 아무튼 정리해서 요약하자면, 환인 오빠한테 메리아놀 협의회는 사과하거나 할 생각이 없다는 거죠?=
“그래. 입장문이 돌면 그때부터 메리아놀도 여론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클 거다.”
=여론전…… 여론에 관해서는 영도와 영혼사를 이길 수 없을 텐데 무슨 생각인 걸까요?=
두 사람의 대화에 짐을 정리하며 꺅꺅거리던 여자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차원 방랑자라는 점을 붙잡고 늘어질 생각이겠지. 그다음으로 보자면 메리아놀 국내 입국 거부 정도 될까.”
=…영식 현상 때문에요? 정말 그러면 오빠를 해치려 한다는 거로 해석되니까 사태가 더 험악해질텐데…….=
말하던 아영은 순간 그라파든이 한 말, 저지르라는 말을 떠올리곤 흔들리는 눈동자로 환인을 바라보았고, 그의 냉막한 미소에 소름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그와 아영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여자들도 침을 꼴깍 삼키는 건 마찬가지.
반쯤 얼어있던 아영이 애써 목소리를 낸다.
=음…… 어……. 그러면 저는 저주 방어 대책을 마련해볼게요. 도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상대측 대장이나 영주 같은 책임자에게 저주를 걸어 약하게 만들거나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상대가 국가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죠?=
그리고 그 이야기에 다른 여자들이 화들짝 놀랐다.
전쟁 중에 그런 일도 일어나나?!
아니, 상대는 국가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격 방식이 얼마든지 있다고 봐도 무방할테니까…….
침을 꼴깍 삼킨 유르파가 안느의 손을 잡는다.
=아영아. 언니랑 같이 준비하자. 지금까지 모았던 고등급 위상석으로 저주나 질병 반사 마도기를 만들어도 괜찮을 거 같아.=
=옙. 언니들한테도 도움을 부탁할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때 되면 협조 부탁드림다!=
=물론이야. 그때가 되면 반드시 말해줘. 인체 실험이라도 도와줄테니까!=
=나, 나도!=
한 발 떨어져서 그녀들의 결의를 바라보던 환인은 자신에게 심핵력으로 강화한 위상류가 있어 대부분의 술법이나 비술은 튕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말았다.
자신의 일이라면 언제나 진심 120%가 되는 그녀들이다.
괜히 걱정을 덜어주기보다 완벽한 마도기를 만들어오면 그걸 여자친구들에게 쓰게 하는 쪽이 좋겠지.
=아참, 자기? 방벽 마도구 잠시 돌려줄래? 려강이 아가씨한테 7급 정신 침해 방어 목걸이를 만들어줄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걸로 자기의 방벽을 개량해줄게.=
“어떤 식으로 개량할 수 있습니까.”
=조작 거리 증가, 위상력 소모 감소, 조작 개수 증가 정도? 7급 위상석을 쓴 방벽이면 준유물급 성능을 기대할 만할 거야.=
다른 것보다 위상력 소모 감소가 매력적이다.
위상력의 소모가 줄어든다면 그만큼 많은 위상력을 내구도 쪽으로 돌릴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방벽의 활용처가 더더욱 많아진다는 뜻이니까.
왼팔에 차고 있던 브레이서를 벗던 환인은 거실 창문 너머로 안느의 모친, 슈아나데가 소녀처럼 설렌다는 표정으로 두 명의 시녀와 다가오는 걸 보며 유르파에게 말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위상력 소모 감소 쪽으로 집중해주면 좋겠습니다.”
=아, 그쪽이 좋아? 알았어, 나한테 맡겨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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